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탁 위의 한국사 - 메뉴로 본 20세기 한국 음식문화사
주영하 지음 / 휴머니스트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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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

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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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

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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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탁 위의 세계사 창비청소년문고 5
이영숙 지음 / 창비 / 201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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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
-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 [식탁 위의 세계사], 이영숙, <창비>, 2012.


"한편, 양의 창자를 구하기 어려웠던 조선에서는 개, 소, 돼지, 민어 등의 창자로 순대를 만들었다. 그런데 왜 이름이 순대일까? 중국에서 부르는 '관장(灌腸:[제민요술])'이 곧바로 한국어 '순대'로 바뀐 것은 결코 아닐 것이다. 순대의 '대'는 한자로 자루를 뜻하는 '대(袋)'이다. 중국어 '관장'은 무엇인가를 집어넣은 창자라는 뜻이다. 그러니 순대의 '대'가 중국어 관장의 '장'인 셈이다. 그렇다면 순대의 '순'은 무엇일까? 한국에서 사용한 순대의 한자어는 '장대(腸袋)'이다. 하지만 '장'은 고대 한국어에서 '쟝'이라고 적혀 있다. 그러니 '쟝'이 '슌'으로 바뀌었을 가능성은 없다. 혹자는 '순'이 장의 모양이 둥글둥글한 데서 '둘'이 '순'이 되었다고도 하고, 만주어 '순타(sunta : 고기 담은 작은 자루)'에서 온 것이라고도 한다. 하지만 아직 정설은 없다."
- 주영하, [식탁 위의 한국사], <고급 음식에서 대폿집 메뉴가 된 돼지순대>, 2013.


'동서북공정'으로 문화적, 역사적 영토를 넓히려는 중국이 요즘에는 '김치'도 다 같은 동아시아 문화권 음식이라고 주장한단다. 중국 유투버로부터 촉발된 이 '문화침략'에 대한 우리의 반응은 당연히 '종주국' 전쟁이 될테니 한중일의 현대 동아시아 '삼국지'에서는 일상 다반사일 테다.

1920년대 방언 연구에 의하면, '김치'는 서울과 경기, 황해도와 함경북도 일부에서 부른 이름이다. '침치'는 강원도와 제주도, 전남북, 경남북 일대, '침끼'는 제주 성산과 서귀포, 대전 일대, '깍두기'는 함경남도 북청이며, '짠지'는 북청을 제외한 함남 지역 일대, '지'는 전남 순천 일대라고 한다(주영하, 같은책, <김치, 조선배추에서 호배추로>).
중국 고대문헌에서는 한반도에 사는 우리 조상들이 많은 채소를 기르면서 '화식'이 아닌 '냉식'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는데, 데쳐먹는 것보다 소금에 절인 발효상태로 먹는데 능하다고 했단다. 소금에 절이는 모든 음식의 '염장(鹽醬)'은 냉장과 냉동 기술이 발전하기 전 모든 음식문화의 공통점이겠으나 우리 조상들은 특히 채소의 '염장'에 익숙했다는 사실은 '독도는 우리 땅'처럼 분명하다. 어용실증사학자라도 문헌고증 기록으로 인정할 사실일테니 이 음식 '문화전쟁'에는 이제 '외교'만이 남을 테다.


역사학자 주영하는 "식사로서 음식은 일상이지만, 문화와 역사로서의 음식은 인문학"이라며 '비판적 음식학'을 기조로 음식 진화의 '역사'를 다룬다. 문화와 역사도 사회 '과학'이므로 새로운 증거와 주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가설'에 불과하니 '정답'은 없다. 그 해석의 관점은 각 시대의 정치경제가 배경이 되므로 "그 다양한 시선에 숨겨진 정치, 경제적 함의를 밝히는 작업(주영하, 같은책, <에필로그>)"이 그의 '비판적 음식학'이다.
그러므로 각국의 음식은 그 '진화의 역사' 속에서 서로의 문화로서 상호 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해 왔다. 지금 우리가 먹는 '김치'는 17세기에 들어 온 고추와 20세기에 이식된 현대식 결구배추로 완성되었으므로 우리 조상들의 '김치(침치/짠지)'와도 사뭇 다르다.

주영하는 [식탁 위의 한국사]에서 여러 음식들의 유래와 진화의 역사를 다루지만 통례의 '정답'을 제시하지는 않는다. '역사'로서 '음식의 기원'은 고고학의 영역으로 넘기고 그 진화의 이야기만 읽으니 더욱 재미지다. 국밥, 설렁탕, 육개장, 냉면, 짜장면, 쏘가리와 과메기, 우리 음식 신선로와 구절판, 탕평채, 대폿집과 술(막걸리/약주/소주), 순대와 김밥, 해방 후 혼종음식 등의 진화사로 우리의 문화사 일부를 돌아볼 수 있다.

'순대' 또한 각국의 사정에 따라 오래전 중국에서는 애용식인 양고기로 만들었다. 우리는 돼지나 개 또는 민어 창자에 각 채소와 다진고기 등을 넣어 만들었고 중국은 구웠으며 우리는 삶았다. 서양은 훈제 소시지가 비슷할테지만 우리나라 1960년대 돼지고기와 당면이 대중화되기 전에는 재료도 구하기 어렵고 손도 많이 가는 음식이었으므로 역사속 순대는 '고급음식'이었단다. 또한 순대는 양이 많은 짐승의 소장을 주로 쓰는데, '아바이순대'는 양이 적은 대장을 써서 나름대로 고급음식이라고도 한다.

