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불류 시불류 - 이외수의 비상법
이외수 지음, 정태련 그림 / 해냄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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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불류 시불류. '내가 흐르지 않으면 시간도 흐르지 않는다'

이 가을에 정말 멋들어 지는 문장이 아닐 수 없다. 그냥 한글로 봤을 때는 어감이 좋지는 않아서 무슨 주문인가? 주문이라면 어떤 것을 이뤄주기 위함일까? 하면서 웃었던 기억이 난다.  이외수 작가님의 책은 '하악하악'을 시작으로 '청춘불패'까지 딱 두 권 읽었다. 빳빳한 표지가 좋았고, 책의 냄새도 좋았고, 예쁜 그림과 어우러진 활자들과 빠짐없이 하나씩은 들어있는 책갈피가 좋았다. 마니아가 있을 정도로 유명하신 작가님이지만, 좀처럼 다가가기 힘들었달까. 마구 꾸중 들을 것만 같은 느낌이다. 그리고 마니아 층이 있다고 하면 대개는 맹목적이라고 생각하게 되버린다. 일반인은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그들만의 세계.  단 시간에는 전혀 섞일 수 없는 벽이 존재할 것만 같아 섣불리 읽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 책은 좀 달랐다. 이미 두 권을 읽은 적이 있고, 다른 책도 읽어보고 싶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리고 지인들 사이에서 한참 이 책을 주고 받는 것이 유행이었다. 그 시기가 언제인지는 모르나, 꼭 소장하고 싶다는 생각을 하던 차에 운 좋게도 선물을 받게 되었다.

 

 책을 펼치고 냄새를 킁킁 맡은 다음, 활자들과 어우러진 그림들을 스르륵 훑어 보았다. 글자도 기존 책 보다 작지 않고, 스르륵 넘겨보아도 부담을 주지 않을 것 같은 느낌. 그리고 나서 책갈피를 찾았다. 그림 설명을 보니 '산부추' 라고 되어 있다. 보라색이 꽤나 매력적이다. 책에서 찾을 수 있는 또 하나의 선물. 책을 사고 무언가를 하나 더 끼워주면 횡재한 것 같은 기분이 들 듯이 꼭 그런 짜릿한 기분이었다. 보물이라도 되는 냥 구겨지지는 않을까, 냄새가 날아가지는 않을까 염려하면서 책 속에 고이고이.

 

  1장에서 5장까지 총 323개의 글귀들. - 내용이 길지 않다고, 책을 잡은 순간 다 읽으려고 하지말자.

처음에는 정독할 마음에 다짜고짜 책을 잡았다가 2장까지인가 보고 덮어버렸다. 다 맞는 말 뿐이었기 때문이다. 뭔가 따분하달까. 곰방대를 태우시며 해주는 할아버지의 추억담을 듣는 것 마냥 그다지 재미있는 내용이 아니었다. 아마, 빨리 읽고 싶다는 욕심을 부려서이다. 나름 책을 꾸준하게 보고 있다고 자부하지만, 그 때문에 책의 분량에도 욕심이 생기는 것이 사실이다. 짧은 이야기에 그림도 많으니까 빨리 보고 다른 책을 읽어야지. 하고 생각해버렸던거다. 하지만 이 책은 그렇게 보아서는 안된다. 덮고나서 한참을 다시 손에 잡지 못했다. 흥미를 잃었기 때문이었다. 짧은 글 마저 빨리 읽고 다음 책으로 넘어가려는 내 어리석은 생각에, 이럴거면 책을 뭣하러 읽어? 하며 의욕을 상실해버렸다. 그리고 나에게한 실망감까지 들었고,

 

 이 책을 선물받은 것이 여름이었으니까, 한 계절이 지났다. 그리고, 날씨는 제법 쌀쌀해졌고. 가을에서 겨울로 넘어가는. 아직 겨울은 아닌 그런 계절.

책은 현재의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질 때. 더 여운이 많이 남고, 감정이입도 더 잘되게 마련이다. 날씨가 습하고 몸에도 열이 올라오는데 감성이 먹힐리 없다. 지금에서야 이 책이 읽히게 된 이유이다. 조금이라도 마음을 옮기고, 쏟을 수 있을 때 더 빛을 발하는 책이다.

 

  제목이 한자이다보니, 자연스레 한자에 관심이 갔다. 본디 어원부터 따지는 것을 좋아하는 나로써는 저자의 이름도 곰곰히 생각해봤을 법도 한데, 이외수 작가님은 어떤 한자를 쓰실까 궁금하지 않았다니. 의외다. 그만큼 마음을 쏟지 않았다는 뜻이라 좀 죄송스럽다. 이제서야 한자를 보니 바깥 외(外) 자에, 빼어날 수()를 쓰신다. 그러면 바깥으로 빼어나다는 뜻인데, 그래서 명문장을 쓰시나? 글로 널리 알려지신건가? 하는 생각을 해봤다. 도시와 떨어져 자연과 함께 사시지만, 마니아 층도 가지고 계시고 유명하신 작가님이시니까 이름이 어느정도 맞아떨어지는 셈 같다. 그러고 보면, 이름도 참 중요하단 말이야. ^^;

 

