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노트
김규항 지음 / 알마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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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혁명'은 '안단테'로!
-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을 낳으며 다시 그 둘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자선도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정서가 생략된 과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과 지성에 대한 모욕이며, 오늘 인류가 미래를 희망하는 일이란 바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다... 대체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를 처음 시작할 자격을 갖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
- 김규항, [B급 좌파], <혁명은 안단테로>

사회문화비평가이자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씨네21]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 [B급 좌파]로 엮은 바 있다.
'386' 세대로 불렸던 지식인 엘리트들이 80년대에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체제 변혁'을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열성적으로 수입하고 소개하다가 동구권 공산주의 진영의 몰락을 맞아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일제히 청산한 행태는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다. 아마도 그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A급 좌파'라 생각했겠지만, 김규항이 보기에는 "앙상한 사회주의자들"에 불과했다.
이론으로만 향유했을 뿐, 다수 노동인민대중의 '정서'를 재료로 하지 못했던 'A급'보다는 다수대중의 'B급'이 훨씬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역사는 무수히 많다.
"정서가 생략된 과학"으로서 "연민과 분노가 사라진 이론과 사상"은 결국 다수 인민에게 무섭고 살벌한 얼굴로 다가가곤 했는데, 이러한 'A급'들과 '스탈린주의'는 쌍둥이였다.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를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또한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의 재개'다. '물신세계'에서 인간은 모든 '첫 질문'을 잊는다... '첫 질문의 재개'를 통해 개인은 시스템 속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 김규항, [혁명노트], <113>, 2020.

거의 이십 년 정도 지나 'B급 좌파' 김규항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 연구한 후 돌아왔다. 그 동안은 아마도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여 대중들에게 훈계질하던 '386'에서 어느덧 '486', '586'으로 이론적으로는 '진화'를 표방하나, 인간적으로 '퇴화'한 지식인 엘리트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을 것이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질곡에 빠진 2000년대 후반부터 아마도 1914년의 위기 상황에서 레닌이 '헤겔 철학'을 그 근본부터 연구하고 '철학노트'를 작성했듯이, 김규항은 마르크스 [자본론]을 더 철저히 파고들어 2020년에 [혁명노트]를 작성한 듯 하다.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에 의한 '안단테적 혁명'은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이행되는 과정이다.

"'혁명'은 현재 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로만 이해되어왔다. 그렇게 건설된 건 고작 새로운 정부이거나 새로운 지배 시스템이다. 혁명은 건설이자 '이행'이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 김규항, [혁명노트], <119>

비인간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세상'은 단 번에 오지 않는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더 이상의 '노예'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스파르타쿠스처럼 주체적인 '자기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며, 현재 시스템에서 볼 수 없는 '미래의 것'을 조금씩 선취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일상을 만들어간다. 
'내 안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혁명'이 없다면, 지배계급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개혁'도 없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계급타협' 또한 '혁명'의 이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혁명노트]는 '혁명' 외에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라는 기본모순은 물론,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표현'되는 '물신성'을 강조한다. 김규항에게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가장 주목할 개념이 바로 '물신성(Fetishism)'이다.

"'물신성'은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을 막론하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환상'이다. '물신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원자인 상품에 실재한다. '상품 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물신성'은 지속하며, '물산성'이 지속하는 한 자본주의도 지속한다."
- 김규항, [혁명노트], <61>

마르크스 [자본론]은 '상품'이라는 '개별성'의 '자기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라는 '보편성'을 보여주는 헤겔식의 변증법적 서술방식에 따라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인간의 '노동(력)' 조차도 '상품'이다. 그리하여 실제 '노동의 (사용)가치'는 은폐되고 '노동력의 교환가치'만이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인적 관계' 일체가 '물적 관계'로 대체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물신성'의 단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계급'을 이미 '인격화된 자본'이라 정의한 바 있으나,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현상, 즉 지배계급이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 자체이며, 계급을 망라하여 시스템 내 모든 사람이 '물신성'에 사로잡혀 있다. 'A급 좌파' 조국의 '물신성'을 우리는 최근에 본 바 있다.


결국, '혁명'은 시스템의 전복이나 새로운 정부로의 대체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첫 질문을 재개'하는 '철학'의 복원과 함께 '물신성'을 극복하고 '노예'를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하는 개인'들의 끊임없는 '자기해방'을 통해 선취되는 것이다.
체제가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행 과정'에서 각성한 인간들에 의해 체제가 극복되는 것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투쟁하고 각성하는 개인들의 '연대'다.

