칭기스의 교환 - 몽골 제국과 세계화의 시작
티모시 메이 지음, 권용철 옮김 / 사계절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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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짠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 결과로서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

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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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보는 5만 년의 역사 - 인류의 문화, 충돌, 연계의 빅 히스토리
타밈 안사리 지음, 박수철 옮김 / 커넥팅(Connecting) / 2020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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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짠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 결과로서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

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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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 연구사 / 1988년 2월
평점 :
절판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이고,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다"
- [국가와 혁명],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모든 인류의 역사를 '계급투쟁의 역사'라 규정하는 마르크스주의 관점에서 '국가'는, 지배계급이 피지배계급을 지배하고 억압하기 위한 기구, 더 나아가 지배계급의 이익을 지키는 '위원회(엥겔스)'에 불과하다. 부르주아(자본가계급)에 의한 '생산수단 독점'이라는 경제적 토대 위에 이러한 생산관계를 공고히 하는 상부구조로서 정치적 기구가 바로 '국가'라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의하면, 국가란 '계급지배의 도구'이므로 계급이 소멸되면 그 역할을 다하고 사멸된다. 프롤레타리아(노동자계급)는 '혁명'을 통해 정치권력을 장악하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생산수단'을 '사회화'함으로써 일체의 계급을 철폐하고 인류 역사에서 '마지막 계급'으로서의 소명을 완수하는데, 마르크스-엥겔스는 이 시기 사멸하는 '국가' 대신, 프랑스어 '코뮌'이나 독일어 '공동체(Gemeinwesen)'가 그 '최종적 형태'라고 한다. 
이것이 바로, 실현되지 않은 '공산주의', '코뮌주의' 또는 '공동체주의'이며, 그 내용은 "개인의 발전이 만인의 발전의 기초"가 되는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 공동체'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레닌은 [국가와 혁명]에서 계급사회 국가의 본질을 분석하고 사회주의 혁명을 통해 수립할 '노동자국가'는 기존 계급사회의 국가장치를 파괴함으로써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이행체제를 통해 '계급사멸(공산주의)'을 달성해야 하고 그와 함께 국가의 역할도 소멸된다고 주장한다. '부르주아 국가(State)'는 '사멸'되는 것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에 의해 '폐지'되고 '계급철폐'와 함께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준국가(Semi-state)'는 궁극에 '사멸'된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은 필연적으로 '폭력혁명'과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수반한다.




[국가와 혁명]은 소비에트혁명이 일어나기 직전인 1917년 8월과 9월에 발표된 저작으로서 계급국가의 정의와 분석으로부터 시작하여 엥겔스의 보충설명, 국가에 관한 각종 기회주의적 경향(카우츠키 류)에 대한 비판을 지나 1905년과 1917년 사이 러시아 혁명의 경험까지 기획하였지만, 임박한 실제 혁명의 정세를 맞아 제7장인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장을 시작하기 전에 중단된 '미완의 저작'이다.


"이 소책자([국가와 혁명])는 1917년 8월에서 9월 사이에 쓰여졌다. 나는 이미 제7장(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대한 계획을 구상해두었었다. 하지만... 계속해서 써내려갈 시간이 없었다. 왜냐하면 1917년 10월 혁명의 전야라는 정치적 위기가 나의 저술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그러한 '중단'은 반가운 것일 수밖에 없다..."
- 레닌, [국가와 혁명], <초판 후기>, 1917.11.30.


[국가와 혁명] 말미에 '임박한 혁명'을 실천하기 위해 펜을 놓고 밖으로 뛰쳐나가는 레닌의 '급박함'이 묻어나는데, 그는 소비에트 러시아혁명 후 출간된 이 '미완의 저작' <초판 후기>에 위와 같이 쓰면서 "아마도 1905년과 1917년 러시아혁명의 경험에 대한 저술은 먼 훗날로 미루어야 될 것"이라고 덧붙인다.
결국, 그 시기에 대한 기록은 레닌의 몫이 아니라 '혁명'으로 '국가'를 '장악'하고 '폐지'하고 '사멸'시켜야 할 후세의 '노동자계급'의 임무가 되었을 터, 그러나 '혁명'은 실패했고 아직까지 '계급'은 존재하며 '국가'는 건재하다.


