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지린의 고조선 연구
리지린 지음, 이덕일 해역 / 도서출판 말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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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륙 고조선(古朝鮮)'을 찾아서
-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필자는 우리 고대국가들에서의 계급투쟁의 력사를 찾아보려고 시도하였다. 계급투쟁은 결코 계급적 모순이 첨예화된 때에 비로소 전개되는 것이 아니라 계급적 대립이 생긴 첫날부터 진행된 것이다...
필자는 위만정권의 수립은 고조선 사회의 발전의 계기로 되었다고 인정하며, 그의 정변은 고조선 사회의 계급투쟁의 반영이라고 보려고 한다...
고조선의 위치에 대해서 필자는 기원전 3세기 초까지 오늘의 료동, 료서 지역에 걸쳐 있었고, 서변은 우북편 지역에까지 이르렀다가 기원전 3세기초 연에게 패전한 후는 오늘의 대릉하(패수) 이동으로 축소되었다고 인정하며,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오늘의 중국 요령성 개평이라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종래 옥저는 다만 함경남북도에만 위치한 것으로 인정한 설에 대하여 의문을 품지 않을 수 없게 되어 문헌사료를 세밀히 검토한 바, 옥저는 옥저, 동옥저, 북옥저의 3개 옥저가 있었고, 옥저 지역은 오늘의 중국 즙안(집안)에서 압록강 밑으로 위치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예맥'이 강원도에 위치했고, '예'는 그 밑(압록강 하류지역)에서 료동반도 동변에 걸쳐 위치했다는 것을 증명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예맥'이 강원도에 위치했다는 력대의 설이 근거가 매우 박약함을 인정하면서 필자의 견해를 내놓으려 한다. 그리고 고대 숙신은 3세기 이후 읍루, 물길, 말갈족과는 완전히 다른 종족이며, 그것은 곧 '고조선족'이였다는 것을 론증해 보려고 시도하였다."
- 리지린, [고조선 연구], <머리'말>, 1962.


1961년 6월부터 9월까지 북한의 과학원 '력사연구소'는 7차례에 걸쳐 '고조선에 관한 과학토론회'를 개최하여 '낙랑군=평양설'과 '고조선=요동설' 사이의 끝장토론을 벌인다. 도유호와 같은 고고학자들은 평양 일대의 청동기 유물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중심지는 대동강 유역의 평양이며 '패수'는 청천강이라는 주장, 반대편 문헌사학자들은 고조선의 영역이 요동 지역이라는 주장의 일대 격돌이었다. 일제강점기 제국주의자들이 축소시킨 고조선의 강역을 벗어나려는 북한 역사학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도 고고학 유물을 근거로 하는 '실증주의' 역사관을 벗어나기는 쉽지 않았다. 그러던 중 이 '력사과학토론회'에 한 역사학자의 논문 한 편이 제출되면서 결국 '고조선=요동설'로 급작스레 종결된다. 
북한 세습정권이 반동화되면서 '평양' 중심의 '대동강 인류문명설' 따위의 어용 역사학이 지금 이북에서 득세하고 있다지만, 해방 후와 민주주의인민공화국을 건설하려던 역동적인 시대인 1960년대에는 '과학'적이고 '진보'적인 역사학자들이 북한의 역사학계를 이끌었다.
'실증주의' 역사과학를 넘어서 고대 문헌들과 당대의 정치경제 사회구성체 분석을 통한 '과학'적 역사유물론을 토대로 고조선의 강역을 최대한으로 넓히면서 위 토론에 종지부를 찍은 논문이 바로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 연구]다.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1916~?)는 1958년부터 중국 북경대에서 위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고 돌아왔다. 그는 중국의 '고사변학파'로 불리는 고힐강 교수로부터 지도를 받았다는데 이 학파는 중국내에서는 진보적 학파였으나 대외적으로는 '중화주의'를 벗어나지 못하였고, 대륙고조선설이 마뜩치 않았음에도 리지린의 철저한 중국 고대문헌 분석에 반박하지 못한 채 박사학위 논문을 승인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즉, 리지린은 중국으로부터 '배우기' 위해 북경 유학을 간 것이 아니라, 역사왜곡의 본산지에서 당당하게 우리 고조선의 영역을 확인하기 위해 북경대 박사학위에 도전한 것이었다. 그는 결국 중국의 대역사가 고힐강조차 인정할 수 밖에 없는 철저한 문헌조사와 고증을 통해 중국을 딛고 귀국하여 '실증주의' 역사학을 무릎 꿇렸다.

위 <머리말>은 결국 이 논문 [고조선 연구]의 요약 서문이자 결론이기도 하다. 결론적으로 리지린 박사는 '고조선=평양설'을 뛰어넘은 '고조선=요동설'에서 한 발 더 나아가 고대의 요동과 요서 지역 자체를 서쪽으로 더 확장하였고, 그에 따라 옥저와 진국(辰國/삼한:三韓)까지도 한반도 북부로 더 끌어올렸다. 
리지린의 [고조선 연구]는 우리가 아는 고조선 강역도 중 가장 넓은 영토를 그리고 있다.


"... '습(濕)'자 음이 '숙(肅)', '식(息)', '직(稷)' 음과 통하며, '숙신(肅愼)'(식신,직신; 息愼,稷愼)이 '습수(濕水)', '렬수(洌水)', '선수(汕水)'가 합하여 '렬수(洌水)'를 이루는 강 명에 유래했다는 고대의 설이 '조선(朝鮮)'의 명칭의 유래로 된 것으로 바뀌여졌다고 해석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하게 된다."
- 리지린, 같은책, <1. 고조선의 력사지리>.


우리 역사의 시작 고조선(古朝鮮)은 기원전 2,333년에 단군왕검이 건국하여 청동기 시대를 거쳐 철기 '열국시대'를 지나 고대국가 '삼국시대'의 기초가 되는 우리 역사 고대 노예제 사회였다. 원래 국명은 '조선'인데, 이후 이씨 조선과 구분을 위해 '고조선'이라 부른다. [사기], [한서] 등의 중국 고대문헌에는 '조선'이라 부르면서 <조선열전>을 따로 전한다. 물론, '조선'의 이야기가 아니라 중국 한나라 왕조 및 전국시대 왕국들과 관련된 역사로서 서술되고 있다.

'조선(朝鮮)'. 
14세기말에 고려를 무너뜨리고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정도전 등의 급진적 사대부들은 우리 역사의 뿌리이자 '동방의 해뜨는 나라'라는 식의 국명으로 '조선'을 채택했을 수도 있으나, 애초 중국 고대 문헌에서 부른 '조선'은 뜻을 지닌 말이 아니라 동북방의 고대 '조선어'의 음을 한자로 옮긴 것이었다. '렬수'라는 큰 강을 중심으로 번성한 '습수(濕水)' 등의 음과 그와 비슷한 '숙신(肅愼)' 등의 음을 중국의 한자로 번역한 말이 '조선'이라는 것인데 우리글이 아직 없던 시절의 이두식 표현인 것이다. [사기] 등에는 '조선', '발(發).조선' 식의 표현도 있는데, 고대 조선어로 '발(發)', '불(不)'은 '국가' 또는 '지역'을 뜻한다. 고구려의 기원후 1세기 수도 '국내성'은 '불내성'이라고도 쓰며, '부여'라는 고구려 이전 열국 중 하나의 국명은 '지역국가'라는 의미의 '불여(不與)'라는 설도 있다.
그리하여 '(고)조선'이라는 국명이 등장하기 전 오랜 문헌에 나오는 '숙신'은 한참 후 두만강 유역에서 야만생활을 하던 '여진족'의 선조들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바로 '고조선족'을 이르는 말이었다.

