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티 오이디푸스 - 자본주의와 분열증 현대사상의 모험 1
질 들뢰즈 & 펠릭스 가타리 지음, 김재인 옮김 / 민음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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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본의 '물신성' 속 '욕망하는 기계'들
-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상품형태의 신비성은, 상품형태가 인간 자신의 노동의 사회적 성격을 노동생산물 자체의 '물적 성격(물건들의 사회적인 자연적 속성)'으로 보이게 하며, 따라서 총노동에 대한 생산자들의 사회적 관계를 그들 외부에 존재하는 관계, 즉 '물건'들의 사회적 관계로 보이게 한다는 사실에 있을 뿐이다... 인간의 눈에는 '물건들 사이의 관계'라는 환상적인 형태로 나타나지만 그것은 사실상 '인간들 사이의 특정한 사회적 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이것을 나는 '물신숭배'라고 부른다."
- 칼 마르크스, [자본론] 1권, <자본의 물신적 성격과 비밀>, 1867.

자본주의 사회는 생산수단을 사유화한 자본가가 가진 것은 노동력 밖에 없는 노동자들을 고용하여, 그들의 '노동의 (사용)가치'가 아닌 '상품'으로서 '노동의 교환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인 '임금'을 주는 생산관계를 그 경제적 토대로 한다. 여기서 '지불되지 않는 노동(부불노동)'은 '잉여가치'가 되고 자본으로 축적되며, 이러한 과정은 "스스로 자기증식하는 자본의 자기운동"이라는 헤겔식 표현으로 마르크스의 [자본론]에 서술된다.
'잉여가치'가 발생하는 자본의 '자기증식운동'의 과정이 노동 '착취'며, 자본 축적의 본질은 생산수단의 '독점'인 바, 이것이 자본주의 본질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이러한 생산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현상하면서 그 본질인 '인적 관계'를 은폐하는데, 마르크스는 이것을 '물신성(Fetishism)'으로 표현한다.

'기계'라는 프랑스 현대철학의 구조주의식 표현은, 말 그대로의 '기계'가 아닌 '은유'인데, 위와 같이 각 역사적 특정 단계의 사회적 '생산관계'에서 '자기운동'에 의해 가동되는 하나의 거대한 '구조'를 말한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 조차 자본주의를 '주체'도 없이 돌아가는 '구조'로 보는데, 고도로 발전한 복잡한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나온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질 들뢰즈는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구조주의 '주변의 괴상한 철학자'로 알려져 있다. 그가 좌파 정신분석의 펠릭스 가타리와 함께 작업한 [앙띠오이디푸스]는 이와 같은 자본주의 생산관계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인간들을 '욕망하는 기계들'이라 표현하는데, 난해하지만, 거대한 '기계'와 연결된 장치로서 '부품'들이기는 하나 '욕망'이라는 본질이 있다.
들뢰즈와 가타리는 프로이트 정신분석의 영향을 받았으되, 사회적 '생산관계'가 아닌 개인적 '가족관계'로 한정된 프로이트의 '무의식-초자아(id)'는 거부한다. 그러므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개념에 반대한다는 선언이 [앙띠-오이디푸스(Anti-Oedipe)]이다.


"오이디푸스가 자본주의 체계 속에서 탄생하는 것은 첫째 차원의 사회적 심상들이 둘째 차원의 가족적 삼상들에 일치하는 데서이다... 오이디푸스는... 돈-자본의 탈규준화한 흐름들을 타고 도래한다... 오이디푸스 개념은 자본주의 '기계'의 상상적인 오이디푸스의 개념이 됨으로써만 그 온전한 모습을 드러내고 현실화한다...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실로 세계사의 결과이거니와, 이것은 자본주의가 이미 세계사의 결과라고 하는 독특한 의미에서이다."
- 가타리/들뢰즈, [앙띠오이디푸스], <결국은 오이디푸스>, 1972.

스핑크스의 퀴즈를 풀고 왕을 죽인 후 왕비를 차지한 그리스 시대 오이디푸스가 결국 본인이 죽인 왕이 자신의 아버지이고 본인이 겁탈한 왕비가 자신의 어머니임을 알고는 '정신분열'에 빠진 이야기. 프로이트는 '아버지-어머니-나'의 '가족적 삼각관계' 속에서 '오이디푸스'라는 '나'를 두고 '성적 억압'과 '정신분열'을 다루는데, 들뢰즈와 가타리는 이 '오이디푸스' 개념은 개인적 '가족관계'가 아닌 자본주의적 '사회관계'를 통해 현실화된다고 한다. 
[앙띠오이디푸스]의 '자기비판점'은' "가족에 포개는 일 밑에 무의식의 사회적 공급들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개인적 환상 밑에 집단의 환상들의 본성을 발견하는 것" 혹은, "환영이 심상의 심상이기를 그치는 점까지 환영을 밀어붙여, 환영이 숨기면서 포장하고 있는 추상적인 형상들, 즉 '분열들-흐름들'을 찾아내는 것"인데, 사회적 '오이디푸스'인 '정신분열자' 분석의 과제는 개인적(가족적) 오이디푸스라는 "표상의 극장을 '욕망하는 생산'의 질서 속에 다시 옮겨놓는 것"이다.
'오이디푸스'는 프로이트에 의해 개인적이고 가족적으로 발명된 것이 아니라, 자본주의 사회 구조 속에, 그 특정 '생산관계'의 '질서' 속에 "이미-주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역시, 프랑스 '구조주의' 철학의 영향이다.


