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지음 / 들녘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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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1. '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경대전](최제우)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수운(최제우)이 서른일곱 되던 해가 경신년 1860년이었다. 4월 5일, 장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서 집에 돌아온 수운은 상제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세상의 병을 고치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 수운은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는 황홀함 속에서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1824년 경주의 유학자인 근암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2세의 나이에 대구감영에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난민(亂民)'의 죄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경주의 대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었을 최제우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되 서자로서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였으나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성리학자'였다. 출사할 길이 막혔던 이 똑똑했던 '지식인'은 처자를 이끌고 경주에서 울산으로 방황을 하던 중 아버지가 글공부를 하던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입되던 천주교의 하느님과 예수님까지 알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까지 분명히 읽었을 그는 마침내 서른일곱살에 '한울님'을 영접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근본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개시하게 된다. 즉, '천명'을 따르는 '천주(한울님)'를 모시는데 그 '천주'는 바로 나의 마음이자 너의 마음, 우리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라는 것,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믿음의 출발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나뉘고 상호 소통하지 않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글도 몰랐다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하나님/한울님(천주)'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생태주의'적 사상을 펼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포접제'의 동학 기본 조직을 만드는 '최보따리'로 불렸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만들었다.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61년 <포덕문>부터 시작하여 저술된 수운 최제우의 저작 일체를 모은 1880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다. '동쪽의 경전을 크게 모은다'는 제목의 [동경대전]은 순한문체로 쓰인 동학의 경전과 문집이다. 1861년의 <포덕문(布德文)>은 '덕을 펼친다', 1862년의 <동학론(東學論)/논학문(論學文)>은 '서학'과 비교되는 '동학'의 정체에 관한 논설과 '21자 주문' 해설, 같은해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다'는 글이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개념적 길을 잡은 최제우에게 '덕(德)'은 '천명(天命)'이자 '도(道)'를 의미한다. 2021년에 [동경대전]을 새롭게 주해한 도올 김용옥은 1860년에 '도(道)'를 얻은 최제우가 다음해에 지은 <포덕문>은 외부를 향한 '정(正)', 그 이듬해 지은 <동학론/논학문>은 '서학'과의 대비를 통해 '동학'이 무엇인가 정의하는 '반(反)', <수덕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천인합일(天人合一)" 및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를 확인하는 '합(合)'이라는 헤겔식 변증법의 '정-반-합' 테제로 설명한다. 이 세 문건이 바로 [동경대전]의 핵심을 담은 세 개의 소경전이다. 도올에 의하면 '동학'의 핵심은 '천도'로서의 유학적 '도'를 넘어 '인덕'으로서 '덕'을 중시한 그 실천성에 있고 이것이 바로 기존 '유-불-도'나 기독교(천주교)와 차별되는 '동학'의 우수함이다. 그리하여 도올은 '천주'를 '한울님'으로 해석한 '천도교'의 좁은 틀을 벗어나 원래의 보편적 '천주', 즉 '하느님'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 또는 '하나'가 우리말 어원인 '하느님'은 동학에서는 더 이상 '높은 곳의 유일자'가 아닌 나와 너, 우리 모두와 세상만물이지만 말이다.
최제우의 사상이 성리학에 기반하다 보니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조화'다. 성리학의 경전인 [중용]과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의 '원'은 '크다', '형'은 '형통하다', '이'는 '이롭다', '정'은 '바르다'는 뜻인데, [동경대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 즉 "천도는 항상 '원형이정'으로 나타난다"고 적혀있다. 수운 최제우의 도통은 해월 최시형이 받았으나, '성리학자' 최제우는 여러 제자들 중 뛰어난 자들에게 '원형이정'의 조화를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선비 '강시원', 2대 도통 '최시형' 외에 '심시정'이라는 이름도 [동경대전] 편찬자의 명단에 있다. 어딘가에 아무개 '시리'라는 이름의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불-도'의 동양 3교는 물론 서양의 천주교까지 섭렵한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도교적 '목화토금수' 같이 수운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이정'의 조화를 불교적 '4대천왕(지국-광목-부처-증장-다문)'으로 배치한 것 아닐까.

'동학'의 기본사상은 '삼경(三敬)', 즉 '하늘을 섬기고(경천)', '사람을 섬기며(경인)', '만물을 섬기는(경물)' 근대적 '생태주의' 철학이었다. 이 '삼경'은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덕목이었는데, 최제우의 '동학' 사상 자체가 그 기본 뿌리는 재차 강조하지만 유교 또는 '성리학'이었다. 14세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에는 사회를 개조하는 진보적 실천철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특히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 사대부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고 쓸데없는 '예학'의 강조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는 끝간 데 없었다. 썩어버린 성리학이나마 그 실천철학의 덕목은 이렇게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학'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최제우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등의 기본 개념들은 '성리학'적 개념들이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인데, '미륵불하생'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신세계 개벽에 대한 믿음으로 수만 명의 농민반란군은 관군과 일본군대의 신식무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댔고 당당하게 쓰러져 갔다. 
주자 성리학의 기초가 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소옹의 [선천역학]에서 '태극'은 동학에서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무극'이고,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결국 '개벽(開闢)'이다. 도올에 의하면 최제우는 '선천'이나 '후천'이라는 말은 한 적 없고 '개벽'만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애초 '5만년' 전 '천지개벽' 후 19세기 '다시 개벽'의 '이전(선천)'이냐 '이후(후천)'이냐 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의 깨달음으로 이제 '다시 개벽'하는 실천만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말 동학농민군이 외세와 썩은 왕조의 총포 앞에서 외우며 죽어간 이 주문이 바로 '13자 시천주주문(侍天主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원래 최제우가 [동경대전]의 <동학론/논학문>에서 선언하고 해설한 주문은 스물한자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그 뜻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천주)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이며, 사람과 만물 안에 깃든 '천주(天主)'를 모셔 대자연의 만물 창조의 큰 이치인 '조화(造化)'를 정하고 이를 잊지 않고 행하면 모든 일에 통달한다는 의미겠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실천철학적 '진보성'을 잇는 조선 후기 새로운 실천철학 '동학'의 '진보성'은 이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였다.


2. '운동'으로서의 '동학'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개벽'의 본질... 허황한 부귀공명을 약속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신인간(新人間;眞人)'이 땀흘려 만드는 세상이 곧 '개벽'한 세상이요, 동학이 추구하는 미륵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2강. 사람이 하늘이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 백승종, <들녘>, 2019.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사상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에서 우리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투영해 본다.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 배경을 훑어보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정리하며 '동학운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했던 농민조직을 설명한 후 이 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강의록의 제목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2019)이다. 저자는 '동학'을 '혁명' 보다는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국가를 개조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혁명'의 실패의 관점이 아닌,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운동'의 관점이다. 
그는 '동학운동'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로 연결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둘째는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와 같은 계층이 유일한 자산인 '지식'을 팔아 키운 '평민지식인', 셋째는 오랜 동안 '두레'와 '품앗이', 동종'이나 '하계' 등을 토대로 한 농민사회 '비밀결사', 넷째는 이와 같은 자생적인 농민조직과 이들의 평등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해 건설되는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다섯째는 만물이 하늘인 '생태주의', 여섯째는 예나 지금이나 독점이 갈수록 강화되는 세상에서 사물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후천개벽'으로서의 '자주적 근대화', 일곱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미륵신앙', 여덟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동학, 아홉번째는 '화해'와 '협동'과 '연대'의 가치, 열번째는 불평등과 억압 및 착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청산 등이다. '동학'이 '근대화'인 이유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 시민사회적 개념을 우리식으로 공유하려 했던 실천적 노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중 사회의 주체적 실천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된다. 백승종 선생에 의하면 이 '자주적 근대화'가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요, 이상세계로서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도교의 '조화선경', 유교의 '대동사회'였다. "평화와 정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이 개벽된 새 세상의 특징(백승종, 같은책, '4강')"인 것이다.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원했다는 점...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 '경제적 정의'를 구현하여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꿈,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목표였어요...
동학적 의미의 인간개조 또는 사회개조...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의로운 새로운 관계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상황, 동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후천개벽'으로 보았습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3강. 갑오동학농민운동, 그 중심에 소농이 있다', 백승종.


3. '혁명'으로서의 '동학'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신정일)


최제우가 '접신'하여 '득도'한 1860년 조선 말기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862년은 삼남 지역의 '임술민란'의 해였고, 북쪽의 유흥렴과 남쪽의 이필제 같은 '직업혁명가'들은 수많은 가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란들을 조직하고 선동했을 수도 있는데, 이 '직업혁명가'들이 바로 '평민지식인'들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해 5월 '전주화약' 후 농민군이 흩어졌을 때,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서울진격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소심한 책상물림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혁명'적 '동학정신'을 이어나간 것이 김개남의 집단(포)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숨어든 지리산은 이후 1~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격대의 조직적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보인다. 민중 도보답사가 신정일 선생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발로 다니며 기록한 [동학농민혁명 답사기](2019)에서 당시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은...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같은책, <남원 교룡산 :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가였던 김개남>)"고 쓴다. 
이렇게 동학의 '실천'은 우리 역사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거나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중심포였고 가장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2차 봉기에 그는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켰다.
우금치 싸움이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겠다.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듬해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했다... 
어쨌거나 '비결탈취사건'은 암울했던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민중들의 동학과 시대의 현실과 미륵설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조선 후기 또한 중국이나 후삼국 한반도 못지 않게 농민들의 '비밀결사' 조직이 성행했을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교'나 '백련교', 청나라 말 '태평천국' 등은 각 시대에 맞게 각색된 '미륵불하생경'이었으며 이들이 대항이데올로기로 우뚝 서 '후천개벽' 비슷한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농민사회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후 우연히 성경책을 읽고 '접신'을 하고는 예수의 동생이 된 것이 흡사 열 몇살 아래인 조선의 최제우와 비슷하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청나라 말 홍수전이 과거에 합격하는 '공정'한 사회였다면, 서자였던 최제우도 성리학 이론으로 무장하여 출사할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접신' 또는 '후천개벽'을 외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과 달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민지식인'이었다. 사형당하기 전 재판서에는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떠돌이 훈장 선생님 쯤 되었단다. 동학혁명 내내 급진 과격파 김개남과 가장 큰 조직을 지녔던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강경파 '남접'의 접주들이었다. 최시형과 손씨들을 비롯한 충청도와 강원도의 '북접'은 '남접'과 한때 대립까지 불사하던 온건파였는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시형의 고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민란의 시대'는 다수 민중 모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봉준이 형님'을 따라 지옥길을 나섰고 결국 '시천주주문'과 함께 수만 명의 민중들이 지옥의 명부에 갇혔다.


