니콜로 마키아벨리, 군주론 - 정치의 본질을 이해하기 위한 책,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최장집 교수의 정치철학 강의 2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최장집 한국어판 서문, 박상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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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루이 알튀세르의 '고독' : 후기 알튀세르 유고집
-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저는 필요한 변형을 가하면, 자연법 철학자들이 국가의 역사에 관해 내세우는 교훈적인 담론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와 아주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법과 자연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국민국가가 될 만큼 충분히 지속하고 강력해지려면 국가가 어떻게 탄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모든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무장력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국가의 시작에 필연적인 잔인성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이용해야 하는 종교 없는 정치의 언어로, 도덕적이어야 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정치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계급들간의 투쟁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권리, 법, 도덕은 그에 적합한 부차적인 장소로 배치합니다."
- [마키아벨리의 가면], <부록 - 마키아벨리의 고독>, 루이 알튀세르.


'철학(哲學)'은 추상화(抽象化)'다.
'구체적 사실'들 속에서 그 '현상'들의 원인들을 이론화하는 것이 각각의 영역에서의 '과학'이라면, 이들의 흐름을 꿰뚫는 '본질'을 '추상화'하여 거대한 사상적 논리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철학'이다. 사회구성체로는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의 결정적 영향을 받는 정치와 문화의 상부구조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는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였고 알튀세르에게는 역설적으로 '현실적인 힘'이었으며 유발 하라리에게는 반대로 '사피엔스'의 1차 '인지혁명'의 키워드였다. 
'철학'은 '추상'이고 '허위의식'이지만, 그 이상의 '현실적 힘'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는 20세기 말 한국에서 잊혀졌다.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다시 마르크스 자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건 좌파의 흐름에서 90년대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타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론가 중 하나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인데 평생 정신분열증으로 살다가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그는 1978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끝으로 더이상 저작을 발표하지 못하나,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유고'들이 속속 출간된다.

'인간주의'적 청년 마르크스와 '구조주의'적 노년 마르크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철학'과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주체 없는' 사회구성체에서의 경제적 '최종심급'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와 관계되는 복합적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으로 확장한 '국가론',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은 알튀세르가 한국에 들여온 사상들이었다. 이후 몇 번의 '자기 비판'과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제자들과의 결별이 그의 '정신분열'의 영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과 사상은 어렵다.

21세기 초, 우연히 발견한 그의 첫번째 유고작은 [마키아벨리의 가면]이었다. 이후 거의 20년 가까이 지나 [무엇을 할 것인가?], [검은 소] 등의 유고집이 편집되어 국내에 소개되고 그 사이 2011년에는 알튀세르 전공학자들의 글들이 '추모집' 비슷한 [알튀세르 효과]라는 900여 쪽의 책으로도 묶였다.

'과학'의 역사에서 '수학'의 대륙을 발견한 고대 그리스 탈레스로부터 '물리학'의 대륙을 발견한 갈릴레이와 뉴턴, 그리고 데카르트, '역사'의 대륙을 발견한 마르크스의 '철학'적 계보를 이어가려던 루이 알튀세르는 근대초의 이탈리아에서 '정치학'을 연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만나서 그의 '가면'을 쓴 채 그의 '고독'을 논한다. [마키아벨리의 가면]은 1972~1980년까지 마키아벨리에 관한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제목으로 엮은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도 '군주주의자'도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오직 하나의 정부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 즉, 국가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정부 형태"([마키아벨리의 가면], <2장>).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현존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 국가형태를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한 마키아벨리는 한 지방에서 홀로 고독하게 세력을 키우는 체자레 보르지아라는 '군주' 또는 '왕자(The Prince)'를 현실적 잠재태로 설정하고 그 유명한 '사자와 여우' 의 비유로써 도덕윤리와 분리된 하나의 현실적 '정치이론'이라는 '과학'의 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이상은 역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처럼 '고독'한 이유이며,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추구한 루이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의 '가면'을 쓰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변증법의 기본명제는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R. 변증법에 대한 몇마디. 두 변혁>,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레닌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치, 계급관계,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두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죠) 계급투쟁의 상태로 필연적으로 향하는 그러한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 [검은 소], <2장. 22차 당대회의 모순>, 루이 알튀세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다.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을 선언하고 하나의 '현실 정치체제'가 된 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서 '의회주의'를 병행하는 유럽 공산당들은 노선 전환을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에서 '필연'적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수정하는 '유로 코뮤니즘'의 출현이다.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마르크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이 기획에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 테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젊은 동료로서 1965년 [자본론을 읽는다]의 공저자이기도 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국역:[민주주의와 독재])가 이론적 포문을 열었고 이에 대한 보완과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문제제기 형태의 글이 알튀세르의 [검은 소]인데, 본인 또는 "이미 안다고 가정된 자"라는 가상의 인물과 자기 인터뷰하는 형식의 문답집이다. [검은 소] 제목의 '철학'적 의미는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소들'인데,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위에의 <올가트 절벽 위의 검은 소들>처럼 위험에 처한 현실을 은유할 수도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치체제 이전에 '역사유물론'의 '과학'과 '유물변증법'의 '철학'의 사상체계 상 '필연적' 개념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혁명적이었던 근대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현대에 이르러 소수의 지배계급으로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면서 이 절대다수의 노동계급은 계급 자체를 철폐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할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이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는 이상향이며, '이행기'로서 절대다수 노동계급의 독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듯,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절대다수 노동인민의 '독재'이므로 '이론적'으로 다수의 '민주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계급이 철폐되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정초한 ('역사'라는)'과학'의 유일한 대상은 그가 서로 다른 생산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에 속하는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들 내의 '계급투쟁의 법칙'입니다."
- [검은 소], <5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루이 알튀세르.


루이 알튀세르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람시의 진보적 정치정당으로서 '현대의 군주'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이상적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마주친다. '계급투쟁'의 엄연한 현실이 스탈린주의적 '선언'에 의해 소멸할 수 없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학' 또한 '단어'를 없앤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폐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필연적' 개념을 '해방'시켰다는데, 그는 당강령 속에서 사멸해 가던 개념이 다시금 부활되어 현실 속에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논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적 작업은 '실천적 계급투쟁'을 끝내 담보하지 못한 채 '유고집'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현대의 군주, 즉 신화, 군주는 실제의 한 인격,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이미 인정받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한 하나의 집단의지가, 그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유기체 혹은 복합적 사회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러한 유기체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정당-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효소들이 함께 모여진 최소의 세포-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Ⅰ](1929~1935), <현대의 군주>,
‘마키아벨리 정치학에 대한 간단한 주석’ 중.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역시 이탈리아 사람답게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주목한다. 즉, "마키아벨리 이전에는 정치과학이 유토피아의 형식을 빌어 표현되거나 현학적인 논술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이 양자를 결합하여, 교의적, 합리적 요소를 '대장(군주/왕자/체자레 보르지아)'이라는 인격체 속에 육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념에 상상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부여"하였으며, "순수히 이론적인 추상"으로서의 군주를 통해 궁극에는 민중과 하나가 되고, 이 과정에서의 발화된 정치적 정열과 신화의 요소들이 실존하는 '군주'를 통해 이상적인 '군주론'이라는 '정치적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한 군주'는 '귀족'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인민의 목표는 군주의 목표보다 명예롭기 때문([군주론],<9장>)"에 아무리 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지배계급 내 적들'인 '귀족'보다는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논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정치과학'에서의 이와 같은 '국가론'과 '권력론'은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이고, '불가능'하나 추구할 수 밖에 없는 방향이자 역사의 경향성이다. 더구나 지금 이 시대는 부르주아계급들의 '과두정적 공화국'을 딛고 다수 인민의 힘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적 공화정'의 시기다.


