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람을 본 적이 있나요? (반양장) 보름달문고 44
김려령 지음, 장경혜 그림 / 문학동네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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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야지,하면서도 두께가 얇아서 그냥 훅- 읽어버릴 듯한 느낌때문에 조금은 망설였었다. 하지만, 김려령 작가님의 신작이니만큼 두께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께 그 이상의 무언가를 항상 남겨주는 그녀이기에. 「우아한 거짓말」을 접했을 때 그랬다. 굉장히 강한 두뇌의 떨림이랄까. 한동안 뇌리에 박혀 오랜동안 기억에서 떨쳐낼 수 없던 충격적이었던 그녀의 글과의 첫 만남. 그 무한한 떨림을 기억하고 있기에 이 책 또한 굉장한 설레임으로 다가왔다. 조곤조곤, 그녀가 들려주는 동화 속으로 풍.덩.

표지를 보나, 살짝 내비쳐진 글들을 보나, 청소년 문학임이 틀림이 없지만 이것이 꼭 우리 아이들만을 겨냥한 것이라고 생각치 않는다. 우리는 모두 아이라는 샘을 거쳐 어른이라는 강으로 흘러가고 있으니까.
우리들의 마음 속에도 아이는 여전히 존재한다. 특히, 어린시절을 조금은 특별하게 보냈던 사람이라면 더더욱이 그 아이는 아련하게 간직되어 있으리라.

출근길. 
아침마다 아이들을 사고로부터 보호하려는 건널목 아저씨를 만난다. 경쾌한 호루라기 소리가 설핏 덜 깬 듯한 나의 졸음을 깨운다. 대수롭지 않게 지나치던 광경. 오늘 아침은 괜스레 다시 뒤돌아보게 된다. 어젯밤 나를 찾아온 우리의 건널목 아저씨 때문에.
 
작가인 오명랑. 칠년 전 동화작가로 등단한 이후, 계속 글을 쓰고 있지만 작가로 성공하기란 참 녹록치 않다. 하루하루 시간이 흐를수록 글만 쓰고 있는 그녀를 주변에서 지켜보는건 답답할 수 밖에. 하루가 멀다하고 가족들의 성화가 끊이질 않는다. 그래서 시작하게 된 ’이야기 듣기 교실’. 독자에게 더 다가가기 위해 마음을 여는 일부터 시작하기로 한다. 아이들에게 들려줄 이야기는 바로 이 책의 주인공 ’건널목 아저씨’.신호등이 없는 도로에 직접 만든 건널목 카펫을 들고 다니는 아저씨. 그 아저씨 덕분에 폭신폭신 카펫을 밟는 아이들에겐 웃음이 운전자들에게는 잠깐의 여유가 생겼다. 주변이 밝아진 느낌이다. 마치, 걸어다니는 신호등, 가로등 같은 우리의 건널목 아저씨. 처음에는 유치하게 시시하게만 들리던 동화가 어느새 아이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건널목 아저씨’는 바로 마음을 움직이는 따뜻한 분이었으니까.

그녀가 하고 싶었던 이야기는 그리웠던 그 시절을 회상하는데에서 시작된다. 건널목 아저씨를 만나게 된 일부터, 아저씨와 헤어지는 그 순간까지를 동화처럼 아이들에게 들려준다. 다른 사람의 이야기이면서 나의 이야기가 될 수도 있는 그런 이야기. 잃어가는 우리의 마음에 따스한 온기를 불어주는 그런 이야기였다.



# 참 이상하지? 근사하게 생긴 사람도 아닌데, 가진 게 많아서 듬뿍듬뿍 퍼주는 사람도 아닌데, 사람들은 건널목 씨를 좋아했어. 많은 사람들 사이에 건널목 씨 한 사람 더 와서 사는 건데 아리랑 아파트 분위기가 달라졌다니까. 이웃끼리 인사도 더 자연스럽게 했고 더 상냥해졌지. 좋은 사람이란 그런 거야. 가만히 있어도 좋은 에너지를 뿜어내는 사람. 내가 이걸 해 주면 저 사람도 그걸 해 주겠지? 하는 계산된 친절이나, 나 이 정도로 잘해 주는 사람이야, 하는 과시용 친절도 아닌 그냥 당연하게 남을 배려하는 사람, 그 사람이 바로 건널목 씨야. 그런 사람이 뿜어내는 에너지는 참 많은 사람을 행복하게 해. (77쪽)
아무 대가 없이 아이들이 안전하게 건널 수 있도록 건널목이 되어준 사람. 우리에게도 지금 그가 필요하다. 요즘은 이미지, 라는 것이 굉장히 중요해서 과시용 친절이 많이 눈에 띈다. 그리고 나도 모르는 사이 그 행동을 하고 있다. 나도, 내 나름으로는 배려를 많이 하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돌이켜 생각해보면 내심, 하고 기대를 하고 있었다. 참 무서운 기대감, 내심. 건널목 씨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었는데 어느새 나는 세상에 찌들어가고 있었다.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그렇게 되어버린, 슬픈 현실. 이 글을 읽을 때 나의 가슴 속의 아이는 펑펑 울었다. 먼저 손을 내밀 줄 아는 사람이었는데, 그저 주기만 해도 행복해하는 아이였는데, 지금 그 아이는 어디로 숨어버린 걸까. 너무 많이 잃어버린 내 모습. 난 다시 찾을 수 있을까.


