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속 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 위기 시대의 자본론
사이토 고헤이 지음, 김영현 옮김 / 다다서재 / 2021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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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고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
- [지속불가능 자본주의](2020)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 사이토 고헤이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1883년에 죽은 그가 1867년에 출간한 [자본론] 제1권은 '상품'이라는 '개별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체제라는 '보편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서술방식은 "개별은 보편"이라는 헤겔 논리학의 '변증법'이었다. 
1867년의 [자본론] 1권은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전 '독일 이데올로기'나 '철학/경제학 초고' 시기의 '철학'적 단계와 단절되는 '과학'적 단계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단계는 1851년 망명지 영국의 대영도서관에서 작성된 마르크스의 24권 '런던노트'였다. 
마르크스는 미완의 발췌록과 노트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돌아갔고 그의 사후에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자본론] 2권(자본의 순환), 3권(자본의 총생산과 지대, 이윤 등), 그들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칼 카우츠키에 의해 4권에 해당되는 '잉여가치 학설사'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부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신세(人新世/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부르는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연대하여 '자본의 전제(專制)'에서 인류의 유일한 고향 지구를 지켜낸다면, 그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인신세'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자본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한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마치며>, 2020.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사이토 고헤이(1987~)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과 편지, 연구노트 등 일체 출간을 위해 'MEGA(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 작업에 참여하는 학자다. 그가 독일에서 출간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였다. [자본론]을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방대한 연구노트와 발췌 등을 '훈고학'적으로 추척하여 마르크스가 말년에 기획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생태사회주의'를 이어서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논문의 영문판은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에게 수여된다는 아이작 도이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는 박사논문이었거니와 마르크스의 초고들의 발췌를 기본으로 했으니 상당히 딱딱하고 문헌적이며 어찌보면 교조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음에도 동일하게 '성장주의'였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말년에 자연과 인간의 원활한 '대사'와 교류를 기획했던 '생태주의'였으며 그러므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지와 후계자에 의해 편집되고 요약되어 속간된 [자본론]이 아니라 당대부터 성장 제일주의였던 자본주의와 투쟁하던 '자연과학'이었던 생태주의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자본론]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론] 연구를 이르는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고, '생태사회주의'로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제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다시 살아난다. 2017년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라는 딱딱한 논문을 벗어나 사이토 고헤이는 2020년에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라는 대중서를 냈는데, 그 부제는 '인신세의 자본론'이고 국역은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다.