나는 중국의 '동북공정' 따위 제국주의 역사관에 대항한 우리의 주체적 역사관은 긍정한다. 반면, 식민사학자 이병도 무리의 '실증주의 사학'은 맹목의 '과학'에 불과하며 심각한 '철학의 빈곤'이 그 본질이라 보고 있다. 한편으로 '대동강 인류문명설'이나 고조선 또는 고구려 '대제국설' 따위는 문헌이나 고고학의 역사과학적 성과를 정치로서 왜곡하는 '유사역사학'이라 불린다. '고조선 연방제국'이 이후 흉노와 섞이고 결국 훈족의 일부로 유럽 문명까지 만들었다는 식의 몽상이 아니라 사료로 말하는 '과학'으로서 역사학의 본연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 [고조선 연구]의 리지린 박사와 이 논문을 역해한 <한가람역사연구소>의 이덕일 소장의 한목소리 주장이다. 그만큼 리지린의 중국 고대문헌 분석은 중국인 역사학자도 반박 못할 정도로 철저했다고 한다. 

리지린의 고조선이 서쪽으로 더 나아간 이유는 바로 '조선(숙신)'이라는 국명의 바탕이 된 강물, 즉 '열수(洌水)'의 위치로부터 나온다. 여기서 '열수'는 '요하' 또는 '요수'인데 현재의 요동과 요서를 가르는 '요하'가 아니라 그보다 더 서쪽에서 흐르는 '난하'라고 한다. '난하'는 북경에서 가까운 북쪽의 강이다. 기존 '고조선=요동설'은 고대의 요동과 현재의 요동을 같은 지역으로 보았으나, 리지린은 '열수(요수)'를 더 서쪽의 '난하'로 보면서 고대 요동을 현재 요동보다 훨씬 더 서쪽으로 비정한 '대륙 고조선설'의 주요 이론가였다. 리지린에 따르면 기원전 7~5세기경 고조선은 극동아시아의 동북지역 전체를 석권하고 있다. 중국 고대 문헌에 "열수는 요동에 있고, 열수 동쪽에 왕검성이 있다"고 하는데, 그러므로 고조선의 수도 '왕검성'은 '평양'이 아니라 고구려의 개모성 또는 개평으로 발해만에 인접한 도시였다. 

기원전 5세기에는 청동기 말기로 '구리의 나라', '고리국'이 고조선의 서쪽에 인접해 있었다. '고리국'의 민족은 '맥(貊)'족으로 표범 비슷한 '맥(貊)'이란 짐승을 사냥하던 민족이었다는 설도 있는데, 중국 전국 중 연나라 장군 진개(秦開)에 의해 멸망한 듯 하다. 이때 흩어진 '맥족'이 고조선을 이루던 '예(濊)'족과 섞여 '예맥(濊貊)'족을 이룬다. 이들이 바로 선비족, 부여국, 오환족 등의 선조가 되는 동호(東胡)족(동쪽 '오랑캐')이며 고조선인들이었다. '예(濊)'족의 한자는 '더럽다'는 뜻인데 고조선인들이 스스로 이런 한자를 썼을리는 만무하다. 북방 유목민 '흉노(匈奴:흉칙한 노예)'처럼 중국인들이 지칭한 차별적 언어였을 것인데, 고조선족인 '예'족은 원시야만의 나라가 아니라 주도적 철기 문명을 지닌 동북방 일대의 거대한 고대 '연방국가'를 이룬 사람들이었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은 이미 '8조 금법' 등을 보아도 '원시공동체'를 벗어나 국가권력이 인민 개인을 법으로 통제하던 고대 국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
결국, 고조선의 지배민족은 엄밀히 따지면 '예'족이었고, 부여와 고구려의 지배민족은 '맥'족이라는데 '예맥'족으로 섞인 이들은 아시아의 동북방 또는 고대 요동을 지배한 민족들이다.


"예와 맥은 일찍이 신석기 시대, 늦어도 기원전 2천여 년 이전에 오늘의 료동, 료서 지역에 정착하였다고 보여진다. 예는 료동 개평을 수도로 하여 국가를 형성하였다. 예의 여러 부족들은 국가 형성 이전에 이미 료서와 조선반도로 퍼져 나갔고, 그 일부는 오늘의 하북성 남부인 청장수 지역에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다. 맥은 처음부터 예의 지역의 북방에 거주하면서 기원전 10세기 이전 시기에는 이미 그 일부가 중국 북부에까지 진출하였던 것이며, 늦어도 기원전 5세기에는 료서의 열하, 릉원, 조양 지역, 고 료동의 고조선 지역 북부에 걸쳐서 계급국가인 맥국을 건립하였던 것이다."
- 리지린, 같은책, <3. 예족과 맥족에 대한 고찰>.


후대 조선을 건국한 사대부 '혁명가'들조차 사대주의로 인해 '기자조선'을 근본으로 삼았다. 원래 천제 환인의 아들 환웅과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왕검이 건국한 '(고)조선'이 아니라 중국 은나라의 신하 기자(箕子)가 요동으로 망명하여 세운 중국식 왕조인 '(고)조선'이라는 것인데, 리지린의 문헌 분석에 따르면 '기자'는 동북방 요동으로 오지 않았다. 고조선의 왕족 성씨가 '기'씨였기에 혼동이 전설이 된 것일 수 있다는 것이다. 기원전 3세기 북방 유목민의 대명사 '흉노'족의 왕은 '선우(單于)'인데, 동북방 정착민 '예맥(동호)'족의 왕인 '단군(檀君/단간:單干)'의 한자가 비슷하다. 즉 1,900년 동안 고조선을 다스렸다는 '단군왕검'은 개인이 아니라 곰을 숭상하던 부족의 왕을 뜻하며 고조선이 1,900년 이상 지속되었다는 의미다. '단군'은 '선우', '왕'은 '왕', '검(험)'은 '곰'을 의미한다.

이후 맥국(고리국)을 멸망시킨 연나라 장수 진개는 중국 한족이 아니라 연에 귀순한 맥족이었고, 고조선 준왕을 진국 마한으로 쫓아낸 위만도 중국 한(漢)족이 아니라 맥족이었기에 고조선에 귀순한 후 준왕이 위만에게 맥의 지역을 지키게 한 것이었다. 
결국, 동북방 요동과 요서 지역을 장악한 민족은 중국 한족이나 한반도인들이 아닌 그 지역의 오랜 정착 '예맥족'이었다. 요동은 요동만의 역사와 문화가 이어져 왔으므로 '요동사' 자체가 인정되어야 하는 이유다.
위만의 반란 후 마한, 진한, 변한의 '삼한'과 한반도 일대에서 이 부족국들을 망라한 '진국'으로 고조선의 예맥족이 넘어와 '한(韓)'족과 섞이면서 '요동사'는 우리 역사가 된다. 북방의 역사는 중국보다는 한반도와 더 가깝다.

고대 아시아 동북방의 '예맥(동호)' 이전의 원시민족은 '조이(鳥夷)'족이었는데, 하늘의 새를 숭상하던 풍습으로 사람이 죽으면 그 시체를 새에게 바치는 '조장(鳥葬)'을 시행하기도 하며 건국신화의 영웅들이 전부 '알'에서 태어나는 '난생(卵生)' 신화의 공통점이 있다. 부여와 고구려, 신라와 가야의 시조들은 모두 '알'에서 태어났다.
우리말 '아씨'는 흉노 선우의 부인 '알씨'와 같은 어원이다. 또한 고조선의 뒤를 이은 부여의 '마가', '우가', '저가', '구가' 등의 '제가회의(諸家會議)'에서 '가(加)'는 '가한(可汗)', 즉 '칸(Khan)'이며 이후 돌궐, 몽골 등의 서북방 유목민과도 연결되는 증거다. 고구려 또한 이러한 '칸국'을 거느린 '5부족 연맹체'를 정치체제로 물려받았다.


