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자병법 (양장) - 세상의 모든 전쟁을 위한 고전 글항아리 동양고전 시리즈 3
손자 지음, 김원중 옮김 / 글항아리 / 2011년 6월
평점 :
절판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이란 속이는 도(궤도:詭道)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용병을 하되 적에게는 용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먼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가까운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롭게 하면서 적을 꾀어내고 (내부를) 어지럽게 하여 적을 습격한다. (적이) 충실하면 적을 방비하고, (적이) 강하면 적을 피하고, (적이) 분노하면 그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적이) 비겁하면 적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적이) 편안해하면 그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적이) 친하게 지내면 그들을 이간질하라.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라. 이것은 병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니, 정말로 사전에 누설되어서는 안된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孫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합려에게 기용된 군사가이자 정치가 손무(孫武)의 사상을 사마천이 춘추시대 제자백가 중 하나로 지칭한 학파로서 흔히 '병가(兵家)'로 분류된다. '병법서'는 군사전략전술에 관한 책으로 주나라 태공망 여상의 [육도삼략], 전국시대 명장 오기의 [오자병법] 등도 유명하다고 하나 '손자'가 정리한 13편의 [손자병법]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손무는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6세기경 패자가 되려던 신흥강소국 오나라의 합려에게 기용되기 전에 이미 [손자병법] 13편을 완성했다고 하나, 후세에 죽간으로 발견된 이 병법서가 손무의 것인지 아니면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제나라에서 활약한 그의 손자 손빈(孫臏)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할아버지 손무의 저작을 손자인 손빈이 더 증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손자병법]의 무대는 '전쟁'만이 생존전략이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춘추시대는 그나마 명분과 예의가 남아있어 전면전도 없었고 패전국은 승전국의 신하가 되어 예로써 섬기는 시대였다. 그러나 공자와 손무가 공존하던 시기는 그러한 예악 따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오월쟁패로 월나라 구천이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를 이겼을 때는 바야흐로 승전국이 패전국 전체를 멸망시켜 버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시작이었다.
이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주류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 서쪽 변방 진(秦)나라의 '법가(法家)'와 동쪽의 강국 제(齊)나라의 '병가(兵家)', 이들을 조합하여 전국7웅을 넘나들며 유세하던 '술가(術家)' 등이 된다.

[손자병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에 관한 군사전략"이라 하겠다. 즉, '전쟁'에 관한 책이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며 그래도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싸우기 전에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계책이다.
그리하여 손자가 제1편의 <계(計)>편에서 규정하는 '전쟁'은 다름아닌 '속임수(궤도:詭道)'가 된다. 정직하게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가장 하책으로 그 방법 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전술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의 철학이자 가장 큰 '전략'은 '전쟁'이 아닌 '평화'이며, '속임수(詭)'는 불가피하게 '전쟁'에 임했을 때 사용하는 전술이다.
오랫동안 소인배들이 [손자병법]을 무조건 이기려고 사용하는 속임수의 경전으로 사용한 것은 '병가(兵家)'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평화'가 아닌 '전쟁'으로 규정하고 남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고 생각한 '술가(術家)'의 영향인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게 될 것이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세간에 알려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 또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원래 표현은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인 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인데, '승패(勝敗)'는 '전투'에 국한된 의미이고 '위태로움(태:殆)'이란 '전쟁'의 가능성 모두를 포함한다. 즉, '전쟁'은 물론 '평화'의 국면에서도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주관적, 객관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적 '인식론'을 담고 있는데, '승패(勝敗)'만을 강조한 것도 '술가'의 유산일 것이다.


"전쟁이란 다섯 가지에 따라 경영되어야 하고, (일곱 가지) 항목을 비교하여 그 정황을 탐색해야 한다. 첫째를 '도(道)'라고 하고 둘째를 '천(天)'이라고 하며, 셋째를 '지(地)'라고 하고 넷째를 '장(將)'이라고 하며, 다섯째를 '법(法)'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계책 비교...
(첫째), 군주 중에 누가 도를 지키는가?
(둘째), 장수 중에 누가 더 유능한가?
(셋째), 천시와 지리는 누가 얻었는가?
(넷째), 법령은 누가 잘 시행하는가?
(다섯째), 병력은 누가 더 강한가?
(여섯째),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훈련되어 있는가?
(일곱째), 상벌은 누가 분명한가?
나는 이런 것에 의거하여, 승패를 알 수 있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을 포함하고 나아가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에 관한 논의를 위해 [손자병법]의 <계편>에서는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데, 이른바 '5사7계(五事七計)'다.

'5사(五事)' 중 첫째 '도(道)'는 '올바른 길'이다. 죽음과 위험을 무릅쓰고 따를 수 있는 '도리'나 '정의', '명분'이다. 이로써 '정의의 전쟁'은 다수를 동원하는 명분이 된다. 둘째 '천(天)'은 '때'를 말하는데 '음양' 또는 계절적 요인 들이며, 셋째 '지(地)'는 지리적 요인, 넷째 '장(將)'은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 다섯째 '법(法)'은 전투에서 유용되는 규율이나 상벌의 엄격함을 의미한다. 손자는 이 '다섯 가지 일(五事)'을 "아는 자는 승리하지만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할 수 없다(계편)"고 한다.

'5사(五事)'가 큰 전략이라면, 실제 전투에서 활용되는 '7계(七計)'는 전술인 바, 이를 잘 살펴 "군대를 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니 그(오왕 합려)에게 남을 것(계편)"이라고 한다.

'5사7계(五事七計)'는 [손자병법]의 '전략전술론'이다.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에 지나지 않으나 기정의 변화는 남김없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기정'이 상생하는 것은 마치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능히 이것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손자병법(孫子兵法)], <세(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인데, '기(奇)'는 '변칙'이고 '정(正)'은 '원칙'이다. '기'와 '정'은 상호대립과 침투를 반복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어느 것이 우선인가 손자는 말하지 않으나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시 한다면 '기'보다 '정'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도'이자 '천'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만으로는 안된다. 변칙적인 '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이것이 '기'와 '정'이 상호 변환하며, '정'을 지키되 '기'로서 승리한다는 '기정호변(奇正互變)'과 '출기제승(出奇制勝)'이며, <세(勢)>편이 <허실(虛實)>편으로 이어지는 이유인데, '예상을 뒤엎는 공격'이나 '한 번 쓴 계책은 버리기' 등의 '변칙'적 전술 등이 <허실>편의 내용이다.
<허실>에 이어지는 <군쟁>, <구변>, <행군>, <지형>, <구지>, <화공>, <용간> 등은 앞의 <계>, <작전>, <모공>, <형>, <세> 등의 '전략론'에 이어지는 '전술론'이다.
'전투의 상환 판단'이나 '지형 활용법', '살기 위해 어려운 지형에 들어가기'나 '간첩 활용법' 등은 '전투'에 임하는 각개 '전술'들이다.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주아요(敵駐我擾) 
적피아타(敵避我打) 적퇴아추(敵退我追)"
- 마오쩌뚱, '16자 병법(전법)'

삼국시대 '난세의 영웅' 조조는 늘 전쟁터에서도 군막 안에서 책을 읽었다는데 [손자병법]을 최고의 병법서로 평가하고는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도 길고긴 내전 기간에 [손자병법]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적이 공격하면 후퇴하고 적이 머물면 소요를 일으키며,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추격한다"는 마오쩌뚱의 '16자 병법(전법)'은 [손자병법] '전술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 모두 '도'를 따르는 평화'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수행했던 정치가들이었다.