4. [정감록] 탈취사건 - [민란의 시대](이이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들이기에 전투 중 위기에 빠지면 농민군은 지도자 장수에게 "언제 도술을 쓸 것이냐" 묻기도 하고 대포나 기관총 앞에서 몽둥이나 농기구만 든 채 부적을 붙이고는 13자 주문을 외웠으며 잔다르크 같이 어린 아이를 선두에서 무등 태우고는 그 아이의 지휘에 따르기도 했단다. 웃프기도 한 이 전쟁의 도발은 역시 '비기(祕記) 탈취사건'이었는데, [정감록]이었을지 [목민심서]였을지 아니면 [동경대전]의 '무극이도'나 쿵푸팬더의 빈 '용의 문서'였는지는 모르나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무장 접주 손화중이 '비기'를 탈취하고도 '벽력(벼락)살'을 맞지 않았다는 설에서 시작한다. 물론 끝까지 그 '비기'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봉준과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재판받던 손화중이 관리에게 본인을 '소인'이라 칭하는 것을 본 시종일관 당당했던 전봉준이 "내가 저런 소인배와 큰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는 정해졌던 일(신정일, 같은책)"이라 한탄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를 탈취한 손화중 장군도 동학농민전쟁에서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래도 역시 동학혁명의 자존심은 전봉준 장군이었는데 그는 죽는 그날까지 관리들에게 반말을 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비기'의 대명사 [정감록]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동학' : '개벽'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최제우는 '동학'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단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은 '포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생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의 도는 당신들의 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동학의 개념들 자체가 성리학의 그것이었다. 즉, '하늘의 도(천도)'는 같았으되, 이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계급지배의 도구였고 동학은 민중적 계급투쟁의 이념이었다. 
예를 들어, '귀신(鬼神)론'의 경우, 동양의 귀신은 서양 근대의 'Ghost'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즉 조상이다. 하늘로 퍼지는 '신(伸/神)'과 땅으로 돌아가는 '귀(歸/鬼)'의 뜻으로서 '귀신'은 '혼백(魂魄)'이다.'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늘로 날아올라 퍼지는 것은 '혼(신)'이요, 땅으로 흩어져 스며드는 것은 '백(귀)'이다. 동양에서 '신'이, 특히 '유일신'이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천지 자체가 귀신"이다. 동학의 '천주'가 모든 사람과 만물에 깃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19세기 당시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콜레라와 같은 '팬데믹' 현상으로 수없이 죽어나가던 면역력 없던 동양인들의 위기의식도 '동학' 발생의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전세계가 교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전히 쓸려나가는 현재의 '개벽'과 '동학'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향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 앞에 다시 '동학(東學)'이 우뚝 서 있다. 
'개벽(開闢)'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

1.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2.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3.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4. [동경대전-2](1861), 최제우, 김용옥 주해, <통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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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대전 2 - 우리가 하느님이다 동경대전 2
김용옥(도올) 지음 / 통나무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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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1. '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경대전](최제우)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수운(최제우)이 서른일곱 되던 해가 경신년 1860년이었다. 4월 5일, 장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서 집에 돌아온 수운은 상제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세상의 병을 고치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 수운은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는 황홀함 속에서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1824년 경주의 유학자인 근암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2세의 나이에 대구감영에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난민(亂民)'의 죄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경주의 대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었을 최제우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되 서자로서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였으나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성리학자'였다. 출사할 길이 막혔던 이 똑똑했던 '지식인'은 처자를 이끌고 경주에서 울산으로 방황을 하던 중 아버지가 글공부를 하던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입되던 천주교의 하느님과 예수님까지 알고 있었으며 중국 명나라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까지 분명히 읽었을 그는 마침내 서른일곱살에 '한울님'을 영접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근본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개시하게 된다. 즉, '천명'을 따르는 '천주(한울님)'를 모시는데 그 '천주'는 바로 나의 마음이자 너의 마음, 우리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라는 것,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믿음의 출발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나뉘고 상호 소통하지 않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글도 몰랐다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하나님/한울님(천주)'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생태주의'적 사상을 펼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포접제'의 동학 기본 조직을 만드는 '최보따리'로 불렸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만들었다.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61년 <포덕문>부터 시작하여 저술된 수운 최제우의 저작 일체를 모은 1880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다. '동쪽의 경전을 크게 모은다'는 제목의 [동경대전]은 순한문체로 쓰인 동학의 경전과 문집이다. 1861년의 <포덕문(布德文)>은 '덕을 펼친다', 1862년의 <동학론(東學論)/논학문(論學文)>은 '서학'과 비교되는 '동학'의 정체에 관한 논설과 '21자 주문' 해설, 같은해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다'는 글이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개념적 길을 잡은 최제우에게 '덕(德)'은 '천명(天命)'이자 '도(道)'를 의미한다. 2021년에 [동경대전]을 새롭게 주해한 도올 김용옥은 1860년에 '도(道)'를 얻은 최제우가 다음해에 지은 <포덕문>은 외부를 향한 '정(正)', 그 이듬해 지은 <동학론/논학문>은 '서학'과의 대비를 통해 '동학'이 무엇인가 정의하는 '반(反)', <수덕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천인합일(天人合一)" 및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를 확인하는 '합(合)'이라는 헤겔식 변증법의 '정-반-합' 테제로 설명한다. 이 세 문건이 바로 [동경대전]의 핵심을 담은 세 개의 소경전이다. 도올에 의하면 '동학'의 핵심은 '천도'로서의 유학적 '도'를 넘어 '인덕'으로서 '덕'을 중시한 그 실천성에 있고 이것이 바로 기존 '유-불-도'나 기독교(천주교)와 차별되는 '동학'의 우수함이다. 그리하여 도올은 '천주'를 '한울님'으로 해석한 '천도교'의 좁은 틀을 벗어나 원래의 보편적 '천주', 즉 '하느님'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 또는 '하나'가 우리말 어원인 '하느님'은 동학에서는 더 이상 '높은 곳의 유일자'가 아닌 나와 너, 우리 모두와 세상만물이지만 말이다.
최제우의 사상이 성리학에 기반하다 보니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조화'다. 성리학의 경전인 [중용]과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의 '원'은 '크다', '형'은 '형통하다', '이'는 '이롭다', '정'은 '바르다'는 뜻인데, [동경대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 즉 "천도는 항상 '원형이정'으로 나타난다"고 적혀있다. 수운 최제우의 도통은 해월 최시형이 받았으나, '성리학자' 최제우는 여러 제자들 중 뛰어난 자들에게 '원형이정'의 조화를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선비 '강시원', 2대 도통 '최시형' 외에 '심시정'이라는 이름도 [동경대전] 편찬자의 명단에 있다. 어딘가에 아무개 '시리'라는 이름의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불-도'의 동양 3교는 물론 서양의 천주교까지 섭렵한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도교적 '목화토금수' 같이 수운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이정'의 조화를 불교적 '4대천왕(지국-광목-부처-증장-다문)'으로 배치한 것 아닐까.

'동학'의 기본사상은 '삼경(三敬)', 즉 '하늘을 섬기고(경천)', '사람을 섬기며(경인)', '만물을 섬기는(경물)' 근대적 '생태주의' 철학이었다. 이 '삼경'은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덕목이었는데, 최제우의 '동학' 사상 자체가 그 기본 뿌리는 재차 강조하지만 유교 또는 '성리학'이었다. 14세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에는 사회를 개조하는 진보적 실천철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특히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 사대부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고 쓸데없는 '예학'의 강조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는 끝간 데 없었다. 썩어버린 성리학이나마 그 실천철학의 덕목은 이렇게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학'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최제우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등의 기본 개념들은 '성리학'적 개념들이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인데, '미륵불하생'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신세계 개벽에 대한 믿음으로 수만 명의 농민반란군은 관군과 일본군대의 신식무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댔고 당당하게 쓰러져 갔다. 
주자 성리학의 기초가 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소옹의 [선천역학]에서 '태극'은 동학에서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무극'이고,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결국 '개벽(開闢)'이다. 도올에 의하면 최제우는 '선천'이나 '후천'이라는 말은 한 적 없고 '개벽'만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애초 '5만년' 전 '천지개벽' 후 19세기 '다시 개벽'의 '이전(선천)'이냐 '이후(후천)'이냐 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의 깨달음으로 이제 '다시 개벽'하는 실천만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말 동학농민군이 외세와 썩은 왕조의 총포 앞에서 외우며 죽어간 이 주문이 바로 '13자 시천주주문(侍天主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원래 최제우가 [동경대전]의 <동학론/논학문>에서 선언하고 해설한 주문은 스물한자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그 뜻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천주)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이며, 사람과 만물 안에 깃든 '천주(天主)'를 모셔 대자연의 만물 창조의 큰 이치인 '조화(造化)'를 정하고 이를 잊지 않고 행하면 모든 일에 통달한다는 의미겠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실천철학적 '진보성'을 잇는 조선 후기 새로운 실천철학 '동학'의 '진보성'은 이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였다.



2. '운동'으로서의 '동학'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개벽'의 본질... 허황한 부귀공명을 약속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신인간(新人間;眞人)'이 땀흘려 만드는 세상이 곧 '개벽'한 세상이요, 동학이 추구하는 미륵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2강. 사람이 하늘이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 백승종, <들녘>, 2019.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사상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에서 우리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투영해 본다.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 배경을 훑어보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정리하며 '동학운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했던 농민조직을 설명한 후 이 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강의록의 제목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2019)이다. 저자는 '동학'을 '혁명' 보다는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국가를 개조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혁명'의 실패의 관점이 아닌,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운동'의 관점이다. 
그는 '동학운동'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로 연결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둘째는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와 같은 계층이 유일한 자산인 '지식'을 팔아 키운 '평민지식인', 셋째는 오랜 동안 '두레'와 '품앗이', 동종'이나 '하계' 등을 토대로 한 농민사회 '비밀결사', 넷째는 이와 같은 자생적인 농민조직과 이들의 평등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해 건설되는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다섯째는 만물이 하늘인 '생태주의', 여섯째는 예나 지금이나 독점이 갈수록 강화되는 세상에서 사물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후천개벽'으로서의 '자주적 근대화', 일곱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미륵신앙', 여덟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동학, 아홉번째는 '화해'와 '협동'과 '연대'의 가치, 열번째는 불평등과 억압 및 착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청산 등이다. '동학'이 '근대화'인 이유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 시민사회적 개념을 우리식으로 공유하려 했던 실천적 노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중 사회의 주체적 실천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된다. 백승종 선생에 의하면 이 '자주적 근대화'가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요, 이상세계로서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도교의 '조화선경', 유교의 '대동사회'였다. "평화와 정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이 개벽된 새 세상의 특징(백승종, 같은책, '4강')"인 것이다.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원했다는 점...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 '경제적 정의'를 구현하여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꿈,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목표였어요...
동학적 의미의 인간개조 또는 사회개조...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의로운 새로운 관계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상황, 동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후천개벽'으로 보았습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3강. 갑오동학농민운동, 그 중심에 소농이 있다', 백승종.