"진정 그람시는 피지배계급의 권력 쟁취 이전의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열렬히 강조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고전들은 적절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했다. 1) 노동자계급의 전위는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확장해야 하며 '자신의 관념'이 가장 많은 수의 지지자들에게 수용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노동자계급의 당파는 자신의 영향력, 자신의 '헤게모니'를 자신과 가까운 대중조직들에까지 확장해야 하며, '권력 쟁취'에 필수불가결한 동맹을 이 조직들과 함께 형성해야 한다. 그람시는 이 두 가지 테제를 지지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테제에 세 번째 테제를 추가한다. 노동자계급은 '권력 쟁취' 이전에 사회 전체 안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 [무엇을 할 것인가?], <2장. 안토니오 그람시와 절대적 경험주의>, 루이 알튀세르.


'국가'를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옥중수고])로 규정한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는 노동계급 "당파의 관념이 취하는 영향력과 그 관객을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것, 국가를 장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민사회 권력의 중심들을 장악해 결국 시민사회 그 자체를 장악하는 것([무엇을 할 것인가?], <2정>, 루이 알튀세르)"이기도 하다. 즉, 다수 인민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국가권력 장악만이 목표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인 일상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인데, '계급소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다수의 직접 민주주의 힘으로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겠다. '재벌해체' 등의 경제적 생산관계 재편은 오히려 정치권력을 잡은 후에 더욱 시도조차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련의 민주정부를 보며 경험했다. 유일한 방법은 정치권력자에 대한 대리주의적 의탁이 아닌 일상에서의 '계급투쟁'이다.


"마키아벨리의 의식이라는 '가면' 속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 루이 알튀세르.


정치'를 도덕, 윤리 덕목과 분리시켜 근대 정치학의 기틀을 닦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현실' 군주에게 선택받기 위해 '헌사'를 바치면서까지 국가를 유지하며 권력을 지키는 방안을 제출했고 후세에 '권모술수 정치가'와 같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공화정'이나 '군주정' 어느 것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으로서 '정치학' 자체를 지지하였으므로 알튀세르에 의하면 말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는 마르크스와도 같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한채 '고독'하다. 
그리고 이 '고독'은 정신분열 속에서도 끝까지 '이론적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 루이 알튀세르에게도 해당된다.

이들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사상 자체, '원전(原典)'으로 돌아간다.


***

1.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2. [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3.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4. [옥중수고 1~2](1929~1935), 안토니오 그람시, 이상훈 옮김, <거름>, 1994.
5.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후마니타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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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진태원 해제 / 생각의힘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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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의 '고독' : 후기 알튀세르 유고집
-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저는 필요한 변형을 가하면, 자연법 철학자들이 국가의 역사에 관해 내세우는 교훈적인 담론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와 아주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법과 자연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국민국가가 될 만큼 충분히 지속하고 강력해지려면 국가가 어떻게 탄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모든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무장력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국가의 시작에 필연적인 잔인성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이용해야 하는 종교 없는 정치의 언어로, 도덕적이어야 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정치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계급들간의 투쟁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권리, 법, 도덕은 그에 적합한 부차적인 장소로 배치합니다."
- [마키아벨리의 가면], <부록 - 마키아벨리의 고독>, 루이 알튀세르.


'철학(哲學)'은 추상화(抽象化)'다.
'구체적 사실'들 속에서 그 '현상'들의 원인들을 이론화하는 것이 각각의 영역에서의 '과학'이라면, 이들의 흐름을 꿰뚫는 '본질'을 '추상화'하여 거대한 사상적 논리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철학'이다. 사회구성체로는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의 결정적 영향을 받는 정치와 문화의 상부구조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는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였고 알튀세르에게는 역설적으로 '현실적인 힘'이었으며 유발 하라리에게는 반대로 '사피엔스'의 1차 '인지혁명'의 키워드였다. 
'철학'은 '추상'이고 '허위의식'이지만, 그 이상의 '현실적 힘'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는 20세기 말 한국에서 잊혀졌다.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다시 마르크스 자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건 좌파의 흐름에서 90년대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타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론가 중 하나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인데 평생 정신분열증으로 살다가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그는 1978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끝으로 더이상 저작을 발표하지 못하나,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유고'들이 속속 출간된다.

'인간주의'적 청년 마르크스와 '구조주의'적 노년 마르크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철학'과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주체 없는' 사회구성체에서의 경제적 '최종심급'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와 관계되는 복합적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으로 확장한 '국가론',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은 알튀세르가 한국에 들여온 사상들이었다. 이후 몇 번의 '자기 비판'과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제자들과의 결별이 그의 '정신분열'의 영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과 사상은 어렵다.

21세기 초, 우연히 발견한 그의 첫번째 유고작은 [마키아벨리의 가면]이었다. 이후 거의 20년 가까이 지나 [무엇을 할 것인가?], [검은 소] 등의 유고집이 편집되어 국내에 소개되고 그 사이 2011년에는 알튀세르 전공학자들의 글들이 '추모집' 비슷한 [알튀세르 효과]라는 900여 쪽의 책으로도 묶였다.

'과학'의 역사에서 '수학'의 대륙을 발견한 고대 그리스 탈레스로부터 '물리학'의 대륙을 발견한 갈릴레이와 뉴턴, 그리고 데카르트, '역사'의 대륙을 발견한 마르크스의 '철학'적 계보를 이어가려던 루이 알튀세르는 근대초의 이탈리아에서 '정치학'을 연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만나서 그의 '가면'을 쓴 채 그의 '고독'을 논한다. [마키아벨리의 가면]은 1972~1980년까지 마키아벨리에 관한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제목으로 엮은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도 '군주주의자'도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오직 하나의 정부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 즉, 국가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정부 형태"([마키아벨리의 가면], <2장>).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현존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 국가형태를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한 마키아벨리는 한 지방에서 홀로 고독하게 세력을 키우는 체자레 보르지아라는 '군주' 또는 '왕자(The Prince)'를 현실적 잠재태로 설정하고 그 유명한 '사자와 여우' 의 비유로써 도덕윤리와 분리된 하나의 현실적 '정치이론'이라는 '과학'의 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이상은 역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처럼 '고독'한 이유이며,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추구한 루이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의 '가면'을 쓰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모든 진리는 구체적이다."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레닌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치, 계급관계,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두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죠) 계급투쟁의 상태로 필연적으로 향하는 그러한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 [검은 소], <2장. 22차 당대회의 모순>, 루이 알튀세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다.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을 선언하고 하나의 '현실 정치체제'가 된 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서 '의회주의'를 병행하는 유럽 공산당들은 노선 전환을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에서 '필연'적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수정하는 '유로 코뮤니즘'의 출현이다.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마르크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이 기획에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 테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젊은 동료로서 1965년 [자본론을 읽는다]의 공저자이기도 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국역:[민주주의와 독재])가 이론적 포문을 열었고 이에 대한 보완과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문제제기 형태의 글이 알튀세르의 [검은 소]인데, 본인 또는 "이미 안다고 가정된 자"라는 가상의 인물과 자기 인터뷰하는 형식의 문답집이다. [검은 소] 제목의 '철학'적 의미는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소들'인데,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위에의 <올가트 절벽 위의 검은 소들>처럼 위험에 처한 현실을 은유할 수도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치체제 이전에 '역사유물론'의 '과학'과 '유물변증법'의 '철학'의 사상체계 상 '필연적' 개념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혁명적이었던 근대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현대에 이르러 소수의 지배계급으로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면서 이 절대다수의 노동계급은 계급 자체를 철폐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할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이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는 이상향이며, '이행기'로서 절대다수 노동계급의 독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듯,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절대다수 노동인민의 '독재'이므로 '이론적'으로 다수의 '민주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계급이 철폐되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정초한 ('역사'라는)'과학'의 유일한 대상은 그가 서로 다른 생산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에 속하는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들 내의 '계급투쟁의 법칙'입니다."
- [검은 소], <5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루이 알튀세르.


