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궁예
이재범 지음 / 푸른역사 / 2000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미륵 중앙집권국가 '태봉' vs. 호족 지방연합국가 '고려'
- [슬픈 궁예], 이재범, <푸른역사>, 2000.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로서 그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혹은 이르기를,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때 옥상에서 하얀 빛깔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단오)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으며, 또 불꽃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기르지 마십시오.' 하여 왕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라고 하였다. 사자가 강보 속에서 들어내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 손으로 찔러서 한쪽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수고하며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유희를 그치지 않으니 그 유모가 말하기를, '네가 태어나서 나라의 버림을 받았으나 나는 차마 못하여 몰래 기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너의 미친 행동이 이러하니 반드시 남이 알게 될 것이며, 너와 나는 함께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느냐.' 하였다. 궁예는 울며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는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을 없게 하겠습니다.' 하며 세달사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가 이곳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열전 권10 - 궁예전>, 김부식, 1145.


우리 역사 10세기 전반 신라 말부터 고려 건국까지 약 50여 년의 기간을 '후삼국시대'라 한다. 이 시기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재건한 사람이 궁예(弓裔)다. '고조선'이든 '조선'이든 국호는 '조선(朝鮮)'인데 구분을 위해 오래된 '조선'은 '고(古)'를 붙였고, '고구려'든 '고려'든 국호는 '고려(高麗)'인데 역시 구분을 위해 오래된 '고려'는 '구(句)'를 삽입했다. 물론 궁예의 다음 국호 '마진' 같은 고유 국명이나 우리식 나라이름이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정사' 기록이 전하는 '공식 국명' 얘기다.

역시 '후삼국시대'라는 교과서적 역사시기 구분을 벗어나 당시 남쪽의 통일신라 말 정세를 보면 골품제를 기본으로 한 고대 귀족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했고 북쪽의 발해는 요동사회의 통합력을 잃어가는 시기, 이른바 한반도와 요동의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할만 하였다. 고대국가의 중앙권력으로 보장받던 귀족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중앙왕조의 몰락과 함께 각 지역에서 '군벌(軍閥)'의 형태인 '호족(豪族)'으로 등장하는, 지금으로 치면 '지방자치'가 더 강력한 시대일 수도 있겠다. 

박사 학위 논문이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인 경기대 이재범 교수는 '후삼국시대' 대신 '전국시대' 또는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호족시대'로 따로 구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며 '후고구려' 궁예에 관한 대중서 [슬픈 궁예]를 맺는다. 단순히 '후삼국시대'로 보면 궁예, 견훤, 왕건, 신라왕조는 '삼국시대'를 잇는 피튀기는 경쟁자였지만, '전국시대' 또는 '호족시대'로 본다면 궁예와 견훤은 '호족시대'의 기틀을 다졌고 왕건은 이 '호족' 세력에 기반한 새로운 '지방자치(?)' 연합왕조를 연 개창자다. 알다시피 고려 건국 과정에서 지방 호족과 정략결혼 정책을 편 태조 왕건의 왕비는 29명이었다고 한다.

'고려'라는 이름의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지금의 비무장지대에 갇힌 '철원'을 중심으로 '마진(摩震)', 태봉(泰封)'국을 이어가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쫓겨난 궁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악담'만이 유일하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 세종조 [고려사] 등의 역사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 12세기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 등에 등장하는 궁예는 역사 속 '위인'이라기 보다는 '악당'에 가깝다. 한 나라를 개창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연호까지 내세웠으나 막판에는 배고파서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고려왕' 궁예의 출생과 최후에 관한 기록은 우리 '정사' [삼국사기]의 '열전 권10'에서 유일하게 전한다. [삼국사기] '열전'의 마지막 권10은 '신라의 적' 궁예와 견훤에 관한 이야기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주지하다시피 '신라의 후예'였다.

'궁예 박사' 이재범 교수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후삼국시대'와 궁예가 재조명되던 2000년도에 [슬픈 궁예]라는 책으로 궁예에 관한 짧은 역사 기록과 전승되는 관련 이야기들 속에서 그 왜곡된 기억 이면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 궁예의 패망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철원에는 더 많이 흩어져 있다. 궁예가 항전했던 최후의 격전지인 '보개산성', 왕건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는 '성동리성', 그리고 궁예가 왕건과 싸우다 달아났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패주(敗走)골'이 그곳이다. 실제 보개산성에서는 지금도 신라 말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외에 궁예의 군사가 '명성산'으로 한탄을 하며 쫓겨갔다고 하여 '군사들의 한탄'이라는 뜻의 '군탄리'라는 지명도 있다. 
이러한 여러 지명 가운데서도 궁예의 최후 은거지로 알려진 '명성산(鳴聲山)'은 궁예의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한다. 명성산의 다른 이름은 울음산인데 이는 궁예와 그 부하들이 왕건에게 쫓겨간 것이 서러워 슬피 통곡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 궁예가 도망가다가 피신했던 곳이라고 전하는 개적(바위)봉굴, 궁예가 쫓겨가다 흐느껴 울었다고 하여 이름붙여진 느치골,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간 골짜기라고 하여 이름붙여진 한잔모텡이(골),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망원대를 세우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야전골은 당시 궁예와 왕건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케 한다."
- [슬픈 궁예], '1.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이재범, <푸른역사>, 2000.


역사에서, 특히 '승자의 기록'으로서 '정사(正史)'에서 '패자(敗者)'들은 잊혀질 뿐 아니라 왜곡되기도 하는데, 동서양을 막론하여 조선왕조 오백년 '불구대천'의 역적 정도전이 그랬고, 스탈린의 숙적 트로츠키가 그랬으며, 프랑스 왕정복고 귀족들의 원수 로베스피에르가 그랬다. 20세기말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통해 깨달음을 얻듯 '역적' 정도전을 '혁명가'로 새롭게 만났던 나는 2000년도 대하드라마를 통해 '폭군' 궁예의 '미륵(彌勒)불'로서 면모를 보았고 이를 뒷받침해준 책이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였다.

물론, 민중을 돌아보지 못하여 쫓겨난 '폭군' 궁예가 '미륵불'이라 평가하기에는 그 근거로서 역사의 기록이 없다. 일반인에게 궁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가 전부라고 보면 된다. 일생을 일제에 대항한 독립투쟁과 주체적 역사관 정립투쟁으로 일관하신 존경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목대왕의 철퇴]라는 미완의 역사소설을 지으셨다. '일목(一目)대왕' 즉 눈이 하나인 '애꾸눈' 대왕이 바로 고려왕 궁예다. 궁예에 관한 악의적 기록 이면에 흘러온 전승구담과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 우리 주체적 역사를 이어간 인물을 재조명하려던 단재 신채호의 소설은 궁예가 북원의 양길 휘하에 들어가는 대목에서 그친다는데, 그 외 궁예의 출신과 생애에 관한 궁금증은 당최 풀 수가 없다.