식민지 시대 가정과 교수 방신영의 [조선요리제법]이나 한량문인 이용기의 [조선무쌍신식요리제법]은식민지든 말든 '음식'만을 논한 '기술' 책이었으나 후세에게는 음식의 '진화사'를 볼 수 있는 우리의 귀한자료가 되었다. 중국의 위진 남북조 시대 북위의 관리 가사협이 지은 [제민요술]이나 청나라 사람 원매의 [수원식단] 같이 당대 모든 집에 두고 참고할 '기술' 필독서와 같은 책들에 음식 요리법이나 먹는 방법 등이 주로 나오고 인용되는데 '문화사'가 굳이 식민지, 정치경제 체제 등 당대의 거대담론 역사만이 아닌 다수 민중의 소소한 역사까지 다룬 기록인 이유다.


"이로써 진상은 명확해졌다. 청대에는 광동 이외의 지역에서는 개고기를 먹지 않았다. 약으로 먹는 경우를 제외하면 개고기는 거의 먹을 게 없는 사람만 먹는 음식으로 전락했다. 더구나 일상생활에서 개고기를 먹는 것은 파렴치한 일로 여겼다. 하증전(만청시대 문인, [수원식단보증])은 이렇게 된 것을 의아하게 생각했지만, 옛날 북방 유목 민족의 남하가 이처럼 문화 변용을 초래했으리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 장징, [식탁 위의 중국사], <4장. 개고기를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 - 수당시대>, 2013.


공자가 살던 중국 춘추시대는 주식인 콩이나 기장밥을 손으로 먹었고 철기시대 이후에야 보편화되는 음식을 익히는 기술과 장비가 미비하여 생고기 '회(膾)'를 먹었으며 사냥을 못하면 가장 가까이 있는 개고기가 주된 고기였을 것이다(장징, 같은책, <1장. 공자의 식탁 - 춘추전국시대>). 
물론 육고기는 자본주의 대량생산체계 이전에는 제삿날이나 잔치날 외에는 먹을 수 없는 음식이었다. 현대사회는 거의 매일 고기를 먹을 수 있는 특별한 날을 우리에게 선사한 대신 축산업 대량생산체계의 확산을 통해 대량 암모니아 발산과 에너지 남발의 기후위기, 자연 서식지 침탈로 인한 신종 바이러스 유입과 유전자 변종 폐해 등이 담긴 선물상자도 함께 남겼다. 

'계구시체(鷄狗豕彘)'는 고대로부터 중국의 육류를 이르는 말인데, 닭(鷄)과 개(狗), 돼지고기(豕/彘)로 중국인들이 오랫동안 즐겨 먹은 육류다. 소는 농경의 주요 동력으로 제삿날과 같은 중요한 날에만 먹었고 일상적 연회에서는 닭고기와 개고기를 먹었는데 돼지고기는 그 옛날에도 서민음식이었단다. 북송 시인 소식(소동파)은 '진흙처럼 값싼' 돼지고기 맛을 모르는 사람들을 위해 삼겹살 간장조림을 개발한 '동파육'까지 내놓았다.

중국 출신으로 일본에서 비교문화학을 연구한 장징은 [중화요리 문화사]라는 책으로 중국요리의 역사를 주제로 하여 중국의 역사를 통시적으로 돌아본다. 중국음식이기는 하나 '중국'이라는 나라에 국한될 수 없고 역사속 다양한 민족들이 섞이고 교류하며 만들어낸 '중화요리'로 규정하며 현재도 끊임없이 다양한 문화의 교섭을 통해 변화하는 '중화요리'로써 '잡종'의 문화와 역사를 보여준다.
국역 제목은 [식탁 위의 중국사]다.

중국 정착민인 한(漢)족 민간에서 주로 먹던 개고기는 흉노로부터 시작된 북방 유목민족들이 중원에 정착하면서 차츰 양고기로 대체되었다. 유목민에게 개는 정착농경민의 소와 같이 중요한 자산이었기에 유목민들은 개고기를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의 역사는 주지하다시피 5호16국 이후 혼혈민족 중심의 수당시대부터 문명의 전성기를 시작한다. 동북의 선비족 유물에서는 양고기 뼈가 많이 나오지는 않는다지만 그들을 제외한 흉노, 갈, 저, 강족들은 대놓고 양고기 문화다. 이후 북송의 번영기를 지나 거란의 요나라는 '양고돈저(羊高豚低)', 즉 양고기로 돼지고기를 대체하였단다. 이후 요를 멸한 금나라 여진족은 요동의 예맥족처럼 돼지고기도 주로 먹던 숙신과 말갈의 후예인데 그들이 중원을 장악했을 때는 이미 양고기가 최고인 식문화가 정착한 후였다(장징, 같은책, <5장. 양고기 대 돼지고기 - 송대>). 

현재 돼지고기는 중국음식에서 빠질 수 없는 주요 재료인데 이는 우리나라 1980년대 이후와 같은 정책적 양돈사업 육성의 영향이다. 우리도 오래 전에는 한반도 북방 지역은 돼지고기를 주로 먹었던 한편, 남방은 소고기가 주된 육류였으며 이 또한 제삿날에나 먹는 귀한 음식이었을 것이다. 한반도 남쪽의 조상들이 예로부터 단백질 섭취를 위해 복날을 잡아 개에 일상적으로 된장을 발라 왔다는 증거다. 육개장의 기원도 대구에서 개고기를 찢어 넣고 끓인 '개장(구장)'이었다. 이후 식민지 시대 전국적 음식 '대구탕반'이 되면서 고춧가루를 풀고 소고기를 찢어 대체 첨가한 것이 육개장이다(주영하, 같은책, <개장의 변이, 육개장>).
아무튼, 우리의 슉육이나 편육도 지금의 돼지고기 편육만이 아닌 소의 가슴살과 각 부위를 섞어 찌고 눌러 만든 '양지머리편육', '업진편육'도 있었으며 민간에서 '제육(저육:猪肉)'이라 부른 돼지고기 '제육편육'이 지금의 편육이 된다(주영하, 같은책, <쇠고기편육, 고급 요정의 최상급 메뉴>). 새우젓을 구하기 힘든 북방의 돼지편육은 소금을 찍어 먹은 한편, 해안에 둘러싸인 남쪽은 새우젓에 찍어 먹었다고 한다.