***

1.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2. [B급 좌파], 김규항, <야간비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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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 석필 / 199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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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한, '변혁'은 실패하지 않는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마리서사>, 2005.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귀이다. 훈구파의 사주를 받은 궁녀는 덧붙인다.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나아가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풍운의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己卯)사화'이고 사약을 마실 당시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사림의 집권과 동서 분당>

아직 조선 시대 '당쟁'이 시작되기 전이다. '당쟁', 즉 권력을 중심으로 '정파'를 만들어 수행하는 '정치투쟁'은 '사림파'가 조선의 정치를 장악한 이후인 선조대부터 이야기다.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한 '신진사대부'는 민본적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하고 사회 '개혁'을 중심으로 두 정파를 형성하는데, 하나는 정도전의 급진적 '역성혁명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몽주의 온건적 '고려개혁파'였다. 
전자는 조선을 건국하고 100년의 기득권 기간을 거쳐 보수적 '훈구파'가 되었고, 후자는 현실정치에서 배제된 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며 진보적 '사림파'를 형성한다. 이후 출사한 사림파 선비들은 기득권 훈구파와 투쟁하며 연산군대에는 '폐비 윤씨 사건' 등을 둘러싸고 두 차례의 '사화(무오, 갑자)'를 겪고 패배하는데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건'이다. 그것도 대규모 숙청이다.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 두 번의 '사화(기묘, 을사)'가 더 반복되는데, 세 번째 '기묘사화'의 주인공이 바로 정암 조광조이다.

연산군을 폐하고 반정을 일으킨 훈구파 대신 3인방 공신(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죽은 후 중종은 '개혁'을 명목으로 공신 세력 견제를 위해 개혁적 사림파 조광조를 천거받는데, 중종 10년(1515년)에 천거받은 조광조는 그 해 문과에 응시하여 원칙적 '도학정치'를 설파한 '책문'으로 급제한다.
급진적 '정치 개혁'을 추진한 조광조는 가짜 공신을 없애는 '위훈삭제'와 이전 사화로 희생된 스승 김굉필과 더 거슬러 정몽주의 성균관 문묘종사에 올리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중종과 뜻이 맞지 않아 사사당하고 만다.
개혁의 명분과 이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그 한계는 이해해야 하지만, '적폐 세력'의 씨를 말릴 힘이 없음에도 비타협적 '정치투쟁'만 한 결과 '기묘사화'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도전이 그랬고, 왕안석이 그랬으며, 로베스피에르와 트로츠키도 같은 길을 갔으니 '실패한 개혁가'의 한 표상이고, 당시는 잊혀졌으되 현재의 역사에서는 그래서 더 기억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극히 원칙적이었고 협잡하지 않았으며 실력이 부족해 쓰러질 지언정 적에게 굴복하지 않은 점이다.
<중종실록>은 조광조 개혁 4년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조광조들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류가 화를 입음에 이르러 염절(청렴과 절제)이 따라서 무너지니 조정은 재물에 때가 끼고 군현도 그 바람을 타서 이를 데가 없게 되었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중종실록, 15년 10월>


일제시대 '식민사관'은 조선인들을 모이기만 하면 '붕당'을 만들어 싸우는 하급 민족이라 폄하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사대부들의 '사화'와 '당쟁'이었다.
물론, 조선의 '송자'로 불라면서 서인 노론의 '일당독재'를 구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은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은 당시의 '다당제'라 할 수 있는 '당쟁'을 통해 기득권을 견제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음을 설파한다.
조선 '당쟁사'의 '문제적 인물' 송시열을 비판하고 그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 쓴 책이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이다.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싸움이 발생한 것은 선조 임금 때였다. 선조 7년(1574) 전랑으로 있던 오건이 다른 자리로 가면서 김효원을 자신의 후임으로 이조정랑에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심의겸이었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조선의 '이조정랑'은 '3사' 관리 추천권을 지닌 자리인데, '3사'는 사헌부(감찰), 사간원(언론), 홍문관(학술정책) 등의 임무로 '도학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에게는 중요한 직책이었으니, 이 자리의 추천권을 두고 첫 '분당'이 이루어진다.
김효원은 한양 동쪽에 살아 '동인', 심의겸은 서쪽에 있어 '서인'이 되는데, 이후 상대당을 몰아내고 처단 수위의 강경-온건에 따라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이 광해군과 함께 패배한 뒤에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고, 장례복식 등의 쓰잘데기 없는 '예송논쟁' 등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최후의 승자 '노론'은 다시 강경파인 '벽파'가 끝까지 살아남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니 아마도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린다. 
이덕일이 보기에 현재 우리나라 '적폐'와 '수구보수'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어쩌면, '송자' 우암 송시열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육은 효종에게 '삼남에는 부호가 많습니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영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며 확대 실시를 주장했으나 양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힌 효종은 확대 실시를 주저했다. 그러자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배수진을 쳤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항 개혁], 이덕일, <100년 동안의 조세개혁, '대동법'>

