노란 밤의 달리기
이지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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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책을 손에 붙들 때와는 전혀 다른 색채가 덧입혀지는 것을 느낀다. 띠지에 쓰인 을지로 청년 예술가도, 상실에도 어두워지지 않는 젊음의 빛도 그다지 선명하게 각인되지 않았다. (작가의 의도와 관계없이) 내게는 한없이 취약하고 여린 이 세상 모두의 크고 작은 상처에 관한 이야기이자 누구보다 가장 솔직한 사랑 이야기로 각인되었다.

특히 좋은 문장들, 인상적인 표현들이 많았다. 전반적인 컨셉이나 소재는 어슴프레 몽환적이기도, 어색하고도 낯설기도, 그런 연유소 쉽게 받아들이기 힘들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읽는 중간 멈칫 하게 만드는 어떤 걸림돌들이 무색하리만치 예쁜 말, 솔직한 표현들이 많아서 좋았다. 솔직함으로 무장한 글, 과장같고 억지같은 소재들 사이사이 진짜를 촘촘히 숨겨두고서 뽀빠이 과자 속 별사탕을 탐닉하듯 독자들이 그 빛들을 찾아내길 바라는 소설 같아서 유쾌하고 또 아련했다.

모두가 괴짜같다. 분명 여자아이였지만 엄마가 떠남과 동시에 남자아이가 된 휴일, 어딘가에 진득하게 머무르고 싶지만 물리적으로도 심적으로도 한 곳에 정착하는 것이 어쩐지 힘들어 보이는 엘, 남자를 사랑하고 습관적 유턴이 곧 삶인 휴일의 아빠, 그의 매니저이자 연인이자 안내견이기도 한 황실장, 예술이라는 이름으로 모였으나 어느덧 각자의 빛을 찾아 쌩뚱맞은 미래를 맞는 동료와 선배들 ... 이별, 상실, 배신, 죽음 같은 속절없는 슬픔 앞에서 무엇 하나 슬프지 않은 이들의 이야기. 그들이어서, 그들 안에서 가능할 법한 어떤 이야기.

몽롱하고 달뜬 가슴으로 책을 덮는다. 작가는 등단하면서 '한 줄 메시지로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을 쓰고 싶다'는 포부를 밝힌 바 있다. 정확히 목표한 바를 이루고 있는 작가가 아닐까 싶다. 한 줄 메시지로 결코 요약할 수 없는 소설이다. 아니 더 정확히는 요약하고 싶은 마음이 사라졌다. 자꾸만 구구절절 구질구질하게 이야기를 늘어놓고 나누고 부풀리고 싶어지는 소설이다. 그것이 이 작가가 쓰는 소설의 매력이라면 매력이겠다. 잘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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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끼들의 섬
엘비라 나바로 지음, 엄지영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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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곰히 되짚어 본다. 스페인어권 작가들의 책을 읽었던 적이 있던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적어도 최근에는 읽어보지 못했다. [토끼들의 섬]은 책에 실려있는 11편의 단편들 중 첫 번째 이야기의 제목이다. 사실 다른 10편의 단편들도 몹시 인상적인 소재와 기괴한 뒤틀림이 생생하게 묘사되고 펼쳐지는 글이라 모든 단편들의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또 다른 (새로운) 제목으로 책 제목을 설정했어도 좋았겠다는 생각을 아주 잠시 했다.

평범한 일상인 것 같지만 여간해서는 그 일상적 범주에 집어넣을래야 넣을 수 없는 독특한 이질감이 책 전반에 젖어들어 있다. 이것이 특유의 분위기로 뒤엉켜 일종의 불투명하고 탁한 공기를 만들어내는데, 때문에 책을 읽는 내내 무언가 매캐하고 답답한, 그러면서도 동시에 생경하고 신선한 느낌을 느낄 수 있어 인상적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궁금증이 일어 찾아본 작가 인터뷰에 "외곽, 변두리, 경계 ... 내 관심사는 언제나 현실을 결정짓는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에 있다"는 언급이 시선을 붙잡는다.

윤곽이 희미해지는 틈새, 그 미세하고도 결정적인 틈새에서 저자만의 기이하고 불편한 세계가 재창조된다. 무엇 하나 평범하지 않고 안정적이지 않은 그 낯선 공간을 통해 젠더, 공간, 계층, 환경, 역사 등에서 투박하게 조각난 이분법적 관념에 대한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남성과 여성, 도시와 주변(변두리), 자본가와 노동자, 자연 개발과 환경 보호, 기록된 정서와 기록됮 못한 미시 서사 ... 그것들 너머로 밀려나 있는 문제들, 소외되고, 외면 당하고, 무시되었던 대사들이 이야기의 중심으로 튀어나오면서 저자만의 세계는 어쩐지 조금 더 단단한 우주를 다져내는 것도 같다. 그 과정에서 각자가 만나게 될 '개인의 서사'들이 궁금해진다. 촘촘하게 늘어선 열 한 편의 환상 같기도, 악몽 같기도 한 이야기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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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버트 영매탐정 조즈카 2
아이자와 사코 지음, 김수지 옮김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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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학기 들어 범죄심리학 과목을 강의하고 있다. 학부생 때부터 염원했던 본교 본과에서의 범죄심리학 강의. (하고 싶었다는 뜻이 아니라 듣고 싶었어요) 그 첫 개설을 내가 맡은 것은 실로 큰 행운이자 복이라 믿는다. 다른 대학에서 이미 범죄심리학을 강의했지만 본교에서의 강의는 그 의미와 무게가 전연 다르다.