현재는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의 족보에 궁예가 일가였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그의 출신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궁예가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는 설이 통설이다. 신라 하대는 수많은 왕위쟁탈전의 시대였다. 이 와중에 밀려난 왕족의 피붙이라는 그의 배경은 왕위쟁탈전에 끼어들다가 암살당한 청해진의 장보고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즉 궁예의 외가가 장보고 집안이고, 장보고 숙청 과정에서 쫓겨간 애기 궁예가 장성하여 찾아간 세달사는 영주 부석사이며, 당시 그곳은 장보고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설, 이후 궁예가 통일전쟁에서 소백산 부석사를 접수한 후 신라왕의 초상화에 칼집을 내면서 신라 구체제 전복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물론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적 추리에 불과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시 군벌 호족들을 대규모로 통합하면서 한반도 중남부를 석권하고 왕건의 고려 개국의 기틀을 다진 궁예가 단지 '미친 짓'과 '관심법' 등의 일탈로 인해 쫓겨났다고 보기에는 역사의 개연성이 너무 굳건하다. 개성의 상인호족 왕건의 집안은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했으며, '고려'를 넘어서 '마진(큰 진인)'과 '태봉(큰 영토)'의 국호를 내걸고 새로운 통일국가를 기획하던 궁예의 '미륵불' 세상과 현실적인 '지역 호족 연합'의 '고려'를 붙들고 견훤과 정복전쟁를 하던 왕건 세력의 대전쟁에서 '이상'적이었던 궁예가 '현실'적이었던 왕건에게 패배했다는 그 역사적 개연성 말이다. '미륵'과 '현실'의 치열한 세계관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현실의 왕건은 그렇게 패주 궁예를 역사에서 지우고 악마화하였으나, '호족 연합국가'로서 '고려'와 '미륵 중앙집권국가'로서 '태봉' 중 어떤 체제가 민중을 위한 국가였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중앙귀족왕조를 칼로 내려친 궁예의 새로운 '미륵불' 세상은 한낱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가능한 게 아니라 당시 신흥 호족 세력의 발호라는 시대정신을 담았어야지 구시대적 중앙집권체제로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역사단계적 추정이 가능하다. 궁예 또한 대호족 양길의 휘하에서 하나의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그가 명주(강릉)를 접수한 894년에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한 것은 그 자신이 당시 중국 당나라 말기 각 지역 군벌인 '절도사'와 같은 한반도의 지역 군벌인 '호족'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승자인 왕건은 그 집안 자체도 호족이었던 덕에 당시 '호족시대'의 흐름을 탈 수 있었고, 패자인 궁예는 왕족이었으되 탁발승과 반란군 이력에 따라 호족을 통합했음에도 구시대적인 중앙집권왕조를 선택했다.


"음양오행설의 원리에는 오행상승(극)설과 오행상생설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원리는 오행의 운동원리를 기준으로 역사를 합리화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에 따르면 제왕은 오행의 운행에 의해 지위를 얻는다고 하는데, 운행의 순서는 상승(극)설(수-화-금-목-토)과 상생설(목-화-토-금-수)로 구분된다. 오행상승(극)설은 이전의 덕을 극복하고 나아간다는 것이며, 오행상생설은 이전의 덕을 보완하며 계승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오행상승(극)설은 '혁명'의 원리, 오행상생설은 '선양'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 [슬픈 궁예], '5. 미륵의 나라', 이재범.


한(漢)나라 고조 유방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중 '화덕(火德)'이자 붉은 '적제(赤帝)'로서 검은 물의 '수덕(水德)'을 상징하는 진(秦)나라 시황제의 뒤를 이었다. 즉, '오행상승설'에 따르면 물 '수(水)'를 이기고 대체하는 것이 불 '화(火)'니 '혁명'의 원리로서 '오행상승(극)설'로 보면 '혁명가' 유방은 물을 이긴 불의 제왕인 '적제'가 된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고조본기> 등에서는 노역을 가다가 도망친 유방이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길가를 막은 큰 뱀의 목을 베었을 때, 그 큰 뱀은 '백제(白帝)'인 바, 자신과 상극인 쇠 '금(金)'을 미리 친 것일 수 있겠다. 결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세운 한나라 역사가들에게 한나라는 오행의 이치를 거스르면서 영원불멸해야 하는 권력이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권력자들의 욕망일 텐데, 유방은 '오행상승(극)설'에 의해 혁명을 일으켰으나 권력의 안정을 위해 '오행상생설'을 더 따랐다고 하며, 이는 궁예를 몰아낸 고려 태조 왕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미륵불'이 되고자 했으나 절대권력을 꿈꾼 궁예는 진시황처럼 '수덕(水德)'을 표방하며 마지막 왕국 '태봉'국의 연호를 '수덕만세'로 지었다. 궁예가 신라왕조를 오행 중 무엇으로 보았는지는 모르나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베고 천년고도 경주를 '멸도'라 부르며 극복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아 '토덕'이나 '화덕'으로 보았을 수 있지만, 왕건은 신라를 멸망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긴 견훤도 포석정까지 쳐들어가 신라 경애왕을 죽였으나 감히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보면 당시 '천년왕국' 신라의 위상은 '썩어도 준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예의 처신과 행각은 '혁명가'로서 그의 자유분방한 성정을 엿보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의 물결 속에서 비틀려진 궁예를 재조명하는 이유는 '현실'에 패배한 '이상'의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 이 책을 내면서 이런 질문을 수 없이 받았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궁예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현재는 우리에게 도전과 모험을 요구하고 있다. 또 현재 우리의 내적 당면 과제는 통일이다. 이러한 과제와 사명을 잘 실천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궁예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기와 환경은 다르지만 현실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고, 실천했던 인물이 바로 궁예였던 것이다. 궁예는 천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신라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하고자 했다. 지역주의를 탈피한 통일을 갈구하였다. 마진과 태봉으로 상징되는 이상사회로의 통합을 원했다. 그러나 단지 정권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예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바르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궁예가 오늘도 우리의 테마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슬픈 궁예], '6. 궁예 최후의 재해석', 이재범.


9~10세기 '후고구려' 궁예의 삶은 14~15세기 중국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과 비슷하다. 물론 단명정권 '태봉'과 장수왕조 '명'의 차이는 있으나 부패한 왕조말기의 불우한 어린 시절, 탁발승과 반란군의 이력,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주변 권력자에게는 가혹했던 반면 민중에게는 상대적으로 긍휼하게 대한 마키아벨리식 '군주론'의 면모 등 삶의 궤적이 비슷하다. 

비록, '현실'의 왕건에게 패배하여 역사의 서재에 쳐박혔을지라도, 굳이 남의 역사 속 주원장의 '현실'적 혁명을 찾는 대신, 우리 역사의 궁예의 '이상'적 혁명을 상상할 일이다.

***

1. [슬픈 궁예], 이재범, <푸른역사>, 2000.
2. [삼국사기](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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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일오비 2집/4210301
공일오비 노래 / 예전미디어 / 199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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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은 돌아오지 않는 무한반복 리플레이
- [015B]를 듣는 시간 : 1990 ~ 1993.



"오늘도 아무렇지 않은 것처럼
아픈 가슴 감추며 살아가지만~
한번씩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떨리는 마음
그대이길 바라며 수화길 들지~"
- [015B] 2집, 'Second Episode', <떠나간 후에>, 1991.

고등학교 3학년 때 서태지와 아이들 등장 후 학교 쉬는 시간은 온통 "오, 그대여, 가지 마세요~"로 뒤덮였고, 학력고사 전 백일주 마실 때 야밤에 우리 철봉파는 학교 철봉대 밑에서 김종서 노래를 고성방가하다가 대학생 규찰대 형들한테 검도부 죽도로 얻어맞고 쫓겨나기도 했다.
그러나 나의 십대 후반과 이십대 초반을 지배한 건 단연, [015B]였다.