조선 시대 '성공한 개혁'은 단연 '대동법'이다. 공납의 폐해를 없애고 토지에 따라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로 '근대국가'의 기틀이 되고 다수 민중들에게도 공평한 조세제도로 당시 지배계급인 대지주에게만 불리한 법이었다. 
당연히 지주와 관료, '토호열신'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국 확대에만 100년이 걸렸고 그 중심에 김육이라는 '서인' 정치가가 있다.
잠곡 김육은 왜란으로 부모를 잃고, 호란으로 출사 기회를 잃기도 하고 성균관에서는 상소운동 등의 '학생운동'도 주도했다는데, 본인의 자리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결국 숙종대에 대동법이 전국 확대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또한 김육의 새로운 역법과 상평통보 주조 등의 경제관은 조선 후기 실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서인'은 '한당'과 '산당'으로 분열하는데, 김육은 '한당'의 지도자였고 '산당'의 우두머리는 송시열이었다.
대동법은 광해군대에 경기도, 효종대 충청도, 숙종대에 전국 확대된 바, 효종이 호서지역 민심을 묻자, 대동법 반대파 송시열 조차도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도도한 '시대정신'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개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득 있는 곳에 과세있다"는 대원칙 아래
소득과 자산에 따라 공정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민중의 '보편복지'를 위해 평등하게 분배하는 '시대정신'은 대동법의 조선이나 현재의 대한민국이나 보편적인 것 아닐는지.

다수 민중을 위한 '보편복지'의 '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한, '개혁'이든 '혁명'이든 사회 변혁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는다.

***

1.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마리서사>, 2005.
2.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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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 김춘추에서 노무현까지
이덕일 지음 / 마리서사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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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정신'을 놓치 않는 한, '변혁'은 실패하지 않는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마리서사>, 2005.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중종 임금에게 한 궁녀가 나뭇잎 하나를 가져다 바친다. 벌레가 갉아먹은 자리를 따라 나뭇잎에 글자가 새겨져 있다. 
'주초위왕(走肖爲王)', 조씨(走+肖=趙)가 왕이 된다는 글귀이다. 훈구파의 사주를 받은 궁녀는 덧붙인다. 
'조광조의 역심(逆心)을 하늘이 알려준 것이옵니다.' 
반정으로 등극한 중종은 조광조를 의심하나, 나뭇잎의 글씨는 궁녀가 과일즙을 발라놓은 자리를 개미들이 파먹은 것에 불과한 것이다. 말하자면 음모이다... 중종은 조광조, 김식, 김구 등 사림파를 투옥시킨다. 나아가 의심 많은 왕 중종은 조광조에게 사약을 내린다. 풍운의 개혁 정치가 조광조는 이렇게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 이것이 이른바 '기묘(己卯)사화'이고 사약을 마실 당시 조광조는 38세의 젊은 나이였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사림의 집권과 동서 분당>

아직 조선 시대 '당쟁'이 시작되기 전이다. '당쟁', 즉 권력을 중심으로 '정파'를 만들어 수행하는 '정치투쟁'은 '사림파'가 조선의 정치를 장악한 이후인 선조대부터 이야기다.

고려말, 권문세족에 대항한 '신진사대부'는 민본적 이상사회 실현을 위한 성리학 이념으로 무장하고 사회 '개혁'을 중심으로 두 정파를 형성하는데, 하나는 정도전의 급진적 '역성혁명파'이고, 다른 하나는 정몽주의 온건적 '고려개혁파'였다. 
전자는 조선을 건국하고 100년의 기득권 기간을 거쳐 보수적 '훈구파'가 되었고, 후자는 현실정치에서 배제된 채 고향으로 돌아가 후학을 양성하며 진보적 '사림파'를 형성한다. 이후 출사한 사림파 선비들은 기득권 훈구파와 투쟁하며 연산군대에는 '폐비 윤씨 사건' 등을 둘러싸고 두 차례의 '사화(무오, 갑자)'를 겪고 패배하는데 '사화'는 '선비들이 화를 당하는 사건'이다. 그것도 대규모 숙청이다. 이후 사림파가 집권하기까지 두 번의 '사화(기묘, 을사)'가 더 반복되는데, 세 번째 '기묘사화'의 주인공이 바로 정암 조광조이다.