체코의 현대적 '변증법적 유물론자' 슬라보예 지젝의 [레닌 재장전]에 따르면, 혁명 전의 레닌과 혁명 후의 레닌은 사상 및 실천적으로 구분되는데, [국가와 혁명]은 레닌의 혁명 전 사상을 표현하는 ‘마지막 저작’이 된다. 

레닌의 이 '미완의 저작'은 1976년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이며 알튀세르의 동료이자 제자인 에티엔 발리바르([레닌 재장전]의 저자 중 한 명이기도 하다)가 저술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한역판은 [민주주의와 독재])를 통해 요약 및 정리된다. 


[국가와 혁명]에서 레닌이 정리한 '국가론', 즉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레닌의 세 가지 테제는 다음과 같다. 


(1) 국가권력은 항상 단일한 계급의 정치권력이다. 
(2) 국가장치가 없이는 국가권력은 존재할 수 없다. 그리하여 기존 계급사회의 국가장치들은 혁명기에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한다.
(3) '프롤레타리아트 독재'는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기이다.


결국, 계급사회에서 국가를 통해 실현되는 '민주주의'는 결국 한 계급의 '독재'에 불과하다. 즉,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롤레타리아 민주주의와 동일하다.
이것이 바로, 마르크스-레닌주의 '국가론'의 결론이다.


마지막으로 '국가론'과 연관된 '민주주의'에 대한 레닌의 견해를 들어본다.


"민주주의는 처음에 자본주의에 대한 혁명적 투쟁을 치르는 프롤레타리아 계급과 융합되고, 이어 자본주의를 산산조각내며, 모든 부르주아 계급과 공화적인 부르주아지와 국가기구 그리고 상비군과 경찰과 관료제까지도 이 지구상에서 싹쓸어버리고, 그 대신에 보다 민주적인 국가기구로, 그것도 모든 대중을 포함하는 시민군을 형성하는 무장한 노동자들이라는 측면에서 본 국가기구로 그것들을 대체하게 된다는 사실로 귀결된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

1. [국가와 혁명],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2. [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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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 연구사 / 1988년 2월
평점 :
절판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1918), 칼 카우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자본주의 사회와 공산주의 사회 사이에는 하나의 사회가 다른 사회로 전환하는 '혁명적 이행시기'가 있다. 이 시기는 정치적 이행기에 해당하며 그 국가형태는 다름 아닌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독재'일 수밖에 없다."
- 칼 마르크스, [고타강령 비판], 1875.


독일 사회민주당은 1875년 고타에서 페르디난트 라살레의 '독일노동자총연맹'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아우구스트 베벨의 '사회민주노동당'이 합당하면서 탄생한다.
비스마르크식 강력한 보수주의 국가와의 결탁을 통해 사회주의를 달성하려는 '라살레주의'와 '계급지배의 도구'인 국가권력과 대결하는 '마르크스-엥겔스주의'가 결합하는 순간,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한 [고타강령]을 맹렬하게 비판한다.
[고타강령 비판](1875)은 '공산주의'로 가는 '정치적 이행기'로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전면 제기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조차도 당시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현실적으로 어떤 모습일지 알 수 없었기에 구체적인 이야기를 하지 않는다. 다만, 1871년 '파리 코뮌'이 바로 그 현실태라고 규정했다.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름 아닌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라고 이해할 수 있다."
- 칼 카우츠키, [프롤레타리아 독재], 1918.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1917년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에 대하여 정면으로 비판한 카우츠키의 1918년 저작이다. 제헌의회 소집과 보통선거권을 거부하고 착취자와 피착취자의 계급관계를 토대로 한 '계급민주주의'에 기반하여 중앙집중 권력을 구축한 레닌의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일당독재'의 맹아가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카우츠키의 방식으로 증명하고 있다. 
러시아 볼셰비즘 비판의 본질적 근거는 보통선거권과 '의회주의'에 기반한 '민주주의'였다. 카우츠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란, "우리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다름아닌 민주주의의 토대 위에 선 프롤레타리아의 지배라고 이해할 수 있다"는 한 문장의 규정으로 요약된다. 


카우츠키의 관점에서 '민주주의'란 다음과 같다. 


"민주주의는 때때로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사고를 억누르기도 하지만 프롤레타리아가 권력을 획득하고 사회주의를 실현하기 위해서 필요한 만큼 성숙해 가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수단이다… 그런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가 국가권력을 잡게 될 경우 프롤레타리아는 즉각 경제발전의 방향을 사회주의로 향하게 하고, 즉시 사회의 전반적 복지를 증대시킬 수 있는 충분한 물적·정신적 권력수단을 갖게 될 것이다."
- 칼 카우츠키, 같은책.