"'욕망'은 생산의 질서에 속하며, 모든 생산은 욕망하는 것인 동시에 사회적이다... 리카도가 표상 가능한 모든 가치의 원리로서 '양적 노동(추상노동)'을 발견함으로써 정치적 혹은 사회적 경제학(정치경제학)의 기초를 세운 것과 마찬가지로, 프로이트는 '욕망'의 대상들과 목표들의 표상 전체의 원리로서 '양적 리비도'를 발견함으로써 '욕망'하는 경제학의 기초를 세우고 있다... 리카도가 '단적으로 노동 자체'를, 또한 표상을 실제로 넘어서서 넘쳐흐르는 생산의 영역을 최초로 찾아낸 사람이듯이, 프로이트는 '단적으로 욕망 자체'를 찾아낸 사람이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정신분석과 자본주의>, 1972.

마르크스주의에서 소비에트 러시아혁명까지 '마르크스-레닌주의'는 세계체제 변혁이라는 '거대담론'을 고민하고 자본주의 '국가'를 전복하는 '혁명'에 주력한다. 그러나, [앙띠오이디푸스]에 의하면, "레닌주의의 이 '절단'은 사회주의 자체에 국가자본주의가 되살아나는 것을 막지 못했다."
따라서, 사회관계 속 개인들의 '욕망'이 부각된다. 사람들 개인의 '미시담론'이 해결되지 않으면, 사회체제와 정치권력의 정복이라는 '거시담론'이 해결되어도 미흡하다는 것인데, 계급 전반을 지배하는 자본주의적 '물신성(물신숭배)'의 문제인 것이다.
[앙띠오이디푸스]는 "욕망하는 기계들은 사회적 기계로부터 나오며, 욕망하는 기계들 없는 사회적 기계 또한 없다"고 한다.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 세 가지 원천'(레닌)은 철학에서 독일의 관념론(칸트, 헤겔), 정치경제학에서 영국의 정치경제학(아담 스미스, 데이비드 리카도), 사회주의에서 프랑스의 공상적 사회주의라고 하는데, 마르크스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리카도의 '노동가치론'에 대한 비판이듯, 들뢰즈와 가타리의 '반-오이디푸스론'은 프로이트의 '관념론적 오이디푸스'에 대한 비판이라는 것이다.


이제, '정신분열적' 난해한 이 책의 결론은 자본주의 사회의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열자들을 어떻게 보는가의 문제이다.

"혁명가는 더러운 관을 깨부수고, 홍수를 통과시키고, 흐름을 풀어놓고, 분열을 다시 절단한다. 정신분열자는 혁명가가 아니지만, 정신분열증적 과정은 '혁명의 잠재력'이다... 그러므로 정신분석자-분석의... 마지막 명제는 사회적인 리비도 공급의 두 극을 구별한다고 하는 것이다. 그 하나는 반동적이고 파시즘화하는 편집병적인 극이요, 다른 하나는 정신분열적인 극이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정신분열자-분석의 적극적 임무>, 1972.

자본주의적 '물신성' 속에서, 가족관계에 머무는 관념론적 '오이디푸스'는 '편집증'의 형태로 '반동화'되고 '파시즘화'되는 반면, '욕망하는 기계들'을 긍정하는 유물론적 '오이디푸스들'은 '정신분열'은 겪지만 '혁명의 잠재력'이라는 것이 이 난해한 저서의 결론이다.
즉, '욕망(리비도)'을 억압하는 '사회적 기계'를 전복하는 '잠재력'을 '욕망하는 기계들'의 '오이디푸스적 정신분열'에서 찾아낸다.

다만, [앙띠오이디푸스]는 오해를 피하기 위해 세 가지를 적고 있다.
첫째, 예술과 과학만이 혁명의 잠재력을 가지고 있다. 
둘째, 하부구조(경제적 토대) 자체 속에 근거를 두는 '계급'의 중요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다. 
셋째, '혁명가'가 '정신분열자'이거나 그 역으로 생각하지 않는다. '편집증'이 반동적 파시스트적이라는 '극단적' 의미로 '정신분열증'이 혁명적이라는 것이며, 그 전제는 위 두 가지일 것이다.

자본주의적 '오이디푸스'의 한 극단이 '파시즘적 편집증'이라면, 다른 극단은 '혁명적 정신분열증'이라는 결론인데, [앙띠오이디푸스]라는 책 자체가 '정신분열'적인 이유 아니겠는가.


"'욕망' 자체, 욕망의 위치의 문제가 제기... 즉, 욕망의 극단적인 두 극 간에, '욕망하는 기계들'과 기술적인 '사회기계들' 간의 내재적 관계의 문제... 이 두 극의 한쪽에서는 욕망이 '파시스트적인 편집병적' 조직체들을 공급하고, 다른 한 쪽에서는 '정신분열' 기질의 '혁명적인' 흐름들을 공급한다."
- 들뢰즈/가타리, [앙띠오이디푸스], <부록>, 1972.

***

- [앙띠오이디푸스](1972), 질 들뢰즈/펠릭스 가타리, 최명관 옮김, <민음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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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듀링론 - 오이겐 류링씨의 과학혁명, 개정판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민석 옮김 / 새길아카데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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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운동은 진정한 '철학'의 '상속자'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모든 철학, 특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근본문제는 '사유'와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사유'가 차지하는 위치의 문제, 중세시대의 스콜라철학에서도 매우 커다란 역할을 했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정신'과 '자연' 가운데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첨예화된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히 존재해 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진다."
-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1888.