3. '혁명'으로서의 '동학'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신정일)


최제우가 '접신'하여 '득도'한 1860년 조선 말기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862년은 삼남 지역의 '임술민란'의 해였고, 북쪽의 유흥렴과 남쪽의 이필제 같은 '직업혁명가'들은 수많은 가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란들을 조직하고 선동했을 수도 있는데, 이 '직업혁명가'들이 바로 '평민지식인'들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해 5월 '전주화약' 후 농민군이 흩어졌을 때,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서울진격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소심한 책상물림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혁명'적 '동학정신'을 이어나간 것이 김개남의 집단(포)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숨어든 지리산은 이후 1~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격대의 조직적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보인다. 민중 도보답사가 신정일 선생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발로 다니며 기록한 [동학농민혁명 답사기](2019)에서 당시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은...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같은책, <남원 교룡산 :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가였던 김개남>)"고 쓴다. 
이렇게 동학의 '실천'은 우리 역사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거나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중심포였고 가장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2차 봉기에 그는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켰다.
우금치 싸움이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겠다.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듬해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했다... 
어쨌거나 '비결탈취사건'은 암울했던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민중들의 동학과 시대의 현실과 미륵설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조선 후기 또한 중국이나 후삼국 한반도 못지 않게 농민들의 '비밀결사' 조직이 성행했을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교'나 '백련교', 청나라 말 '태평천국' 등은 각 시대에 맞게 각색된 '미륵불하생경'이었으며 이들이 대항이데올로기로 우뚝 서 '후천개벽' 비슷한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농민사회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후 우연히 성경책을 읽고 '접신'을 하고는 예수의 동생이 된 것이 흡사 열 몇살 아래인 조선의 최제우와 비슷하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청나라 말 홍수전이 과거에 합격하는 '공정'한 사회였다면, 서자였던 최제우도 성리학 이론으로 무장하여 출사할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접신' 또는 '후천개벽'을 외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과 달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민지식인'이었다. 사형당하기 전 재판서에는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떠돌이 훈장 선생님 쯤 되었단다. 동학혁명 내내 급진 과격파 김개남과 가장 큰 조직을 지녔던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강경파 '남접'의 접주들이었다. 최시형과 손씨들을 비롯한 충청도와 강원도의 '북접'은 '남접'과 한때 대립까지 불사하던 온건파였는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시형의 고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민란의 시대'는 다수 민중 모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봉준이 형님'을 따라 지옥길을 나섰고 결국 '시천주주문'과 함께 수만 명의 민중들이 지옥의 명부에 갇혔다.


4. [정감록] 탈취사건 - [민란의 시대](이이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들이기에 전투 중 위기에 빠지면 농민군은 지도자 장수에게 "언제 도술을 쓸 것이냐" 묻기도 하고 대포나 기관총 앞에서 몽둥이나 농기구만 든 채 부적을 붙이고는 13자 주문을 외웠으며 잔다르크 같이 어린 아이를 선두에서 무등 태우고는 그 아이의 지휘에 따르기도 했단다. 웃프기도 한 이 전쟁의 도발은 역시 '비기(祕記) 탈취사건'이었는데, [정감록]이었을지 [목민심서]였을지 아니면 [동경대전]의 '무극이도'나 쿵푸팬더의 빈 '용의 문서'였는지는 모르나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무장 접주 손화중이 '비기'를 탈취하고도 '벽력(벼락)살'을 맞지 않았다는 설에서 시작한다. 물론 끝까지 그 '비기'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봉준과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재판받던 손화중이 관리에게 본인을 '소인'이라 칭하는 것을 본 시종일관 당당했던 전봉준이 "내가 저런 소인배와 큰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는 정해졌던 일(신정일, 같은책)"이라 한탄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를 탈취한 손화중 장군도 동학농민전쟁에서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래도 역시 동학혁명의 자존심은 전봉준 장군이었는데 그는 죽는 그날까지 관리들에게 반말을 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비기'의 대명사 [정감록]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동학' : '개벽'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최제우는 '동학'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단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은 '포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생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의 도는 당신들의 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동학의 개념들 자체가 성리학의 그것이었다. 즉, '하늘의 도(천도)'는 같았으되, 이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계급지배의 도구였고 동학은 민중적 계급투쟁의 이념이었다. 
예를 들어, '귀신(鬼神)론'의 경우, 동양의 귀신은 서양 근대의 'Ghost'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즉 조상이다. 하늘로 퍼지는 '신(伸/神)'과 땅으로 돌아가는 '귀(歸/鬼)'의 뜻으로서 '귀신'은 '혼백(魂魄)'이다.'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늘로 날아 올라 퍼지는 것은 '혼(신)'이요, 땅으로 흩어져 스며드는 것은 '백(귀)'이다. 동양에서 '신'이, 특히 '유일신'이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천지 자체가 귀신"이다. 동학의 '천주'가 모든 사람과 만물에 깃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19세기 당시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콜레라와 같은 '팬데믹' 현상으로 수없이 죽어나가던 면역력 없던 동양인들의 위기의식도 '동학' 발생의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전세계가 교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전히 쓸려나가는 현재의 '개벽'과 '동학'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향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 앞에 다시 '동학(東學)'이 우뚝 서 있다. 
'개벽(開闢)'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

1.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2.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3.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4. [동경대전-2](1861), 최제우, 김용옥 주해, <통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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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정일의 동학농민혁명답사기
신정일 지음 / 푸른영토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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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1. '개벽'을 위한 '21자 주문(呪文)' - [동경대전](최제우)


"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

"수운(최제우)이 서른일곱 되던 해가 경신년 1860년이었다. 4월 5일, 장조카의 생일에 참석했다가 한기가 몹시 나서 집에 돌아온 수운은 상제의 음성을 듣고 상제로부터 세상의 병을 고치는 영부(靈符)와 세상을 다스릴 수 있는 조화(造化)를 얻었다. 수운은 이 세상을 구하는 큰 깨달음을 얻는 황홀함 속에서 '나의 영부를 받아 사람을 질병에서 건지고 나의 주문을 받아 사람을 가르치라.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니라. 사람이 어찌 이를 알리오. 천지는 알고 귀신은 모르니 귀신이 곧 나이니라. 너에게 무궁무진한 도를 내릴 것이니, 이를 닦고 다듬어서 글을 지어 사람을 가르치고 그 법을 바르게 하여 덕을 펴라. 너로 하여금 이 세상을 빛내게 하리라'라는 '한울님'의 말씀을 들었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1824년 경주의 유학자인 근암 최옥의 서자로 태어난 수운 최제우는 1864년 42세의 나이에 대구감영에서 "백성을 혼란스럽게 했다"는 '난민(亂民)'의 죄를 받고 사형을 당한다. 그는 부모를 일찍 여의었다. 경주의 대유학자였던 부친의 영향으로 어려서부터 사서오경을 읽었을 최제우는 양반집에서 태어났으되 서자로서 과거시험도 보지 못하였으나 '천명'을 따르고자 했던 '성리학자'였다. 출사할 길이 막혔던 이 똑똑했던 '지식인'은 처자를 이끌고 경주에서 울산으로 방황을 하던 중 아버지가 글공부를 하던 경주 구미산의 용담정으로 돌아와 '깨달음'을 얻는다. 유교와 불교 및 도교를 두루 섭렵하고 당시 서양에서 유입되던 천주교의 하느님과 예수님까지 알고 있었으며 중국 명날에 천주교를 전한 마테오 리치의 [천주실의]까지 분명히 읽었을 그는 마침내 서른일곱살에 '한울님'을 영접하고 '인내천(人乃天)'의 근본이 되는 '시천주(侍天主)'를 개시하게 된다. 즉, '천명'을 따르는 '천주(한울님)'를 모시는데 그 '천주'는 바로 나의 마음이자 너의 마음, 우리 사람들 모두의 마음이라는 것, '사람이 곧 하늘(인내천)'이라는 믿음의 출발이었다. 수운 최제우는 하느님을 섬기지만 섬기는 자와 섬김을 받는 자가 나뉘고 상호 소통하지 않는 천주교, 즉 '서학(西學)'에 대비되는 개념으로 '동학(東學)'을 창시한다. 글도 몰랐다던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하느님/하나님/한울님(천주)'을 사람 뿐만이 아니라 모든 사물로까지 확장하는 '생태주의'적 사상을 펼치며 전국을 떠돌아 다니면서 '포접제'의 동학 기본 조직을 만드는 '최보따리'로 불렸고 3대 교주 손병희는 '동학'을 '천도교'로 만들었다. 

