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대한 개츠비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김영하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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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의 '미래'와 콜필드의 '과거'
-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 /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 [위대한 개츠비], <1>, 스콧 피츠제럴드, 1925.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거대 양당제의 과두지배적 정치체제가 사실, 한심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지배당하고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초대 대통령은 한참 후세인 내가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는데 더 중요한 건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정치도 미국의 '양당체제'가 이식된 것이 나는 더 슬펐다. 공화당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라는 식의 수사가 우리의 '양당제'에도 그대로 이식되기를 우리의 지배자들은 바랬겠지만, 적어도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 마이클 샌델 식의 '공화주의적' 자부심이란 게 미국의 '보수'에게는 있었겠지만, 그건 '왕정'을 겪어보지 못한 미국인들의 역사일 뿐, 우리나라 '보수'는 할 수만 있다면, 즉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정'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역사가 깊은 유럽의 '보수'들처럼 말이다.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이미 미국식 양당 정치체제를 두고 "도둑놈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바꿔먹는 정치체제"라 논평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대선을 통해 20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의 몰락을 본다. 이유는, 코로나도 경제위기도 아니다. 바로 빌어먹을 '양당제'다.

1920년대라면, 아마도 미연방공화국의 최대 전성기의 시작과도 같은 시기였을 텐데, 1차 세계대전 후 세력들이 재편되는 유럽을 제끼고 미국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학창시절에 관련 공부는 커녕 관련 소설책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20세기 영미소설' 하면,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미국의 스콧 피츠제럴드와 샐린저 등은 어깨 너머로 들어봤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야 피츠제럴드와 샐린저를 읽었다. 사치스런 행각으로 유럽을 넘나들던 피츠제럴드는 유럽의 조이스와도 친분이 있었고, 미국의 샐린저와도 친했다고 한다.

1896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첫 소설 [낙원의 이쪽]의 대성공으로 상류층의 딸 젤다와 결혼한 피츠제럴드는 호화파티와 유럽여행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소설을 썼다. 부인 젤다는 정신병을 앓았는데 그녀 또한 소설을 썼고 아마도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소설을 질투했을 수도 있고 파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라는 아주 얇은 '대작'을 남겼다. 그의 살아 생전에는 책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대성공까지는 못했다 하나, 1940년 알콜중독과 심장마비로 그가 사망한 후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상류층인 닉 캐러웨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다. 그는 나서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성격인데,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말한다. 당시 성장 사업이었을 '드럭스토어(편의점/잡화점)'를 통해 부자가 된 1차대전 참전군인 '제임스 개츠'는 자신의 과거를 베일에 가린 채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바꾸고 첫사랑이었던 상류층 딸 데이지의 인근에 화려한 대저택을 갖추고는 유명인사들을 꼬이는 호화 파티를 열면서 데이지를 기다린다. 개츠비의 이웃인 화자 닉은 데이지와의 친분이 있었으므로 개츠비의 '친구'가 된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화자 홀든 콜필드의 말을 빌어 말끝마다 "친구" 또는 "형씨"라 붙이는 개츠비식 말투를 높이 평가하는데, 아마도 당시 성장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고지식한 격식을 벗어나는 '미래지향적' 어법으로 본 듯 하다. 사실상  근본이 '유럽인들'이었던 미국인들은 상류층이 득세하면서 '유럽'의 '귀족'적 격식을 갖추고자 했을 텐데, 이 가식적인 상류사회에 '미국식' 벼락부자 개츠비가 끼어들어 과거는 잊고 모두를 "형씨"라 부르며 반말을 까는 거다. 소설가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동년배 사이의 존대를 없애고 다 현대식 '반말까기'로 번역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미국식 '미래지향적' 반말까기였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호밀밭의 파수꾼], <22>, J.D.샐린저, 1951.


스콧 피츠제럴드의 '친구'였다는 제롬 데이빗 샐린저(J.D.Salinger)는 1951년에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라는 아주 정신없는 소설을 썼는데, 이 역시 20세기 미국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영문학'을 '전공'하던 스무살에 읽었다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이나 우리의 소설가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등에 못지않게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별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나아가 왜 '위대한' 미국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몇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거나 정신놓고 출근하다가 큰길에서 발목을 삐기나 할 뿐이다. 

1920년대에 성장하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줬던 [위대한 개츠비]를 정신나간 와중에도 높이 사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여러 상류층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학을 거듭하면서 뉴욕의 상류층 부모를 실망시키고 헛소리와 정신분열을 거듭하다가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어린 여동생 피비에 집착하는 그는 아마도 호밀밭에서 어린이들이 절벽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미래'가 아니라 단지 그의 '과거'일 뿐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화자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샐린저는 '매카시즘(광신적 반공주의)' 같은 1950년대 당시 미국의 신종 '전체주의'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그 시대풍조를 비틀기 위해 '성장이 멈춘' 청소년 홀든 콜필드를 화자로 내세웠는지 모르나 '괜히 읽었나' 싶다가 발목이나 삐어버린 중년 노동자인 나로서는, 좀더 어렸을 때 읽을걸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만 읽고 '영미소설'은 접을까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인 홀든 콜필드식으로 말한다면, "뭐 그렇다고 아주 나빴던 건 아니었다. 단지 난 괜히 읽었나 생각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뿐이고 그때문에 기분을 잡쳤는데, 그렇다고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나이가 백만살 정도만 더 젊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후세들은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기저귀를 벗자마자 바로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는 정도로만 해두자.


다시 미국 '양당제' 얘기로 돌아오면, 20세기의 이 거대한 '제국'은 '공화주의'적 '양당제'로 흥했으나 이 과두지배체제로 이제 몰락하고 있다 말하고 싶다. 99% 다수의 운동도, 인종차별에 대한 극렬한 투쟁도 이 '도둑' 같은 '양당제' 정치체제로 편입되면 체제전환을 기획할 수 없다. 다수의 역동성을 잠식하고 무력화하는 이 거대양당의 과두지배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이를 깨달았으면 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죽은 개츠비 곁에서 '친구' 닉 캐러웨이는 '과거'를 딛는 '미래'를 애써 그리지만,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는 더 이상 영광스럽던 '공화주의'적 '과거'의 그 모습이 아니다.

체제변혁의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서 희망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위대한' 개츠비와 그 친구들이 이미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지 않았는가.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9>, 스콧 피츠제럴드, 1925.


***

1.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2009.
2.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3.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4. [새가 되었네], 성석제, <강>, 1996
5.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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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밀밭의 파수꾼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47
J.D. 샐린저 지음, 공경희 옮김 / 민음사 / 200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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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츠비의 '미래'와 콜필드의 '과거'
- [위대한 개츠비], 피츠제럴드 / [호밀밭의 파수꾼], 샐린저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 [위대한 개츠비], <1>, 스콧 피츠제럴드, 1925.