"중국에서 하루에 소비하는 돼지고기 양은 약 14만 톤으로, 다 자란 돼지 약 70만 마리에 달하는 어마어마한 규모... 중국에서 키우는 돼지는 2011년 기준으로 약 4억5000만 마리... 전 세계 돼지의 절반이 넘은 수야. 중국에서도 점점 기업형 대형 축산 농가가 늘면서 사료 수요가 매년 20퍼센트 넘게 증가하고, 사료(옥수수 원료)값이 오르면 돼지고기 가격도 덩달아 뛰는 거란다.
2011년 중국의 옥수수 수입량은 157만 톤인데, 전년보다 무려 18배나 늘어난 거래. 수요가 많으면 가격아 오르게 되어 있으니까. 지난 1년 동안 시카고 상품 거래소의 옥수수 값이 두 배 가까이 오른 것도 중국 때문이었다는 거야."
- 이영숙, [식탁 위의 세계사], <돼지고기 - 대장정에서 문화혁명까지>, 2012.


제2회 '창비청소년도서상'을 받고 출간된 작가 이영숙의 [식탁 위의 세계사] 또한 '식탁' 위에서 '역사'를 논한다. 자녀들과 음식을 같이 먹으며 그에 관한 역사를 이야기하는 형식으로 감자를 통해 아일랜드와 영국의 관계, 후추를 얻으려 떠난 콜럼버스의 신대륙 발견, 돼지고기와 마오쩌뚱의 혁명, 닭고기로 서민을 대변하려던 앙리 4세와 후버 대통령의 역설, 바나나 대량생산 과정에서의 환경파괴와 아편전쟁의 핑계로서의 차(茶) 이야기 등 통시적이지는 않지만 세계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는 잡화적 역사 이야기를 나눈다.


[식탁 위의 한국사], [식탁 위의 중국사]([중화요리 문화사]), [식탁 위의 세계사] 모두 음식('식탁')을 중심으로 '역사'를 돌아본다. 시리즈는 아니지만 우연하게 '식탁 위의' 역사를 논하는 이 책들을 함께 읽다 보면 해당 음식에 관한 입체적 시각을 얻음과 동시에 동아시아 한중일 역사는 물론 관련 세계사를 공시적으로 함께 돌아보게 된다. 이후 각 음식들을 연결시켜 각각의 연대와 엮으면 통시적 역사관도 나름 세울 수 있지 않을까.

물론, '지식'으로서 접근하는 음식의 '역사'는 재미도 없을 뿐더러, 실증적 고증도 쉽지 않은 일이다. 어떤 음식이든 편식하지 않고 모든 음식이 다양한 문화들의 상호교류인 '혼종(주영하)', '잡종(장징)'이듯 인류 문명사 일체가 한데 섞이는 '경향성'으로 이해하는 것만 남길 일이다. 어떤 음식의 기원이 새로운 고증을 통해 바뀔지언정 모든 문명이 상호침투하고 변화 및 발전하는 변증법의 '역사'는 불변하는 '철학'적 '진리'일 테니 말이다.

결국,
모든 '음식'의 역사는 '퓨전'의 역사다.


***

1.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2. [식탁 위의 중국사](2013), 장징, 장은주 옮김, <현대지성>, 2021.
3. [식탁 위의 세계사], 이용숙, <창비>,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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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양장) 한국 민주주의 토대연구 총서 2
김동춘 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외 엮음 / 한울(한울아카데미)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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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공성'을 위한 민주적 '공화주의'
-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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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민주주의100년, 가치와 문화](2020)
&#39;공공성&#39;을 위한 민주적 &#39;공화주의&#39; | &#39;공공성&#39;을 위한 민주적 &#39;공화주의&#39;-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lt;한울아카데미&gt;, 2020. &quot;서구에서도 &#39;민주주의&#39;는 언제나 혁명이나 직접행동의 결과로 도입되었지, 지배세력이 양보하여 순순히 민주적 제도를 도입한 적은 없다. 특히 왕을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한 것이나 보통선거권을 확보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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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구에서도 '민주주의'는 언제나 혁명이나 직접행동의 결과로 도입되었지, 지배세력이 양보하여 순순히 민주적 제도를 도입한 적은 없다. 특히 왕을 몰아내고 공화제를 실시한 것이나 보통선거권을 확보한 것도 모두 봉건귀족 세력과의 유혈투쟁, 전쟁과 내전, 봉기와 집단저항의 결과였고, 그러한 투쟁에 나선 주체는 일반 대중, 노동자들이었다... 지식인들의 사상과 이념만 중요한 것이 아니라, 대중이 어떤 의미 부여 작업을 통해 그런 가치나 구호에 공명해서 그처럼 생존을 위해 목숨을 건 봉기와 투쟁을 감행했는지 물어야 할 것이다."
- 김동춘, 같은책, <서문>.


