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등 - 개정판
박범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1년 2월
평점 :
품절


툭툭툭툭. 내 창을 두드리는 소리가 비였으면 했다. 하지만 빗소리라고 하기에는 약간 어수선한 느낌이었다.

그랬나보다. 꼭 이 책을 덮고 난 내 마음이 옹송거리며 아우성치는 꼭 그 느낌과 닮았기에 쉽사리 창 밖을 내다 보지 못했다.

정말 이 소리가 비라면, 나는 해 쨍쨍하던 오후, 망설임 없이 뜰 앞의 목련을 내 카메라 속에 남겨뒀어야 했다.

눈을 뜨고 또 새 아침이 오면 그 목련이 후두둑, 다 떨어져버리고 말지 않았을까. 노심초사의 새벽을 보냈다.

결국, 창 밖에 슬그머니 손을 뻗으며 그것이 비였음을 확인했다. 목련의 꽃잎을 모조리 떨어뜨리기에는 조금 역부족인,

조금은 수줍게 내리는 봄비, 혹은 이슬비. 나의 심장을 둥둥이게 하는 그녀, 혹은 그녀들과 꼬옥 닮은 이슬비였다.

그녀가 좋아했던 이슬비와 함께 나의 외등은 그렇게 켜져있었다.

 

'비즈니스'를 통해 스스로 박범신 작가님의 팬이 될 것임을 자처했다. 드디어 첫 장을 편다. 그 두근거림이란,

그런데 한번에 훅- 몰입되었던 '비즈니스'와는 달리 무언가 겉도는 느낌.

사실, 기분이 가라앉아있던터라 밝은 느낌의 글을 읽고 싶었었다. 이것은 지극히 모순이다.

제목에서만 보더라도 그 쓸쓸함을 이루 말할 수 없는데, 그래서 몇번을 들었다 놨다를 반복하며, 두근거림이 옅어지고 있었다.

 

한 사내의 뜻하지 않은 죽음을 시작으로, 어두웠던 우리의 시대를 재조명하고 있다. 어느 것 하나 온전하지 않은 인물들이 나의

마음을 마구마구 짓이기고 있었다. 새로 시작하는 봄을 맞이하고 싶었던 나에게는 잔인한 4월이야기였다. '목련'이 피는 계절,

그리고 4월. 지금 읽지 않으면 안된다고 마음을 다잡고 읽기 시작한 이후부터 나락으로 떨어지고 있었다.

 

'목련'. 몸을 한창 웅크리고 있을 즈음. 그 꽃봉오리가 무척이나 수줍다. 하지만 여지껏 목련이 예쁘다, 혹은 내가 가장 좋아하는

꽃이 목련인 적은 단 한번도 없었다. 언제 수줍었냐는 듯 활짝 피어오르는 것도 잠시. '목련'은 어딘가 허무하게 바닥으로 낙하할 즈음

갈색 멍이 온몸 한 가득이다. 상처투성이가 되기 싫어서, 나는 '목련'을 좋아할 수가 없다. '목련'을 좋아할 수는 없지만 '목련'을 닮은

이 책은 좋아질 것이다. 이 책의 제목이 '외등'의 다음 제목으로 '목련'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꼭 '목련'을 닮은 책이다.

 

언제나 내 줄을 끊어버리곤 한다. (8쪽)

세상과 연결되어 있고 싶지만 세상은 언제나 그의 줄을 끊어버린다. 자신의 힘으로 온전히 그녀를 지킬 수도 아버지의 뜻을 완벽히 따를 수도 없는.

늘 갈림길에서 그는 얼마나 외로웠을까. 늘 일렁이는 파도처럼 밀물처럼 왔다가 썰물처럼 저 만치 사라져버리는 그의 인생은 늘 상처투성이었다.

민.혜.주. 그녀를 그리워하는 마음하나로 온 평생을 다 바치던 바보같던 사람. 앉은뱅이 눈사람이 되어 연줄이 끊어진 채 그녀하나만을 향해 날고 있을까.

세상은 그의 줄을 끊었지만, 그녀는 놓지 않았다. 살아생전 한번도 자유롭지 못했던 그를 오히려 자유롭게 하되, 영원히 함께 추억하기로 했다.

 

 

비록 세상이 얼어붙어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가 손전등으로 자신의 주검을 비추었던 외등은 하나의 불꽃이었다고 나는 생각했다. (106-107쪽)

그가 용감하지 못하다고, 생각했었다. 그토록 사랑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보낼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한 그가 바보같았다. 다른 사람에게 가버리면, 또 그토록

아프고 괴로울 거면서. 눈 질끈 감고 그녀를 놓아주지 말지. 서로 사랑하면서 이토록 바보 같은 그와 그녀가 답답하고 또 불쌍했다.

밝을 때에는 그녀에게 다가갈 수 없었던 그. -데모로 인해 도피자의 생활을 해야했기 때문- 어둠이 찾아와서야 비로소 둘은 사랑을 나눌 수 있었다.

한없이 어둠과 한 몸이었던 그가 자신의 주검을 비추는 '외등'을 단 이유는 무엇일까.

어둠에 다다라서야 그녀에게 다가갈 수 있었던 그가 죽어서야 비로소 외등으로나마 밝은 빛으로 자신을 온전히 드러낼 수 있었다.

비록 미미한 손전등이었지만, 그 빛은 무엇보다 찬란하고 따뜻했다.

자신의 온 세포마다 들어차 있었던 그녀를 마음껏 사랑한다고 할 수 없었던 그의 마지막 용기이자 절규가 바로 '외등'인 것이다.

 

유일하지 않으면 사랑이랄 수 없어. 민혜주, 내겐 고유명사란 말야. 많은 여자 중 한 명이 아니라 단 한 명일 뿐이라는 거야. (150쪽)

그렇게 한 곳만을 바라보며 그녀를 위한 스위치, '외등'을 켰던 영우. 세상에 이렇게 지독한 사랑이 또 있을까.

 

 

지독하고, 잔인한 사랑을 되풀이하는 그들 때문인지, 새 봄이 오는 소리가 저만치 멀어진 것 같은 느낌이다.

'목련'은 예쁘지 않아. 정도에서 끝날 것 같던 나의 봄. 카메라에 몇 장 담고서는 너도 꽃이니까, 로 지나칠 것 같던 봄.

'외등'으로 인해 '목련'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졌다. 나에게 너무 아련하고 아픈 상처투성이가 되어버린 '목련'이지만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놓인다.

 

그들이 함께 보냈던 추억의 '목련 그늘' 아래서 이제는 따뜻한 봄을 맞이하고 있겠지.

온 몸이 멍들어 차갑게 지더라도, 수줍었던 그들의 미소를 기억할께.

우리집 뜰 아래 목련그늘에도 잠시 다녀가 주겠니? 이제야 비로소 자유로워진 당신들의 행복한 미소가 보고싶다.

 

 

[수정했으면 하는 부분/오타]

115쪽  그 분의 건강 어떠셨어요? --> 그 분의 건강 어떠셨어요?

131쪽  집 살 때 연을 많이 날렸어 / 184쪽  저 재희예요. 집에 살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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