첫 강의를 앞두고 고민들이 많았다. 학생들에게 요구할 과제도 수많은 고민들 중 하나였는데, 그 때 생각했던 것 중 하나는 상상 글쓰기였다. 범인을 추적하거나 범죄행동을 분석하는 프로파일링 같은 단편적인 접근은 시시했으므로 반대가 되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범인의 입장에서 하나의 사건(지정해 주는 유형의 범죄 내에서)을 저지를 것. 철저히 범인이 되어 범인 입장에서 생각하고 판단하고 결정하고 행동하는 무수한 일련의 과정을 상상해 볼 것을 요구하고 싶었다. 글쓰기 능력을 보려는 것이 아니라 범인의 마음을 뼛속까지 이해하고 심층적으로 살펴보는 기회를 갖게 하기 위함이었다. 끝내 이번 학기에는 무난한 과제로 방향을 전환했지만 여전히 마음속에 콕 저장해 둔 과제. (언젠가는 시도해 보는 걸로)

갑자기 다짜고짜 왜 과제 이야기를 하느냐. [영매탐정 조즈카]의 속편인 이 책이 바로 내가 상상한 흐름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다. 처음부터 범인의 정체와 범행 방식이 공개되어 있다. 반대로 탐정에게 추적 당하는 범인의 입장에서 이야기가 전개되는 일명 도치 서술 추리소설인 셈. 흔히 마주할 수 있는 서술 방식이 아니라 신선하고 또 간접적으로나마 범인이 되어보는 매 순간의 짜릿함과 불안함 같은 묘미도 있었다. (이쯤 되니 꼭 그 과제는 시도해 봐도 좋겠다.)

내용을 실컷 읽고서야 뒤늦게 제목을 기웃거린다. invert가 곧 '~을 거꾸로 하다, 뒤바꾸다, 반대로 하다, 반전시키다'를 의미한다. 도치 서술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하겠지만 저자가 촘촘하게 심어둔 반전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겠다. 어느 쪽이든 퍽 만족스럽다. 개인적으로 전형적인 순정만화에 부합하는 표지라던가 '영매'라는 단어에서 취향에 부합하지 않아 큰 기대를 하지 않았던 것에 비해 상대적으로 몰입하여 흥미롭게 읽었다. 장르소설을 애정하는 사람들에게는 꽤 인기가 높겠다는 예상도 조심스레 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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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자가의 괴이 비채 미스터리 앤솔러지
조영주 외 지음 / 비채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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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년 5월, 경북 문경의 한 채석장에서 기이한 변사체가 발견된다. 아직까지도 자살, 타살을 규명하지 못한 채, 일명 '십자가 사건'이라는 이름의 난해하고 괴이한 미제 사건으로 남아있다.

6명의 작가가 이 사건을 중심으로 각기 고유한 단편소설을 엮었다. "어느 날 십자가에 못 박힌 시체가 발견되었다."로부터 파생되는 다채로운 이야기들이 닮은듯 다른 모습으로 펼쳐지는 미스터리 앤솔러지. 이 책 안에서만큼은 "그래서 사건의 진상이 무엇이냐" "자살이나 타살이냐"같은 문제는 더이상 중요치 않다. 말 그대로 소설은 소설일 뿐. (개인적으로는 단편 중 '도적들의 십자가'가 주는 기괴한 분위기가 가장 흥미로웠다.)

하나의 현상, 사건, 대상을 두고 각자가 다른 이야기를 펼칠 수 있다는 점에서 가치가 빛나는 책이다. 지금까지 알고 있었던 실제 사건에 대해서는 잠시 두터운 이불을 덮어두고, 각기 다른 목소리로 들려주는 6가지 이야기들에 가벼운 마음으로 귀 기울여 보기를. 어쩌면 지금껏 생각지 못한, 내 안에 잠들어 있던 미스터리 씨앗이 싹을 틔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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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 수학 A 데카 융합수학 1
켈리 피어슨 지음, 강미선 옮김 / 서사원주니어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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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가상이지만) 네 마리의 아기 고양이를 키우고 있다. 각자의 생김새를 따라 갈이, 살구, 요미, 여우라고 이름도 붙였다. 입양을 할 수 있을 때까지 앞으로 5주간 이 고양이들의 임시 보호처가 되어주기로 했다.


한글 공부를 공룡이름으로 정복한 적 있다. 아이는 확실히 제가 좋아하는 것에는 (그것이 공부라고 특별히 인식하기보다는) 높은 흥미를 보인다. 이번에는 고양이 키우기로 즐겁게 수학을 한다. 평소 같으면 분량을 따지거나 시계를 보기 바빴을 아이가 잔뜩 신나서 더, 더를 외친다. 깔깔 웃음꽃이 떠나지 않는다.


아이와 함께 고양이를 키우는 고양이 수학 A는 초등 2학년과 3학년이 대상이다. 날짜 계산, 두 자리 수 덧셈, 어림, 그래프, 나눗셈, 시간, 비율, 뺄셈을 다룬다. 이 책 덕에 날짜나 달력에 관한 수학적 접근을 제법 자연스럽게 나누었다. 고양이의 생일과 입양 가능일을 찾는 과정에서 일주일 뒤의 날짜는 7씩 더해진다는 것이라든가, 매 달의 마지막 날이 30일인지 31일인지는 어떻게 기억하는지 하는 것들을 시나브로 익혔다. (아직 그래프까진 안 갔는데 … 기대된다!) 정말이지 세상에서 가장 사랑스러운 수학책이다.


학습으로서의 공부는 사실 인생에서 접할 공부의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기왕 해야만 하는 기본 학습, 피할 수 없다면 즐겁고 신나게 할 수 있는 이런 기회들이 많아지면 좋겠다. 고양이 필통까지 찾아와 고양이 표정을 따라하는 아이의 얼굴에서 이 교재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잘’ 하는 것보다 ‘즐겁게’ 하는 것이 더 중요한 학습 장기전. 이 책이라면 가능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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