"옛날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적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능히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지만 적으로 하여금 (내가) 기필코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란 (미리)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형(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을 '술가'가 아닌 '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병법서는 '전쟁'을 다루되 '평화'를 지향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 즉 '올바름'이므로 '변칙'으로서 '기'는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수단이며,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말 것"이고, "싸움을 하기 전에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건다(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는 정신이다.

물론, 미리 계획만으로 물리적 승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싸움을 예방하며 역시 불가피한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에 임하되 단시간에 반드시 승리로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손자병법]은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는 병법서다.


"상책의 용병은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차선은 적의 외교관계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다음 정책은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아래 정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지만 전쟁은 하지 않고, 적의 성은 함락시키지만 공격은 하지 않으며, 적의 나라를 무너뜨리지만 질질 끌지는 않고, 반드시 (적을) 온전하게 하여 천하를 다투므로 군대는 무뎌지지 않으면서 '이익'은 정말로 온전해지니, 이것이야말로 지모로써 성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영수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가 말하는 '이익'이란 모두가 온전한 다수 민중들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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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병법 (리커버 특별판) - 시공을 초월한 전쟁론의 고전 명역고전 시리즈
손무 지음, 김원중 옮김 / 휴머니스트 / 2016년 9월
평점 :
품절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이란 속이는 도(궤도:詭道)이다. 따라서 능력이 있는데 능력이 없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용병을 하되 적에게는 용병하지 않는 것처럼 보이게 하며, 가까운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먼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하고, 먼 곳을 노리면서도 적에게는 가까운 곳을 노리는 것처럼 보이게 한다.
이롭게 하면서 적을 꾀어내고 (내부를) 어지럽게 하여 적을 습격한다. (적이) 충실하면 적을 방비하고, (적이) 강하면 적을 피하고, (적이) 분노하면 그들을 소란스럽게 하고, (적이) 비겁하면 적을 교만에 빠지게 하고, (적이) 편안해하면 그들을 수고롭게 만들고, (적이) 친하게 지내면 그들을 이간질하라. 그들이 방비하지 않는 곳을 공격하고 그들이 생각하지 못한 곳으로 출격하라. 이것은 병가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니, 정말로 사전에 누설되어서는 안된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孫子)는 중국 춘추시대 말기 오나라 합려에게 기용된 군사가이자 정치가 손무(孫武)의 사상을 사마천이 춘추시대 제자백가 중 하나로 지칭한 학파로서 흔히 '병가(兵家)'로 분류된다. '병법서'는 군사전략전술에 관한 책으로 주나라 태공망 여상의 [육도삼략], 전국시대 명장 오기의 [오자병법] 등도 유명하다고 하나 '손자'가 정리한 13편의 [손자병법]이 가장 잘 알려져 있다.
손무는 춘추시대 말기인 기원전 6세기경 패자가 되려던 신흥강소국 오나라의 합려에게 기용되기 전에 이미 [손자병법] 13편을 완성했다고 하나, 후세에 죽간으로 발견된 이 병법서가 손무의 것인지 아니면 기원전 4세기 전국시대 제나라에서 활약한 그의 손자 손빈(孫臏)의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아마도 할아버지 손무의 저작을 손자인 손빈이 더 증보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렇게 [손자병법]의 무대는 '전쟁'만이 생존전략이던 춘추전국시대였다. 
춘추시대는 그나마 명분과 예의가 남아있어 전면전도 없었고 패전국은 승전국의 신하가 되어 예로써 섬기는 시대였다. 그러나 공자와 손무가 공존하던 시기는 그러한 예악 따위는 무너지기 시작했고 오월쟁패로 월나라 구천이 오왕 합려의 아들 부차를 이겼을 때는 바야흐로 승전국이 패전국 전체를 멸망시켜 버리는 '전국시대(戰國時代)'의 시작이었다.
이제, '제자백가(諸子百家)'의 주류는 중국을 최초로 통일하게 되는 서쪽 변방 진(秦)나라의 '법가(法家)'와 동쪽의 강국 제(齊)나라의 '병가(兵家)', 이들을 조합하여 전국7웅을 넘나들며 유세하던 '술가(術家)' 등이 된다.

[손자병법]을 한 문장으로 정리한다면, "싸우지 않고 이기는 방법에 관한 군사전략"이라 하겠다. 즉, '전쟁'에 관한 책이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지향하며 그래도 싸워야 한다면 반드시 이겨야 하는데 싸우기 전에 먼저 이겨놓고 싸우는 계책이다.
그리하여 손자가 제1편의 <계(計)>편에서 규정하는 '전쟁'은 다름아닌 '속임수(궤도:詭道)'가 된다. 정직하게 정면승부를 하는 것은 가장 하책으로 그 방법 밖에 없을 때 어쩔 수 없이 쓰는 전술이다. 그러나 [손자병법]의 철학이자 가장 큰 '전략'은 '전쟁'이 아닌 '평화'이며, '속임수(詭)'는 불가피하게 '전쟁'에 임했을 때 사용하는 전술이다.
오랫동안 소인배들이 [손자병법]을 무조건 이기려고 사용하는 속임수의 경전으로 사용한 것은 '병가(兵家)'라기 보다는 모든 것을 '평화'가 아닌 '전쟁'으로 규정하고 남을 죽여야만 내가 산다고 생각한 '술가(術家)'의 영향인 것이다.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을 것이다. 적을 알지 못하고 나만 알면 한 번은 이기고 한 번은 지게 될 것이며, 적을 알지 못하고 나도 알지 못하면 싸울 때마다 반드시 위태롭게 될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세간에 알려진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패(百戰不敗)' 또는 '백전백승(百戰百勝)'의 원래 표현은 [손자병법]의 '지피지기(知彼知己)'면 '백전불태(百戰不殆)'인 바, '적을 알고 나를 알면 백 번 싸워도 위태롭지 않다'는 뜻인데, '승패(勝敗)'는 '전투'에 국한된 의미이고 '위태로움(태:殆)'이란 '전쟁'의 가능성 모두를 포함한다. 즉, '전쟁'은 물론 '평화'의 국면에서도 나 자신은 물론 상대방까지도 잘 파악해야 한다는 주관적, 객관적 인식의 중요성을 강조한 철학적 '인식론'을 담고 있는데, '승패(勝敗)'만을 강조한 것도 '술가'의 유산일 것이다.