연산군을 폐하고 반정을 일으킨 훈구파 대신 3인방 공신(박원종, 유순정, 성희안)이 죽은 후 중종은 '개혁'을 명목으로 공신 세력 견제를 위해 개혁적 사림파 조광조를 천거받는데, 중종 10년(1515년)에 천거받은 조광조는 그 해 문과에 응시하여 원칙적 '도학정치'를 설파한 '책문'으로 급제한다.
급진적 '정치 개혁'을 추진한 조광조는 가짜 공신을 없애는 '위훈삭제'와 이전 사화로 희생된 스승 김굉필과 더 거슬러 정몽주의 성균관 문묘종사에 올리는 일을 무리하게 추진하다가 결국 중종과 뜻이 맞지 않아 사사당하고 만다.
개혁의 명분과 이념은 시대에 따라 다르므로 그 한계는 이해해야 하지만, '적폐 세력'의 씨를 말릴 힘이 없음에도 비타협적 '정치투쟁'만 한 결과 '기묘사화'를 초래하고 말았던 것이다.
정도전이 그랬고, 왕안석이 그랬으며, 로베스피에르와 트로츠키도 같은 길을 갔으니 '실패한 개혁가'의 한 표상이고, 당시는 잊혀졌으되 현재의 역사에서는 그래서 더 기억된다.
이들의 공통점은, 지극히 원칙적이었고 협잡하지 않았으며 실력이 부족해 쓰러질 지언정 적에게 굴복하지 않은 점이다.
<중종실록>은 조광조 개혁 4년을 아래와 같이 정의하고 있다.

"조광조들이 일을 행할 때 탄핵과 논박을 크게 하여 조정의 재상들이 주현을 범할 수 없었고, 주현의 관리들도 역시 각기 스스로를 삼가니 백성들 사이에 침어의 괴로움이 없어지고 조정에서도 또한 뇌물을 쓰는 사람이 없어졌다. 그런데 사류가 화를 입음에 이르러 염절(청렴과 절제)이 따라서 무너지니 조정은 재물에 때가 끼고 군현도 그 바람을 타서 이를 데가 없게 되었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중종실록, 15년 10월>


일제시대 '식민사관'은 조선인들을 모이기만 하면 '붕당'을 만들어 싸우는 하급 민족이라 폄하했다. 그 증거 중 하나가 사대부들의 '사화'와 '당쟁'이었다.
물론, 조선의 '송자'로 불라면서 서인 노론의 '일당독재'를 구축하고 장기집권을 획책하다가 강력한 왕권을 추구하던 숙종에 의해 사약을 받은 우암 송시열 같은 인물만 보면 그럴 수도 있겠으나, 재야 역사학자 이덕일은 당시의 '다당제'라 할 수 있는 '당쟁'을 통해 기득권을 견제하고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음을 설파한다.
조선 '당쟁사'의 '문제적 인물' 송시열을 비판하고 그 역사를 제대로 조명하기 위해 쓴 책이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1997)이다.


"이조정랑 자리를 놓고 싸움이 발생한 것은 선조 임금 때였다. 선조 7년(1574) 전랑으로 있던 오건이 다른 자리로 가면서 김효원을 자신의 후임으로 이조정랑에 추천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김효원이 이조정랑이 되는 것을 반대하고 나선 인물이 있었다. 바로 심의겸이었다."
-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조선의 '이조정랑'은 '3사' 관리 추천권을 지닌 자리인데, '3사'는 사헌부(감찰), 사간원(언론), 홍문관(학술정책) 등의 임무로 '도학정치'를 추구하는 사림파에게는 중요한 직책이었으니, 이 자리의 추천권을 두고 첫 '분당'이 이루어진다.
김효원은 한양 동쪽에 살아 '동인', 심의겸은 서쪽에 있어 '서인'이 되는데, 이후 상대당을 몰아내고 처단 수위의 강경-온건에 따라 '동인'은 다시 '남인'과 '북인'으로, '북인'이 광해군과 함께 패배한 뒤에 인조반정으로 집권한 '서인'의 장기집권이 시작되었고, 장례복식 등의 쓰잘데기 없는 '예송논쟁' 등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최후의 승자 '노론'은 다시 강경파인 '벽파'가 끝까지 살아남아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아니 아마도 지금까지 기득권을 누린다. 
이덕일이 보기에 현재 우리나라 '적폐'와 '수구보수'의 근원을 찾아 올라가다 보면 어쩌면, '송자' 우암 송시열을 만날 수도 있는 것이다.


"김육은 효종에게 '삼남에는 부호가 많습니다. 이 법의 시행을 부호들이 좋아하지 않습니다. 국가에서 영을 시행하는데 있어서 마땅히 소민들의 바람을 따라야 합니다. 어찌 부호들을 꺼려서 백성들에게 편리한 법을 시행하지 않아서야 되겠습니까'라며 확대 실시를 주장했으나 양반 지주들의 반대에 부딪힌 효종은 확대 실시를 주저했다. 그러자 김육은, '대동법은 지금 모든 조례를 올렸으니, 전하께서 옳다고 여기시면 행하시고 불가하면 신을 죄주소서'라고 배수진을 쳤다."
- [성공한 개혁, 실패항 개혁], 이덕일, <100년 동안의 조세개혁, '대동법'>