1988년 대학가요제 금상을 받은 <그대에게>는 신해철의 '데뷔곡'인데, 그가 속한 [무한궤도]는 이듬해 공식 1집 앨범을 낸다. 2006년생인 우리 아들도 아는 불후의 명곡 <그대에게>와 내가 좋아하는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가 대표곡인 1집의 [무한궤도]는 대학가요제 출전 당시의 5인이 아니라 한 명이 충원된 6인이다. 피아노 치는 서울대 컴퓨터공대생 '정석원'이 추가된 거다. 정석원은 대학가요제 출전 멤버는 아니나 가수보다는 다른 길을 선택한 다른 멤버들과 달리 음악을 본업으로 하면서 일년 후 [015B]로 [무한궤도]를 잇는다. 원래부터 연예인이 꿈이었을 신해철은 이미 솔로로 독립하여 인기를 얻고 있었다. 당시까지만 해도 대중들에게 '보컬'은 그룹의 대표이자 전부였다. 원래 김종서가 '보컬'을 했던 락그룹 [시나위]든 이승철이 노래했던 [부활]이든 보컬은 자주 바뀌었는데 [015B]는 아예 '객원보컬'을 운영하는 본격 '프로듀싱 그룹'의 시초가 된다.

정석원은 신해철이 강변가요제에 출전할 때 역시 예선탈락한 다른 팀이었던 서울대생 밴드에서 건반을 치던 동갑내기 그를 보고 일본만화 [바벨 2세]의 악당 '요미'를 닮은 '신비주의' 능력자를 떠올리며 [무한궤도] 공식앨범에 합류시켰다고 한다. 1974년생인 내게는 '철인28호'식의 로봇만화로 기억되는 요코야마 미쓰테루의 [바벨 2세]를 나보다 앞세대 형인 1968년생 신해철은 좀더 진지하게 읽었던 것 같다. 정석원에게서 자신과 같은 탁월한 음악적 재능을 보고는 고대로부터 내려오는 음악의 '신비'롭고 영적인 힘 같은 것을 떠올렸을까. 일본 전후 극우 성향의 만화가 요코야마 미쓰테루가 [바벨 2세]에서 그리고자 한 고대로부터 내려온 '신성(神聖)'은 아마도 군국주의 천황의 '신성(神性)'이었을 수도 있지만 어쨌든.

정석원의 [015B]는 '빈 하늘에 까마귀 한 마리 날다'라는 [空一烏飛]라는 뜻을 당시 숫자와 알파벳으로 암호처럼 사용한 작명인데, 십대 후반 우리들은 [무한궤도(無限軌道)] 멤버 중 둘이 주축으로 만든 [015B]의 '0'은 '無', '1'의 '하나'는 한'과 같은 음, '5B'는 '軌道'를 뜻하는 영어 'orbit'으로 알고 있었다. 한참 후 방송이나 언론 노출 없는 '신비주의' 프로듀서인 [015B]의 정석원도 어느 인터뷰에서 작명에 관한 그 소문이 맞다고 인정했다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팬인 우리에게는 오래전부터 이미 기정사실이었다. 소문이 먼저인지 사실이 먼저인지는 중요하지 않다. 

1990년부터 1992년까지 고등학교를 다닌 우리들은 <그대에게> 세대도, [무한궤도] 세대도 아니었지만, [015B] 세대였다. 원래 음악을 좋아했던 친구들은 몰라도 비틀즈나 가끔 '머리로' 듣거나 2층 창가에서 저녁 6시부터 잠시 라디오를 듣고는 했던 나와 내 친구들은 고등학교 2학년 때 [015B] 2집 카세트 테잎으로 처음 접했다.

[015B] 2집, 'Second Episode' 중 내가 제일 좋아한 곡은 나보다 한 살 많은 객원보컬 이장우의 <떠나간 후에>다.


"짙은 눈물 흘리며 떠나보낸 네가 그리워~
쏟아지는 비 맞으며 너의 집앞에 또 다시 기다리지만~
골목 저편에 너의 모습 보일 때 쯤이면 
가슴이 떨려 숨어버리지~"
- [015B] 3집, 'The Third Wave', <널 기다리며>, 1992.

고 3때 [015B]는 '세번째 물결(The Third Wave)'로 다시 등장했다. 대표곡 <아주 오래된 연인들>은 인기가 좋았지만, 내게 3집 하면 떠오르는 건 B면을 시작하는 연주곡 'Santa Fe'다. 외국의 케니 지(Kenny G.)를 연상시키기도 하는 이 연주곡을 나는 다양한 장르를 시도한 '프로듀싱 그룹' [015B]의 '진보성'을 표현하는 한 사례로 기억한다. 이렇게 정석원은 자신들의 앨범에 '물결(3집)'과 '운동(4집)'이라는 이름을 붙이며 1990년대 한국 대중가요를 선도하고자 했다.

마지막 학력고사가 끝나고 길거리에서 담배를 피우며 망우리고개 넘어 친구집을 찾아가던 겨울, 돈은 없지만 술집에서 대놓고 술을 시켜 마실 수 있었던 친구들과의 수많았던 밤, 담배연기와 함께 찾아올 우리의 스무살과 일상를 채운 농담들, 그 시절에는 항상 [015B]가 불쑥불쑥 끼어들곤 했다. 아직 제대로 해보지도 못한 1974년생 우리들 연애의 '가상현실'은 90년대 '감수성'을 주도한 68년생 정석원 형님이 앞서서 선도적으로 이끌어 주셨다. 
나는 음악에 대해선 잘 모르지만, 80년대 미국의 '프로그레시브(progressive)', '뉴 웨이브(New Wave)' 음악이 대중음악을 현대화했다면, 90년대 우리식 '프로그레시브(진보성)'와 '뉴 웨이브(새물결)'는 [015B]가 선도했다고 생각한다. 신해철의 [N.E.X.T]보다 더 '순수'한 모습으로 '연예'가 아닌 '음악'을 만들었고, 이후 이승환이나 [토이]의 유희열 같은 '프로듀싱 그룹'의 모태였다고 본다.

[015B] 3집, 'The Third Wave'에서 내가 가장 좋아한 곡은 역시 객원보컬 이장우의 <널 기다리며>다.


"어디선가 듣고는 있니
너만을 위해 불러왔던 나의 그 노래들을~
어떨까, 너의 기분은 정말 미안해
어쩌면 나처럼 울고 있겠지~"
- [015B] 4집, 'The Fourth Movement',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 1993.

대학교에서는 노래방을 거의 가지 않았다. 역시 돈도 없었지만 차라리 그 돈으로 소주를 더 마시며 사회체제에 대해 논쟁을 더 해대려고 했는데 지나고 보면 새로운 선후배와 친구들을 사귀는 나의 편한 방식이었던 것 같지만, 당시의 이유는 노래방에는 '민중가요'가 없다는 거였다. 
택시비가 없어 하루걸러 한 번 집에 들어오던 주중 생활이 끝나면 용돈을 더 타서 주말에는 고등학교 '철봉파' 친구들을 만나 술을 마셨고 매월 셋째주 토요일 '철봉파' 정기모임 때는 꼭 노래방을 찾았다. 고등학교 친구들과는 '민중가요'를 부를 수 없었으니 당시 노래방에서는 마음놓고 [015B]를 불러댔다. 거의 항상 '광란의 끝' 1분 정도 남긴 마지막은 친구가 부르던 노래를 강제로 끄고 [015B] 2집의 마지막 곡 <이젠 안녕>을 열댓명 친구들과 돌아가며 불렀다. 아마도 한세대 전 선배들이 나이트에서 퇴청하며 들었을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다음에 또 만나요~"의 정확한 90년대 버전이었을 거다.