"전쟁이란 다섯 가지에 따라 경영되어야 하고, (일곱 가지) 항목을 비교하여 그 정황을 탐색해야 한다. 첫째를 '도(道)'라고 하고 둘째를 '천(天)'이라고 하며, 셋째를 '지(地)'라고 하고 넷째를 '장(將)'이라고 하며, 다섯째를 '법(法)'이라고 한다...
(일곱 가지) 계책 비교...
(첫째), 군주 중에 누가 도를 지키는가?
(둘째), 장수 중에 누가 더 유능한가?
(셋째), 천시와 지리는 누가 얻었는가?
(넷째), 법령은 누가 잘 시행하는가?
(다섯째), 병력은 누가 더 강한가?
(여섯째), 병사들은 어느 쪽이 더 훈련되어 있는가?
(일곱째), 상벌은 누가 분명한가?
나는 이런 것에 의거하여, 승패를 알 수 있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계(計)>,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전쟁' 뿐만 아니라 그 가능성을 포함하고 나아가 '전쟁'을 예방하는 '평화'에 관한 논의를 위해 [손자병법]의 <계편>에서는 철학적 방향을 제시하는데, 이른바 '5사7계(五事七計)'다.

'5사(五事)' 중 첫째 '도(道)'는 '올바른 길'이다. 죽음과 위험을 무릅쓰고 따를 수 있는 '도리'나 '정의', '명분'이다. 이로써 '정의의 전쟁'은 다수를 동원하는 명분이 된다. 둘째 '천(天)'은 '때'를 말하는데 '음양' 또는 계절적 요인 들이며, 셋째 '지(地)'는 지리적 요인, 넷째 '장(將)'은 전투를 지휘하는 장수, 다섯째 '법(法)'은 전투에서 유용되는 규율이나 상벌의 엄격함을 의미한다. 손자는 이 '다섯 가지 일(五事)'을 "아는 자는 승리하지만 알지 못하는 자는 승리할 수 없다(계편)"고 한다.

'5사(五事)'가 큰 전략이라면, 실제 전투에서 활용되는 '7계(七計)'는 전술인 바, 이를 잘 살펴 "군대를 쓰면 반드시 승리하게 될 것이니 그(오왕 합려)에게 남을 것(계편)"이라고 한다.

'5사7계(五事七計)'는 [손자병법]의 '전략전술론'이다.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에 지나지 않으나 기정의 변화는 남김없이 헤아릴 수 없는 법이다. '기정'이 상생하는 것은 마치 순환하는 것이 끝이 없는 것과 같으니 누가 능히 이것을 다 헤아릴 수 있겠는가?"
- [손자병법(孫子兵法)], <세(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에서 '전쟁'의 '형세'는 '기정(奇正)'인데, '기(奇)'는 '변칙'이고 '정(正)'은 '원칙'이다. '기'와 '정'은 상호대립과 침투를 반복하는 '변증법'적 관계를 이룬다. 어느 것이 우선인가 손자는 말하지 않으나 '전쟁'보다 '평화'를 우선시 한다면 '기'보다 '정'이 더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그것이 '도'이자 '천'에 가깝지 않겠는가. 그러나 '전투'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올바른 '정'만으로는 안된다. 변칙적인 '기'를 잘 활용해야 한다. 
이것이 '기'와 '정'이 상호 변환하며, '정'을 지키되 '기'로서 승리한다는 '기정호변(奇正互變)'과 '출기제승(出奇制勝)'이며, <세(勢)>편이 <허실(虛實)>편으로 이어지는 이유인데, '예상을 뒤엎는 공격'이나 '한 번 쓴 계책은 버리기' 등의 '변칙'적 전술 등이 <허실>편의 내용이다.
<허실>에 이어지는 <군쟁>, <구변>, <행군>, <지형>, <구지>, <화공>, <용간> 등은 앞의 <계>, <작전>, <모공>, <형>, <세> 등의 '전략론'에 이어지는 '전술론'이다.
'전투의 상환 판단'이나 '지형 활용법', '살기 위해 어려운 지형에 들어가기'나 '간첩 활용법' 등은 '전투'에 임하는 각개 '전술'들이다. 

"적진아퇴(敵進我退) 적주아요(敵駐我擾) 
적피아타(敵避我打) 적퇴아추(敵退我追)"
- 마오쩌뚱, '16자 병법(전법)'

삼국시대 '난세의 영웅' 조조는 늘 전쟁터에서도 군막 안에서 책을 읽었다는데 [손자병법]을 최고의 병법서로 평가하고는 나름의 주석을 달았다고 한다. 중국의 혁명가 마오쩌뚱도 길고긴 내전 기간에 [손자병법]을 항상 지니고 다녔다고 하는데, "적이 공격하면 후퇴하고 적이 머물면 소요를 일으키며, 적이 피로하면 공격하고 적이 후퇴하면 추격한다"는 마오쩌뚱의 '16자 병법(전법)'은 [손자병법] '전술론'의 골자를 정리하고 있다.
이들 모두 '도'를 따르는 평화'를 위해 '정의'의 '전쟁'을 수행했던 정치가들이었다.


"옛날에 전쟁을 잘하는 자는 먼저 (적이) 승리할 수 없도록 만들고, 적으로부터 승리할 수 있기를 기다린다. (적이) 승리하지 못하는 것은 자신에게 달려 있으며 (내가) 승리할 수 있는 것은 적에게 달려 있다. 그러므로 전쟁을 잘하는 사람은 능히 (적이) 승리할 수 없게 만들지만 적으로 하여금 (내가) 기필코 승리할 수 있도록 만들 수는 없는 것이다. 따라서 승리란 (미리) 알 수는 있어도 만들 수는 없다고 하는 것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형(形)>,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병법]을 '술가'가 아닌 '병가'의 입장에서 본다면, 이 병법서는 '전쟁'을 다루되 '평화'를 지향한다.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도', 즉 '올바름'이므로 '변칙'으로서 '기'는 '올바름'을 지키기 위해 불가피하게 사용하는 수단이며, 그럼에도 '평화'를 위해 '전쟁'에서는 반드시 이겨야 한다. "이기지 못할 싸움은 하지 말 것"이고, "싸움을 하기 전에는 미리 이겨놓고 싸움을 건다(선승이후구전:先勝以後求戰)"는 정신이다.

물론, 미리 계획만으로 물리적 승리를 만들어낼 수는 없다. 미리 이길 수 있는 조건을 모두 갖추고 싸움을 예방하며 역시 불가피한 경우에 최후의 수단으로 전쟁에 임하되 단시간에 반드시 승리로서 피해를 최소화해야 한다.

[손자병법]은 '평화(平和)'를 위해 '전쟁(戰爭)'을 논(論)하는 병법서다.


