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가사키 - 2010 아카데미 프랑세즈 소설 대상 수상작
에릭 파이 지음, 백선희 옮김 / 21세기북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한순간,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삶이 뒤틀려버린다면 당신은 어떻겠는가.

 

이런 물음을 던지게 만들었던 「나가사키」나에게는 사각사각 밤하늘이 별들로 아름답게 수놓아진 도시로 기억되고 있는 곳이었다. 직접 가본적은 없지만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고향이자, 그 세계를 동경해 꼭 한번은 가보고 싶다고 생각했던 곳 나가사키. 그래서일까, '나가사키'라는 제목만 가지고서도 충분히 읽고 싶은 마음이 들었었다. 새로운 모습을 볼 수 있을거라고 생각했으니까. 제목만으론 당연히 일본소설이라고 생각했지만, 프랑스 작가가 쓴 작품이라니 뭔가 신선한 느낌. 일본 소설과는 어떤 다른 매력으로 나를 이끌고 갈 것인지, 기대되었다.

 

  원자폭탄의 폐허를 딛고 힘겹게 살아난 잿빛도시, 나가사키. 책 표지를 장식하고 있는 문구. 제 2차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그 밤하늘이 아름답던 나가사키는 원폭의 피해를 입었다. 이 책의 내용은 그 원폭으로 인해 집주인 몰래 이불 벽장 속에 숨어산 일본 여인의 충격실화. 그리고 2008년 5월 <아사히 신문> 을 비롯해 일본의 여러 신문에 실렸던 사회면 기사를 바탕으로 삼았다고 전하고 있다.

 

  이 충격사건은 나가사키 변두리에 혼자 사는 쉰여섯의 남자가 정상처럼 보이는 집안에서 이상한 점을 발견하는데서 시작된다. 아침에 나갈 때는 15센티미터였던 음료가 8센티미터로 줄어들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가 하나씩 새로 발견되는 증거에 그는 몸서리친다. 범인을 잡기 위해 웹캠을 설치하고 그 범인을 잡았다. 내용은 이렇게나 간단하다. 어떻게 범인이 숨어들었고 그렇게 긴 기간동안 집주인이 모를 정도로 지낼 수 있었는지 또한 기이하지만, 내가 이 책에 주목하는 점은 이런 것이 아니다.

 

  나는 세상을 피해 혼자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저녁, 모든 밤들을 다시 떠올렸다. 유리관 속에 있다고 생각했는데. 은신처며 땅굴이며 아지트라 생각했는데. 당혹함과 더불어 분노가 피어올랐다.(55쪽) 범인이 잡혀가고 나서 그동안의 진상을 형사로 부터 듣고 있다. 그는 혼자였다. 함께 일을 하는 동료가 있었다할지라도 그는 늘 겉으로 맴돌았다. 퇴근 후 동료들이 맥주 몇 잔 정도를 마시러 다닐 때 자신은 혼자 여섯시를 넘기지 않은 시간에 일찍 저녁을 먹는 것을 좋아한다고 했다. 어쩌면 그는 오래전부터 혼자에 익숙해졌던 것이다. 그렇게 혼자의 시간을 편하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 그 집에 마음을, 애정을 쏟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사람들을 의식할 필요도, 신경을 쓸 필요도 없는 유리관 같다고 생각하던 집이 실제로는 혼자가 아이었던 사실에 그는 멍해져 있다. 은신처며 땅굴이며 아지트였던 곳이 함께 공유하는 공간이었던 것에 대한 당혹감이 그를 분노케 한다.

 

  위기가 사람들을 조금 더 혼자로 만들었다. 대화에 수도 없이 등장하는 '우리'라는 말이 아직 어떤 의미를 가지고 있을까? 그 '우리'는 죽어가고 있다. 각각의 '나'들은 불 주위로 모여드는게 아니라 동떨어져 서로를 염탐한다. 저마다 이웃보다 잘 헤쳐 나가고 있다고 믿는데, 어쩌면 이 또한 인간의 종말일지도 모른다.(78쪽) 우리는 점점 혼자가 되어가고 있다. 서로 필요한 부분만큼만 공유하고, 그 이상을 내보이지 않는다. 같은 공간을 사용하거나, 함께 일을 하는 정도의 해를 끼치지 않을 만큼의 공유이지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다. 혹은 뒤쳐지지 않기 위해서 딱 그만큼의 삶을 유지하기 위해서 눈치를 보며 살아가는 정도일까. 이 책에서는 '우리'라는 말이 참 낯설다. 각자의 고독을 안고 같은 공간에 있지만 다른 삶을 사는 그와 그녀의 삶은 공유될 수 없다. 하지만 그들은 고독이라는 이름아래 하나로 묶여 있다.

 

  매일 저녁, 저는 낙관하며 누웠지요. 이건 농담이야. 자고 나면 모든 게 제자리로 돌아갈 거야. 이렇게 의미를 상실할 수는 없어. 별, 바람, 인간, 이 모든 게.(112쪽) 그녀의 삶도 평화로울 때가 있었다. 그 태풍이 일어나기 전까지는. 원폭이 그녀의 가족들을 앗아갔고, 보금자리까지 빼앗았던 것이다. 그래서 그녀는 그 보금자리로 돌아가고 싶었을 뿐이다. 바로 남자가 혼자 살고 있던 그 집으로. 그녀의 행복한 시간이 고스란히 베어있었던 그 집으로 말이다. 제자리로 돌릴 수 없는 시간이 그녀의 삶을 물고 늘어졌지만 그렇게 옛 추억에 잠겨 그 집에서 살아가고 싶었던 그녀가 안스럽고 안타까웠다.

 

  지진이 몰고 온 피해. 지금 일본은 또 한번 이런 아픔을 겪고 있다. 그래서 그녀가 숨어 살 수 밖에 없었던 그 상황이 더없이 마음이 아프다. 한순간에 자신의 보금자리를, 가족들을 잃고 무엇부터 시작을 할 수가 있을까. 그 마음 속에 분노는 어떻게 삭여줄 수 있을 것인가. 이런 상황에서도 살아내고자 하는 마음들이 참 대단하다고 여긴다. 어찌보면 쉽게 놓아버릴 수 있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견디고 이겨내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들의 침착함에 더한 박수를 보낸다.

 

  그는 그녀가 숨어든 그 시간에 자신의 것이라고 생각했던 모든 것을 빼앗겨버린 느낌때문에 더이상 그 집에서 살 수 없을 것 같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녀의 편지로 그가 그녀를 조금은 더 이해해주기를 바란다. 세상과 조금은 화합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살아줬으면 좋겠다. 힘을 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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