"위만이 들어온지 얼마 안되어 왕권을 탈취했다는 사실은 고조선의 계급투쟁이 첨예화되였으며, 거기에는 그 계급투쟁을 리용할 수 있는 새로운 계급, 즉 봉건 지주계급이 형성되고 있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겠는가?...
요컨대, 고조선에서는 기원전 3세기 말에는 호민 계층이 지주계급을 형성하기 시작하였으며, 위만은 그 계층과 결합하여 하호와 노예의 폭동을 리용하여 고조선 왕권을 전취하였다고 인정된다."
- 리지린, 같은책, <9. 고조선의 국가 형성과 그 사회 경제 구성>.


고조선은 기원전 12세기 중국 서주 시대부터 흩어져 있던 부족국가들이 기원전 8~7세기경에는 '고조선'으로 '예맥'의 통합국이 된 '고대 노예제 사회'였고, 독자적인 철기 문화를 주도하면서 중국 제나라와 활발한 교역도 했다. 노예와 같은 처지의 소작빈민인 '하호(下戶)'가 기본계급이었으나 중소지주에 해당하는 '호민(豪民)'들이 봉건 지주계급으로 성장하는 과정에서 위만은 이 '호민'과 '하호' 세력의 지지 하에 고대 노예제 국가 고조선을 뒤집어 엎고 '봉건지주 혁명'을 완수하면서 과도기적 정치경제 체제를 건설했다는 것이 리지린의 주장이다. 
즉, 위만(衛滿)은 '예맥'인으로서 고조선인이었고, 고조선 왕조의 교체는 고대 노예제 사회에서 봉건제 사회로 이행하는 과정이었다는 것이다. 
북한의 진보적 '력사학자'답게 리지린에게 우리의 역사, 고조선의 고대사 또한 "계급투쟁의 역사"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현존 문헌 자료 상의 고조선 사회 경제 구성은 아세아적 공동체가 파괴되였으나 여전히 총체적 노예제의 유제가 강인하게 잔존한 노예 제도가 지배적 지위를 차지한 노예제 사회이였고, 위만 이후 점차적으로 봉건사회에로 이행하였다고 인정한다."
- 리지린, 같은책, <9장>.

***

-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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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 - 신화학의 거장 조지프 캠벨의 ‘인생과 신화’ 특강
조지프 캠벨 지음, 권영주 옮김 / 더퀘스트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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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평'없는 '신화'의 새로운 '지평' 열기
-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1972), 조지프 캠벨, 권영주 옮김, <더퀘스트>, 2020.



"... 신화는 말하자면 집단의 꿈이요, 꿈은 개인의 신화다."
- 조지프 캠벨,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 '1. 신화가 과학을 만났을 때', 1961.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Joseph Campbell:1904~1987)은 1958년부터 1971년까지 뉴욕에서 행한 신화 관련 강연록을 정리하여 [Myths To Live By]라는 책을 낸다.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이라는 국역본의 이 원제는 우리말로 "우리가 삶의 신조로 삼을 신화 이야기" 정도 될 듯 한데, 그리스-로마 신화를 비롯한 각 지역의 흥미진진한 신화 이야기인 줄 알고 펼치니, '신화 일반'에 관한 이야기였다. 유럽에서 산스크리트어를 공부하고 인도 경전 [우파니샤드]를 번역한 저자는 동양, 더 세부적으로 인도 신화 이야기를 많이 언급한다.

결론부터 말하면, '우주의 법칙'을 묘사한 '신화' 일반은 우리들 인간 '마음의 법칙'에 다름 아니라는 내용인데, 인류의 사유의 역사로부터 시작되는 '신화' 이야기는 '종교'와 '과학'을 비껴갈 수 없다.


"이전부터 사회의 도덕질서는 종교화된 신화가 바탕이 됐고, 과학이 신화에 영향을 끼쳐 불가피하게 도덕질서에 혼란을 야기한다면, 이제는 인간의 삶을 지탱하는 신화를 '과학적으로' 이해할 수 없는지 따져봐야 할 것이다."
- 조지프 캠벨, 같은책, '1강'.


인류가 아직 '문명'을 깨우치기 전, 세상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그 근원이 무엇인지 '과학'적으로 설명할 수 없었던 고대에는 '이야기'를 지어냈다. 개인의 상상이라면 '꿈'이겠지만 여러 개인들이 모인 집단의 이야기는 '신화'가 되었다. 비록 '역사적 사실'이 아니라고 해도 모두에게 "널리 사랑받은 신화적 상상"이라면 "정신의 사실(캠벨, 같은책, 1강)"이 된다고 한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바로 '이데올로기'의 시작이다.

'이데올로기'.
마르크스에게는 '허위의식'이자 '관념'이었고, 알튀세르에게는 현실적인 힘을 갖는 계급투쟁의 '무기'였으며, 하라리에게는 호모 사피엔스의 최초 '인지 혁명'의 요체다. 
그러므로 '집단의 꿈'인 '신화'는 '이데올로기'로서 해당 사회의 '도덕질서'를 규정했고, '종교'로서 다수에게 절대적 믿음의 교리를 선사했으며 이에 반대 사실을 밝혀낸 '과학'과 대립하며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 수많은 '이단'을 양산했다.
그리하여 '종교'는 '정신적 사실'로서 더욱 확고해지려고 하지만, 결국 '과학'에 의해 밀려난다는, '종교'와 '과학'의 대립의 역사가 우리에게 익숙하다.

그러나 캠벨에 의하면, '과학' 또한 완결될 수 없는 가설의 연속이며 '신화'나 '종교'는 어느 면에서는 당시의 '과학'이었으므로, 엄밀히 말하면 '종교'와 '과학'의 대립이 아닌, 2천년 전의 '과학'과 현재의 '과학' 사이의 대립으로 보아야 한다. 
역시 동양(인도) 사상답게 '신화'도 '종교'도 '과학'도 하나로서 '합일'된다.


"... 새로운 지혜는 공상하는 젊음이 아니라, 경험 많은 노년의 지혜이며, 나이를 불문하고 우리 모두가 흡수해야 하는 것이다."
- 조지프 캠벨, 같은책, '5. 동서양 종교는 어떻게 대립하는가'.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로 유발 하라리식 표현으로 하면 '인지 혁명'을 이룬 호모 사피엔스의 발자취를 훑은 캠벨은 '동양과 서양의 분리'에 주목한다. '신화'의 동기가 되는 '만물을 지배하는 거대한 우주법칙'을 이집트어로는 '마트(Maat)', 수메르어로는 '메(Me)', 중국어로는 '도(道)', 산스크리트어로는 '다르마(Dharma)'라고 하는데, 메소포타미아 지역 또는 지금의 중근동 지역인 '레반트' 지역에서는 이러한 '거대한 우주법칙'이나 자연을 중심으로 보는 것이 아닌 "얼마든지 마음이 변할 수 있고 실제로 자주 변하는 개인"을 중심으로 '신화'를 구축해 왔다. 캠벨은 여기서 유럽 또는 서양 고유의 '개인주의'를 본다.