레닌은 카우츠키의 이 저작에 대하여 그 유명한 '배신자' 낙인을 유래시킨 [프롤레타리아 혁명과 배신자 카우츠키]라는 글을 통해 '의회주의'의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아닌 '계급민주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핵심임을 주장하였고, 카우츠키는 [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이라는 위 반박문건을 통해 1789년 프랑스혁명의 자코뱅주의(이른바 '1차 파리코뮌')와 1871년 파리코뮌(이른바 '2차 파리코뮌')의 역사를 고찰하면서, 러시아 볼셰비즘을 마르크스의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닌 '테러리즘'으로 규정하기에 이른다. 
카우츠키는 이 문건에서 "전세계에서 프롤레타리아는 운동에 돌입해 있으며 그들의 국제적인 압력은 매우 커져서 이제 어떤 경제적인 발전도 자본주의적인 성격은 물론 사회주의적인 성격을 함께 띠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면서 사회주의 이행에 대한 낙관적인 전망을 토대로 "의회주의와 민주주의는 국민의 유형과 그 계층에 따라서 다양한 내용과 형태를 가질 수 있다. 의회 내에서 부르주아 정당들이 우세할 경우 '의회주의'는 부르주아적 성격을 띤다… 그러나 의회 내에 사회주의 다수파가 자리를 잡게 되면 이 모든 것은 근본적으로 변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고 규정하며 사회주의 혁명에서 '국민의회'의 역할을 다시금 강조한다. 
이러한 카우츠키식 '사회민주주의'는 이후 [에르푸르트 강령]으로 다시금 구체화된다.
'민주주의'와 '독재'를 철저히 구분하는 카우츠키의 결론은 다음과 같은 문장들로 요약된다. 


"보통 및 평등선거권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적 지배의 특징이 아니다.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혁명 시기에 평등선거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차별선거를 도입했으며… 오랜 기간의 힘든 투쟁을 거치고 나서야 비로소 프롤레타리아들이 보통 및 평등선거권을 쟁취했다는 것은 너무도 잘 알려진 사실인데… 보통 및 평등선거권으로 이루어진 민주주의는 주먹에 의한 계급투쟁을 머리에 의한 계급투쟁으로 바꾸는 방법이며 자신의 적들에 비해서 지적으로나 도덕적으로 더욱 성장해 있는 계급만이 승리를 거둘 수 있도록 만드는 방법이기도 하다."
- 칼 카우츠키, 같은책.


이에 대해 1920년 레온 트로츠키는 같은 제목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라는 글로 다시 카우츠키의 '진화론적이고 자연법적'인 사회주의 이행강령을 비판하게 된다.
 
"코뮌은 형식적 민주주의의 살아있는 부정이었다."
- 레온 트로츠키, [테러리즘과 공산주의], 1920.


위 저작은 카우츠키의 논문인 [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을 같은 제목을 걸고 반박한 레온 트로츠키의 글이다. 
스탈린의 '일국 사회주의'에 대한 평생의 비판자이며 '불구대천의 원수', 한편으로는 영구혁명론자이자 이후 소비에트연방에서도 끝내 복권되지 못한 트로츠키답지 않게 러시아 볼셰비키 혁명 후 '일당독재'와 '노동의 군사화'의 필요성을 강하게 주장하고 있다. 
외부적으로 유럽 선진 자본주의 국가들의 프롤레타리아 사회주의 혁명을 기다리면서 러시아 내부적으로는 부르주아 계급은 물론 러시아 사회혁명당 및 멘셰비키 등 사회주의 혁명의 적들에게 포위된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지키기 위해서는 부르주아 민주주의인 '의회주의'와 보통선거권 따위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보다 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독재가 불가피하다는 주장이 이 글의 요지다. 
이론이 아니라 실천이 중요하다는 관점에서는 수긍이 갈 수 밖에 없다. 사회주의 적들과의 내전으로 인해 파괴된 러시아 산업을 지키고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권력을 지키기 위해서는 볼셰비키의 배타적 권력이 필요하다는 절실함이 묻어나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후의  스탈린주의와 교차점을 이루는 주장이기도 하다. 
트로츠키에게 '프롤레타리아 독재'로서 "코뮌은 형식적 민주주의에 대한 살아있는 부정이었다". 
그럼에도 슬라보예 지젝에 의하면 스탈린과 트로츠키의 궁극적 차이점은 이것이다.


