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 한 잔 술에 담긴 인류 역사 이야기
미야자키 마사카츠 지음, 정세환 옮김 / 탐나는책 / 2020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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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술 : '접신(接神)'의 역사
-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2007), 미야자키 마사카츠, 정세환 옮김, <탐나는책>, 2020.


"이슬람 세계에서 동방의 인도, 동남아시아, 동아시아로 이어지는 바닷길을 따라 증류기 '알렘빅'과 증류 기술이 전해졌다. 서아시아의 '아락'에서 일본의 '소주'에 이르는 길고 긴 여행의 시작이다... 먼저 인도에 '알렘빅'이 전해져 증류주가 만들어졌다. 오늘날 인도에는 쌀, 당밀, 야자를 발효시킨 후 단식 증류기로 두 번에서 세 번 증류하는 '아락'이라는 증류주가 있다... 이슬람과 인도의 교역이 탄생시킨 '아락'은 두 문화가 융합한 성과로 볼 수 있다. 이집트의 술 '아라키', 터키의 술 '라키', 리비아의 술 '락비' 등도 '아락'에 포함시키는 경우가 있다. 말하자면 '아락'은 이슬람 상인의 넓은 상권이 만들고 키운 술인 것이다.
...
원의 황제 '칸(가한)'을 위해 쓴 요리책 [음선정요]는 증류한 소주를 '아라길주'라고 적었다. '아라길'은 좋은 술을 증발시켜 수분을 제거한 찌꺼기를 뜻하는데, 동남아시아로부터 전해진 '소주'라는 뜻도 있다. '아라길'이라는 말에서 '알렘빅'을 연상하는 것이 어렵지 않기 때문이다. 유럽에서는 증류기를 '알렘빅'이라고 불렀는데, 아시아에서는 증류주 자체를 '아라길'이라고 부른 듯 하다."
-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 <3장. 이슬람 세계에서 동서로 전해진 증류주>, 미야자키 마사카츠, 2007.


지금 생각해도 이십대에 술마신 기억이 사뭇 아찔할 때가 있다. 차비는 커녕 술값도 없어 학생증 맡기고 외상술에 외박을 일삼았고, 장마철에는 빗속에서 엄동설한에도 한파 속에서 음주 풍찬노숙을 하다가 자칫 골로 갈 뻔한 적이 돌아보면 여러 번이었다. 그 때마다 아마도 '신(神)'의 덕으로 여태 살아남았을 게다.
인류가 신을 만나 일체가 된 '접신(接神)'의 역사는 바로 '술'의 역사다.


일본의 역사가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어느날 우연히 '바'에서 술을 마시다가 '술'을 매개로 세계사를 써볼 생각을 했단다. '바텐더(Bar-tender)'는 미국의 서부개척시대 술을 훔쳐먹지 못하게 '바(bar)'를 설치하고 술통들을 '지키던 사람(tender)'에서 유래하는데, 지금은 와인을 설명하는 '소믈리에(식품운반업자)' 못지 않게 각종 술의 특성을 숙지하고 이들을 혼합하는 칵테일 전문가를 뜻하는 단어가 되었다. 세계사 전문가인 미야자키 마사카츠는 술 전문가인 단골 바텐더를 통해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2007)라는 책으로 세상 모든 술의 흐름에 따라 세계사의 단편들을 보여준다.


술은 크게 '발효주', '증류주', '혼성주'로 나뉜다.

'발효주'는 고대로부터 벌꿀을 자연발효시킨 봉밀주 '미드', 지중해 온대지방의 포도가 자연발화한 포도주 '와인', 아메리카 옥수수술 '치차' 등이 그 시초인데, 메소포타미아의 보리로 만든 '액체빵' 맥주는 수천년 전에는 발효효소가 없어 보리빵을 사람이 씹어서 만들었다고 한다. 동시대로 추정되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도 옥수수를 신성한 처녀인 '아크라'가 씹어서 옥수수술 '치차'를 만들었다고 하니 타액에 발효효과가 있다는 것을 지구의 양 극단에서도 알았다는 것이 신기하다. 가히 역사의 '양자 역학'이다. 한편으로 침범벅인 고대의 양조주를 거리낌없이 마신 것을 보면 역시 '접신'의 힘이 무섭기도 하다. 이후 천연발효주인 와인 이외에도 양조주는 쌀/보리와 당밀(사탕수수 찌꺼기), 고구마나 감자 등의 곡식에 누룩 같은 발효효소를 가미하게 되면서 서양의 맥주와 동양의 황주, 청주, 막걸리 등의 모습이 된다. 

다음으로 '증류주'는 고대 이슬람의 연금술사들이 싼 금속으로부터 비싼 금은을 추출하기 위해 발명한 '증류기'로부터 유래한다. 물과 알코올의 끓는 온도가 다른 점에 착안하여 발효주를 끓여 먼저 수증기가 되는 알코올 성분을 다시 액화시키는 방식으로 증류기에 '땀'처럼 맺힌 것을 보고 아랍인들은 이 증류기를 '알렘빅(Alembic:땀)'이라 불렀단다. 증류주의 발견은 아마도 동아시아 도교의 '신선술'과 서아시아 이슬람의 '연금술'의 문명적 결합의 산실일 수 있는데, 영생을 구하려던 진시황과 같은 절대권력자들의 등을 쳐먹은 신선들의 '불로장생약'과 아랍의 연금술이 만나 우연하게도 발효주를 끓여 얻은 증류주가 발견되었을 것이란다. 수당시대 서아시아 교역으로부터 이슬람 상인들의 활동으로 이러한 증류주는 동방에서 전통 발효 곡주를 증류한 '아락'과 '소주'로, 서방에서는 14세기 페스트의 공포 속에서 전통적 와인을 불꽃이 일 정도로 알코올 도수가 높게 증류한 '생명의 물' '위스키'와 '브랜디', 북방 러시아의 '보드카'와 바이킹의 '아쿠아비트(생명수)' 등의 모습으로 각지에 출현했다. 이슬람은 음주를 '악마'의 행위로 여겨 '금주'가 율법인데, 이들의 증류기 '알렘빅'이 술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는 것이 역설적이다. 이슬람공화국을 자처하는 터키는 '라키'라는 독한 증류주를 마시는데 아마도 서양의 근대화를 쫓은 증거일 지도 모른다.

마지막으로 '혼성주'는 이런 증류주에 과일이나 설탕 등 다른 요소를 가미하여 풍미를 높인 술이다. 설탕을 만들고 남은 찌꺼기인 당밀을 이용해 만든 해적들의 싸구려술 '럼주', 근대 자본주의 대항해 시대의 시초 네덜란드에서 현대의 콜라처럼 소화제로 만들었다는 '진', 미국에서 우연히 불에 탄 오크통에서 숙성된 '버번(부르봉:bourbon) 위스키' 등의 과도기를 거쳐 지금의 칵테일과 각종 혼합주로 다양하게 발전해 온 것이 '술'의 역사다.


"희석식 소주... 고구마나 감자에 화학 처리를 하여 값싼 알코올을 추출하는 기술은 1920년대 초반 화석 연료를 대체하기 위해 개발되었다. 일제도 '연료 국책' 방침에 따라 1936년부터 조선에 무수주정(無水酒精) 공장을 만들었다... 이 뒤로 '값싼 알코올'이 대량 생산되어 연료와 음료에 공용되었다. 그 덕에 알코올 도수가 높은 '소주' 값은 싸졌다. 세상에 흔하면서 신성한 존재는 없다... 소주가 '서민의 술'이 됨으로써 술의 '신성성'도 더불어 옅어졌다."
- [우리 역사는 깊다 - 1], <4월 7일 - 값싼 알코올, 대량생산 본격화>, 전우용, 2015.


술이 대중화된 역사는 소수만이 독점하던 '접신'의 대중화와 맥을 같이 한다. 권력자들은 이러한 술에 세금을 부과하여 통제하려 했지만, 밀주를 포함하여 술을 절대로 끊을 수 없었던 인류는 한편으로 '접신'을 통해 신의 권위에 끊임없이 도전해 왔다. 

중국의 '불로장생약' 신선술과 이슬람의 연금술이 결합하여 우연히 발견된 '증류주'는 동양에서는 대표적으로 '소주(燒酒)'가 된다.
역사학자 전우용에 의하면 고려 시대 몽골을 통해 들어온 증류주인 '소주'는 우리의 전통적 주조 방식으로 이어져 왔고 조선 후기까지 각 지역의 '어지간히 살 만한 집'들은 단식 증류기인 '조선식 고리'를 갖추고는 나름의 증류주인 '소주' 제조법을 종갓집 며느리를 통해 전수해 왔다고 한다. '소주'는 원래 동아시아 조선의 '고급술'이었던 것이다. '소주'를 마실 수 없었던 다수 민중들은 '막걸리'를 마셨다. 그러나 일제는 조선식 소주의 '신맛'이 '유치한 제조방법'에 있다면서 일본식 주조방식으로 대체함으로써 우리 전통의 소주들을 말살했다. 술 또한 일제의 '근대화' 이식의 희생물이었다. 한편으로 '술'과 '주세'는 전통적으로 국가행정의 중요 부문이었고 국가권력은 이 '접신'의 매개물을 '국민건강'의 이름으로 통제하고자 했다. '신의 대리인'에서 유래한 국가권력 이데올로기는 다수의 '접신'을 통제함으로써 가급적 다수 민중들을 신으로부터 분리시켜야 했던 것이다.

일제 강점기 억압의 최고조에 달했던 1930년대 중반 '총력전' 시대에는 조선의 소나무 껍질까지도 전쟁연료로 벗겨가던 시기였다. 화석연료가 부족하여 대체연료로서 '무수주정'은 고구마와 감자와 같은 구황작물에서 순수 에탄올을 추출하는 작업이었는데, 이 과정에서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원료를 희석시켜 만든 '희석식 소주'가 등장하면서 기존의 '고급술'이었던 전통 '소주'들을 아예 대체하였다. 어차피 일제의 '주조법 근대화'로 우리의 '안동소주', '평양소주' 등의 지역 소주는 근본을 잃었던 터였다. 알코올 도수가 보드카나 고량주처럼 40도를 넘던 전통적 '고급 소주'는 도수를 낮출 수 밖에 없는 화학적 희석식 '인공 소주'에게 자리를 물려주면서 급기야 도시화와 공업화가 급격히 추진되던 1960년대 '국가독점자본주의' 체제에 이르면 이 인공적 '희석식 소주'가 막걸리를 대신하여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다수 주종이 된다. 평양의 '어복장국'과 서울의 '설렁탕', 전주의 콩나물 '탁백이국'과 함께 나오던 '탁배기(막걸리)'가 서서히 '희석식 소주'로 대체된 것이다.