미국 대선을 지켜보면서 거대 양당제의 과두지배적 정치체제가 사실, 한심했다. 일제로부터 해방 후 미군정에 의해 다시 지배당하고 거의 '미국인'에 가까운 초대 대통령은 한참 후세인 내가 보기에 웃기지도 않았는데 더 중요한 건 분단이 고착화되면서 우리 정치도 미국의 '양당체제'가 이식된 것이 나는 더 슬펐다. 공화당은 '보수', 민주당은 '진보'라는 식의 수사가 우리의 '양당제'에도 그대로 이식되기를 우리의 지배자들은 바랬겠지만, 적어도 '정의란 무엇인가?' 묻는 마이클 샌델 식의 '공화주의적' 자부심이란 게 미국의 '보수'에게는 있었겠지만, 그건 '왕정'을 겪어보지 못한 미국인들의 역사일 뿐, 우리나라 '보수'는 할 수만 있다면, 즉 자기들 기득권을 지키기 위해서는 '왕정'을 선택할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역사가 깊은 유럽의 '보수'들처럼 말이다. 
19세기 유럽의 과학적 사회주의자 엥겔스는 이미 미국식 양당 정치체제를 두고 "도둑놈들이 돌아가면서 자리를 바꿔먹는 정치체제"라 논평한 바 있다.
그런데 지금 미국의 대선을 통해 20세기를 지배했던 제국의 몰락을 본다. 이유는, 코로나도 경제위기도 아니다. 바로 빌어먹을 '양당제'다.

1920년대라면, 아마도 미연방공화국의 최대 전성기의 시작과도 같은 시기였을 텐데, 1차 세계대전 후 세력들이 재편되는 유럽을 제끼고 미국이 성장하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내 전공은 영문학이었으나 학창시절에 관련 공부는 커녕 관련 소설책도 제대로 읽어본 기억은 없다. 그래도 '20세기 영미소설' 하면, 아일랜드의 제임스 조이스, 미국의 스콧 피츠제럴드와 샐린저 등은 어깨 너머로 들어봤다. 그리고 마흔이 넘어서야 피츠제럴드와 샐린저를 읽었다. 사치스런 행각으로 유럽을 넘나들던 피츠제럴드는 유럽의 조이스와도 친분이 있었고, 미국의 샐린저와도 친했다고 한다.

1896년에 미국에서 태어나 1920년 첫 소설 [낙원의 이쪽]의 대성공으로 상류층의 딸 젤다와 결혼한 피츠제럴드는 호화파티와 유럽여행의 비용을 충당하기 위해 많은 소설을 썼다. 부인 젤다는 정신병을 앓았는데 그녀 또한 소설을 썼고 아마도 피츠제럴드는 그녀의 소설을 질투했을 수도 있고 파경을 겪으면서도 그는 [위대한 개츠비(The Great Gatsby)]라는 아주 얇은 '대작'을 남겼다. 그의 살아 생전에는 책의 '저렴한 가격'으로 인해 대성공까지는 못했다 하나, 1940년 알콜중독과 심장마비로 그가 사망한 후 [위대한 개츠비]는 '가장 위대한 미국소설'이 되었다고 한다.

미국 중서부 상류층인 닉 캐러웨이는 [위대한 개츠비]의 화자다. 그는 나서지는 않지만 주변 사람들의 곁을 지키는 성격인데, "판단을 유보하면, 희망도 영원하다" 말한다. 당시 성장 사업이었을 '드럭스토어(편의점/잡화점)'를 통해 부자가 된 1차대전 참전군인 '제임스 개츠'는 자신의 과거를 베일에 가린 채 이름을 '제이 개츠비'로 바꾸고 첫사랑이었던 상류층 딸 데이지의 인근에 화려한 대저택을 갖추고는 유명인사들을 꼬이는 호화 파티를 열면서 데이지를 기다린다. 개츠비의 이웃인 화자 닉은 데이지와의 친분이 있었으므로 개츠비의 '친구'가 된다. 샐린저는 [호밀밭의 파수꾼]의 화자 홀든 콜필드의 말을 빌어 말끝마다 "친구" 또는 "형씨"라 붙이는 개츠비식 말투를 높이 평가하는데, 아마도 당시 성장하는 미국의 입장에서 고지식한 격식을 벗어나는 '미래지향적' 어법으로 본 듯 하다. 사실상  근본이 '유럽인들'이었던 미국인들은 상류층이 득세하면서 '유럽'의 '귀족'적 격식을 갖추고자 했을 텐데, 이 가식적인 상류사회에 '미국식' 벼락부자 개츠비가 끼어들어 과거는 잊고 모두를 "형씨"라 부르며 반말을 까는 거다. 소설가 김영하는 [위대한 개츠비]를 번역하면서 동년배 사이의 존대를 없애고 다 현대식 '반말까기'로 번역했다고 한다. [위대한 개츠비]가 '위대한' 이유는 바로 이 미국식 '미래지향적' 반말까기였다. 


"[호밀밭을 걸어오는 누군가를 만난다면]... 나는 늘 넓은 호밀밭에서 꼬마들이 재미있게 놀고 있는 모습을 상상하곤 했어. 어린애들만 수천 명이 있을 뿐 주위에 어른이라고는 나밖에 없는거야. 그리고 난 아득한 절벽 옆에 서 있어. 내가 할 일은 아이들이 절벽으로 떨어질 것 같으면, 재빨리 붙잡아주는 거야...
말하자면, '호밀밭의 파수꾼'이 되고 싶다고나 할까..."
- [호밀밭의 파수꾼], <22>, J.D.샐린저, 1951.


스콧 피츠제럴드의 '친구'였다는 제롬 데이빗 샐린저(J.D.Salinger)는 1951년에 [호밀밭의 파수꾼(The Catcher in the Rye)]이라는 아주 정신없는 소설을 썼는데, 이 역시 20세기 미국소설에서 빼놓을 수 없다. 사실, '영문학'을 '전공'하던 스무살에 읽었다면 가르시아 마르케스의 [백년 동안의 고독](1967)이나 우리의 소설가 성석제의 [새가 되었네](1996),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2002) 등에 못지않게 재미있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마흔이 넘어서는 별로 읽을 것을 권하고 싶지는 않다. 나아가 왜 '위대한' 미국소설인지 당최 이해할 수도 없다. 다만, 몇 구절에서 나도 모르게 피식거리거나 정신놓고 출근하다가 큰길에서 발목을 삐기나 할 뿐이다. 

1920년대에 성장하는 미국의 '미래'를 보여줬던 [위대한 개츠비]를 정신나간 와중에도 높이 사는 [호밀밭의 파수꾼] 홀든 콜필드는 여러 상류층 고등학교에 적응하지 못한 채 퇴학을 거듭하면서 뉴욕의 상류층 부모를 실망시키고 헛소리와 정신분열을 거듭하다가 결국 정신병원 신세를 진다. 어린 여동생 피비에 집착하는 그는 아마도 호밀밭에서 어린이들이 절벽에 빠지지 않게 지켜주는 '파수꾼'이 되고 싶다 생각했지만, 그건 그의 '미래'가 아니라 단지 그의 '과거'일 뿐이다. 실제로 소설 내내 화자는 '어린 시절'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아마도 샐린저는 '매카시즘(광신적 반공주의)' 같은 1950년대 당시 미국의 신종 '전체주의'로부터 일탈을 꿈꾸며 그 시대풍조를 비틀기 위해 '성장이 멈춘' 청소년 홀든 콜필드를 화자로 내세웠는지 모르나 '괜히 읽었나' 싶다가 발목이나 삐어버린 중년 노동자인 나로서는, 좀더 어렸을 때 읽을걸 하는 생각을 내내 했다. 그래서 제임스 조이스의 [율리시스]까지만 읽고 '영미소설'은 접을까 한다.