"스탈린에게 '레닌은 영원히 산다.' '자신이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 외설적 영혼, 권력의 도구가 되어 인공적으로 생명을 부지하고 있는 영혼으로 말이다. 트로츠키에게, 죽은 레닌은 조 힐(누명을 쓰고 죽은 미국의 노동운동가)처럼 살아 있다. 같은 이데아를 위해 투쟁하는 민중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그도 살아 있다."
- 트로츠키의 [테러리즘과 공산주의]에 대한 슬라보예 지젝의 <서문>, 2007.


결국, 1917년 소비에트 러시아혁명 이후 정세를 뺀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무의미하지만, 두 인물의 '철학적 논쟁'에서 우리는 '민주주의'와 '독재'라는 정치적 개념을 추출하게 된다. 


"마르크스주의 국가론에 있어서는, '모든 민주주의는 계급독재'이다."
- 에티엔 발리바르, [민주주의와 독재 -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 1976.


스탈린식 '일국 사회주의'에 대항하여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재정립하려는 프랑스 공산당 이론가 루이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동료였던 에티엔 발리바르는 레닌의 [국가와 혁명](1917)의 정식화를 소환하면서 '계급사회'에서 "모든 민주주의는 계급독재"라 규정한다. 부르주아 사회의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계급의 '독재'를 은폐하고 있으며, 그러므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노동계급에 의한 광범위한 '대중민주주의'라는 것이다.


더 나은 세상으로의 '혁명'과 그 '정치적 이행체제'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정치권력의 정점으로 '국가론'이 중요하던 시대의 심각한 논쟁이었을 것이다.
이제, '정치권력' 못지 않게 '시민사회'에서의 '헤게모니 투쟁'이 중요한 시대에서는 오래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다시 되물어 보자.


지금 우리 시대 '의회 민주주의' 같은 '형식적 민주주의'는 '자본 독재'의 다른 이름은 아닌지.


***


1.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 칼 카우츠키 지음,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2. [트로츠키:테러리즘과 공산주의], 슬라보예 지젝 서문 / 레온 트로츠키 지음, 노승영 옮김, <프레시안북>, 2009.
3. [민주주의와 독재],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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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키아벨리의 가면
루이 알튀세르 지음, 김정한 외 옮김 / 이후 / 200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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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 알튀세르의 '고독' : 후기 알튀세르 유고집
-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저는 필요한 변형을 가하면, 자연법 철학자들이 국가의 역사에 관해 내세우는 교훈적인 담론에 대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와 아주 동일한 방식으로 대응한다고 주장하고자 합니다... 국가가 법과 자연에서 태어났다고 말하는 대신에, 그는 국민국가가 될 만큼 충분히 지속하고 강력해지려면 국가가 어떻게 탄생되어야 하는지를 말해줍니다. 그는 법의 언어로 이야기하지 않으며, 모든 국가의 필수불가결한 무장력의 언어로 이야기하고, 국가의 시작에 필연적인 잔인성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어떻게 해서든 종교를 이용해야 하는 종교 없는 정치의 언어로, 도덕적이어야 하지만 도덕적이지 않을 수도 있어야 하는 정치의 언어로 이야기합니다. 그는 계급들간의 투쟁의 언어로 이야기하며, 권리, 법, 도덕은 그에 적합한 부차적인 장소로 배치합니다."
- [마키아벨리의 가면], <부록 - 마키아벨리의 고독>, 루이 알튀세르.


'철학(哲學)'은 추상화(抽象化)'다.
'구체적 사실'들 속에서 그 '현상'들의 원인들을 이론화하는 것이 각각의 영역에서의 '과학'이라면, 이들의 흐름을 꿰뚫는 '본질'을 '추상화'하여 거대한 사상적 논리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철학'이다. 사회구성체로는 경제적 토대인 하부구조의 결정적 영향을 받는 정치와 문화의 상부구조 중에서도 가장 '추상'적이고 막연하다. 그리하여 마르크스에게는 '허위의식'으로서 이데올로기였고 알튀세르에게는 역설적으로 '현실적인 힘'이었으며 유발 하라리에게는 반대로 '사피엔스'의 1차 '인지혁명'의 키워드였다. 
'철학'은 '추상'이고 '허위의식'이지만, 그 이상의 '현실적 힘'이다.