루이 알튀세르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람시의 진보적 정치정당으로서 '현대의 군주'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이상적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마주친다. '계급투쟁'의 엄연한 현실이 스탈린주의적 '선언'에 의해 소멸할 수 없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학' 또한 '단어'를 없앤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폐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필연적' 개념을 '해방'시켰다는데, 그는 당강령 속에서 사멸해 가던 개념이 다시금 부활되어 현실 속에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논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적 작업은 '실천적 계급투쟁'을 끝내 담보하지 못한 채 '유고집'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현대의 군주, 즉 신화, 군주는 실제의 한 인격,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이미 인정받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한 하나의 집단의지가, 그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유기체 혹은 복합적 사회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러한 유기체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정당-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효소들이 함께 모여진 최소의 세포-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Ⅰ](1929~1935), <현대의 군주>,
‘마키아벨리 정치학에 대한 간단한 주석’ 중.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역시 이탈리아 사람답게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주목한다. 즉, "마키아벨리 이전에는 정치과학이 유토피아의 형식을 빌어 표현되거나 현학적인 논술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이 양자를 결합하여, 교의적, 합리적 요소를 '대장(군주/왕자/체자레 보르지아)'이라는 인격체 속에 육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념에 상상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부여"하였으며, "순수히 이론적인 추상"으로서의 군주를 통해 궁극에는 민중과 하나가 되고, 이 과정에서의 발화된 정치적 정열과 신화의 요소들이 실존하는 '군주'를 통해 이상적인 '군주론'이라는 '정치적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한 군주'는 '귀족'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인민의 목표는 군주의 목표보다 명예롭기 때문([군주론],<9장>)"에 아무리 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지배계급 내 적들'인 '귀족'보다는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논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정치과학'에서의 이와 같은 '국가론'과 '권력론'은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이고, '불가능'하나 추구할 수 밖에 없는 방향이자 역사의 경향성이다. 더구나 지금 이 시대는 부르주아계급들의 '과두정적 공화국'을 딛고 다수 인민의 힘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적 공화정'의 시기다.


"진정 그람시는 피지배계급의 권력 쟁취 이전의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열렬히 강조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고전들은 적절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했다. 1) 노동자계급의 전위는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확장해야 하며 '자신의 관념'이 가장 많은 수의 지지자들에게 수용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노동자계급의 당파는 자신의 영향력, 자신의 '헤게모니'를 자신과 가까운 대중조직들에까지 확장해야 하며, '권력 쟁취'에 필수불가결한 동맹을 이 조직들과 함께 형성해야 한다. 그람시는 이 두 가지 테제를 지지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테제에 세 번째 테제를 추가한다. 노동자계급은 '권력 쟁취' 이전에 사회 전체 안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 [무엇을 할 것인가?], <2장. 안토니오 그람시와 절대적 경험주의>, 루이 알튀세르.


'국가'를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옥중수고])로 규정한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는 노동계급 "당파의 관념이 취하는 영향력과 그 관객을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것, 국가를 장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민사회 권력의 중심들을 장악해 결국 시민사회 그 자체를 장악하는 것([무엇을 할 것인가?], <2정>, 루이 알튀세르)"이기도 하다. 즉, 다수 인민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국가권력 장악만이 목표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인 일상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인데, '계급소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다수의 직접 민주주의 힘으로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겠다. '재벌해체' 등의 경제적 생산관계 재편은 오히려 정치권력을 잡은 후에 더욱 시도조차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련의 민주정부를 보며 경험했다. 유일한 방법은 정치권력자에 대한 대리주의적 의탁이 아닌 일상에서의 '계급투쟁'이다.


"마키아벨리의 의식이라는 '가면' 속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 루이 알튀세르.


정치'를 도덕, 윤리 덕목과 분리시켜 근대 정치학의 기틀을 닦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현실' 군주에게 선택받기 위해 '헌사'를 바치면서까지 국가를 유지하며 권력을 지키는 방안을 제출했고 후세에 '권모술수 정치가'와 같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공화정'이나 '군주정' 어느 것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으로서 '정치학' 자체를 지지하였으므로 알튀세르에 의하면 말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는 마르크스와도 같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한채 '고독'하다. 
그리고 이 '고독'은 정신분열 속에서도 끝까지 '이론적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 루이 알튀세르에게도 해당된다.

이들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사상 자체, '원전(原典)'으로 돌아간다.


***

1.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2. [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3.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4. [옥중수고 1~2](1929~1935), 안토니오 그람시, 이상훈 옮김, <거름>, 1994.
5.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후마니타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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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지음, 배세진 옮김 / 오월의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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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의 '고독' : 후기 알튀세르 유고집
-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저는 필요한 변형을 가하면, 자연법 철학자들이 국가의 역사에 관해 내세우는 교훈적인 담론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와 아주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법과 자연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국민국가가 될 만큼 충분히 지속하고 강력해지려면 국가가 어떻게 탄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모든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무장력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국가의 시작에 필연적인 잔인성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이용해야 하는 종교 없는 정치의 언어로, 도덕적이어야 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정치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계급들간의 투쟁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권리, 법, 도덕은 그에 적합한 부차적인 장소로 배치합니다."
- [마키아벨리의 가면], <부록 - 마키아벨리의 고독>, 루이 알튀세르.


'철학(哲學)'은 추상화(抽象化)'다.
'구체적 사실'들 속에서 그 '현상'들의 원인들을 이론화하는 것이 각각의 영역에서의 '과학'이라면, 이들의 흐름을 꿰뚫는 '본질'을 '추상화'하여 거대한 사상적 논리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철학'이다. 사회구성체로는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의 결정적 영향을 받는 정치와 문화의 상부구조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는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였고 알튀세르에게는 역설적으로 '현실적인 힘'이었으며 유발 하라리에게는 반대로 '사피엔스'의 1차 '인지혁명'의 키워드였다. 
'철학'은 '추상'이고 '허위의식'이지만, 그 이상의 '현실적 힘'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는 20세기 말 한국에서 잊혀졌다.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다시 마르크스 자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건 좌파의 흐름에서 90년대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타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론가 중 하나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인데 평생 정신분열증으로 살다가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그는 1978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끝으로 더이상 저작을 발표하지 못하나,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유고'들이 속속 출간된다.

'인간주의'적 청년 마르크스와 '구조주의'적 노년 마르크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철학'과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주체 없는' 사회구성체에서의 경제적 '최종심급'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와 관계되는 복합적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으로 확장한 '국가론',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은 알튀세르가 한국에 들여온 사상들이었다. 이후 몇 번의 '자기 비판'과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제자들과의 결별이 그의 '정신분열'의 영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과 사상은 어렵다.

21세기 초, 우연히 발견한 그의 첫번째 유고작은 [마키아벨리의 가면]이었다. 이후 거의 20년 가까이 지나 [무엇을 할 것인가?], [검은 소] 등의 유고집이 편집되어 국내에 소개되고 그 사이 2011년에는 알튀세르 전공학자들의 글들이 '추모집' 비슷한 [알튀세르 효과]라는 900여 쪽의 책으로도 묶였다.