이제 우리들 스무살때, [015B]는 4집으로 '네번째 운동(The Fourth Movement)'을 전개했고, 우리 대중음악사에서 그들의 '운동'은 90년대 음악 정서가 적어도 이후 최소 20년 정도는 영향을 끼치게끔 했다. 미국의 80년대 '프로그레시브'나 '뉴 웨이브'는 어떨지 몰라도 1990년에 나온 [015B]의 '진보'적인 음악은 20년이 지난 2010년에 들어도 촌스럽지 않았다. 적어도 내 귀에는 그랬다. 
하긴 나는 음악의 '진보성'을 논하기엔 '똥귀'에다가 40대 중년 이후로 노래방에서는 80년대 '발라드', 변진섭의 <너무 늦었잖아요>를 가장 많이 부른다. 변진섭이 뜰 때 나는 초딩이라 세대에 맞지 않음에도 직장 동료들이 한 곡 하라고 하면 그 노래 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참고로 다수의 철봉파 친구들은 이제 대거 '트로트'로 넘어갔다.

아무튼,
스무살 '광란의 노래방'에서 되도않는 '락발라드'로 목이 쉬고, 얼토당토 않는 '댄스'로 지쳤을 때 내가 가장 많이 불렀고, [015B] '4번째 음악운동'에서 제일 좋아한 노래는 <어디선가 나의 노랠 듣고 있을 너에게>였는데, 이 역시 이장우 형님이 불러주셨고, 이 노래를 흥얼거리던 그 시절 나는 실제로 연애도 했고 미칠 듯한 '사랑'도 해봤다.

이십대, 
어설프고 미안하며 빛나면서도 슬펐던 내 연애의 저변에도 역시 [015B]의 노래가 흐르고 있었다.


"흐린 창문 사이로 
하얗게 별이 뜨던 그 교실
나는 기억해요 
내 소년 시절의 파랗던 꿈을~"
- [무한궤도] 1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1989.

사람들은 모두 본인의 경험을 중심으로 생각할게다. 1990년대에 이십대를 보낸 내게 '대중음악'은 90년대 대중가요와 등치된다. 

고등학교 1학년, 어린시절 동안 유일하게 집같은 집에서 살 때, 2층 내 방 창문에서 지는 저녁노을을 보며 라디오를 들으려고 '야자(야간자율학습)'를 제꼈고, 고 2때부터 형용모순의 대명사 '강제 야자(강제적 야간자율학습)' 시간에 해가 지고 별이 뜰 때면 어두워진 창문을 보며 [무한궤도]의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를 무시로 떠올렸다. 
스무살을 앞두고 친구들한테 담배와 술을 배우면서 우리들의 젊은 날을 시시한 농담처럼 이야기할 때는 [015B]의 서정이 늘 함께했다. 주중에는 '민중가요'를 부르며 '체제변혁'를 부르짖고 주말에는 노래방에서 '자본주의 첨병' [015B]를 불러제낀 나는 아마도 조국 전 법무부장관 같은 386세대를 쉽게 욕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나이들며 21세기 '대중가요'의 흐름에 따라가지 못했기도 했고, 왔다리갔다리 이십대를 반성하면서 나는 삶의 '일관성'이 가장 중요하다 깨닫기도 했고, 그렇게 저렇게 내게 '대중가요'는 [015B]가 끝이 되었다.


코로나 시대, 제대로 만나지 못하는 고등학교 '철봉파' 친구들, 일년에 '송년회' 한 번 하고자 만나는 대학 친구들. 
그들을 만나러 가는 길에 떠오르는 우리들 '젊은날의 초상'과 어김없이 뒤따라오는 나의 [015B].
그러나 막상 만나면 그 시절의 우리는 온데간데 없고, 중년의 아저씨들만이 둘러앉아 내게 현실을 일깨워준다.

그렇게 "내 소년 시절의 파랗던 꿈"과 등이 푸르던 젊은날의 '추억'은 돌아오지 않는 흐릿한 영상과 카세트 테잎 음향으로 무한반복 리플레이된다.

***

1. [015B] 2집, 'Second Episode', 1991.
2. [015B] 3집, 'The Third Wave', 1992.
3. [015B] 4집, 'The Fourth Movement', 1993.
4. [무한궤도] 1집, '우리 앞의 생이 끝나갈 때', 1989.
5. [바벨 2세], 요코야마 미쓰테루, 19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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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반역실록 - 12개의 반역 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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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
- [조선반역실록] /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성계는 역적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그는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을 일으킨 국조이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혁명가이지만 고려왕조 입장에선 나라를 훔친 역적이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스스로 옹립한 공양왕과 그의 세자를 죽였으며, 수많은 고려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를 충신이라 부르고, 두문동에 숨어 살며 조선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72현을 고려의 마지막 충절로 기리는 것이다.
...
그렇듯 조선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역적의 피묻은 손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을 세웠을 때만 해도 '혁명'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다시 '역적'에 의해 쫓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그 역시 반역에 의해 쫓겨날 운명이었던 것을!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 [조선반역실록], <1. 고려의 마지막 역적 이성계>, 박영규, <김영사>, 2017.


고려말 권문세족의 토지경제 전횡과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의 부패 등의 폐단을 뒤집어 엎기 위해 '계민수전(計民授田)'의 경제토대와 '민본주의(民本主義) 성리학(性理學)' 이념으로 새로운 국가를 설계한 '혁명가' 정도전(鄭道傳)은 본인이 건설한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역적(逆賊)'이었다. 그처럼 조선왕조 마지막까지 신원(伸冤)되지 못한 이씨 왕조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영원불멸의 역적은 광해군 시기 [홍길동전]의 허균(許筠) 정도였다. 선조 때 역적 정여립(鄭汝立)도, 조선 후기 계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퍼진 비기(祕記) [정감록(鄭鑑錄)]도 그 뿌리는 정도전의 '정(鄭)씨'였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22권 한국통사 [한국사이야기]를 집필한 재야사학자 이이화 선생은[정감록]과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의병(義兵) 투쟁까지 조선 후기 다수 민중들의 '혁명'의 역사를 2017년에 [민란의 시대]로 엮었다. 한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 역사를 대중화시킨 작가 박영규는 같은 해 '12개의 반역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라는 부제의 [조선반역실록]에서 고려의 최후 역적 태조 이성계부터 태종과 세조, 억울한 청년 장수 남이, 정여립과 허균, 이괄 등 12건의 '반역사건'을 통해 조선 역사를 돌아본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의 혁명이론에 따라 고려말 '3단계 혁명 단계'를 거치는데, 1차는 위화도 회군 후 우왕과 최영 처단, 2차는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논리로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 시기 승려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규정하여 '진짜 왕(王)씨' 공양왕 옹립, 마지막 3차는 일종의 '상생협정'을 맺고자 찾아온 공양왕을 그 자리에서 폐위시킨 전략단계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에서 설파한 새로운 국가는 '천명'을 받은 '인군(人君,人主)'을 중심으로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士大夫)'가 이끌어가는 체제였는데, 이에 따르면 건국의 공로가 있는 왕자라도 사병을 거느리면 안되었기에 당시 혁명국가의 설계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이유로 중앙군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들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혁명가' 정도전은 결국 조선을 온전히 '이(李)씨'의 국가로 만들려는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일으킨 '2단계 쿠데타' 중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가장 먼저 숙청된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으로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태종이 되는데, 7백여 년 전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과 비슷한 경력으로 아버지를 도와 '혁명'에 공헌한 왕자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았다는 후대의 평가는 받지만, 고려 최후의 '역적'인 아버지 이성계와 같이 '반역'은 하였으되 '체제변혁'과 무관하므로 '혁명'이 아닌 '쿠데타'였다. 이후 태상왕 이성계는 개국 당시 정5품 형조의랑을 지낸 조사의(趙思義)라는 수하를 통해 본인의 복위를 위한 반란을 도모하나 태종에 의해 진압되었고 결국 아들의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마지막 화해의 자리에서도 이성계는 이방원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으나 기둥을 맞추고 술잔을 따르려는데 신하를 시켜 받으니 소매에서 철퇴를 꺼내놓고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한탄했다는 야사를 전한다. 
'역적' 태조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반란'을 진압한 후 살기 위해 처남들인 민씨형제들도 '역적'으로 숙청한다. 후대는 이방원이 이룬 '왕권강화'의 결과를 말하지만, 당시로 보면 피묻은 칼을 쥔 자가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평생 본인 주변의 '역적'을 만든 생애였다. 