칼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마르크스 사후 그의 '악필' 초고들을 편집하여 [자본론] 2권과 3권을 출간하였으며, 유럽 사회민주주의 연대체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청년 시절 마르크스를 만나 [독일이데올로기 초고](1844)와 [공산당선언](1848)을 공동 집필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다.
그는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 본격적 축적으로 인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목도했고, 전세계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경제주의'의 오명도 받고 있다. 결국, 만년의 엥겔스는 그 제자 칼 카우츠키가 그랬듯, '과학적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견하면서 사상적 여로를 마치는데, 그의 중간 시기는 온갖 '사이비'에 맞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한 '철학'적 투쟁의 시간이었다.

1888년 만년의 엥겔스는 칸트로 시작하여 헤겔로 완성된 '독일고전철학(사변철학-관념철학)'은 포이어바흐라는 반쪽짜리 '유물론자'를 거쳐 진정한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담지자인 독일노동계급에게 "상속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져 투쟁한 '철학의 역사'를 정리하고 '존재'보다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관념론'이 객관적 사회경제체제의 토대 위에서 '존재'가 '정신'보다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에 의해 대체되고 "상속"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엥겔스가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로 결론지을 수 있었던 강력한 근거는 19세기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전이었다.


"'잉여가치'의 발견... 부불노동을 전유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이로 인해 완성된 노동자 착취의 기본형태라는 것, 자본가가 가령 노동자의 노동력을,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시장에서 갖고 있는 충분한 가치 그대로 구입하였을 경우에도 그는 지불한 대가 이상의 가치를 노동자에게서 회수한다는 것, 그리고 이 '잉여가치'가 결국에는 가치총액이 되는 바, 유산자계급의 수중에 부단히 축적되는 대자본의 출처는 바로 여기('잉여가치')에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 즉 '유물론적 역사관'과 '잉여가치'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야말로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것들이 발견됨으로써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과학'을 그 모든 개별들과 그것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 F. Engels, [반뒤링론], <1장 개관>, 1878.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으로 '잉여가치'와 '유물론적 역사관' 두 가지를 든다.

'노동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노동의 교환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가격)'만을 임금으로 지불한 자본가가 지불하지 않는 '노동의 가치'인 '부불노동'으로 '잉여가치'를 남기는데, 이 과정이 바로 '착취'다.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 과정이며, 새로운 사회에서는 철폐되어야 할 것인데, 자본주의에서 '불법적'인 것은 '착취'가 아니라 '수탈'이다(김규항, [혁명노트]). '착취'는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교환가치(가격)'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 자본주의 본질로 현상하며, '수탈'은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과 억압적 지배에서 보인 '강화된 불법착취'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도식화'되었는데, 인류의 사회역사에는 '역사적 유물론', 그 외 자연 전체에 대한 사유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보면 되는 바, 결국 양자의 공통지점은 '유물론'이라는 '철학'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뒤집어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가 '사이비 유물론자'임을 '11개 테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은 '진정한 유물론'과 '해석'이 아닌 '변혁'의 철학이었다.
엥겔스는 1878년에 당시 '사이비' 사회주의자이자 '강단 좌파'인 오이겐 뒤링이라는 인물의 주장들을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분야로 나누어 조목조목 인신공격과 각종 역설(또는 '욕설')을 섞어 비판한다.
특히, 1부 '철학'의 영역에서는 당시 따로 집필 중이었을 [자연변증법](1873~1883)의 자료들을 가지고 비판한 듯 한데, [자연변증법]은 19세기 당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발전을 토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이 객관적 자연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는 일종의 '필연의 증명' 작업이었다. 
[반뒤링론]에서 엥겔스는 '자연철학'으로서 수학(미적분), 우주발생론, 물리학, 화학, 유기체(생물학), 그를 기반으로 파생되는 '도덕'과 '법', 그리고 '양질전환'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변증법' 등의 영역에서의 무지막지한 비판으로 '오이겐 뒤링씨'를 깔아 뭉개버리고 있다.

엥겔스의 [반뒤링론]은 마르크스의 푸르동(공상적 사회주의자) 비판([철학의 빈곤])의 '논쟁 저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그 영역은 '온 우주'를 망라하는 바,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호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저작이다. 
이러한 '논쟁을 목표로 쓴 저작'의 전통은 1908년 '유물론'의 외피를 쓴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를 비슷한 방식으로 비판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국가'라는 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불상용적인 대립으로 분열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대립, 즉 경제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이 무익한 투쟁에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면 외관상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 즉 충돌을 완화시켜 사회를 '질서'의 한계 내에 유지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나, 그 위에 올라서서 사회와는 더욱더 멀어져 가는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 F. Engels,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1884.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원천,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원시 씨족사회를 연구하던 루이스 모건의 [고대사회](1877)라는 저서를 바탕으로 씨족에서 부족, '원시공동체'에서 생산력 발전의 과정 속 '잉여생산'과 '사유재산'의 축적, '계급사회'의 등장과 그 결정체인 '국가'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 고전적 '국가론'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으로 이어진다.


[자연변증법]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의 거대한 영역에서, '사이비 사회주의자' 뒤링을 잠시 비판한 [반뒤링론], 씨족사회에서 '국가'의 기원까지 추적한 '역사적 유물론'을 거쳐 만년의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해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인 노동계급에게 '고전적 관념론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은 다름아닌 [자연변증법]이라는 방대한 연구, 그 '빅 히스토리'를 위한 '메모'였다.