동양은 '도' 또는 '하늘', '천자', '텡그리' 등을 중심으로 공동체를 '집단화'하는 반면, 서양은 이 모두를 '인격화'시킨 신을 통해 '개인화'한다. 천국과 지옥, 신과 악마, 선과 악 등의 고전적 이분법은 고대 메소포타미아 지역 페르시아 제국의 종교였던 '조로아스터교'가 근원인데, '불'을 숭상하며 '빛'과 '어둠'의 대립을 중심사상으로 했던 교리가 이후 유대교, 기독교, 이슬람교 등 유일신 신화의 뿌리였던 것이다. 이를 구제하는 자가 바로 '메시아', '그리스도', '구세주'다. 한편, 동양의 불교에서도 '메시아'와 비슷한 '미륵불'도 있고 깨달은 자도 있으며, 극락과 지옥도 있고 부처와 악귀 역시 존재하나, 이들은 이분법적으로 대립하지는 않는다. 동양은 외부의 신이 아닌 "자신 내면으로 향하는 길"을 강조하면서 모든 것은 하나라는 '합일'을 강조한다.

대승불교의 한 종파인 '선종'의 중심개념인 '선(禪)'의 최종 목표는 '개념의 그물을 끊는 무심(無心)의 철학'이며, '부처'를 뜻하는 '여래(如來)'는 무엇을 설교하는 자가 아니라 무의미하게 그냥 '그처럼 다가오는 자'라는 의미다. '존재(sattva)'가 '깨달은(bodhi)' 자로서 '보살(Bodhisattva)'은 현세에서 '자비'로서 중생을 구제하면서도 속세를 더 나은 곳으로 바꾸는 것에는 무심하다. 선악과 옳고 그름 등의 이분법 조차 '자비'라는 "형이상학적 충동 속에 사라진다(캠벨, 같은책, 8강)."


"... 수행자와 성자는 그 (지복의) 바다에서 헤엄치고 있는데 반해, 조현병 환자는 그저 바다에 빠진 셈이다... 모험에서 돌아오려면 모험의 최종목적이 자기자신을 위한 해방이나 황홀경이 아니라, 타인에게 도움이 되는 지혜와 힘이어야 한다... 신화의 영웅, 샤먼, 신비주의자, 조현병 환자의 내적 여행은 원칙적으로 동일하다. 그들의 귀환 또는 증세의 완화는 '재생'으로 체험된다. 다시 말해 현실의 '지평'에 더는 구속되지 않는 '거듭난' 자아가 탄생하는 것이다."
- 조지프 캠벨, 같은책, '10. 내면으로 떠난 여행 : 조현병의 연구'.


캠벨은 이후 신화적 '영웅'과 정신분열(조현병)의 심리학을 비교하는데, 신화적 '영웅'은 기존 질서에서 일탈하는 자기부정 과정에서 집단적 공공선에 대한 깨달음을 얻고 돌아와 민중들을 구원하고 '영웅'이 되는 반면, 조현병자도 비슷한 일탈을 겪지만 공적인 깨달음에 이르지 못하는 병리현상에 머문다. 


"... 불의 사용... 불에의 매료... 하지만 인간의 생각과 삶에 가장 큰 영감을 준 것은 기원전 3500년경 메소포타미아의 밤하늘을 관측하던 신관들을 사로잡은 일로, 수학적으로 정의할 수 있는 우주질서에 맞춰 사회질서를 수립하는 것이다. 그때부터 계급구조를 갖춘 도시국가가 등장해 그 뒤로 수천년간 모든 고대문명의 모델이 됐다. 다시 말해 그때 인간에게 문명화된 삶을 준 종교와 예술, 문학, 과학, 도덕, 사회질서는 '경제'가 아니라 '천체과학'에서 시작됐다는 뜻이다. '우리를 속여 한계를 넘게 해서' 경제나 정치로는 절대로 불가능했을 것을 달성하게 해주었다.
...
선사시대의 동굴에서, 산 위의 절, 그리고 이제 달에 이르기까지 '지평'의 확장은 언제나 의식의 확장을 가져왔다... 따라서 우리는 '지금 이 순간'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위대한 도약에 동참하고 있다는 것이 내 논지다."
- 조지프 캠벨, 같은책, '11. 세상 바깥으로 떠난 여행 : 달 위를 걷다'.


이제 캠벨의 '신화 일반'에 대한 생각의 결론까지 왔다. 1969년 달 위에 인류의 발자취를 남긴 역대사건에 대한 감동과 얼핏 보이는 미국인으로서의 '미국주의'는 살짝 거슬리기는 하나, 캠벨의 논지는 '종교'나 '경제'나 '정치' 등의 '현실적 지평' 너머까지 인류를 인도했던 '과학'과 '신화'의 역할을 강조하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기로는 '신화'적 상상력과 '과학'적 발전을 통해 현실의 '지평'들의 한계를 넘어서야 한다는 결론이며, '과학' 진보의 길에서 "다시, 신화를 읽을 시간" 또는 '과학'과 합일되어 '지평'을 열어가는 '신화'가 바로 우리가 지금 이 순간 '신조로 삼아야 할 신화([Myths To Live By])라는 내용일 것이다.


"새로운 신화는 무엇인가 또는 무엇이어야 하는가?
...
지혜 전승의 상징이 특정한 역사적 실존인물과 실제사건이 아니라 인간의 내적 잠재가능성을 가리키는 것을 보고 심리학적으로 올바른 의미에서 '영적으로' 해석할 때, 그 모든 것에서 진정한 '구원의 철학'이 나타날 것이다."
- 조지프 캠벨, 같은책, '12. 끝맺으며 : '지평'의 소멸'.


과거에는 각 지역이나 분야, 다른 문화의 '지평'에서 '신화'가 만들어졌지만, 캠벨이 이 책을 낸 1960년대에 이미 그런 '지평'은 허물어지고 있었다. 21세기인 지금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러므로 캠벨이 말하는 '지금의 신화'는 우리 하나하나가 세상의 중심이고 우리 안에 각자 해방된 마음이 있으며 이 '마음의 법칙'이 모든 '우주의 법칙'이기에 우리 개인을 깨워 자기 스스로를 알게 해주는 것을 목표로 해야 한다. 쉽게 말해 인도식으로 '요가'를 하면서 우주와 자기를 '합일'시키기라도 하라는 것 같지만, 수천 년전 '과학'이었던 '신화'와 오늘날의 '과학'이 하나이므로 결국 외부로 '지평'을 확대하는 '과학'의 길에서 내부의 우리 인류 '자기'를 함께 들여다 봐야 한다는 20세기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의 메시지는 21세기까지 [코스모스] 계획을 집대성하는 앤 드루얀(칼 세이건의 동료이자 배우자인 천체물리학자)의 마지막 문장들과 같다.


"우리는 서서히 자연의 책을 읽는 법을, 자연의 법칙을 배우는 법을, 나무를 보살피는 법을 익혔다. 우리가 코스모스라는 망망대해에서 언제, 어디에 있는지 알아내는 법을 익혔다. 그리고 코스모스가 스스로를 이해하는 수단이, 별로 돌아가는 길이 되었다."
- 앤 드루얀, [코스모스], 2020.


20세기의 칼 세이건이 [코스모스] 외부로 나아가는 길을 밝혔다면, 21세기의 앤 드루얀은 그 방식을 따라 인류라는 또 하나의 '별'로 돌아오는 길을 함께 밝히고자 한다. 
그리하여 캠벨의 마지막 문장은 이렇게 맺는다.


"... 한 사람 한 사람이 각각의 방식으로 모든 것과 하나인 이 세계에 '지평'은 없다."
- 조지프 캠벨, 같은책, '12강', 1971.