"단종 1년(1453년) 10월 19일 새벽, 수양대군 이유의 집 지게문으로 세 명의 갓 쓴 사내들이 찾아들었다. 권람, 한명회, 홍달손이 그들이었다. 권람은 조선 개국공신이자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손자였고, 한명회는 개국 당시 명나라로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명문집안 출신들인 셈인데, 그들과 달리 홍달손은 내금위장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한명회와 친밀한 자들로서 몇 년 전부터 수양대군과 부쩍 가깝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벼슬살이로 보자면 권람은 36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고, 홍달손은 내금위장을 거쳐 수군첨절제사를 지내다가 파직당한 처지였고, 한명회는 조상의 공덕에 힘입어 문음으로 겨우 종9품 경덕궁직으로 있었다."
- [조선반역실록], <6.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박영규.


'역적'의 자손이라 그 유전적 형질로 인해 계속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니리라. 왕조만이 유일한 정치체제였던 당시로서는 필연적인 과정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가 이끌어가는 체제가 정도전의 죽음으로 작동하지 못한 것도 아니리라. 후대의 분분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마지막까지 견고한 관료체제로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나라였고 유일하게 이를 완전히 무시했던 연산군부터 시작하여 관료들의 '반란'으로 왕을 갈아치운 '반정(反正)'이 반복되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쿠데타는 아마도 왕자가 일으킨 마지막 반란일 것인데 마치 오늘날 윤석열 검찰총장을 연상시키는 권람과 과거 급제도 못한 채 '사대부'의 자격조차 미달이었던 한명회 등을 끌어들인 수양대군이 '역적'의 중심이었다. 이후 '반정'으로 즉위한 진성대군 중종이나 능양군 인조는 실질적 중심 '역적'이 아니었고 권력투쟁을 위해 결사한 '사대부' 무리가 '반정'의 중심이었다. 

이후 선조 시기 정여립은 고향 전주로 낙향하여 유학 경전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과 호방한 행보로 '대동계'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역적'이 되어 처단되었고, '율도국'이라는 이상세계를 건설한 의적 [홍길동전]의 허균도 광해군 시기 여당이었던 북인 중 대북파의 정파투쟁 과정에서 국문도 없이 능지처참 당했다. 정여립이나 허균 모두 명문 집안 출신 자제로서 수재들이었고 남보다 특출한 인물들이었으되 '반역'의 증거는 없다. 그들을 '역적'으로 만든 건 '혁명'으로 건설된 나라였던 조선왕조의 '역적' 왕자들 및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쟁탈하려던 '사대부' 관료들의 반복적 출현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역'에 대한 권력자들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라 했으나 어떻게 그 칭호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는 어릴 때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그런 끝에 뜻을 품고 서울로 와 과거에 응시했다. 서북 출신들이 비록 등용은 되지 않으나 문과는 진사, 무과는 출신(무과 합격자)이라도 되기 위해 과거를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홍경래는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했고 자신보다 형편없는 글재주와 학식을 가진 남쪽 출신의 양반붙이들이 합격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20대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문벌집단이 벌이는 차별과 부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접한 홍경래는 과거 합격을 단념했다. 그리고 절로, 산으로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그는 길흉을 점치는 술수를 익히기도 하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평안도 박천의 청룡사에서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났다. 이 만남이야말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한 그의 혁명가적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변혁지향의 이론이나 실천운동이 민중에게 절실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도 운수가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전봉준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나름대로 왕권을 견제하면서 유지되던 '사대부' 관료체제가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오로지 왕권에 기생하여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이 된 19세기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이르러 '혁명(革命)'이 만든 나라 조선에서는 진정한 '혁명(革命)'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 당시 '역적'은 부패정치로 인해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다수 농민 민중들이었고, 조선 최초의 '혁명가'들은 관서의 과거시험 낙방생 홍경래와 서자 우군칙, 지식인 김사용과 김창시, 장사 홍총각, 부호 이희저 무리였다. 
홍경래 이후 같은 관서지방의 유흥렴, 삼남지방의 이필제 등의 '직업혁명가'들이 그를 이어 조선의 마지막 1백년 '민란의 시대'에 등장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그들의 계획이 감히 '혁명'인 이유는 다수 민중을 동력으로 했기 때문이며, 이후 왕조의 몰락 과정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반역' 역사의 절정을 맞는다. 
물론 '근대화'라는 당시 시대정신에 휘말린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쿠데타도 있었고 국가 주도의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도 있었지만, 썩어빠진 왕조를 결과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다수 민중 '역적(逆賊)'들의 '반역(叛逆)', 즉 '혁명(革命)'이었다.


반봉건(反封建) 투쟁으로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당시 정세에 따라 반외세(反外勢) 투쟁이 되었고 결국 조선말 '혁명' 운동은 '의병 투쟁' 등의 반침략 투쟁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조선왕조 내부 체제 '혁명'이 이루어졌다면 우리 역사 마지막 왕을 끌어내린 혁명가는 과연 누가 되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의 로베스피에르와 쑨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

1.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2.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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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지음 / 한겨레출판 / 2017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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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
- [조선반역실록] /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성계는 역적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그는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을 일으킨 국조이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혁명가이지만 고려왕조 입장에선 나라를 훔친 역적이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스스로 옹립한 공양왕과 그의 세자를 죽였으며, 수많은 고려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를 충신이라 부르고, 두문동에 숨어 살며 조선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72현을 고려의 마지막 충절로 기리는 것이다.
...
그렇듯 조선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역적의 피묻은 손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을 세웠을 때만 해도 '혁명'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다시 '역적'에 의해 쫓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그 역시 반역에 의해 쫓겨날 운명이었던 것을!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 [조선반역실록], <1. 고려의 마지막 역적 이성계>, 박영규, <김영사>, 2017.