"상책의 용병은 적의 계략을 공격하는 것이며 그 차선은 적의 외교관계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다음 정책은 군대를 공격하는 것이며 그 아래 정책은 성을 공격하는 것이다...
따라서 용병을 잘하는 자는 적의 군대를 굴복시키지만 전쟁은 하지 않고, 적의 성은 함락시키지만 공격은 하지 않으며, 적의 나라를 무너뜨리지만 질질 끌지는 않고, 반드시 (적을) 온전하게 하여 천하를 다투므로 군대는 무뎌지지 않으면서 '이익'은 정말로 온전해지니, 이것이야말로 지모로써 성을 공격하는 방법이다."
- [손자병법(孫子兵法)], <모공(謀攻)>, 손자, 김영수 옮김, <글항아리>, 2011.

손자가 말하는 '이익'이란 모두가 온전한 다수 민중들의 '평화'에 다름 아니다.


***

- [손자병법(孫子兵法)], 손자, 김원중 옮김, <글항아리>,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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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 통제의 승부사 사마의 - 자신을 이기는 자가 최후의 승자가 된다 삼국지 리더십 4
자오위핑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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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공명(孔明)'과 산 '중달(仲達)'의 '평상심(平常心)'
-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제갈량과 100여 일을 대치하다 때마침 제갈량이 병사하자 장수들이 군영에 불을 지르고 몰래 도망갔다. 백성들이 달려와 보고하자 사마의는 출병하여 그들을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인 양의가 군기를 돌려 북을 울리며 마치 사마의와 싸우려고 했다. 사마의가 몰린 적은 몰아붙이지 않아야 한다고 여겨 양의는 진을 유지하며 물러갔다. 며칠이 지나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영에 이르러 남은 물건들을 살피고 많은 서적과 군량를 노획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인하며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방현령 외, 7세기.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사곡도에서 나왔는데, 유마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으며, 무공현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남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항상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될까 근심하여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게 하여 장기간 주둔할 기반을 만들었다. 경작하는 자들은 위수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지냈는데, 백성들은 마음 놓고 편안히 지냈고, 군대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서로 대치한 지 100여 일이 지난 그해 8월, 제갈량이 병이 들어 군중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54세였다.
촉의 군대가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영과 보루, 거처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진수, 3세기.


"[한진춘추]에 이르길, 양의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사마의에게 달려와 고했고 사마의는 그들을 추격했다. 강유는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마치 사마의에게 향하는 것처럼 하자, 사마의는 곧 물러나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을 했다. 사마의가 퇴각하니 백성들은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라는 속언을 지었다."
- [삼국지(三國志) 주(註)], 배송지, 5세기.



제갈량(諸葛亮)은 자가 '공명(孔明)'이고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 유비가 형주 유표에게 의탁하던 시절에 기용한 지식인 참모다. 
'삼국지 영웅'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전자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 후 '머리'도, '세력'도 없이 두주먹 불끈 쥔 '의지'만으로 버티다가 몰락하기 직전의 시절이고, 후자는 '머리'를 갖추고 '비전'을 장착한 후 대업을 향해 한발씩 전진하던 시기인 것이다.
제갈량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주전>에서 '선주'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를 통해 본인이 유비에게 기용된 과정을 말하는데, 이것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출전이다. 조실부모하고 형주에서 초막살이를 하던 제갈량은 늘 본인을 제나라 관중과 연나라 악의에 비유하며 언젠가 큰 뜻을 펼칠 것이라 장담하고 다녔지만 주변으로부터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서서와 사마휘 등의 지인들을 통해 본인의 홍보를 부탁하고는 '삼국지 영웅' 중 가장 열세였던 유비가 위기에 빠진 것을 알고 유비 스스로 본인을 찾도록 계획한다. 그것도 앞의 두 차례 방문에서는 만나주지도 않고 세번째 방문에서야 마루에서 자는 척 하다가 만나서는 여유롭게 '천하삼분지계'의 '융중대'를 연출한다.
47세 유비도 인재에 목말랐지만, 27세 제갈량도 당시 나이대에는 내심 느긋하지는 못했을터,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다. 다만, 밖에서 큰 소리 쳐서 상대를 불러들인 후 안에서 속삭이는 전술을 썼다.
이후 제갈량은 손권의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조조의 위나라를 적벽대전에서 패퇴시켜 북위가 더 남하하지 못한 채 위-촉-오 삼국이 솥발처럼 '정족지세'를 이루는 '천하삼분지계'를 확립한다. 제갈량의 이 '융중대' 전략은 당시 오나라 책사였던 노숙도 주장했던 것으로 강대국 위나라에 대항하여 2인자 오나라와 약소국 촉한이 연합하여 위나라가 망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적이 남도록 하는 계략이었다. 제갈량은 촉한이 오나라로부터 형주를 빼앗겨 벽지로 더 몰리고 촉한황제 '선주' 유비가 죽은 후에도 오-촉 동맹을 유지하면서 6차례나 위나라 정벌을 위한 '북벌'을 수행하던 중 오장원에서 '떨어지는 별'이 된다.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실력은 뒷받침되지 않는데 '비전'과 '명분'이 우선된 점도 있으나, 외부적으로는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사마의때문일 수도 있다.