  시적인 부분도 많고, 아.. 괜히 작가가 아니구나, 자연과 함께 사시니 이리도 싱그러운 표현이 가능하구나. 세속적인 사람들과는 생각 자체가 다르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가을단풍을 보더라도, 메아리 소리를 듣더라도 작가님에겐 다 글쓸 거리가 되는 것이 신기하고 부러웠다. 글을 쓰신 세월이 오래되셨어도 쉽게 써지지는 않는다고 하시지만 읽고 있는 활자들은 날개도 달렸고, 나름의 그림자와 풍류도 있다. 길지는 않지만 짧은 문장에서도 나의 뇌리를 탁 스쳐가는, 그래서 한없이 고민하게 만드는 걸 보면 쉽게 읽어지지가 않는게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탐관오리를 풍자하며, 세상의 속된 것들을 바로 잡고, 그래서 영영 섞일 수 없을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현대인과 어우러지며, 감성이 그 누구보다 살아있으시고, 지친이들에게 위로와 격려, 용기를 주신다. 책 속에 모든 요소를 담아내는 일이 쉽지 않은데 이 책을 보고 있노라면 세상사는 드라마를 총집합해놓은 느낌이다. 가벼이 던지신 말이라 할지라도, 그 속 뜻을 읽기 위해 쉽게 책장을 넘기지 않고 붙잡고 있었다. 어떤 것을 말하고자 함인지 내가 100% 다 이해할 수 있는 경지는 아니지만 최대한 가까이 이해하기 위해서, 활자를 곱씹고 곱씹었다.

 

 직접 읽어봐야 그 제맛을 느낄 수 있고, 또 제각기 다른 생각의 보따리를 풀어놓을 수 있을테지만,

나혼자 느끼기에는 너무 아까운 부분이 있어 조금만 열거하려 한다.

 

 204

달밤에 홀로 숲속을 거닐면 여기저기 흩어져 빛나고 있는 달의 파편들.

몇 조각만 주워다 불면에 시달리는 그대 방 창틀에 매달아 주고 싶었네. - Page. 162

 

지금도 분명 온갖 고민과 번뇌로 쉽게 잠들지 못하는 영혼들이 있을 터.
표현이 참 멋지지 않은가? 여기저기 흩어져 빛나고 있는 달의 파편. 절로 상상을 하고 보니, 꽤 멋지다. 그 조각을 불면에 시달리는 그대를 위해 쓰고 싶으시다니.
지친 영혼을 달래주기에 너무 멋진 표현 같다.
누군가가 불면에 시달릴 때마다  들려주거나, 혹은 나를 위해 이 구절을 써야겠다. 그 깊은 밤 혼자이지 않다는 것을 느낄 수 있도록. 그것이 나의 마음이라고 말이다.

212

등잔밑이 어둡다고 탓하지 마세요.

이 세상 어딘에 제 모습 비추기 위해 켜져 있는 등불이 있던가요. - Page. 168

 

이 글귀를 읽고 한참동안 멍하게 있었다. 그리고는 창밖을 내다보았다. 가로등이 애처롭게 누군가의 가는 길을 비춰주고 있었다.
그래. 자신을 위한 불빛이 아니라 그 어떤 누군가를 위한 불빛이라 생각하니 갑자기 가로등이 처량하게도 느껴지고, 따스하게도 느껴졌다.
단 한번도 가로등이 쓸쓸해보인다거나 아니면 고맙다거나 느껴본 적이 없었기에 이제서야 그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아직 세상을 품기에 어리구나. 여겨졌다.
그리고 막연히 누군가를 위한 등불이 되고 싶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그 자리에서 그 밤이 무섭지 않게 나도 누군가를 위해 그렇게 덩그러니 서 있어 주겠노라고.

 

290

길 가다 옷자락만 스쳐도 인연이라지요. 밤새우며 글자락을 스치면 얼마나 큰 인연일까요.  - Page. 224 

 

인연은 헛되이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인연이면 쉽게 떨어지지도 않는다 믿고 있다. 컴퓨터가 보편화되면서 자신의 생각을 전하거나 어떤 기록을 남길 때도 손글은 잘 쓰지 않게 되는데 이따금 편지나 일기를 쓸때면 기분이 좋아진다. 네모난 글자가 전해주는 느낌보다는 비뚤비뚤하더라도 그 사람의 필체를 마주할 수 있는 것에 대한 기쁨을 나는 안다. 그래서 이 글귀를 읽었을 때, 내가 편지를 쓰면서 그 사람을 생각하듯 그 글자락들도 그 사람에게 닿아 서로 스치는 것일터인데 꼭 만나지 않더라도 그렇게 나마 마음을 전할 수 있음에 쉬이할 인연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앞으로 더 많이 글자락을 스쳐보기로 했다. ^^

 

   정태련 님의 예쁜 그림을 감상하며 활자를 읽는 기쁨은 이루 말할 수 없다. 거기에 솔솔 은은한 향까지 더해져 꼭 소장하고 싶게 만든다. 책을 쫘악 펼쳐보아도 구겨지거나 뜯어질 염려가 없어 더욱 좋다. 세상에 어느 것하나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고, 용기를 주는 책. 이따금씩 좋지 않은 것들의 대한 흉도 보면서, 지금 살아가는 삶을 반성하고 다시 일어설 수 있고, 또 내려놓음까지 알려주는 책. 그래서 이 책은 그저 참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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