프랑스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1918~1990)는 20세기 말 한국에서 잊혀졌다.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다시 마르크스 자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건 좌파의 흐름에서 90년대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타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론가 중 하나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인데 평생 정신분열증으로 살다가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그는 1978년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끝으로 더이상 저작을 발표하지 못하나,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유고'들이 속속 출간된다.

'인간주의'적 청년 마르크스와 '구조주의'적 노년 마르크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철학'과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주체 없는' 사회구성체에서의 경제적 '최종심급'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와 관계되는 복합적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으로 확장한 '국가론',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은 알튀세르가 한국에 들여온 사상들이었다. 이후 몇 번의 '자기 비판'과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제자들과의 결별이 그의 '정신분열'의 영향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과 사상은 어렵다.

21세기 초, 우연히 발견한 그의 첫번째 유고작은 [마키아벨리의 가면]이었다. 이후 거의 20년 가까이 지나 [무엇을 할 것인가?], [검은 소] 등의 유고집이 편집되어 국내에 소개되고 그 사이 2011년에는 알튀세르 전공학자들의 글들이 '추모집' 비슷한 [알튀세르 효과]라는 900여 쪽의 책으로도 묶였다.

'과학'의 역사에서 '수학'의 대륙을 발견한 고대 그리스 탈레스로부터 '물리학'의 대륙을 발견한 갈릴레이와 뉴턴, 그리고 데카르트, '역사'의 대륙을 발견한 마르크스의 '철학'적 계보를 이어가려던 루이 알튀세르는 근대초의 이탈리아에서 '정치학'을 연 니콜로 마키아벨리를 만나서 그의 '가면'을 쓴 채 그의 '고독'을 논한다. [마키아벨리의 가면]은 1972~1980년까지 마키아벨리에 관한 알튀세르의 강의록을 '마키아벨리와 우리'라는 제목으로 엮은 것이다.

알튀세르에 의하면, 마키아벨리는 '공화주의자'도 '군주주의자'도 아니다. "마키아벨리는 오직 하나의 정부 형태에만 관심이 있다. 즉, 국가를 지속시켜줄 수 있는 정부 형태"([마키아벨리의 가면], <2장>). 분열된 이탈리아에서 현존하지도 않고 존재할 수도 없는 '이상적' 국가형태를 매우 현실적인 방법으로 실현하고자 한 마키아벨리는 한 지방에서 홀로 고독하게 세력을 키우는 체자레 보르지아라는 '군주' 또는 '왕자(The Prince)'를 현실적 잠재태로 설정하고 그 유명한 '사자와 여우' 의 비유로써 도덕윤리와 분리된 하나의 현실적 '정치이론'이라는 '과학'의 대륙을 발견했다. 그러나 마키아벨리의 이상은 역시 현실에서 실현되지 못한다.
이것이 마키아벨리가 마르크스처럼 '고독'한 이유이며, '필연적이지만 불가능한 것'을 추구한 루이 알튀세르 자신이 마르크스와 마키아벨리의 '가면'을 쓰고 주장하는 내용이다.


"변증법의 기본명제는 추상적 진리는 없으며 진리는 언제나 구체적이라는 것이다."
- [한 걸음 앞으로, 두 걸음 뒤로], <R. 변증법에 대한 몇마디. 두 변혁>,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레닌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치, 계급관계,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두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죠) 계급투쟁의 상태로 필연적으로 향하는 그러한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 [검은 소], <2장. 22차 당대회의 모순>, 루이 알튀세르.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다. 스탈린의 '1국 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을 선언하고 하나의 '현실 정치체제'가 된 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서 '의회주의'를 병행하는 유럽 공산당들은 노선 전환을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에서 '필연'적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수정하는 '유로 코뮤니즘'의 출현이다.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마르크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이 기획에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 테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알튀세르의 제자이자 젊은 동료로서 1965년 [자본론을 읽는다]의 공저자이기도 한 에티엔 발리바르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하여](국역:[민주주의와 독재])가 이론적 포문을 열었고 이에 대한 보완과 공산당 지도부에 대한 문제제기 형태의 글이 알튀세르의 [검은 소]인데, 본인 또는 "이미 안다고 가정된 자"라는 가상의 인물과 자기 인터뷰하는 형식의 문답집이다. [검은 소] 제목의 '철학'적 의미는 '깊은 어둠 속에서 서로 구분할 수 없는 검은 소들'인데, 19세기 프랑스 화가 폴 위에의 <올가트 절벽 위의 검은 소들>처럼 위험에 처한 현실을 은유할 수도 있겠다.