1863년 최제우로부터 도통을 이어받은 2대 교주 해월 최시형은 1861년 <포덕문>부터 시작하여 저술된 수운 최제우의 저작 일체를 모은 1880년 [동경대전(東經大全)]을 간행한다. '동쪽의 경전을 크게 모은다'는 제목의 [동경대전]은 순한문체로 쓰인 동학의 경전과 문집이다. 1861년의 <포덕문(布德文)>은 '덕을 펼친다', 1862년의 <동학론(東學論)/논학문(論學文)>은 '서학'과 비교되는 '동학'의 정체에 관한 논설과 '21자 주문' 해설, 같은해 <수덕문(修德文)>은 '덕을 닦는다'는 글이다. 성리학에서 기본적인 사상적, 개념적 길을 잡은 최제우에게 '덕(德)'은 '천명(天命)'이자 '도(道)'를 의미한다. 2021년에 [동경대전]을 새롭게 주해한 도올 김용옥은 1860년에 '도(道)'를 얻은 최제우가 다음해에 지은 <포덕문>은 외부를 향한 '정(正)', 그 이듬해 지은 <동학론/논학문>은 '서학'과의 대비를 통해 '동학'이 무엇인가 정의하는 '반(反)', <수덕문>은 결국 '나'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천인합일(天人合一)" 및 "내 마음이 곧 네 마음이다(吾心卽汝心)"를 확인하는 '합(合)'이라는 헤겔식 변증법의 '정-반-합' 테제로 설명한다. 이 세 문건이 바로 [동경대전]의 핵심을 담은 세 개의 소경전이다. 도올에 의하면 '동학'의 핵심은 '천도'로서의 유학적 '도'를 넘어 '인덕'으로서 '덕'을 중시한 그 실천성에 있고 이것이 바로 기존 '유-불-도'나 기독교(천주교)와 차별되는 '동학'의 우수함이다. 그리하여 도올은 '천주'를 '한울님'으로 해석한 '천도교'의 좁은 틀을 벗어나 원래의 보편적 '천주', 즉 '하느님'으로 다시 해석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하늘' 또는 '하나'가 우리말 어원인 '하느님'은 동학에서는 더 이상 '높은 곳의 유일자'가 아닌 나와 너, 우리 모두와 세상만물이지만 말이다.
최제우의 사상이 성리학에 기반하다 보니 [동경대전]에서 '천도(天道)'가 나타나는 참된 모습은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조화'다. 성리학의 경전인 [중용]과 [주역]에서 말하는 '원형이정'의 '원'은 '크다', '형'은 '형통하다', '이'는 '이롭다', '정'은 '바르다'는 뜻인데, [동경대전]에서는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천도지상(天道之常)", 즉 "천도는 항상 '원형이정'으로 나타난다"고 적혀있다. 수운 최제우의 도통은 해월 최시형이 받았으나, '성리학자' 최제우는 여러 제자들 중 뛰어난 자들에게 '원형이정'의 조화를 내렸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대선비 '강시원', 2대 도통 '최시형' 외에 '심시정'이라는 이름도 [동경대전] 편찬자의 명단에 있다. 어딘가에 아무개 '시리'라는 이름의 제자도 있었을 것이다. 아마도 '유-불-도'의 동양 3교는 물론 서양의 천주교까지 섭렵한 최제우는 유교의 '인의예지신'과 도교적 '목화토금수' 같이 수운 자신을 중심으로 '원형이정'의 조화를 불교적 '4대천왕(지국-광목-부처-증장-다문)'으로 배치한 것 아닐까.

'동학'의 기본사상은 '삼경(三敬)', 즉 '하늘을 섬기고(경천)', '사람을 섬기며(경인)', '만물을 섬기는(경물)' 근대적 '생태주의' 철학이었다. 이 '삼경'은 누구라도 군자가 될 수 있는 실천덕목이었는데, 최제우의 '동학' 사상 자체가 그 기본 뿌리는 재차 강조하지만 유교 또는 '성리학'이었다. 14세기에 도입된 성리학은 당시에는 사회를 개조하는 진보적 실천철학이었지만, 조선 후기로 접어들며 특히 왜란과 호란의 전란을 겪은 후 사대부 지배체제가 위기를 맞고 쓸데없는 '예학'의 강조로 피지배계급에 대한 착취는 끝간 데 없었다. 썩어버린 성리학이나마 그 실천철학의 덕목은 이렇게 피지배계급 사이에서 '동학'의 모습으로 새로 태어나게 된다. 최제우의 '동학 경전'인 [동경대전]이나 [용담유사] 등의 기본 개념들은 '성리학'적 개념들이다. 수운이 말한 '개벽'은 '정의로운 경제공동체'로 새로 태어나는 새로운 세상인데, '미륵불하생'의 세계관과 맞닿는다. 신세계 개벽에 대한 믿음으로 수만 명의 농민반란군은 관군과 일본군대의 신식무기 앞에서도 굴하지 않고 주문을 외워댔고 당당하게 쓰러져 갔다. 
주자 성리학의 기초가 된 주돈이의 [태극도설]이나 소옹의 [선천역학]에서 '태극'은 동학에서는 결국 하나로 통하는 '무극'이고, '선천'과 '후천'의 구분은 결국 '개벽(開闢)'이다. 도올에 의하면 최제우는 '선천'이나 '후천'이라는 말은 한 적 없고 '개벽'만을 주장했다. 따라서 '선천'이냐 '후천'이냐는 애초 '5만년' 전 '천지개벽' 후 19세기 '다시 개벽'의 '이전(선천)'이냐 '이후(후천)'이냐 하는 의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동학의 깨달음으로 이제 '다시 개벽'하는 실천만이 중요한 것이다.
조선 말 동학농민군이 외세와 썩은 왕조의 총포 앞에서 외우며 죽어간 이 주문이 바로 '13자 시천주주문(侍天主呪文)인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인데, 원래 최제우가 [동경대전]의 <동학론/논학문>에서 선언하고 해설한 주문은 스물한자 주문인 "지기금지 원위대강, 시천주 조화정, 영세불망 만사지(至氣今至 願爲大降, 侍天主 造化定, 永世不忘 萬事知)"다. 그 뜻은 "지극한 기운이 지금 이르러 크게 내리도록 비나이다. 한울님(천주)을 모셔 '조화'가 정해지는 것을 영세토록 잊지 아니하면 온갖 일을 알게 되나이다"이며, 사람과 만물 안에 깃든 '천주(天主)'를 모셔 대자연의 만물 창조의 큰 이치인 '조화(造化)'를 정하고 이를 잊지 않고 행하면 모든 일에 통달한다는 의미겠다. 여말선초 '성리학'의 실천철학적 '진보성'을 잇는 조선 후기 새로운 실천철학 '동학'의 '진보성'은 이러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자주적 근대화'였다.


2. '운동'으로서의 '동학'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백승종)


"'개벽'의 본질... 허황한 부귀공명을 약속하는 이상세계가 아니라, 개인의 실천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계가 만들어진다는 것이지요. '신인간(新人間;眞人)'이 땀흘려 만드는 세상이 곧 '개벽'한 세상이요, 동학이 추구하는 미륵세상이었다는 말입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2강. 사람이 하늘이다. 최제우와 최시형의 가르침', 백승종, <들녘>, 2019.


역사학자 백승종 선생은 '사상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수운 최제우와 해월 최시형의 동학 사상에서 우리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고 미래를 투영해 본다. 조선 후기 '민란의 시대' 배경을 훑어보고 수운과 해월의 사상을 정리하며 '동학운동'이 실천적으로 가능했던 농민조직을 설명한 후 이 운동의 현재적 의미를 정의하는 강의록의 제목은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2019)이다. 저자는 '동학'을 '혁명' 보다는 '운동'으로 규정하는데, 국가를 개조하고 외세를 몰아내는 '혁명'의 실패의 관점이 아닌, 지금까지도 지속되는 '운동'의 관점이다. 
그는 '동학운동'을 몇 가지 주요 키워드로 연결하고 있다. 첫째는 조선 후기의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둘째는 몰락 양반이나 유학자와 같은 계층이 유일한 자산인 '지식'을 팔아 키운 '평민지식인', 셋째는 오랜 동안 '두레'와 '품앗이', 동종'이나 '하계' 등을 토대로 한 농민사회 '비밀결사', 넷째는 이와 같은 자생적인 농민조직과 이들의 평등한 '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해 건설되는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다섯째는 만물이 하늘인 '생태주의', 여섯째는 예나 지금이나 독점이 갈수록 강화되는 세상에서 사물관계의 질적 전환을 통한 '후천개벽'으로서의 '자주적 근대화', 일곱째는 더 나은 세상을 바라는 '미륵신앙', 여덟째는 새로운 세상을 향한 '실천'으로서의 동학, 아홉번째는 '화해'와 '협동'과 '연대'의 가치, 열번째는 불평등과 억압 및 착취를 심화하는 자본주의 청산 등이다. '동학'이 '근대화'인 이유는 '자유'와 '평등' 같은 근대 시민사회적 개념을 우리식으로 공유하려 했던 실천적 노력에서 그렇다는 의미인 것이다. 여기에 우리 민중 사회의 주체적 실천이 결합하여 '자주적 근대화'가 된다. 백승종 선생에 의하면 이 '자주적 근대화'가 바로 '후천개벽(後天開闢)이요, 이상세계로서 불교의 '미륵하생신앙', 도교의 '조화선경', 유교의 '대동사회'였다. "평화와 정의, 풍요롭고 건강한 삶이 개벽된 새 세상의 특징(백승종, 같은책, '4강')"인 것이다. 


"동학농민들이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기 원했다는 점... '유무상자(有無相資)... '정의로운 경제공동체'... '공공성'을 갖추어야 하는 것... 보편타당한 기준에 부합하는 것이 바로 동아시아의 '정의'... 하늘의 뜻에 부합되는 것... '경제적 정의'를 구현하여 새로운 경제공동체를 건설하는 꿈, 이것이 동학농민운동의 진정한 목표였어요...
동학적 의미의 인간개조 또는 사회개조... '후천개벽'이라는 것이 그것입니다... 정의로운 새로운 관계가 낡은 질서를 대체하는 새로운 상황, 동학에서는 이러한 변화를 '후천개벽'으로 보았습니다."
-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3강. 갑오동학농민운동, 그 중심에 소농이 있다', 백승종.


3. '혁명'으로서의 '동학'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신정일)


최제우가 '접신'하여 '득도'한 1860년 조선 말기는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862년은 삼남 지역의 '임술민란'의 해였고, 북쪽의 유흥렴과 남쪽의 이필제 같은 '직업혁명가'들은 수많은 가명으로 전국을 돌아다니며 민란들을 조직하고 선동했을 수도 있는데, 이 '직업혁명가'들이 바로 '평민지식인'들이었다. 1894년 갑오농민전쟁의 해 5월 '전주화약' 후 농민군이 흩어졌을 때, 태인 대접주 김개남은 서울진격을 끝까지 주장하다가 "소심한 책상물림들과는 상종하지 않겠다"며 남원으로 내려갔다. 전봉준과 손화중, 손병희로 이어지는 동학농민혁명의 불꽃이 사그라지면서 '혁명'적 '동학정신'을 이어나간 것이 김개남의 집단(포)였다고 하는데, 이들이 숨어든 지리산은 이후 1~3차 지리산 의병전쟁의 주역이 되었다고 한다. 지리산 유격대의 조직적 계보를 거슬러 오르면 김개남과 동학농민군이 보인다. 민중 도보답사가 신정일 선생은 동학농민전쟁의 현장을 발로 다니며 기록한 [동학농민혁명 답사기](2019)에서 당시 "지리산을 넘어 하동, 진주까지 진출했던 김개남의 잔존세력들은... 진주 형평사운동과 고려공산당을 만든 김단야로, 민족민중운동의 중심세력으로 오늘날까지 면면히 이어져 왔다(같은책, <남원 교룡산 : 처음부터 끝까지 혁명가였던 김개남>)"고 쓴다. 
이렇게 동학의 '실천'은 우리 역사에서 '혁명'의 정신을 계승한다.


