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 2
전우용 지음 / 푸른역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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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성'의 역사학, 그 '실용성'에 대하여
- [내 안의 역사], 전우용, <푸른역사>, 2019.


"신성권력이 지배하던 시대에는 신과 신의 아들=영웅의 이야기가 역사였다... 유럽 68혁명을 계기로 민주주의는 국가 운영 원리를 넘어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을 조직하는 기본 원리로 재정의되었다... 보통사람의 삶은 거의 전적으로 '평범성'이 점유한다... 인류 역사의 본류는 사람의 시선을 끌지 않는 '평범성'이다. '비범함'이란 도도히 흐르는 물줄기가 바위를 만났을 때 물보라로 튀어 오르는 입자 같은 것이다. '평범성'이 '비범함'을 규정하는 것이지 그 역은 아니다. 인류 역사의 위대한 성취들은 '평범성' 안에 깃든다."
- 전우용, [내 안의 역사], <책머리에>

국사학을 전공하고 동아시아문화 연구교수인 역사학자 전우용은 다수 민중의 '평범성'의 역사를 통해 현재를 돌아본다. SNS를 통한 그의 '사회비평'은 그 적폐의 역사적 배경을 토대로 꽤 설득력있게 다가온다. 물론, '수구세력'과 '토착왜구'들과 결연히 분투하는 최근의 시원한 포스팅의 결론은 대부분 민주당과 현 집권세력의 '진영논리' 같기도 하지만, 어차피 역사를 '해석'하는 것은 평범한 우리들 각자의 몫이니, '평범성'이 전부인 우리에게 그 역사를 알려주는 역사학자의 깊은 노고는 고마울 따름이다.
그렇게 '신성'하고 어려운 '구름 위의 역사'는 땅으로 내려온다.

"[삼국지연의]에는 '전국새'가 나온다. '전국새'는 진시황이 천하의 명옥 '화씨벽'을 얻어 만든 도장으로, '수명우천, 기수영창' 여덟 자, 즉 '하늘로부터 받은 명이여, 영원히 번창하리라'라는 글자를 전서로 새겼다. 글씨는 재상 이사가 썼고, 조각은 옥공 손수가 맡았다고 한다. 물론 당시의 이름은 '전국새'가 아니었다. 진시황은 이 도장을 '천자새'로 쓰면서 금이나 옥으로 만든 도장은 황제만 쓸 수 있도록 했다. 황제나 왕의 도장을 '옥새'라고 하는 것도 여기에서 유래했다... '전국새는 한나라 말의 혼란기에 황궁에서 흘러나가 손견, 원술, 조조의 손을 거친 뒤 다시 황제의 도장이 되었다. 이후 위진남북조시대와 수, 당, 오대십국시대까지 전승되다가 후진의 출제가 요나라 태종에게 사로잡힌 서기 946년에 사라진 것으로 전해진다. 만약 지금 진품 '전국새'가 발견된다면, 이제껏 지구상에서 거래된 골동품 중 최고가를 기록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원칙적으로 황제의 것은 '새', 왕의 것은 '보'라 했고, 제후의 것은 '장'이라 했으며, 그 밖의 것들은 '인'이라 했다."
- 전우용, [내 안의 역사], <태초에 도장이 있었다>

이를테면, 이런 식이다. 우리가 익히 쓰고 있는 '도장'이라는 사물과 그로 인한 '근대적' 계약관계를 이야기하기 위해 먼 옛날 이야기로부터 시작한다. 근대의 개인들은 자본주의 발전과 함께 '사람'이 아닌 '문서'로서의 '계약 관계'를 중시하게 되었는데(마르크스가 말한 자본의 '물신성'의 한 형태), 근대 국가(우리에게는 슬프게도 일제총독부다)는 이름 석 자도 못 쓰는 인민들에게 '도장'을 부여했고 '인감증명'으로 그들의 '시민권'을 확정했다. 이전 '신분사회'에서야 '도장'이나 '서명'의 형식이 차별되었겠지만, 근대에 들어 글도 모르고 이름도 없던 다수 인민들의 '평범성'은 이 과정에서 국가로 하여금 정식 이름 조차 없던 '꽃분이'나 말순이' 같은 우리 할머니와 어머니들에게 제대로 된 이름을 짓게 만들었다. '여성'도 '시민'이 된 것이다. 