누구나 앞에서는 '민주주의'를 지지하는 시대다. 신체의 일부와도 같은 손 안의 SNS를 통해 정보독점이 갈수록 약화되고 다수 민중의 정보활용과 연대의식이 무한 확장되고 있는 지금은, 30여 년 전 '민주화' 같은 용어가 무색할 정도다. 그러나 자세히 살펴보면 누구나 '민주주의'를 옹호하지는 않는다. 거대자본과 정치권력의 편에 선 자들에게는 세계를 움직이는 것은 극소수이므로 소수에 의한 다수 지배체제는 당연한 것이고, '선민의식'을 버리지 못한 586 민주화 형님들은 본인들이 소싯적에 이미 겪은 '민주주의'만으로는 체제를 유지할 수 없다고 생각하며, 거대 기득권 양당구조로 '적폐'를 청산하겠다는 시민들은 민주당 원외인사들이 생산하는 자극적인 뉴스들을 무기로 또 다른 파시즘을 양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주화' 이후 시대인 지금, 모든 현상은 '민주주의'로 포장된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산하 한국민주주의연구소가 1919년 3.1 운동 100주년 기념으로 2019년 발간한 연구총서 [한국 민주주의, 100년의 혁명 1919~2019]에 이어 2020년에 발간한 책이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한울아카데미>)다. 
우리 헌법의 기초가 된 일제강점기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민주공화정' 불을 당긴 3.1 운동부터 1960년 4.19 혁명, 1970년 전태일 열사, 1980년 5.18 광주민중항쟁, 1987년의 민주화 대투쟁, 2002년부터 현재까지의 촛불시위 등의 거대한 '민주주의' 투쟁의 역사를 기반으로, 1부에서는 '자유', '평등', '민주공화주의', '토지공개념' 등의 '가치'를, 2부에서는 '저항', '정당정치', '미투(젠더)', '학생운동' 등의 '문화'를 다룬다. 
그 이전 역사도 가끔 거론되나 조선이라는 마지막 '왕조'의 몰락 후 주로 한국 현대사 100년의 역사 속 '민주주의'의 '가치'와 '문화'가 주제다.

'민주주의'가 유래한 고대 그리스의 페리클레스가 연설에서 사용한 '자유'의 희랍어 '엘레우테리아(eleutheria)'는 '노예가 아닌 상태'나 '속박되지 않음'을 뜻한다는데 우리 조선 후기에도 비슷한 의미로 '자유'라는 용어가 등장한다지만, 계급사회에서 지배계급이 말하는 '자유'는 그들만의 '자유'였고 피지배계급에게는 노동에 구속되거나 굶어죽을 '자유'만이 허락되었다. 일제강점기 진정한 '자유'는 식민지 상태로부터의 독립과 해방이었고, 현대 '신자유주의적 국가독점자본주의' 시대의 '자유'는 무한증식을 위한 '자본의 자유'에 불과하다. 사상의 '자유'를 제한하는 '자유민주주의'는 그 용어 자체가 역설이다. 즉, '자유'라는 용어는 보편화되고 '평등'해져야 한다. 이렇게 각 개인의 '자유'가 모든 사람들 '자유'의 기초가 되는 진정한 '자유'의 조건은 '평등'이다. 근대적 의미의 '평등' 이전인 조선 시대 '민본주의'는 '균(均)'이라 표현했다. 우리 역사 최초의 대학 '성균관(成均館)'은 '균(均)을 이루는 교육기관'이었으며, 조선을 건국한 정도전의 '경자유전' 원칙과 '과전법'의 토지개혁의 이념이 바로 '균(均)'이었다. 정약용도 '나라를 고르게 하는 것이 정치'라 했단다. 우리 제헌헌법에서도 단호하고 원칙적인 '평등'보다 현실적이고 정책적 개념인 '균등'을 선호했는데, 정치-경제-교육의 '균등' 강령인 조소앙의 '삼균주의' 영향일 수도 있고 '반공'의 이념적 영향도 있다. 그럼에도 조선 후기 농민봉기와 동학농민전쟁 및 동학의 기치는 단호한 '평등'이었음을 잊지 말 것이며, 현재는 과정과 절차를 우선하는 '공정성'과 결과로서의 '평등'의 연대를 지향해야 한다.

스스로 물러나는 기득권이나 적폐세력은 없다. 일제에 의해 패망하기까지 조선왕조는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나라와 일본을 끌어들였다. 외세의 군대로 내국민들을 죽이고 짓밟는 것을 서슴치 않은 결과 외세에 의해 국권 자체를 상실했다. 제국주의 열강들 경쟁에서 이긴 일제가 아니었더라도 다수 조선민중의 힘으로 무너졌을 조선이었겠지만, 왕조가 실제로 무너진 1907~1910년 이전 우리 역사 최초의 시민단체였던 독립협회와 만민공동회의 '헌의6조' 같은 '민주주의'는 '입헌군주제'를 벗어나지 못했다. 

'민주공화국'은 왕조도 몰락하고 식민지 근대화가 폭력적으로 이식되던 1919년 3.1 운동 이후에야 상상 가능한 정치체제였다.




"임시정부가 내건 '민주공화국'이라는 비전과 구호는... '민주공화국과 관련하여 최초로 개념의 민주화가 시작'된 것이었다... '민주'라는 수식어를 결합한 용어 '민주공화'를 '임시헌장'에 삽입한 기초자들의 독창성, 그리고 그것이 이후의 역사에서 한 단어로 확고하게 굳어진 용어의 확정력은 '공화'의 개념사에서 적극적으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민주공화주의'가 애국지사들이 일본의 강점에 대항하기 위해 서구사상을 수용하여 독창적으로 만들어낸 정치철학 이념인 것은 확실하다."
- 정상호, 같은책, <3장. 헌법 제1조의 기원과 변화로 본 '민주공화국'으로서 대한민국>.