"... 변증법적 자연관이 모든 자연철학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만들었듯이 이러한 견해는 역사의 영역에서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어느 곳에서든 우리 두뇌로부터 상호연관을 발명해 내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속에서 상호연관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자연의 역사로부터 추방된 '철학'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순수한 사유의 영역, 즉 사유과정 자체의 법칙에 관한 이론인 '논리학'과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은 노동의 발전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새로운 경향은 처음부터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으며... 독일 노동계급운동은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이다."
-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1888.

엥겔스에 의하면, 헤겔은 [법철학]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했는데 '현실'을 '절대이성'화하는 '보수성'이 있었던 한편으로, 그 다음 명제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이라면서 '필연'의 변화에 '이성'을 포함시켜 '진보성'의 맹아를 품고 있다. 
포이어바흐는 자연철학에서는 헤겔을 뒤집었으나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해 '철학'에서는 '인류의 사랑'만을 발견했다. 
결국, '독일고전철학'이라는 '관념론' 일체는 다수 노동계급의 각성과 함께 '종말'을 고하면서, 노동계급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으로 "상속"받는다.

***

1. [반뒤링론(Anti-During)](1878), F. Engels,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2.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F. Engels.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3.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4.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V. I. Lenin,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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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트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강유원 옮김 / 이론과실천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노동계급운동은 진정한 '철학'의 '상속자'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모든 철학, 특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근본문제는 '사유'와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사유'가 차지하는 위치의 문제, 중세시대의 스콜라철학에서도 매우 커다란 역할을 했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정신'과 '자연' 가운데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첨예화된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히 존재해 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진다."
-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1888.

칼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마르크스 사후 그의 '악필' 초고들을 편집하여 [자본론] 2권과 3권을 출간하였으며, 유럽 사회민주주의 연대체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청년 시절 마르크스를 만나 [독일이데올로기 초고](1844)와 [공산당선언](1848)을 공동 집필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다.
그는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 본격적 축적으로 인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목도했고, 전세계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경제주의'의 오명도 받고 있다. 결국, 만년의 엥겔스는 그 제자 칼 카우츠키가 그랬듯, '과학적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견하면서 사상적 여로를 마치는데, 그의 중간 시기는 온갖 '사이비'에 맞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한 '철학'적 투쟁의 시간이었다.

1888년 만년의 엥겔스는 칸트로 시작하여 헤겔로 완성된 '독일고전철학(사변철학-관념철학)'은 포이어바흐라는 반쪽짜리 '유물론자'를 거쳐 진정한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담지자인 독일노동계급에게 "상속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져 투쟁한 '철학의 역사'를 정리하고 '존재'보다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관념론'이 객관적 사회경제체제의 토대 위에서 '존재'가 '정신'보다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에 의해 대체되고 "상속"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엥겔스가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로 결론지을 수 있었던 강력한 근거는 19세기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전이었다.


"'잉여가치'의 발견... 부불노동을 전유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이로 인해 완성된 노동자 착취의 기본형태라는 것, 자본가가 가령 노동자의 노동력을,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시장에서 갖고 있는 충분한 가치 그대로 구입하였을 경우에도 그는 지불한 대가 이상의 가치를 노동자에게서 회수한다는 것, 그리고 이 '잉여가치'가 결국에는 가치총액이 되는 바, 유산자계급의 수중에 부단히 축적되는 대자본의 출처는 바로 여기('잉여가치')에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 즉 '유물론적 역사관'과 '잉여가치'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야말로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것들이 발견됨으로써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과학'을 그 모든 개별들과 그것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 F. Engels, [반뒤링론], <1장 개관>, 1878.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으로 '잉여가치'와 '유물론적 역사관' 두 가지를 든다.

'노동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노동의 교환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가격)'만을 임금으로 지불한 자본가가 지불하지 않는 '노동의 가치'인 '부불노동'으로 '잉여가치'를 남기는데, 이 과정이 바로 '착취'다.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 과정이며, 새로운 사회에서는 철폐되어야 할 것인데, 자본주의에서 '불법적'인 것은 '착취'가 아니라 '수탈'이다(김규항, [혁명노트]). '착취'는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교환가치(가격)'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 자본주의 본질로 현상하며, '수탈'은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과 억압적 지배에서 보인 '강화된 불법착취'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도식화'되었는데, 인류의 사회역사에는 '역사적 유물론', 그 외 자연 전체에 대한 사유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보면 되는 바, 결국 양자의 공통지점은 '유물론'이라는 '철학'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뒤집어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가 '사이비 유물론자'임을 '11개 테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은 '진정한 유물론'과 '해석'이 아닌 '변혁'의 철학이었다.
엥겔스는 1878년에 당시 '사이비' 사회주의자이자 '강단 좌파'인 오이겐 뒤링이라는 인물의 주장들을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분야로 나누어 조목조목 인신공격과 각종 역설(또는 '욕설')을 섞어 비판한다.
특히, 1부 '철학'의 영역에서는 당시 따로 집필 중이었을 [자연변증법](1873~1883)의 자료들을 가지고 비판한 듯 한데, [자연변증법]은 19세기 당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발전을 토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이 객관적 자연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는 일종의 '필연의 증명' 작업이었다. 
[반뒤링론]에서 엥겔스는 '자연철학'으로서 수학(미적분), 우주발생론, 물리학, 화학, 유기체(생물학), 그를 기반으로 파생되는 '도덕'과 '법', 그리고 '양질전환'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변증법' 등의 영역에서의 무지막지한 비판으로 '오이겐 뒤링씨'를 깔아 뭉개버리고 있다.