[호밀밭의 파수꾼]인 홀든 콜필드식으로 말한다면, "뭐 그렇다고 아주 나빴던 건 아니었다. 단지 난 괜히 읽었나 생각을 하다가 발목을 삐었을 뿐이고 그때문에 기분을 잡쳤는데, 그렇다고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읽을 필요가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냥 내 나이가 백만살 정도만 더 젊었다면 훨씬 재미있었을 수도 있다는 말이다. 후세들은 이 '위대한' 미국소설을 기저귀를 벗자마자 바로 읽어보라 권하고 싶다"는 정도로만 해두자.


다시 미국 '양당제' 얘기로 돌아오면, 20세기의 이 거대한 '제국'은 '공화주의'적 '양당제'로 흥했으나 이 과두지배체제로 이제 몰락하고 있다 말하고 싶다. 99% 다수의 운동도, 인종차별에 대한 극렬한 투쟁도 이 '도둑' 같은 '양당제' 정치체제로 편입되면 체제전환을 기획할 수 없다. 다수의 역동성을 잠식하고 무력화하는 이 거대양당의 과두지배체제는 더 이상 지속가능하지 않다. 우리 사회도 이를 깨달았으면 한다.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죽은 개츠비 곁에서 '친구' 닉 캐러웨이는 '과거'를 딛는 '미래'를 애써 그리지만, 미국이라는 '거대제국'의 '미래'는 더 이상 영광스럽던 '공화주의'적 '과거'의 그 모습이 아니다.

체제변혁의 판단을 '유보'한다고 해서 희망이 '영원'하지는 않다는 것을 '위대한' 개츠비와 그 친구들이 이미 역설적으로 보여주었지 않았는가.


"그곳에 앉아 그 옛날 미지의 세계에 대해 골똘히 생각하다가 문득 개츠비가 데이지네 집의 잔교 끝에서 빛나는 초록색 불빛을 처음 찾아냈을 때의 놀라움에 생각이 이르렀다. 바로 이 파란 잔디밭까지 오기까지 그는 참으로 먼 길을 돌아왔다. 이제 그의 꿈은 손만 뻗으면 닿을 곳에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의 꿈이 어느새 자기 등 뒤에, 저 뉴욕 너머의 혜량할 수조차 없는 불확실성 너머, 밤하늘 아래 끝없이 펼쳐진 미국의 어두운 들판 위에 남겨져 있었다는 것을... 그러므로 우리는 물결을 거스르는 배처럼, 쉴새없이 과거 속으로 밀려나면서도 끝내 앞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 [위대한 개츠비], <9>, 스콧 피츠제럴드, 1925.


***

1. [위대한 개츠비](1925), 스콧 피츠제럴드, 김영하 옮김, <문학동네>, 2009.
2. [호밀밭의 파수꾼](1951), J.D.샐린저, 공경희 옮김, <민음사>, 2001.
3. [백년 동안의 고독](1967), 가르시아 마르케스, 안정효 옮김, <문학사상사>, 1999.
4. [새가 되었네], 성석제, <강>, 1996
5. [황만근은 이렇게 말했다], 성석제, <창작과비평사>, 2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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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식의 기원 - 옛 인류는 신의 음성을 들을 수 있었다
줄리언 제인스 지음, 김득룡.박주용 옮김 / 연암서가 / 2017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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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의 음성'을 들었던 흔적을 찾아서
-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의식은 문화적으로 학습된 사건이고 초기 심리상태('양원적 정신')의 억압된 흔적이다."
- [의식의 기원], 줄리언 제인스, 1976.


'의식(Consciousness)'은 주체가 객체를 인식하는 행위로서 인간의 주관적 정신의 영역이다. '의식'의 기원을 추적한다는 것은 얼핏 인간의 '주관'이 우선한다는 '관념론'과 '정신'이나 '의식' 조차도 뇌라는 '물질'이 생산한 "최고의 산물(레닌)"이라는 극단적 '유물론' 간의 철학적 투쟁을 예고하는 듯 하기도 하다. 
그러나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Julian Jaynes)는 '철학'적 고찰 대신 '역사'적이고 '고고학'적이며 '문화'적 접근방식으로 '의식'의 기원을 파헤친다.


"본래 의식의 본성 탐구는 장황한 철학적 해답들로 가득차 있는 심신관계의 문제로 알려졌다. 그러나 진화론이 등장한 이래, 이 문제는 더욱 과학적인 문제가 되어 버렸다. 정신의 기원 문제, 좀더 세부적으로 말하면 '진화 상에서의 의식의 기원'이라는 게 문제가 된 것이다."
- [의식의 기원], <서론 - 의식의 문제>, 줄리언 제인스, 1976.


'의식'이라는 철학적 주제는 오랜 동안 신화적이고 종교적이며 신비의 영역에 있었다. 근대에 들어 과학이 발전하고 특히 '진화론'의 영향으로 인해 '의식'이 인간의 생물학적인 요소라는 견해가 우세해 지기도 했다. 그러나 줄리언 제인스는 "뇌 지식만으로는 그 뇌가 우리와 같은 '의식'이 있는지 결코 알 수 없다"(같은책, 서론)며 우리의 '의식'이 무엇인지의 개념부터 서술하면서 새롭게 시작하고 있다.
그리하여 [의식의 기원]의 독해에서 가장 주요 개념은 '양원적 정신(Bicameral mind)'과 '내성(Introspect)'다. 

[의식의 기원]의 원제는 '양원적 정신의 붕괴과정에서 의식의 기원(The Origin of Consciousness in the Breakdown of the Bicameral Mind)'이다.


"... '의식의 기원' 문제... 의식이 (은유적) 언어에 근거를 둔 것이라면, 그 말은 곧 의식은 이제까지 주장되어 온 것보다 훨씬 더 최근에야 모습을 나타낸 것이라는..."
- [의식의 기원], <1권 인간의 정신 - 2장 의식>, 줄리언 제인스.


'양원적 정신'은 인간의 정신 또는 마음이 '신'의 영역인 '집행부'와 '인간'의 영역인 '실행부'로 나뉘어진 시기의 개념이다(같은책, 1권-4장). 즉, 인류가 '신'으로부터 매개 없이 직접 지시를 받고 고민 없이 실행하던 기원전 2000년 전 이야기다. 이 시기를 지나면 인간은 '사제'나 '영매', '무당' 등의 매개자를 통해 신을 접하게 되는데, 이 때는 이미 주관적 '정신'이 생기고 이것이 은유적 언어를 통해 표현되고 소통되면서 비로소 '의식'이 등장한다는 것이다.
쉽게 이해하면, 고대의 인류는 '어린 아이'와 같아서 의사결정의 스트레스를 신의 지시로 직접 들었는데, 인류가 성장하면서 '어른'처럼 '자기 주관'이 생긴다는 것이다. '신'에 직접 의지하는 '양원적 정신'이 붕괴하면서 그 자리를 '스스로 자기성찰'하는 '내성(Introspect)'을 특성으로 하는 '의식'이 생겨났다는 말이다. 
줄리언 제인스가 말하는 '의식'은 넓은 의미의 인간 정신, 관념이 아니라 '내성'하는 언어적 정신의 좁은 의미이다.