'도장'의 역사를 더 보면, '단군 설화'를 담은 일연의 [삼국유사]에서 단군의 아버지 환웅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가져온 '천부인'은 '하늘의 명이 새겨진 도장'이었고, 김부식의 [삼국사기]에는 고구려와 신라왕들의 옥새 이야기도 나오며, 고려는 요, 금, 원나라로부터, 조선은 명나라로부터 '조선국왕지인'을 금도장을 받아 중국과의 외교문서에 찍었다. 더럽지만 살기 위해 찍은 '도장'이었겠으나, 어떤 지배계급에게는 '사대주의'의 큰 명분이었다.

[내안의 역사]는 역사학자 전우용의 '한국 근대 읽기 3부작'의 마지막 3부로, '유리거울'이나 '도장' 등의 <개인사>, '연애', 'TV', '담배' 등 <가족과 의식주>, '탕수육과 짜장면', '소 보험과 암 보험' 등 <직업>, '한양도성', '경찰' 등 <공간과 정치>, '입시제도', '문화재' 등의 <가치관과 문화> 등의 사소항 영역에서 실로 재미있는 역사를 소환한다.

'보험'의 역사에 관한 역사를 한 번 보자.

"소를 잃는 일과 훔치는 일이 이토록 큰 일이었기에, 우리나라 초창기 보험업이 선박 다음으로 소를 주목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조선 영조) 당시 보험 조건은 매년 엽전 한 냥씩을 내면 기르던 소가 갑자기 죽거나 도둑맞을 경우 소 값을 물어준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조선 후기 정치적 특권과 결합한 독점상업 체제, 즉 '도고상업 체제'가 쌓아올린 적폐는 질기게도 오래 버텼다. (1897년) 대조선보험회사 사원들은 소 키우는 집마다 찾아다니면서 나라에서 하는 일이라고 윽박질러 보험료를 강제로 징수했다... 보험금을 지급했다는 기록도 없다. 보험이 뭔지 모르던 농민들은 없던 '우세'가 생겼다고 분개했고... 당황한 정부는 곧 회사 허가를 취소했지만, 그 뒤에도 우척보험회사(1898), 무본보험회사(1900) 등이 잇따라 설립되어 비슷한 짓을 되풀이했다."
- 전우용, [내 안의 역사], <'소 보험'에서 ' 암 보험'까지, 시대의 불안감>

보험의 동기는 '위험(리스크)'이므로 17세기(1666년) '런던 대화재'라는 '화재보험'의 계기는 있었지만, 원래는 근세 '대항해 시대'의 경제활동 중 가장 큰 '위험'과 '손해'의 원천인 '선박'과 '해상무역'이 보험의 첫 물건이었다. 우리도 예외는 아니어서 조선  후기 '호상보험회사'가 정부와 결탁하여 사업을 시작했으나 '보험금 지급 기록'은 남기지 않았고 1894년 갑오개혁 과정에서 철폐되었으나 1897년 조선의 '자본가'들은 '대조선보험회사'를 열고는 오로지 '소 보험'만 팔았고 역시 '보험금 지급 기록'은 없다고 한다. 
언제 어디서든, 자본주의 '시초 축적'의 민낯은 역시, '양아치' 또는 '악마의 맷돌'이다.


"역사학은 인간의 집단 기억을 다루는 학문이다.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기억은 정체성을 구성하는 근본 요소이자 자기 성찰의 원천 재료다. 과거를 기억하고 회상하는 능력은 인간만이 가진 것이라 단정할 수 없으나, 그를 기록하여 전승하는 능력은 오직 인간만이 가진 것이다... '교훈으로서의 역사'는 역사학에 대한 가장 오래된, 그런 점에서 '시대에 뒤떨어진 정의'로 취급되나, 나는 결코 무효화할 수 없는 정의라고 생각한다. '산 자가 죽은 자를 되살리고 죽은 자가 산 자를 지배한다'는 카(E.H.Carr)위 말대로, 인간은 자기 필요에 따라 과거를 소환하여 그 과거가 가르치는 바를 배움으로써 변화하는 존재다. 그 변화가 진보인지 퇴보인지, 발전인지 아닌지를 판단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 전우용, [우리 역사는 깊다], <책머리에>

현대 사회가 고도화되고 자본주의 '산업 혁신'이 가속화되면서, '인문학' 특히 '역사학'의 '실용성'에 더더욱 의문의 제기하는 세태를 두고 역사학자 전우용이 내놓은 답변이다.