엥겔스의 [반뒤링론]은 마르크스의 푸르동(공상적 사회주의자) 비판([철학의 빈곤])의 '논쟁 저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그 영역은 '온 우주'를 망라하는 바,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호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저작이다. 
이러한 '논쟁을 목표로 쓴 저작'의 전통은 1908년 '유물론'의 외피를 쓴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를 비슷한 방식으로 비판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국가'라는 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불상용적인 대립으로 분열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대립, 즉 경제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이 무익한 투쟁에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면 외관상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 즉 충돌을 완화시켜 사회를 '질서'의 한계 내에 유지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나, 그 위에 올라서서 사회와는 더욱더 멀어져 가는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 F. Engels,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1884.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원천,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원시 씨족사회를 연구하던 루이스 모건의 [고대사회](1877)라는 저서를 바탕으로 씨족에서 부족, '원시공동체'에서 생산력 발전의 과정 속 '잉여생산'과 '사유재산'의 축적, '계급사회'의 등장과 그 결정체인 '국가'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 고전적 '국가론'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으로 이어진다.


[자연변증법]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의 거대한 영역에서, '사이비 사회주의자' 뒤링을 잠시 비판한 [반뒤링론], 씨족사회에서 '국가'의 기원까지 추적한 '역사적 유물론'을 거쳐 만년의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해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인 노동계급에게 '고전적 관념론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은 다름아닌 [자연변증법]이라는 방대한 연구, 그 '빅 히스토리'를 위한 '메모'였다.

"... 변증법적 자연관이 모든 자연철학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만들었듯이 이러한 견해는 역사의 영역에서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어느 곳에서든 우리 두뇌로부터 상호연관을 발명해 내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속에서 상호연관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자연의 역사로부터 추방된 '철학'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순수한 사유의 영역, 즉 사유과정 자체의 법칙에 관한 이론인 '논리학'과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은 노동의 발전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새로운 경향은 처음부터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으며... 독일 노동계급운동은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이다."
-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1888.

엥겔스에 의하면, 헤겔은 [법철학]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했는데 '현실'을 '절대이성'화하는 '보수성'이 있었던 한편으로, 그 다음 명제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이라면서 '필연'의 변화에 '이성'을 포함시켜 '진보성'의 맹아를 품고 있다. 
포이어바흐는 자연철학에서는 헤겔을 뒤집었으나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해 '철학'에서는 '인류의 사랑'만을 발견했다. 
결국, '독일고전철학'이라는 '관념론' 일체는 다수 노동계급의 각성과 함께 '종말'을 고하면서, 노동계급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으로 "상속"받는다.

새로운 세상을 꿈꾼다면,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을 끊임없이 갱신하고 현대화해야 한다.

***

1. [반뒤링론(Anti-During)](1878), F. Engels,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2.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F. Engels.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3.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4.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V. I. Lenin,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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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 사유재산, 국가의 기원 팡세총서 2
프리드리히 엥겔스 지음, 김대웅 옮김 / 두레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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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계급운동은 진정한 '철학'의 '상속자'이다"
-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



"모든 철학, 특히 현대 철학의 중요한 근본문제는 '사유'와 '존재'에 관한 문제이다... '존재'와의 관계 속에서 '사유'가 차지하는 위치의 문제, 중세시대의 스콜라철학에서도 매우 커다란 역할을 했던 문제는 바로 이것이다. '정신'과 '자연' 가운데 어느 것이 '일차적'인 것인가? 이 문제는 교회와의 관계에서 이렇게 첨예화된다. 신이 세계를 창조했는가, 아니면 세계는 영원히 존재해 왔는가? 
이 문제에 대한 답에 따라 철학자들은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진다."
-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 1888.

칼 마르크스의 동지이자 마르크스 사후 그의 '악필' 초고들을 편집하여 [자본론] 2권과 3권을 출간하였으며, 유럽 사회민주주의 연대체인 '제2인터내셔널'의 지도자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청년 시절 마르크스를 만나 [독일이데올로기 초고](1844)와 [공산당선언](1848)을 공동 집필한 '과학적 사회주의'의 창시자다.
그는 마르크스 사후 자본주의 본격적 축적으로 인한 생산력의 비약적 발전을 목도했고, 전세계 노동계급의 단결과 투쟁으로 자본주의 체제가 '필연적'으로 무너질 것이라는 '경제주의'의 오명도 받고 있다. 결국, 만년의 엥겔스는 그 제자 칼 카우츠키가 그랬듯, '과학적 사회주의'의 승리를 예견하면서 사상적 여로를 마치는데, 그의 중간 시기는 온갖 '사이비'에 맞서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을 옹호한 '철학'적 투쟁의 시간이었다.

1888년 만년의 엥겔스는 칸트로 시작하여 헤겔로 완성된 '독일고전철학(사변철학-관념철학)'은 포이어바흐라는 반쪽짜리 '유물론자'를 거쳐 진정한 철학인 '변증법적 유물론'의 담지자인 독일노동계급에게 "상속된다"고 주장한다.
"두 가지 커다란 진영"으로 갈라져 투쟁한 '철학의 역사'를 정리하고 '존재'보다 '정신'이 일차적이라는 '관념론'이 객관적 사회경제체제의 토대 위에서 '존재'가 '정신'보다 일차적이라는 '유물론'에 의해 대체되고 "상속"되는 과정을 추적한다.
엥겔스가 '관념론'에 대한 '유물론'의 '승리'로 결론지을 수 있었던 강력한 근거는 19세기 당시의 자연과학의 발전이었다.


