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내 것이었던
앨리스 피니 지음, 권도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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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블로그를 보고 있자니 스릴러를 이따금 읽은 적은 있지만 서평을 제대로(?) 쓴 책은 한 권 뿐이라는 사실에 적잖이 당황했다. 원래 장르문학은 추천이 아무리 많이 있어도 읽게된 날은 어김없이 관련된 꿈을 꾸기 때문에 잠을 쉽게 들지 못하는 나에게는 그 점이 꽤 곤란해서 애써 보려고는 하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심리 스릴러라는 점이 마음에 들어 나도 모르게 덥썩 집어 들게 되었다.

나는 지금 임신중이다. 그리고 첫 아이는 4살이다. 어떤 상황과 마주하게 되면 누구나 자신의 상황과 겹쳐 생각하게 되기 마련.

앰버, 클레어와 마주하게 되었을 때 내가 그랬다. 첫째의 비애에 관해 자주 생각하면서 읽을 수 밖에 없었고 제목 또한 나를 자꾸 따라다녔다. 둘째 출산을 앞두고 집에 이것저것 들이고 있는지라 앰버와 클레어의 대화나 서로를 대하는 태도를 보니 태어나게 될 둘째보다 첫째가 영 신경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앰버는 크리스마스날 어떠한 사고로 코마상태가 되어있고, 들을 수만 있는 상황이기에 나의 마음은 오롯이 앰버에게만 집중되어 있었다. 마치 애처로운 아이, 내가 요즘 첫 아이에게 느끼고 있는 그 감정을 앰버에게 쏟았다. 그래서 읽으면 읽을수록 교차되는 시간을 보고 있을수록 마음이 정말 아팠다. 심리 스릴러가 이런 것이구나, 스릴러라고 다 무섭거나 잔인한 것은 아니구나. 이 책의 글에는 그런 무언의 힘이 분명히 존재했다.

보통 스릴러는 나의 경우 범인 찾기에 급급했다. 뭐가 어떻게 된거지? 앞과 뒤의 상황을 나열하고 범인 리스트를 머릿 속에 끊임없이 떠올리곤 했다. 현장이 어땠다거나 그런 걸 계속 생각하다가는 꿈에 나올게 뻔하기 때문에 최대한 그 사건이 왜 일어났느냐 보다는 범인 찾는데 주력했던 것 같다. 물론 이 책에서도 앰버의 사고경위가 중요하긴 했지만 현재-그 때-이전, 이런 식으로 시간을 전환하며 글이 이어지고 있기 때문에 그 시간들에 집중할 수 있었다. 그래서 구성이 지루하지 않았고 범인찾기가 주가 아닌 다른 방향으로 많이 생각할 수 있었다.

 

- 악몽도 꿈이다. P.14

- 나를 둘러싼 새로운 세상은 내 손이 닿지 않을 만큼 느린 속도로 움직인다. P.42

- 할머니는 항상 사람보다는 책을 친구로 삼는 게 낫다고 하셨어. 책만 있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다고 하셨지. 할머니 말씀이 맞다고 생각해. P.61

- 이 끝없는 잠에서 나를 깨우려는 듯, 작은 손촙들이 창문을 쉴새없이 톡톡 두드리는 듯한 빗소리가 들린다. 성난 빗방울로도 이 마법에서 깨지 못하자, 눈물로 변한 비가 유리창 밑으로 흘러내리는 모습을 그려본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문으로 걸어가는 모습을 상상해본다. 창밖으로 손을 내밀어 살갗에 떨어지는 빗방울을 느끼고,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것이다. 그렇게 하고 싶다는 갈망과 더불어 내가 다시 별을 볼 수 있을지 궁금해진다. 우리는 모두 몸 속에 별을 품고 있다. 하지만 결국에는 먼지로 사라지게 될 것이다. 할 수 있을 때 최고로 빛을 발해야 한다. P.64

- 만일 우리의 순수한 의도를 전부 내려놓는다면, 공통적으로 바라는 건 항상 자신의 이야기를 현대 사회의 소음으로 치부하지 않고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일테다. 일단 나는 질문을 하고 싶지 않다. 누군가 내 대답을 들어주길 바라고, 내 생각이 옳든 그르든 무조건 맞다고 해주길 바란다. 가끔 옳은 일을 하는 것이 옳지 않을 때도 있지만, 인생은 원래 그런 것이다. P.75