조선 시대 '성공한 개혁'은 단연 '대동법'이다. 공납의 폐해를 없애고 토지에 따라 쌀로 세금을 내는 제도로 '근대국가'의 기틀이 되고 다수 민중들에게도 공평한 조세제도로 당시 지배계급인 대지주에게만 불리한 법이었다. 
당연히 지주와 관료, '토호열신'들의 격렬한 저항으로 전국 확대에만 100년이 걸렸고 그 중심에 김육이라는 '서인' 정치가가 있다.
잠곡 김육은 왜란으로 부모를 잃고, 호란으로 출사 기회를 잃기도 하고 성균관에서는 상소운동 등의 '학생운동'도 주도했다는데, 본인의 자리와 기득권에 연연하지 않고 결국 숙종대에 대동법이 전국 확대되도록 만든 장본인이다. 또한 김육의 새로운 역법과 상평통보 주조 등의 경제관은 조선 후기 실학에도 영향을 주었다고 한다.
대동법 시행 과정에서도 '서인'은 '한당'과 '산당'으로 분열하는데, 김육은 '한당'의 지도자였고 '산당'의 우두머리는 송시열이었다.
대동법은 광해군대에 경기도, 효종대 충청도, 숙종대에 전국 확대된 바, 효종이 호서지역 민심을 묻자, 대동법 반대파 송시열 조차도 "편리하게 여기는 자가 많으니 좋은 법"이라고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도도한 '시대정신'이었다.
역사학자 이덕일은 '개혁'은 바로 이러한 '시대정신'을 반영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소득 있는 곳에 과세있다"는 대원칙 아래
소득과 자산에 따라 공정하게 세금을 부과하고 민중의 '보편복지'를 위해 평등하게 분배하는 '시대정신'은 대동법의 조선이나 현재의 대한민국이나 보편적인 것 아닐는지.

다수 민중을 위한 '보편복지'의 '시대정신'을 놓지 않는 한, '개혁'이든 '혁명'이든 사회 변혁의 시도는 '실패'하지 않는다.

***

1. [한국사로 읽는 성공한 개혁, 실패한 개혁], 이덕일, <마리서사>, 2005.
2.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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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낭 - 상
풍몽룡 지음, 이원길 옮김 / 신원문화사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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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謀略)'은 나이든 자의 '지낭(智囊)'인가
- [모략(謀略)], 차이위치우 외, 김영수 편역, <들녘>, 1996.



"대지약우(大智若愚). [노자]를 보면 '가장 떳떳한 사람은 마치 겸손한 것 같고, 가장 재주 있는 사람은 마치 졸렬한 것 같고,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은 마치 말더듬이 같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장자]에서도 노자의 말을 끌어다 '위대한 기교는 졸렬하게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다... 송나라 때 소식(소동파)은 벼슬길에 오르는 사람을 위한 축하의 글에서 '위대한 용기는 겁을 먹은 것 같고, 위대한 지혜는 어리석은 것 같다...'고 말했다. 본래 지모가 뛰어난 사람은 일부러 멍청하게 보이려 한다. 이 모략은 마음 속에 품은 원대한 포부를 감추고 특정한 정치, 군사적 의도를 실현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지혜로우면서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고, 할 수 있으면서도 못하는 것처럼 꾸며 상대를 속이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 [모략(謀略], <정치모략 -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모략(謀略)'이라 하면 보통 위 인용문과 같이 여겨진다.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속임수' 같은 것. [손자병법] <시계편>에는 "병(兵)이란 궤도(詭道)"라고 하는데, 군사작전은 다름아닌 '속임수'라는 의미다.
유방이 항우가 초대한 '홍문연'에서 굽신거리고, 조조의 휘하에 의탁하던 시절 유비가 텃밭이나 가꾸다가 "천하 영웅은 그대와 나 둘 뿐"이라는 조조의 말에 크게 놀라는 척 하며 나중에 삼국을 정립하는 과정 따위가 그렇다.


"'모략'은 대단히 친숙하면서도 신비한 단어다. 수천년 동안 이 단어는 인류의 사회적 실천, 사유의 발전과 발걸음을 함께 해 왔다... 파란만장한 인류 발전사는 모략의 창조사이자 실천사로, 시공을 초월해서 인류 지혜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인류 사유의 긴 흐름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인간은 실천 속에서 점차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다듬어 각종 '기모묘계(奇謀妙計)'를 창조해 냈다. 뒷사람들은 앞사람의 사유 성과를 몸소 실천하고 운용하여 앞사람들이 남긴 모략의 이론과 실천을 총결했다. 인류의 '모략사유'에 대한 연구와 총결은 지금까지 멈춰본 적이 없다.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지혜의 창고' 속을 구경하다 보면 모략이 놀랍게도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중요한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음모'건 '양모'건 간에... 뛰어난 모략은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 [모략(謀略], <'모략총서'를 펴내며>