***

1. [다시, 신화를 읽는 시간](1972), 조지프 캠벨, 권영주 옮김, <더퀘스트>, 2020.
2. [코스모스](2020), 앤 드루얀, 김명남 옮김, <사이언스북스>,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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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평전
조영래 지음 / 아름다운전태일(전태일기념사업회)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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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태일 열사 50주기]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
- [전태일 평전], 조영래, <전태일기념사업회>, 2009.



"이 결단을 두고 얼마나 오랜 시간을 망설이고 괴로워했던가? 지금 이 시간 완전에 가까운 결단을 내렸다. 나는 돌아가야 한다. 꼭 돌아가야 한다. 불쌍한 내 형제의 곁으로, 내 마음의 고향으로, 내 이상의 전부인 평화시장의 어린 동심 곁으로. 생을 두고 맹세한 내가, 그 많은 시간과 공상 속에서, 내가 돌보지 않으면 아니 될 나약한 생명체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마. 조금만 참고 견디어라. 너희들의 곁을 떠나지 않기 위하여 나약한 나를 다 바치마. 너희들은 내 마음의 고향이로다."
- 1970년 8월 9일, 전태일의 일기 중

 
현대 독점자본주의 체제 정착을 목표로 한 한국의 자본축적 과정에서 경제개발을 위한 노동착취가 일상화되던 제3공화국 군부독재 시기는 노동해방을 주장하던 노동자 및 사회주의 세력 등이 분단과 단독정부 세력에 의해 씨가 말라 버린 상황에서 직접 착취를 당하는 노동자나 지식인 어느 누구도 노동자의 사회적 권리를 외칠 수도 없는 암흑의 시기였습니다. 그러나 1970년 이후 20세기 말까지 민중의 힘으로 정치적 민주화를 이루는 과정과 함께 한국의 노동운동은 세계가 인정할 만큼 전투적으로 노동자의 권리를 주장하고 쟁취하여 왔습니다. 
이러한 노동자 권리에 대한 노동자 의식의 질적인 변화의 중심에 바로 전태일 열사가 있습니다.
 
1970년 11월 13일,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한 재단사가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몸에 불을 살랐습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혹사하지 말라!”는 외침과 함께 분신을 하였고 응급실에 실려가면서도 근로감독관에게 항의하면서 어머니와 친구들에게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는 당부와 함께 스물 두 살의 젊은 삶을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바친 그가 바로 전태일 열사입니다.
 

전태일 열사는 1948년 대구에서 태어나 17세가 되던 1966년에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일하기 시작하여 재단사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평균 15세 미만의 여성 ‘시다’들이 돈이 없어 밥을 굶고 하루 14시간 이상의 장시간 중노동에 시들어가면서도 그나마의 박봉도 며칠씩 체불당하기도 하고 열악한 작업환경으로 인해 병에 걸렸으나 아프다는 이유로 일방적인 해고를 당하는 참혹한 노동 현실을 그대로 두고 볼 수 없어 ‘바보회’라는 친목단체를 만들어 [근로기준법] 준수를 요구하게 됩니다. 

그가 생각한 개선방향은 네 가지였습니다.
첫째, 좋은 재단사가 되어 어린 여공들을 위해 일하는 ‘온정주의’, 
둘째, 정부당국을 상대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계속 진정을 하는 ‘진정주의’, 
셋째, 좋은 모범기업을 만들어서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는 방법, 
넷째, 노동조건 개선에 동조하는 모든 사람들을 규합하여 적극 쟁취하는 ‘적극 투쟁주의’였다고 [전태일 평전]을 쓴 인권변호사 故조영래 선생은 분석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첫 번째 ‘온정주의’는 이미 오래전부터 가지고 있던 생각으로 노동조건 개선에 한계가 있었고, 두 번째 ‘진정주의’ 또한 정부 당국과 노동청(당시 노동부) 근로감독관에게 수 차례 진정을 하였으나 기만당하기 일쑤였으며, 세 번째 모범기업은 당시 재단사로서는 상상하기도 힘든 3천만원 정도 거액의 자본이 필요한 것으로 예상되어 꿈에 그칠 수 밖에 없었으므로 청계천 평화시장을 떠나 삼각산 공사현장에서 노동을 하던 4개월 동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다시 평화시장으로 돌아갔던 1970년 9월에 부득이하게 네 번째 ‘적극 투쟁주의’를 선택할 수 밖에 없었을 것이라고 故조영래 변호사는 말합니다.
 
1970년 9월, 다시 청계천 평화시장을 찾은 전태일 열사는 무너진 ‘바보회’ 시절 동료들을 다시 규합하면서 ‘삼동친목회’라는 이름으로 조직을 변모시킵니다. ‘바보회’와 달리 ‘삼동친목회’는 노동조건에 대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신문에 평화시장의 실상을 알리는 기사가 게재되도록 하는 등 더욱 적극적인 활동을 하였으나 노동자들의 노동조건 개선은 조금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전태일 열사는 자신이 위편삼절하듯 읽었던 [근로기준법]은 현실과 괴리된 채 사문화되었다고 판단하게 됩니다. 게다가 ‘삼동친목회’에서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준비한 집회도 정부당국과 경찰, 기업주로부터 저지당하는 과정에서 ‘[근로기준법] 화형식’을 거행하려고 하던 1970년 11월 13일, 전태일 열사는 [근로기준법] 책을 안은 채 자신의 몸에 불을 놓게 됩니다.

이후, 전태일 열사가 살아 생전 [근로기준법]을 혼자 연구하며 “대학생 친구가 하나 있었으면 원이 없겠다”라고 아쉬워 했던 그 대학생들과 지식인들은 열사의 분신을 계기로 하여 즉각적으로 노동자들과의 연대를 고민하기 시작하였고 청계천 평화시장에 남은 동료 노동자들과 전태일 열사의 어머니 故이소선 여사는 열사의 유지를 이어 투쟁한 결과 1970년 11월 27일 ‘청계피복 노동조합’을 결성하기에 이르는데 유신독재와 신군부 독재 시기였던 1970~80년대 노동운동의 선봉에는 ‘청계피복 노동조합’이 있었습니다.
 

2020년 11월 13일은 전태일 열사가 노동조건 개선을 위해, 노동자들의 사회적 지위 향상을 위해 목숨을 바친 지 50주기가 되는 날입니다. 우리 노동계는 매년 이날을 기념하여 '전국노동자대회'를 개최합니다.

11월 13일은, 나와 내 이웃의 삶과 권리를 위해 우리 모두가 함께 모여야 하는 바로 그 날입니다.


"어쩌면 좀 잔인한 것 같지만 내가 지나온 길을 자네를 동반하고 또 다시 지나지 않으면 고갈한 내 심정을 조금이라도 적실 수 없을 것 같네. 내가 앞장설 테니 뒤따라오게."
- 1969년 9월, 전태일의 수기 중

***

- [전태일 평전], 조영래, <전태일기념사업회>,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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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 무서운 그림 1
나카노 교코 지음, 이연식 옮김 / 세미콜론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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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것은 '그림'이 아닌 '인간'이다
- [무서운 그림 1~2], 나카노 교코, 이연식/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8~2009.



"내가 '무서운' 그림에 대해 쓰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투아네트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케치였다. 머리는 짧게 깎고 손은 뒤로 묶인 채 짐마차에 실려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때는 '로코코의 장미'였던 이의 깜짝 놀랄 만한 모습. 이 그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고성쇠의 낙차를 느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린 이의 악의가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다비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었고 생애 내내 동료를 배신하며 권력자에게 아첨한 화가였다. 이 앙투아네트를 그린 1793년 무렵, 국왕을 처형하는 쪽에 표를 던진 그는 왕비였던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노릇이다."
- [무서운 그림 1], <서문>, 나카노 교코, 2007.


