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무와 함께 정처 없음
노재희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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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시작을 여는 글부터 상당히 강렬하게 내게 파고들었다. 작가가 오랜기간 고심해서 혹은 직관에 가깝게 선택했을 단어가, 문장이, 그리고 무엇보다 담고 있는 내용이 하나같이 똘똘 뭉쳐 그녀 앞으로 나를 데리고 간다. 그간 내게는 전혀 모르는 작가, 특별한 정보조차 없었던 작가와의 만남은 그렇게 진한 천리향 향기처럼 시작됐다.


✍🏻 234p. 누군가 쓴 것을 내가 읽는다. 내가 쓴 것을 당신이 읽는다. 심심해서 외로워서 궁금해서 슬퍼서 읽을 것이다. 우리는 이렇게 만난다.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들이 몹시 좋았다. 진부해서 이렇게 표현하기 정말 싫은데 진짜 좋았다. 무한하고 고독한 기다림, 기억을 잃었던 시간, 결핵성 뇌수막염이 그녀에게 가져다 준 변화들, 신춘문예 등단 작가의 솔직한 마음,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솔직하다못해 투명한 평가, 남편과 나무와 (거미와) 함께하는 이동 생활, 흡연과 신앙 및 과학을 향한 단단한 신념과 태도 … 스스로를 문자공화국의 시민이라 부르는 그녀는 문자를 참 유려하게 잘 사용한다. 단지 화려하고 신박한 문자여서가 아니라, 익숙하고 담담한데 그것들이 모여 이루는 글이여서 그 유려함이 빛을 발한다. 읽고 쓰는 삶을 사랑하는 이들 간의 동지애도 한 몫 했다.


특히 그녀가 병상에 있던 시간 동안의 이야기가 주는 울림이 컸다. 그녀 자신에게도 삶의 큰 변곡점이었을 터인데, 내게 다가온 그 시간들은 ‘가족’과 ‘돌봄’ 그리고 ‘사랑‘으로 남았다. 내가 읽은 글 속 그녀는 참 크고 깊은 사랑에 둘러싸여 있다. 강렬한 각성가의 사랑이 아니라, 공기처럼 물처럼 은은하고 안온하게 일상에 녹아들어 있는, 그러나 단단하고 뿌리깊은 나무같은 사랑 말이다. 내심 그런 그녀가 부럽기도 했다. 그녀의 그 시간들에 함께한 가족들의 사랑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 변곡점이 보다 좋은 세계로 나아가는 쪽으로 방향을 틀게 한 것은, 그녀에게로 온전히 쏟아진 가족의 돌봄과 마음이 아니었을까.


묵묵히 일상을 살아가는 것. 나의 상황들을 더하거나 빼지 않고 있는 그대로 수용하는 것. 그 어떤 모습이어도 나 그 자체로 실패와 시련을 거듭하며 경험을 쌓아가는 것. 그녀의 글 덕에 다시 한 번 더 새겨보는 삶의 중요한 가치들. 정처 없기에 어디로든 흘러갈 수 있는 이 삶을 보다 애정할 수 있을 것만 같은 작은 용기.


앞으로의 그녀가, 그녀의 글이 기대된다. 늘 어두운 평지만을 헤매듯 살던 그녀가 한 계단 껑충 뛰어오른 지금, 어느 방향으로 어떻게 자신만의 세계를 확장해나갈지 감히 상상하기 어렵다. 그녀가 만들어갈 그 세계의 지도들이 완성되는 과정에 함께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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혐오 - 우리는 왜 검열이 아닌 표현의 자유로 맞서야 하는가? Philos 시리즈 23
네이딘 스트로슨 지음, 홍성수.유민석 옮김 / arte(아르테) / 202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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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읽은 책들에서 다루는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여다보고 있노라면 그 이면에 안개처럼 스며든 혐오라는 감정이 자주 고개를 들었다. 책의 표지 속 부제에서 간파할 수 있듯이 이 책은 혐오라는 감정 그 자체에 대해 이야기하는 책은 아니다. “혐오표현 금지법”을 둘러싼 솔직하고 체계적인 비판과 함께 현실적이고 접근성 높은 대안을 제안하는 책이다.


저자가 우리에게 전하는 메세지는 사실 분명하고 간단하다. 그러나 혐오표현 금지법과 관련해 우리가 꼭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하고도 가치있는 핵심 메세지를 파악하기도 전에 받아들이고 이해해야 할 내용이 어렵다는 이유로 포기하는 독자도 제법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인지하는 것, 알아차리는 것에서부터 출발이다. 만일 그 어떤 이유로든 이 책에 손을 댔다면 쉽게 포기하지 말고 천천히, 개인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조금씩 친밀감을 쌓아가면 좋겠다.