고대 그리스 '트로이 전쟁' 이야기인 호메로스의 [일리아드]는 "의식은 은유적 언어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줄리언 제인스의 가설을 평가하기에 충분할 정도로 확실하게 번역할 수 있는 "최초의 언어기록(1권-3장)"이다. 아킬레우스와 아가멤논, 헥토르 등을 비롯한 등장인물들에게는 개념도, 자유의지도 없다. 그저 '신'들이 '의식'의 자리를 대신한다. 이 고대 미케네인들의 정신구조 자체가 '양원적 정신'이다. 그들에게 '신'은 '유일신'도 아니고 천상에 있지도 않다. 모든 만물에 깃든 '신'들이 '의식' 대신 차지하고 있다. 미케네인들은 '신'들이 조종하는 꼭두각시들이었다. 물론, '어린 아이' 같았던 고대인들이 만든 '신'들이었지만, 그들에게 철저히 지배당하면서 의사결정의 스트레스를 견뎠다.
인간 개인으로 봐도 3~7세에는 '상상의 친구'와 논다. 8~10세에는 '최면' 감수성이 절정, 즉 최면에 잘 걸린다고 하는데, '정신분열'과 함께 '양원적 정신'의 현대적 흔적인 '최면'은 '신'과 '나'를 매개하는 단계와 같다고 한다. '양원적 정신', '상상의 친구' 따위는 '어린 시절'의 이야기다.


"양원적 정신은 사회적 통제양식으로, 이는 인류에게 소규모 수렵-채취 집단에서부터 대단위 농경공동체로 이행하게 한 사회통제 양식인 것이다. (자체 내에) 자신을 통제하는 신을 갖고 있던 양원정신은 진화하여 최종단계의 언어 진화에 이른다. 그리고 문명의 기원은 바로 이 (언어의) 발달에서 비롯된다."
- [의식의 기원], <1권 - 6장 문명의 기원>, 줄리언 제인스.


'양원적 정신' 구조를 갖고 있던 고대 인류는 주로 '신의 목소리'를 '청각'적으로 들었다. [일리아드]에서 번역하기 모호한 '투모스'는 '신'이 불어 넣어주는 '충동질', '용기' 등을 의미한다는데, 신체적으로는 아드레날린 같은 호르몬을 조절하는 간이나 부신 등으로 볼 수 있다. 그 다음 많이 나온다는 '프레네스'는 '호흡'이자 복수형으로서 허파, '크라디'는 심장, '에토르'는 위장, '누스'는 지각, '사이키'는 생명 등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이처럼 '양원적' 고대인에게 '신'은 신체기관과 직접 연결되어 지시를 내리고 인간은 청각으로 전달받은 지시를 그대로 이행한다. 그냥 '어린이' 자체다.

기원전 2000년경이 되면 인류는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 등으로 나타나듯 사회조직을 '문자'로 표현하고 유지한다. 어찌보면 '정신분열' 환자 같던 '양원적' 고대인들은 그냥 '미친놈들'이 아니었다. 거대한 사회조직의 '집단적 규범'에 따라 움직였다는 것이다. 이제 문자와 같은 '문명'은 그 자체로 인간 개인의 '의식'을 발생시켰고, 거대한 사회를 조직하는 '사회통제' 기제로서 인간은 한단계 성장하여 '내성'을 하게 된다. 
청각적인 '양원적 정신'이 붕괴된 자리에 문자를 시각적으로 보는 '의식'이 들어선다.

줄리언 제인스가 주요 근거로 삼지는 않으나 우리의 뇌구조와 비교하면 '양원적 정신'의 이해가 더 쉽다. 우리 뇌의 좌반구는 언어와 말, 우반구는 종합적 사고와 노래 등의 감성적 영역일 텐데 '의식'이 우세한 현재 인류는 좌반구가 우세하나, '신의 음성'을 직접 들었던 고대인들에게는 우반구도 활발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반구는 '신'의 영역, 좌반구는 '인간'의 영역. 이 '2중 뇌(1권-5장)'는 '양원적 정신'의 흔적이다.


"진정한 양원 시대에서는 그 어떤 '신'도 인간의 입술을 통해 말하지 않았다. 그러나 기원전 400년에 이르렀을 때 요즈음 우리 주위에 많은 교회가 있듯이, 신들림은 그리스 전역에 흩어져 있는 신탁들과 개개인에게 빈번히 나타났다. 양원적 정신은 사라지고 신들림이 그 흔적으로 남았던 것이다... 양원적 정신에서는 환상이 우반구에서 만들어져 그것에서 들리고, 신들린 상태에서 하는 말은 정상적인 경우에서처럼 좌반구에서 생성되지만 우반구에 의해 조종된다... 우반구의 베르니케 영역에 대응하는 영역이 좌반구의 브로카 영역을 사용한다는 것이다."
- [의식의 기원], <3권 - 2장>, 줄리언 제인스.


1권 '인간의 정신'에서 '의식'의 개념을 정의하고, 2권 '역사의 증언'에서 그리스와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와 '카비루(히브루)'의 구약 등을 통해 역사적 사례를 소개한 후, 저자는 3권 '현대세계에서의 양원정신의 흔적'으로 시와 음악, 최면과 정신분열 등의 흔적들을 일별하는데 3권은 불필요한 장광설에 불과한 듯 하나 마지막 '과학'에 관한 장은 이 책의 결론에 해당한다.

'양원적 정신'의 붕괴에 대한 직접적 결과로서 '과학 혁명'은 그 자체로 '사실'에 기반한다 해도 근본적으로는 '신의 의지'를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과학'도 '종교'도 모두 '종교적'이라는 것이다(3권-6장).
미국의 신화학자 조지프 캠벨이 종교는 그 시대의 '과학'이었으므로 '종교'와 '과학'의 대립은 "예전의 과학과 지금의 과학이 대립"하는 것이라 규정했듯,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양자 모두 '종교'라 규정한다. 
결국, 성장한 현대 인류의 '의식'은 이러한 '종교적' 행위로써 아서왕과 기사들이 성배를 찾듯 '우주의 안정성'과 '총체성', '잃어버린 신의 음성'을 끊임없이 찾는다고 한다. 
고대에 '신의 목소리'를 직접 들었던 인류는 이제 현대에 이르면서 '의식'을 통해 '과학'적으로 '신의 음성'을 끊임없이 갈구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적대적인 것은 교회와 과학이지 종교와 과학이 아니다. 종교와 과학은 서로 경쟁관계에 있지 상반되는 관계가 아니다. 둘 다 '종교적'이다... 진정한 문제는 우리가 잃어버린 권한위임을 '신의 목소리'를 들었던 고대 예언자에서부터 지속되어 온 사제들을 통해서 발견할 수 있는지, 아니면 사제의 매개 없이 객관적 세계에서 우리의 현재 경험을 통해 '천국'을 찾을 수 있는지였다."
- [의식의 기원], <3권 - 6장 과학이라는 복신술>, 줄리언 제인스.