"'잉여가치'의 발견... 부불노동을 전유하는 것이 자본주의적 생산양식 및 이로 인해 완성된 노동자 착취의 기본형태라는 것, 자본가가 가령 노동자의 노동력을, 그것이 상품으로서 상품시장에서 갖고 있는 충분한 가치 그대로 구입하였을 경우에도 그는 지불한 대가 이상의 가치를 노동자에게서 회수한다는 것, 그리고 이 '잉여가치'가 결국에는 가치총액이 되는 바, 유산자계급의 수중에 부단히 축적되는 대자본의 출처는 바로 여기('잉여가치')에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이상의 두 가지 위대한 발견, 즉 '유물론적 역사관'과 '잉여가치'를 통한 자본주의적 생산의 비밀의 폭로야말로 마르크스의 공적이다. 이것들이 발견됨으로써 '사회주의'는 하나의 '과학'이 되었다. 지금은 무엇보다도 먼저 이 '과학'을 그 모든 개별들과 그것의 총체적 연관 속에서 더욱 완성시키는 것이 문제이다."
- F. Engels, [반뒤링론], <1장 개관>, 1878.

엥겔스는 마르크스의 위대한 발견으로 '잉여가치'와 '유물론적 역사관' 두 가지를 든다.

'노동의 (사용)가치'가 아니라 '상품'으로서 '노동의 교환가치', 즉 '노동력의 가치(가격)'만을 임금으로 지불한 자본가가 지불하지 않는 '노동의 가치'인 '부불노동'으로 '잉여가치'를 남기는데, 이 과정이 바로 '착취'다. '착취'는 자본주의에서 '합법적' 과정이며, 새로운 사회에서는 철폐되어야 할 것인데, 자본주의에서 '불법적'인 것은 '착취'가 아니라 '수탈'이다(김규항, [혁명노트]). '착취'는 '노동의 가치'와 '노동력의 교환가치(가격)' 사이의 차이에서 발생한 자본주의 본질로 현상하며, '수탈'은 20세기 '제국주의' 국가들의 '식민지' 쟁탈전과 억압적 지배에서 보인 '강화된 불법착취'로 나타났다.

다음으로, '유물론적 역사관'은 후대 마르크스주의자들에 의해 '변증법적 유물론'과 '역사적 유물론'으로 '도식화'되었는데, 인류의 사회역사에는 '역사적 유물론', 그 외 자연 전체에 대한 사유는 '변증법적 유물론'이라고 보면 되는 바, 결국 양자의 공통지점은 '유물론'이라는 '철학'이다.
청년 마르크스는 헤겔의 변증법적 방법론을 뒤집어 유물론적으로 해석한 루드비히 포이어바흐가 '사이비 유물론자'임을 '11개 테제'로 남겼는데, 그 내용은 '진정한 유물론'과 '해석'이 아닌 '변혁'의 철학이었다.
엥겔스는 1878년에 당시 '사이비' 사회주의자이자 '강단 좌파'인 오이겐 뒤링이라는 인물의 주장들을 '철학', '정치경제학', '사회주의' 분야로 나누어 조목조목 인신공격과 각종 역설(또는 '욕설')을 섞어 비판한다.
특히, 1부 '철학'의 영역에서는 당시 따로 집필 중이었을 [자연변증법](1873~1883)의 자료들을 가지고 비판한 듯 한데, [자연변증법]은 19세기 당시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등의 발전을 토대로 '변증법적 유물론'이라는 '철학'이 객관적 자연 전체에 일관되게 적용된다는 일종의 '필연의 증명' 작업이었다. 
[반뒤링론]에서 엥겔스는 '자연철학'으로서 수학(미적분), 우주발생론, 물리학, 화학, 유기체(생물학), 그를 기반으로 파생되는 '도덕'과 '법', 그리고 '양질전환'과 '부정의 부정'으로서 '변증법' 등의 영역에서의 무지막지한 비판으로 '오이겐 뒤링씨'를 깔아 뭉개버리고 있다.

엥겔스의 [반뒤링론]은 마르크스의 푸르동(공상적 사회주의자) 비판([철학의 빈곤])의 '논쟁 저작'의 전통을 이으면서 그 영역은 '온 우주'를 망라하는 바, '변증법적 유물론'을 수호하려는 결연한 의지가 보이는 저작이다. 
이러한 '논쟁을 목표로 쓴 저작'의 전통은 1908년 '유물론'의 외피를 쓴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를 비슷한 방식으로 비판한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요컨대, '국가'라는 것은 결코 외부로부터 사회에 강요된 권력이 아니다... '국가'는 일정한 발전단계에 있는 사회의 산물이다. '국가'는 사회가 해결할 수 없는 자기 모순에 빠졌으며, 자기 힘으로는 벗어날 수 없는 불상용적인 대립으로 분열했다는 것을 고백한 것에 다름 아니다. 그런데 이 대립, 즉 경제적으로 서로 모순되는 이해관계를 가진 계급들이 무익한 투쟁에서 자신과 사회를 파멸시키지 못하도록 하려면 외관상 사회 위에 서 있는 권력, 즉 충돌을 완화시켜 사회를 '질서'의 한계 내에 유지시킬 권력이 필요하게 되었다. 사회로부터 발생했으나, 그 위에 올라서서 사회와는 더욱더 멀어져 가는 권력이 바로 '국가'이다."
- F. Engels,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 1884.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의 원천,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에서 엥겔스는 원시 씨족사회를 연구하던 루이스 모건의 [고대사회](1877)라는 저서를 바탕으로 씨족에서 부족, '원시공동체'에서 생산력 발전의 과정 속 '잉여생산'과 '사유재산'의 축적, '계급사회'의 등장과 그 결정체인 '국가'의 기원을 추적한다. 
이 고전적 '국가론'은 이후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주요한 이론적 근거가 되었고 레닌의 [국가와 혁명]으로 이어진다.