중국의 군사학자 차이위치우를 필두로 한 일련의 학자들이 1992년에 수천년 인류 사유의 발전 사례로서 [모략론], [모략고], [모략가]의 '모략 3부작'을 기획해서 집필했고, 그 중 [모략고]를 우리나라에서 편역한 [모략] '3부작'은 '정치', '통치', '외교', '언변', '간사', '경제', '군사' 분야별 정리하여 각종 고사와 고전의 문장, 사례 등을 총망라한다.
물론, 인류 사유의 발전 과정에서 '음모'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과정이다. 인류 '지혜의 보고'로서 '모략'은 '양모(좋은 꾀)'와 '음모(나쁜 꾀)'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끊임없이 모순되고 대립하며 변화발전함으로써 후대로 이러지며, 이러한 인류 사유와 지혜, 철학의 발전이 거대하게 이루어진다. 
'모략'은 인류 사상사의 '빅데이터'인 것이다.


화원위엔이란 중문학 박사는 2003년 이러한 '모략'들을 [책략(策略)]과 [권력(勸力)]이라는 나름의 분류법으로 재편했는데, [책략]은 '모책', '심책', '정책', '기책', '술책', '방책' 등으로, [권력]은 '권모', '용권', '제권', '분권' 등 세부항목으로 나눠 역사 속 인물들의 고사를 소개한다. 역시 중문학자인 자오촨둥은 앞서 1999년에 춘추전국의 '백가쟁명'과 통일왕조의 '궁정논변', 소수민족 분열기와 집권기의 '격변기'의 분류법으로 [쟁경] 같은 책을 출간했다. 이 모든 테마가 다름아닌 '모략론'인 것이다.


"... 진정한 큰 지혜는 기실 '무심(無心)'이다. '무심'이란 기존의 그 어떤 원칙이나 경험 그리고 사고방식에 국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무심'의) 지혜를 지혜 중의 상등 지혜인 '상상지혜(上上知慧)'라고 하는데, 이런 상상지혜는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오로지 그와 유사한 지혜로운 일들을 많이 알거나 경험해야 현실적인 문제들에 봉착하여 그런 지혜들을 유효하게 키울 수가 있다."
- 풍몽룡, [지낭(智囊)], <상등의 지혜 - 서언>, 1626.

춘추전국시대를 소설화한 [동주열국지]로 유명한 명말청초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풍몽룡은 명나라 희종대에 역사 속 인물의 고사와 이에 대한 저자의 '평어(논평)'을 붙이는 형식으로 [지낭(智囊)]을 편찬했고 이 책은 당대 지배계급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 혁명가 마오쩌뚱도 대장정 시기에도 늘 가지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고 하는데, 과연 마오의 저작 중 수많은 중국 역사 사례의 원천이 풍몽룡의 [지낭]일 수도 있다.
또한, 풍몽룡의 [지낭]은 중국 '모략론'의 시초이기도 하겠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 도와 마음이 성실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나뉘는 것입니다... 정치원리를 잘 아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근본에 속하는 일과 말단에 속하는 일을 구별해서, 먼저 근본을 바로잡습니다... '근본'이라는 것은... 바로 도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고, 마음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성실하게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거는 도 밖에 없으며, 도는 본성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본성이 없는 것은 없으니, 도는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 [책문(策文) -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김태완, <5장. 조광조의 대책>

조선 중기 '개혁가' 정암 조광조가 1515년(중종 10년) 알성시에 제출한 '책문'의 내용이다.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이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개혁 세력'의 포섭이 필요했고 심지굳은 '도학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등용했으나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당'처럼 기득권과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된 조광조는 중종의 과거시험 마지막 질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가 다르지 않다"는 취지의 대책문을 제출한다.
조광조의 '책문' 또한 상당한 원리원칙을 토대로 한 인류 사유의 총결으로서 '모략'이며, 그 핵심은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공자의 '도학정치'이다. 


중국은 수천년의 문자역사를 통해 아시아의 '노인'으로 살아왔다. 우리의 요동과 한반도 역사도 그와 같지만 중국과 같은 기록이 없어 이 '아시아 노인'의 고사를 많이 인용해 왔다.
중국인들은 '모략'을 수천년 '역사의 지혜'로 정리하면서 전수해 왔고, 문자기록에 뒤진 우리는 그들의 '지혜주머니(지낭)'에서 수많은 '대책'을 뒤지고 있다. 조광조의 '대책' 또한 그렇다.

궁금해 진다.
과연, '모략(謀略)'은 나이든 자의 '지낭(智囊)'인 것인가.