"자기 필요에 따라 과거를 소환"하는 인류의 '집단 기억'으로서의 역사는 항상 '승자의 역사'로 기록되고 전승되기도 했으나, '기록'만이 아닌, 아니 그 '기록의 문장' 사이의 맥락에서도 선대의 역사기록자들은 수많은 '암시'들을 남겼을 테고, '평범성'의 큰 물줄기를 타고 흘러가는 우리 다수대중은 그 '맥락의 역사'에서 다수의 '비범함'을 캐낼 수 있다.

다수의 '평범성'들이 영웅적 '비범함'으로 전화되도록 도와주는 역사학자의 노고에 다시금 경의를 표한다.

***

1. [내 안의 역사 - 현대 한국인의 몸과 마음을 만든 근대], 전우용, <푸른역사>, 2019.
2. [우리 역사는 깊다 1~2], 전우용, <푸른역사>,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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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팔사략 - 쉽게 읽는 중국사 입문서 현대지성 클래식 3
증선지 지음, 소준섭 옮김 / 현대지성 / 2015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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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양한 '아시아'의 역사 중 하나로서 '중국'
- [십팔사략], 증선지, 소준섭 편역, <현대지성>, 2018.


"... 진회는 엄청난 고문을 가하는 등 모든 수단을 동원하며 악비에게 모반하려 했다는 자백을 받아내려 했으나 악비는 침묵만 지킬 뿐이었다. 그는 조용히 윗옷을 벗어 등을 보였다. 거기에는 '진충보국(盡忠報國 : 모든 정성과 충성을 다해 국가에 보답하리라)'이라는 네 글자가 선명하게 문신되어 있었다. 악비의 모반죄를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진회는 단 하나의 증거도 제시하지 못한 채 다만, '그에게... 아마 무언가... 모반죄가 있을 것입니다'라며 말끝을 흐릴 뿐이었다... (남)송나라의 충신 악비 장군은 이렇듯 억울하게 세상을 떠나야 했다. 그때 악비의 나이 39세였다."
- 증선지, [십팔사략], <남송시대>

중국의 '정사(正史)'는 17세기 청나라 건륭 연간에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와 진수의 [삼국지] 등 '4사'와 청나라 장정옥의 [명사]까지 이후 기전체 '단대사'들을 포함한 '24사(二十四史)'로 정리되었다고 한다. 특징은 기전체 형식으로 당시 정권의 '정통성' 확보를 위해 이전 왕조의 역사를 당시 왕명에 의해 기술된 역사서라는 것인데, 유일하게 사마천의 [사기]는 '왕명'이 아닌 사마천의 굳은 의지로 '중국 민족'의 주체적 '통사'로서  거대한 '족보' 정리 작업이었고, 나머지 '단대사'는 이전 왕조를 뒤집어 엎고 역성혁명를 했으나 '천자'로서 하늘의 계시를 받은 정통성이 있음을 조작하기 위함이었다.
역성혁명를 통해 새왕조를 열었던 조선의 세종이 김종서, 정인지 등에게 명해 [고려사]를 편찬한 이유도 같다.
청나라 '르네상스' 건륭제가 '이민족' 여진이었음에도 결국 '중국'의 정통성 있는 정권이었음을 애써 과시하기 위해 '정사 24사'를 확정한 것이었다. 

'정사'는 아니지만, 13세기 중국에는 [십팔사략(十八史略)]이 있다.
청나라의 선조인 여진족 금나라에 의해 멸망한 북송시대 이후 강남에 자리잡았다가 칭기즈칸의 몽골제국(그 중 원나라)에 의해 멸족된 남송시대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증선지가 이전 18종의 '정사'를 간략히 정리한 역사서다.
나열하면,
사마천의 [사기], 반고의 [한서], 범엽의 [후한서], 진수의 [삼국지], 방현령의 [진서], 심약의 [송서], 소자현의 [남제서], 요사렴의 [양서]와 [진서], 위수의 [후위서], 이백약의 [북제서], 영호덕분의 [후주서], 위장의 [수서], 이연수의 [남사]와 [북사], 구양수의 [당서]와 [오대사], 탁극탁의 [송사], 이렇게 '고금역대' 18종의 '정사'들을 요약한 것인데, 하나의 왕조를 기록한 것은 '서'로, 남북조 시대나 5대10국 시대처럼 여러 왕조의 기록은 '사'로 이름지었으며, 그 기록자들은 바로 다음 왕조의 저자들이었다.