자크 다비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기의 '투사'였고 로베스피에르의 급진 '자코뱅파' 당원이었다가 나폴레옹 황제의 '남작'이기도 했다. 또한 혁명가 '마라'의 타살을 예수의 죽음과도 같은 '피에타'처럼 그린 18~19세기 신고전주의 대표적 화가였다. 
그는 루이 16세와 그 '음탕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을 주장한 로베스피에르의 동지로서, 단두대로 향하는 왕비의 마지막 초상을 '무서운' 스케치로 남겼는데 권력에 아부하는 화려한 '로코코'식 궁정화풍을 단순한 스케치로써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자코뱅파가 실각하고 몸을 피했던 다비드는 형장으로 끌려가던 로베스피에르를 또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이후 20세기에 역사소설 [마리 앙투아네트](국역 : [베르사유의 장미])를 쓴 독일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동지였으나 '왕당파'에 기운 정적 조르주 당통의 입을 빌어 다비드를 "이 못된 종놈"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로코코' 궁정화풍을 비판했던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자크 다비드는 역시 권력에 빌붙는 '무서운' 인간의 초상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다비드의 가장 '무서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케치>도 <마라의 죽음>도 아닌 단연 대혁명을 배신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다.


"... 이에(카라바조의 유딧에) 반해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딧은 단호한 의지를 지닌 성숙한 여인이다.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사내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만약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도 되어 있다. 그녀를 돕는 젊은 몸종도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동지로서 강한 연대감을 내보인다. 둘은 예사롭지 않은 기백으로 임하고 있다. 곯아떨어졌다지만 상대는 한 군대의 우두머리다. 정의는 우리 편이라고 믿기는 해도,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사람의 목을 벨 수는 없다. 
이렇게 하여 이때까지 전설의 미녀였던 유딧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피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범죄 현장을 생중계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만약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카라바조 그림의 유딧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면 놀라고 당황할 것이 뻔했다."
- [무서운 그림 1],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나카노 교코, 2007.


여기 또 다른 '혁명가'들이 있다. 이 여성 '혁명가'들은 권력이나 가부장적 권위에 순응하기보다 이에 용감하게 맞선 '무서움'의 상징들이다. 19세기 아르누보 계열의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의 [유디트]로 잘 알려진 유대 여인 '유딧'과 17세기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구약성서의 외전에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핍박하는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으로 들어가 술과 섹스로 떡실신한 그 장수의 목을 썰어서 나온 유대인 과부 '유딧' 이야기를 전한다. 16세기 화가 카라바조나 17세기 남성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그림에서 묘사된 '유딧'은 여리고 아름답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카라바조의 '유딧'은 예쁜 척을 너무 유지한 나머지 도저히 목을 벨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알로리의 '유딧'은 화가 자신의 구애를 뿌리친 창녀의 얼굴을 모델로 한 '유딧'이 알로리 본인의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17세기에 흔치 않은 여성 화가이자 동료 화가에 의한 강간사건의 피해자로 오랜 시간 송사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겨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려낸 '유딧'은 강력하고 거침없다. 예쁜 척하면서는 결코 적군 장수의 목을 썰어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무서운' 현실보다 훨씬 더 '무서워' 지지 않고서는 베길 수도 없다.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그 하녀 '동지'는 그 강렬함 만큼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의 그림 중 가장 '현실적'이기에 '무서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딧'이다.


"그 중에서 유난히 선호되었던 것이 '악녀'들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피를 빠는 흡혈귀 여인, 마술로 남자를 미혹시키는 마녀, 어부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인어,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으로 남자를 유혹해 결국엔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 그리고 남자의 목을 자르는 '유딧'과 '살로메'..."
- [무서운 그림 2], <비어즐리의 '살로메'>, 나카노 교코, 2008.


19세기 영국의 탐미주의 극작가 오스타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성서나 고대 유대사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순교사건을 다룬다. 실제는 '유대왕'의 재림을 두려워한 '이스라엘 왕' 헤롯왕가 이야기다. 동방박사로부터 '예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그 시기 1~2년 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 전부를 죽이라 명하고 기독교 '최초의 순교'일 수 있는 '베들레헴 영아 대학살(피터르 브뢰겔, 16세기)'을 일으킨다. 헤롯왕가의 이후 다른 헤롯왕은 예수에게 세례를 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요한을 참수하면서 의붓딸 '살로메'를 희생자로 이용하는데,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던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원하여 마지못해 베었다는 식의, '종교 박해'를 다분히 '정치적 우화'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에 오스카 와일드는 한 발 더 나아가 감금된 세례 요한을 유혹하다가 뜻대로 안되자 헤롯왕에게 청하여 아예 목을 따버린 '악녀 살로메'로 진화시킨다. 

스물 한살의 영국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삽화로 유명해졌는데,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외국 도피 중 결핵으로 스물 다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무튼 이렇게 '악녀'의 이미지는 '남성'의 잘린 머리와 자동적으로 교합('베톨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하면서 하나의 상징적 우화가 되었고, 그 아이콘이 바로 '유딧'과 '살로메'다.

로마를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왕이 되었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음에도 정작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은 '헤롯왕가'는 지역의 힘없는 영아들을 대학살하고 성자를 죽였으며 동시에 나약한 여인 '살로메'를 '악녀'로 만들어 후세들, 특히 '남성'들에 의해 두고두고 죽게 만들었다.

하긴, 이 가부장제는 '성녀' 마리아의 '수태고지' 자체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데, 결혼예정자 요셉과 '별도 못 봤는데' 임신했다는 황당무계한 소식을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결국,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임하소서."라는 순종의 언어였다(<수태고지>, 자코포 틴토레토, 16세기 / 프라 안젤리코, 15세기).
가부장제는 '악녀' 뿐만 아니라 '성녀'조차도 폭력적으로 양산한다.

이로 인해, 가장 '무서운' 것은 욕정과 욕망에 가득찬 '악녀'와 그녀의 쟁반에 올려진 참수된 '남성의 머리'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특히 '약자'인 타인의 희생을 통해 본인의 이익과 목적을 쟁취하는 '정치'와 그런 권력을 탐닉하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그러면 이 야무진 악당들과 우둔한 젊은이가 엮어내는 드라마는 왜 이처럼 보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그건 어리석은 청년을 비웃은 뒤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갑자기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는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인간의 사악한 시선이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처럼 분명하게 보일리 없다...
위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다니, 무척이나 두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그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아예 모른 채로 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파국은 해일처럼 몰아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순식간에 전후로 지각이 확장되어 가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공포의 본질'이리라."
- [무서운 그림 1], <라 투르의 '사기꾼'>, 나카노 교코, 2007.