3.1 운동과 같은 동시대적 20세기 초 전세계 대중운동은 우연이 아니다. 유럽은 19세기 중반부터 다수의 노동계급에 의한 산업별 노동조합 투쟁과 정치세력화로 사회민주당 같은 진보정당이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시작했고 소비에트 노동자 정권도 등장했던 역동의 시기라 다수대중의 '민주주의'를 위한 투쟁은 시대정신이었다. 한반도는 해방 후 불행하게 남북 분단정권의 등장으로 남한 단독정부의 제헌헌법은 '반공'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이 헌법이 담은 '민주공화정' 또한 그 독창성에도 불구하고 초기 제창자 유진오의 해석에 따르면 삼권분립, 의회, 정당, 선거 등의 '절차적' 민주주의에 그친다. 자본주의 체제 모순을 '창조적 기업가정신'으로 극복하자는 조지프 슘페터 같은 학자의 '최소주의'적 '민주주의'와 같은 제헌헌법의 반공주의적 '민주공화국'은 박정희-전두환 군사독재 시기 국고보조금 나눠먹기로 살아남은 제도권 거대정당들의 장기독재 획책을 저지한 다수대중의 저항과 투쟁을 통해 더욱 대중화되었고 21세기 '촛불투쟁'으로 등장한 대중민주주의 투쟁으로 '실질적' 민주주의의 길에 접어든다.

고대 로마 시대 '전제군주'의 명목상 임무는 '공화정'을 지키는 것이었다. '공화정'이 '군주정'과 대립된 정치체제가 된 것은 근대에 이르러서였다. '공화정'은 서양의 'republic', 즉 '공공성'의 어떤 표현이었고, 근대 이후 동양에 유입되면서 중국 주나라에서 폭군을 쫓아낸 재상정치체제로서 '공화'로 번역된 것인데, 권위있는 해석의 우리 문헌은 없지만 우리 독립운동사와 민주주의 역사는 '민주주의'와 '공화정'을 어울린 '민주공화국'이라는 정치철학을 남북한 헌법 1조에 공히 선언하고 있다. 

- 남한 헌법 제1조 : 대한민국은 민주공화국이다.
- 북한 헌법 제1조 :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은 전체 조선인민의 이익을 대표하는 자주적인 사회주의 국가이다.

물론, 두 체제 모두 헌법 1조만큼 실질적 '민주주의' 공화국인지는 별론으로 하고, 남한인 대한민국은 다수 대중의 참여민주주의 확산을 통해 '실질적' 민주공화국으로 거듭나고 있다는 것이 최근 30여 년간의 실증적 역사다.

이탈리아의 헌법은 '노동에 기초를 두는 민주공화국'을, 대혁명의 국가 프랑스 헌법은 '민주적, 사회적 공화국'을 국체로 선언하지만 우리 '임시헌장'의 '민주공화국'보다 시기상 늦다. 그 용어 자체로 '사회성'과 '공공성'을 담보하는 '공화주의'는 지금 시대 참여민주주의를 통해 더욱 실질적으로 확대되고 공고화되어 대한민국은 더욱 민주적이고 사회적이며 공공성을 우선하는 '공화국'이 되어간다.




"조소앙의 (지공주의) 토지개혁론에서 중요한 것은 국유화 그 자체보다는 '평균지권'의 실현이었다. 국유화 후 토지분배는 (삼균주의) 조소앙이 이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고안한 방책이었다... 조선 시대 과전법도, 조소앙의 토지개혁론도 토지를 농민에게 한 번 나눠주고 끝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었다. 골고루 나눠준 토지가 다시 소수의 수중에 흘러 들어가 불평등하게 소유되는 것을 방지하는 것이 국전의 원칙이었다."
- 전강수, 같은책, <4장. 한국의 토지소유 이데올로기는 어떻게 변천해 왔을까?>.


책의 1부는 '민주공화국'의 주요 가치로서 '소유권'의 '공공성' 주제를 다루는데, 역사적으로 '공공소유'의 대상이었던 '토지', 즉 '토지공개념'의 주제를 다룬다. 고려시대 전시과와 조선의 과전법은 '국전'의 형태였다. 소유권은 국가였고 조세 수취권을 부여하거나 토지생산물을 농민이 소유하도록 하는 제도로 '평등지권'을 실현하는 정책이었다. 고려 말 권문세족이나 조선 후기 신분제의 망조는 대토지소유로 드러났고 조선이나 '민주공화국'의 새로운 세상의 시작은 '토지개혁'으로부터 출발했다. 토지공개념은 단순한 '국유화'가 아니라 토지의 사적 소유와 투기의 이념인 '지주(地主)주의'를 토지의 공공소유 이념으로서의 '지공(地公)주의'로 대체하면서 '평등지권'을 지향하며 그러므로 '민주주의'는 '지공주의'를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군사독재정부는 국민들의 소유욕을 부추기는 '지주주의'를 강화하여 이 나라를 '부동산공화국'으로 만들어왔는데, 1987년 '민주화' 이후 다수 민중의 '사회공공성' 열망으로 노태우 정권은 토지공개념 정책을 시작할 수 밖에 없었으나 '세계화'와 'IMF' 체제 이후 '지공주의'가 약화되어 왔다. 노무현 정부는 부동산보유세 강화의 장기적 계획 정책화를 시도했으나 '지주주의' 기득권 세력에게 패배했으며 이후 보수정권은 부동산과 토지를 아예 투기대상으로 굳혔다. 문재인 정부도 '지공주의'를 정책화하는데 실패하고 있는데, 여전히 "권력이 시장에게 넘어갔다"는 이유를 대고 있는지 모르겠다.