저자가 혐오표현 금지법에 딴지를 건다고 해서 혐오표현 자체를 옹호하는 것이 결코 아니다. 혐오표현을 제한하거나 감소시키기 위해 법률의 힘을 빌리는 것은 심각한 부작용을 초래한다는 점에서 다른 대안으로의 접근을 제안하는 것이다. 아무리 외현적 차별과 혐오가 감소했다고 해도 여전히 우리 사회에는 암묵적 차별과 혐오가 만연하다. 저자는 이에 맞서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모순 투성이인 법적 제재가 아니라 더 많은 표현, 즉 대항 표현(counterspeech: 혐오표현에 대항하는 모든 표현. 특히 교육이나 정보 제공과 같은 환경 조성)임을 한 권의 책을 통해 탄탄하게 블럭을 쌓듯 차근차근 설명 및 주장한다.


저자가 한국인이 아니니 당연히 미국 법률을 중심으로 주장을 펼친다. 우리는 그 과정에서 우리나라가 직면하고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성을 발견할 수 있다. 혐오표현에 대한 금지나 검열에 반대하는 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겠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더 많은 일을 적극적으로 해야 한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에서 혐오표현에 관한 논의는 법 제정 그 자체에 지나치게 매몰되어 있다. 혐오표현의 위험성을 잊지 않되, 혐오표현 금지법이 아닌 다른 대안으로 시선을 확장하는 것. 법적 규제가 아닌 다른 방법으로 혐오표현에 적극적으로 맞서 싸우는 것. 그것이 우리가 나아가야 할 더 나은 방향은 아닐까.


꽤 오랜 시간을 들여 진하게 빠져들어야만 소화가 가능한 독서였다. 그럼에도 충분히 그럴 만한 가치가 있는 독서였다. 혐오표현 금지법의 문제점을 충실히 언급하는 것을 넘어 혐오표현에 대처할 다른 여러 방법들을 제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의 가치가 빛을 발한다. 보다 많은 이들이 접할 수 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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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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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잇다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해서 읽은 책이다. 이선희 작가님의 수려하고도 섬세한 묘사 덕분이기도, 두 시대를 있는 메세지를 던지기 위해 마련한 천희란 작가님의 탄탄하고 정갈한 구성력 덕분이기도 했다. ‘취향 저격’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잇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지금까지의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시리즈에서 나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무한한 공포를 경험했다. ‘백룸’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포였다. 물론 이상한 공간에 갇힌다는 요소는 공포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소재다. 그러나 백룸은 조금 더 기이하다. 백룸에 들어서면 우리는 무한하고도 아득한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상당히 일상적이고 평범해보이는 것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주는 공포보다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배경이 반복되는 무한한 공간이 주는 공포가 더 크다.


백룸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제목이거나, 그저 한 편의 단편에 삽입된 작은 소재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백룸이 이 책의 전부였다. 책을 덮을 쯤에는 백룸의 뫼비우스에 갇힌 듯한 답답함이 엄습했다. 겨우 출구를 찾아도 결국 또 다른 백룸으로 떨어진다는 설명과 이 책에 담긴 여인들의 생이 묘하게 이어진다.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미궁같은 백룸, 두 여성 작가들이 말하는 출구는 어디일까.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숨쉬고 있을까.


✍🏻 462p. 길먼에서 이선희를 거쳐 내가 있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몰라 보게 변했는데, 가부장제의 유산을 떠안은 여자들의 운명은 질기게도 대물림 되고 있다. 그리고 지구상 어딘가에는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고 소리 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눈뜨지 못한 채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벌써 세 번째 시리즈인데, 결국 하나의 메세지가 관통한다. 세대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는 백룸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이 세상은 여전히 변화에 목마른 자들의 끝없는 아우성이 몹시 옅게, 누가 음소거 버튼이라도 쥐고 있는 듯 소음처럼 깔려있다. 그 당시 여성들이 문학의 힘을 빌려 발악하듯 울부짖던 이야기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이야기의 변형을 겪었을 뿐, 지금의 여성 작가들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세 번째 시리즈 쯤 읽고 나니, 소설 잇다 시리즈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조금 더 선명하게 와 닿는다. 다음 시리즈가 내게 안겨줄 감동이 벌써부터 기대되기도, 두렵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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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민함의 힘 - 세상을 다르게 감지하는 특별한 재능
젠 그랜만.안드레 솔로 지음, 고영훈 옮김 / 21세기북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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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내 아이는 예민하다. 서로 갖고 있는 예민함의 결은 다르지만 예민하지 않은 사람들의 눈에는 좀처럼 쉽게 받아들이기 힘든 어떤 구석들을 갖고 있다는 점에서 ’예민한 사람‘의 카테고리에 놓여 있다. 나는 어떠한가. 스스로도 그렇지만 아이의 예민함을 섬세함으로, 아이만의 특성이자 강점으로 이해한다. 시각 또는 태도의 차이일 수도 있는데, 그 단순한 차이가 아이와의 상호작용에서 전혀 다른 결과물을 내놓는다.


그런 점에서 너무도 마음에 드는 책을 만났다. 예민함의 힘이라니, 제목부터 전하고자 하는 바를 확실히 강조한다. 강인함 사회에서 벗어날 것을, 예민함은 우리가 가진 여러 많은 특성들과 마찬가지의 선 상에 놓인 나만의 가치와 강점임을, (많은 이들이 놓치고 있을) 예민한 사람이 가진 강점을 제대로 인식할 것을 제안한다.