"소주회사의 통합 과정은 또 다른 측면에서 증류식 소주, 혼합식 소주, 희석식 소주 등으로 나누어져 있던 소주를 '희석식 소주'로 단일화시키는 역할도 했다. '희석식 소주'는 고구마나 타피오카와 같은 곡물을 발효시켜 나온 알코올을 분해해 정제한 주정에 물과 향료를 희석해 만든 술이다. 주정은 그냥 마시면 치명적일 정도로 독하기 때문에 물을 섞어서 써야 한다. 이 같은 주정은 결코 전래의 증류 방식을 온전히 따라 만든 것이 아니다. 밑술인 양조주를 만들지 않고 발효균을 원료에 넣어서 기계에서 연속으로 증류시켜 만든다. 그렇기에 발효주와 같은 독특한 향기가 주정에서는 나지 않는다."
- [식탁 위의 한국사], <5-3. 식품공업의 성장과 뒤안길>, 주영하, 2013.


음식인문학자 주영하는 역시 음식을 중심으로 돌아본 한국사를 통해 '식품공업화'를 통해 사라지는 전통적인 '간장'과 '술' 등의 역사도 언급한다. 1970년대 국가와 독점자본이 결탁한 '국가독점자본주의'는 술공장 역시 통폐합하는데 국가는 세금을 많이 걷어 좋고 국가권력에 가까운 '정치력' 있는 대자본가는 군소자본들을 흡수하면서 독점자본으로 성장하여 좋은 자본주의 필연적 발전단계였다. 1970년에 전국의 387개 탁주 제조창은 113개로 통합되었고, 1973년에는 전국의 334개 소주공장은 34개로 통폐합되었다. 이 과정에서 각 지역별 독점적 '소주 자본'(경기 진로, 강원 경월, 경남 무학 등)이 시장을 휘저었고, 신자유주의가 판치는 21세기에는 각지의 소주들도 전국적으로 끝이 없는 통폐합을 노정하고 있다. 21세기의 자본주의는 국가권력의 협조 없이도 이윤의 자기증식을 위해 스스로 거대독점자본을 만들어 간다. 

'국가독점자본주의' 시기에 '소주 자본'은 이익의 극대화를 위해 '국가'가 필요했다. 국가는 독점자본의 이익을 지켜주면서 세수도 늘리고 다수 민중의 직접적 '접신'을 통제했으나 예로부터 다수 민중은 동서를 막론하고 밀주를 만들어 마시며 지속적으로 '접신'을 이어왔다. 
이제 국가권력보다 훨씬 강력해진 독점자본은 더 이상 국가에 기대지 않고 스스로 거대독점권력이 되어 다수의 삶에 침투한 지 오래다. 아마도 또 하나의 '절대권력'이 되고자 하는 이 '독점적 소주 자본'은 본의 아니게 다수의 음주 속에 도사린 '저항'과 '공유'의 역사를 한 단계 더 진보시킬 수도 있겠다. 
'술'과 '음주'의 역사에서 다수의 '접신(接神)'을 매개로 '저항'과 '공유'의 도도한 역사를 낚아낼 수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기 때문이다.

중국의 불로장생 '신선술'이 절대권력 황제들을 무너뜨렸고, 영국 명예혁명으로 유입된 네덜란드 '진'이 초기 자본주의 영국을 망가뜨렸으며, 현대의 '희석식 소주'가 우리의 산업자본주의 역사에서 노동계급을 단결시켜온 것처럼 말이다.


***

1. [처음 읽는 술의 세계사](2007), 미야자키 마사카츠, 정세환 옮김, <탐나는책>, 2020.
2. [우리 역사는 깊다 - 1], 전우용, <푸른역사>, 2015.
3. [식탁 위의 한국사], 주영하, <휴머니스트>,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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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조, 무예와 통하다 - 정역 무예도보통지 민속원 아르케북스 188
정조 명, 최형국 옮김 / 민속원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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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개혁'을 위한 '최후의 무예서'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정조(正祖) 편찬,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저술, <규장각/장용영>, 1790.


"무예제보(武藝諸譜)에 수록된 곤방, 등패, 낭선, 장창, 당파, 쌍수도 등 '6기'는 척계광의 [기효신서(紀效新書)]에서 나왔다. 선조(宣祖) 임금께서 재위시절 (훈련도감) 훈국랑 한교가 임진왜란 때 참전한 명나라 장수들에게 두루 물어 편찬하여 간행한 것이다. 선왕(영조) 기사년(1749년)부터 아버지 사도세자께서 업무를 대신 수행하셨는데 기묘년(1758년)에 죽장창, 기창, 예도, 왜검, 교전, 월도, 협도, 쌍검, 제독검, 본국검, 권법, 편곤 등 '12기'를 증입하도록 명하였고, 그림(圖)과 해설(譜)을 모두 모아 정리하여 [무예신보(武藝新譜)]를 만들었는데... 내가 즉위한 원년에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앞의 '18기'를 함께 무예시험 과목으로 연습하도록 처음으로 명하였고, 또한 기창,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등 '4기'를 더 추가하였다. 지금 또 격구와 마상재를 그 아래에 덧붙였다.
...
이에 무예의 신/구보 '24목'을 너희들에게 모두 주어 상세히 연구케 하여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라는 이름을 내려주노라."
-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 <병기총서>, 정조, 1790.


어린 시절, 태권도 '품증'은 배불뚝이 아저씨 한 분이 택견 품세를 하는 그림을 바탕으로 하고 있었다. 그림그리기 좋아했던 내게는 품증의 내용보다는 그 바탕화면이 항상 먼저 눈에 들어왔다.

조선 후기 학자 이만영의 [재물보](1789)라는 책에는 '권법'을 이르는 '변(卞)'과 '각력(角力)'에 관한 해설이 있다고 한다. 고대로부터 전승된 우리식 씨름인 '수박(手搏)'을 '변'이라 하고 겨루기를 뜻하는 '각력'은 '무(武)'라고 하는데 당시에는 이를 '탁견'이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중국 [한서] <애제기>편에 적힌 "변사와 무희를 관람하셨다"는 최초 기록에서 힘을 겨루는 '변'과 '각력'은 고대로부터 '무예놀이(무희:武戲)'라는 주석이 나왔다는데, 황해도에 있는 우리의 고구려 안악 3호분묘 벽화에도 맨손무예인 '수박'의 장면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오래전부터 이런 격투기 대련은 관람의 대상이었음을 알 수 있다. 고대 그리스의 올림픽에서도 '레슬링'이 고전종목이었다. 조선 후기로 오면 이 맨손무예를 '탁견'이라 불렀단다. 우리 태권도의 원형으로서 '택견'의 어원에 관한 기록이다. 전통 무예로서 그 역사와 정신을 추적하는 태권도협회의 노력은 우리 권법의 사료적 기원을 우리식 무예서에서 찾을 것인데, 우리식 '권법' 총화의 원형은 사도세자의 [무예신보]에 전하는 '18기(十八技)'에서 찾는다.

우리 한반도와 요동인들은 오래전부터 활과 화살을 강조했고 수련해 왔다. 고대 원거리 전투의 효자종목인 활쏘기는 우리 전쟁의 역사에서 매우 중요했고 우리 역사에서 대부분의 영웅들은 명궁이었다. 조선 무과에서도 아마 가장 중요한 과목이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에 등장한 조총은 신병기로서 그 위력은 놀라웠겠으나 사정거리나 장전능력에서 아직 활보다 못했을 수도 있었겠지만, 장도를 앞세운 왜군의 단병접전에서 고전을 면치 못했던 조선군은 왜란 후 '훈련도감'을 설치하여 '포수(조총)', '사수(활)', '살수(창칼)' 등의 부대 편제와 훈련을 강화한다. 선조는 훈련도감 장수 한교에게 명해 명나라 파병군의 장수를 만나 여섯 가지 무예를 전수받아 조선 최초의 국정 무예서를 만들게 하는데, 이것이 바로 [무예제보](1598)다. 곤방(봉), 등패(방패), 낭선(독묻힌 대나무 가지), 장창(긴 창), 당파(삼지창), 쌍수도(양손으로 잡는 긴 칼) 등 '6기'를 그림과 설명으로 확정하고 군사들을 훈련시킨 것이다. 이것이 광해군 대에 [무예제보번역속집](1610)이라는 제목으로 '권법', '청룡언월도', '협도곤', '왜검' 등 '4기'를 추가하였으나 패주인 광해군의 업적은 높이 기릴 수 없었다. 영조 시절 대리청정하던 사도세자는 병자호란을 겪고 청에서 인질생활을 하다가 즉위 후 '북벌'을 외치던 효종이 말을 타고 청룡언월도를 휘두르던 기상을 본받아 무예를 중시했다고 한다. 실질적으로 사도세자가 편찬한 [무예신보] 또한 공식적으로 인정받지 못했으나 북방의 기병술과 남방의 보병술을 두루 훈련하기 위해 기존 '10기'에 죽장창(긴 대나무창), 기창(깃발창), 예도(일반검), 교전(검겨루기), 쌍검(쌍칼), 제독검(장수검), 본국검(조선검), 편곤(도리깨/쌍절곤) 등 '8기'를 보태어 조선무예 '18기'를 완성한다.
결국 조선 후기 '르네상스 개혁군주' 정조에 이르러 기창(말을 탄 창술), 마상월도, 마상쌍검, 마상편곤, 격구(마상 스포츠), 마상재(마상 서커스) 등 '6기'를 덧붙여 조선무예 '24기'로 증편되었다.