***

-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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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메스의 기둥 1
송대방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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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이냐?"
- [헤르메스의 기둥 1~2], 송대방, <문학동네>, 1996.


"이 작품은 일명 [긴 목의 마돈나(성모)]라고 불리는데, 그 까닭은 이 화가가 성모를 자기 나름대로 우아하고 고상하게 표현하려고 애쓴 나머지 성모의 목을 마치 백조의 목처럼 길쭉하게 그렸기 때문이다... 파르미자니노는 자기가 이처럼 비정상적으로 길게 늘인 형태를 좋아한다는 것을 열심히 보여주려고 했다. 이런 효과를 보다 강조하기 위해서 그는 이 그림의 배경에 인체와 마찬가지로 이상한 비례를 가진 괴상한 모양의 높은 원주를 세워놓았다... 이 화가는 전통적인 수법을 피하고 싶어했다. 그는 완벽한 조화에 관한 고전적인 해결 방식만이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여주려고 했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18. 미술의 위기>, 1950.


1995년 10월에 처음 써 본 단편소설 습작을 학보사에 버리듯 응모하고 군에 입대했다. 창피함에 아무에게도 말은 안 했는데, 결과는 궁금했기에 복학생 선배 한 명에게는 확인해 달라 살짝 부탁을 했다. 휴가 때 그 형한테 들은 얘기로는 "입대를 앞둔 한 젊은이의 넋두리"라는 한 줄 평이었다는데 부러 확인하지는 않았다. 
본부대 근무로 부대 밖에서 책을 들여와서 읽을 수 있었다. 1996년에 읽은 소설 중 하나가 [헤르메스의 기둥]이었다.
기갑여단 '민사심리처'에서 예하부대에 신문을 돌리던 나는 아마도 부대내 민간 일간지의 '신간 안내'를 통해 그 책을 알게 되었을 것이고, 내가 좋아했던 그리스 신화 속 '헤르메스(머큐리)' 이름을 보고 구입했을 거다.

스물세살의 '소설가 지망생'이 군대에서 읽은 스물일곱살 미술사 전공생의 미스테리 소설은 놀라웠다. 집에 있는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 원서는 먼지만 쌓여 있었고 '추리소설'은 중학교 때 이후로 읽어본 기억이 없었다. 한참 후인 2003년에 세계적으로 인기를 끈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보다 앞선 우리 작가의 '미스테리 걸작'이었다. 
[헤르메스의 기둥]에서는 하나의 소재로부터 수백년 전의 문예와 역사, 그리고 철학 등 인문학의 향연이 꼬리를 물고 펼쳐졌다. 

제대 후 3일만에 단편소설 습작을 한 편 쓴 것도, 다음달에 또 하나를 쓸 수 있었던 것도 아마 송대방 작가의 [헤르메스의 기둥] 덕이리라. 20대 특유의 조절되지 않는 감성적 문장과 아는 거 다 끌어다가 인용하고 적용하려는 지적인 의욕이 20대의 내 습작들에서도 난무했다. 내 단편들의 모티브는 단연 1996년에 만난 송대방의 소설, [헤르메스의 기둥]이었다.


"파르미자니노, [긴 목의 성모], 1535년경 작, 우피치 미술관 소장.
파르미자니노의 대표작이며 매너리즘 미술의 대표작. 기다랗게 기둥처럼 그려진 성모의 옷은 젖은 옷의 드레이퍼리(drapery) 양식으로 처리되어 있으며 그 위에는 아기 예수가 누워 있다. 왼쪽에는 목동들이 있으며 한 명은 암포라(고대 그리스/로마 시대의 몸통이 불룩나온 항아리)를 들고 있다. 성모의 오른쪽으로는 작은 예언자와 기둥이 있으며 그 의미는 아직 밝혀지지 않고 있다. 기둥은 곰브리치에 의하면 길게 늘여진 신체의 미를 좋아했던 파르미자니노의 미학을 상징하는 것 같다. 이처럼 뱀 모양의 S자 곡선으로 길게 늘여진 양식을 '스틸레 세르펜티나타(Style Serpentinata)', 곧 '뱀의 양식'이라고 부른다. 파르미자니노는 16세기 초반 이탈리아의 북부 파르마에서 활동했던 작가다. 그는 이외에도 [자화상]이라는 독특한 그림을 남겼다."
- 송대방, [헤르메스의 기둥 1], <1장>, 1996.


아마도 르네상스 미술을 전공하기 위해 유학을 간 작가의 논문 주제는 16세기 이탈리아 매너리즘(마니에리스모) 화가 파르미자니노(Parmigianino:1503~1540)였을 것이며, 본격적인 '픽션'이 시작되기 전 대부분의 배경 이야기는 '자전적' 내용일 것이다. 나의 단편 습작들도 그랬고 대부분의 소설가들 초기작은 '자전적 소설'에서 출발한다. 주인공 외 다른 인물들은 주변 사람들의 형식에 나 자신의 분열된 의식을 나누어 인격화된 내용으로 등장하기도 한다.
르네상스의 엄격한 규범을 비틀어 기이한 형태로 표현했던 '매너리즘' 화가 파르미자니노의 대표작은 [긴 목의 성모]다. '이교도'적인 르네상스의 영향을 받았으나 더욱 신비주의적으로 빠진 파르미자니노는 37세에 요절했는데 죽기 전에는 연금술에 빠졌고 [긴 목의 성모]는 죽기 전 6년 동안 그렸으나 완성하지 못한 채 우측 기둥의 기단에 서명을 남겼다고 한다.
움베르토 에코가 [푸코의 진자](1988)라는 소설에서 던진 메시지는 "세상에 중심은 없다"였다. 즉, 거대한 만물의 진자를 지탱하는 거대한 하나의 축이라는 건 없다는 것. '일자'나 '유일신'이 아닌 '다원성'의 세계를 부각하는 '포스트 모더니즘' 작가였다. 송대방의 모티브는 분명 움베르토 에코였다. '일자(일원성)'가 아닌 '다자(다원성)', 획일적인 규범이 아닌 구체적인 다양성, '일탈'이 아닌 하나의 양식으로서의 매너리즘과 이를 은유하는 파르미자니노의 [긴 목의 성모].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이 모든 것의 미학적 출발이 되는 그림이다.