✍🏻 294p. 시끄럽고, 빠르며 지나치게 과도한 세상에서 우리는 예민한 사람들에게 주목하고 기대를 걸어야 한다.


애착 유형을 설명할 때마다 꼭 이야기하는 것이 있다. 애초에 기질적으로 먹고 자는 것이 예측 가능하고 편안한 유아와 기질적으로 민감하게 반응하고 많은 것이 예측 불가능한 유아 중에 후자가 불안정 애착일 가능성이 높지 않냐는 이야기 말이다. 책에서도 다루고 있지만, 후자도 충분히 안정 애착을 이룰 수 있다. 단, 부모가 그에 맞는 애착 환경을 제공할 수 있을 정도로 기민하게 아이를 잘 이해하고 반응해줄 수 있을 때 그렇다. 예민함을 모나고 못난 특성으로 바라보고 싹을 잘라버리려는 노력 대신 그 특성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지해주는 환경에서 예민함은 화려하게 고유의 빛을 낸다.


비단 예민함 뿐일까. 우리 사회는 “~~해야 한다.”는 주문이 생각보다 많다. 정상과 비정상을 쉽게 구분하고 재단한다. 늘 버릇처럼 말한다. 이 세상에 이유 없는 마음은 없다. 예민함도 혹은 그 어떤 특징도 모두 당신만이 가진 이유 있는 마음이다. 스스로가 예민해서, 아이가 예민해서, 지인이 예민해서, 혹은 예민함을 좀처럼 깊이있게 이해하지 못해서 … 그 어떤 이유에서건 나와 주변을 오롯이 이해하고 사랑하고 보다 건강하게 삶을 건설하는 태도를 함양하는 데 도움이 될 만한 책임에 분명하다.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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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호한 상실 - 해결되지 않는 슬픔이 우리를 덮칠 때
폴린 보스 지음, 임재희 옮김 / 작가정신 / 202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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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만 시간을 내어 가만히 돌이켜보자. 우리의 인생에 새겨진 수많은 이별과 상실들 말이다. 선명해보이는 상실들만이 존재하면 좋겠지만 인생은 그다지 우리에게 친절하지 않다. 경계가 모호한 상실들이 비일비재하다. 분명히 실체가 보이고 느낄 수 있지만 곁에 없는 것 같거나, 부재하지만 여전히 곁에 함께 있는 것 같은 수수께기 같은 상실의 지점들을 두고, 이 책의 저자인 폴린 보스 박사는 “모호한 상실”이라 칭한다. 때로는 내가 처한 이 상실이 막연하고 불분명하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만으로도 한 뼘 더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안개처럼 흐릿한 시간들에 조금이나마 안도하고 이해할 수 있는 힘이 생긴다. 실체를 알면, 모호함은 상대적으로 희미해지기 때문 아닐까.


불확실함으로 가득한 이 상실들은 모호하다는 표현 외에는 그럴듯한 단어를 찾기 힘들다. 질병, 죽음, 이민, 전쟁, 이혼, 재혼, 입양, 심지어는 독립하는 자녀와의 지지부진한 거리두기까지. 해결되지 않은 상실은 우리 인생의 길목에 늘 송곳처럼 솟아있고, 상실의 증상은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날카롭고 또 희뿌연 상실에 직면할 필요가 있다. 그것이 극복, 치유, 성장의 출발이다.


그리스어로 ‘위기’는 ‘터닝 포인트’를 의미한다는 말이 가슴에 콕 박힌다. 이보다 확실한 위안이 더 있을까. 사실 우리네 인생은 확실한 것들보다는 불확실한 것들이 더 많다. 상실 앞에서 완벽을, 확실한 무언가를 기대하는 것은 다소 어리석은 판단일 지도 모르겠다. 안정적인 것, 완벽한 것, 확실한 것으로부터 한 발자국 물러서면 오히려 더 잘 보이는 것들이 있다.


책은 모호한 상실의 임상 사례로 사랑하는 사람과의 결별,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 확인되지 않은 실종 상태, 이민자들이 겪는 문화와 언어의 차이, 입양아가 느끼는 단절과 고립, 알츠하이머/기억상실/정신질환으로 인한 공감과 유대감 부재에서 오는 상실감 등을 소개한다. 그러나 그 뿐이랴. 실은 우리가 살아가는 현실 속 상실감 대부분은 모호한 면들이 있고, 이처럼 모호한 상실은 매우 가까이에 우리와 함께 살아가고 있다. 이 책을 읽거나 혹은 이 글을 읽으며 스스로 깨닫기에 너무 늦었다고 자책하지 않기를 바란다. 지금도 늦지 않았다. 모호한 성실을 인정하면 된다. 거기서부터 다시 시작하면 된다. 인정하는 그 순간, 아마도 전에는 경험해 보지 못한 삶의 이면이 드러날 것이다. 많은 이들이 모호한 상실로 괴로웠던 지난 우울의 시간들과 이별하고, 깊은 위로를 받을 수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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