'인신세'는 사이토 고헤이의 일본식 작법인 듯 하다. 1995년에 노벨 화학상를 받은 파울 크뤼천이 썼다는 '인류세'를 지칭한다. 정해진 번역어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명칭으로 지금의 신생대 중 인류에 의해 지구가 장악된 시기를 일컫는 일종의 비유적인 용어다. 번역자는 고헤이의 원문에 따라 '인신세'라 쓰나 내게는 '인류세'가 익숙하니,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는 결국 '인류세의 [자본론]'을 뜻한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후계자들을 제치고 이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자본론]을 쓰겠다는 젊은 학자의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망친 지금의 '인류세'는 '자본세'라 불러야 마땅하나, 인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인류와 자연이 원활한 교류를 해야 하므로 그냥 '인류세(인신세)'로 부르면서 자신이 연구한 말년의 마르크스 [자본론] 연구를 토대로 '탈성장 코뮤니즘'의 실천을 당장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학자지만 '이론'적 비판에 머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분석만 하고 있다가 지구 온도가 2~3도 이상 오르면 한 세대 이내 지구의 대부분은 사막화되고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자본가들만 살아남거나 여차하면 그 소수만 우주 밖으로 탈주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장과 이윤을 위해 인간의 노동은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와 자연을 끊임없이 비틀어짜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당장 뒤엎는 실천을 해야하며, 그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를 이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가 말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쓰가 발표한 '3.5퍼센트 수치'는 '3.5%가 먼저 진심으로 실천하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법칙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역사속 '민중항쟁'과 혁명을 통해 보아왔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시한 전세계적 사례에서는 빠졌지만 우리의 2016년 촛불항쟁의 시초도 거의 '3.5%'였을 게다. 
그래서 사이토 고헤이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 말하는 당장의 실천 또한 기다릴 것 없이 '3.5%'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뤄지는 마르크스 재해석의 핵심개념 중 하나는 '커먼(common)' 혹은 '공(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커먼'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富)를 가리킨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라는 두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제기하여 단숨에 유명해진 개념이다... '제3의 길'인 '커먼'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 '인신세'의 마르크스>, 202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초고들을 추적한다. 1844년의 '파리노트'에서는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년 헤겔학파'의 철학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노동'에 기초한 사회혁명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획한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정국에서 [공산당선언]으로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잡았지만 현실의 혁명은 실패했고, 1849년 영국 망명 이후 작성된 1851년의 '런던노트'에서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에서 '정치경제학자'로 진화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으로서 [자본론]은 자본주의 총생산 분석의 틀은 잡았으나 마르크스는 이 [자본론]의 기획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과 그로 인한 노동의 '소외', 교환가치를 매개로 하면서 인적 관계를 물적 관계로 은폐하는 '물신화(물상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노동으로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의 왜곡은 지구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적 약탈로 이어지지만 지구환경이 망한다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의 자기증식 경향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작업은 막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국가, 그리고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자본론]의 대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기후위기 '인류세'에서는 더 이상 연구만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지구와 인류문명의 멸망으로 멈추기 전에 다수 대중의 '3.5%'부터 시작되는 당장의 실천으로 이 자본주의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온 다음해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을 심도깊게 공부한다. 그는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당시 그가 연구하던 '자연과학'은 '지대'에 관한 연구를 심화시키기 위해 참고하던 '농업학'이었다. 유스투스 본 리비히와 칼 니콜라우스 프라스라는 농학자들을 우리는 잘 모른다. 이들은 '인클로저' 운동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농축산업에 의한 토지생산성 약탈을 우려했고 마르크스는 이들의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통찰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자본론] 연구에서 "너무나 큰 이론적 전환"([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이 이루어졌고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미완으로 남았다.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남긴 그것을 넘어서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다시금 잇는 실천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은 한가한 이론적 선택이 아니다.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우리 다수대중에겐 다른 선택지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에 맞서 미국에서조차 젊은이들 과반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이 체제의 '지속성장'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먹고 사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선전하던 이 자본주의 체제는 다수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을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모두 경제성장으로 번 돈으로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자본주의적 희망은 그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다. 그리하여 현재 자본주의가 이룬 경제성과를 배분하는 'FALC'도 등장했다. 아론 바스타니의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선언(FALC)](2019)은 바로 자본주의적 공공재를 절대다수가 재전유하여 불평등 체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아론 바스타니의 주장은 그 바람직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생산력(기술발전)'의 함정에 걸린 "가속주의라는 현실도피"([지속불가능 자본주의], <5>)에 불과하다. '노동의 종말'이나 '엔트로피 법칙' 따위로 '미래학자' 행세를 하는 제레미 리프킨 같은 학자가 내놓는 대안들이나 '그린 뉴딜' 또한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기반한 '가속주의' 또는 '기후 케인즈주의'로 분류된다.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나 '생산력(기술) 발전'이 아니라 '탈성장'이며 다수들의 연대에 기반한 '연합체(association)'다. 지금의 성장으로도 다수 인류가 충분히 번영을 이루며 살 수 있으니 후진국(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자연과 노동력에 대한 선진국(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약탈과 착취를 멈추고 소수에 독점된 '커먼(common)'을 다수가 재전유하는 '연합'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다. '탈성장'을 지향하는 다수 개인들이 연합하여 지구가 망하든 말든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기만 하다가 안되면 지구를 떠나겠다는 소수의 발상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커먼(common)'이라는 용어 또한 정해진 번역어는 없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1998), [어셈블리](2017)를 통해 다수대중인 '다중'(multitude/mass worker/people)'이 '공통적인 것(common)'을 재전유하는 '연합(association)'을 이야기한다. 즉 '커먼'을 더 많이 만들어 봐야 결국 소수가 독점하는 '결핍의 자본주의'를 벗어나, 현재의 '커먼'과 공공재를 그것을 만든 다수가 재전유하는 '풍요의 코뮤니즘'으로 이행시키는 열쇠는 '평등'과 '탈성장'을 공유하는 전세계적 연합체인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지향하는 '자/개/연(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의 현대화다.


"지금 사람들이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바로 '생산'일 것이다. 그러니 '변혁'을 형한 첫걸음은 '생산(노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7.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2020.