역시 '무서운' 건 '인간'이다. 사기를 치는 '인간'도 그렇고, 사기를 당하는 '인간'도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이야기일 수 있기에 그러한 관계와 상황 자체가 '공포'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3세 궁정화가였던 조르주 라 투르의 그림 <사기꾼>은 이런 상황을 카드 게임 장면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준다. 사기를 당하는 '호구'인 귀족 청년은 처음에 쉽게 딴 금화들을 앞에 두고 자기 패에만 몰두하느라 상황을 모르고 있지만 나머지 두 선수와 하인까지 모두 다 한 패거리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만 가능한 장면인데 '짜고차는 고스톱'인 건 사기당하는 사람 혼자만 모른다. 
루이 13세의 궁정화가 조르주 라 투르의 이런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노골적인 화풍은 이후 루이 14세의 화려한 '바로크'식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궁을 나와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재산을 불린 전 '궁정화가' 라 투르는 아마도 전쟁과 약탈, 학살과 페스트가 만연한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고 세상을 불신하는 극도의 '개인'으로서 '나'만을 믿었을 테고, 이런 세태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가속화하는 현상이겠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도 '그림'도 아닌 '인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독일문학과 서양문화사를 가르치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 1](2007)과 그 속편인 [무서운 그림 2](2008)를 통해 "가장 무서운 건 '천재지변'도, '유령'도 아닌,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런 '무서운' 인류는 '천재지변'이나 '호환마마' 같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적 '바이러스'라는 더 '무서운' 것들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무서운' 인류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초래했다는 사실이 '공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임박한 파국을 정작 당사자 본인만 모르는,
조르주 라 투르의 <사기꾼>에서 극적으로 묘사된 이런 상황과 현실이,
이것을 만든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

1. [무서운 그림 1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2007),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08.
2. [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2008),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9.
3. [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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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 무서운 그림 2
나카노 교코 지음, 최재혁 옮김 / 세미콜론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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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무서운' 것은 '그림'이 아닌 '인간'이다
- [무서운 그림 1~2], 나카노 교코, 이연식/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8~2009.



"내가 '무서운' 그림에 대해 쓰려고 생각하게 된 계기 중 하나는 마리 앙투아네트였다. 정확히 말하자면 앙투아네트를 그린 자크 루이 다비드의 스케치였다. 머리는 짧게 깎고 손은 뒤로 묶인 채 짐마차에 실려 단두대로 끌려가는, 한때는 '로코코의 장미'였던 이의 깜짝 놀랄 만한 모습. 이 그림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영고성쇠의 낙차를 느꼈기 때문이라기 보다 오히려 그림을 그린 이의 악의가 날카롭게 느껴졌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다비드는 살아남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정치적 입장을 아무렇지도 않게 바꾸었고 생애 내내 동료를 배신하며 권력자에게 아첨한 화가였다. 이 앙투아네트를 그린 1793년 무렵, 국왕을 처형하는 쪽에 표를 던진 그는 왕비였던 앙투아네트에 대한 증오 또한 숨기지 않았다... 정말 '무서운' 노릇이다."
- [무서운 그림 1], <서문>, 나카노 교코, 2007.


자크 다비드는 1789년 프랑스 대혁명기의 '투사'였고 로베스피에르의 급진 '자코뱅파' 당원이었다가 나폴레옹 황제의 '남작'이기도 했다. 또한 혁명가 '마라'의 타살을 예수의 죽음과도 같은 '피에타'처럼 그린 18~19세기 신고전주의 대표적 화가였다. 
그는 루이 16세와 그 '음탕한' 오스트리아 출신 왕비 마리 앙트와네트의 처형을 주장한 로베스피에르의 동지로서, 단두대로 향하는 왕비의 마지막 초상을 '무서운' 스케치로 남겼는데 권력에 아부하는 화려한 '로코코'식 궁정화풍을 단순한 스케치로써 조롱하고 있다. 그러나 더 '무서운' 것은 자코뱅파가 실각하고 몸을 피했던 다비드는 형장으로 끌려가던 로베스피에르를 또 스케치했다는 것이다. 이후 20세기에 역사소설 [마리 앙투아네트](국역 : [베르사유의 장미])를 쓴 독일 소설가 슈테판 츠바이크는 로베스피에르의 혁명동지였으나 '왕당파'에 기운 정적 조르주 당통의 입을 빌어 다비드를 "이 못된 종놈"이라고 저주하고 있다. 
'로코코' 궁정화풍을 비판했던 신고전주의 대표화가 자크 다비드는 역시 권력에 빌붙는 '무서운' 인간의 초상을 가장 '이상적인 형태'로서 '신고전주의'적으로 보여준다.

그리하여, 내가 보기에 다비드의 가장 '무서운' 그림은 <마리 앙투아네트의 스케치>도 <마라의 죽음>도 아닌 단연 대혁명을 배신한 <나폴레옹 황제의 대관식> 그림이다.


"... 이에(카라바조의 유딧에) 반해 아르테미시아가 그린 유딧은 단호한 의지를 지닌 성숙한 여인이다. 신성한 목적을 위해서라면 성적인 매력을 이용해 사내를 함정에 빠뜨리는 것조차 꺼리지 않고 만약 실패한다면 목숨을 잃을 각오도 되어 있다. 그녀를 돕는 젊은 몸종도 부림을 당하는 사람이라기 보다는 한 사람의 동지로서 강한 연대감을 내보인다. 둘은 예사롭지 않은 기백으로 임하고 있다. 곯아떨어졌다지만 상대는 한 군대의 우두머리다. 정의는 우리 편이라고 믿기는 해도, 어지간히 독한 마음을 먹지 않는다면 사람의 목을 벨 수는 없다. 
이렇게 하여 이때까지 전설의 미녀였던 유딧의 모습은 사라져 버리고 피와 땀 냄새가 진동하는 범죄 현장을 생중계하는 듯한 그림이 나왔다. 만약 이 그림을 주문한 사람이 카라바조 그림의 유딧 같은 모습을 기대했다면 놀라고 당황할 것이 뻔했다."
- [무서운 그림 1], <젠틸레스키의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 나카노 교코, 2007.


여기 또 다른 '혁명가'들이 있다. 이 여성 '혁명가'들은 권력이나 가부장적 권위에 순응하기보다 이에 용감하게 맞선 '무서움'의 상징들이다. 19세기 아르누보 계열의 오스트리아 화가 구스타프 클림프의 [유디트]로 잘 알려진 유대 여인 '유딧'과 17세기 이탈리아 여성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다. 

구약성서의 외전에는 이스라엘을 침공하고 핍박하는 아시리아 군대의 장수 홀로페르네스의 장막으로 들어가 술과 섹스로 떡실신한 그 장수의 목을 썰어서 나온 유대인 과부 '유딧' 이야기를 전한다. 16세기 화가 카라바조나 17세기 남성화가 크리스토파노 알로리 그림에서 묘사된 '유딧'은 여리고 아름답고 그만큼 '비현실적'이다. 카라바조의 '유딧'은 예쁜 척을 너무 유지한 나머지 도저히 목을 벨 수 없는 자세를 취하고 있으며, 알로리의 '유딧'은 화가 자신의 구애를 뿌리친 창녀의 얼굴을 모델로 한 '유딧'이 알로리 본인의 머리를 들고 있기까지 하다. 
그러나 17세기에 흔치 않은 여성 화가이자 동료 화가에 의한 강간사건의 피해자로 오랜 시간 송사에 시달리다가 결국 이겨낸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가 그려낸 '유딧'은 강력하고 거침없다. 예쁜 척하면서는 결코 적군 장수의 목을 썰어서 가지고 나올 수 없다. '무서운' 현실보다 훨씬 더 '무서워' 지지 않고서는 베길 수도 없다. 
젠틸레스키의 '유딧'과 그 하녀 '동지'는 그 강렬함 만큼 '현실적'이다. 

그러므로, 홀로페르네스의 목을 베는 '유딧'의 그림 중 가장 '현실적'이기에 '무서운' 작품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유딧'이다.