[자연변증법]이라는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의 거대한 영역에서, '사이비 사회주의자' 뒤링을 잠시 비판한 [반뒤링론], 씨족사회에서 '국가'의 기원까지 추적한 '역사적 유물론'을 거쳐 만년의 엥겔스는 '과학적 사회주의' 대중화를 위해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인 노동계급에게 '고전적 관념론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은 다름아닌 [자연변증법]이라는 방대한 연구, 그 '빅 히스토리'를 위한 '메모'였다.

"... 변증법적 자연관이 모든 자연철학을 불필요하고 불가능하게 만들었듯이 이러한 견해는 역사의 영역에서 '철학의 종말'을 고한다. 그것은 이제 더 이상 어느 곳에서든 우리 두뇌로부터 상호연관을 발명해 내는 문제가 아니라 사실 속에서 상호연관을 발견하는 문제이다. 자연의 역사로부터 추방된 '철학'에게 남아 있는 것은 오직 순수한 사유의 영역, 즉 사유과정 자체의 법칙에 관한 이론인 '논리학'과 '변증법'만이 있을 뿐이다...
사회의 역사 전체를 이해하는 관건은 노동의 발전사에 있다는 것을 인정한 새로운 경향은 처음부터 노동계급의 지지를 받기 시작했으며... 독일 노동계급운동은 독일고전철학의 '상속자'이다."
- F. Engels,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고전철학의 종말], 1888.

엥겔스에 의하면, 헤겔은 [법철학]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다"라고 했는데 '현실'을 '절대이성'화하는 '보수성'이 있었던 한편으로, 그 다음 명제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이라면서 '필연'의 변화에 '이성'을 포함시켜 '진보성'의 맹아를 품고 있다. 
포이어바흐는 자연철학에서는 헤겔을 뒤집었으나 헤겔의 '변증법'을 이해하지 못해 '철학'에서는 '인류의 사랑'만을 발견했다. 
결국, '독일고전철학'이라는 '관념론' 일체는 다수 노동계급의 각성과 함께 '종말'을 고하면서, 노동계급운동은 '변증법적 유물론' 철학으로 "상속"받는다.

***

1. [반뒤링론(Anti-During)](1878), F. Engels, 김민석 옮김, <새길>, 1987.
2.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F. Engels.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3.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4.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V. I. Lenin,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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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급 좌파 - 김규항 칼럼집
김규항 지음 / 야간비행 / 2001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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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혁명'은 '안단테'로!
-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연민은 자선을 낳고 분노는 싸움을 낳으며 다시 그 둘은 시스템을 바꾸지 않고는 자선도 싸움도 별 소용이 없다는 깨우침을 통해 '과학적 사회주의'가 된다. 말하자면 사회주의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이다. 현실 사회주의의 문제는 '정서가 생략된 과학'의 문제이기도 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로 인간의 존엄과 지성에 대한 모욕이며, 오늘 인류가 미래를 희망하는 일이란 바로 자본주의라는 괴물을 어떻게 극복하는가의 문제다... 대체 우리가 새로운 사회주의를 처음 시작할 자격을 갖지 않아야 할 어떤 이유라도 있는가. 과거의 실패가 짐스럽다면 사회주의가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임을 잊지 말고 느리게 '안단테'로 가면 된다. '안단테'라면. 우리가 혁명을 회피할 이유는 정말 적어진다. 안 그런가."
- 김규항, [B급 좌파], <혁명은 안단테로>

사회문화비평가이자 어린이 교양지 [고래가 그랬어] 발행인 김규항은 1998년부터 2001년까지 [씨네21]에 기고한 칼럼들을 모아 [B급 좌파]로 엮은 바 있다.
'386' 세대로 불렸던 지식인 엘리트들이 80년대에 군부독재에 저항하면서 '체제 변혁'을 고민했고 그 과정에서 마르크스주의를 열성적으로 수입하고 소개하다가 동구권 공산주의 진영의 몰락을 맞아 '사회주의' 자체의 문제로 규정하고 일제히 청산한 행태는 그의 주된 비판의 대상이다. 아마도 그 엘리트들은 스스로를 'A급 좌파'라 생각했겠지만, 김규항이 보기에는 "앙상한 사회주의자들"에 불과했다.
이론으로만 향유했을 뿐, 다수 노동인민대중의 '정서'를 재료로 하지 못했던 'A급'보다는 다수대중의 'B급'이 훨씬 혁명적이라는 사실을 증명한 역사는 무수히 많다.
"정서가 생략된 과학"으로서 "연민과 분노가 사라진 이론과 사상"은 결국 다수 인민에게 무섭고 살벌한 얼굴로 다가가곤 했는데, 이러한 'A급'들과 '스탈린주의'는 쌍둥이였다.