"손화중이 왕이 될 것이라거나 세상이 뒤집어질 것이라는 소문이 줄을 잇고 손화중의 집에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남접의 중심포였고 가장 많은 세력을 규합했던 손화중은 전봉준, 김개남과 함께 황룡강 싸움에서 지대한 공헌을 한다. 그러나 2차 봉기에 그는 공주로 가지 않고 광주 일대를 지켰다.
우금치 싸움이 패배로 돌아가고 태인에서 농민군의 주력부대가 해산하자 그는 재실지기였던 이봉우에게 '그 동안 내가 너에게 진 빚을 갚겠다. 나를 고발하여 큰 상을 받으라'라고 말했다고 한다. 손화중은 서울로 끌려가 재판을 받고 이듬해 전봉준과 한날한시에 처형당했다... 
어쨌거나 '비결탈취사건'은 암울했던 시대의 모순을 극복하고 '후천개벽'을 꿈꾸었던 민중들의 동학과 시대의 현실과 미륵설화를 절묘하게 조화시켜 농민전쟁의 발단이 된 것이다."
-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조선 후기 또한 중국이나 후삼국 한반도 못지 않게 농민들의 '비밀결사' 조직이 성행했을 것이다. 원나라 말기 '명교'나 '백련교', 청나라 말 '태평천국' 등은 각 시대에 맞게 각색된 '미륵불하생경'이었으며 이들이 대항이데올로기로 우뚝 서 '후천개벽' 비슷한 사상을 설파할 수 있었던 배경은 농민사회 '비밀결사'였다. 
'태평천국'의 홍수전도 거듭된 과거시험 낙방 후 우연히 성경책을 읽고 '접신'을 하고는 예수의 동생이 된 것이 흡사 열 몇살 아래인 조선의 최제우와 비슷하다. 당나라 말기 황소와 청나라 말 홍수전이 과거에 합격하는 '공정'한 사회였다면, 서자였던 최제우도 성리학 이론으로 무장하여 출사할 수 있었던 세상이었다면, 아마도 그들은 '접신' 또는 '후천개벽'을 외칠 수 없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이들과 달리 '녹두장군' 전봉준은 '평민지식인'이었다. 사형당하기 전 재판서에는 그의 직업이 '농업'으로 되어 있지만, 그는 농사를 지을 줄 몰랐고 사람들에게 글을 가르치는 떠돌이 훈장 선생님 쯤 되었단다. 동학혁명 내내 급진 과격파 김개남과 가장 큰 조직을 지녔던 손화중은 전봉준과 함께 강경파 '남접'의 접주들이었다. 최시형과 손씨들을 비롯한 충청도와 강원도의 '북접'은 '남접'과 한때 대립까지 불사하던 온건파였는데 조직을 지키기 위한 최시형의 고뇌 또한 이해 못할 바는 아니지만 그 '민란의 시대'는 다수 민중 모두가 죽을 줄 알면서도 '봉준이 형님'을 따라 지옥길을 나섰고 결국 '시천주주문'과 함께 수만 명의 민중들이 지옥의 명부에 갇혔다.


4. [정감록] 탈취사건 - [민란의 시대](이이화)


'동학'이라는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무장한 그들이기에 전투 중 위기에 빠지면 농민군은 지도자 장수에게 "언제 도술을 쓸 것이냐" 묻기도 하고 대포나 기관총 앞에서 몽둥이나 농기구만 든 채 부적을 붙이고는 13자 주문을 외웠으며 잔다르크 같이 어린 아이를 선두에서 무등 태우고는 그 아이의 지휘에 따르기도 했단다. 웃프기도 한 이 전쟁의 도발은 역시 '비기(祕記) 탈취사건'이었는데, [정감록]이었을지 [목민심서]였을지 아니면 [동경대전]의 '무극이도'나 쿵푸팬더의 빈 '용의 문서'였는지는 모르나 고창 선운사 마애불의 배꼽에서 무장 접주 손화중이 '비기'를 탈취하고도 '벽력(벼락)살'을 맞지 않았다는 설에서 시작한다. 물론 끝까지 그 '비기'의 실체는 밝혀지지 않았고 전봉준과 함께 서울로 호송되어 재판받던 손화중이 관리에게 본인을 '소인'이라 칭하는 것을 본 시종일관 당당했던 전봉준이 "내가 저런 소인배와 큰 일을 도모했으니 실패는 정해졌던 일(신정일, 같은책)"이라 한탄했다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비기'를 탈취한 손화중 장군도 동학농민전쟁에서 탁월했던 지도자였다. 그래도 역시 동학혁명의 자존심은 전봉준 장군이었는데 그는 죽는 그날까지 관리들에게 반말을 하고 뻣뻣하게 고개를 들고 죽었다고 한다. 
아무튼, '비기'의 대명사 [정감록]은 재야 역사학자 이이화 선생에 따르면 다음과 같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5. '동학' : '개벽'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최제우는 '동학'이 옳다고 판단했지만 타인에게 강요하지 않았단다. [동경대전]의 <포덕문>은 '포교'의 목적이 아니었다. 유생들이 손가락질할 때 그는 "나의 도는 당신들의 도와 다르지 않다"고 했는데 동학의 개념들 자체가 성리학의 그것이었다. 즉, '하늘의 도(천도)'는 같았으되, 이를 해석하고 실천하는 방식이 달랐다. 조선 말기의 성리학은 계급지배의 도구였고 동학은 민중적 계급투쟁의 이념이었다. 
예를 들어, '귀신(鬼神)론'의 경우, 동양의 귀신은 서양 근대의 'Ghost'가 아니라 나와 같은 인간, 즉 조상이다. 하늘로 퍼지는 '신(伸/神)'과 땅으로 돌아가는 '귀(歸/鬼)'의 뜻으로서 '귀신'은 '혼백(魂魄)'이다.'혼비백산(魂飛魄散)', 하늘로 날아올라 퍼지는 것은 '혼(신)'이요, 땅으로 흩어져 스며드는 것은 '백(귀)'이다. 동양에서 '신'이, 특히 '유일신'이 없는 이유다. 우리에게는 "천지 자체가 귀신"이다. 동학의 '천주'가 모든 사람과 만물에 깃든 이유이기도 하다.
한편으로, 19세기 당시 서양 문물의 유입과 함께 콜레라와 같은 '팬데믹' 현상으로 수없이 죽어나가던 면역력 없던 동양인들의 위기의식도 '동학' 발생의 배경이라고도 하는데, 전세계가 교류하고 코로나 팬데믹으로 여전히 쓸려나가는 현재의 '개벽'과 '동학'이 만나는 지점이 어디일까 궁금하기도 하다.

이제, 모두가 '하느님'인 세상을 향한 '철학'의 새로운 '실천' 앞에 다시 '동학(東學)'이 우뚝 서 있다. 
'개벽(開闢)'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


***

1. [동학에서 미래를 배운다], 백승종, <들녘>, 2019.
2. [동학농민혁명 답사기], 신정일, <푸른영토>, 2019.
3.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4. [동경대전-2](1861), 최제우, 김용옥 주해, <통나무>,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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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3 : 수당의 정국 이중톈 중국사 13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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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의 전공, '제2제국'
- [위진풍도] / [남조와 북조] / [수당의 정국]
https://brunch.co.kr/@beatrice1007/213


"제1제국인 진한은 441년이고 제2제국인 수당은 326년이며 제3제국인 송원은 416년, 제4제국인 명청은 543년이다. 그 밖의 369년은 분류가 불가능해 별도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
그 369년은 바로 위진남북조다."
- [수당의 정국], <1장. 수양제>, 이중톈, 2015.


2006년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의 인문강연 프로그램인 '백가강단'에서 '한나라 시대의 풍운아들'이라는 주제로 인기를 끌고는 이를 [삼국지를 품평하다(品三国)/국역:삼국지 강의/2007)]라는 책으로 펴내 '삼국지 르네상스'를 이끈 '중국 최고 인기 역사고전해설가' 이중톈(이중텐:易中天)은 2013년 5월부터 '이중톈의 중국사'를 집필하고 있단다. 순환을 의미하는 '완전한 수'인 '3'의 배수를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총 6부작에 각 부 6권의 시리즈로서 중국 '삼황오제'의 '선조'부터 등소평 시대까지 총 '36권(6부X6권)'으로 계획되었는데, 6가지 계략당 각 6가지 계책으로 구성된 '36계'가 연상된다. '6X6=36'이나 '9X9=81' 또는 손오공의 '일흔두(3X24=72)가지 도술' 따위 민간에 떠도는 숱한 '3'의 배수들은 사실 구체적 숫자가 아니라 "무한히 많다"는 뜻이다. 아무튼 방송이나 강연을 통한 '무한한' 돈벌이를 포기하고 시골에 틀어박혀 집필에 전념하는 이중톈은 '분기당 2권 출간'의 애초 목표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2018년 현재 중국에서는 20권 정도 냈다고 한다. 우리는 2021년 현재 13권 [수당의 정국]까지 번역되어 나왔다.
1947년생으로 일흔이 넘은 유명 역사학자 이중톈은 '돈벌이'는 포기했지만 추리소설을 틈틈이 읽는 것은 포기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의 특이한 '중국사' 글쓰기의 특징은 "간결하고 단순한 문체", 그리고 "추리소설과 시나리오 기법"이다. [사기], [한서], [삼국지], [진서], [당서], [자치통감] 등의 문헌이나 문물 고증을 통해 '역사서'로서 당연히도 엄밀하고 사실적인 서술을 지향하지만 역사의 순서를 설명하느라 사실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논문이 아니므로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모든 역사적 사료들을 늘어놓고 분류하지 않는다. 내가 읽기로는 일종의 '문화사'로 그 시대의 특징을 정의하려는 목표로 수렴하기 위해 '추리소설'이나 '시나리오'처럼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그러므로 독자는 둘 중 하나일 테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이미 알고 있든지, 그런 사소한 일들은 관심없고 각 시대의 특징만 파악하든지.

원래 미학자인 이중톈의 전공은 '위진남북조와 수당의 역사문화'라고 한다. 중국사는 사마천 [사기]로 방향을 잡고 진수의 [삼국지]와 증선지의 [십팔사략]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나는,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를 읽을 마음은 없었다. 다만 [삼국지 강의]로 역사 '르네상스'를 '재부흥'시켰던 그가 본인의 '전공'에 해당되는 시기의 이야기들은 과연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 시작은 [위진풍도(魏晉風度)]다. 