[21세기 자본]의 '자유주의'에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참여사회주의'로 이행한 토마 피케티에 대한 사이토 고헤이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에 기반한 '생태주의'를 결합하되, 피케티처럼 마르크스를 구닥다리로 보지 않고 지속적으로'현대화'시키는 당장의 실천을 위해 그 이론적 기초를 추적하는 것이 사이토 고헤이의 지적 여정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쓰는 '인신세(인류세)의 [자본론]'의 결론은 '노동'과 '생산'에 여전히 기반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 :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멈추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물질대사'로서의 '사용가치'가 양적이고 '물신화(물상화)'된 '교환가치'보다 우선될 것.
2) '노동시간 단축' : '노동일' 단축과 '생산혁신'을 통해 '교환가치'의 양적 생산영역이 아닌 '사용가치'의 질적 생산영역인 여가노동(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것.
3) '획일적인 분업폐지' : 노동자가 생산의 일부만이 아니라 생산과정 일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물을 함께 전유할 것.
4) '생산과정의 민주화' : 노동자 자주관리와 상호부조에 기초한 민주적인 생산과정은 '경제성장'의 덫에 빠지지 않는 '탈성장'의 기본 운영구조이므로 더디더라도 생산과정 일체를 민주화할 것.
5) '필수노동 중시' : '교환가치' 우선의 '물신화'를 극복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돌봄(감정)노동과 공공재 생산의 '필수노동'은 기계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중시하고 지켜낼 것.


막연한가?
언제 어느 시절에도 '변혁'과 '혁명'은 그래 왔다. 그럼에도 '인류세'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인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환경의 운명을 책임지는 임무는 우주 먼 별에서 그랜다이저를 타고 온 '듀크프리드' 왕자나 소수 독점자본가와 정치권력이 아니라 화성으로 도망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대다수에게 있다.

사이토 고헤이는 '소비주의'적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부터 플라스틱 줄이기와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 등을 실천하면서 더 나아가 진지하게 '탈성장'과 다시금 '평등'을 곱씹어 봐야겠다.
[자본론]의 전체적인 윤곽은 잡았지만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 복원에 머리를 싸맨 채 도서관에 처박혀 '자연과학(생태학)'과 게르만 '마르크공동체', 러시아의 '미르' 등과 같은 '지역공동체' 등을 공부하며 여전히 '런던노트'를 쓰던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커피숍에서도 플라스틱 빨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인류세의 [자본론]'이다.

***

1.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2.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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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
사이토 고헤이 지음, 추선영 옮김 / 두번째테제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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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이토 고헤이의 '인류세의 [자본론]'
- [지속불가능 자본주의](2020) /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 사이토 고헤이


칼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완성할 수 없었다. 
1883년에 죽은 그가 1867년에 출간한 [자본론] 제1권은 '상품'이라는 '개별자'를 통해 '자본주의'의 거대한 생산체제라는 '보편자'를 과학적으로 분석하는 위대한 첫걸음이었다. 서술방식은 "개별은 보편"이라는 헤겔 논리학의 '변증법'이었다. 
1867년의 [자본론] 1권은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시기에 발표된 [공산당선언]을 분기점으로 하여 이전 '독일 이데올로기'나 '철학/경제학 초고' 시기의 '철학'적 단계와 단절되는 '과학'적 단계의 서막이었다. 그리고 그 준비단계는 1851년 망명지 영국의 대영도서관에서 작성된 마르크스의 24권 '런던노트'였다. 
마르크스는 미완의 발췌록과 노트를 남긴 채 저 세상으로 돌아갔고 그의 사후에 평생의 동지인 프리드리히 엥겔스에 의해 [자본론] 2권(자본의 순환), 3권(자본의 총생산과 지대, 이윤 등), 그들의 후계자로 여겨지던 칼 카우츠키에 의해 4권에 해당되는 '잉여가치 학설사'로 출간되었다.
그러나,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결코 완성될 수 없었다.