마르크스주의에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정치체제 이전에 '역사유물론'의 '과학'과 '유물변증법'의 '철학'의 사상체계 상 '필연적' 개념이다. "인류의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고 혁명적이었던 근대 자본주의 부르주아 계급은 현대에 이르러 소수의 지배계급으로서 다수의 프롤레타리아 계급을 양산하면서 이 절대다수의 노동계급은 계급 자체를 철폐하고 '무계급사회'를 건설할 역사적 임무를 부여받는다는 것이다. 이 '무계급사회'인 공산주의'는 이상향이며, '이행기'로서 절대다수 노동계급의 독재인 '프롤레타리아 독재'가 필연적으로 수반되는데, '부르주아 민주주의'가 '부르주아 독재'의 다른 이름이듯,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절대다수 노동인민의 '독재'이므로 '이론적'으로 다수의 '민주주의'가 될 수 밖에 없다. 이렇게 계급이 철폐되면 '공산주의'에서 '민주주의'가 완성된다는 것이다.


"... 마르크스가 정초한 ('역사'라는)'과학'의 유일한 대상은 그가 서로 다른 생산양식이라고 불렀던 것에 속하는 서로 다른 사회구성체들 내의 '계급투쟁의 법칙'입니다."
- [검은 소], <5장.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하여>, 루이 알튀세르.


루이 알튀세르에게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그람시의 진보적 정치정당으로서 '현대의 군주'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같은 '이상적 현실'이라는 지점에서 마주친다. '계급투쟁'의 엄연한 현실이 스탈린주의적 '선언'에 의해 소멸할 수 없듯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학' 또한 '단어'를 없앤다고 해서 소멸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알튀세르가 보기에 1976년 프랑스 공산당 22차 당대회는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단어'를 폐기함으로써 역설적으로 그 '필연적' 개념을 '해방'시켰다는데, 그는 당강령 속에서 사멸해 가던 개념이 다시금 부활되어 현실 속에서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이라는 마르크스주의적 방식으로 논의되기를 희망했다. 그러나 그의 '이론적 계급투쟁'으로서 '철학'적 작업은 '실천적 계급투쟁'을 끝내 담보하지 못한 채 '유고집' 속에서 침묵하고 있다.


"현대의 군주, 즉 신화, 군주는 실제의 한 인격, 하나의 구체적인 개인일 수는 없다. 그것은 오직, 이미 인정받고 있으며 또 어느 정도까지는 행동을 통하여 스스로를 확인한 하나의 집단의지가, 그 속에서 하나의 구체적인 형태를 취하기 시작하는 유기체 혹은 복합적 사회요소일 수 밖에 없다. 역사는 이미 이러한 유기체를 보여 주었는데 그것이 바로 정치정당-보편적이고 전체적으로 되고자 하는 집단의지의 효소들이 함께 모여진 최소의 세포-이다."
- 안토니오 그람시, [옥중수고Ⅰ](1929~1935), <현대의 군주>,
‘마키아벨리 정치학에 대한 간단한 주석’ 중.
 

안토니오 그람시는 자신의 [옥중수고]에서 역시 이탈리아 사람답게 [군주론]의 저자 마키아벨리에 주목한다. 즉, "마키아벨리 이전에는 정치과학이 유토피아의 형식을 빌어 표현되거나 현학적인 논술의 형식으로 표현"되었으나 "마키아벨리는 이 양자를 결합하여, 교의적, 합리적 요소를 '대장(군주/왕자/체자레 보르지아)'이라는 인격체 속에 육화시킴으로써 자신의 개념에 상상적이고 예술적인 형식을 부여"하였으며, "순수히 이론적인 추상"으로서의 군주를 통해 궁극에는 민중과 하나가 되고, 이 과정에서의 발화된 정치적 정열과 신화의 요소들이 실존하는 '군주'를 통해 이상적인 '군주론'이라는 '정치적 선언'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마키아벨리의 '고독한 군주'는 '귀족'과 끊임없이 투쟁한다. "인민의 목표는 군주의 목표보다 명예롭기 때문([군주론],<9장>)"에 아무리 해도 만족시킬 수 없는 '지배계급 내 적들'인 '귀족'보다는 다수 '인민'의 지지를 받아 '국민국가'를 건설하고 권력을 유지하는 것이 더 낫다는 것이다. 물론 마키아벨리는 '계급투쟁'의 현실을 논하지는 않는다. 다만, 그의 '정치과학'에서의 이와 같은 '국가론'과 '권력론'은 이상적이라 할지라도 '필연적'이고, '불가능'하나 추구할 수 밖에 없는 방향이자 역사의 경향성이다. 더구나 지금 이 시대는 부르주아계급들의 '과두정적 공화국'을 딛고 다수 인민의 힘으로 전진할 수 밖에 없는 '민주주의적 공화정'의 시기다.