'과학'의 역사에서 '수학'의 대륙을 발견한 고대 그리스 탈레스로부터 '물리학'의 대륙을 발견한 갈릴레이와 뉴턴, 그리고 데카르트, '역사'의 대륙을 발견한 마르크스의 '철학'적 계보를 이어가려던 루이 알튀세르는 근대초의 이탈리아에서 '정치학'을 연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만나서 그의 '가면'을 쓴 채 그의 '고독'을 논한다. [마키아벨리의 가면]은 1972~1980년까지 마키아벨리에 관한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제목으로 엮은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도 '군주주의자'도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오직 하나의 정부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 즉, 국가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정부 형태"([마키아벨리의 가면], <2장>).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현존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 국가형태를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한 마키아벨리는 한 지방에서 홀로 고독하게 세력을 키우는 체자레 보르지아라는 '군주' 또는 '왕자(The Prince)'를 현실적 잠재태로 설정하고 그 유명한 '사자와 여우' 의 비유로써 도덕윤리와 분리된 하나의 현실적 '정치이론'이라는 '과학'의 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이상은 역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처럼 '고독'한 이유이며,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추구한 루이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의 '가면'을 쓰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모든 진리는 구체적이다."
-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레닌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치, 계급관계,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두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죠) 계급투쟁의 상태로 필연적으로 향하는 그러한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 [검은 소], <2장. 22차 당대회의 모순>, 루이 알튀세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다.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을 선언하고 하나의 '현실 정치체제'가 된 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서 '의회주의'를 병행하는 유럽 공산당들은 노선 전환을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에서 '필연'적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수정하는 '유로 코뮤니즘'의 출현이다.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마르크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이 기획에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 테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젊은 동료로서 1965년 [자본론을 읽는다]의 공저자이기도 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국역:[민주주의와 독재])가 이론적 포문을 열었고 이에 대한 보완과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문제제기 형태의 글이 알튀세르의 [검은 소]인데, 본인 또는 "이미 안다고 가정된 자"라는 가상의 인물과 자기 인터뷰하는 형식의 문답집이다. [검은 소] 제목의 '철학'적 의미는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소들'인데,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위에의 <올가트 절벽 위의 검은 소들>처럼 위험에 처한 현실을 은유할 수도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치체제 이전에 '역사유물론'의 '과학'과 '유물변증법'의 '철학'의 사상체계 상 '필연적' 개념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혁명적이었던 근대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현대에 이르러 소수의 지배계급으로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면서 이 절대다수의 노동계급은 계급 자체를 철폐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할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이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는 이상향이며, '이행기'로서 절대다수 노동계급의 독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듯,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절대다수 노동인민의 '독재'이므로 '이론적'으로 다수의 '민주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계급이 철폐되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정초한 ('역사'라는)'과학'의 유일한 대상은 그가 서로 다른 생산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에 속하는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들 내의 '계급투쟁의 법칙'입니다."
- [검은 소], <5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루이 알튀세르.


루이 알튀세르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람시의 진보적 정치정당으로서 '현대의 군주'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이상적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마주친다. '계급투쟁'의 엄연한 현실이 스탈린주의적 '선언'에 의해 소멸할 수 없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학' 또한 '단어'를 없앤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폐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필연적' 개념을 '해방'시켰다는데, 그는 당강령 속에서 사멸해 가던 개념이 다시금 부활되어 현실 속에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논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적 작업은 '실천적 계급투쟁'을 끝내 담보하지 못한 채 '유고집'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현대의 군주, 즉 신화, 군주는 실제의 한 인격,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이미 인정받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한 하나의 집단의지가, 그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유기체 혹은 복합적 사회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러한 유기체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정당-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효소들이 함께 모여진 최소의 세포-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Ⅰ](1929~1935), <현대의 군주>,
‘마키아벨리 정치학에 대한 간단한 주석’ 중.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역시 이탈리아 사람답게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주목한다. 즉, "마키아벨리 이전에는 정치과학이 유토피아의 형식을 빌어 표현되거나 현학적인 논술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이 양자를 결합하여, 교의적, 합리적 요소를 '대장(군주/왕자/체자레 보르지아)'이라는 인격체 속에 육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념에 상상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부여"하였으며, "순수히 이론적인 추상"으로서의 군주를 통해 궁극에는 민중과 하나가 되고, 이 과정에서의 발화된 정치적 정열과 신화의 요소들이 실존하는 '군주'를 통해 이상적인 '군주론'이라는 '정치적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한 군주'는 '귀족'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인민의 목표는 군주의 목표보다 명예롭기 때문([군주론],<9장>)"에 아무리 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지배계급 내 적들'인 '귀족'보다는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논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정치과학'에서의 이와 같은 '국가론'과 '권력론'은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이고, '불가능'하나 추구할 수 밖에 없는 방향이자 역사의 경향성이다. 더구나 지금 이 시대는 부르주아계급들의 '과두정적 공화국'을 딛고 다수 인민의 힘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적 공화정'의 시기다.


"진정 그람시는 피지배계급의 권력 쟁취 이전의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열렬히 강조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고전들은 적절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했다. 1) 노동자계급의 전위는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확장해야 하며 '자신의 관념'이 가장 많은 수의 지지자들에게 수용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노동자계급의 당파는 자신의 영향력, 자신의 '헤게모니'를 자신과 가까운 대중조직들에까지 확장해야 하며, '권력 쟁취'에 필수불가결한 동맹을 이 조직들과 함께 형성해야 한다. 그람시는 이 두 가지 테제를 지지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테제에 세 번째 테제를 추가한다. 노동자계급은 '권력 쟁취' 이전에 사회 전체 안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 [무엇을 할 것인가?], <2장. 안토니오 그람시와 절대적 경험주의>, 루이 알튀세르.


'국가'를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옥중수고])로 규정한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는 노동계급 "당파의 관념이 취하는 영향력과 그 관객을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것, 국가를 장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민사회 권력의 중심들을 장악해 결국 시민사회 그 자체를 장악하는 것([무엇을 할 것인가?], <2정>, 루이 알튀세르)"이기도 하다. 즉, 다수 인민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국가권력 장악만이 목표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인 일상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인데, '계급소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다수의 직접 민주주의 힘으로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겠다. '재벌해체' 등의 경제적 생산관계 재편은 오히려 정치권력을 잡은 후에 더욱 시도조차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련의 민주정부를 보며 경험했다. 유일한 방법은 정치권력자에 대한 대리주의적 의탁이 아닌 일상에서의 '계급투쟁'이다.


"마키아벨리의 의식이라는 '가면' 속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 루이 알튀세르.


정치'를 도덕, 윤리 덕목과 분리시켜 근대 정치학의 기틀을 닦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현실' 군주에게 선택받기 위해 '헌사'를 바치면서까지 국가를 유지하며 권력을 지키는 방안을 제출했고 후세에 '권모술수 정치가'와 같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공화정'이나 '군주정' 어느 것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으로서 '정치학' 자체를 지지하였으므로 알튀세르에 의하면 말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는 마르크스와도 같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한채 '고독'하다. 
그리고 이 '고독'은 정신분열 속에서도 끝까지 '이론적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 루이 알튀세르에게도 해당된다.

이들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사상 자체, '원전(原典)'으로 돌아간다.


***

1.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2. [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3.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4. [옥중수고 1~2](1929~1935), 안토니오 그람시, 이상훈 옮김, <거름>, 1994.
5.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후마니타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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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지음 / 역사비평사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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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士大夫)'의 '진보성'과 '민란(民亂)의 시대'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2020), 유승원 / [민란의 시대](2017), 이이화