그리스 신화 속 '전령의 신' 헤르메스(머큐리)가 그렇다. 고대 그리스의 신들 자체가 인간의 다른 모습이었으므로 기독교식 유일신 같은 전지전능함이 아니라 좌충우돌 모순 덩어리였는데, 그래도 하나의 신은 하나의 표상이 있었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비너스)처럼. 그러나 헤르메스는 사기꾼, 장사꾼, 도박꾼, 이야기꾼, 운동선수 등을 대표하는 신으로 가장 예측불허한 신이다. 이 헤르메스(Hermes)는 아프로디테(Aprodite)와 교합해서도 특이한 자식을 낳게 하는데, 남성과 여성을 한 몸에 지닌 '자웅동체(雌雄同體)' 헤르마프로다이트(Herma-prodite)'다. 내 전공이 영문학이라 그리스 신화는 관심이 조금 있었음에도 송대방의 [헤르메스의 기둥]을 통해 기억하게 되는 르네상스 인문학 지식이 수없이 많았다. 그리고 이후 글쓰기의 소재로 활용하는 법을 배웠다.

아무튼, 서양미술사 시간에 접한 파르미자니노의 그림에 관심을 갖고 비록 성적은 'B+'였지만 전공논문의 주제로 채택했을 작가 송대방은 관련 자료와 지식을 총망라하여 흥미진진한 내용을 전개해 간다. 오래 전 읽은 소설이라 세부 내용은 잊혀졌으되, 목이 길어 슬퍼보이던 성모 마리아의 좌측 기둥이 지닌 메타포는 남는다. 성모의 옷자락을 기준으로 위로는 하나의 기둥이나 아래로는 여러 개의 기둥들의 형태로 기존 르네상스식 규범을 깬 성 모자(聖母子)에게 기이하게 작은 예언자 히에로니무스(제롬)가 말하는 듯 하다. "하나는 없으며 전체가 하나다"라고. 물론, 이 사상을 대변하는 '이교도'적 신은 말할 것도 없이 '헤르메스' 밖에 없다.


"그리스 태생의 이탈리아계 미술가 조르조 데 키리코(Giorgio de Chirico : 1888~1978)는 예기치 못한 것이나 완전히 수수께끼 같은 것과 마주쳤을 때 우리에게 엄습해 오는 낯선 느낌을 포착하고자 했다."
- 에른스트 곰브리치, [서양미술사], <27. 실험적 미술>, 1950.


작가 송대방은 이 소설 발표 후 나의 기대와는 달리 '종적을 감추었다'. 난 사실 그의 지적인 여행이 계속되기를 기대했고 제대 후 단편소설 몇 편을 끄적일 때도, 졸업 후 '소설가'의 꿈을 접은 후에도 가끔 그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역시 파르미자니노의 '이단'적 매너리즘과 조르조 데 키리코의 '신비'적 초현실주의에 주목했던 그의 소식을 더 찾을 수는 없었다. 


현대 초현실주의 화풍을 선구했던 조르조 데 키리코는 20대에 [거리의 신비와 우울](1914) 같은 그림으로 당대의 주목을 받았다. 1차 대전의 먹구름이 다가올 때의 불안과 우울 등을 그려냈다는 평을 들었으나 그 진위는 작가 본인이 아니고서는 알 수 없다. 이후 후기에는 그런 화풍을 접음으로써 "초현실주의의 배신자"로 낙인찍히기도 했다지만, 그의 20대 초기의 작품들은 이후 살바도르 달리, 르네 마그리트 등의 '초현실주의' 화가들에게 크게 영향을 주었다. 작가 송대방은 [헤르메스의 기둥] 초반에 조르조 데 키리코의 초반 작품 중 [위대한 형이상학자](1916)를 인용한다. 즉, 그의 이야기가 상당한 '형이상학'적 사고에 기반한다는 것을 암시라도 한다는 듯이. 역시나 [헤르메스의 기둥]을 읽고 난 사람들의 후기는 둘로 나뉜다. 하나는 '형이상학'적이고 사변적이며 지적 유희에 기반한 무슨 내용인지 모르겠다는 것과 다른 하나는 나처럼 '글쓰기'에 무한한 모티브를 제공했던 매우 흥미로운 그것으로 말일테다. 

20세기 초, '초현실주의'자들은 '다다이즘'의 무의식적 '자동기술' 기법에 이어 '콜라주(붙이기)'와 '데페이즈망(추방하기)' 기법 등으로 새로운 작법을 선보이는데, 사물을 현실의 익숙한 장면에서 분리시켜 생뚱맞은 다른 사물과 결합하는 양식이다. 시쳇말로 "니가 왜 거기서 나와?"다. 꿈에서 본 것일 수도, 무의식의 흐름에 따른 표현일 수도 있는데, 현실을 넘어서는 표현으로 '초현실주의'의 특징이다.
1924년에 정립되지 않은 '다다'를 넘어선 하나의 새로운 문예이론으로 '초현실주의'를 선언한 프랑스 시인 앙드레 브르통은 조르조 데 키리코가 '초현실주의'에 미친 결정적인 영향을 다음과 같이 언급한다.


"키리코의 작품에서는 모든 것이 숨을 죽이고 어떤 황홀한 순간을 기다리는 듯 하다. 엇갈린 원근법, 길게 늘어진 그림자, 정체불명의 광원이 만들어내는 신비스러운 분위기. '초현실주의자'들은 거기서 수수께끼 같은 '경이'를 보았다."
- 진중권,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8. 초현실주의>.


'초현실주의' 기법 중 '오브제'는 전통적 조형물의 '초현실주의'적 대체물인데, 조르조 데 키리코는 '폐허'와 얼굴없는 '마네킹'을 통해 전통적인 조형을 대체한다. 그의 작품 [위대한 형이상학자]는 이 무면 마네킹과 폐허를 이루는 사물들의 결합체로 인문학적 유희의 '초현실성'을 표현하는 듯 하다.

1995년 10월 입대 전 응모했던 학보사 당선작은 흡혈귀가 나오는 SF식 소설이었다는 말을 건너건너 전해 들었다. 나는 사실 '지적 유희'를 동반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지향한다고 했지만, 마지막 단편소설에서는 '무의식'과 '살인사건', 현실과 초현실의 경계를 4차원에서 넘나들었다. 내 마지막 소설의 모티브는 시인 임화의 '4차원'인 '제4의 점령(占領)'이었다.


인간이 표현하려는 그 어떤 '초현실'도 '현실'에 근거한다는 생각을 한다. 이제 나는 문학과 예술에 어떠한 '이론'이나 '주의'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지적 유희'든 흰소리든 일상을 비틀고 경계를 넘어 다니며 한 바탕 놀면 그만이다. 어차피, 그 어떤 글이 나오든 그 배경은 견고한 지금의 정치경제 현실체제일 테니.

사반세기가 지난 지금은 사라졌으나 "하나이면서 동시에 전체인 것은 무엇이냐?" 묻던 뛰어난 작가 송대방이 다시금 소설을 쓴다면 과연 어떤 내용과 형식일지 문득 궁금하다.


***

1. [헤르메스의 기둥 1~2], 송대방, <문학동네>, 1996.
2. [서양미술사](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13.
3.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모더니즘], 진중권, <휴머니스트>,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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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을 보는 기술 -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
아키타 마사코 지음, 이연식 옮김 / 까치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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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 보면' 보이는 명화의 '질서'
- [그림을 보는 기술](2019),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2020.