"진정 그람시는 피지배계급의 권력 쟁취 이전의 '자신의 헤게모니'를 확보해야 할 필요성을 열렬히 강조했던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였다. 마르크스주의의 모든 고전들은 적절하고도 분명한 방식으로 다음의 두 가지를 말했다. 1) 노동자계급의 전위는 자신의 영향력을 최대한으로 확장해야 하며 '자신의 관념'이 가장 많은 수의 지지자들에게 수용되도록 만들어야 한다. 2) 노동자계급의 당파는 자신의 영향력, 자신의 '헤게모니'를 자신과 가까운 대중조직들에까지 확장해야 하며, '권력 쟁취'에 필수불가결한 동맹을 이 조직들과 함께 형성해야 한다. 그람시는 이 두 가지 테제를 지지하지만, 그는 이 두 가지 테제에 세 번째 테제를 추가한다. 노동자계급은 '권력 쟁취' 이전에 사회 전체 안에서 헤게모니적인 것이 되어야 한다는 테제를."
- [무엇을 할 것인가?], <2장. 안토니오 그람시와 절대적 경험주의>, 루이 알튀세르.


'국가'를 "강제의 철갑을 두른 헤게모니"([옥중수고])로 규정한 그람시에게 '헤게모니'는 노동계급 "당파의 관념이 취하는 영향력과 그 관객을 사회 전체로 확장하는 것, 국가를 장악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또한 시민사회 권력의 중심들을 장악해 결국 시민사회 그 자체를 장악하는 것([무엇을 할 것인가?], <2정>, 루이 알튀세르)"이기도 하다. 즉, 다수 인민들은 공적인 영역에서 국가권력 장악만이 목표가 아니라 사적인 영역인 일상 속에서 '헤게모니'를 장악해야 한다는 것인데, '계급소멸' 자체가 목표가 아니라 다수의 직접 민주주의 힘으로 그 차이를 무화시키는 과정 자체가 목표일 수도 있겠다. '재벌해체' 등의 경제적 생산관계 재편은 오히려 정치권력을 잡은 후에 더욱 시도조차 못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일련의 민주정부를 보며 경험했다. 유일한 방법은 정치권력자에 대한 대리주의적 의탁이 아닌 일상에서의 '계급투쟁'이다.


"마키아벨리의 의식이라는 '가면' 속에서,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바로 나 자신에 관한 것이었다."
- 루이 알튀세르.


정치'를 도덕, 윤리 덕목과 분리시켜 근대 정치학의 기틀을 닦은 니콜로 마키아벨리는 '현실' 군주에게 선택받기 위해 '헌사'를 바치면서까지 국가를 유지하며 권력을 지키는 방안을 제출했고 후세에 '권모술수 정치가'와 같은 평가를 받기도 하지만 '공화정'이나 '군주정' 어느 것을 지지한 것이 아니라 사회과학으로서 '정치학' 자체를 지지하였으므로 알튀세르에 의하면 말년에 "나는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다"라고까지 말했다는 마르크스와도 같이 '침묵 속에서' 그 누구로부터도 이해받지 못한채 '고독'하다. 
그리고 이 '고독'은 정신분열 속에서도 끝까지 '이론적 계급투쟁'이라는 '철학'적 작업을 수행한 루이 알튀세르에게도 해당된다.

이들의 '고독'을 이해하기 위해 우리는 그들의 사상 자체, '원전(原典)'으로 돌아간다.


***

1.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2. [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3.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4. [옥중수고 1~2](1929~1935), 안토니오 그람시, 이상훈 옮김, <거름>, 1994.
5. [군주론](1513), 니콜로 마키아벨리, 박상훈 옮김,<후마니타스>,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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