***

1. [모략(謀略)], 차이위치우 외, 김영수 편역, <들녘>, 1996.
2. [책략(策略)], 화원위엔, 박미애 옮김, <한스미디어>, 2005.
3. [권력(勸力)], 화원위엔, 정광훈 옮김, <한스미디어>, 2005.
4. [쟁경(爭經)], 자오촨둥, 노만수 옮김, <민음사>, 2013.
5. [지낭(智囊)](1626), 풍몽룡, 이원길 옮김, <신원문화사>, 2004.
6. [책문(策文)], 김태완, <소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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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을 움직이는 힘 정치모략 들녘 모략 총서
차이위치우 외 34인 지음, 김영수 옮김 / 들녘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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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략(謀略)'은 나이든 자의 '지낭(智囊)'인가
- [모략(謀略)], 차이위치우 외, 김영수 편역, <들녘>, 1996.



"대지약우(大智若愚). [노자]를 보면 '가장 떳떳한 사람은 마치 겸손한 것 같고, 가장 재주 있는 사람은 마치 졸렬한 것 같고, 가장 말 잘하는 사람은 마치 말더듬이 같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장자]에서도 노자의 말을 끌어다 '위대한 기교는 졸렬하게 보인다'는 말을 하고 있다... 송나라 때 소식(소동파)은 벼슬길에 오르는 사람을 위한 축하의 글에서 '위대한 용기는 겁을 먹은 것 같고, 위대한 지혜는 어리석은 것 같다...'고 말했다. 본래 지모가 뛰어난 사람은 일부러 멍청하게 보이려 한다. 이 모략은 마음 속에 품은 원대한 포부를 감추고 특정한 정치, 군사적 의도를 실현시키려 할 때 사용하는 것으로, 지혜로우면서도 겉으로는 어리석게 보이고, 할 수 있으면서도 못하는 것처럼 꾸며 상대를 속이고 주도권을 장악하는 것이다."
- [모략(謀略], <정치모략 - 큰 지혜는 어리석은 것처럼 보인다>

'모략(謀略)'이라 하면 보통 위 인용문과 같이 여겨진다. 상대를 속이고 이용하여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는 '속임수' 같은 것. [손자병법] <시계편>에는 "병(兵)이란 궤도(詭道)"라고 하는데, 군사작전은 다름아닌 '속임수'라는 의미다.
유방이 항우가 초대한 '홍문연'에서 굽신거리고, 조조의 휘하에 의탁하던 시절 유비가 텃밭이나 가꾸다가 "천하 영웅은 그대와 나 둘 뿐"이라는 조조의 말에 크게 놀라는 척 하며 나중에 삼국을 정립하는 과정 따위가 그렇다.


"'모략'은 대단히 친숙하면서도 신비한 단어다. 수천년 동안 이 단어는 인류의 사회적 실천, 사유의 발전과 발걸음을 함께 해 왔다... 파란만장한 인류 발전사는 모략의 창조사이자 실천사로, 시공을 초월해서 인류 지혜의 불꽃을 태우고 있다... 인류 사유의 긴 흐름은 한 번도 끊긴 적이 없다. 인간은 실천 속에서 점차 자신의 사유를 발전시키고 완전하게 다듬어 각종 '기모묘계(奇謀妙計)'를 창조해 냈다. 뒷사람들은 앞사람의 사유 성과를 몸소 실천하고 운용하여 앞사람들이 남긴 모략의 이론과 실천을 총결했다. 인류의 '모략사유'에 대한 연구와 총결은 지금까지 멈춰본 적이 없다. 옛사람들이 남겨놓은 '지혜의 창고' 속을 구경하다 보면 모략이 놀랍게도 한 번도 끊이지 않고 이어져 왔다는 중요한 특성을 발견하게 된다... '음모'건 '양모'건 간에... 뛰어난 모략은 아주 질긴 생명력을 갖고 있다."
- [모략(謀略], <'모략총서'를 펴내며>

중국의 군사학자 차이위치우를 필두로 한 일련의 학자들이 1992년에 수천년 인류 사유의 발전 사례로서 [모략론], [모략고], [모략가]의 '모략 3부작'을 기획해서 집필했고, 그 중 [모략고]를 우리나라에서 편역한 [모략] '3부작'은 '정치', '통치', '외교', '언변', '간사', '경제', '군사' 분야별 정리하여 각종 고사와 고전의 문장, 사례 등을 총망라한다.
물론, 인류 사유의 발전 과정에서 '음모'도 있다. 그러나 이는 과정이다. 인류 '지혜의 보고'로서 '모략'은 '양모(좋은 꾀)'와 '음모(나쁜 꾀)'의 '변증법적' 발전을 통해 끊임없이 모순되고 대립하며 변화발전함으로써 후대로 이러지며, 이러한 인류 사유와 지혜, 철학의 발전이 거대하게 이루어진다. 
'모략'은 인류 사상사의 '빅데이터'인 것이다.