고려말 권문세족의 토지경제 전횡과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의 부패 등의 폐단을 뒤집어 엎기 위해 '계민수전(計民授田)'의 경제토대와 '민본주의(民本主義) 성리학(性理學)' 이념으로 새로운 국가를 설계한 '혁명가' 정도전(鄭道傳)은 본인이 건설한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역적(逆賊)'이었다. 그처럼 조선왕조 마지막까지 신원(伸冤)되지 못한 이씨 왕조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영원불멸의 역적은 광해군 시기 [홍길동전]의 허균(許筠) 정도였다. 선조 때 역적 정여립(鄭汝立)도, 조선 후기 계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퍼진 비기(祕記) [정감록(鄭鑑錄)]도 그 뿌리는 정도전의 '정(鄭)씨'였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22권 한국통사 [한국사이야기]를 집필한 재야사학자 이이화 선생은[정감록]과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의병(義兵) 투쟁까지 조선 후기 다수 민중들의 '혁명'의 역사를 2017년에 [민란의 시대]로 엮었다. 한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 역사를 대중화시킨 작가 박영규는 같은 해 '12개의 반역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라는 부제의 [조선반역실록]에서 고려의 최후 역적 태조 이성계부터 태종과 세조, 억울한 청년 장수 남이, 정여립과 허균, 이괄 등 12건의 '반역사건'을 통해 조선 역사를 돌아본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의 혁명이론에 따라 고려말 '3단계 혁명 단계'를 거치는데, 1차는 위화도 회군 후 우왕과 최영 처단, 2차는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논리로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 시기 승려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규정하여 '진짜 왕(王)씨' 공양왕 옹립, 마지막 3차는 일종의 '상생협정'을 맺고자 찾아온 공양왕을 그 자리에서 폐위시킨 전략단계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에서 설파한 새로운 국가는 '천명'을 받은 '인군(人君,人主)'을 중심으로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士大夫)'가 이끌어가는 체제였는데, 이에 따르면 건국의 공로가 있는 왕자라도 사병을 거느리면 안되었기에 당시 혁명국가의 설계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이유로 중앙군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들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혁명가' 정도전은 결국 조선을 온전히 '이(李)씨'의 국가로 만들려는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일으킨 '2단계 쿠데타' 중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가장 먼저 숙청된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으로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태종이 되는데, 7백여 년 전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과 비슷한 경력으로 아버지를 도와 '혁명'에 공헌한 왕자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았다는 후대의 평가는 받지만, 고려 최후의 '역적'인 아버지 이성계와 같이 '반역'은 하였으되 '체제변혁'과 무관하므로 '혁명'이 아닌 '쿠데타'였다. 이후 태상왕 이성계는 개국 당시 정5품 형조의랑을 지낸 조사의(趙思義)라는 수하를 통해 본인의 복위를 위한 반란을 도모하나 태종에 의해 진압되었고 결국 아들의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마지막 화해의 자리에서도 이성계는 이방원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으나 기둥을 맞추고 술잔을 따르려는데 신하를 시켜 받으니 소매에서 철퇴를 꺼내놓고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한탄했다는 야사를 전한다. 
'역적' 태조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반란'을 진압한 후 살기 위해 처남들인 민씨형제들도 '역적'으로 숙청한다. 후대는 이방원이 이룬 '왕권강화'의 결과를 말하지만, 당시로 보면 피묻은 칼을 쥔 자가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평생 본인 주변의 '역적'을 만든 생애였다. 


"단종 1년(1453년) 10월 19일 새벽, 수양대군 이유의 집 지게문으로 세 명의 갓 쓴 사내들이 찾아들었다. 권람, 한명회, 홍달손이 그들이었다. 권람은 조선 개국공신이자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손자였고, 한명회는 개국 당시 명나라로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명문집안 출신들인 셈인데, 그들과 달리 홍달손은 내금위장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한명회와 친밀한 자들로서 몇 년 전부터 수양대군과 부쩍 가깝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벼슬살이로 보자면 권람은 36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고, 홍달손은 내금위장을 거쳐 수군첨절제사를 지내다가 파직당한 처지였고, 한명회는 조상의 공덕에 힘입어 문음으로 겨우 종9품 경덕궁직으로 있었다."
- [조선반역실록], <6.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박영규.


'역적'의 자손이라 그 유전적 형질로 인해 계속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니리라. 왕조만이 유일한 정치체제였던 당시로서는 필연적인 과정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가 이끌어가는 체제가 정도전의 죽음으로 작동하지 못한 것도 아니리라. 후대의 분분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마지막까지 견고한 관료체제로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나라였고 유일하게 이를 완전히 무시했던 연산군부터 시작하여 관료들의 '반란'으로 왕을 갈아치운 '반정(反正)'이 반복되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쿠데타는 아마도 왕자가 일으킨 마지막 반란일 것인데 마치 오늘날 윤석열 검찰총장을 연상시키는 권람과 과거 급제도 못한 채 '사대부'의 자격조차 미달이었던 한명회 등을 끌어들인 수양대군이 '역적'의 중심이었다. 이후 '반정'으로 즉위한 진성대군 중종이나 능양군 인조는 실질적 중심 '역적'이 아니었고 권력투쟁을 위해 결사한 '사대부' 무리가 '반정'의 중심이었다. 

이후 선조 시기 정여립은 고향 전주로 낙향하여 유학 경전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과 호방한 행보로 '대동계'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역적'이 되어 처단되었고, '율도국'이라는 이상세계를 건설한 의적 [홍길동전]의 허균도 광해군 시기 여당이었던 북인 중 대북파의 정파투쟁 과정에서 국문도 없이 능지처참 당했다. 정여립이나 허균 모두 명문 집안 출신 자제로서 수재들이었고 남보다 특출한 인물들이었으되 '반역'의 증거는 없다. 그들을 '역적'으로 만든 건 '혁명'으로 건설된 나라였던 조선왕조의 '역적' 왕자들 및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쟁탈하려던 '사대부' 관료들의 반복적 출현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역'에 대한 권력자들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라 했으나 어떻게 그 칭호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는 어릴 때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그런 끝에 뜻을 품고 서울로 와 과거에 응시했다. 서북 출신들이 비록 등용은 되지 않으나 문과는 진사, 무과는 출신(무과 합격자)이라도 되기 위해 과거를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홍경래는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했고 자신보다 형편없는 글재주와 학식을 가진 남쪽 출신의 양반붙이들이 합격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20대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문벌집단이 벌이는 차별과 부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접한 홍경래는 과거 합격을 단념했다. 그리고 절로, 산으로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그는 길흉을 점치는 술수를 익히기도 하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평안도 박천의 청룡사에서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났다. 이 만남이야말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한 그의 혁명가적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변혁지향의 이론이나 실천운동이 민중에게 절실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도 운수가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전봉준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나름대로 왕권을 견제하면서 유지되던 '사대부' 관료체제가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오로지 왕권에 기생하여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이 된 19세기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이르러 '혁명(革命)'이 만든 나라 조선에서는 진정한 '혁명(革命)'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 당시 '역적'은 부패정치로 인해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다수 농민 민중들이었고, 조선 최초의 '혁명가'들은 관서의 과거시험 낙방생 홍경래와 서자 우군칙, 지식인 김사용과 김창시, 장사 홍총각, 부호 이희저 무리였다. 
홍경래 이후 같은 관서지방의 유흥렴, 삼남지방의 이필제 등의 '직업혁명가'들이 그를 이어 조선의 마지막 1백년 '민란의 시대'에 등장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그들의 계획이 감히 '혁명'인 이유는 다수 민중을 동력으로 했기 때문이며, 이후 왕조의 몰락 과정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반역' 역사의 절정을 맞는다. 
물론 '근대화'라는 당시 시대정신에 휘말린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쿠데타도 있었고 국가 주도의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도 있었지만, 썩어빠진 왕조를 결과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다수 민중 '역적(逆賊)'들의 '반역(叛逆)', 즉 '혁명(革命)'이었다.