정조는 즉위 연설에서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 일갈했다는데, 이는 노론에 대한 정치보복을 예고하는 말이 아니었다. 할아버지 영조에 의해 사도세자의 형인 요절한 효장세자의 양자 형식으로 '적통'이 만들어져 즉위한 정조는 본인을 앞세워 사도세자를 극히 높여 당쟁을 격화하는 술수를 부리지 말라는 경고를 통해 당시 집권당 노론을 경계했다. 영조의 '탕평책'을 잇겠다는 천명이었으되 한편으로 조선 개혁의 동력을 지배세력에서 찾지 않고 서얼 출신의 천재들을 직접 기용하여 '개혁군주'의 친위대로 삼았다. 정조 개혁의 핵심 조직은 '문치개혁'의 '규장각'과 '무치개혁'의 '장용영'이었다.


"정조 시대의 국정 운영의 방향은 '문치규장 무설장용(文治奎章 武設壯勇)'이라는 문장에 함축적으로 담겨 있다. '문'은 '규장각'을 중심으로 초계문신제를 도입하고 성리학을 바로 잡으며, '무'는 친위 군영인 '장용영'을 통해 왕권을 강화시킨다는 것이다. 특히 중앙군영 장악은 국정 장악에 반드시 필요했기에 가장 중요한 개혁의 대상이었다. 정조의 '무(武)'에 대한 특별한 인식은 장용영 설치와 함께 다양한 병서의 편찬으로 구체화되었다."
- [정조, 무예와 통하다], <[고이표]와 '통지'의 의미>, 최형국, <민속원>, 2021.


조선의 '르네상스'를 꿈꾼 '개혁군주' 정조는 '왕권 강화'를 통해 조선의 변화를 기획했다. 18세기 당시 유럽은 프랑스 대혁명으로 왕의 목이 날아가던 '시민권 강화'의 시대였지만, 아시아에서는 다수의 복지 증진을 위한 '공공성'이 '시민권'이 아니라 '왕권'으로 표현되고 있었다. 19세기에 청나라가 아편전쟁에 패해 서양에게 굴욕을 당한 이유는 역설적이게도 몇 세기 전부터 전제왕권을 성공적으로 강화했기 때문에 사회 전반의 개혁이 불가능했다는 점도 들고 있다. 동아시아는 역시 그 영향권 안에 있었다. 정조의 '개혁'은 결국 '왕권 강화'의 강령을 벗어날 수 없었다. 정조 즉위 당시 집권당 노론은 각 정부관제를 장악하고 서로 사돈을 맺어 세불리기에 혈안이 되어 있었다. 선대 '탕평책'의 말로였다. 스스로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가 되어 국가 전체의 '기강'을 바로잡으려던 정조는 본인이 직접 발탁한 '초계문신'들을 직접 가르쳐 규장각에 집합시키고, 역시 같은 방식으로 장용영의 친위부대를 길러 국정을 장악하려 했다. 물론 서얼자의 한계로 뜻을 펴지 못한 천재들을 파격적으로 기용한 면모는 가히 개혁적이었다. 높은 관직은 아니었지만 조선의 모든 지식의 집합소인 '규장각'을 거친 박제가, 이덕무, 유득공 등의 이 어용지식인 관료들은 이후 실학의 발전에 크게 기여했다. 물론 정조의 성리학 '르네상스'는 결국 얼마 후 세도정치의 물결을 막지 못하였는데, 시대와 역사는 정조가 '왕권 강화'를 통한 조선 개혁이 성공할수록 사회의 진보를 그 이상으로 더 늦추었을 것이라는 거대한 '역설'을 보여줄 것이었다. 조선을 바꾼 것은 정조의 시대착오적 '왕권 강화'가 아니라, 왕조의 명을 재촉하는 다수 민중의 반란이었을 뿐이다. 

그럼에도 '개혁군주' 정조의 노력은 가상하여 문무를 겸비한 총체적인 개혁을 추진하였으니 조선의 법전 [경국대전]을 '개헌'한 [대전통편(大典通編)], 정도전의 [진법(陣法)]으로부터 기원했을 조선의 '진법'을 정리한 [병학통(兵學通)],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武藝圖譜通志)]의 '3통(通)'이 그것이다. 법전을 개혁하여 국가의 세계관을 재정립하고, '병법'을 정리하여 국가의 군사력을 강화한 것이다. [병학통]은 군대의 전체 대오를 통해 전투에서 승리하는 '진법'의 집대성이었다. 이후 이어진 [무예보도통지]는 각 군사의 개별 무예를 총정리하여 위의 '진법'에서 종합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유기적 발상이었다. 원래 조선의 국정 무예서의 시초인 [무예제보]가 참고했던 명나라 장수 척계광의 [기효신서] 또한 각 진영이 '원앙'처럼 찰지게 어우러지는 '원앙진'의 개별 요소로서 단병접전술을 총정리한 것이었다. 척계광의 '척가군'은 기병 중심의 중원 전투에 비해 광동과 절강성 지역을 노략질하던 왜적의 단병접전에 대응하기 위한 게릴라전과 각개전투의 기술 및 무기개발에 그 효용성을 인정받았던 것이다. [무예도보통지]는 척계광은 물론 역시 왜국에 대비한 무인 집안의 후예로서 무예서 [무비지] 240권을 지은 명나라 장수 모원의 또한 참고하고 있는데, 책의 앞부분에 <척소보/모총병 사실>이라는 장을 통해 위 두 장수를 간략히 소개하고 뒤 이어 <기예질의>를 통해 [무예제보]를 지은 한교가 왜란시 파견된 명나라 장수를 찾아가 '병서' 전반을 질의한 내용도 싣고 있어, 국정 무예서의 시초로서 선조대 [무예제보]의 위상을 확실히 해두고 있다.

한편, 정조의 [무예도보통지]에서 주목할 점은 '성리학 지식인 개혁군주'이고자 했던 정조답게 이 '조선 최후의 무예서' 집필을 지식인에게 맡겼다는 것이다. 기존 '훈련도감'에서 관장했던 [무예제보]나 [무예제보번역속집]과 달리 [무예도보통지]는 '규장각'의 지식인 박제가와 이덕무가 총괄했다. 이에 신체적 교본의 실험과 취재는 '장용영' 장수 백동수가 맡은 것이었는데, 이 지은이 셋 모두 서얼 출신의 천재들이었다. 과연 이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무술의 '실전교본'을 넘어 무예에 깃든 철학과 역사, 해당 무기의 잡학사 일체를 아우른다. 물론 그 사상적 기본 태도는 '성리학'의 '격물치지(格物致知)'였다.


"[검결가]에 실려 있는,
...
조선세법은 처음에 안법, 격법, 세법, 자법 등을 연습한다. 격법에는 다섯 가지가 있는데, 즉 표두격, 과좌격, 과우격, 익좌격, 익우격 등이다..."
- [무예도보통지], <예도(銳刀)>, 1790.


[무예도보통지]의 서문과 각 사설의 앞부분(권수)을 지나면 1권에서 '찌름을 위한 무예'로 '창'술을 다루고 2~3권에서 '베기를 위한 무예'로서 '검'술을 망라하며, 4권에서는 '치기를 위한 무예'인 권법 및 봉술과 쌍절곤(편곤)술, 기타 마상 무예를 합쳐 '24기'에 관한 그림과 설명을 상세히 기록한다. 제목의 뜻은 '무예(武藝)'에 관한 '그림과 설명(도보:圖譜)'을 총망라하고 '완전히 달통한 기록(통지:通志)'로서 '무예(武藝)'+'도보(圖譜)'+'통지(通志)'인 것이다. 참고로 조선시대 과거시험에서 '만점'을 의미하는 단어 또한 '통(通)'이었단다. 과연 '성리학자' 지식인이 되고 싶었던 군주 정조다운 작명법이다.
각 무기에 대한 상세한 설명과 묘사, 그 원료로서 금속과 나무의 재질과 제작법은 물론 무기의 변천사 등을 박제가와 이덕무 등의 규장각 '천재'들이 취재하고 짓고 감수하며, 각 무기들의 활용법은 장용영 장수 백동수가 장사들을 데리고 시범하면서 실증한다.
각 자세들은 '태산압란세(태산이 알을 누르듯 창을 든 자세), '거정세(솥을 들듯 검을 치켜든 자세)', '복호세(호랑이처럼 낮춘 자세)', 표두격(표범이 머리를 공격하는 것)' 등의 비유적 표현이 차고 넘친다. 몇 번 따라 해보려는데 현대인인 나로서는 구현이 쉽지 않다. 하지만 '격법(치고)', '세법(베고)', '자법(찌르고)' 등의 직접 행동 이전에 '안법(눈으로 보고)'을 최우선으로 하는 것은 싸움은 무기와 기술도 중요하나 '눈'을 비롯한 '오감'으로 상대를 사전 제압하는 '담력'을 최고로 치는 '도(道)'를 앞에 두는 사상을 잊지 않는다. '태권도', '유도', '검도', 하물며 '합기도'까지 '기예' 이전에 올바른 '도(道)'를 중시하는 바로 그 전통선상에 있다.

맨손무예로서 '권법'은 수많은 무기들을 자유자재로 다루기 위한 기본적 신체단련으로서 '도수체조'와 같은 성격이며, 이를 기본으로 중앙군부터 지방군까지 전국이 표준적이고 통일화되어 단련한 각종의 무기술은 각 무기의 특성에 맞게 각 군대의 진법에서 결국 유기적으로 활용된다는 것이다. [대전통편]에서 정립된 국가 사상이 [병학통]의 '진법' 속에서 [무예도보통지]의 각개전투술로 어우러지며 구현되는데, 이 모두를 잇는 한 글자 역시 다름아닌 '통(通)'이다.


"비록 진법을 완벽하게 구축하였을지라도 군사 개개인의 무예가 잘 갖춰지지 않으면 전투가 불가한 것으로 보고... 따라서 [병학통]을 중심으로 대규모 부대의 진법을 완성하고, [무예도보통지]의 무예를 군사 개개인이 익혀야만 병법이 완성된다...
즉, 진법과 무예는 서로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상호보완적인 성격으로 해당 진법의 변화는 무예의 변화와 직결되는 것이고, 반대로 해당 무예의 변화는 곧 진법의 변화와 연관이 되는 것이다."
- [정조, 무예와 통하다], '부록 1 - [무예도보통지] 편찬 의미와 당대의 활용', 최형국, <민속원>, 2021.