"귀족의 주력 업무는 바로 외부로부터의 공동체 수호, 즉 군사적 기능의 수행에 두어졌다... 평민 출신의 '중갑보병(重甲步兵)'이 전투의 주력으로 등장하자 고대 아테네에서는 귀족정이 무너지게 되었고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사대부(士大夫)'의 역할은 통치의 두번째 목표인 공동체의 행복추구, 특히 통치주체의 자격강화를 통한 '사회공공성(社會公共性)'의 구현에 역점이 두어졌다...
국가, 군주, 그리고 지배계급의 '공공성'은 사대부시대에 들어와 최고조로 높아졌다. 그 이전의 문벌사회에서의 공공성과는 그 차원을 달리했을 것이다. 사대부는 이 점에서 근대 이전의 전세계의 지배계급 중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이다. 과거(科擧)에 의해 선발된 관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위민정치(爲民政治),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소리높여 주장했고 스스로 도덕적 수범으로서의 윤리의식을 가질 것을 부단히 강조했다."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2부 2장 2절. 사대부계급>,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사대부(士大夫)'라 하면, 흔히 조선시대 '양반'을 떠올린다. 절반은 맞다. '사대부'는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다. 한편 '양반(兩班)'은 고려와 조선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합칭으로 각각 '문무관료'의 '반열'에 오른 국가권력을 통한 '지배계급'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절반은 틀리다. '사대부(士大夫)'는 조선의 법제적 의미로는 5품 이하 중소관원을 이르는 '사(士)'와 4품 이상의 고위관원을 지칭하는 '대부(大夫)'의 합칭이나 원래는 '사회공공성(社會公共性)'을 위한 높은 윤리의식과 사회이념으로 무장한 '진보적 개혁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썩어빠진 '사대부 양반' 지배계급을 '진보적 개혁세력'이라니 의아하겠지만, 고려말의 권문세족과 그 대지주 약탈체제를 뒤엎은 조선의 '역성혁명' 과정에서 그 주동세력으로서의 신진 '사대부(士大夫)'와 16세기 조선 후기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양반'은 구분되어야 한다. 
14세기말의 고려는 체제 말기 현상으로 중앙 정치권력을 틀어쥐고 세습을 통해 토지 경제권력까지 강화한 '권문세가'들의 나라였고 다수 민중은 이 대토지소유자인 '권문세족'들에게 수탈당한다. '권문세가'는 외세인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라는 국가공동체를 사유화하는데, 5백여년 후 19세기 '세도정치' 문벌가문의 계급지배 형태로 다시 반복되는 역사적 현상이지만 조선 후기 '양반' 계급은 본래 의미로서 '사대부(士大夫)'와 거리가 멀다.
고려말과 조선초(여말선초:麗末鮮初)에 등장한 '사대부(士大夫)'는 지배계급이었으되 '진보'적이고 '개혁'적이었다.


'서구중심주의' 역사관을 경계하며 '내재적' 역사관을 통해 조선의 사회사를 연구한 역사학 교수 유승원은 조선시대 정치, 경제, 이념, 계급을 분석한 [사대부시대의 사회사](2020)에서 "지배계급의 성격을 기준으로 한국사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개관해 볼 때, 원시사회 이후 계급분화의 진전으로 귀족사회가 성립한 다음 나말여초에는 귀족사회에서 문벌사회로, 여말선초에는 다시 문벌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사회전환을 이룩"(같은책, <머리말>)한 것으로 정리하며 '고대-중세-근대-현대' 등의 '서구중심주의' 역사발전단계론과 차별되는 "한국사의 진정한 내재적 발전"(머리말)의 기본 줄거리를 설정한다. 유승원은 중국이라는 아시아 강대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체제와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힘은 "역사의 큰 고비, 특히 왕조교체기마다 사회를 대대적으로 혁신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사회전환을 성공시켰던 역량이 이후의 문화 발전과 왕조 장수의 원동력이 되었다"(머리말)는 '잠정적 결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조선초 체제혁명을 이끈 '사대부(士大夫)' 계급의 '진보성'과 '개혁성'을 중심으로 조선의 사회사를 분석하고 있다.


"태조 3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국가운영의 전반적인 틀을 제시해 놓은 사찬(私撰) 형식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나왔고, 태조 6년에는 조준(趙浚)의 주도 하에 정부의 조직이나 행정법규를 담은 국가편찬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나왔다. 이 [경제육전]을 모본으로 하여 태종-세종대에 걸쳐 여러 차례 새로운 법령을 증보하는 형식으로 법전이 개수되었다. 세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영구히 준수할 법전을 편찬할 것이 결정되고, 세조대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편찬과 개수를 거듭한 끝에 완성을 본 것이 바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경국대전]은 이제까지 집적된 각 법조문을 일반화, 추상화하여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법전으로 만든 완전히 새롭고도 본격적인 법전이었다. 행정의 '예측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완성도 높은 최초의 법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법전이다."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4부 1장 2절. 관료제>,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조선은 '법치국가'였다. 근대적 의미의 '입헌군주제'는 아니지만, '민본주의'와 '위민정치'의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士大夫)'가 '왕도정치'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관료제' 정치체제의 중심에서 공자가 말한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실현하고자 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은 새로운 국가 조선의 조직과 운영을 논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스스로 지어 태조 이성계에게 바쳤고, 이후 왕명을 받은 조준 등이 공식적으로 [경제육전]을 편찬하는데 이 저술들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토대가 된다. 물론, 강대국인 중국 황제에 의한 '책봉'의 형식을 받아야 했던 당시 조선의 '형법'은 중국의 [대명률]이었다지만, 조선은 [경국대전]을 통해 사회공동체 내의 세부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운영한 '법치국가'였다. 왕조시대였으나 왕권을 제한하고 지적, 윤리적 교양을 지닌 '사대부'를 과거시험 등을 통해 엄격히 선발하며 이 '사대부'들의 집단지도체제로써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 조선초기의 역동적인 '진보성'과 '개혁성'이었다.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되 '정당한 소유권' 보호를 위해 왕실과 대지주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모든 민중에게 세금을 물리는 '개새제(皆稅制)'와 '누진세'만큼 개혁적이지는 못하나 소득에 비례해 세금을 부과하는 '비례세(比例稅)'의 원칙을 조선시대 마지막까지 법률로 유지했다. 이러한 사회체제의 중심 주체가 바로 '사대부(士大夫)'였다. 조선은 '양천제'로서 이 '사대부'는 '양인'인 평민이라면 누구나 과거시험을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천인'은 국가에 죄를 지은 자로서 의무와 권리가 법적으로 제약된 신분이었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양인'은 '사대부'가 되어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물론 '법제적'이고 '형식적' 신분제였고 실질적으로 '양인'으로서 평민이 '사대부'가 되는 길은 기록으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유승원 교수에 의하면, 이는 법적 민주주의와 평등이 자리잡은 현대사회에도 실질적으로 지배와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것처럼 '계급'의 문제는 조선시대의 한계라기 보다는 '초시대'적 문제라고 하면서 조선의 '법제적 신분제'로서 '양천제'의 '진보성'을 강조한다.



'사대부(士大夫)'로 대표되는 조선의 '진보성'이 일제 식민지 등을 거치지 않고 "참다운 내재적 발전"을 지속하였다면, 물리적 폭력으로 군림하던 '귀족'이 타도되면서 서구의 신분해방이 이뤄진 것과 대비되어 '천인'으로서의 '노비'를 없애면서 우리식의 신분해방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며, 조선에서 구축된 '법제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스스로의 역사적 과제를 부여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론짓고 있다.


"조선의 평민은 지배계급과 함께 신분적 제일성, 즉 '법제적 평등'을 누린지 이미 오래였다... 조선말에 토지개혁의 요구가 나오고 해방 이후 남북한 모두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실질적 평등'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어 있었던 것이다."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6부 2장 3절. 약간의 전망>,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면 여말선초에 '진보'적이었던 '사대부'의 성리학 이념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채 보수화되고 '사대부'는 확고한 대자적 지배계급으로서 '양반'이 되어 특권을 세습하면서 같은 '양인'이면서도 평민과 차별되며, 서얼이나 중인들을 역시 차별화하면서 왕조를 중심으로 '문벌화'된다. 지적, 윤리적 교양인이자 중소지주로서 '사대부'는 그 자체로 취약한 지배계급이었으므로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가 필수불가결하였다. 그러나 '사대부'의 '진보적 개혁성'이 무디어지고, 어리석은 자들이 왕족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세습받는 왕조체제가 근대로까지 이어지면서 그 왕권 주변에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 등의 '문벌사회'가 고려말처럼 다시금 반복된다.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한 그의 혁명가적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변혁지향의 이론이나 실천운동이 민중에게 절실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도 운수가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전봉준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민란의 시대], <1부.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사대부' 자격의 엄격한 관문이었던 '과거시험'은 중국 수나라부터 시작되었고 우리 고려시대부터 도입된 제도로서, 나름대로 객관적 관리등용 제도였지만, 지역적으로 또한 계급적으로 차별과 소외의 폐해도 심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과거시험에서 수차례 낙방한 '황소의 난'으로 인해 멸망했고, 청나라말 강남에서 과거시험 4수 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한 홍수전은 마지막 과거 낙방 후 열병을 앓다가 '예수'를 접하고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썩은 왕조를 죽음으로 몰아갔다([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시안>, <강남>, 이유진).