반봉건(反封建) 투쟁으로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당시 정세에 따라 반외세(反外勢) 투쟁이 되었고 결국 조선말 '혁명' 운동은 '의병 투쟁' 등의 반침략 투쟁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조선왕조 내부 체제 '혁명'이 이루어졌다면 우리 역사 마지막 왕을 끌어내린 혁명가는 과연 누가 되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의 로베스피에르와 쑨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

1.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2.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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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제국 이야기 - 유라시아 대륙 양단에 강력한 흔적을 남기고 사라진 흉노를 찾아서
장진퀘이 지음, 남은숙 옮김 / 아이필드 / 2010년 4월
평점 :
절판


'중간지대'와 '교환'의 세계사
- [칭기스의 교환],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 몽골제국은 화약 지식의 주요 전달자로 알려져 있다... 유럽이 몽골로부터  직접 화약 지식을 획득했을 것 같지는 않지만, 어쨌든 몽골이 침입한 이후에야 화약이 출현했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고 있다. 아마도 대부분의 상인들이 (심지어 폴로 가문도) 몽골제국을 여행하면서 화약제조법을 가지고 돌아왔을 것이다. 이는 1500년 이후 유럽인들이 세계의 대부분을 지배하게 되는 결과를 야기했다."
- [칭기스의 교환], <2-5. 새로운 전쟁방식>, 티모시 메이, 2012.



"... 몽골족의 폭발적 팽창은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핵심적 역할을 맡았다. 왜냐하면 몽골족은 중국을 제압하고, 러시아를 유린하고, 이슬람 영역을 초토화했지만, 기독교 왕국은 거의 그대로 뒀기 때문이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3-14. 유럽과 장기 십자군운동>, 타밈 안사리, 2019.


진시황은 중국을 최초로 통일한 후 만리장성을 쌓았는데, 예전부터 각 나라들이 세운 성벽들을 통일제국답게 하나로 이은 대공정이었다. 달에서도 보인다는 현재의 만리장성은 진나라 이후 천년 이상 지나 중국을 다시금 통일한 명나라가 증축한 것이다. 농경의 가능 여부를 가르는 연간 강우량 15인치선과 대략 유사하다는 만리장성은 '정착민'들이 북방 '유목민'들을 막기 위해 세웠다.

동쪽의 만리장성은 이후 서쪽의 로마에까지 영향을 미쳤다는 발상으로 미국의 저술가 타밈 안사리는 세계사 5만년을 종합한다. 미국의 몽골학자 티모시 메이는 동서양을 연결한 북방 초원의 유목민족 중 가장 거대한 제국을 건설한 몽골족을 중심으로 한 세계사를 '칭기스의 교환'이라 칭한다.


"(일 칸국 가잔 칸의 계승자) 울제이투는 라시드 앗 딘에게 [집사(集史)]의 일부로 몽골족의 역사를 포함시키는 것은 물론이고, 그 내용을 '세계의 역사'로 확장하라고 명령했는데 불교에 관한 내용이 꽤 많은 분량을 차지했다. 수니파 행정관료들은 불교도가 포함된 조사팀과 함께 시아파 몽골칸(일 칸국)을 위해 불교의 역사를 저술했다."
- [칭기스의 교환], <2-7. 종교와 몽골제국>, 티모시 메이.


모든 '제국'들은 자기를 중심으로 세상을 보았으므로 자기가 서술한 역사가 '세계사'였다. 인류 최초의 제국이었던 메소포타미아의 아카드왕조부터 아시리아와 바빌로니아, 동방의 페르시아와 서방의 로마, 더 동쪽의 중국 모두 본인을 중심으로 '세계사'를 엮었을 것이므로 진정한 '보편역사'는 없다. 타밈 안사리 말대로 '세계사'는 인간 관념의 '별자리'를 만드는 '언어의 상징적 상호모형'인 각자의 '세계관'의 영향를 받는다. 미국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 편집자였던 이슬람계 미국인 타밈 안사리가 돌아본 '5만년의 세계사' 또한 동서를 이어준 '중간지대' 이슬람세계에 관한 이야기가 상대적으로 부각된다. 

이 '중간지대'는 동아시아와 서유럽까지를 연결하는 지역으로 샤머니즘 토착신앙은 물론 조로아스터교로부터 불교와 이슬람교까지 유래한 지역이다. 현재 '실크로드'로 알려진 동서교역의 지대는 일찍이 초원의 유목민족들이 닦아놓은 길인데, 티모시 메이는 미국 역사학자 앨프리드 크로스비가 아메리카 대륙의 발견으로 동반구와 서반구 문명을 이은 콜럼버스를 기려 '급격한 사회변화'를 지칭한 '콜럼버스의 교환'에 빗대어 몽골족의 세계사적 영향을 의미하는 '칭기스의 교환'을 설명한다. 칭기스 칸 이후 4대를 거치면서 분열된 몽골제국이 동서양 문명을 교환시킨 윤활유 역할을 이야기한다.


"역사를 통틀어, 사람들은 '중간지대'를 거쳐 어떤 세계문명으로 이동해왔다... 중국을 400여 년 동안(기원전 206년부터 서기 200년까지) 다스린 한왕조는 유라시아 스텝 지대의 유목민인 북쪽의 이웃들을 상대로 자주 전쟁을 치렀다. 중국인들은 그들을 '흉노'라고 불렀다. 중국은 로마에서 멀리 떨어져 있었지만, 유목 부족들은 중국과 로마의 중간지대를 돌아다녔고, 여러 무리 간의 교류망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후손들과 혈족관계인 유목부족들은 훗날 아틸라의 지휘 하에 서유럽을 휩쓸었고, 로마를 공격했다. 유럽에서, 그 유목민 침략자들은 '훈족'으로 알려졌다. 동양에서 그들은 중국사의 일부분이었고, 서양에서는 유럽사의 일부분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2-8. 중간지대>, 타밈 안사리.


로마는 내부로부터 무너지기는 했지만 북방으로부터 내려온 '게르만족'의 대이동으로 멸망했다고 전해진다. 고트족, 반달족 등의 게르만족과 스키타이족은 그냥 내려온 것이 아니다. 기후변화로 인해 먹고 살 곳을 찾기 위해서, 한편으로 중국의 '문명국가'를 약탈하지 못하고 서쪽으로 내쫓긴 '흉노족'에 의해 밀려난 결과로 남유럽을 침범하게 된 것이다. 타밈 안사리가 진시황의 만리장성과 로마의 '변화'를 연계시킨 이유다. 흉노족이나 그의 후예로 추정되는 훈족은 유럽을 약탈하고 돌아갔다. 그들에 밀린 게르만족들은 유럽 남부에 정착하고 적응하며 유럽을 변화시켰다. 로마인들은 로마가 '멸망'한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들은 로마가 '변화'한다고 생각했다. 이슬람을 비롯한 '이교도' 또는 '타자들'과 구분하면서 '프랑크인'에서 '유럽인'으로 정체성을 굳힌 '장기 십자군운동' 과정에서 로마 문명은 지금껏 '멸망'이 아닌 '변화'를 겪어온 것이다.


