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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룸 ㅣ 소설, 잇다 3
이선희.천희란 지음 / 작가정신 / 2023년 9월
평점 :
소설, 잇다 시리즈 중, 개인적으로 가장 몰입해서 읽은 책이다. 이선희 작가님의 수려하고도 섬세한 묘사 덕분이기도, 두 시대를 있는 메세지를 던지기 위해 마련한 천희란 작가님의 탄탄하고 정갈한 구성력 덕분이기도 했다. ‘취향 저격’이라는 수식어를 붙이고 싶은 잇다 시리즈의 세 번째 책이다.
지금까지의 시리즈와는 달리 이번 시리즈에서 나는 끝없는 낭떠러지로 떨어지는 듯한, 무한한 공포를 경험했다. ‘백룸’이라는 공간이 주는 공포였다. 물론 이상한 공간에 갇힌다는 요소는 공포 영화에서 흔히 나오는 소재다. 그러나 백룸은 조금 더 기이하다. 백룸에 들어서면 우리는 무한하고도 아득한 공포감에 사로잡힌다. 상당히 일상적이고 평범해보이는 것들이 무한히 반복되는 공간. 어둡고 우중충한 분위기가 주는 공포보다 일상적이고 단조로운 배경이 반복되는 무한한 공간이 주는 공포가 더 크다.
백룸은 누군가에게는 단순한 제목이거나, 그저 한 편의 단편에 삽입된 작은 소재일지도 모른다. 내게는 백룸이 이 책의 전부였다. 책을 덮을 쯤에는 백룸의 뫼비우스에 갇힌 듯한 답답함이 엄습했다. 겨우 출구를 찾아도 결국 또 다른 백룸으로 떨어진다는 설명과 이 책에 담긴 여인들의 생이 묘하게 이어진다. 시대가 달라졌음에도 계속 이어지는 미궁같은 백룸, 두 여성 작가들이 말하는 출구는 어디일까. 그 안에서 나는 어떤 존재로 숨쉬고 있을까.
✍🏻 462p. 길먼에서 이선희를 거쳐 내가 있기까지 세상의 모든 것이 몰라 보게 변했는데, 가부장제의 유산을 떠안은 여자들의 운명은 질기게도 대물림 되고 있다. 그리고 지구상 어딘가에는 자신이 미쳐 가고 있다고 소리 칠 수 있다는 가능성에도 눈뜨지 못한 채 살아가는 여성들이 있을 것이다.
벌써 세 번째 시리즈인데, 결국 하나의 메세지가 관통한다. 세대가 변하고 시대가 바뀌어도 우리는 백룸의 어딘가를 헤매고 있다. 이 세상은 여전히 변화에 목마른 자들의 끝없는 아우성이 몹시 옅게, 누가 음소거 버튼이라도 쥐고 있는 듯 소음처럼 깔려있다. 그 당시 여성들이 문학의 힘을 빌려 발악하듯 울부짖던 이야기들은 다양하고 복잡한 이야기의 변형을 겪었을 뿐, 지금의 여성 작가들도 같은 목소리를 낸다. 세 번째 시리즈 쯤 읽고 나니, 소설 잇다 시리즈가 우리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가 개인적으로 조금 더 선명하게 와 닿는다. 다음 시리즈가 내게 안겨줄 감동이 벌써부터 기대되기도, 두렵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