사마천의 작업 덕택에 증선지도 중국의 시조로서 '삼황오제'로부터 시작하면서 각 왕조들의 '약사'를 서술하고 있어 남송시대까지 중국의 전체 역사를 일별할 수 있다.

수많은 인물군상들이 명멸하는 역사기록이나 [십팔사략]의 클라이막스 또는 '주인공'은 악비 장군일 것이다. 다른 단대사들에서는 볼 수 없겠지만, 사마천의 [사기]의 절정이 '초한전쟁'의 영웅 유방과 항우로 볼 수 있는 것처럼, 증선지는 멸망한 남송을 외세로부터 끝내 지키고자 했던 '한족의 영웅' 악비와 '매국의 간신' 진회를 대비시키고 있다.
'정사'는 아니지만 [삼국지연의]를 지은 원말명초의 '독립투사' 나관중이 '촉한정통 춘추필법'으로 촉한황제 유비를 부각했듯이 말이다.

금나라와 원나라가 유일하게 두려워 했던 악비 장군은 중국인들에게 쉽게 말해 임진정유왜란 시기 왜국이 유일하게 두려워 했던 우리의 이순신 장군과 같다. 악비를 모함해 죽인 추밀부사 진회도 처음부터 간신은 아니었다지만 금나라와의 화친을 주장한 '화친파'였고, 악비는 '주전파'였다. 우리의 병자호란 시기 '남한산성 농성'과 같지만, 아쉽게도 우리의 병자호란에서는 악비 같은 명장이 없다.

결국, 당대에는 간신 진회가 '승리'했지만, 악비의 고향을 비롯한 후세 중국인들에게 진회는 두고두고 모욕을 당하고 있다.

[십팔사략]의 저자 증선지는 남송을 지키기 위해 끝까지 싸우다가 원세조 쿠빌라이에게 사형당한 충신 문천상의 후배였다고 한다. 선배 문천상은 나라를 위해 의병을 모으고 잡혀가서도 충절을 지키다가 죽었고, 후배 증선지는 원나라 초까지 살아 '중국 민족의 통사'를 [십팔사략]으로 정리했다.

우리에게 '십팔사략' 이야기는 [고우영의 십팔사략] 만화로 나오기도 했는데, '편역서'는 2015년에 출간되었다.


"'남선북마'라는 표현이 있다... '중국'은 원래 '가운데 있는 나라'가 아닌 '나라의 가운데'를 의미했다... 중화는 '문화의 중심', 다시 말해 수도권을 말한다... '관동은 상(재상)을 내고, 관서는 장(장군)을 낸다'는 표현이 있다... 중국은 광대하고 사람이나 물건의 경관도 다양하다... 남과 북, 동과 서가 마치 서로를 보완하듯 하나의 완성된 천하를 만드는 것이 이상이었다. 분열의 시대는 있었으나 사람들은 그 상태에 안주하지 않았다. 항상 통일에 대한 소망이 있었고 마침내는 달성했다."
- 진순신, [중국 오천년], 1983.

아시아의 역사를 문학적 형태로 표현한 일본 작가 진순신은 [중국사 오천년 1~2]에서 [십팔사략]처럼 삼황오제부터 시작하는 중국의 5천년 전역사를 서술한다. 그는 "1949년 10월 1일 톈안먼에서 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을 선포한 것을 마지막으로 이제 붓을 놓기로 한다"며 긴 이야기를 마치는데, 아마도 현대 '사회주의 중국'에 대한 평가는 후대에 맡기기로 한 듯 하다. 하긴, 지금의 중국이 '국가사회주의'인지, '국가독점자본주의'에 불과한지, '시장사회주의'라는 별종인지 평가는 불가하다. 