사마의(司馬懿)는 자가 중달(仲達)이며 제갈량보다 2살 많으나 18년을 더 살았다. 위-촉-오 '삼국'을 잠시 통일한 '사마(司馬)'씨의 진(晉)나라 '고조(高祖)'로 추존되었으므로 '정사' [삼국지] 기록에는 등장할 수 없었고,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도 조조, 유비, 관우, 장비 등의 '1세대'가 다 죽고 제갈량이 남은 후에야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연의]에서는 거의 '신(神)'적 존재로 그려지는 제갈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묘사되지만 위나라 조조(무제)-조비(문제)-조예(명제) 3대를 섬기면서 조용히 힘을 길러 손자 사마염에 이르러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자기 통제의 승부사'가 바로 사마의 중달이다.
[삼국연의] '허구'이기는 하나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전'에 속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제갈량과 정면대결을 피하다가 여인의 옷을 선물받기도 했으나 웃으며 넘어갔으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었을 때는 제갈량의 계략으로 의심하여 공격을 머뭇거리다가 퇴각하는 촉한군을 놓치기도 한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은 [삼국지]와 그 [주석], [진서]에서도 일치하는 기록으로 사실일 것인데,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명해 정리한 '정사'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에 의하면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을 달아나게 했다"는 당시 민중들의 비아냥에도 "나는 산 사람을 잘 알지 죽은 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역시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라는 난세에 생존을 넘어 '비전'을 제시하고 '대업'에 도전하던 제갈량과 사마의는 기본적으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구보다 잘났고 목소리를 높이려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인물들임은 기본일텐데, 두 사람의 대결과정에서는 상대적 차이점은 일단 보인다. 즉, 제갈량은 '촉한정통론'의 명분에 입각하여 조씨의 위나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후한을 재건한 광무제 유수처럼 '북벌'을 포기하지 않는 '비전'을 가지고 궁벽한 촉한을 그나마 수십년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사마의는 조씨 3대 정권을 보좌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필요하면 병으로 다 죽어가는 연기까지 하면서 꾸준히 '대업'을 준비한 결과 위나라 정권을 갈아엎고 촉한과 오나라까지 정벌하고는 삼국통일을 이루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까지 다졌다.
'한왕실 부흥'이라는 제갈량의 '비전'은 '실패'했고, '새왕조 개창'이라는 사마의의 '대업'은 '성공'한 차이점도 있겠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더 많다.
우선 내부 조직 관리에서 본인보다 '조직'이나 '국가'를 우선하면서 사사로운 감정과 개인적 욕망을 조절했다. 결국 제갈량은 '북벌'의 '비전'을 위해, 사마의는 '혁명'의 '대업'을 위해 겉으로는 그랬다. 그리하여 조직 내부의 어떠한 도전에도 흔들림없이 스스로의 중심을 잡았다.
제갈량은 군사에 실패한 아끼는 수하 마속을 죽이면서까지 '북벌'을 위한 내부결속을 다지는 '읍참마속'의 고사를 낳았고,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이자 왕족으로 실권자였던 조상과 대립하지 않고 병으로 물러나는 위장술 이면에 착실한 준비를 통해 자식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공통점은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비전'과 '대업'의 목표를 놓지 않는 '주체성(主體性)'과 '평상심(平常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으로 차이점 하나를 더 들자면, 제갈량은 '북벌'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사마의를 제거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사마의는 세간의 비웃음을 감수하면서도 제갈량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을 수도 있다. 위나라에서 촉한의 제갈량을 대적할 사람은 사마의 뿐이었기에 제갈량이 없으면 본인의 군사적 입지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을 것인데 실제로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는 '혁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은 '공명(孔明)'이 산 '중달(仲達)'에게 더욱 치밀하고 굳건한 '평상심(平常心)'을 남긴 것이다.


***

1.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2.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3.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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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제갈량 - 승부처는 사람에게서 나온다 삼국지 리더십 2
자오위핑 지음, 박찬철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1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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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은 '공명(孔明)'과 산 '중달(仲達)'의 '평상심(平常心)'
-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제갈량과 100여 일을 대치하다 때마침 제갈량이 병사하자 장수들이 군영에 불을 지르고 몰래 도망갔다. 백성들이 달려와 보고하자 사마의는 출병하여 그들을 추격했다. 제갈량의 장사인 양의가 군기를 돌려 북을 울리며 마치 사마의와 싸우려고 했다. 사마의가 몰린 적은 몰아붙이지 않아야 한다고 여겨 양의는 진을 유지하며 물러갔다. 며칠이 지나 사마의가 제갈량의 군영에 이르러 남은 물건들을 살피고 많은 서적과 군량를 노획했다. 사마의는 제갈량이 죽었음을 확인하며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당시 백성들은 이 일에 대해 노래를 지어 불렀다.
'죽은 공명이 산 중달을 달아나게 했다.'"
-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 방현령 외, 7세기.


"건흥 12년(234년) 봄, 제갈량은 전군을 인솔하여 사곡도에서 나왔는데, 유마로 군수물자를 운반하였으며, 무공현 오장원을 점거하고, 사마의와 위남에서 대치했다. 제갈량은 항상 식량이 계속 공급되지 않아 자기의 뜻을 펴지 못하게 될까 근심하여 병사를 나누어 둔전을 하게 하여 장기간 주둔할 기반을 만들었다. 경작하는 자들은 위수 가에 거주하는 백성들 사이에 섞여 지냈는데, 백성들은 마음 놓고 편안히 지냈고, 군대는 사사로움이 없었다. 서로 대치한 지 100여 일이 지난 그해 8월, 제갈량이 병이 들어 군중에서 사망했는데, 당시 54세였다.
촉의 군대가 퇴각하자 사마의는 제갈량의 군영과 보루, 거처를 둘러보고 말했다.
'천하의 기재구나!'"
- [삼국지(三國志)], <제갈량전(諸葛亮傳)>, 진수, 3세기.


"[한진춘추]에 이르길, 양의 등이 군을 정돈하고 출발하자 백성들이 사마의에게 달려와 고했고 사마의는 그들을 추격했다. 강유는 양의에게 명하여 군기를 반대로 하고 북을 울리도록 하여 마치 사마의에게 향하는 것처럼 하자, 사마의는 곧 물러나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이에 양의는 진형을 짠 채 물러나고 계곡으로 들어간 뒤 발상을 했다. 사마의가 퇴각하니 백성들은 '죽은 제갈(諸葛)이 살아 있는 중달(仲達)을 달아나게 했다'라는 속언을 지었다."
- [삼국지(三國志) 주(註)], 배송지, 5세기.



제갈량(諸葛亮)은 자가 '공명(孔明)'이고 중국 후한 말 삼국시대 촉한 유비가 형주 유표에게 의탁하던 시절에 기용한 지식인 참모다. 
'삼국지 영웅' 유비는 제갈량을 만나기 전과 후로 나뉘는데, 전자는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 관우, 장비와 '도원결의' 후 '머리'도, '세력'도 없이 두주먹 불끈 쥔 '의지'만으로 버티다가 몰락하기 직전의 시절이고, 후자는 '머리'를 갖추고 '비전'을 장착한 후 대업을 향해 한발씩 전진하던 시기인 것이다.
제갈량은 진수의 '정사' [삼국지], <후주전>에서 '선주' 유비의 아들인 '후주' 유선에게 올린 '출사표'를 통해 본인이 유비에게 기용된 과정을 말하는데, 이것이 '삼고초려(三顧草廬)'의 출전이다. 조실부모하고 형주에서 초막살이를 하던 제갈량은 늘 본인을 제나라 관중과 연나라 악의에 비유하며 언젠가 큰 뜻을 펼칠 것이라 장담하고 다녔지만 주변으로부터 별로 인정받지 못했다고 한다. 제갈량은 서서와 사마휘 등의 지인들을 통해 본인의 홍보를 부탁하고는 '삼국지 영웅' 중 가장 열세였던 유비가 위기에 빠진 것을 알고 유비 스스로 본인을 찾도록 계획한다. 그것도 앞의 두 차례 방문에서는 만나주지도 않고 세번째 방문에서야 마루에서 자는 척 하다가 만나서는 여유롭게 '천하삼분지계'의 '융중대'를 연출한다.
47세 유비도 인재에 목말랐지만, 27세 제갈량도 당시 나이대에는 내심 느긋하지는 못했을터, 그러나 겉으로는 태연하다. 다만, 밖에서 큰 소리 쳐서 상대를 불러들인 후 안에서 속삭이는 전술을 썼다.
이후 제갈량은 손권의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조조의 위나라를 적벽대전에서 패퇴시켜 북위가 더 남하하지 못한 채 위-촉-오 삼국이 솥발처럼 '정족지세'를 이루는 '천하삼분지계'를 확립한다. 제갈량의 이 '융중대' 전략은 당시 오나라 책사였던 노숙도 주장했던 것으로 강대국 위나라에 대항하여 2인자 오나라와 약소국 촉한이 연합하여 위나라가 망하면 상대적으로 약한 적이 남도록 하는 계략이었다. 제갈량은 촉한이 오나라로부터 형주를 빼앗겨 벽지로 더 몰리고 촉한황제 '선주' 유비가 죽은 후에도 오-촉 동맹을 유지하면서 6차례나 위나라 정벌을 위한 '북벌'을 수행하던 중 오장원에서 '떨어지는 별'이 된다.