그는 중국의 역사시대를 진시황 통일 전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방국시대' 즉 지방국가 또는 열국의 시대와 진한부터 명청까지 통일왕조의 '제국시대'와 신해혁명 이후의 '공화국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약 2천년을 아우르는 '제국시대'는 또 다시 1~4제국으로 나뉘는데, 진나라와 한나라는 '제1제국', 수나라와 당나라는 '제2제국', 송나라와 원나라는 '제3제국', 명나라와 청나라는 '제4제국'이다. 이 중 이중톈의 전공은 '제2제국' 수-당 시대에 해당되는데, 이를 예고하는 시기가 '오호십육국'과 '위진남북조' 시대이며, 이 시대를 설명하는 문화적 풍류가 바로 '위진풍도'인 것이다.


"춘추전국의 결과로 첫 번째 제국('제1제국'), 즉 진한과 한나라 문명이 탄생했다. 위진남북조의 결과는 두 번째 제국('제2제국' 수당)과 당나라 문명의 탄생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두 문명을 비교하여 위진은 춘추에 해당하고 남북조는 전국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주나라의 착오는 제도... 한나라의 골칫거리는 문화... 그래서 춘추전국 이후에 탄생한 것은 새 제도였고, 위진남북조 이후에 탄생한 것은 새 문화였다. 한나라 문명과 비교하여 당나라 문명은 한층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췄으며 유교숭배도 유, 불, 도의 삼교합류로 바뀌었다. 물론 국가적 사상과 주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유학이었다.
이것이 바로 위진남북조의 역할이었다."
- [위진풍도], <5장. 가치관>, 이중톈, 2015.


후한 말기 '삼국지'의 난세를 거쳐 사마의 집안이 치밀한 준비를 통해 창업한 진(晉)은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정착시킨 진한 '제1제국'의 업적을 뒤집어 다시금 사마씨 왕자들에게 분봉을 하는 '봉건제'를 채택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데, 진무제 사마염의 할아버지 사마의라는 인물 자체가 '국가'나 '공공성'보다는 가문의 생존을 우선시했던 '사(士)족 집단'의 기원이었다. 이들 사마씨 왕자들은 황권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팔왕의 난'을 거쳐 이들에 기생하는 '사족'들을 낳았고 반란의 전투력은 사방의 이민족 '용병'들의 군사적 응집을 도왔으며 결국 북방의 '대기근'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4세기에 북방 유목민들이 서방의 지중해와 중앙의 '중간 지대' 및 동방의 '중원'으로 비슷한 시기에 대거 이동할 때, 동아시아의 남쪽으로 쫓기면서 '패수' 아래 강남지방에 '사족 집단'이 중심이 되는 중국의 '남조'를 이어간다. 장안과 낙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중원'으로서 북쪽은 이후로 약 한세기 넘게 흉노, 갈, 저, 강, 선비족의 '다섯 오랑캐(5호)'가 16국'(이중톈은 '18국')을 번갈아 세우다가 결국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고, 사마씨의 '서진'이 망하고 '사족'들과 달아나 자리잡은 남쪽에서는 동진-유송-남제-양-진(陳)의 단명왕조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또 한세기 이상 지속된다. 이 당시 정착화되려는 유목민족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북쪽 절반을 갱신해간 한편, 무능과 사치향락의 극치를 보여주던 강남의 '사족'들은 술과 약물, 고담준론과 시로 세월을 보내며 '위진남북조'의 문화를 형성했는데, 당대의 잘생긴 '사족' 출신 귀족 남성들은 기존의 '남성적' 영웅호걸의 이미지와는 달리 화장을 하고 '여성화'된 연약하거나 혹은 병약한 스타일로 연예인 못지 않은 유행을 선도했단다. 원래 풍체가 당당했던 제갈량이 잘생긴 미남에 하얀 피부를 지닌 것으로 묘사된 [삼국지연의]의 문학적 표현은 아마도 이런 '위진풍도'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남조의 '사족(士族)'들은 지위는 높으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실질적인 실무를 맡은 한단계 아래 '서족(庶族)'들이 실력과 신망을 쌓아 남조의 새로운 왕조를 거듭 개창하였으나 귀족적이고 사치한 강남 '사족' 중심의 '풍도'에 지배당해 결국 북쪽을 완전 통일한 '선비화된 한족' 수문제 양견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데올로기는 유교가 주가 되고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받아들이는 형태가 돼야 했다...
북주 무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틀리지는 않았다. 사실 (북위) 태무제가 도교를 신봉한 것도, 양 무제가 불문에 귀의한 것도, 그리고 북주 무제가 유학을 추종한 것도 모두 미래에 삼교(유-불-도)가 합류해 장기간 공존하게 되는 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 세 황제는 모두 열린 마음과 긴 안목을 가진 채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괘념치 않았고 심지어 민족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했다. 그래서 수문제 양견이 다시 한족 성으로 돌아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을 때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새 문명이 도래했다."
- [남조와 북조], <5장. 새 문명의 재창조>, 이중톈, 2015.


이중톈의 표현에 의하면 '기생충'이나 '암세포'와 같은 '사족'들의 '풍류'가 만연하던 '위진풍도'의 "혼란과 분열은 새로운 조합을 의미할 뿐이며 그 조합의 전제는 융합([위진풍도], <5장>)"이라면서, 이중톈은 '남북조'로의 필연적 이행을 말한다. '5호16국'의 '혼란'과 '분열'은 사실상 중국 문명의 업그레이드 전환기였고 통일제국을 향한 남조와 북조의 끊임없는 노력은 기왕에 '중원'에 국한되어 있던 '제1제국'의 시야를 넓혔다. 강남 지역은 '삼국지' 손권의 오나라의 중흥에도 불구하고 중원에서 보기에 '오랑캐'의 땅이었으나 '위진풍도' 덕분에 비로소 '문화'적으로 개화되었고 '오랑캐'에게 빼앗긴 북방의 '중원'은 열심히 '혼혈(hybrid)'을 거듭했다. 이중톈은 "남북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 문화도 없다([남조와 북조])"고 말한다. 북조는 결국 선비족의 승리로 탁발(척발)씨의 '북위'가 통일했다. 태무제 탁발도는 도교를 기반으로 유교와 불교를 융합하기도 했으나 불교를 중시하던 태자 탁발황 세력과 대립하며 불교를 금지하는 '대법난(446년)'을 일으키기도 했고, 남조 양나라의 무제는 불자를 자처하며 공자와 노자(신선)를 부처의 제자로 만들려고 했다지만 결국 이데올로기적으로 유-불-도의 '삼교' 융합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적극 시도된 것 또한 '위진풍도'라 할 수 있겠다. 

탁발씨의 북위가 선비화된 한족 고씨의 동위와 한족화된 선비족 우문씨의 서위로 또 다시 분열되었을 때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이어졌고 문명화가 다소 늦었던 북주의 무제가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를 융합한 지배이데올로기 정립과 국가제도의 혁신을 통해 북방 재통일의 기반을 다지다가 죽고, 그의 사위인 선비족 이름 '보륙가 나라연'이 자신의 한족 성을 되찾아 '양견'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선비족을 위시한 '5호'와 한족의 '혼혈'이 한창 때였을 것이다. 북주-북제-남진의 '삼국시대'를 잠시 거쳐 수문제 양견이 중국을 다시 통일했을 때 중국은 '제1제국' 당시의 중국이 아니었다. 연간 등강수량 800밀리미터 기준선인 회하와 진령의 '북위 33도'는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선이라는데, 이를 넘어 남진을 멸한 수나라의 대원수는 수문제의 둘째아들인 스무살 양광, 즉 훗날의 수양제였다. 그는 남조 진나라 마지막 황제 진숙보를 폐하면서 혼폭의 군주라는 뜻의 '양(煬)'이라 불렀다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이 후대인 당나라에 의해 '수 양(煬)제'로 불리게 된다.

대운하를 파고 무리한 순행과 원정을 일삼으며 고구려를 계속 점령하려다가 멸망한 수나라는 수문제 양견의 '개황'의 치세에는 중국 역사 그 어느 때보다 부유했고 빠르게 전란을 딛고 안정을 찾았다. 수양제는 아버지를 죽이고 태자 자리를 빼앗아 황제가 되었다는 의혹을 계속 받았고 사치와 향락, 무리한 정벌로 수나라를 망하게 한 '혼폭'한 군주 '양(煬)'이 되었으나 기실 당나라 '정관의 치'를 열었다는 당태종은 그의 판박이였다. 그들 둘은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되었고 고구려 정벌을 무리하게 시도한 점이 똑같았다. 그들의 쿠데타는 기존 황태자의 기반이었던 '관농(관중-농서) 세력'에 반발한 새로운 세력의 정치 노선투쟁이었다. 남진을 멸하고 강남 출신 배우자를 얻은 수양제는 기존 장안 일대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과 투쟁하여 승리했고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완성하여 중국 대륙내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속된 원정으로 수도인 장안 세력의 지지가 취약했던 당태종 이세민은 역시 기득권 세력인 황태자 이건성을 비롯한 형제들을 죽이고는 지역적 '패도(霸道)'가 아닌 전국적 '왕도(王道)'를 실현한다면서 위징과 함께 '정관의 치'를 연다. 그리고는 서쪽의 돌궐을 장악하여 '천카간'의 명예를 얻고 당나라의 문화적 영토를 서역까지 넓히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물론 동쪽의 고구려 원정은 수나라처럼 실패하였으나 결국 후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대한 '원한'은 풀고야 말지만 이 '제국'은 지역적 영토를 넓히자 마자 얼마 안 가 '안사(안록산-사사명)의 난'이라는 내분으로 무너지는 역사의 경향적 '법칙'을 재차 증명한다.
수양제 양광이 없었다면 당태종 이세민도 없었다는 게 이중톈의 시각이다. 다만, 수양제와 당태종의 결정적 차이는 양제에게 민중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반면, 수나라 말기 '반란'으로 일어섰고 현무문의 '쿠데타'로 등극한 당태종은 민중들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하는 '인의'의 '왕도'를 지향했던 점이었다. 


"당나라인... 그들은 우세했고 우월했지만 우월감은 없었다... 문명은 사유재산이 아니고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실로 '대국의 풍모'였다.
이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농업제국은 원래 확장성이 있었으며 수당은 또 혼혈왕조인데다 중국 문화의 우세까지 겸하여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세계성을 띤 문명을 창조해낸 3대 원인이었다. 비잔틴, 아랍과 함께 3대 제국이 되기에 충분했다."
- [수당의 정국], <5장. 세계 제국>, 이중톈, 2015.