화원위엔이란 중문학 박사는 2003년 이러한 '모략'들을 [책략(策略)]과 [권력(勸力)]이라는 나름의 분류법으로 재편했는데, [책략]은 '모책', '심책', '정책', '기책', '술책', '방책' 등으로, [권력]은 '권모', '용권', '제권', '분권' 등 세부항목으로 나눠 역사 속 인물들의 고사를 소개한다. 역시 중문학자인 자오촨둥은 앞서 1999년에 춘추전국의 '백가쟁명'과 통일왕조의 '궁정논변', 소수민족 분열기와 집권기의 '격변기'의 분류법으로 [쟁경] 같은 책을 출간했다. 이 모든 테마가 다름아닌 '모략론'인 것이다.


"... 진정한 큰 지혜는 기실 '무심(無心)'이다. '무심'이란 기존의 그 어떤 원칙이나 경험 그리고 사고방식에 국한되지 않는 것을 말한다... 이런 ('무심'의) 지혜를 지혜 중의 상등 지혜인 '상상지혜(上上知慧)'라고 하는데, 이런 상상지혜는 배워서 되는 일이 아니다. 오로지 그와 유사한 지혜로운 일들을 많이 알거나 경험해야 현실적인 문제들에 봉착하여 그런 지혜들을 유효하게 키울 수가 있다."
- 풍몽룡, [지낭(智囊)], <상등의 지혜 - 서언>, 1626.

춘추전국시대를 소설화한 [동주열국지]로 유명한 명말청초의 학자이자 관료였던 풍몽룡은 명나라 희종대에 역사 속 인물의 고사와 이에 대한 저자의 '평어(논평)'을 붙이는 형식으로 [지낭(智囊)]을 편찬했고 이 책은 당대 지배계급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고 한다. 중국공산당 혁명가 마오쩌뚱도 대장정 시기에도 늘 가지고 다니며 읽고 또 읽었다고 하는데, 과연 마오의 저작 중 수많은 중국 역사 사례의 원천이 풍몽룡의 [지낭]일 수도 있다.
또한, 풍몽룡의 [지낭]은 중국 '모략론'의 시초이기도 하겠다.


"저는 다음과 같이 대답합니다... 내 도와 마음이 성실한가 그렇지 않은가에 따라, 다스려짐과 어지러움이 나뉘는 것입니다... 정치원리를 잘 아는 사람은 반드시 사전에 근본에 속하는 일과 말단에 속하는 일을 구별해서, 먼저 근본을 바로잡습니다... '근본'이라는 것은... 바로 도의 실현을 정치의 목표로 삼고, 마음을 정치의 근본으로 삼아, 성실하게 도를 행하는 것입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근거는 도 밖에 없으며, 도는 본성을 따르는 것일 뿐입니다. 본성이 없는 것은 없으니, 도는 어디에나 있는 것입니다."
- [책문(策文) - 시대의 물음에 답하다], 김태완, <5장. 조광조의 대책>

조선 중기 '개혁가' 정암 조광조가 1515년(중종 10년) 알성시에 제출한 '책문'의 내용이다. 반정으로 집권한 중종이 기득권을 견제하기 위해 '개혁 세력'의 포섭이 필요했고 심지굳은 '도학정치'를 표방한 조광조를 등용했으나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당'처럼 기득권과의 타협을 거부하면서 기묘사화의 희생자가 된 조광조는 중종의 과거시험 마지막 질문에 "옛날이나 지금이나 도가 다르지 않다"는 취지의 대책문을 제출한다.
조광조의 '책문' 또한 상당한 원리원칙을 토대로 한 인류 사유의 총결으로서 '모략'이며, 그 핵심은 '이상사회' 건설을 위한 공자의 '도학정치'이다. 


중국은 수천년의 문자역사를 통해 아시아의 '노인'으로 살아왔다. 우리의 요동과 한반도 역사도 그와 같지만 중국과 같은 기록이 없어 이 '아시아 노인'의 고사를 많이 인용해 왔다.
중국인들은 '모략'을 수천년 '역사의 지혜'로 정리하면서 전수해 왔고, 문자기록에 뒤진 우리는 그들의 '지혜주머니(지낭)'에서 수많은 '대책'을 뒤지고 있다. 조광조의 '대책' 또한 그렇다.

궁금해 진다.
과연, '모략(謀略)'은 나이든 자의 '지낭(智囊)'인 것인가.

***

1. [모략(謀略)], 차이위치우 외, 김영수 편역, <들녘>, 1996.
2. [책략(策略)], 화원위엔, 박미애 옮김, <한스미디어>, 2005.
3. [권력(勸力)], 화원위엔, 정광훈 옮김, <한스미디어>, 2005.
4. [쟁경(爭經)], 자오촨둥, 노만수 옮김, <민음사>, 2013.
5. [지낭(智囊)](1626), 풍몽룡, 이원길 옮김, <신원문화사>, 2004.
6. [책문(策文)], 김태완, <소나무>,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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