전통무예 연구가로서 '조선무예 24기'를 수련한 최형국 박사는 한문과 한글(언문)로 간행된 정조의 [무예도보통지]를 번역하고 해설한 [정조, 무예와 통하다](2021)라는 책을 내면서 정조 개혁의 '3통(通)'에서 '통(通)'을 '소통'으로 해석한다. 정조의 개혁정신을 높이 사는 저자는 정조가 펼친 이 '소통'의 가치 또한 이 책의 결론으로 가져간다.
한편, '왕정'이라면 그 어떤 형식으로든 경멸하고 반대하는 '공화주의자' 독자인 내가 읽은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는 성리학 사상과 전통무예 기술의 '소통', 진법과 각개무술의 '소통', 과거의 전통과 현대의 혁신과의 '소통' 등 이 모든 변증법적 '소통' 속에는 우리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잇는 '통(通)'이 있다는 생각이었다.
'등패(단거리 방패)' 부대를 중거리 '낭선(대나무 가지)' 부대가 호응하고, 중거리 '장창(긴 창)' 부대는 단거리 '당파(삼지창)' 부대가 구원하는 종합전술 병법처럼 이론과 실천, 전통과 혁신이 변증법적으로 상호 어우러지는 '소통'이 정조의 시대착오적이지만 절실했던 개혁의 방향이었을 것이다. 

정조는 세간의 평과 달리 문치 군주 세종보다는 무예를 숭상한 수양대군 세조를 더욱 닮았다고 한다. 세조는 성종대에 완성되는 [경국대전] 편찬을 시작하고 선왕 문종대부터 무예서 편찬을 관장했다고 한다. 조카의 왕위를 찬탈한 후 중앙집권적 왕권 강화를 꾀한 이유는 반란을 막고 왕위를 지키기 위한 책략이었으나 결과적으로 조선왕조를 한층 제도적으로 발전시키기도 했다. 문무를 겸비한 정조 또한 왕위의 정통성을 강조하기 위한 내치용 개혁으로서 왕권 강화를 꾀한 것에 불과했음에도 후세에 조선의 '개혁군주' 평가를 받고 있을는지도 모른다. 역사는 자고로 한 개인이나 소수의 의도대로 작동하지 않는다.


북한은 2016년에 단독으로 [무예도보통지]를 세계 유네스코 문화유산으로 등록하였다고 한다. 남북이 함께 했었으면 좋았겠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우리 역사가 전수해 준 '조선 최후의 무예서' [무예도보통지]의 이 '소통'의 비법을 어떻게 활용할 것인지가 아닐는지.


* 여담으로, 이 역해본 책의 가격이 저렴하지는 않다. 
하지만 박물관에 소장된 한문과 언해본의 영인본이나마 소장할 가치로만 해도 그 가격은 전혀 아깝지 않다.


***

- [정조, 무예와 통하다 - 正譯 武藝圖譜通志], 박제가/이덕무/백동수 지음, 최형국 역해, <민속원>,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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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유라시아 견문 3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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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과거(過去)는 해석(解釋)의 전장(戰場)이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탤지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1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국의 추억 -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이병한.


1. 다시 '동학'으로


20대에는 마르크스를 모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였다. 30대에 들어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였다. 40대가 되어 우리 역사로 돌아와 '동학(東學)'에 귀의했다. 이십대부터 전세계를 주유했는데, '동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수년 간 '유라시아' 대륙 사방을 '견문(見聞)'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신동학(新東學)'의 길을 찾고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프레시안>의 [유라시아 견문]을 쓴 원광대 교수 이병한의 이야기다. 정말 부지런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각종 언어를 계속 익히면서 당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명과 문자들을 직접 훑어본다. 타국을 돌며 수년을 살면서도 요가나 운동도 열심히 한단다.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도 못할 습성이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사십대 중반인데 '동학'에 귀의했다니 아마도 21세기의 '수운 최제우'가 되고자 하는 '천재'인가 보다. 최제우는 서른일곱에 '접신'하고 '득도'했는데 조선말 당시에는 '늙은' 축에 들었을 것이나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마흔넷은 '애기'다. 조선말 최제우는 그 나이도 되기 전 '난민(亂民)'의 죄를 쓰고 죽어갔지만 이 시대의 사십대는 아직 창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시대정신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같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나도 지금껏 '서구사상'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비웃으며 '민주주의'에 찬동하고, '왕정'과 '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공화주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함께 실현하는 사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다수가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옳은 방법론이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성리학에 부딪혀 유학을 조금 엿보게 되었고,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거대문명에 너무 빨려들 것을 경계하며 우리 역사로 되돌아서니 '동학'이 우뚝 서 있었다. 
'개벽(開闢)' 세상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써보다가 그래도 젊은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던 내가 정작 '동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선후배를 만나 '동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였던 내가 '민주주의'에 관해 많은 영감을 받은 이진 선배와 우리의 토착사상에 조예가 깊은 후배 정평을 만나 '자문'을 구하던 중 평이 추천은 물론 친히 빌려주기까지 한 책이 바로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이었다.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원불교의 학당에 자리잡은 그는 이 대장정의 견문을 통해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3중 분단체제'를 넘는 21세기 '전환시대의 반전'을 '유라시아'의 신(新) '제국'에서 찾는다. 기존 20세기 영미와 서유럽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또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대일통'과 '사통팔달'의 '대회통'을 통한 활발한 연대를 조망하고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해석의 전장'인 과거 역사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명의 관점에서 재고찰한다. '객관성'과 '과학'으로 점철된 20세기 서구사상의 일방적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다시금 '주관성'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의 [유라시아 견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의 '공진화(共進化)'"를 뽑겠다. 지난 백년 이상 지배한 서구의 '이성의 제국'을 넘어 '영성의 제국'이 함께 지배하는 세계, 그 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동학'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반만 동의하기로 한다.


2. [유라시아 견문]의 모티브 - '개벽' 이전의 '개화'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은 치우친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중원(中原)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眞)개화(開化)'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 [유라시아 견문 1], <2. 연행록과 견문록 - 개화기의 사대부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제목의 모티브는 의외로 조선말 개화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알고보면 '자주적 근대화'를 꿈꾼 사대부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한 이후인 1895년에 발간된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사대부'의 부흥을 통해 개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단다. 유길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흥사단(興士團)'이었다. '견문'이 가능했던 지배계급의 '개화' 중에서도 우리의 민중적 '동학'의 '개벽' 못지 않게 자주적인 '개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은 '자주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유럽과 동서남북의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 혁명에 억눌려 있던 각 지역의 '영성' 혁명에 주목한다. 그 실현태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이고, 동아시아는 '유교', 남아시아는 '불교', 북아시아 유목문화의 '텡그리(천명)' 사상을 넘어 러시아의 '그리스 동방정교'를 각 지역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종교가 발견되는데 바로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는 중국과 몽골, 실크로드 일대인 하서주랑과 동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유교와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문명을 이어왔고 이로써 우리도 토착된 '영성'을 재발굴하여 유라시아 대일통의 성원이 되자는 주장이다. 결국 [유라시아 견문]의 목표는 '동학'의 재발견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학'은 '서학(천주교)'을 배타하지 않고 "되감아 치는 회심의 발군"(1권, <18. 인의예지의 공화국>)이자 전통을 내치지 않는 "유학의 민중화"이며,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국학의 지배사상으로 함몰되지 않고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린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으로서 '동학'은 "서학과 국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이상 같은책)하고 있는 "굉장하고 신통"한 사상이라고 반추하고 있다. '고금 합작'에 기반하여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계급투쟁'은 기각해 버린 저자가 보기에 '동학'은 농민전쟁의 주역인 다수 피지배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주적 개화파' 유길준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유교적 '대장부'의 시각이겠다.
'동학'의 재발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유라시아 각 지역의 '중국몽', '인도몽', '터키몽', '러시아몽', '이란몽' 등 대제국적 '꿈(夢)'들의 연합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유-불-도'의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동학'의 사상적 기반도 바로 '유-불-도+기독교(서학)'이었다.


3. '유라시아'의 문명사 - 수천 년의 '종교'적 '영성'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들의 민족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튀르크(돌궐)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적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적 인도'가 된 것도 튀르크의 공헌이었다. 튀르크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의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 [유라시아 견문 2], <24. '이슬람의 집', 실향과 귀향 - 이슬람 천 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병한.


6.25 한국전쟁에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남한과 '형제국'이 된 터키 얘기가 아니다. 서구유럽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는 말을 들으며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멸망하고 분열된 '오스만튀르트' 얘기다. [유라시아 견문] 2권에서 저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인도를 잇는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이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집트까지 돌아보며 '이슬람교'의 힘을 재발견한다. 물론 인도는 무굴제국 이전부터 토착종교인 힌두교가 주요 종교이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승전국인 '서구' 영국이 분리독립시켜 분할지배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2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 공존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 16억 명 중 13억 힌두교에 3억 이슬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교역의 장이었던 인도양을 둘러싸고 역시 3억 명 가까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면 남아시아만 해도 13억 힌두교를 6억의 이슬람교가 포위한 형국이다. '중동'이나 '극동' 또한 서구의 시각인데 '유라시아'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근원지인 '중동'은 진정한 '중원'이다. '중원'을 자처하는 중국 조차 변방이다. 실크로드와 중국의 차마고도, 아랍의 향신료길이나 인도의 면화길 등으로 사방팔방 교역의 중심이었던 이 '중원'을 지배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교'인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제국이 분열하고 남서부 이슬람권에서 일어선 티무르제국과 중국 명나라가 충돌 직전 명나라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으로 찌그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시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유라시아 대일통의 도전은 세계의 중심답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중국이 동남서 아시아를 다니며 육지의 '일대'와 해양의 '일로'를 적극 '지원'하고 있단다. 여기에 그리스 동방정교를 기반으로 유럽 일대를 장악하려는 러시아 문명권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유라시아' 대문명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다양한 대문명의 지도에서 사통팔달의 '윤활유'와 같다.
"이제 머리가 굳어" 힘들다는 이병한 교수는 2권의 말미에서 후세들에게 '이슬람학'을 꼭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지정학 또는 지리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중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오래된 '영성', 이슬람교를 소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 영미유럽은 '극서'에 불과하다. 지금 민족과 종교로 산산히 분할된 유라시아는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산물이며 냉전기 '제3세계'의 비동맹과 '반둥회의(1955년)'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길에 이슬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했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이병한이 각 지역 '이니셔티브(주도권)'의 기준으로 잡는 것은 백여년의 '이성'의 '문화독재'가 아니라, 지난 수천년의 '문명자치'로서의 '종교'와 그로부터 퍼진 '영성'이다. 
동방의 유교와 도교, 남방의 불교, 북방의 그리스정교(기독교), 서방의 이슬람교와 카톨릭(기독교)이 '유라시아' 중앙에서 만나 융합한다. 