진순신에 의하면, 중국은 '중화'라는 '나라 가운데' 문명과 동서남북 사방의 이질적 문화가 오랫동안 함께 어우러진 거대한 복합문화인데, 황하를 중심으로 북쪽은 말을 타고 남쪽은 배를 타며, 함곡관을 기준으로 동쪽은 문인(재상)을, 서쪽은 무인(장군)을 내면서 분열과 통일을 반복해온 역사라는 것이다.
즉, '중국의 역사'가 아니라 '중화주의'의 중국과 동서남북 다양한 문화의 발자취로서 '아시아의 역사'를 기술하고 있다.
'중국' 또한 다양한 '아시아 역사'의 일부다.

동북쪽에서 말을 달리고 동남쪽에서 해상을 장악했던 우리 요동과 한반도의 역사는 결국, '중국'의 변방이 아니라 '아시아 역사'의 당당한 한 부분인 것이다.

***

1. [십팔사략], 증선지, 소준섭 편역, <현대지성>, 2018.
2. [중국 오천년 1~2], 진순신, 이혁재 옮김, <다락원>, 2002.
3. '최고 수준의 중국 역사문화답사기 시리즈 9권', 진순신 외, <솔출판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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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택동 선집 1 중국 문화 총서 5
모택동 지음, 김승일 옮김 / 범우사 / 200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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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2단계 혁명발전론'은 어떻게 혁신되는가
-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중국혁명의 역사과정은 반드시 두 단계 발걸음으로 나뉘어 나아가야 한다. 그 첫째 단계는 '민주주의 혁명'이고, 둘째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혁명과정이다. 이른바,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이미 구 범주의 민주주의, 즉 '구민주주의'가 아니라 신 범주의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중화민족의 새로운 정치는 바로 '신민주주의 정치', 중화민족의 새로운 경제는 '신민주주의 경제', 중화민족의 새로운 문화란 '신민주주의 문화'라 잘라 말할 수 있겠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1940.

중국은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중화민국)을 세웠는데, 중국의 부르주아(자산계급) 혁명은 '민족', '민생', '민권'의 소위 '삼민주의'로 정리된다. 
항일 투쟁의 전선에서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집권한 중국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시도했던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뚱은 1919년 중국 5.4 운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는데, 바로 '신민주주의론'이다.

1918년 중국 5.4 운동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수탈당하는 식민지 민족문제에 대한 대대적 대응이었다. 우리의 3.1 항쟁이 그랬듯, 기존의 '반봉건' 운동에 '반제국주의' 투쟁이 전면화되면서 식민지 민중들은 각성했고 '민주주의 혁명'의 내용도 새롭게 혁신된다.

마오쩌뚱은 민중이 주인되는 국가건설을 위해 1단계로 '자산계급'에 의한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자산계급'에 의한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긍정한다. 당시 중국의 발전단계가 후진적이고 봉건적이었기에 필수적인 단계이되, '자산계급의 독재'가 아닌 농민과 노동자의 '무산계급'의 광범위한 '혁명적 독재'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의 이론화가 바로 '신민주주의론'인데, 2단계로서 '사회주의 혁명'은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다. 

'신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민주주의' 정치는 '반제국주의 계급연합독재'다.

"반제국주의 계급의 연합에 의한 공동독재의 '신민주주의' 국가... 국체는 각 혁명계급 연합전정, 정체는 민주집중제, 이것이 바로 '신민주주의' 정치이며 '신민주주의' 공화국이고 항일통일전선 공화국이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정치>

2. '신민주주의' 경제는 '대은행, 대공업, 대상업의 국유화'와 쑨원의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이 소유하게 한다.

"무산계급 영도 하의 '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국영경제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며, 이는 국민경제의 지도적 역량을 갖는다. 그렇지만 '신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으며, '국민생계를 마음대로 뒤흔들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금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경제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경제>

3. '신민주주의' 문화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반혁명 구세력과 투쟁하는 '반제/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혁명적 신세력의 문화다.

"이른바 '신민주주의' 문화는 곧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 문화이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곧 항일통일전선의 문화이다... '신민주주의' 문화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의 문화이다."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문화>

"모든 사상에는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실천론])", "복잡한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는 하나의 주요 모순이 있으며 이 주요 모순의 존재와 발전에 의해 다른 모순의 존재와 발전이 규정되거나 영향을 받는다([모순론])" 등의 간략하고 쉬운 문장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설명하는 마오쩌뚱답게 항일투쟁의 '주요 모순' 국면에서 계급투쟁의 '기본 모순' 일소를 위한 '혁명론'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리한 개념이 [신민주주의론]인 것이다.