민주주의적 소유권은 '지공주의' 소유권처럼 '평등(평균)지권'이 본질이다. 실질적으로 노동하고 만들며 전유하는 다수가 그 생산물을 소유하고 처분한다는 '공공소유'가 그 내용이 된다. 

민주적이고 사회적인 '공화주의'의 본질은 '공공성(公共性)'이다.


***

- [한국 민주주의 100년, 가치와 문화], 김동춘 외 지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엮음, <한울아카데미>, 2020.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한국민주주의연구소, #한국민주주의100년가치와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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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 문장의 왕국 조선을 풍미한 명문장을 찾아서
백승종 지음 / 김영사 / 2020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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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나은 세상을 위한 '문장(文章)'의 시대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백승종, <김영사>, 2020.



"조광조 등을 각지로 귀양 보낸 다음에도 한동안 조정이 소란하였다. 무명의 청년들이 사람을 모아 임금 주변을 정화하겠다며 쿠데타를 시도하였다. 그들은 일이 발각되어 목숨을 잃는 것도 두려워할 줄 모르고 앞다퉈 봉기를 꿈꾸었다. 그만큼 조광조와 그 동료들의 인기가 높았다. 반면 남곤은 다 이겨놓고도 진 싸움을 벌이고 있었다."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1부. 시대의 문장 - 성리학 전성기의 문장가', 백승종.


조선은 '문장'의 나라였다.
우리의 문자 한글이 창제된 것이 고작 15세기였는데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고려말 성리학이 도입된 후 한반도의 유학자들은 한문으로 지은 글이 중국인들조차 우러러 볼 정도로 수려한 문장을 구사했다고 한다. 물론, 아직 우리 문자인 한글로 지어진 문장 이야기가 아니었으므로 중국인들을 능가할 정도의 주자학적 교조주의가 팽배했다는 것일 수도 있겠다. 조선의 '이단아' 허균의 최초 한글소설 [홍길동전]은 16세기 말 민중봉기의 기운을 받고서야 등장했다.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고려말 대학자 목은 이색, 그의 제자 포은 정몽주와 삼봉 정도전의 문장으로부터 조선 성리학의 전성기와 쇠퇴기, 실학의 시대를 거쳐 근대화 개항기의 '문장가'들을 찾아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2020)으로 엮었다. '민본'의 건국이념을 내건 성리학 도덕정치의 조선, 그 '시대의 문장'을 한편으로, '문장의 시대'를 이끈 명문장가들을 한편으로 하여 이 시대에도 변함없는 '문장(文章)'의 의미를 조명한다. 
난 개인적으로 '빈곤의 철학, 철학의 빈곤' 식의 댓구를 이루는 작명을 좋아하는데, 일단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이라는 제목이 와닿는다. '시대'와 '문장'의 두 단어로 네 가지 그 이상의 의미를 함축하는 작법이다.

고려말 관리로서는 실무능력이 떨어지나 시대의 대학자였던 이색과 개혁가 정몽주, 혁명가 정도전의 운명은 엇갈렸다. 결국 썩은 고려왕조를 '민본'의 이름으로 뒤집어 엎은 정도전 또한 새왕조의 칼날에 명을 다했고 납작 엎드린 이색은 제 명을 다 누렸다. 성리학적 신념으로 일생 타협하지 않은 정도전의 정치는 그의 실각과 함께 사라진 듯 했지만 조선은 그의 '문장'까지 버리지는 않았다. 사찬 형식이었지만 [조선경국전]은 '법치국가' 조선의 헌법과 같은 [경국대전]의 골자가 되었으며, 왕권을 견제하는 사대부 집단지도체제의 운영원리는 그의 [경제문감]이 뿌리였다. 조선왕조 불구대천의 역적 정도전의 문집인 [삼봉집]은 벼슬길이 막히지 않았던 그의 후손들이 편찬할 수도 있었다.

집현전을 통해 '문장가'가 지도하는 성리학적 시대는 세종이 본격적으로 문을 열었다. 세종 또한 '역적' 정도전과 그의 문장을 "없는 것만 못하다"며 싫어했으나, 그가 건설하고자 했던 '민본주의' 이념은 지향했으며 이를 가능하게 할 명문장가들을 양성했다. 정도전의 '혁명동지'였던 대문장가 권근의 후손인 권채, 백승종 선생이 '조선 제일 문장가'로 꼽는 박팽년 등은 일종의 안식휴가를 받고 경학과 문장을 연마하여 시대의 문장가로 활약할 수 있었다. 이후 세종은 어린 손자 단종이 자신의 아들 세조에 의해 죽임을 당할 때 끝까지 저항한 박팽년, 성삼문 등의 '충신'을 양성했으니 그 뜻은 어느 정도 이뤘을 수도 있겠다.