이중톈의 '제2제국' 수-당 시대는 '위진풍도'에 기반한 혼혈과 융합, 남북조의 확장과 소통에 기반한 '세계 제국'이었다. 
당나라는 사방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당대의 '대국'으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융합되고 발전한 문화가 각 지역으로 이륙하는 "문화의 항공모함"([수당의 정국], <5장>)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70대의 역사학자로서 '마지막 사명'과 같은 중국사 집필의 목적지가 '하나의 중국'이겠거니 생각하면 뭐 특별하달 것은 없겠다. 다만, 수당 시대의 '3성6부'의 중앙집권 정부 제도의 정착과 찰거와 천거 등 오래된 관리 선발제도와 차별된 과거 시험 도입 등의 제도적 역할, '한족 우위'의 신화를 벗어나 '혼혈(hybrid)'을 거쳐서야 한단계 문명이 진보할 수 있었다는 계보학적 관점은 수긍할 만 하다. 서방의 고대 로마나 당나라, 현대의 미국과 같은 '세계 제국'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는데, 이중톈은 중국 한나라와 동서로마, 당나라와 비잔틴 동로마 등을 지속적으로 비교하며 나름의 세계사적 '역사법칙'을 증명하기도 한다. 

중국인 이중톈의 '중국사' 중 '제2제국' 이전 이야기들은 별로 읽고 싶지는 않다. 그의 문체가 재미있기는 해도 굳이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 선상에서 펼쳐질 그들 선조들 얘기를 읽을 필요성은 못 느낀다. 또한 "황제 아래 만민이 평등"하므로 "제국에는 계급이 없다"는 식의 이중톈의 관점은 인류 역사에서 '제국'이 가장 합리적인 체제였다는 식으로 보는 유발 하라리 같은 시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왕이 없는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가장 선호하는 나는 '제국'의 긍정성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이중톈의 '제2제국'을 들여다 보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간결한 문체와 추리소설 기법"으로 재생되는 역사는 그 자체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

1.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2.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3.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4.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톈,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 [빛나는 세계 제국 : 수당시대], 게가사와 야스노리(氣賀澤保規), 2014.
: 이중톈이 [수당의 정국]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대 동아시아 석각문물연구소장 게가사와 야스노리의 위 책은 국내 번역되면 읽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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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 중국사 12 : 남조와 북조 이중톈 중국사 12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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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중톈의 전공, '제2제국'
- [위진풍도] / [남조와 북조] / [수당의 정국]
https://brunch.co.kr/@beatrice1007/213


"제1제국인 진한은 441년이고 제2제국인 수당은 326년이며 제3제국인 송원은 416년, 제4제국인 명청은 543년이다. 그 밖의 369년은 분류가 불가능해 별도로 취급할 수 밖에 없다.
그 369년은 바로 위진남북조다."
- [수당의 정국], <1장. 수양제>, 이중톈, 2015.


2006년 중국중앙텔레비전방송(CCTV)의 인문강연 프로그램인 '백가강단'에서 '한나라 시대의 풍운아들'이라는 주제로 인기를 끌고는 이를 [삼국지를 품평하다(品三国)/국역:삼국지 강의/2007)]라는 책으로 펴내 '삼국지 르네상스'를 이끈 '중국 최고 인기 역사고전해설가' 이중톈(이중텐:易中天)은 2013년 5월부터 '이중톈의 중국사'를 집필하고 있단다. 순환을 의미하는 '완전한 수'인 '3'의 배수를 좋아하는 중국인답게 총 6부작에 각 부 6권의 시리즈로서 중국 '삼황오제'의 '선조'부터 등소평 시대까지 총 '36권(6부X6권)'으로 계획되었는데, 6가지 계략당 각 6가지 계책으로 구성된 '36계'가 연상된다. '6X6=36'이나 '9X9=81' 또는 손오공의 '일흔두(3X24=72)가지 도술' 따위 민간에 떠도는 숱한 '3'의 배수들은 사실 구체적 숫자가 아니라 "무한히 많다"는 뜻이다. 아무튼 방송이나 강연을 통한 '무한한' 돈벌이를 포기하고 시골에 틀어박혀 집필에 전념하는 이중톈은 '분기당 2권 출간'의 애초 목표에는 미치지 못한다지만 2018년 현재 중국에서는 20권 정도 냈다고 한다. 우리는 2021년 현재 13권 [수당의 정국]까지 번역되어 나왔다.
1947년생으로 일흔이 넘은 유명 역사학자 이중톈은 '돈벌이'는 포기했지만 추리소설을 틈틈이 읽는 것은 포기하지 못한다고 하는데, 그의 특이한 '중국사' 글쓰기의 특징은 "간결하고 단순한 문체", 그리고 "추리소설과 시나리오 기법"이다. [사기], [한서], [삼국지], [진서], [당서], [자치통감] 등의 문헌이나 문물 고증을 통해 '역사서'로서 당연히도 엄밀하고 사실적인 서술을 지향하지만 역사의 순서를 설명하느라 사실들을 일일이 열거하지 않는다. 논문이 아니므로 모든 것을 담기 위해 모든 역사적 사료들을 늘어놓고 분류하지 않는다. 내가 읽기로는 일종의 '문화사'로 그 시대의 특징을 정의하려는 목표로 수렴하기 위해 '추리소설'이나 '시나리오'처럼 이야기를 전개해 간다. 그러므로 독자는 둘 중 하나일 테다. 역사적 사실들에 대해 구구절절한 설명 없이도 이미 알고 있든지, 그런 사소한 일들은 관심없고 각 시대의 특징만 파악하든지.

원래 미학자인 이중톈의 전공은 '위진남북조와 수당의 역사문화'라고 한다. 중국사는 사마천 [사기]로 방향을 잡고 진수의 [삼국지]와 증선지의 [십팔사략]으로 충분하다 생각하는 나는, 이중톈의 중국사 시리즈를 읽을 마음은 없었다. 다만 [삼국지 강의]로 역사 '르네상스'를 '재부흥'시켰던 그가 본인의 '전공'에 해당되는 시기의 이야기들은 과연 어떻게 서술하고 있을지 궁금했다. 
그 시작은 [위진풍도(魏晉風度)]다. 

그는 중국의 역사시대를 진시황 통일 전 춘추전국 시대까지의 '방국시대' 즉 지방국가 또는 열국의 시대와 진한부터 명청까지 통일왕조의 '제국시대'와 신해혁명 이후의 '공화국시대'로 크게 구분한다. 약 2천년을 아우르는 '제국시대'는 또 다시 1~4제국으로 나뉘는데, 진나라와 한나라는 '제1제국', 수나라와 당나라는 '제2제국', 송나라와 원나라는 '제3제국', 명나라와 청나라는 '제4제국'이다. 이 중 이중톈의 전공은 '제2제국' 수-당 시대에 해당되는데, 이를 예고하는 시기가 '오호십육국'과 '위진남북조' 시대이며, 이 시대를 설명하는 문화적 풍류가 바로 '위진풍도'인 것이다.


"춘추전국의 결과로 첫 번째 제국('제1제국'), 즉 진한과 한나라 문명이 탄생했다. 위진남북조의 결과는 두 번째 제국('제2제국' 수당)과 당나라 문명의 탄생이었다. 그래서 역사가들은 두 문명을 비교하여 위진은 춘추에 해당하고 남북조는 전국에 해당한다고 말한다... 
주나라의 착오는 제도... 한나라의 골칫거리는 문화... 그래서 춘추전국 이후에 탄생한 것은 새 제도였고, 위진남북조 이후에 탄생한 것은 새 문화였다. 한나라 문명과 비교하여 당나라 문명은 한층 개방성과 포용성을 갖췄으며 유교숭배도 유, 불, 도의 삼교합류로 바뀌었다. 물론 국가적 사상과 주류 이데올로기는 여전히 유학이었다.
이것이 바로 위진남북조의 역할이었다."
- [위진풍도], <5장. 가치관>, 이중톈, 2015.


후한 말기 '삼국지'의 난세를 거쳐 사마의 집안이 치밀한 준비를 통해 창업한 진(晉)은 중앙집권의 군현제를 정착시킨 진한 '제1제국'의 업적을 뒤집어 다시금 사마씨 왕자들에게 분봉을 하는 '봉건제'를 채택함으로써 역사의 수레바퀴를 뒤로 돌리는데, 진무제 사마염의 할아버지 사마의라는 인물 자체가 '국가'나 '공공성'보다는 가문의 생존을 우선시했던 '사(士)족 집단'의 기원이었다. 이들 사마씨 왕자들은 황권을 두고 서로 죽고 죽이는 '팔왕의 난'을 거쳐 이들에 기생하는 '사족'들을 낳았고 반란의 전투력은 사방의 이민족 '용병'들의 군사적 응집을 도왔으며 결국 북방의 '대기근'이 원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되는 4세기에 북방 유목민들이 서방의 지중해와 중앙의 '중간 지대' 및 동방의 '중원'으로 비슷한 시기에 대거 이동할 때, 동아시아의 남쪽으로 쫓기면서 '패수' 아래 강남지방에 '사족 집단'이 중심이 되는 중국의 '남조'를 이어간다. 장안과 낙양 등을 중심으로 하는 전통적 '중원'으로서 북쪽은 이후로 약 한세기 넘게 흉노, 갈, 저, 강, 선비족의 '다섯 오랑캐(5호)'가 16국'(이중톈은 '18국')을 번갈아 세우다가 결국 선비족의 '북위'가 통일하고, 사마씨의 '서진'이 망하고 '사족'들과 달아나 자리잡은 남쪽에서는 동진-유송-남제-양-진(陳)의 단명왕조와 대립하는 '남북조' 시대가 또 한세기 이상 지속된다. 이 당시 정착화되려는 유목민족은 끊임없는 혁신을 통해 북쪽 절반을 갱신해간 한편, 무능과 사치향락의 극치를 보여주던 강남의 '사족'들은 술과 약물, 고담준론과 시로 세월을 보내며 '위진남북조'의 문화를 형성했는데, 당대의 잘생긴 '사족' 출신 귀족 남성들은 기존의 '남성적' 영웅호걸의 이미지와는 달리 화장을 하고 '여성화'된 연약하거나 혹은 병약한 스타일로 연예인 못지 않은 유행을 선도했단다. 원래 풍체가 당당했던 제갈량이 잘생긴 미남에 하얀 피부를 지닌 것으로 묘사된 [삼국지연의]의 문학적 표현은 아마도 이런 '위진풍도'의 영향이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남조의 '사족(士族)'들은 지위는 높으나 할 수 있는 일은 없었고 실질적인 실무를 맡은 한단계 아래 '서족(庶族)'들이 실력과 신망을 쌓아 남조의 새로운 왕조를 거듭 개창하였으나 귀족적이고 사치한 강남 '사족' 중심의 '풍도'에 지배당해 결국 북쪽을 완전 통일한 '선비화된 한족' 수문제 양견에 의해 멸망하고 만다. 