"'차리즘(러시아왕정)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인민' 곧,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뿐이다... 농촌 및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지를 두 세력에 포함... '차리즘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뜻한다."
-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

러시아왕정 '차르'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세운 1905년 '1차 러시아혁명'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 혁명'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문제를 두고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대립하고 분화된다.
'온건파'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세력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협력하고자 한 반면, '급진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도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다.
1848년 프랑스 4월 혁명 등의 교훈은 '민주주의 혁명' 후 부르주아지의 다수 노동자-농민 계급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인데, 레닌의 볼셰비키는 케렌스키의 민주주의적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반전평화와 노동권 쟁취 투쟁을 이어갔고 결국 1917년 '2차 러시아혁명(소비에트혁명)'을 이루어낸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은 단번에 성취한 것이 아니다. 다수 노동대중의 '혁명적 독재'와 그 주체성(영도성)을 결코 놓지 않은 여러 단계의 '혁명발전론'의 결과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병사 등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혁명적 독재'에 의한 '이중 권력'으로, 중국에서는 다수 '무산계급'의 '반제/반봉건 계급연합독재'로 나타난 '혁명발전론'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혁신되어야 할 것인가.

***

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3.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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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 마르크스.레닌주의 고전문고 2
레닌 지음 / 돌베개 / 198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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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적인 '2단계 혁명발전론'은 어떻게 혁신되는가
-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중국혁명의 역사과정은 반드시 두 단계 발걸음으로 나뉘어 나아가야 한다. 그 첫째 단계는 '민주주의 혁명'이고, 둘째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혁명과정이다. 이른바,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이미 구 범주의 민주주의, 즉 '구민주주의'가 아니라 신 범주의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중화민족의 새로운 정치는 바로 '신민주주의 정치', 중화민족의 새로운 경제는 '신민주주의 경제', 중화민족의 새로운 문화란 '신민주주의 문화'라 잘라 말할 수 있겠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1940.

중국은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중화민국)을 세웠는데, 중국의 부르주아(자산계급) 혁명은 '민족', '민생', '민권'의 소위 '삼민주의'로 정리된다. 
항일 투쟁의 전선에서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집권한 중국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시도했던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뚱은 1919년 중국 5.4 운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는데, 바로 '신민주주의론'이다.

1918년 중국 5.4 운동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수탈당하는 식민지 민족문제에 대한 대대적 대응이었다. 우리의 3.1 항쟁이 그랬듯, 기존의 '반봉건' 운동에 '반제국주의' 투쟁이 전면화되면서 식민지 민중들은 각성했고 '민주주의 혁명'의 내용도 새롭게 혁신된다.

마오쩌뚱은 민중이 주인되는 국가건설을 위해 1단계로 '자산계급'에 의한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자산계급'에 의한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긍정한다. 당시 중국의 발전단계가 후진적이고 봉건적이었기에 필수적인 단계이되, '자산계급의 독재'가 아닌 농민과 노동자의 '무산계급'의 광범위한 '혁명적 독재'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의 이론화가 바로 '신민주주의론'인데, 2단계로서 '사회주의 혁명'은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다. 

'신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민주주의' 정치는 '반제국주의 계급연합독재'다.

"반제국주의 계급의 연합에 의한 공동독재의 '신민주주의' 국가... 국체는 각 혁명계급 연합전정, 정체는 민주집중제, 이것이 바로 '신민주주의' 정치이며 '신민주주의' 공화국이고 항일통일전선 공화국이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정치>

2. '신민주주의' 경제는 '대은행, 대공업, 대상업의 국유화'와 쑨원의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이 소유하게 한다.

"무산계급 영도 하의 '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국영경제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며, 이는 국민경제의 지도적 역량을 갖는다. 그렇지만 '신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으며, '국민생계를 마음대로 뒤흔들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금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경제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경제>

3. '신민주주의' 문화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반혁명 구세력과 투쟁하는 '반제/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혁명적 신세력의 문화다.