제갈량의 '북벌'이 실패한 이유는 기본적으로 실력은 뒷받침되지 않는데 '비전'과 '명분'이 우선된 점도 있으나, 외부적으로는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 사마의때문일 수도 있다.

사마의(司馬懿)는 자가 중달(仲達)이며 제갈량보다 2살 많으나 18년을 더 살았다. 위-촉-오 '삼국'을 잠시 통일한 '사마(司馬)'씨의 진(晉)나라 '고조(高祖)'로 추존되었으므로 '정사' [삼국지] 기록에는 등장할 수 없었고, 나관중의 '삼국연의'에서도 조조, 유비, 관우, 장비 등의 '1세대'가 다 죽고 제갈량이 남은 후에야 등장하는 인물이다. [삼국연의]에서는 거의 '신(神)'적 존재로 그려지는 제갈량에 비해 상대적으로 열등하게 묘사되지만 위나라 조조(무제)-조비(문제)-조예(명제) 3대를 섬기면서 조용히 힘을 길러 손자 사마염에 이르러 '삼국통일'을 이루게 하는 '자기 통제의 승부사'가 바로 사마의 중달이다.
[삼국연의] '허구'이기는 하나 사마의는 제갈량의 '공성전'에 속기도 하고, 어지간하면 제갈량과 정면대결을 피하다가 여인의 옷을 선물받기도 했으나 웃으며 넘어갔으며, 제갈량이 오장원에서 죽었을 때는 제갈량의 계략으로 의심하여 공격을 머뭇거리다가 퇴각하는 촉한군을 놓치기도 한다. 아마도 마지막 장면은 [삼국지]와 그 [주석], [진서]에서도 일치하는 기록으로 사실일 것인데, 당나라 태종이 방현령 등에게 명해 정리한 '정사' [진서(晉書)], <선제기(宣帝紀)>에 의하면 "죽은 공명(제갈량)이 산 중달(사마의)을 달아나게 했다"는 당시 민중들의 비아냥에도 "나는 산 사람을 잘 알지 죽은 사람을 잘 알지 못하기 때문"이라며 역시 웃으며 말했다고 한다.


'삼국시대'라는 난세에 생존을 넘어 '비전'을 제시하고 '대업'에 도전하던 제갈량과 사마의는 기본적으로 차이점보다는 공통점이 더 많을 것이다. 누구보다 잘났고 목소리를 높이려는 '영웅주의'에 사로잡힌 인물들임은 기본일텐데, 두 사람의 대결과정에서는 상대적 차이점은 일단 보인다. 즉, 제갈량은 '촉한정통론'의 명분에 입각하여 조씨의 위나라를 역적으로 규정하고 후한을 재건한 광무제 유수처럼 '북벌'을 포기하지 않는 '비전'을 가지고 궁벽한 촉한을 그나마 수십년 버틸 수 있게 하였다. 한편, 사마의는 조씨 3대 정권을 보좌하면서도 결코 그들을 자극하지 않고 필요하면 병으로 다 죽어가는 연기까지 하면서 꾸준히 '대업'을 준비한 결과 위나라 정권을 갈아엎고 촉한과 오나라까지 정벌하고는 삼국통일을 이루는 새로운 왕조의 기틀까지 다졌다.
'한왕실 부흥'이라는 제갈량의 '비전'은 '실패'했고, '새왕조 개창'이라는 사마의의 '대업'은 '성공'한 차이점도 있겠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공통점이 더 많다.
우선 내부 조직 관리에서 본인보다 '조직'이나 '국가'를 우선하면서 사사로운 감정과 개인적 욕망을 조절했다. 결국 제갈량은 '북벌'의 '비전'을 위해, 사마의는 '혁명'의 '대업'을 위해 겉으로는 그랬다. 그리하여 조직 내부의 어떠한 도전에도 흔들림없이 스스로의 중심을 잡았다.
제갈량은 군사에 실패한 아끼는 수하 마속을 죽이면서까지 '북벌'을 위한 내부결속을 다지는 '읍참마속'의 고사를 낳았고, 사마의는 조조의 손자이자 왕족으로 실권자였던 조상과 대립하지 않고 병으로 물러나는 위장술 이면에 착실한 준비를 통해 자식들이 '창업'할 수 있도록 하였다.

제갈량과 사마의의 공통점은 그리하여 어떤 상황에서도 '비전'과 '대업'의 목표를 놓지 않는 '주체성(主體性)'과 '평상심(平常心)'으로 정리할 수 있다.


한편으로 차이점 하나를 더 들자면, 제갈량은 '북벌'의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사마의를 제거하고 싶었을지 모르나, 사마의는 세간의 비웃음을 감수하면서도 제갈량의 존재를 인정해야 했을 수도 있다. 위나라에서 촉한의 제갈량을 대적할 사람은 사마의 뿐이었기에 제갈량이 없으면 본인의 군사적 입지가 줄어들 것으로 판단했을 것인데 실제로 제갈량이 죽은 후 사마의는 '혁명'을 위한 준비에 착수할 수 밖에 없었다.


죽은 '공명(孔明)'이 산 '중달(仲達)'에게 더욱 치밀하고 굳건한 '평상심(平常心)'을 남긴 것이다.