'법적'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조선의 평민들, 조선 후기에는 그마저도 전체 사대부가 아닌 일부 '문벌세족'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권력은 소수의 가문이 독점하게 되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역'은 대놓고 차별을 당하는데, 과거시험에 연거푸 낙방한 평안도 출신 유생 홍경래는 세도정치가 시작된 1800년부터 10년의 준비 끝에 1812년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다. 우리 역사에서 이 반란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체제 변혁적 성격을 지닌다 하여 '관서 농민전쟁'으로 불린다.


재야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정조가 죽은 후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며 온갖 개혁정책을 무화시킨 정순대비와 이에 빌붙어 왕가에 며느리들을 보낸 안동 김씨 등 문벌의 '세도정치'가 본격화한 1800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조선의 마지막 100년'을 '민란(民亂)의 시대'로 설명한다.
차별적 과거정책에 분노한 '관서'의 홍경래는 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준비하지만 시대는 이미 정도전이 고려를 뒤집어엎던 때와는 달랐다. 다수 민중을 위한 경제적 토지개혁과 정치적 역성혁명을 소수의 '신진 사대부'가 이끌던 시대가 아니었다. 19세기는 다수 민중에 의한 '민란(民亂)의 시대'였다.

관서 농민전쟁의 패배 후에도 홍경래는 계속 민중의 체제변혁 열망에 소환되는데, '경래불사지설'과 '경래내조지설'이다. 여기에 아래 삼남(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정감록]의 '정씨왕조'는 조선초의 혁명가 정도전에 대한 도참사상적 은유였을지도 모르는데 현실 정치에서 전정, 군포, 환곡이 문란해져서 다수 민중을 끝없이 수탈하는 이른바 '삼정 문란'으로 인해 발생한 1861년의 '진주 민란'은 삼남 지방 전체에 민란의 불씨를 들불처럼 퍼뜨린 바 '삼남 농민봉기'로 불러야 마땅하다. 


"... 영남의 정가, 이가가 뒤에 영남에서 일어난 사건에 나타난 인물 누구일 수 있으며 주순장이 삼남 지방을 휘저은 이필제일 수도, 양명렬이 유흥렴일 수도 있다. 또 김수정이 말한 영남의 장사들은 진주 작변의 세력들로 점칠 수 있으며 광양 봉기의 잔당이 진주 작변과 새재 유회에 가담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새재 유회에 삼남 세력이 연계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이필제의 활약상을 보면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했다거나 최시형을 만나 봉기를 부추기고 필요인원을 요구했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그의 활동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민란의 시대], <2부. 성장하는 민중의식, 계속되는 민중봉기>,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1850년대 홍경래의 뒤를 이은 '관서' 민란의 주모자가 유흥렴이고 1860~70년대 삼남 지방을 휩쓴 민란의 주모자 중 하나가 이필제인데, 이필제라는 인물은 주성칠 등의 여러 가지 가명으로 다른 많은 민란을 조직한 조선 후기 '직업적 혁명가'로 추정된다. 1869년 지리산 일대에서 모의된 반란에서 관서의 유흥렴으로 추정되는 양영렬이라는 자는 이필제로 추정되는 주성칠을 만난 첫인상을 "그의 문사와 언어를 보니 반고와 사마천, 그리고 소진, 장의와 다름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바로 '직업적 혁명가'의 '사대부'적 이념상이다.
다수 민중이 세도정치의 수탈로 인해 인간답게 살 수가 없었고, 체제변혁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적인 '직업적 혁명가'의 시대를 거쳐 1894년 갑오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농민전쟁은 신분해방의 '반봉건'과 일본 등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는 '반외세'의 이념으로 규정된다. 


"(동학) 농민군은 일단 후퇴한 뒤 각지에 '집강소(執綱所)'를 차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폐정 개혁에 나섰다. 집강소는 농민 통치기구였고, 집강소 활동은 반봉건 운동이었다...
변혁을 추구한 세력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교단 조직을 이용하려는 의도 역시 품고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일본군에 의해 압송되는 와중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 [민란의 시대], <3부. 반봉건, 반침략의 동학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조선 후기 '민란'의 정점이었던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은 스스로 자정 능력을 상실한 조선 사회에 대한 다수 민중의 심각한 경고였고 신분철폐의 필연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역사적 기폭제였다. 같은해 개화파 정부가 발표한 '갑오개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 조선말 근대사회는 '사대부' 같은 소수가 아닌 다수 민중의 힘으로 작동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후 단발령과 1895년 민비 살해사건으로 촉발한 1차 의병전쟁과 1905년 을사 늑약 이후 2차 의병, 1907년 고종 강제퇴위 후 3차 의병 및 '13도 연합 서울 진공작전' 등은 신돌석, 안규홍 등 평민 의병장들을 소외시킨 '유림 의병'의 봉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수 민중의 힘으로 시대에 항거한 역사를 이었으며 일제강점기를 맞아 '국권수호 독립투쟁'으로 전환되었다.
김구 주석은 10대의 나이에 황해도의 동학 '애기 접주' 김창수였으며, 홍범도 장군은 평민들의 '의병투쟁'을 통해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지낸 '관서' 출신의 포수였다.


다수에 의한 '민주주의' 열망이 번지던 19세기와 20세기. 
우리 조선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단연 다수의 '민란'과 '농민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조직하던 '사대부'들과 그들의 이념은 더이상 조선초 전근대사회에서처럼 '진보'를 담보할 수 없었다.


***

1.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2.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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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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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부(士大夫)'의 '진보성'과 '민란(民亂)의 시대'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2020), 유승원 / [민란의 시대](2017), 이이화




"귀족의 주력 업무는 바로 외부로부터의 공동체 수호, 즉 군사적 기능의 수행에 두어졌다... 평민 출신의 '중갑보병(重甲步兵)'이 전투의 주력으로 등장하자 고대 아테네에서는 귀족정이 무너지게 되었고 로마는 공화정으로 이행하게 되었다... '사대부(士大夫)'의 역할은 통치의 두번째 목표인 공동체의 행복추구, 특히 통치주체의 자격강화를 통한 '사회공공성(社會公共性)'의 구현에 역점이 두어졌다...
국가, 군주, 그리고 지배계급의 '공공성'은 사대부시대에 들어와 최고조로 높아졌다. 그 이전의 문벌사회에서의 공공성과는 그 차원을 달리했을 것이다. 사대부는 이 점에서 근대 이전의 전세계의 지배계급 중에서 아주 독특한 존재이다. 과거(科擧)에 의해 선발된 관원들이 국정을 주도하면서 위민정치(爲民政治),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소리높여 주장했고 스스로 도덕적 수범으로서의 윤리의식을 가질 것을 부단히 강조했다."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2부 2장 2절. 사대부계급>,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사대부(士大夫)'라 하면, 흔히 조선시대 '양반'을 떠올린다. 절반은 맞다. '사대부'는 조선의 '지배계급'이었다. 한편 '양반(兩班)'은 고려와 조선의 '문반(文班)'과 '무반(武班)'의 합칭으로 각각 '문무관료'의 '반열'에 오른 국가권력을 통한 '지배계급'을 이르는 말이었다. 그러나 절반은 틀리다. '사대부(士大夫)'는 조선의 법제적 의미로는 5품 이하 중소관원을 이르는 '사(士)'와 4품 이상의 고위관원을 지칭하는 '대부(大夫)'의 합칭이나 원래는 '사회공공성(社會公共性)'을 위한 높은 윤리의식과 사회이념으로 무장한 '진보적 개혁세력'이었기 때문이다.