"이른바 '신민주주의' 문화는 곧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 문화이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곧 항일통일전선의 문화이다... '신민주주의' 문화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의 문화이다."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문화>

"모든 사상에는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실천론])", "복잡한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는 하나의 주요 모순이 있으며 이 주요 모순의 존재와 발전에 의해 다른 모순의 존재와 발전이 규정되거나 영향을 받는다([모순론])" 등의 간략하고 쉬운 문장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설명하는 마오쩌뚱답게 항일투쟁의 '주요 모순' 국면에서 계급투쟁의 '기본 모순' 일소를 위한 '혁명론'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리한 개념이 [신민주주의론]인 것이다.


"'차리즘(러시아왕정)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인민' 곧,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뿐이다... 농촌 및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지를 두 세력에 포함... '차리즘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뜻한다."
-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

러시아왕정 '차르'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세운 1905년 '1차 러시아혁명'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 혁명'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문제를 두고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대립하고 분화된다.
'온건파'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세력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협력하고자 한 반면, '급진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도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다.
1848년 프랑스 4월 혁명 등의 교훈은 '민주주의 혁명' 후 부르주아지의 다수 노동자-농민 계급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인데, 레닌의 볼셰비키는 케렌스키의 민주주의적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반전평화와 노동권 쟁취 투쟁을 이어갔고 결국 1917년 '2차 러시아혁명(소비에트혁명)'을 이루어낸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은 단번에 성취한 것이 아니다. 다수 노동대중의 '혁명적 독재'와 그 주체성(영도성)을 결코 놓지 않은 여러 단계의 '혁명발전론'의 결과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병사 등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혁명적 독재'에 의한 '이중 권력'으로, 중국에서는 다수 '무산계급'의 '반제/반봉건 계급연합독재'로 나타난 '혁명발전론'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혁신되어야 할 것인가.

***

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3.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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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전론/신민주주의론 - 두레문고 2
모택동 / 두레 / 1989년 7월
평점 :
절판


고전적인 '2단계 혁명발전론'은 어떻게 혁신되는가
-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중국혁명의 역사과정은 반드시 두 단계 발걸음으로 나뉘어 나아가야 한다. 그 첫째 단계는 '민주주의 혁명'이고, 둘째 단계는 '사회주의 혁명'으로, 이것은 질적으로 다른 두 개의 혁명과정이다. 이른바, 지금 여기에서 말하는 '민주주의'란 이미 구 범주의 민주주의, 즉 '구민주주의'가 아니라 신 범주의 민주주의, 즉 '신민주주의'이다. 그러므로, 이른바 중화민족의 새로운 정치는 바로 '신민주주의 정치', 중화민족의 새로운 경제는 '신민주주의 경제', 중화민족의 새로운 문화란 '신민주주의 문화'라 잘라 말할 수 있겠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1940.

중국은 1911년 쑨원의 '신해혁명'을 통해 청나라 왕정을 무너뜨리고 공화국(중화민국)을 세웠는데, 중국의 부르주아(자산계급) 혁명은 '민족', '민생', '민권'의 소위 '삼민주의'로 정리된다. 
항일 투쟁의 전선에서 쑨원의 신해혁명으로 집권한 중국 국민당과의 '국공합작'을 시도했던 중국 공산당의 마오쩌뚱은 1919년 중국 5.4 운동을 기점으로 새로운 민주주의 혁명을 주장하는데, 바로 '신민주주의론'이다.

1918년 중국 5.4 운동은 일본을 비롯한 '제국주의' 침략에 의해 수탈당하는 식민지 민족문제에 대한 대대적 대응이었다. 우리의 3.1 항쟁이 그랬듯, 기존의 '반봉건' 운동에 '반제국주의' 투쟁이 전면화되면서 식민지 민중들은 각성했고 '민주주의 혁명'의 내용도 새롭게 혁신된다.

마오쩌뚱은 민중이 주인되는 국가건설을 위해 1단계로 '자산계급'에 의한 '민주주의 혁명'이 이루어지면서 '자산계급'에 의한 중국의 '자본주의적 발전'을 긍정한다. 당시 중국의 발전단계가 후진적이고 봉건적이었기에 필수적인 단계이되, '자산계급의 독재'가 아닌 농민과 노동자의 '무산계급'의 광범위한 '혁명적 독재'의 형태가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이 과정의 이론화가 바로 '신민주주의론'인데, 2단계로서 '사회주의 혁명'은 이러한 '자본주의 발전'이 선행되어야 한다는 마르크스주의에 근거한다. 