"이데올로기는 유교가 주가 되고 불교와 도교를 함께 받아들이는 형태가 돼야 했다...
북주 무제는 선견지명이 있었다.
다른 이들도 틀리지는 않았다. 사실 (북위) 태무제가 도교를 신봉한 것도, 양 무제가 불문에 귀의한 것도, 그리고 북주 무제가 유학을 추종한 것도 모두 미래에 삼교(유-불-도)가 합류해 장기간 공존하게 되는 것에 대한 준비였다. 그 세 황제는 모두 열린 마음과 긴 안목을 가진 채 자신이 어느 민족에 속하는지 괘념치 않았고 심지어 민족의 이익에 위배되는 일도 서슴지 않고 행했다. 그래서 수문제 양견이 다시 한족 성으로 돌아와 불교를 믿기 시작했을 때 더 개방적이고 수용적인 새 문명이 도래했다."
- [남조와 북조], <5장. 새 문명의 재창조>, 이중톈, 2015.


이중톈의 표현에 의하면 '기생충'이나 '암세포'와 같은 '사족'들의 '풍류'가 만연하던 '위진풍도'의 "혼란과 분열은 새로운 조합을 의미할 뿐이며 그 조합의 전제는 융합([위진풍도], <5장>)"이라면서, 이중톈은 '남북조'로의 필연적 이행을 말한다. '5호16국'의 '혼란'과 '분열'은 사실상 중국 문명의 업그레이드 전환기였고 통일제국을 향한 남조와 북조의 끊임없는 노력은 기왕에 '중원'에 국한되어 있던 '제1제국'의 시야를 넓혔다. 강남 지역은 '삼국지' 손권의 오나라의 중흥에도 불구하고 중원에서 보기에 '오랑캐'의 땅이었으나 '위진풍도' 덕분에 비로소 '문화'적으로 개화되었고 '오랑캐'에게 빼앗긴 북방의 '중원'은 열심히 '혼혈(hybrid)'을 거듭했다. 이중톈은 "남북조가 없었다면 지금의 중국 문화도 없다([남조와 북조])"고 말한다. 북조는 결국 선비족의 승리로 탁발(척발)씨의 '북위'가 통일했다. 태무제 탁발도는 도교를 기반으로 유교와 불교를 융합하기도 했으나 불교를 중시하던 태자 탁발황 세력과 대립하며 불교를 금지하는 '대법난(446년)'을 일으키기도 했고, 남조 양나라의 무제는 불자를 자처하며 공자와 노자(신선)를 부처의 제자로 만들려고 했다지만 결국 이데올로기적으로 유-불-도의 '삼교' 융합이 국가 이데올로기로 적극 시도된 것 또한 '위진풍도'라 할 수 있겠다. 

탁발씨의 북위가 선비화된 한족 고씨의 동위와 한족화된 선비족 우문씨의 서위로 또 다시 분열되었을 때 동위는 북제로, 서위는 북주로 이어졌고 문명화가 다소 늦었던 북주의 무제가 유교를 중심으로 불교와 도교를 융합한 지배이데올로기 정립과 국가제도의 혁신을 통해 북방 재통일의 기반을 다지다가 죽고, 그의 사위인 선비족 이름 '보륙가 나라연'이 자신의 한족 성을 되찾아 '양견'이 되었을 때는 이미 선비족을 위시한 '5호'와 한족의 '혼혈'이 한창 때였을 것이다. 북주-북제-남진의 '삼국시대'를 잠시 거쳐 수문제 양견이 중국을 다시 통일했을 때 중국은 '제1제국' 당시의 중국이 아니었다. 연간 등강수량 800밀리미터 기준선인 회하와 진령의 '북위 33도'는 중국의 남북을 가르는 선이라는데, 이를 넘어 남진을 멸한 수나라의 대원수는 수문제의 둘째아들인 스무살 양광, 즉 훗날의 수양제였다. 그는 남조 진나라 마지막 황제 진숙보를 폐하면서 혼폭의 군주라는 뜻의 '양(煬)'이라 불렀다는데 역설적이게도 그 자신이 후대인 당나라에 의해 '수 양(煬)제'로 불리게 된다.

대운하를 파고 무리한 순행과 원정을 일삼으며 고구려를 계속 점령하려다가 멸망한 수나라는 수문제 양견의 '개황'의 치세에는 중국 역사 그 어느 때보다 부유했고 빠르게 전란을 딛고 안정을 찾았다. 수양제는 아버지를 죽이고 태자 자리를 빼앗아 황제가 되었다는 의혹을 계속 받았고 사치와 향락, 무리한 정벌로 수나라를 망하게 한 '혼폭'한 군주 '양(煬)'이 되었으나 기실 당나라 '정관의 치'를 열었다는 당태종은 그의 판박이였다. 그들 둘은 '쿠데타'를 통해 황제가 되었고 고구려 정벌을 무리하게 시도한 점이 똑같았다. 그들의 쿠데타는 기존 황태자의 기반이었던 '관농(관중-농서) 세력'에 반발한 새로운 세력의 정치 노선투쟁이었다. 남진을 멸하고 강남 출신 배우자를 얻은 수양제는 기존 장안 일대를 중심으로 기득권을 누리던 세력과 투쟁하여 승리했고 남북을 잇는 대운하를 완성하여 중국 대륙내 문화교류가 더욱 활발해지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지속된 원정으로 수도인 장안 세력의 지지가 취약했던 당태종 이세민은 역시 기득권 세력인 황태자 이건성을 비롯한 형제들을 죽이고는 지역적 '패도(霸道)'가 아닌 전국적 '왕도(王道)'를 실현한다면서 위징과 함께 '정관의 치'를 연다. 그리고는 서쪽의 돌궐을 장악하여 '천카간'의 명예를 얻고 당나라의 문화적 영토를 서역까지 넓히면서 '실크로드'를 장악했다. 물론 동쪽의 고구려 원정은 수나라처럼 실패하였으나 결국 후대에 이르러 고구려에 대한 '원한'은 풀고야 말지만 이 '제국'은 지역적 영토를 넓히자 마자 얼마 안 가 '안사(안록산-사사명)의 난'이라는 내분으로 무너지는 역사의 경향적 '법칙'을 재차 증명한다.
수양제 양광이 없었다면 당태종 이세민도 없었다는 게 이중톈의 시각이다. 다만, 수양제와 당태종의 결정적 차이는 양제에게 민중들은 안중에도 없었던 반면, 수나라 말기 '반란'으로 일어섰고 현무문의 '쿠데타'로 등극한 당태종은 민중들의 눈치를 보는 척이라도 하는 '인의'의 '왕도'를 지향했던 점이었다. 


"당나라인... 그들은 우세했고 우월했지만 우월감은 없었다... 문명은 사유재산이 아니고 천하의 모든 사람에게 속한다고 믿었다.
그것은 실로 '대국의 풍모'였다.
이제 한 가지 결론을 내릴 수 있게 되었다. 농업제국은 원래 확장성이 있었으며 수당은 또 혼혈왕조인데다 중국 문화의 우세까지 겸하여 개방적이고 포용적이었다. 이것이 바로 그들이 세계성을 띤 문명을 창조해낸 3대 원인이었다. 비잔틴, 아랍과 함께 3대 제국이 되기에 충분했다."
- [수당의 정국], <5장. 세계 제국>, 이중톈, 2015.


이중톈의 '제2제국' 수-당 시대는 '위진풍도'에 기반한 혼혈과 융합, 남북조의 확장과 소통에 기반한 '세계 제국'이었다. 
당나라는 사방을 아우르고 포용하는 당대의 '대국'으로서 이곳을 중심으로 융합되고 발전한 문화가 각 지역으로 이륙하는 "문화의 항공모함"([수당의 정국], <5장>)이라는 표현까지 쓴다.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70대의 역사학자로서 '마지막 사명'과 같은 중국사 집필의 목적지가 '하나의 중국'이겠거니 생각하면 뭐 특별하달 것은 없겠다. 다만, 수당 시대의 '3성6부'의 중앙집권 정부 제도의 정착과 찰거와 천거 등 오래된 관리 선발제도와 차별된 과거 시험 도입 등의 제도적 역할, '한족 우위'의 신화를 벗어나 '혼혈(hybrid)'을 거쳐서야 한단계 문명이 진보할 수 있었다는 계보학적 관점은 수긍할 만 하다. 서방의 고대 로마나 당나라, 현대의 미국과 같은 '세계 제국'의 공통점일 수도 있겠는데, 이중톈은 중국 한나라와 동서로마, 당나라와 비잔틴 동로마 등을 지속적으로 비교하며 나름의 세계사적 '역사법칙'을 증명하기도 한다. 

중국인 이중톈의 '중국사' 중 '제2제국' 이전 이야기들은 별로 읽고 싶지는 않다. 그의 문체가 재미있기는 해도 굳이 중국 '일대일로(一帶一路)' 선상에서 펼쳐질 그들 선조들 얘기를 읽을 필요성은 못 느낀다. 또한 "황제 아래 만민이 평등"하므로 "제국에는 계급이 없다"는 식의 이중톈의 관점은 인류 역사에서 '제국'이 가장 합리적인 체제였다는 식으로 보는 유발 하라리 같은 시각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왕이 없는 '공화국'의 정치체제를 가장 선호하는 나는 '제국'의 긍정성에 동의하지는 않지만 그렇다 하여 이중톈의 '제2제국'을 들여다 보는데 방해가 되지는 않는다.

"간결한 문체와 추리소설 기법"으로 재생되는 역사는 그 자체로 재미가 있기 때문이다.


***

1.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2.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3.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4. [삼국지강의(品三国)](2006), 이중톈, 김성배/양휘웅 옮김, <김영사>, 2007.

* [빛나는 세계 제국 : 수당시대], 게가사와 야스노리(氣賀澤保規), 2014.
: 이중톈이 [수당의 정국]에서 자주 인용하고 있는 일본 메이지대 동아시아 석각문물연구소장 게가사와 야스노리의 위 책은 국내 번역되면 읽어볼 예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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