썩어빠진 '사대부 양반' 지배계급을 '진보적 개혁세력'이라니 의아하겠지만, 고려말의 권문세족과 그 대지주 약탈체제를 뒤엎은 조선의 '역성혁명' 과정에서 그 주동세력으로서의 신진 '사대부(士大夫)'와 16세기 조선 후기 대자적 계급으로서의 '양반'은 구분되어야 한다. 
14세기말의 고려는 체제 말기 현상으로 중앙 정치권력을 틀어쥐고 세습을 통해 토지 경제권력까지 강화한 '권문세가'들의 나라였고 다수 민중은 이 대토지소유자인 '권문세족'들에게 수탈당한다. '권문세가'는 외세인 원나라를 등에 업고 고려라는 국가공동체를 사유화하는데, 5백여년 후 19세기 '세도정치' 문벌가문의 계급지배 형태로 다시 반복되는 역사적 현상이지만 조선 후기 '양반' 계급은 본래 의미로서 '사대부(士大夫)'와 거리가 멀다.
고려말과 조선초(여말선초:麗末鮮初)에 등장한 '사대부(士大夫)'는 지배계급이었으되 '진보'적이고 '개혁'적이었다.


'서구중심주의' 역사관을 경계하며 '내재적' 역사관을 통해 조선의 사회사를 연구한 역사학 교수 유승원은 조선시대 정치, 경제, 이념, 계급을 분석한 [사대부시대의 사회사](2020)에서 "지배계급의 성격을 기준으로 한국사의 발전을 거시적으로 개관해 볼 때, 원시사회 이후 계급분화의 진전으로 귀족사회가 성립한 다음 나말여초에는 귀족사회에서 문벌사회로, 여말선초에는 다시 문벌사회에서 '사대부사회'로 사회전환을 이룩"(같은책, <머리말>)한 것으로 정리하며 '고대-중세-근대-현대' 등의 '서구중심주의' 역사발전단계론과 차별되는 "한국사의 진정한 내재적 발전"(머리말)의 기본 줄거리를 설정한다. 유승원은 중국이라는 아시아 강대국의 압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민족의 체제와 문화를 유지하고 발전시킨 힘은 "역사의 큰 고비, 특히 왕조교체기마다 사회를 대대적으로 혁신하여, 시대적 과제를 해결하고 사회전환을 성공시켰던 역량이 이후의 문화 발전과 왕조 장수의 원동력이 되었다"(머리말)는 '잠정적 결론'에서 찾을 수 있으며 조선초 체제혁명을 이끈 '사대부(士大夫)' 계급의 '진보성'과 '개혁성'을 중심으로 조선의 사회사를 분석하고 있다.


"태조 3년에는 정도전(鄭道傳)이 국가운영의 전반적인 틀을 제시해 놓은 사찬(私撰) 형식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이 나왔고, 태조 6년에는 조준(趙浚)의 주도 하에 정부의 조직이나 행정법규를 담은 국가편찬의 [경제육전(經濟六典)]이 나왔다. 이 [경제육전]을 모본으로 하여 태종-세종대에 걸쳐 여러 차례 새로운 법령을 증보하는 형식으로 법전이 개수되었다. 세조대에 이르러 마침내 영구히 준수할 법전을 편찬할 것이 결정되고, 세조대에서 성종대에 이르기까지 편찬과 개수를 거듭한 끝에 완성을 본 것이 바로 [경국대전(經國大典)]이다... [경국대전]은 이제까지 집적된 각 법조문을 일반화, 추상화하여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법전으로 만든 완전히 새롭고도 본격적인 법전이었다. 행정의 '예측가능성'을 최대한 끌어올린, 완성도 높은 최초의 법전이라는 점에서 주목을 받은 법전이다."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4부 1장 2절. 관료제>,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조선은 '법치국가'였다. 근대적 의미의 '입헌군주제'는 아니지만, '민본주의'와 '위민정치'의 정치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士大夫)'가 '왕도정치'에 입각한 강력한 중앙집권체제를 구축하고 '관료제' 정치체제의 중심에서 공자가 말한 '대동사회(大同社會)'를 실현하고자 했다. 
'역성혁명'으로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은 새로운 국가 조선의 조직과 운영을 논한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을 스스로 지어 태조 이성계에게 바쳤고, 이후 왕명을 받은 조준 등이 공식적으로 [경제육전]을 편찬하는데 이 저술들이 조선의 법전인 [경국대전]의 토대가 된다. 물론, 강대국인 중국 황제에 의한 '책봉'의 형식을 받아야 했던 당시 조선의 '형법'은 중국의 [대명률]이었다지만, 조선은 [경국대전]을 통해 사회공동체 내의 세부적인 권리와 의무를 규정하고 운영한 '법치국가'였다. 왕조시대였으나 왕권을 제한하고 지적, 윤리적 교양을 지닌 '사대부'를 과거시험 등을 통해 엄격히 선발하며 이 '사대부'들의 집단지도체제로써 '이상사회'를 구현하고자 한 것이 조선초기의 역동적인 '진보성'과 '개혁성'이었다. 토지소유권을 인정하되 '정당한 소유권' 보호를 위해 왕실과 대지주의 재산권을 제한하고, 모든 민중에게 세금을 물리는 '개새제(皆稅制)'와 '누진세'만큼 개혁적이지는 못하나 소득에 비례해 세금을 부과하는 '비례세(比例稅)'의 원칙을 조선시대 마지막까지 법률로 유지했다. 이러한 사회체제의 중심 주체가 바로 '사대부(士大夫)'였다. 조선은 '양천제'로서 이 '사대부'는 '양인'인 평민이라면 누구나 과거시험을 통해 접근이 가능했다. '천인'은 국가에 죄를 지은 자로서 의무와 권리가 법적으로 제약된 신분이었으나 적어도 법적으로 '양인'은 '사대부'가 되어 국가를 운영할 수 있었다고 하는데, 이는 물론 '법제적'이고 '형식적' 신분제였고 실질적으로 '양인'으로서 평민이 '사대부'가 되는 길은 기록으로도 극히 소수에 불과했다. 유승원 교수에 의하면, 이는 법적 민주주의와 평등이 자리잡은 현대사회에도 실질적으로 지배와 피지배계급이 존재하는 것처럼 '계급'의 문제는 조선시대의 한계라기 보다는 '초시대'적 문제라고 하면서 조선의 '법제적 신분제'로서 '양천제'의 '진보성'을 강조한다.



'사대부(士大夫)'로 대표되는 조선의 '진보성'이 일제 식민지 등을 거치지 않고 "참다운 내재적 발전"을 지속하였다면, 물리적 폭력으로 군림하던 '귀족'이 타도되면서 서구의 신분해방이 이뤄진 것과 대비되어 '천인'으로서의 '노비'를 없애면서 우리식의 신분해방을 이룰 수도 있었을 것이며, 조선에서 구축된 '법제적 평등'이 '실질적 평등'으로 나아가는 스스로의 역사적 과제를 부여받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결론짓고 있다.


"조선의 평민은 지배계급과 함께 신분적 제일성, 즉 '법제적 평등'을 누린지 이미 오래였다... 조선말에 토지개혁의 요구가 나오고 해방 이후 남북한 모두에서 토지개혁이 시행될 수 있었던 것은 결코 우연한 일이 아니다. '실질적 평등'이 시대적 과제로 대두되어 있었던 것이다."
-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6부 2장 3절. 약간의 전망>,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그러나 16세기에 이르면 여말선초에 '진보'적이었던 '사대부'의 성리학 이념이 시대를 따라가지 못한 채 보수화되고 '사대부'는 확고한 대자적 지배계급으로서 '양반'이 되어 특권을 세습하면서 같은 '양인'이면서도 평민과 차별되며, 서얼이나 중인들을 역시 차별화하면서 왕조를 중심으로 '문벌화'된다. 지적, 윤리적 교양인이자 중소지주로서 '사대부'는 그 자체로 취약한 지배계급이었으므로 '중앙집권'적 왕권의 강화가 필수불가결하였다. 그러나 '사대부'의 '진보적 개혁성'이 무디어지고, 어리석은 자들이 왕족이라는 이유로 권력을 세습받는 왕조체제가 근대로까지 이어지면서 그 왕권 주변에서 안동 김씨 '세도정치' 등의 '문벌사회'가 고려말처럼 다시금 반복된다.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한 그의 혁명가적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변혁지향의 이론이나 실천운동이 민중에게 절실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도 운수가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전봉준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민란의 시대], <1부.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사대부' 자격의 엄격한 관문이었던 '과거시험'은 중국 수나라부터 시작되었고 우리 고려시대부터 도입된 제도로서, 나름대로 객관적 관리등용 제도였지만, 지역적으로 또한 계급적으로 차별과 소외의 폐해도 심했다. 당나라 수도 장안은 과거시험에서 수차례 낙방한 '황소의 난'으로 인해 멸망했고, 청나라말 강남에서 과거시험 4수 도전에도 불구하고 결국 실패한 홍수전은 마지막 과거 낙방 후 열병을 앓다가 '예수'를 접하고는 '태평천국의 난'으로 썩은 왕조를 죽음으로 몰아갔다([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시안>, <강남>, 이유진).