"현대 미술의 대다수는 이렇게 상식을 파괴함으로써 태어났지만, 기존 규칙 자체를 알지 못하면, 무엇을 부수었는지 알 수 없게 됩니다."
- 아키타 마사코, [그림을 보는 기술], <3. 균형을 보는 기술>, 2019.


피카소는 한 방향 시선에서 다양한 각도를 그려낸 '후기 인상주의' 선구자이자 미학자 진중권의 표현대로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진중권의 서양미술사])인 폴 세잔의 영향을 받은 '입체파'로 분류된다. 2차원 평면에 3차원을 담고자 했기에 그의 그림은 기괴하다. 그러나 피카소도 '정상적인' 그림을 그릴 줄 알았다. 미술가의 '파괴'와 '혁신'은, '무엇'을 파괴하고 혁신하는지 알아야 가능하다.


미국에서 메소포타미아 미술을 공부한 일본의 미술사 연구자 아키타 마사코는 '명화의 구조를 읽는 법'으로써 [그림을 보는 기술]을 정리한다. 그는 영국 탐정 셜록 홈즈가 친구 왓슨에게 한 말, "자네는 보고는 있지만, 관찰하고 있지는 않다네."([보헤미아 왕국의 스캔들], 코난 도일)라는 문장으로 <서문>을 시작하는데, 명화를 감상하는 우리가 '탐정'이 되어 그림의 구조를 읽어보자고 제안한다. 유홍준 선생의 '미술사'나 역사기행처럼 "알고 보면 보인다". 
우리는 '파괴'나 '혁신' 이전에 먼저 '탐정'처럼 관찰하고 알아야 한다.


[그림을 보는 기술]을 요약하면,
1) 그림의 '초점', 즉 주인공을 찾는다.
2) 보는 이의 시선이 '초점'을 중심으로 따라가는 '경로(leading line)'를 나타낸다.
3) 그림의 척추에 해당하는 '구조선'을 찾아 '균형'을 본다(linear scheme).
4) 색상, 채도, 명도, 명암과 배색 등의 '색'을 본다.
5) '구도'를 통해서 그림의 의미를 알고 '비례' 결정의 기준을 본다.
6) 위와 같이 '초점'-'경로'-'균형'-'색'-'구도/비례'를 통해 본 그림의 '구조'를 바탕으로 그림의 '표면'적인 특징인 '통일감'을 본다.


초보자인 우리가 그림을 볼 때 일단 위의 순서로 아래와 같이 접근해 보자. 
1) 중심이든 구석이든 주인공(초점)을 찾고,
2) 그 주인공을 강조하는 시선의 흐름을 따라가 보는데 '회전형'일 수도, '지그재그'일 수도, '방사형'일 수도, 복합적일 수도 있다.
3) 가로든 세로든 가상의 '구조선'을 그어 그림의 균형을 잡는데, 이 '선'들의 관계를 '리니어 스킴(linear scheme)'이라 한다.
4) 색의 종류인 '색상', 색의 선명함인 '채도', 밝기인 '명도'와 전체 '명암'의 관계를 본다.
5) '구조선'들의 복합관계로서 '십자선'과 '대각선' 등 구도의 '마스터 패턴(master patern)'을 읽는다.
6) 위 '구조'를 바탕으로 그림의 전체적인 '표면'적 '통일감'을 관상한다.


이 '그림을 보는 기술'을 토대로 진품 명화를 찾는 국립중앙박물관의 '탐정'이 되어 몇 개의 그림을 읽어보자.


1. [비너스의 탄생], 산드로 보티첼리, 15세기.

그리스 신들의 반란으로 제우스의 아버지 크로노스가 자신의 아버지 우라노스의 성기를 잘라 내다버린 먼 바다의 거품에서 태어난 미의 여신 비너스(아프로디테)가 조개를 타고 육지로 올라오는 유명한 장면이다. 제우스와의 사이에 큐피드를 낳고 헤르메스와 관계하여 자웅동체인 헤르마프로디테를 낳고 전쟁의 신 마르스와 동침하여 공포의 신 포보스, 술의 신 바커스와도 바람 피우고 나서 남편인 헤파이스토스에게로 돌아간 미의 여신이다.
조개를 탄 비너스는 그림의 주인공으로서 '초점'이자 그 자체로 화면을 반으로 가르는 '구조선'이며, 좌측 서풍의 신 제피로스와 우측 계절의 신 호라이의 몸짓을 통해 '회전형 경로'를 그린다. 세로로 삼등분된 '삼분할 구도'로 전체 균형을 맞추면서 '직사각형 속 정사각형'을 구분하는 '래버트먼트(rabatment)' 선을 중심으로 대각선을 그어보면 그 교차되는 안정된 구역에 주인공(초점)이 안착되어 전체적인 안정감을 준다. 마지막으로 좌우 등장인물들은 '황금비율'과 '프랙탈(같은 모양의 반복)'로 수렴된다.


2. [성 가족],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 16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 산치오 등과 같이 16세기 르네상스 전성기(친퀘첸토)를 대표하는 미켈란젤로는 회화와 조각, 건축 등에서 거대한 스케일로 유명하다. 시스티나 예배당의 대작 [최후의 심판]을 거의 혼자 완성했을 정도로 무리했으나 90세까지 장수를 누렸다. 피렌체의 거상 도니 가문은 20대에 이미 [피에타] 상과 [다비드] 상을 만들어 명성을 떨치던 미켈란젤로에게 젊은 부부에게 아이가 생긴 것을 축하하기 위해 '톤도(원형 그림)' 형식의 그림을 의뢰했고, 미켈란젤로는 마리아와 아기 예수, 그리고 요셉이 등장하는 [성 가족]을 완성했다. 그림의 가로선 너머의 '이교도'적인 그리스식 청년들을 배경으로 이 가로선을 넘으면 '기독교' 세계로 진입한다. 그 경계에 앉은 아이는 세례 요한이다. 동정녀 마리아는 중앙에서 르네상스식 육체를 자랑하며 아기 예수를 어색하게 받고 있는데, 예수의 양아버지 요셉은 지나치게 늙었다. 이후 '성 가족' 작품에서도 그는 갈수록 늙어가는데, 마리아와 잠자리도 들기 전 '수태고지'라는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듣고 '신'의 명령으로 파혼도 못한 채 예수를 키워야 했던 그는 마리아의 '처녀성'을 지키기 위해 명화 속에서 '늙은이'가 될 수 밖에 없었다고 한다.

이 작품은 그냥 '마스터 패턴'으로서 '십자선'과 '대각선'만 그려 넣으면 주인공(초점) '성 가족'이 균형있게 배치된다. 거기에 가로세로 '삼등분' 선들을 그으면 마리아가 쏙 들어간다. '이교도' 청년들은 원근법과 좌우 대칭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다.


3. [파리스의 심판] 연작, 파올로 루벤스, 17세기.