13세기초, 타타르족과 케레이트족, 나이만족을 흡수하고 몽골리아 초원을 장악한 테무진은 '단호하고 사나운 지도자'라는 의미인 '칭기스 칸'이 된 후 '대몽골국(예케 몽골 울루스)'을 건국한다. "칸의 눈으로 보았을 때 모든 유목민족은 정체성면에서 모두 몽골족이었다([칭기스의 교환], <1부>).
북방의 유목민족들을 흡수통합하였지만, 칭기스 칸은 정주문화를 지배하기 보다 외부 위협으로부터 몽골리아를 보호하려는 목적이 강했다. 그러나 그의 후계자 우구데이(오고타이) 칸은 "정복이라는 개념을 강화하여 칭기스 칸과 그의 후계자들이 세계를 정복하는 것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라는 '믿음'을 북돋았다(같은책)". 이는 '흉노'로부터 몽골까지 이어온 유목민 신앙으로서 '텡게리즘'이 체제 유지를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가 된 것이다. '텡그리'는 그들의 말로 '하늘'이다. 북방 유목민족들의 '선우'는 중국의 '천자'다. 북방 유목민족 중 하나인 우리의 '단군'은 '선우'와 비슷한 발음을 한자로 쓴 것으로 추정되는데, 우리 단군 또한 하늘의 자손이다. '텡게리즘(천명)'에 의한 칸 체제 또한 4대 뭉케에 이르러 분열의 조짐이 보이는데 그의 동생 쿠빌라이는 동쪽의 중화 문명을, 다른 동생 훌레구는 서쪽의 이슬람 문명을 장악한다. 이후 권력투쟁 과정에서 칭기스 칸의 몽골제국은 중국의 원나라, 이슬람의 일 칸국, 남쪽의 차가타이 칸국과 북쪽의 주치 칸국으로 분열되고 각 지역의 실력자들이 '칭기스 가문' 후계자를 주장하며 세력화한다. 타밈 안사리가 말한 '복원의 서사'로서 중국 명나라가 원나라 몽골족을 북쪽으로 내쫓았을 때 이슬람 튀르크계 티무르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처하며 '중간지대'를 석권했으나 시대정신은 얼마 지나지 않아 유럽의 과학발전과 '진보의 서사'로 대체되고 있었다. 그 결과 유럽과 미국이 지금껏 '역사의 중심축'이 되었다.




"'칭기스의 교환'은 무역을 촉진시키고 종교를 확산시킨 것 이상의 일을 해냈다. 지구적 규모에 걸쳐 사상, 기술의 교환을 야기했다. 기술에는 화약을 비롯한 군사적 기술을 넘어서는 것들이 포함되었다. '문화교류'의 관점에서 볼 때 몽골족이 직간접적인 역할을 수행한 것은 분명하지만 몽골족 자신이 항상 전파의 담당자였던 것은 아니다. 몽골 군대의 위력이 교역로를 보호했지만, 교역로는 상인, 선교사, 용병이 함께 사용한 길이었다."
- [칭기스의 교환], <2-10. 문화교류>, 티모시 메이.


알렉산드로스 대제는 전체 4,800km를 행군하며 페르시아 제국 등을 장악했지만 코끼리를 앞세운 인더스의 마우리아 왕조 앞에서 막혔다. 칭기스 칸의 장수 수베데이(수보타이)는 증원부대나 항해장치의 도움없이 8,050km를 주파했다. 물론 칭기스 칸의 몽골은 지배하지 않고 모든 것을 파괴한 후 초원으로 사라지면서 서방인들을 공포에 떨게 하였는데, '천고마비'의 계절에 살짠 말을 타고 약탈하러 내려오는 북방 유목민을 두려워한 중국 농경민들의 모습이다. 얼마 후 몽골족은 치고 빠지는 '기마궁수', 무슬림의 '투석기', 중국의 '화약', 특수부대 '망구데이(망고타이)' 등의 '새로운 전쟁기술'을 동서로 전파하면서 동쪽의 중국은 물론 서쪽의 튀르크계 이슬람 문명까지 장악하고 지배하는 제국이 되어 중앙행정체계의 '케식(친위대와 가신)', '밍간(천호제)', '탐마치(무관)'와 '다루가치(문관)'의 총독 지배체제 등의 행정 또한 널리 공유한다. 그러나 가장 영향력 있는 '칭기스의 교환'은 상인들(경제)과 선교사들(종교이념)의 활발한 교류와 장려였다.

몽골족과 같은 유목민족들은 중국이나 유럽처럼 유교나 기독교 등의 논리로 '외부'를 배척하지 않았다. 흉노시절부터 그들은 특유의 '개방성'으로 문화를 흡수하고 교역을 장려하며 상인들과 종교인들을 보호했다. 오고타이 칸을 비롯한 후세 칸들의 과소비는 교역을 활성화했고 발달된 역참제도와 통일된 교역망은 물류비용을 효율화했으며, 칸 제국을 위협하지 않는 한 어느 종교도 탄압하지 않았다. 인류의 역사를 활발하게 연계시킨 '칭기스의 교환'은 14세기 유럽에 '흑사병'까지 전달하면서 유럽을 획기적으로 변화시키는데, 이 모든 '교환'은 물론 유목민족들과 몽골족의 의도와는 무관한 역사의 물질적 과정이다.


"결과적으로 (차에 관한) 청 조정의 정책은 미국의 탄생에 기여했다. 청 조정의 정책과 미국의 탄생은 사슬로 기다랗게 연결된 인과관계의 양쪽 끝이었다."
-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 <4-20. 중심이 흔들리다>, 타밈 안사리.


뜬금없다. 타밈 안사리는 상호연계의 역사에 집착한 나머지 중국 청나라로부터 차를 수입하던 영국이 관세를 올리면서 동인도회사가 수입차들을 식민지 미국에 전가함으로써 미국의 독립전쟁이 기인했다는 식의 이야기까지 전개한다. 물론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다. 그러나 원인과 결과를 명확히 하지 않으면, 1차 세계대전의 원인은 '사라예보의 총성'이 되어 버린다. 


동서양의 교역은 초원 스텝 문명을 이끈 북방 유목민의 생존투쟁 결과였고, 유럽의 장기 십자군운동은 후진문명 유럽 기독교왕국들의 이익투쟁 결과였으며, 미국 독립은 원주민 해방이 아닌 아메리카 정착 유럽인들의 투쟁이었다. 20세기 세계대전은 자본의 이윤증식 자기운동 결과로서 제국주의가 원인이었다.

티모시 메이는 몽골족의 활발한 '교역'을 통해 문명 '교환'의 세계사를 보았고, 타밈 안사리는 이슬람 '중간지대'를 통한 '돈'과 '기술', 그 '도구' 속에 담긴 '언어'적 '거대 서사'를 보았다. 

역시, 다양한 세계관의 각축장인 '상호연계'의 세계사에서 기본토대는 경제이고, 역사의 동력은 경제적 발전과 분배의 문제 앞에 선 다수 인간이다.

***

1. [칭기스의 교환](2012), 티모시 메이, 권용철 옮김, <사계절>, 2020.
2. [다시보는 5만년의 역사](2019), 타밈 안사리, 박수철 옮김, <커넥팅>, 2020.
3. [흉노제국 이야기](2007), 장진쿠이, 남은숙 옮김, <아이필드>,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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