4.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제국'


'동학' 재발견의 불가피성을 깨닫기는 했으나, 나는 아직 종교적 '영성'에 동의하지 못한다. [유라시아 견문]의 관점에 절반만 수긍한다. 서구 중심 사상에서 탈피해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사상을 벼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되, 러시아 푸틴의 새로운 '동방정교'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주의'에 당최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치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잣대로 재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영성'으로 다수 민중이 우민화될 우려가 크다고 본다. [유라시아 견문]에서 다소 보이는 푸틴에 대한, 시진핑에 대한 호평은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의 극복을 위한 노력 이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러시아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러시아 정교주의'나 현대 '중국학'의 대가 후안강 인터뷰는 읽기 거북했다. 차르의 측근 라스푸틴이나 칭기스칸 같은 위인들이 회상되고 재영웅화 되는 순간, 우리의 '동학'은 '접신'과 '득도'한 '영성'만 믿고 쓰러져간 조선말 다수 농민의 슬픈 길만을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신시대와 신세기의 다수 민중은 우매하지 않고 지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으로 수양하고, 특히 유학의 전통문명권에 속한 우리 조선인들은 무신론적 자기수양을 통해 각자 득도를 하여 더 나은 '대동세상'을 준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비선실세'의 '영성'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민주주의'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영성' 가득한 수많은 미친 '빠돌이'들을 조장하고 있다. 이 '영성'들은 현대화된 '파시즘'이다.
그리하여 원체 '제국'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일통'은 21세기 새로운 '제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냥 놔둬도 한반도인들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끊임없이 '서구-유라시아' 간 '문명충돌'을 반복할 것으로 본다. 미국(일본) 편에 설 것인가, 중국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편에 설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지배계급은 조선말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서구 영미(일)'냐 '유라시아'냐 갈림길도 다르지 않다. 
'동학'의 '자주적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로마, 오스만, 중화 등의 '제국'들이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루르는 '포용'적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그 넓은 지역을 미처 다스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는 '이성'과 '근대화'를 명분으로 식민지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했다. 그 분할과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민족해방'과 '분리독립'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 역시 식민지를 강압적이고 배타적으로 직접 지배할 역량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지배력 따위는 애초에 인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이제 다시 제출된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세적 방향성은 거스를 수 없다 해도 '영성'과 '전통'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 무장된 '동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로서의 '동학'은 천재들의 사상접목이나 '득도'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조직화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5. 우리 각자의 '동학'으로


"미래의 사회주의... '고금 합작'...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하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 지 모른다. '대동세계', '태평천하'라는 옛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 [유라시아 견문 1], <35. 동서고금의 교차로, 카슈가르 - 중국에도 '서해'가 있다!>, 이병한.


수천 년의 문명적 전통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굳이 '영성' 복귀에서 찾을 것 없다. 우리의 전통적 조직과 공동체 문화의 재창조에 '황족' 또는 '왕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깨달음'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우리 전통의 '유불도' 사상과 결합한 '동학'의 현대화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우리의 '대동세상' 아니겠는가.
"포용적인 제국이 평등하다"는 식의 유발 하라리, 이중톈, 이병한 등의 천재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수의 '계급투쟁'으로 '동학'은 지금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 또한 내 나라가 '선진국'의 위상으로 피할 수 없는 '유라시아 대제국'에 당당히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학'은 내부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적 무장이 된다. 
지배계급은 '서구주의'의 수치로, [유라시아 견문]은'고금 합작'의 '영성'적 인문학으로, 피지배계급은 억압을 뚫은 다수 민중의 역동성으로 '동학'을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어느 편의 '동학'이 될지는 각자 발딛고 선 물질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다. 
노동계급인 내가 동의할 수만은 없지만, [유라시아 견문]의 '결론'으로 택한 단락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부국강병, 세속적 목표만 추구하는 나라는 이제 '후진국'이다. 속된 부르주아를 섬기는 논리(자유주의/시민민주주의)나 천한 프롤레타리아를 모시는 논리(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나 죄다 20세기의 적폐다. 인격을 드높이고 인륜을 다하며 인권을 누리는 '문명국가'가 '선진국'이다. '천상의 나라'를 지상에도 구현해 보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영성(靈性)'을 고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28. 아스타나, 카자흐스탄의 봄 - "通則不痛 不通則痛">, 이병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의 사상적 기준으로서 현대의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인가 각자 한 번은 돌아볼 일이다.


***

1.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6.
2.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3. [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9.

* 읽는 순서는 따로 없겠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결론'으로서 3권을 먼저, 
처음 떠나는 1권을 다음에, 
'중원'에서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재발견하는 2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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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유라시아 견문 2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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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과거(過去)는 해석(解釋)의 전장(戰場)이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탤지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1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국의 추억 -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이병한.


1. 다시 '동학'으로


20대에는 마르크스를 모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였다. 30대에 들어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였다. 40대가 되어 우리 역사로 돌아와 '동학(東學)'에 귀의했다. 이십대부터 전세계를 주유했는데, '동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수년 간 '유라시아' 대륙 사방을 '견문(見聞)'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신동학(新東學)'의 길을 찾고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프레시안>의 [유라시아 견문]을 쓴 원광대 교수 이병한의 이야기다. 정말 부지런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각종 언어를 계속 익히면서 당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명과 문자들을 직접 훑어본다. 타국을 돌며 수년을 살면서도 요가나 운동도 열심히 한단다.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도 못할 습성이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사십대 중반인데 '동학'에 귀의했다니 아마도 21세기의 '수운 최제우'가 되고자 하는 '천재'인가 보다. 최제우는 서른일곱에 '접신'하고 '득도'했는데 조선말 당시에는 '늙은' 축에 들었을 것이나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마흔넷은 '애기'다. 조선말 최제우는 그 나이도 되기 전 '난민(亂民)'의 죄를 쓰고 죽어갔지만 이 시대의 사십대는 아직 창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시대정신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같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나도 지금껏 '서구사상'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비웃으며 '민주주의'에 찬동하고, '왕정'과 '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공화주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함께 실현하는 사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다수가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옳은 방법론이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성리학에 부딪혀 유학을 조금 엿보게 되었고,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거대문명에 너무 빨려들 것을 경계하며 우리 역사로 되돌아서니 '동학'이 우뚝 서 있었다. 
'개벽(開闢)' 세상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써보다가 그래도 젊은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던 내가 정작 '동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선후배를 만나 '동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였던 내가 '민주주의'에 관해 많은 영감을 받은 이진 선배와 우리의 토착사상에 조예가 깊은 후배 정평을 만나 '자문'을 구하던 중 평이 추천은 물론 친히 빌려주기까지 한 책이 바로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이었다.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원불교의 학당에 자리잡은 그는 이 대장정의 견문을 통해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3중 분단체제'를 넘는 21세기 '전환시대의 반전'을 '유라시아'의 신(新) '제국'에서 찾는다. 기존 20세기 영미와 서유럽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또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대일통'과 '사통팔달'의 '대회통'을 통한 활발한 연대를 조망하고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해석의 전장'인 과거 역사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명의 관점에서 재고찰한다. '객관성'과 '과학'으로 점철된 20세기 서구사상의 일방적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다시금 '주관성'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의 [유라시아 견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의 '공진화(共進化)'"를 뽑겠다. 지난 백년 이상 지배한 서구의 '이성의 제국'을 넘어 '영성의 제국'이 함께 지배하는 세계, 그 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동학'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반만 동의하기로 한다.


2. [유라시아 견문]의 모티브 - '개벽' 이전의 '개화'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은 치우친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중원(中原)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眞)개화(開化)'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 [유라시아 견문 1], <2. 연행록과 견문록 - 개화기의 사대부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제목의 모티브는 의외로 조선말 개화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알고보면 '자주적 근대화'를 꿈꾼 사대부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한 이후인 1895년에 발간된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사대부'의 부흥을 통해 개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단다. 유길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흥사단(興士團)'이었다. '견문'이 가능했던 지배계급의 '개화' 중에서도 우리의 민중적 '동학'의 '개벽' 못지 않게 자주적인 '개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은 '자주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유럽과 동서남북의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 혁명에 억눌려 있던 각 지역의 '영성' 혁명에 주목한다. 그 실현태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이고, 동아시아는 '유교', 남아시아는 '불교', 북아시아 유목문화의 '텡그리(천명)' 사상을 넘어 러시아의 '그리스 동방정교'를 각 지역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종교가 발견되는데 바로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는 중국과 몽골, 실크로드 일대인 하서주랑과 동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유교와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문명을 이어왔고 이로써 우리도 토착된 '영성'을 재발굴하여 유라시아 대일통의 성원이 되자는 주장이다. 결국 [유라시아 견문]의 목표는 '동학'의 재발견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학'은 '서학(천주교)'을 배타하지 않고 "되감아 치는 회심의 발군"(1권, <18. 인의예지의 공화국>)이자 전통을 내치지 않는 "유학의 민중화"이며,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국학의 지배사상으로 함몰되지 않고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린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으로서 '동학'은 "서학과 국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이상 같은책)하고 있는 "굉장하고 신통"한 사상이라고 반추하고 있다. '고금 합작'에 기반하여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계급투쟁'은 기각해 버린 저자가 보기에 '동학'은 농민전쟁의 주역인 다수 피지배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주적 개화파' 유길준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유교적 '대장부'의 시각이겠다.
'동학'의 재발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유라시아 각 지역의 '중국몽', '인도몽', '터키몽', '러시아몽', '이란몽' 등 대제국적 '꿈(夢)'들의 연합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유-불-도'의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동학'의 사상적 기반도 바로 '유-불-도+기독교(서학)'이었다.