트로이 전쟁의 영웅, 아킬레스의 부모 결혼식에 초대받지 못한 불화의 여신 에리스가 식장에 던진 황금사과에는 '가장 아름다운 여신에게'라는 꼬리표가 달렸고, 서로 예쁜 척 하는 세 여신인 헤라, 비너스, 아테나가 서로 사과를 차지하려다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에게 심판을 맡겼다. 비너스는 스파르타 왕비 헬레네를 강탈할 수 있게 하겠다는 약조로 사과를 차지했고 결국 트로이 전쟁으로 치달은 이야기의 발단인 '파리스의 심판'을 바로크 거장 파올로 루벤스는 연작으로 몇 편 그렸다. 
그 중 두 편의 그림의 주인공은 비너스일 수도, 파리스(또는 사과)일 수도 있다. 이 두 '초점'을 중심으로 큐피드는 회전하며 어머니 비너스를 따라 흐르고, 파리스(사과)는 양치기 친구와 큰 나무를 배경으로 좌우 균형을 잡는다. 이 두 '초점'은 역시 '래버트먼트' 패턴에 따라 직사각형의 대각선과 정사각형의 대각선의 교차점에서 중심이 안착되는데, 한편은 파리스가 들고 있는 황금사과가 있고 한편에는 비너스가 손으로 가린 성기가 있다. 전형적인 비너스의 자세는 한손은 가슴을, 한손으로 음부를 가린 '푸티카(putica:정숙한)'라고 하며 한눈으로 비너스임을 알 수 있는 '중심'이자 '초점'이다. 그외 헤라임을 알 수 있는 공작새, 아테나임을 알 수 있게 하는 투구와 방패 등이 있다. 이런 '아이콘(도상)'을 찾는 것도 '탐정'의 역할이다.


4. [당대의 결혼 풍속도] 연작, 윌리엄 호가스, 18세기.

지금은 영국의 유명 화가로 남았지만 혁명으로 들끓기 전 18세기 당시 '로코코' 유럽의 영국 화가 윌리엄 호가스는 '만화 작가' 같이 알려져 있었다. '만화'도 '영화'도 없던 당시에 비해 현대로 치면 한 편의 '영화' 또는 시사풍자 '만화'를 상영하듯 호가스는 연작을 그렸다. 싸구려 술인 '진'이 애기들 우유보다 더 싸서 런던의 모든 빈민이 물처럼 마시다가 지옥처럼 변해가는 '진의 거리'나, 귀족으로서 유산을 물려받았으나 술, 도박, 여자로 탕진하고 정신병원에 갇혀 생을 마감하는 '방탕아 일대기'는 당대 현실을 사실적으로 그리고 있다. 몰락하는 귀족 집안에 딸을 강제로 시집보내 명예를 얻으려는 졸부가 있었는데, 애초에 사랑 없이 맺어진 이 젊은 부부는 각자의 사치스러운 삶을 살던 중 부인이 불륜을 저지른 장면을 목격한 남편이 결투 중 살해당하고 결국 부인은 매독균에 감염된 어린 아들을 두고 시골에서 자살로 파국을 맞는다는 아주 우울한 이야기가 호가스의 [당대의 결혼 풍속도] 연작이다. 
주인공은 젊은 부인으로 꼭 그림의 가운데 중심에 있을 필요는 없다. 이미 중세와 르네상스를 넘어 후기 르네상스 화가 티치아노나 그의 제자인 초기 바로크 시대 틴토레토, 매너리즘의 엘 그레코 등은 주인공(초점)을 구석이나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게 하고 그림의 전체 균형을 맞추었다. 모든 인물들의 등장은 주인공 젊은 부인 또는 그의 정부인 사기꾼 변호사의 주고받는 시선을 알 듯 모를 듯 암시하며 흐른다. 역시 '래버트먼트' 패턴에 따라 가상의 대각선을 교차하면 이 불륜 남녀의 시선으로 집중된다. 어수선하고 사치스런 당대 귀족의 일상을 '만화영화' 같이 그려냈으나 전체적 통일성을 지닌 균형을 갖춰 호가스의 연작들은 현재 '명화'로 남았다.


5. [이삭 줍기], 장 프랑수아 밀레, 19세기.

프랑스 시골 바르비종의 먼 배경을 등지고 이삭을 줍는 세 여인은 그림의 주인공이되, 현실에서는 저 멀리 추수를 하는 농부들로부터 소외된 시골의 과부들일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너희 땅의 곡물을 벨 때에 밭 모퉁이까지 모두 베지 말며 떨어진 것을 줍지 말고 그것을 가난한 이와 거류민을 위하여 남겨두라"는 말처럼 밀밭의 구석에서 '찌꺼기'들을 거두고 있는 세 주인공은 성 삼위일체를 의미하는 금색, 빨강과 파랑색의 모자를 쓰고 있다. 동시대 프랑스 귀족 시인 보들레르는 '육체 노동자'를 신성하게 그림으로써 지배계급을 위협한다며 밀레를 매우 싫어했다는데, 사실주의 작가 구스타프 쿠르베 못지 않게 바르비종파이자 인상주의 작가 장 프랑수아 밀레 또한 그림을 현실에 대한 '사실적 묘사'의 무기로 썼다. 
그림을 가로세로 '삼등분' 하고 십자선을 그려서 보자. 가로 삼등분선 위쪽은 먼 지평선이 있다. 세로 삼등분선에는 세 명의 과부들이 중심을 차지한다. '래버트먼트' 패턴으로 그은 대각선의 교차점에는 각각 좌우의 여인들이 안착되어 있다. 이는 밀레의 다른 작품 [만종]에서도 비슷하게 보이는 구도와 균형이다.


이외에도 '명화'는 그냥 그린 그림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그림을 보는 기술]을 통해 '탐정'처럼 볼 수 있다. 
물론, 이 '기술'들은 너무 '도식화'시켜서 기계적으로 도입하는 공식이 아니다. 다만, 막연하게 느끼는 '균형'과 '안정감'이 어디서부터 나오는 것인지 알 수 있는 '기술'은 일반인인 우리에게 '명화'를 '명화'로 식별하고 구분하는 안목을 준다.

예술이나 미술에 반드시 '이론'이나 지식'이 필요한 것은 아니다. 그러나 시대의 배경에 대한 '지식'과 그림을 종합적으로 보는 '이론'을 바탕으로 보는 그림은 어디서나 '명화'가 될 수 있다.
'알고 보면' 명화가 담고 있는 '질서'가 보이는 것이다.


"미술 작품을 감상한다는 것은 거장이 역사 속에서 만들어낸 질서를 파악하고 감탄하는 것이라고도 할 수 있습니다."
- 아키타 마사코, 같은책, <5. 구도와 비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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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림을 보는 기술](2019),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2020.
2. [무서운 그림 3 - 위험한 진실의 명화들](2009),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10.
3. [新 무서운 그림 - 명화 속 숨겨진 어둠을 읽다](2016), 나카노 교코, 이연식 옮김, <세미콜론>, 2019.
4. [운명의 그림 - 명화로 풀어내는 삶의 불가사의한 이야기](2017), 나카노 교코, 최재혁 옮김, <세미콜론>, 2020.
5.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인상주의], 진중권, <휴머니스트>, 20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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