조선을 건국한 기득권 정도전의 후예들인 훈구파에 밀려 지방에서 후학을 양성하던 정몽주의 후예 사림파들은 조선 중기 정계 진출을 하는데, 연산군 등의 폭군의 출현은 왕조 자체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훈구파 지배체제의 한계이기도 했다. '덕치'와 그에 걸맞는 문장만을 인정한 사림파의 거두 김종직의 [조의제문(弔義帝文)]은 그가 꿈에서 본 중국 초한전쟁 시대 초왕 의제(義帝)의 죽음을 담담히 묘사한 글임에도 유자광 등 훈구파는 개인적 복수와 정치적 시기로 해당 글을 세조의 찬탈을 비판하는 반역의 문장으로 둔갑시켜 '무오사화'를 일으켰다. 선비가 화를 당한 사건 '사화(士禍)'는 이렇게 '문장'의 해석에서 시작하였다. 과연 '문장의 나라' 조선답다. 이후 중종에 의해 개혁의 기수로 발탁된 조광조 또한 오로지 '도학정치'만이 나라를 바로 세울 수 있다며 군주를 견제하려 했기에 결국 세 번째 사화인 '기묘사화'의 재물이 되는데, 이 때는 이미 전국적으로 형성된 '사림파' 세력을 무시할 수 없는 시대였다. 성균관을 포함한 전국의 젊은 사림유생들은 목숨을 걸고 투쟁에 나섰고, 아마도 그 정치투쟁의 중심 또한 '문장'이었을 것이다. 오래전 사림파 김종직을 탄핵하고 '무오사화'를 일으킨 주동자였던 훈구파 유자광을 비판한 명문장 [유자광전]을 지은 남곤은 원래 조광조와 같은 사림파였으나 '기묘사화' 때는 훈구파가 되어 조광조를 처단하는데 성공하였으나 청년사림파의 암살 위협을 피해 변장을 하고 처소를 옮겨다닐 정도였단다.
젊은 시절 조광조와 뜻이 맞았을 남곤은 [유자광전]을 통해 '명문장'은 인정받았으나 시대에 굴복한 '문장가'로 후세가 평가한다.
그리하여 '문장의 시대'에는 수려하거나 화려한 '문장' 자체가 아니라, '시대의 문장'을 지어야 한다는 것을 남곤은 그의 일생으로 보여준다.


"피어린 상소문에 얽힌 사연을 더듬어가며, 나는 문장가로서 난세를 해쳐나간다는 것이 참으로 견디기 힘든 고역이 아니었을까 생각했다. 차라리 붓을 꺾을 수는 없었을까. 한 가닥 양심 때문에 문장가는 뜻을 굽히지 못한 채 고난을 자초하였던가."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2부. 문장의 시대 - 송곳처럼 날카롭고 추상처럼 매서운 문장가', 백승종.


네 번의 '사화'에도 불구하고 '문장'으로 무장한 다수 사림파는 굳은 '개혁' 의지로 선조 시대 이후 정권을 장악하고 본격적인 '당파투쟁'을 이어간다. 이후 실학자나 근대화론자들 또한 '문장'을 통한 시대 개혁을 꿈꾸었는데, 이들의 정신적 뿌리는 단연 강직한 선비들의 '피어린 상소문'이다.

광해군 때의 명문장가 권필은 외척을 비판하는 시를 지어 왕가의 노여움을 샀으나 붓을 꺾기보다는 차라리 맞아죽었다. 마지막 사화인 '을사사화'가 일어나기 전 명종 시기 조광조의 제자 백인걸은 모두가 눈치보느라 몸을 사리는 '대윤'과 '소윤' 따위의 정파싸움에 휘둘리지 말고 임금이 공명정대한 '덕치'를 해야한다는 상소 '문장'을 올린 후 왕의 부름을 받고는 모친과 처에게 "지금 들어가면 반드시 의금부에 하옥되어 유배를 떠나는 사태가 발생할 것이나 놀라지 말기 바랍니다"라고 말했다(실록). 조식은 역시 명종 시기 외척을 비판하는 격렬한 상소문으로 권력과 대치했는데 "유비의 삼고초려에도 불구하고 제갈량은 후한을 다시 세우지 못했다"며 명종의 벼슬길을 거절하고 초야에 숨었다. '덕치'가 불가한 세상에서 선비는 '문장' 뒤에 숨을 수 밖에 없었나 보다. 달리보면, 그나마 '문장'이라도 있던 '시대'라 다행이었던가.


"허위정보(가짜뉴스) 캠페인은 '진짜뉴스'를 '가짜뉴스'라고 매도하고 신뢰할 만한 정보를 공격한다. 그 결과 많은 사람들이 넌더리를 내며 '어떤 소스도 믿을 수 없어. 뉴스는 믿을 게 못 돼'라고 외치게 만드는 것이 목표다."
- [가짜뉴스의 고고학], '1장. 가짜뉴스는 어떻게 시작되었나?', 최은창.