3. '유라시아'의 문명사 - 수천 년의 '종교'적 '영성'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들의 민족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튀르크(돌궐)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적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적 인도'가 된 것도 튀르크의 공헌이었다. 튀르크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의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 [유라시아 견문 2], <24. '이슬람의 집', 실향과 귀향 - 이슬람 천 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병한.


6.25 한국전쟁에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남한과 '형제국'이 된 터키 얘기가 아니다. 서구유럽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는 말을 들으며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멸망하고 분열된 '오스만튀르트' 얘기다. [유라시아 견문] 2권에서 저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인도를 잇는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이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집트까지 돌아보며 '이슬람교'의 힘을 재발견한다. 물론 인도는 무굴제국 이전부터 토착종교인 힌두교가 주요 종교이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승전국인 '서구' 영국이 분리독립시켜 분할지배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2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 공존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 16억 명 중 13억 힌두교에 3억 이슬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교역의 장이었던 인도양을 둘러싸고 역시 3억 명 가까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면 남아시아만 해도 13억 힌두교를 6억의 이슬람교가 포위한 형국이다. '중동'이나 '극동' 또한 서구의 시각인데 '유라시아'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근원지인 '중동'은 진정한 '중원'이다. '중원'을 자처하는 중국 조차 변방이다. 실크로드와 중국의 차마고도, 아랍의 향신료길이나 인도의 면화길 등으로 사방팔방 교역의 중심이었던 이 '중원'을 지배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교'인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제국이 분열하고 남서부 이슬람권에서 일어선 티무르제국과 중국 명나라가 충돌 직전 명나라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으로 찌그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시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유라시아 대일통의 도전은 세계의 중심답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중국이 동남서 아시아를 다니며 육지의 '일대'와 해양의 '일로'를 적극 '지원'하고 있단다. 여기에 그리스 동방정교를 기반으로 유럽 일대를 장악하려는 러시아 문명권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유라시아' 대문명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다양한 대문명의 지도에서 사통팔달의 '윤활유'와 같다.
"이제 머리가 굳어" 힘들다는 이병한 교수는 2권의 말미에서 후세들에게 '이슬람학'을 꼭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지정학 또는 지리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중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오래된 '영성', 이슬람교를 소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 영미유럽은 '극서'에 불과하다. 지금 민족과 종교로 산산히 분할된 유라시아는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산물이며 냉전기 '제3세계'의 비동맹과 '반둥회의(1955년)'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길에 이슬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했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이병한이 각 지역 '이니셔티브(주도권)'의 기준으로 잡는 것은 백여년의 '이성'의 '문화독재'가 아니라, 지난 수천년의 '문명자치'로서의 '종교'와 그로부터 퍼진 '영성'이다. 
동방의 유교와 도교, 남방의 불교, 북방의 그리스정교(기독교), 서방의 이슬람교와 카톨릭(기독교)이 '유라시아' 중앙에서 만나 융합한다. 


4.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제국'


'동학' 재발견의 불가피성을 깨닫기는 했으나, 나는 아직 종교적 '영성'에 동의하지 못한다. [유라시아 견문]의 관점에 절반만 수긍한다. 서구 중심 사상에서 탈피해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사상을 벼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되, 러시아 푸틴의 새로운 '동방정교'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주의'에 당최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치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잣대로 재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영성'으로 다수 민중이 우민화될 우려가 크다고 본다. [유라시아 견문]에서 다소 보이는 푸틴에 대한, 시진핑에 대한 호평은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의 극복을 위한 노력 이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러시아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러시아 정교주의'나 현대 '중국학'의 대가 후안강 인터뷰는 읽기 거북했다. 차르의 측근 라스푸틴이나 칭기스칸 같은 위인들이 회상되고 재영웅화 되는 순간, 우리의 '동학'은 '접신'과 '득도'한 '영성'만 믿고 쓰러져간 조선말 다수 농민의 슬픈 길만을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신시대와 신세기의 다수 민중은 우매하지 않고 지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으로 수양하고, 특히 유학의 전통문명권에 속한 우리 조선인들은 무신론적 자기수양을 통해 각자 득도를 하여 더 나은 '대동세상'을 준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비선실세'의 '영성'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민주주의'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영성' 가득한 수많은 미친 '빠돌이'들을 조장하고 있다. 이 '영성'들은 현대화된 '파시즘'이다.
그리하여 원체 '제국'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일통'은 21세기 새로운 '제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냥 놔둬도 한반도인들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끊임없이 '서구-유라시아' 간 '문명충돌'을 반복할 것으로 본다. 미국(일본) 편에 설 것인가, 중국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편에 설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지배계급은 조선말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서구 영미(일)'냐 '유라시아'냐 갈림길도 다르지 않다. 
'동학'의 '자주적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로마, 오스만, 중화 등의 '제국'들이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루르는 '포용'적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그 넓은 지역을 미처 다스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는 '이성'과 '근대화'를 명분으로 식민지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했다. 그 분할과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민족해방'과 '분리독립'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 역시 식민지를 강압적이고 배타적으로 직접 지배할 역량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지배력 따위는 애초에 인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이제 다시 제출된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세적 방향성은 거스를 수 없다 해도 '영성'과 '전통'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 무장된 '동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로서의 '동학'은 천재들의 사상접목이나 '득도'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조직화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5. 우리 각자의 '동학'으로


"미래의 사회주의... '고금 합작'...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하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 지 모른다. '대동세계', '태평천하'라는 옛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 [유라시아 견문 1], <35. 동서고금의 교차로, 카슈가르 - 중국에도 '서해'가 있다!>, 이병한.


수천 년의 문명적 전통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굳이 '영성' 복귀에서 찾을 것 없다. 우리의 전통적 조직과 공동체 문화의 재창조에 '황족' 또는 '왕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깨달음'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우리 전통의 '유불도' 사상과 결합한 '동학'의 현대화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우리의 '대동세상' 아니겠는가.
"포용적인 제국이 평등하다"는 식의 유발 하라리, 이중톈, 이병한 등의 천재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수의 '계급투쟁'으로 '동학'은 지금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 또한 내 나라가 '선진국'의 위상으로 피할 수 없는 '유라시아 대제국'에 당당히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학'은 내부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적 무장이 된다. 
지배계급은 '서구주의'의 수치로, [유라시아 견문]은'고금 합작'의 '영성'적 인문학으로, 피지배계급은 억압을 뚫은 다수 민중의 역동성으로 '동학'을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어느 편의 '동학'이 될지는 각자 발딛고 선 물질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다. 
노동계급인 내가 동의할 수만은 없지만, [유라시아 견문]의 '결론'으로 택한 단락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부국강병, 세속적 목표만 추구하는 나라는 이제 '후진국'이다. 속된 부르주아를 섬기는 논리(자유주의/시민민주주의)나 천한 프롤레타리아를 모시는 논리(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나 죄다 20세기의 적폐다. 인격을 드높이고 인륜을 다하며 인권을 누리는 '문명국가'가 '선진국'이다. '천상의 나라'를 지상에도 구현해 보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영성(靈性)'을 고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28. 아스타나, 카자흐스탄의 봄 - "通則不痛 不通則痛">, 이병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의 사상적 기준으로서 현대의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인가 각자 한 번은 돌아볼 일이다.


***

1.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6.
2.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3. [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9.

* 읽는 순서는 따로 없겠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결론'으로서 3권을 먼저, 
처음 떠나는 1권을 다음에, 
'중원'에서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재발견하는 2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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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유라시아 견문 1
이병한 지음 / 서해문집 / 201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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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학(東學)] -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의 기준
- [유라시아 견문 1~3], 이병한, <서해문집>, 2016~2019.


"과거(過去)는 해석(解釋)의 전장(戰場)이다... 
혼자 추억하면 노스탤지어지만, 다함께 추모하면 유토피아의 원동력이 된다. 고로 역사는 인과법칙을 따지는 과학을 초월한다. 주관적이며 예술적이고 창조적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13. 세르비아 베오그라드, 제국의 추억 - "나토는 가고, 티토는 오라!">, 이병한.


1. 다시 '동학'으로


20대에는 마르크스를 모시는 '과학적 사회주의자'였다. 30대에 들어서는 동아시아의 역사를 연구하는 '중국학자'였다. 40대가 되어 우리 역사로 돌아와 '동학(東學)'에 귀의했다. 이십대부터 전세계를 주유했는데, '동학'으로 돌아오기까지 수년 간 '유라시아' 대륙 사방을 '견문(見聞)'했다. 지금은 디지털 시대 '신동학(新東學)'의 길을 찾고 있다.

내 이야기가 아니다. 2016년부터 2018년까지 유럽과 아시아 일대를 다니며 <프레시안>의 [유라시아 견문]을 쓴 원광대 교수 이병한의 이야기다. 정말 부지런하고 공부 많이 한 사람 같다. 영어, 독일어, 중국어, 아랍어까지 각종 언어를 계속 익히면서 당대 유라시아 각 지역의 문명과 문자들을 직접 훑어본다. 타국을 돌며 수년을 살면서도 요가나 운동도 열심히 한단다. 나 같은 일반인은 범접도 못할 습성이다. 나보다 네 살 어린 사십대 중반인데 '동학'에 귀의했다니 아마도 21세기의 '수운 최제우'가 되고자 하는 '천재'인가 보다. 최제우는 서른일곱에 '접신'하고 '득도'했는데 조선말 당시에는 '늙은' 축에 들었을 것이나 21세기 '선진국' 대한민국에서 마흔넷은 '애기'다. 조선말 최제우는 그 나이도 되기 전 '난민(亂民)'의 죄를 쓰고 죽어갔지만 이 시대의 사십대는 아직 창창하다는 얘기다. 
그런데 이런 시대적 차이에도 불구하고 '동학'이 시대정신으로 주목받지 못하는 점은 같다.