- 그녀는 자신만의 맞춤형 광합성으로 존경을 들이마시고 오만함을 내뱉는다. (...) 나는 비서가 화장을 고치는 것을 보면서, 매일 자기가 아닌 다른 사람인 척하는 것은 어떤 느낌일지 생각해본다. P.77 

- 거짓말도 자주 하면 사실로 보일 수 있다. P.77 - 인기가 있는 게 꼭 좋은 건 아니야. 사람들이 너무 많은 것을 기대하게 되거든. 그냥 사람들 사이에 적당히 섞여 있는 게 나아. 너무 잘하면 눈에 띄니까. P.80

- 할머니 말로는 눈물을 밖으로 내보내지 않으면 독이 된대. P.81

- 할머니는 사고 같은 건 없다고, 모든 일은 이유가 있어서 일어나는 거라고 하셨거든. (...) 가끔은 의도하지 않은 일들이 생기기도 하잖아. 믿을 수 없는 일이라고 해서 의도적으로 했다고 말할 수는 없는 거니까. P.82

- 새가 되면 가장 좋은 게 언제라도 날아갈 수 있다는 거지. 이 새는 날 수 없으니까 여기 내 방, 내 옆에 같이 있는 거야. 이 새는 날지도 못하고 지저귀지도 못해. 멀리 떨어진 어딘가에 둥지를 짓지도 못하지 이 새도 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했을 거야. P.83

- 할머니는 항상 무슨 일이든 하룻밤 자면서 신중하게 생각해보라고 하셨어. 아마 걱정을 안고 잠자리에 들면 그 일이 꿈에 나올 것이고, 그러다 보면 깨어났을 때 좋은 해답이 떠오를 수도 있다는 뜻일 거야. 깨자마자 꿈을 다 잊어버려서 한 번도 해답이 떠오른 적이 없지만. P.83

- 모든 일은 순식간에 일어난다. P.85

- 뭔가를 고르는 것과 소유하는 건 다른 문제다. P.86

- 내게서 도망간 시간을 되찾고 싶다. 시간에는 고유한 냄새가 있다. 친숙한 방처럼. 시간이 더 이상 자기 것이 아닐 때, 갈망하고 군침을 흘리며 갈구하게 된다. 시간을 되찾을 수 있다면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다시 시간을 가질 때까지 몇 초를 훔치고, 몇 분을 집어삼킨다. 그렇게 빌린 시간들을 하나로 모아, 더 늘어나길 바라며 섬세하게 고리로 연결한다. 그 시간이 다음 페이지로 넘어갈 수 있을 정도로 길어지면 좋겠다. 다음 페이지라는 게 존재한다면. P.91

- 두 사람이 나누지 않는 한, 추억은 누구도 다치게 하지 않는다. P. 125

- 하늘이 아주 천천히 빛을 잃어가는 동안, 깜박거리는 가로등 불빛이 집으로 가는 길을 비춘다. P.141

- 그녀의 이런 모습이 훨씬 마음에 든다. 매들린이 자는 동안 독기는 물 안에 갇혀 있고, 그녀가 잠에서 깨어나면 입술에 배어든다. P. 166

- 어둠 속에서는 지저분한 일이나 슬픈 일이 보이지 않는다. P.182
- 나는 가끔 거짓말을 해. 그리고 사람들은 모두 가끔 거짓말을 하지. P.195

- 나는 그대로 누워 베개로 얼굴을 덮었어. 할 수 있는 한 오래 숨을 참아보았지만, 결국 입 밖으로 숨이 새어 나왔어. 죽지 않은 거야. P. 278

- 가끔 나는 모든 사람들이 나보다 행복한 것 같다고 느낀다. 물론 그들에게도 내가 모르는 비밀이 있겠지만. P.285

- 마음 한쪽 어두운 구석으로 몰아넣은 뒤, 상자에 가둬버린다. 나는 예전부터 머릿 속 상자 안에 추억들을 숨겨둔다. 가끔 이렇게 하는 것이 문제를 처리하는 유일한 방법일 때가 있다. P. 289