마음껏 울어도 좋을 만한 느낌의 따뜻한 동화. 건널목 아저씨가 곁에 있어준 나의 어린 시절은 아니었지만, 나와 비슷한 성장기를 보낸 도희, 태희에게서 건널목 아저씨의 따뜻한 사랑을 함께 받고 있었다. 위로 받을 수 없었던 나의 어린시절을 들켜버렸지만, 그보다 더 값진 무언가를 얻은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마음을 움직이는, 오직 그 마음만으로 충분한 인상을 남긴 책이었다. 아이들만을 위한 동화가 아닌 마음 속에 상처받은 아이를 숨기고 살아가는 어른아이에게도 꼭 필요한 동화였다.
바삐 움직이고, 힘겹게 돌아가는 세상 속에서 한 템포 느린 박자를 찾아주는 책. 좋은 사람이 되고자, 행복한 사람이 되고자, 아팠던 어린 시절을 떨치고자 하는 어른아이와 중요한 시기를 맞고 있는 아이들이 함께 읽으면 좋을만한 책. 잃어가는 정(情) 또한 되새길 수 있는 순수하고 따뜻한 동화이다.


# 건널목 아저씨, 아저씨의 여행이 언제까지 계속 될지는 모르겠지만, 저도 아저씨처럼 멈추지 않고 제 길을 가고 싶어요. 그렇게 가다가 언젠가 진짜 아저씨를 만나게 되면 다시 한 번 멋진 콧수염을 그려 드리고 싶습니다. _ 정경혜(그림작가)
# 때로는 힘들고 지쳐 주저 앉고 싶을 때도 있을 테지요. 어른들도 부족한 게 많아 번쩍 안고 원하는 곳으로 옮겨 줄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덜 힘들게 덜 아프게 덜 무섭게 그 시기를 건널 수 있도록 건널목이 되어 줄 수는 있습니다. 친구라도 좋고 이웃이라도 좋습니다. 먼저 손을 내밀어도 괜찮고, 누군가 먼저 내민 손을 잡아도 괜찮습니다. 우리 그렇게 살았으면 합니다._김려령

걷거나 뛰거나 장난쳐서는 안되는 에스컬레이터.
바쁜 출근길, 우리는 그 움직이는 계단을 뛰거나 걷는다. 그만큼 마음의 여유를 잃어버린 우리들. 그래서 서로에게 무심해지고, 자신의 이익을 위해 눈을 감고, 주변의 눈치를 살피게 되어 버렸다. 이럴수록 더 돌아봐야 한다. 건널목을 건널 때만큼은 건널목 아저씨를 생각하며 그가 환하게 만들고 싶었던 세상을 조금은 여유롭게 바라보고 싶다.


아저씨도, 또 다른 누군가의 건널목이 되어 주시며 행복해하고 계실까. 외롭지는 않으실까. 이제는 우리 모두가 건널목 아저씨의 건널목이 되어 주었으면 좋겠다. 아저씨를 닮고 싶어 스스로 건널목 아저씨가 된 태석이처럼 우리도 건널목 아저씨를 잊지 않고 기억해주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유치한 동화라고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우리에게는 지금 이런 동화가 꼭 필요하다. 말하지는 않아도 먼저 손 내밀어줄, 기댈 사람이 필요하지는 않은가?  혼자였던 길도 함께 걸으면 달라보이는 것처럼 이 책을 통해서 조금은 덜 외롭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모두 서로에게 건널목 아저씨가 되어 주자. 내가 잃어버린 것만 같았던 어린 시절에서 또 다른 것을 배운 것 처럼, 지금이라도 건널목이 되고 싶다는 마음을 가진 것 처럼, 우리 모두가 따뜻해질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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