"그 중에서 유난히 선호되었던 것이 '악녀'들의 이야기였다. 남자의 피를 빠는 흡혈귀 여인, 마술로 남자를 미혹시키는 마녀, 어부를 바다로 뛰어들게 하는 인어, 예쁜 얼굴과 풍만한 가슴으로 남자를 유혹해 결국엔 잡아먹는 괴물 스핑크스, 그리고 남자의 목을 자르는 '유딧'과 '살로메'..."
- [무서운 그림 2], <비어즐리의 '살로메'>, 나카노 교코, 2008.


19세기 영국의 탐미주의 극작가 오스타 와일드의 희곡 [살로메]는 성서나 고대 유대사에 나오는 세례 요한의 순교사건을 다룬다. 실제는 '유대왕'의 재림을 두려워한 '이스라엘 왕' 헤롯왕가 이야기다. 동방박사로부터 '예수 탄생' 소식을 들은 헤롯왕은 그 시기 1~2년 간 베들레헴에서 태어난 아기들 전부를 죽이라 명하고 기독교 '최초의 순교'일 수 있는 '베들레헴 영아 대학살(피터르 브뢰겔, 16세기)'을 일으킨다. 헤롯왕가의 이후 다른 헤롯왕은 예수에게 세례를 한 구약의 마지막 선지자 요한을 참수하면서 의붓딸 '살로메'를 희생자로 이용하는데, 어차피 죽일 생각이었던 요한의 목을 '살로메'가 원하여 마지못해 베었다는 식의, '종교 박해'를 다분히 '정치적 우화'로 전환시켜 버렸다. 이에 오스카 와일드는 한 발 더 나아가 감금된 세례 요한을 유혹하다가 뜻대로 안되자 헤롯왕에게 청하여 아예 목을 따버린 '악녀 살로메'로 진화시킨다. 

스물 한살의 영국 화가 오브리 비어즐리는 오스카 와일드의 [살로메] 삽화로 유명해졌는데, 동성애 스캔들에 휘말려 외국 도피 중 결핵으로 스물 다섯의 나이에 요절했다. 
아무튼 이렇게 '악녀'의 이미지는 '남성'의 잘린 머리와 자동적으로 교합('베톨리아로 돌아가는 유딧' /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하면서 하나의 상징적 우화가 되었고, 그 아이콘이 바로 '유딧'과 '살로메'다.

로마를 대신하여 세금을 징수하다가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지방의 왕이 되었고 지역을 다스리기 위해 '유대교'로 개종까지 했음에도 정작 유대인들로부터 '이단' 취급을 받은 '헤롯왕가'는 지역의 힘없는 영아들을 대학살하고 성자를 죽였으며 동시에 나약한 여인 '살로메'를 '악녀'로 만들어 후세들, 특히 '남성'들에 의해 두고두고 죽게 만들었다.

하긴, 이 가부장제는 '성녀' 마리아의 '수태고지' 자체도 폭력적으로 관철하는데, 결혼예정자 요셉과 '별도 못 봤는데' 임신했다는 황당무계한 소식을 대천사 가브리엘로부터 들은 마리아의 대답은 결국, "나는 주님의 여종입니다. 당신의 말씀대로 나에게 임하소서."라는 순종의 언어였다(<수태고지>, 자코포 틴토레토, 16세기 / 프라 안젤리코, 15세기).
가부장제는 '악녀' 뿐만 아니라 '성녀'조차도 폭력적으로 양산한다.

이로 인해, 가장 '무서운' 것은 욕정과 욕망에 가득찬 '악녀'와 그녀의 쟁반에 올려진 참수된 '남성의 머리'가 아니라, 수단을 가리지 않고 특히 '약자'인 타인의 희생을 통해 본인의 이익과 목적을 쟁취하는 '정치'와 그런 권력을 탐닉하고 유지하는 '인간'이다.


"그러면 이 야무진 악당들과 우둔한 젊은이가 엮어내는 드라마는 왜 이처럼 보는 이를 강하게 끌어당기는 걸까?
그건 어리석은 청년을 비웃은 뒤 자신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하고 갑자기 불안에 사로잡히기 때문이 아닐까? 이 그림에서는 남을 함정에 빠뜨리려는 인간의 사악한 시선이 훌륭하게 포착되어 있지만 현실에서는 이처럼 분명하게 보일리 없다...
위기의 한복판에 있으면서도 아무것도 모른 채 아무렇지 않다니, 무척이나 두려운 노릇이다. 왜냐하면 어찌 되었든 그 위기에 직면하지 않으면 안되기 때문에 아예 모른 채로 있던 시간이 길면 길수록 파국은 해일처럼 몰아칠 것이 틀림없다. 그것을 알아차린 순간, 순식간에 전후로 지각이 확장되어 가는 순간, 그것이야말로 '공포의 본질'이리라."
- [무서운 그림 1], <라 투르의 '사기꾼'>, 나카노 교코, 2007.


역시 '무서운' 건 '인간'이다. 사기를 치는 '인간'도 그렇고, 사기를 당하는 '인간'도 남의 일이 아닌 나의 이야기일 수 있기에 그러한 관계와 상황 자체가 '공포'다. 
17세기 프랑스 루이 13세 궁정화가였던 조르주 라 투르의 그림 <사기꾼>은 이런 상황을 카드 게임 장면을 통해 간명하게 보여준다. 사기를 당하는 '호구'인 귀족 청년은 처음에 쉽게 딴 금화들을 앞에 두고 자기 패에만 몰두하느라 상황을 모르고 있지만 나머지 두 선수와 하인까지 모두 다 한 패거리다. 전지적 작가 시점에서만 가능한 장면인데 '짜고차는 고스톱'인 건 사기당하는 사람 혼자만 모른다. 
루이 13세의 궁정화가 조르주 라 투르의 이런 단순하고 평면적이며 노골적인 화풍은 이후 루이 14세의 화려한 '바로크'식 분위기에 맞지 않았다. 궁을 나와 고리대금업 등을 통해 재산을 불린 전 '궁정화가' 라 투르는 아마도 전쟁과 약탈, 학살과 페스트가 만연한 당시 유럽사회에서 살아남기 위해 타인을 의심하고 세상을 불신하는 극도의 '개인'으로서 '나'만을 믿었을 테고, 이런 세태는 지금의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더욱 가속화하는 현상이겠지만, 역시 가장 '무서운' 것은 '유령'도 '그림'도 아닌 '인간' 자체라는 사실을 보여준다.


일본 와세다대학에서 독일문학과 서양문화사를 가르치는 나카노 교코는 [무서운 그림 1](2007)과 그 속편인 [무서운 그림 2](2008)를 통해 "가장 무서운 건 '천재지변'도, '유령'도 아닌, 바로 살아있는 '인간'이라"고 한다.
그러나 21세기 들어 20년이 지난 지금, 이제 그런 '무서운' 인류는 '천재지변'이나 '호환마마' 같은 '기후위기'와 '생태위기'적 '바이러스'라는 더 '무서운' 것들에게 잠식당하고 있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은 '무서운' 인류의 탐욕과 이기주의가 초래했다는 사실이 '공포의 본질'이다.

그러므로,
임박한 파국을 정작 당사자 본인만 모르는,
조르주 라 투르의 <사기꾼>에서 극적으로 묘사된 이런 상황과 현실이,
이것을 만든 '인간'이 가장 '무서운' 것이다.


***

1. [무서운 그림 1 - 아름다운 명화의 섬뜩한 뒷이야기](2007),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08.
2. [무서운 그림 2 - 매혹과 반전의 명화 읽기](2008),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09.
3. [불편한 미술관 - 그림 속에 숨은 인권 이야기], 김태권, <창비>,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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