- 어린 시절에 비하면 많은 것이 변했다. 어쩌면 우리가 좋아하는 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완전히 다른 세상이 되었다. 좀 더 빨라지고 좀 더 시끄러워지고 좀 더 고독해졌다. 우리를 둘러싼 세상과 달리, 우린 변하지 않았다. 역사는 거울이고, 우리는 애들이 어른으로 변장한 것처럼, 그저 나이만 더 먹었을 뿐이다. P.315

- 결국 자신의 인생처럼 딸도 포기했다. 거기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사람도 뭔가 하는 사람만큼이나 위험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P.332

- 나도 상처를 가지고 있다. 안쪽에 있다고 해서 없는 건 아니니까. P.333

- 알 수 없는 공포가 익숙한 공포보다 훨씬 큰 법이다. P. 355

- 겉으로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눈으로 보는 것만큼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여보면 속으로는 힘든 부분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P. 383

- 선과 악은 깨진 유리 안에서 서로의 거울에 비치는 상일 뿐이다. P. 406

- 우리는 모두 무엇이라도, 누구라도 사랑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우리 안에 있는 사랑이 갈 곳이 없으니까. P.413



스릴러라는 장르에 이렇게 많은 포스트잇을 붙일 수 있다니! TV드라마화 확정이라고 하니 주옥같은 글귀들이 많아서인 듯하다. 작가분의 필력과 번역의 조화가 정말 멋드러진다.

 

내 마음을 흔드는 글귀들이 참 많았지만, 책을 다 읽고난 후 이 부분이 머릿 속에서 좀처럼 떠나지를 않았다. 서평을 어떻게 쓸까, 하고 내내 생각하는 동안에도 이 장면이 자꾸만 따라다녔다. 물론 계획대로 부부가 원해서 그 원하는 시기에 아기를 갖는 분들도 많이 있지만 나처럼 계획이 아닌.. 술김에 생긴 아기들도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렇게 직설적으로 말하는 엄마는 과연 몇이나 될까. 한 SNS에서 "어쩌다가 태어났는데 내 의지와 무관하게 멤버는 이미 정해졌다. 이건 확실히 복불복이다." 는 책의 한 부분을 본 적이 있다. 나도 내가 내 아이에게 더 잘해주지 못할 때면 다른 부모에게서 태어났다면 우리 아이가 행복했을까, 하는 생각을 종종하곤 하는데 그 SNS에 달린 댓글이 나에게 망치질을 했다. "가족이 내 선택은 아니지만 그 부모의 자궁을 선택한 건 내 의지가 맞습니다." 나는 이 댓글을 보고 철렁했다. 이따금 너무 괴롭고 삶이 잘 풀리지 않으면 괜스레 지금은 옆에 계시지도 않은 엄마탓을 해보곤 하는데 태어나고자 하는 의지가, 살아야겠다는 의지가 일단 나에게 먼저 있었다는 생각을 하니 좀 더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생각도 들고, 내 아이들에게 저런 엄마는 되지 말아야지, 싶다.

얼떨결에 생기긴 했지만 그 누구보다 내 아이를 사랑하고 아끼고 있다. 사실 둘째가 생겼을 때는 새롭게 내 삶을 시작할 수 있는 시기였어서 갑자기 모든 것이 물거품이 된 것만 같아 정말 나쁜 생각도 많이 했는데, 그렇게치면 ​내가 저 엄마랑 뭐가 다른가 싶고, 모든 딸들의 불행의 엄마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생각하니 뱃 속에 있는 아이에게 너무나 미안할 따름이다. 많이 많이  아끼고 사랑해줘야지..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제목과 거짓말이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구나, 생각했다.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까지가 거짓인지 모든 것이 혼란스러웠고 어지러웠다. 원래 내 것이었어!!!! 하고 악에 찬 것 같다가도 아무렇지 않게 원래 내 것이었는데 뭐, 하고 담담하기까지한.. 제목 참 잘 지었구나, 싶다. 내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는 설정에 흥미로웠고, 아직도 쳇바퀴돌 듯 그녀의 뒷이야기가 궁금해진다. 거짓말의 끝은 어디까지일까. 그 끝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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