'유물론자'를 자처하는 나도 지금껏 '서구사상'을 '유일신'으로 믿고 있다. '전체주의'와 '파시즘'을 비웃으며 '민주주의'에 찬동하고, '왕정'과 '제국주의'를 증오하며 '공화주의'를 앞세운다.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함께 실현하는 사상으로 '과학적 사회주의'에 기초한 '인민민주주의'를 선호한다. 다수가 사람답게 사는 '대동세상'을 건설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가 가장 옳은 방법론이라 판단한다는 말이다. 그 과정에서 한반도의 혁명가 삼봉 정도전을 쫓다가 성리학에 부딪혀 유학을 조금 엿보게 되었고, 동아시아 역사에 관심을 갖던 중 중국이라는 나라와 그 거대문명에 너무 빨려들 것을 경계하며 우리 역사로 되돌아서니 '동학'이 우뚝 서 있었다. 
'개벽(開闢)' 세상을 바란다면 "피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학'에 관한 글을 써보다가 그래도 젊은 시절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찬양했던 내가 정작 '동학'에 대해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선후배를 만나 '동학' 이야기를 나누었다. 삼십대였던 내가 '민주주의'에 관해 많은 영감을 받은 이진 선배와 우리의 토착사상에 조예가 깊은 후배 정평을 만나 '자문'을 구하던 중 평이 추천은 물론 친히 빌려주기까지 한 책이 바로 이병한 교수의 [유라시아 견문]이었다. '동학'에서 갈라져 나온 원불교의 학당에 자리잡은 그는 이 대장정의 견문을 통해 '좌-우', '근대-전근대', '서구-비서구'의 '3중 분단체제'를 넘는 21세기 '전환시대의 반전'을 '유라시아'의 신(新) '제국'에서 찾는다. 기존 20세기 영미와 서유럽 중심의 '자유민주주의'는 물론 실패한 현실사회주의 또한 동전의 양면이라는 시각으로 유럽과 아시아 대륙의 '대일통'과 '사통팔달'의 '대회통'을 통한 활발한 연대를 조망하고 그려나간다. 그리하여 '해석의 전장'인 과거 역사를 그 지역의 전통과 문명의 관점에서 재고찰한다. '객관성'과 '과학'으로 점철된 20세기 서구사상의 일방적 지배에서 벗어나 21세기에 다시금 '주관성'의 영역으로 돌아간다. 
그의 [유라시아 견문]을 한 문장으로 표현하라고 한다면 나는, "이성(理性)과 영성(靈性)의 '공진화(共進化)'"를 뽑겠다. 지난 백년 이상 지배한 서구의 '이성의 제국'을 넘어 '영성의 제국'이 함께 지배하는 세계, 그 안에서 다시 한반도의 '동학'을 재창조해야 한다는 것이다. 
매우 흥미롭고 재미있는 책이다. 
그러나 나로서는 절반만 동의하기로 한다.


2. [유라시아 견문]의 모티브 - '개벽' 이전의 '개화'


"탈냉전은 또 다른 개항기였다. 대륙으로, 유라시아로 다시 길이 열렸다. 왕년의 초원길, 바닷길에 하늘길까지 분주하다. 고로 '포스트모던'은 치우친 독법이었다. '서구적 근대의 종언'이자 '탈서구적 근대의 개막'이 더욱 합당할 것이다. 유라시아는 그 '지구적 근대'의 중원(中原)이다. 20세기에 억압되었던 역사의 무의식이 중국몽, 인도몽, 아세안몽, 이란몽, 터키몽으로 피어난다. 유라시아로 방향을 선회하여 견문을 이어가는 까닭이다. '헛개화'를 거두고 '진(眞)개화(開化)'를 이루는 새 역사의 현장을 목도하기를 소망한다. '개화'는 여전히, 영원히 진행형이다."
- [유라시아 견문 1], <2. 연행록과 견문록 - 개화기의 사대부 유길준, 우리는 그를 몰랐다>, 이병한.


[유라시아 견문] 제목의 모티브는 의외로 조선말 개화파 유길준의 [서유견문]이다. 조선 최초의 미국 유학생 유길준은 알고보면 '자주적 근대화'를 꿈꾼 사대부였다. 1894년 갑오동학농민전쟁이 패배한 이후인 1895년에 발간된 [서유견문]은 국한문혼용체라는 새로운 형식으로 조선의 전통사상인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서구의 학문을 받아들이고 '사대부'의 부흥을 통해 개화를 하자는 입장이었단다. 유길준이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만든 단체가 '흥사단(興士團)'이었다. '견문'이 가능했던 지배계급의 '개화' 중에서도 우리의 민중적 '동학'의 '개벽' 못지 않게 자주적인 '개화'가 있었던 것이다.

이병한의 [유라시아 견문]은 '자주적 근대화'의 관점에서 유럽과 동서남북의 아시아를 바라본다. 그 과정에서 서구의 '이성' 혁명에 억눌려 있던 각 지역의 '영성' 혁명에 주목한다. 그 실현태는 '철학'이 아니라 '종교'다. 서구 사상의 뿌리는 '기독교'이고, 동아시아는 '유교', 남아시아는 '불교', 북아시아 유목문화의 '텡그리(천명)' 사상을 넘어 러시아의 '그리스 동방정교'를 각 지역별 중심으로 삼는다. 여기서 지정학적으로 중요한 종교가 발견되는데 바로 동서남북을 잇는 중앙아시아의 '이슬람교'다. 
[유라시아 견문] 1권에서는 중국과 몽골, 실크로드 일대인 하서주랑과 동남아시아를 주유하며 유교와 불교 이야기가 많이 나오게 된다.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유교와 불교의 융합으로 문명을 이어왔고 이로써 우리도 토착된 '영성'을 재발굴하여 유라시아 대일통의 성원이 되자는 주장이다. 결국 [유라시아 견문]의 목표는 '동학'의 재발견이다. 저자에 의하면 '동학'은 '서학(천주교)'을 배타하지 않고 "되감아 치는 회심의 발군"(1권, <18. 인의예지의 공화국>)이자 전통을 내치지 않는 "유학의 민중화"이며, "사대부의 교양과 일상을 전 인민에게 널리 보급하는 동방형 민주화 기획"이었다. 국학의 지배사상으로 함몰되지 않고 "신세계와 신세기로 열린 고금 합작의 원조이고 원형"으로서 '동학'은 "서학과 국학의 분단체제를 허물고, 구학과 신학의 분단체제를 극복하는 동아시아학이 지향해야 할 덕목을 상당 부분 내장"(이상 같은책)하고 있는 "굉장하고 신통"한 사상이라고 반추하고 있다. '고금 합작'에 기반하여 서구적이고 근대적인 '계급투쟁'은 기각해 버린 저자가 보기에 '동학'은 농민전쟁의 주역인 다수 피지배민중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인 '자주적 개화파' 유길준까지 포괄하는 동아시아 유교적 '대장부'의 시각이겠다.
'동학'의 재발견으로 '아메리칸 드림'을 대체하는 유라시아 각 지역의 '중국몽', '인도몽', '터키몽', '러시아몽', '이란몽' 등 대제국적 '꿈(夢)'들의 연합에 우리도 주도적으로 참여하자는 것이다. 
참고로, 동아시아 문명권에서 살아온 우리는 '유-불-도'의 영향을 받았고 19세기 '동학'의 사상적 기반도 바로 '유-불-도+기독교(서학)'이었다.


3. '유라시아'의 문명사 - 수천 년의 '종교'적 '영성'


"유교가 한족만의 사상이 아니라 몽골족과 만주족, 조선인과 월남인을 막론하고 중화문명의 보편 이론으로 기능했던 것처럼, 이슬람 또한 아랍인들의 민족종교로 그치지 않았다. '이슬람의 집'에 귀의하는 만인만족에게 열려 있었다. 그 중에서도 가장 다대한 역할을 한 족군이 바로 튀르크(돌궐)다. 중앙유라시아를 동/서로 왕래하던 유목민이 이슬람에 귀의함으로써 '이슬람의 집'은 비약적인 도약을 이루게 된다. 중국의 서쪽이 '이슬람적 중국'이 된 것도, 인도의 북쪽이 '이슬람적 인도'가 된 것도 튀르크의 공헌이었다. 튀르크가 접속함으로써 이슬람은 세계 종교가 된 것이다. 그들이 일군 600년의 최장수 제국이 바로 '오스만제국'(1299~1922)이다."
- [유라시아 견문 2], <24. '이슬람의 집', 실향과 귀향 - 이슬람 천 년 제국, 부활의 날갯짓>, 이병한.