'법적'으로 과거시험을 볼 수 있었지만, '실질적'으로 불가능했던 조선의 평민들, 조선 후기에는 그마저도 전체 사대부가 아닌 일부 '문벌세족'에 의해 무력화되면서 권력은 소수의 가문이 독점하게 되고 평양을 중심으로 한 '관서지역'은 대놓고 차별을 당하는데, 과거시험에 연거푸 낙방한 평안도 출신 유생 홍경래는 세도정치가 시작된 1800년부터 10년의 준비 끝에 1812년 '홍경래의 난'을 일으킨다. 우리 역사에서 이 반란은 우발적인 것이 아니라 체제 변혁적 성격을 지닌다 하여 '관서 농민전쟁'으로 불린다.


재야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은 정조가 죽은 후 어린 순조를 수렴청정하며 온갖 개혁정책을 무화시킨 정순대비와 이에 빌붙어 왕가에 며느리들을 보낸 안동 김씨 등 문벌의 '세도정치'가 본격화한 1800년부터 1910년 한일합방까지 '조선의 마지막 100년'을 '민란(民亂)의 시대'로 설명한다.
차별적 과거정책에 분노한 '관서'의 홍경래는 체제를 뒤엎는 '혁명'을 준비하지만 시대는 이미 정도전이 고려를 뒤집어엎던 때와는 달랐다. 다수 민중을 위한 경제적 토지개혁과 정치적 역성혁명을 소수의 '신진 사대부'가 이끌던 시대가 아니었다. 19세기는 다수 민중에 의한 '민란(民亂)의 시대'였다.

관서 농민전쟁의 패배 후에도 홍경래는 계속 민중의 체제변혁 열망에 소환되는데, '경래불사지설'과 '경래내조지설'이다. 여기에 아래 삼남(경상도-전라도-충청도) 지방에서 오래전부터 내려온 [정감록]의 '정씨왕조'는 조선초의 혁명가 정도전에 대한 도참사상적 은유였을지도 모르는데 현실 정치에서 전정, 군포, 환곡이 문란해져서 다수 민중을 끝없이 수탈하는 이른바 '삼정 문란'으로 인해 발생한 1861년의 '진주 민란'은 삼남 지방 전체에 민란의 불씨를 들불처럼 퍼뜨린 바 '삼남 농민봉기'로 불러야 마땅하다. 


"... 영남의 정가, 이가가 뒤에 영남에서 일어난 사건에 나타난 인물 누구일 수 있으며 주순장이 삼남 지방을 휘저은 이필제일 수도, 양명렬이 유흥렴일 수도 있다. 또 김수정이 말한 영남의 장사들은 진주 작변의 세력들로 점칠 수 있으며 광양 봉기의 잔당이 진주 작변과 새재 유회에 가담했다고 가정할 수 있다. 새재 유회에 삼남 세력이 연계되었음도 알 수 있었다. 이필제의 활약상을 보면 동학의 창시자인 최제우를 만나 동학에 입문했다거나 최시형을 만나 봉기를 부추기고 필요인원을 요구했다는 기록 등이 남아있다. 그의 활동영역이 광범위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 [민란의 시대], <2부. 성장하는 민중의식, 계속되는 민중봉기>,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1850년대 홍경래의 뒤를 이은 '관서' 민란의 주모자가 유흥렴이고 1860~70년대 삼남 지방을 휩쓴 민란의 주모자 중 하나가 이필제인데, 이필제라는 인물은 주성칠 등의 여러 가지 가명으로 다른 많은 민란을 조직한 조선 후기 '직업적 혁명가'로 추정된다. 1869년 지리산 일대에서 모의된 반란에서 관서의 유흥렴으로 추정되는 양영렬이라는 자는 이필제로 추정되는 주성칠을 만난 첫인상을 "그의 문사와 언어를 보니 반고와 사마천, 그리고 소진, 장의와 다름이 없었다"고 전하는데, 바로 '직업적 혁명가'의 '사대부'적 이념상이다.
다수 민중이 세도정치의 수탈로 인해 인간답게 살 수가 없었고, 체제변혁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적인 '직업적 혁명가'의 시대를 거쳐 1894년 갑오년 '동학 농민전쟁'이 일어나는데, 이 농민전쟁은 신분해방의 '반봉건'과 일본 등 외세의 침략을 배격하는 '반외세'의 이념으로 규정된다. 


"(동학) 농민군은 일단 후퇴한 뒤 각지에 '집강소(執綱所)'를 차리고 스스로의 힘으로 폐정 개혁에 나섰다. 집강소는 농민 통치기구였고, 집강소 활동은 반봉건 운동이었다...
변혁을 추구한 세력이 동학의 가르침을 따르면서 교단 조직을 이용하려는 의도 역시 품고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바로 전봉준이다...
전봉준은 일본군에 의해 압송되는 와중에 조금도 굴하지 않았다."
- [민란의 시대], <3부. 반봉건, 반침략의 동학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조선 후기 '민란'의 정점이었던 '갑오년 동학농민전쟁'은 스스로 자정 능력을 상실한 조선 사회에 대한 다수 민중의 심각한 경고였고 신분철폐의 필연적 요구를 관철하기 위한 역사적 기폭제였다. 같은해 개화파 정부가 발표한 '갑오개혁'이 그냥 나온 것이 아니다. 이제 조선말 근대사회는 '사대부' 같은 소수가 아닌 다수 민중의 힘으로 작동하는 단계에 이른 것이다.

이후 단발령과 1895년 민비 살해사건으로 촉발한 1차 의병전쟁과 1905년 을사 늑약 이후 2차 의병, 1907년 고종 강제퇴위 후 3차 의병 및 '13도 연합 서울 진공작전' 등은 신돌석, 안규홍 등 평민 의병장들을 소외시킨 '유림 의병'의 봉건적 한계에도 불구하고 다수 민중의 힘으로 시대에 항거한 역사를 이었으며 일제강점기를 맞아 '국권수호 독립투쟁'으로 전환되었다.
김구 주석은 10대의 나이에 황해도의 동학 '애기 접주' 김창수였으며, 홍범도 장군은 평민들의 '의병투쟁'을 통해 대한독립군 총사령관까지 지낸 '관서' 출신의 포수였다.


다수에 의한 '민주주의' 열망이 번지던 19세기와 20세기. 
우리 조선의 변화를 이끄는 힘은 단연 다수의 '민란'과 '농민전쟁'이었다. 그러나 이들을 조직하던 '사대부'들과 그들의 이념은 더이상 조선초 전근대사회에서처럼 '진보'를 담보할 수 없었다.


***

1. [사대부시대의 사회사 - 조선의 계급,의식,정치,경제구조], 유승원, <역사비평사>, 2020.
2.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3. [중국을 빚어낸 여섯 도읍지 이야기], 이유진, <메디치>,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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