"변화는 '질문의 재개'로 시작한다. 예컨대 다들 '인공지능과 로봇의 시대를 맞아...'라 말할 때, '인공지능과 로봇이 인간에게 왜 필요한가? 인간이 그것들을 위해 존재하는가, 그것들이 인간을 위해 존재하는가?' 질문이다. 다들 '인간의 노동이 필요 없어지는 세상를 맞아...'라고 말할 때 '모든 인간은 노동할 권리가 있어야 하지 않는가? 줄어야 할 것은 일자리가 아니라 노동시간이 아닌가?' 질문이다... 또한 삶의 의미에 관한 '질문의 재개'다. '물신세계'에서 인간은 모든 '첫 질문'을 잊는다... '첫 질문의 재개'를 통해 개인은 시스템 속의 자신을 바라보게 된다."
- 김규항, [혁명노트], <113>, 2020.

거의 이십 년 정도 지나 'B급 좌파' 김규항은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다시 연구한 후 돌아왔다. 그 동안은 아마도 '사회주의자'에서 '자유주의자'로 전향하여 대중들에게 훈계질하던 '386'에서 어느덧 '486', '586'으로 이론적으로는 '진화'를 표방하나, 인간적으로 '퇴화'한 지식인 엘리트들과 지속적으로 투쟁해 왔을 것이다. 이제 전세계적으로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가 질곡에 빠진 2000년대 후반부터 아마도 1914년의 위기 상황에서 레닌이 '헤겔 철학'을 그 근본부터 연구하고 '철학노트'를 작성했듯이, 김규항은 마르크스 [자본론]을 더 철저히 파고들어 2020년에 [혁명노트]를 작성한 듯 하다.
'정서를 재료로 한 과학'에 의한 '안단테적 혁명'은 이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이라는 목표를 향해 끊임없이 이행되는 과정이다.

"'혁명'은 현재 사회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사회를 '건설'하는 일로만 이해되어왔다. 그렇게 건설된 건 고작 새로운 정부이거나 새로운 지배 시스템이다. 혁명은 건설이자 '이행'이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미래에 속한 사람이며 또한 새로운 사회의 담지자다. 투쟁하는 자유인의 삶과 생활양식에 선취된 새로운 사회의 조각들이 현재 사회에 균열을 만들며 새로운 사회로 이행해간다. 누군가 새로운 사회가 정말 가능한가 물을 때, 투쟁하는 자유인은 먼저 묻는다. '내 안에 새로운 사회가 있는가?'"
- 김규항, [혁명노트], <119>

비인간적 자본주의를 대체할 '새로운 세상'은 단 번에 오지 않는다. '투쟁하는 자유인'은 더 이상의 '노예'로서의 삶을 청산하고 스파르타쿠스처럼 주체적인 '자기해방'을 위해 싸우는 사람이며, 현재 시스템에서 볼 수 없는 '미래의 것'을 조금씩 선취하고 다시 이전으로 돌아갈 수 없는 불가역적 일상을 만들어간다. 
'내 안의 새로운 사회'를 꿈꾸는 '혁명'이 없다면, 지배계급은 아무것도 양보하지 않으며, 그 어떤 '개혁'도 없다.
북유럽 사회민주주의 복지국가의 '계급타협' 또한 '혁명'의 이상이 없었다면 불가능했다.


[혁명노트]는 '혁명' 외에 마르크스의 '계급투쟁'이라는 기본모순은 물론, '인간들간의 사회적 관계가 상품이라는 물적 관계로 표현'되는 '물신성'을 강조한다. 김규항에게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에서 가장 주목할 개념이 바로 '물신성(Fetishism)'이다.

"'물신성'은 피지배계급과 지배계급을 막론하고 사로잡혀 살아가는 '자본주의적 환상'이다. '물신성'은 자본주의 시스템의 원자인 상품에 실재한다. '상품 생산 사회'로서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물신성'은 지속하며, '물산성'이 지속하는 한 자본주의도 지속한다."
- 김규항, [혁명노트], <61>

마르크스 [자본론]은 '상품'이라는 '개별성'의 '자기운동'을 통해 자본주의 체제라는 '보편성'을 보여주는 헤겔식의 변증법적 서술방식에 따라 '자본주의'를 분석하는데, 인간의 '노동(력)' 조차도 '상품'이다. 그리하여 실제 '노동의 (사용)가치'는 은폐되고 '노동력의 교환가치'만이 사회적 관계를 맺으며, 이로 인해 사회적 '인적 관계' 일체가 '물적 관계'로 대체되는데, 이것이 마르크스가 [자본론]에서 말한 '물신성'의 단초다. 
마르크스는 '자본가계급'을 이미 '인격화된 자본'이라 정의한 바 있으나, 현대 자본주의는 마르크스 시대에는 볼 수 없는 현상, 즉 지배계급이 '자본가'가 아니라 '자본' 자체이며, 계급을 망라하여 시스템 내 모든 사람이 '물신성'에 사로잡혀 있다. 'A급 좌파' 조국의 '물신성'을 우리는 최근에 본 바 있다.


결국, '혁명'은 시스템의 전복이나 새로운 정부로의 대체로만 실현되는 것이 아니라, 체제에 대한 근본적인 '첫 질문을 재개'하는 '철학'의 복원과 함께 '물신성'을 극복하고 '노예'를 벗어나고자 하는 '투쟁하는 개인'들의 끊임없는 '자기해방'을 통해 선취되는 것이다.
체제가 인간을 '개조'하는 것이 아니라, '혁명'의 '이행 과정'에서 각성한 인간들에 의해 체제가 극복되는 것이다.

'혁명'은 '안단테'로, 투쟁하고 각성하는 개인들의 '연대'다.

***

1. [혁명노트], 김규항, <알마>, 2020.
2. [B급 좌파], 김규항, <야간비행>, 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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