6.25 한국전쟁에 '자유국가'의 일원으로 참전하여 남한과 '형제국'이 된 터키 얘기가 아니다. 서구유럽에 의해 '유럽의 병자'라는 말을 들으며 1차 세계대전 패전으로 멸망하고 분열된 '오스만튀르트' 얘기다. [유라시아 견문] 2권에서 저자는 동남아시아와 중앙아시아 및 남아시아 인도를 잇는 미얀마의 역사로부터 시작하여 인도와 이란, 중앙아시아를 지나 이집트까지 돌아보며 '이슬람교'의 힘을 재발견한다. 물론 인도는 무굴제국 이전부터 토착종교인 힌두교가 주요 종교이나 1,2차 세계대전으로 승전국인 '서구' 영국이 분리독립시켜 분할지배하기 전까지는 북인도의 파키스탄과 방글라데시의 2억 명이 넘는 이슬람교도 공존했었다. 인도 아대륙 전체 16억 명 중 13억 힌두교에 3억 이슬람 뿐만 아니라 세계사에서 가장 활발한 해양교역의 장이었던 인도양을 둘러싸고 역시 3억 명 가까이 되는 인도네시아와 말레이시아를 포함하면 남아시아만 해도 13억 힌두교를 6억의 이슬람교가 포위한 형국이다. '중동'이나 '극동' 또한 서구의 시각인데 '유라시아' 입장에서 보면 '이슬람'의 근원지인 '중동'은 진정한 '중원'이다. '중원'을 자처하는 중국 조차 변방이다. 실크로드와 중국의 차마고도, 아랍의 향신료길이나 인도의 면화길 등으로 사방팔방 교역의 중심이었던 이 '중원'을 지배한 사상이 바로 '이슬람교'인 것이다. 칭기스칸 몽골제국이 분열하고 남서부 이슬람권에서 일어선 티무르제국과 중국 명나라가 충돌 직전 명나라가 동아시아 유교 문명권으로 찌그러지지 않았다면 어쩌면 또 다시 이루어졌을 지도 모를 유라시아 대일통의 도전은 세계의 중심답게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다. 지금은 이 일대에서 중국이 동남서 아시아를 다니며 육지의 '일대'와 해양의 '일로'를 적극 '지원'하고 있단다. 여기에 그리스 동방정교를 기반으로 유럽 일대를 장악하려는 러시아 문명권과 결합하면 그야말로 '세계의 중심'으로서 '유라시아' 대문명권이 형성된다는 것이다. '이슬람'은 이 다양한 대문명의 지도에서 사통팔달의 '윤활유'와 같다.
"이제 머리가 굳어" 힘들다는 이병한 교수는 2권의 말미에서 후세들에게 '이슬람학'을 꼭 공부할 것을 당부한다. 지정학 또는 지리학적으로 '세계의 중심(중원)'으로서 중앙아시아의 힘을 발견하기 위해 그들의 오래된 '영성', 이슬람교를 소환하고 재발견해야 한다고 역설한다. 
중앙아시아의 입장에서 영미유럽은 '극서'에 불과하다. 지금 민족과 종교로 산산히 분할된 유라시아는 20세기 서구 제국주의 산물이며 냉전기 '제3세계'의 비동맹과 '반둥회의(1955년)'는 다시 재조명되어야 한다. 새로운 세기 '유라시아 대제국'의 길이 바로 여기에 있으며 그 길에 이슬람의 역할은 역사적으로나 지리적으로 중요했고 앞으로 그럴 것이라고 저자는 전망한다.
이병한이 각 지역 '이니셔티브(주도권)'의 기준으로 잡는 것은 백여년의 '이성'의 '문화독재'가 아니라, 지난 수천년의 '문명자치'로서의 '종교'와 그로부터 퍼진 '영성'이다. 
동방의 유교와 도교, 남방의 불교, 북방의 그리스정교(기독교), 서방의 이슬람교와 카톨릭(기독교)이 '유라시아' 중앙에서 만나 융합한다. 


4. 그럼에도 동의할 수 없는 '제국'


'동학' 재발견의 불가피성을 깨닫기는 했으나, 나는 아직 종교적 '영성'에 동의하지 못한다. [유라시아 견문]의 관점에 절반만 수긍한다. 서구 중심 사상에서 탈피해 우리의 전통에 기반한 사상을 벼르고 준비해야 한다는 생각에는 전적으로 동의하되, 러시아 푸틴의 새로운 '동방정교'와 중국의 '일대일로(一帶一路)'의 새로운 '유라시아 제국주의'에 당최 동의할 수 없다. 그들의 정치체제가 서구의 '민주주의' 또는 '민주화' 잣대로 재단되는 것은 옳지 않다고 생각하나, '제국'의 '영성'으로 다수 민중이 우민화될 우려가 크다고 본다. [유라시아 견문]에서 다소 보이는 푸틴에 대한, 시진핑에 대한 호평은 지난 세기 '서구적 근대화'의 극복을 위한 노력 이상으로까지 보일 정도다. 러시아 푸틴의 책사 알렉산드르 두긴의 '러시아 정교주의'나 현대 '중국학'의 대가 후안강 인터뷰는 읽기 거북했다. 차르의 측근 라스푸틴이나 칭기스칸 같은 위인들이 회상되고 재영웅화 되는 순간, 우리의 '동학'은 '접신'과 '득도'한 '영성'만 믿고 쓰러져간 조선말 다수 농민의 슬픈 길만을 반복할 것 같기 때문이다. 
물론, 신시대와 신세기의 다수 민중은 우매하지 않고 지배자들보다 훨씬 똑똑하다. 모든 사람들이 '영성'으로 수양하고, 특히 유학의 전통문명권에 속한 우리 조선인들은 무신론적 자기수양을 통해 각자 득도를 하여 더 나은 '대동세상'을 준비할 수 있겠다. 하지만 그러는 중에 '비선실세'의 '영성'에 의해 조종당하는 꼭두각시가 나타났다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체한 '민주주의' 정권은 좌우를 막론하고 '영성' 가득한 수많은 미친 '빠돌이'들을 조장하고 있다. 이 '영성'들은 현대화된 '파시즘'이다.
그리하여 원체 '제국' 자체를 싫어하는 나에게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일통'은 21세기 새로운 '제국' 이상도 이하도 아니며 그냥 놔둬도 한반도인들은 그 지정학적 특성상 끊임없이 '서구-유라시아' 간 '문명충돌'을 반복할 것으로 본다. 미국(일본) 편에 설 것인가, 중국 편에 설 것인가, 러시아 편에 설 것인가. 갈팡질팡하는 지배계급은 조선말이나 지금이나 같은 모습이다. '서구 영미(일)'냐 '유라시아'냐 갈림길도 다르지 않다. 
'동학'의 '자주적 현대화'가 필요한 이유다.

로마, 오스만, 중화 등의 '제국'들이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루르는 '포용'적 면모를 보였던 이유는 그들이 탐욕스럽게 차지했던 그 넓은 지역을 미처 다스릴 역량이 없었기 때문이다. 20세기 과학과 자본주의 발전으로 인해 필연적으로 귀결된 '국가독점자본주의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는 '이성'과 '근대화'를 명분으로 식민지들을 직접 지배하려고 했다. 그 분할과 재분할의 결과가 바로 '민족해방'과 '분리독립'이었다. 그러나 '제국주의' 세력 역시 식민지를 강압적이고 배타적으로 직접 지배할 역량이 없었다. 어쩌면 그런 지배력 따위는 애초에 인류에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유라시아 견문]을 통해 이제 다시 제출된 다문화와 다종교를 아우르는 '유라시아 대제국'의 대세적 방향성은 거스를 수 없다 해도 '영성'과 '전통'이 아닌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로 무장된 '동학'이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다.

내가 보기에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로서의 '동학'은 천재들의 사상접목이나 '득도'가 아니라, 다수 민중의 깨달음과 조직화에서 재발견되어야 한다.


5. 우리 각자의 '동학'으로


"미래의 사회주의... '고금 합작'... 각자의 문명적 고유성과 사회주의적 보편성을 튼튼하게 결합하는 '신사회주의 프로젝트'이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역사적 문명을 배격하고 배타했다는 점에서 자본주의의 쌍생아였다. 그러나 미래의 사회주의는 저마다의 문명에 바탕을 둔 '오래된 사회주의'에 빗댈 수 있을 것 같다. 즉 '역사의 종언'도 아니고 '문명의 충돌'도 아닌 '역사적 사회주의', '문명적 사회주의'이다. '과학적 사회주의'가 아니라 '인문적 사회주의'이다. 2050년의 동아시아라면 '사회주의(Socialism)'라는 꼬리표도 떼어낼 지 모른다. '대동세계', '태평천하'라는 옛말이 한결 더 어울릴 법하다."
- [유라시아 견문 1], <35. 동서고금의 교차로, 카슈가르 - 중국에도 '서해'가 있다!>, 이병한.


수천 년의 문명적 전통으로서 종교의 역할을 굳이 '영성' 복귀에서 찾을 것 없다. 우리의 전통적 조직과 공동체 문화의 재창조에 '황족' 또는 '왕족'이 없이 모두가 평등한 '깨달음'의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를 우리 전통의 '유불도' 사상과 결합한 '동학'의 현대화가 바로 한반도의 '사회주의', 우리의 '대동세상' 아니겠는가.
"포용적인 제국이 평등하다"는 식의 유발 하라리, 이중톈, 이병한 등의 천재들의 말을 단호하게 부정하는 다수의 '계급투쟁'으로 '동학'은 지금 되살아나야 한다.

우리나라도 최근에 '공식적'으로 '선진국' 반열에 올랐다고 한다. 나 또한 내 나라가 '선진국'의 위상으로 피할 수 없는 '유라시아 대제국'에 당당히 참여하기를 바란다. 그렇기 때문에 더욱 '동학'은 내부를 위한 사상이 아니라 외부로 확장함에 반드시 필요한 사상적 무장이 된다. 
지배계급은 '서구주의'의 수치로, [유라시아 견문]은'고금 합작'의 '영성'적 인문학으로, 피지배계급은 억압을 뚫은 다수 민중의 역동성으로 '동학'을 다시 만들어갈 것이다. 어느 편의 '동학'이 될지는 각자 발딛고 선 물질적인 계급적 토대에 기반할 것이다. 
노동계급인 내가 동의할 수만은 없지만, [유라시아 견문]의 '결론'으로 택한 단락을 인용하며 서평을 마무리한다.


"부국강병, 세속적 목표만 추구하는 나라는 이제 '후진국'이다. 속된 부르주아를 섬기는 논리(자유주의/시민민주주의)나 천한 프롤레타리아를 모시는 논리(사회주의/인민민주주의)나 죄다 20세기의 적폐다. 인격을 드높이고 인륜을 다하며 인권을 누리는 '문명국가'가 '선진국'이다. '천상의 나라'를 지상에도 구현해 보겠다는 발심을 일으키고 '영성(靈性)'을 고양하는 나라가 '선진국'이다."
- [유라시아 견문 3], <28. 아스타나, 카자흐스탄의 봄 - "通則不痛 不通則痛">, 이병한.


'유라시아 이니셔티브(주도권)'의 사상적 기준으로서 현대의 '동학'은 우리에게 어떤 모습인가 각자 한 번은 돌아볼 일이다.


***

1. [유라시아 견문 1 - 몽골 로드에서 할랄 스트리트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6.
2. [유라시아 견문 2 - 히말라야에서 지중해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8.
3. [유라시아 견문 3 - 리스본에서 블라디보스토크까지], 이병한, <서해문집>, 2019.

* 읽는 순서는 따로 없겠으나 나는, 
집으로 돌아오는 '결론'으로서 3권을 먼저, 
처음 떠나는 1권을 다음에, 
'중원'에서 '이슬람'으로 대표되는 '종교'를 재발견하는 2권을 마지막으로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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