***

1. [마음을 움직이는 승부사 - 제갈량],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2.
2. [자기통제의 승부사 - 사마의], 자오위핑, 박찬철 옮김, <위즈덤하우스>, 2013.
3. [삼국지(三國志)], <촉서(蜀書)>,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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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지 오웰
피에르 크리스탱 지음,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그림, 최정수 옮김 / 마농지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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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웰적인(Orwellian)' 세상과 '스페인 내전'
- [조지 오웰(George Orwell)], 피에르 크리스탱 글,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외 그림, 최정수 옮김, <마농지>, 2020.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
그러나 몇몇 동물은 다른 동물보다 더 평등하다.'
그 뒤로는 농장 일을 감독하는 돼지들이 앞발에 채찍을 들고 있어도 전혀 이상하게 보이지 않았다. 돼지들이 라디오 세트를 구입하고 전화를 설치하고... 신문, 잡지를 구독했다는 것을 알고 나서도 동물들은 이상한 생각이 들지 않았다. 나폴레옹이 입에 담뱃대를 물고 농장 정원을 거니는 것이 목격되기도 했다... 
일주일 뒤 어느 오후, 많은 이륜 마차가 농장으로 들어왔다. 이웃 농장주들의 대표단이 농장을 둘러보려고 온 것이다. 그들은 농장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모든 것, 특히 풍차를 대단히 칭찬했다. 그때 다른 동물들은 순무밭에서 잡초를 뽑고 있었다. 그들은 밭에서 고개를 들지도 않고 돼지가 더 무서운지 혹은 인간 방문객이 더 무서운 존재인지에 대해서도 전혀 생각하지 않고 부지런히 일만 하고 있었다. 그날 저녁 농가에서는 큰 웃음소리와 노랫소리가 터져 나왔다. 뒤죽박죽 뒤섞인 목소리들 때문에 동물들은 갑자기 호기심을 느꼈다...
이제 돼지들의 얼굴에 무슨 변화가 일어났는지 분명히 알게 되었다. 바깥에 있던 동물들은 돼지에서 인간으로, 인간에서 돼지로, 그리고 다시 돼지에서 인간으로 시선을 옮겨가며 살펴보았다. 그러나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구별하기란 정말로 불가능했다."
- [동물농장](1945), 조지 오웰, 황병훈 옮김, <보물창고>, 2016.


'한때는 좋았던 인간' 존스씨의 '메이너농장'에서 '혁명'이 일어난다. 매일 술에 취해 일도 안하고 결정적으로 동물들을 굶기기 일쑤인 '인간' 존스씨가 역시 술에 취해 곯아 떨어지고 인부들도 일손을 놓은 사이 '동물'들은 '한밤중 회의'를 통해 12살짜리 수퇘지 메이저 영감의 '동물'이 주인이 되는 '꿈' 이야기를 듣고 '영국의 동물들'이라는 노래를 함께 부른다. 메이저 영감돼지가 죽은 후 젊고 영리한 수퇘지 스노우볼과 나폴레옹은 메이저 영감의 '꿈'과 '영국의 동물들' 노래를 '동물주의'로 이론화하여 '메이너농장'의 모든 동물들을 사상무장시킨다. 
연일 굶던 동물들은 우발적으로 반란폭동을 일으켜 농장주 존스와 인간들을 농장 밖으로 몰아내고 '혁명'을 성공시킨다.
문자를 익힌 영리한 돼지 스노우볼은 이 '혁명적 동물주의'를 '7계명'으로 정립하는데, '두 발 달린 인간은 적이다', '네 발이나 날개 달린 모든 동물은 동지다', '금주할 것', '옷을 입지 않기', '침대에서 자지 않기', '동물끼리 죽이지 말 것' 등의 내용이며, '모든 동물은 평등하다'라는 테제로 마무리되는 내용이다.
하지만, '생산력 발전'을 위한 무리한 '풍차' 건설로 동물들은 피폐해지는데, '풍차' 건설을 기획하고 한편으로 '동물주의'를 고수하며 '외양간 전투'를 승리로 이끈 스노우볼은 나폴레옹에 의해 '인간'과 내통한 스파이로 몰려 추방당하고 나폴레옹은 '독재 체제'를 구축한다. 
옷을 입고 개를 키우며 침대에서 자는 나폴레옹은 농장의 생존을 위해 이웃의 인간 농장주들과 교류하면서 결국 '동물농장'을 '메이너농장'으로 다시 명명한다.
궂은 일 도맡은 종마 복서는 늙어 도살장으로 끌려가고 암말 클로버가 시니컬한 당나귀 벤자민에세 '7계명'이 온전한가 묻는데, 어느새 '7계명'은 변질되었고 '모든 동물은 평등'하되 '몇몇 동물은 더욱 평등하다'로 바뀌어 있다.
'동물농장'의 주인이었던 동물들 눈에 인간들과 교류하는 돼지들은 누가 인간이고 누가 돼지인지 더이상 구분할 수 없다.
'동물농장'은 여전히 '메이너농장'이 된다.


조지 오웰(George Orwell)의 본명은 에릭 아서 블레어(Eric Arthur Blair)인데, 영국의 식민지였던 인도의 영국인 공무원의 아들로 태어났다. 한살 이후 영국에서 자랐고 이튼스쿨 장학생이었으나 학업에 흥미를 잃고 버마에서 식민지 경찰로 근무했으며 귀국 후 일용노동자와 노숙자 생활도 하다가 작가가 되었다. 
조지 오웰은 우리에게 '반공우화'로 소개되곤 하는 [동물농장]을 2차 대전 종전해인 1945년에 발표한다. 영국은 1917년 러시아혁명 후 소비에트연방(소련)을 극도로 혐오했으나 2차 대전에서는 서로 연합국이 되어 종전 당시인 1945년에는 영국과 소련의 '협력관계'상 소련 체제를 비판한 '정치우화'인 오웰의 [동물농장]을 출판사들이 출간하기를 주저했다는 사실은 이 소설이 '반공소설'이라는 증거라고 한다.
실제로 이 우화에 등장하는 '존스씨'는 러시아 차르 또는 임시정부 등의 구체제, '메이저 영감'은 칼 마르크스, '스노우볼'은 트로츠키, '나폴레옹'은 스탈린, '복서'는 '프롤레타리아', '외양간 전투'는 혁명 후 내전, '풍차 전투'는 2차 대전, '이웃 농장주들'은 영국과 독일이며, '동물농장'은 사회주의, '메이너농장'은 국가자본주의라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아마도 시니컬한 당나귀 '벤자민'은 작가 본인이었으리라.

그러나 '우화'라는 것이 즉자적인 '비유'에 그칠 수는 없다. 조지 오웰이 1945년의 [동물농장]과 1948년의 '빅 브라더(Big Brother)' [1984]를 통해 묘사하고자 했던 것이 단순히 '소련'의 독재체제에 대한 '비유'만이 아니라 '전체주의'와 '파시즘' 일체에 대한 '은유'라는 것은 그의 '스페인 내전' 참전의 경험에서 유추해 볼 수 있다.


"전쟁 초기 몇 달 동안 프랑코의 실질적인 적은 인민전선 정부라기 보다는 노동조합들이었다. 프랑코가 반란을 일으키자, 도시의 조직화된 노동자들은 총파업으로 대응했다. 이어 공공 무기고에 가서 무기를 달라고 요구했다. 그리고 투쟁 끝에 얻어냈다. 만일 그들이 자발적으로, 그리고 다소간 독립적으로 행동에 나서지 않았다면, 프랑코는 아무런 저항에 부딪히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 조지 오웰, [카탈루니아 찬가](1938). [세계노동운동사 3]에서 재인용.