로마의 카이사르 사후 후계자 옥타비아누스는 경쟁자 안토니우스와 클레오파트라 연합세력을 악티움 해전에서 물리치기 전, '가짜뉴스'를 통한 여론전에서 먼저 승리했다. "술꾼에 호색한에게 로마를 맡길 수 없다"며 이집트에 주둔한 안토니우스를 비방하여 로마 시민들의 지지를 먼저 얻었다. 술과 여자를 좋아한 안토니우스였기에 '허위정보'는 아니었으나 정적에 대한 비방이 주를 이룬 짧은 찌라시 '가짜뉴스' 소문의 전파였다. 중세의 이단처형과 마녀사냥까지 온갖 '가짜뉴스'는 '문자'의 배포 형식이 아니었다. 인쇄술 혁명과 종교개혁을 통해 '문자'를 통한 '여론전'이 본격화되었으나 우리 조선과 마찬가지로 문맹률이 높았던 그 시대의 '문자'는 소수 지식인들의 영역이었고 다수 민중은 아마 소문으로 듣고 옮겼을 것이다. 이후 20세기 독일 나치는 라디오를 전국민들에게 싼 값으로 배포하면서 '가짜뉴스'를 세뇌시켰다. 괴벨스의 신조는 "거짓말도 계속 들으면 사실이 된다"였다. 싸구려 타블로이드 신문으로 돈을 벌던 20세기 초 미국의 언론계는 유명작가 에드거 앨런 포조차도 '가짜뉴스'를 일부러 쓰던 시기를 거쳤다. 쿠바나 베트남에서 기사를 '사실'적으로 쓰기도 전에 미국의 의회나 신문사 편집실에서 '전쟁기사'를 먼저 쓰기도 했단다. 그들의 통킹만 사건 조작으로 미국의 베트남전 개입이 시작되었고 우리나라 젊은이들을 포함한 수많은 희생자를 양산했다. 해외는 70% 정도가 페이스북 같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뉴스를 접하는데 우리나라는 80% 정도가 주요 포털사이트를 통해 뉴스를 접한다고 한다. 우리나라 태극기부대 유투브, 정치권의 댓글부대 등 '가짜뉴스'는 각지에서 벌어지는 당장의 진흙탕 싸움에서 승기의 명분을 잡기 위함이었겠으나 이것들을 '고고학(archeology)'적으로 재구성하다보면, "세상 믿을 놈 없다", "너나 나나 다 사기꾼"이라는 허위의식의 판 구성이 목표였다고 소셜미디어, 지적재산권 전문가 최은창은 [가짜뉴스의 고고학](2020)에서 말한다.
위 책은 '가짜뉴스'와 '허위정보'가 증폭되기 위한 필요불가결한 수단이 되는 '디지털 플랫폼'이 제대로 된 역할을 하도록 만들자는 것이 결론인데, "개방적 인터넷 자체는 민주주의를 붕괴시키지도, 허위와 진실을 구분하는 개인들의 능력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치지도 않는다"는 것이 그 주요 전제다. 
2016년 미국 대선에서 '가짜뉴스' 제조기 트럼프를 주요 사례로 들며, 다수대중은 본인이 믿고싶은 내용을 담은 뉴스를 통해 신념을 굳히는 '확증편향' 또는 '동기화된 추론' 등을 통해 '가짜뉴스'를 읽고 전파하는 과정에서 실제 정치적 영향력은 볼 수 없었고, 결국 이 '허위정보'나 '가짜뉴스'를 증폭시키는 언론의 역할이 컸으며 지금 시대의 거대 '언론'이자 '출판사'는 '디지털 플랫폼'이므로 이들의 제대로 된 '역할'을 기대하고 있다. 
나 또한 동의하는 지점이다. 그러나 미국에서 공부한 지적재산권 전문가인 저자에게 이런 거대 '디지털 플랫폼'의 '사회화'까지는 상상이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자본주의를 더욱 발전시킨 철도와 전기 등의 기간산업의 소유가 '사회화'되어야 하는 것처럼 '디지털 플랫폼' 또한 이 산업을 만들고 이용하며 발전시키는 다수에 의해 '사회화'된 민주주의 틀 안에서 그 역할이 토론되고 조정되며 통제되어야 한다. 지금은 다수 모든 민중들이 '문자'를 해독하고, '문장'을 지어내며, 스마트폰을 신체 일부로 활용하는 세상이다. 현대의 '스마트' 민중들에게는 충분히 그럴 능력이 있다.


문명은 문자와 함께 시작되었으니 다수가 문맹이었던 근대 이전에도 모든 것은 '문장'에서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결국 후세에 남은 역사적 사실들 또한 '문장'에 의해서 가능했다.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이 '문장'을 중시했다지만 결국 다수 대중의 독해력으로 '문장'은 어느 시대든 주요한 소양이 될 수 밖에 없다. 권력을 지키고자 한 자들에게는 왜곡의 대상이 될 수도, 새세상을 꿈꾸는 자들에게는 투쟁의 무기가 될 수도 있었으며, 앞으로도 인류 문명사에서는 그렇게 될 것이다. 그 방식이 텍스트든 그림이든, 동영상이든 움짤이든 다양하겠지만, 결국 가장 단순하게 남아 전달되는 형식이 '문장'이 되리라는 믿음은 버릴 수가 없다. '문자'가 없는 '문명'은 상상할 수 없기 때문이다. 

백승종 선생은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말미에서 '가짜뉴스'가 SNS에서 판을 치는 시대에도 '불량한 문장'만이 아니라 평범한 사람들의 "통찰과 지혜가 빛나는 영롱한 문장들이 장차 세상의 흐름을 더욱 정의롭고 평화롭게 바꿀 것"이라고 믿으며 책을 마무리한다. 
지금의 '스마트 시대'는 더 많은 사람들을 '명문장가'로 만들 것이고, 그 평범한 다수 '명문장'들이 증폭되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것이다.


"시대의 조류야 언제든 변하기 마련이다. 그에 발맞춰 형식도 바뀌겠지만 그래도 좋은 문장이 아주 사라지는 날은 오지 않을 것이다. 어질고 아름다운 문장에 깃든 위대한 힘, 영혼을 뒤흔드는 그 힘은 까마득한 옛날부터 머나먼 미래에 이르기까지 우리의 삶을 이끄는 한 줄기 빛이다."
-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마치며. 오늘날 우리에게 문장이란 무엇인가', 백승종.

***

1. [문장의 시대, 시대의 문장], 백승종, <김영사>, 2020.
2. [가짜뉴스의 고고학], 최은창, <동아시아>, 2020.
3. [삼봉집(三峯集) - 2], 정도전, 정병철 편저, <KSI한국학술정보>, 2009.
4.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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