'신민주주의'의 구체적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신민주주의' 정치는 '반제국주의 계급연합독재'다.

"반제국주의 계급의 연합에 의한 공동독재의 '신민주주의' 국가... 국체는 각 혁명계급 연합전정, 정체는 민주집중제, 이것이 바로 '신민주주의' 정치이며 '신민주주의' 공화국이고 항일통일전선 공화국이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정치>

2. '신민주주의' 경제는 '대은행, 대공업, 대상업의 국유화'와 쑨원의 '경자유전' 원칙에 따라 지주로부터 토지를 몰수하여 농민들이 소유하게 한다.

"무산계급 영도 하의 '신민주주의' 공화국에서 국영경제는 '사회주의적 성격'을 띠며, 이는 국민경제의 지도적 역량을 갖는다. 그렇지만 '신민주주의' 공화국은 자본주의적 사유재산을 몰수하지 않으며, '국민생계를 마음대로 뒤흔들 수 없는' 자본주의적 생산의 발전은 금지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중국경제가 아직 충분히 발전되지 못했기 때문이다."
-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경제>

3. '신민주주의' 문화는 '제국주의'와 '봉건주의'를 지탱하는 반혁명 구세력과 투쟁하는 '반제/반봉건'을 기치로 내건 혁명적 신세력의 문화다.

"이른바 '신민주주의' 문화는 곧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 문화이며 오늘날에 있어서는 곧 항일통일전선의 문화이다... '신민주주의' 문화를 한마디로 말하면 '무산계급이 영도하는 인민대중의 반제/반봉건의 문화이다."
-마오쩌뚱, [신민주주의론], <신민주주의 문화>

"모든 사상에는 계급적 낙인이 찍혀 있다([실천론])", "복잡한 사물의 발전과정에는 많은 모순이 존재하는데 그 중에는 하나의 주요 모순이 있으며 이 주요 모순의 존재와 발전에 의해 다른 모순의 존재와 발전이 규정되거나 영향을 받는다([모순론])" 등의 간략하고 쉬운 문장으로 마르크스주의를 설명하는 마오쩌뚱답게 항일투쟁의 '주요 모순' 국면에서 계급투쟁의 '기본 모순' 일소를 위한 '혁명론'을 간결하고 명쾌하게 정리한 개념이 [신민주주의론]인 것이다.


"'차리즘(러시아왕정)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를 성취할 수 있는 유일한 세력은 '인민' 곧, 프롤레타리아와 농민 뿐이다... 농촌 및 도시의 프티부르주아지를 두 세력에 포함... '차리즘에 대한 혁명의 결정적 승리'는 '프롤레타리아와 농민의 혁명적 민주주의 독재'의 수립을 뜻한다."
- 레닌,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1905.

러시아왕정 '차르'를 무너뜨리고 러시아 공화국을 세운 1905년 '1차 러시아혁명'에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은 '민주주의 혁명'의 주체가 누가 되어야 하는가 문제를 두고 볼셰비키(다수파)와 멘셰비키(소수파)로 대립하고 분화된다.
'온건파' 멘셰비키는 부르주아 세력의 주체성을 인정하고 협력하고자 한 반면, '급진파' 볼셰비키는 '민주주의 혁명'에서도 노동자-농민 계급의 '혁명적 독재'를 주장했다.
1848년 프랑스 4월 혁명 등의 교훈은 '민주주의 혁명' 후 부르주아지의 다수 노동자-농민 계급에 대한 배신이었기 때문인데, 레닌의 볼셰비키는 케렌스키의 민주주의적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이중 권력'을 끝까지 유지하면서 반전평화와 노동권 쟁취 투쟁을 이어갔고 결국 1917년 '2차 러시아혁명(소비에트혁명)'을 이루어낸다.

 러시아와 중국의 '혁명'은 단번에 성취한 것이 아니다. 다수 노동대중의 '혁명적 독재'와 그 주체성(영도성)을 결코 놓지 않은 여러 단계의 '혁명발전론'의 결과다.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병사 등 광범위한 노동대중의 '혁명적 독재'에 의한 '이중 권력'으로, 중국에서는 다수 '무산계급'의 '반제/반봉건 계급연합독재'로 나타난 '혁명발전론'은 현재의 우리 사회에서 어떤 모습으로 혁신되어야 할 것인가.

***

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3.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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