소련에서 독재체제를 구축한 스탈린은 레닌이 사망한 1924년에 '후계자'가 되자마자 이미 '1국 사회주의론'을 제기했는데, 1차 대전 종전을 앞당긴 유럽 각국의 연쇄혁명의 전망에도 불구하고 소련이라는 한 국가에서도 공산주의 혁명이 가능하다는 주장이다. 이 '1국 사회주의론'은 스탈린의 내부 숙청이 일단락되던 1935년경에는 확립되었고 다른 자본주의 국가들과의 협력 과정에서 더욱 공고화되는데, 이 시기는 '국가독점자본주의'의 강화 및 이를 기반으로 한 '파시즘'의 확산과 궤를 같이 한다. 
조지 오웰이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한 '스페인 내전'(1936~1939)은 '파시즘'의 발흥과 이에 대항한 유럽 민주주의 세력의 일대 격전장이었다.


1922년 이탈리아의 무솔리니가 내세운 '파시즘'은 '단결'이라는 어원으로 우익 포퓰리즘의 극단적 정치형태였으며, 경제위기로 들끓는 다수 대중의 열망을 고대 신화를 빌어 '신비주의화'하여 결국 독점자본의 이익보장의 도구가 되는데, 1933년의 독일 히틀러의 '나치즘', 일본의 '천황군국주의' 등의 본질적 정치형태다.
이탈리아 무솔리니는 고대 로마에서 '단결'을 상징하는 도끼묶음을, 독일 히틀러는 아리아인을 기원으로 하는 고대 게르만 신화와 그 상징으로서 하켄크로이츠를, 일본 군국주의는 욱일기로 표현되는 고대 천황의 신화를 숭상했다.
'독점자본'을 토대로 하는 '파시즘'이라는 병적이고 극단적인 폭력적 독재체제의 특징을 김세균 서울대 교수는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완성된' 파시즘 체제가 지닌 기본 측면들로는 첫째, 노동자계급을 비롯한 피지배계급 운동 분쇄와 이들 계급을 체제 내로 강제 통합, 둘째, 자본축적을 위한 국가의 광범한 개입, 셋째, 시민의 권리 박탈과 사회에 대한 전면적 감시, 통제체제 수립, 넷째, 의회제 통제로부터 국가권력 집행 기구의 자립과 이를 통한 무제한적 국가 폭력 사용 등이 지적되고 있다."
- 김세균, [자본주의 위기와 파시즘], 1987. [세계노동운동사 3]에서 재인용.


이탈리아와 독일은 이미 '파시즘'이 집권하였고 사회민주당마저 그들과 타협하던 1931년 스페인에서는 공산주의자, 사회주의자, 무정부주의자, 자유주의자 등의 '민주세력'들이 '인민전선'을 형성하여 공화국을 세웠다.
장군 프랑코를 앞세운 우익 반란군과 공화국 민병대간에 전개된 4년여의 전쟁이 바로 '스페인 내전'이었다.

결국 스페인 내전은 프랑코 우익 반란군의 승리로 끝나고 프랑코 군부독재는 이후 40년간 스페인을 지배한다. 20여만 명의 인민을 학살한 스페인의 프랑코는 우리에게는 박정희와 전두환을 합친 정도의 우익 악마였다.
애초 영국,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는 '불간섭위원회'를 통해 스페인 내전을 지원하지 않기로 하였으나 '파시즘' 세계동맹을 기획하던 독일과 이탈리아는 프랑코 반군을 적극 지원했고, 영국은 소련 견제를 위해 뒷짐을 졌으며, 소련은 '공화군'을 소극적으로 지원하는 과정에서 스페인 노동조합의 총파업과 '국제 여단'은 안팎으로 궤멸되어 갔다.
조지 오웰이 참전하여 목도한 스페인 내전의 '정치외교'적 현실이 이러했는데, 이 과정에서 공화국과 소련 공산주의자들은 이 노동자 민병대와 '국제 여단'을 오히려 억압하고 고립시키는데 열중했던 것이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는 프랑코 우익 반란군보다 급진적 노동자와 '국제 여단'을 더 두려워했고, '1국 사회주의'를 선언한 소련공산당은 자본주의 협력국들을 불편하게 만들기 싫어 차라리 위성국을 더 만들지언정 노동자계급에 의한 아래로부터의 세계혁명 확산을 바라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 영국과 소련은 전유럽의 '파시즘' 확산에 기여하면서 2차 세계대전 확산을 방조했다.
조지 오웰은 스페인 내전의 경험을 토대로 1938년에 [카탈루니아 찬가]를 출간했는데, 이 내전의 초기 정신은 '정치적 인민전선이 아닌 노동자 총파업'이라고 적고 있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고, '현실 사회주의'가 붕괴했다. 그리고 소련이 해체되었다. 미래 예측이 틀린 SF 작가들의 경우처럼 오웰의 아우라는 쇠퇴한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겉으로 보기에 빅 브라더는 확산되지 않았다. 
그러나 '오웰적인(Orwellian)'이라는 형용사는 다른 운명을 겪어, '카프카적인(Kafkaesque;부조리하고 우울하고 악몽같은)'처럼 일종의 관용적 표현이 되었다.
오웰은 자신을 전향시키려는 시도에 굴복하지 않았다."
- [조지 오웰(George Orwell)], <에필로그 - 오웰 이후>, 피에르 크리스탱 글,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외 그림, 최정수 옮김, <마농지>, 2020.


'오웰적인(Orwellian)' 세상은 [1984]에 나온 '빅 브라더'의 '전체주의' 세상에 대한 표현이라는데, 이는 조지 오웰의 삶을 볼 때 비단 '반혁명'과 '반노동자'적인 '스탈린주의' 체제 뿐만 아니라 '파시즘'으로 대표되는 '국가독점자본주의'를 토대로 한 '전체주의' 체제 일반을 의미한다.
'오웰적인' 세계에 대한 저항은 스페인 내전에 공화파 '국제 여단''으로 참전한 조지 오웰의 '자유' 정신과 노동자 '평등' 정신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념이 앞서는 것이 아니다. 
'자유'가 우세하면 '평등'을 위해, '평등'이 우세하면 '자유'를 위해 싸우는 바로 그 정신이다.


[동물농장]의 당나귀 벤자민은 '동물농장'도 지지하지 않았지만, 그렇다고 결코 술주정뱅이 '존스씨'의 '메이너농장'을 동경한 것도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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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조지 오웰(George Orwell)], 피에르 크리스탱 글, 세바스티앵 베르디에 외 그림, 최정수 옮김, <마농지>, 2020.
2. [동물농장(Animal Farm)](1945), 조지 오웰, 황병훈 옮김, <보물창고>, 2016.
3. [세계노동운동사 3], 김금수, <후마니타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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