"자본주의가 지구를 부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면 '인신세(人新世/인류세:Anthropocene)'가 아니라 '자본세'라고 부르는게 어울릴지도 모르겠다. 그렇지만 사람들이 연대하여 '자본의 전제(專制)'에서 인류의 유일한 고향 지구를 지켜낸다면, 그때는 긍정적인 의미로 인류의 새로운 시대를 '인신세'라 부르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자본에 대해 철저하게 분석한 '인신세의 자본론'이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마치며>, 2020.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 연구자 사이토 고헤이(1987~)는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저작과 편지, 연구노트 등 일체 출간을 위해 'MEGA(마르크스-엥겔스 전집:Marx-Engels Gesamtausgabe)' 작업에 참여하는 학자다. 그가 독일에서 출간한 마르크스주의 철학 박사학위 논문의 주제는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였다. [자본론]을 준비하던 마르크스의 방대한 연구노트와 발췌 등을 '훈고학'적으로 추척하여 마르크스가 말년에 기획하다가 미완으로 남긴 '생태사회주의'를 이어서 복원하려는 시도다. 이 논문의 영문판은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이란 부제를 달고 뛰어난 마르크스주의 연구자에게 수여된다는 아이작 도이처상을 받았다고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2017)는 박사논문이었거니와 마르크스의 초고들의 발췌를 기본으로 했으니 상당히 딱딱하고 문헌적이며 어찌보면 교조적이기까지 하다. 결론은 마르크스는 자본주의를 분석하고 비판했음에도 동일하게 '성장주의'였다는 세간의 평가와는 달리 말년에 자연과 인간의 원활한 '대사'와 교류를 기획했던 '생태주의'였으며 그러므로 기후위기의 시대에 부활해야 한다는 것이다. 동지와 후계자에 의해 편집되고 요약되어 속간된 [자본론]이 아니라 당대부터 성장 제일주의였던 자본주의와 투쟁하던 '자연과학'이었던 생태주의 연구를 마무리하지 못하고 죽는 바람에 마르크스는 자신의 [자본론]을 완성하지 못했던 것이다. [자본론] 연구를 이르는 '정치경제학 비판'은 그렇게 미완으로 끝났고, '생태사회주의'로서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은 이제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다시 살아난다. 2017년의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라는 딱딱한 논문을 벗어나 사이토 고헤이는 2020년에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라는 대중서를 냈는데, 그 부제는 '인신세의 자본론'이고 국역은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다.

'인신세'는 사이토 고헤이의 일본식 작법인 듯 하다. 1995년에 노벨 화학상를 받은 파울 크뤼천이 썼다는 '인류세'를 지칭한다. 정해진 번역어도 없고 학문적으로도 확정되지 않은 명칭으로 지금의 신생대 중 인류에 의해 지구가 장악된 시기를 일컫는 일종의 비유적인 용어다. 번역자는 고헤이의 원문에 따라 '인신세'라 쓰나 내게는 '인류세'가 익숙하니, 사이토 고헤이의 [지속불가능 자본주의]는 결국 '인류세의 [자본론]'을 뜻한다. 수많은 마르크스주의 후계자들을 제치고 이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마르크스의 뒤를 이어 [자본론]을 쓰겠다는 젊은 학자의 자신감이 참으로 대단하다. 
그는 자본주의가 지구를 망친 지금의 '인류세'는 '자본세'라 불러야 마땅하나, 인류는 자본주의를 극복하고 다시 인류와 자연이 원활한 교류를 해야 하므로 그냥 '인류세(인신세)'로 부르면서 자신이 연구한 말년의 마르크스 [자본론] 연구를 토대로 '탈성장 코뮤니즘'의 실천을 당장 시작하자고 제안한다. 학자지만 '이론'적 비판에 머물 시간이 없기 때문이다. 이대로 분석만 하고 있다가 지구 온도가 2~3도 이상 오르면 한 세대 이내 지구의 대부분은 사막화되고 지금처럼 소수의 독점자본가들만 살아남거나 여차하면 그 소수만 우주 밖으로 탈주하게 된다. 그렇지 못한 절대다수 민중들에게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성장과 이윤을 위해 인간의 노동은 물론 근본적으로 지구와 자연을 끊임없이 비틀어짜고 착취하는 자본주의를 당장 뒤엎는 실천을 해야하며, 그 이론적이고 과학적인 무기를 이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가 말년에 준비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하버드대 정치학자 에리카 체노웨쓰가 발표한 '3.5퍼센트 수치'는 '3.5%가 먼저 진심으로 실천하면 다수에 의한 변화가 가능하다는 법칙이라는데, 우리는 이미 역사속 '민중항쟁'과 혁명을 통해 보아왔다. 사이토 고헤이가 예시한 전세계적 사례에서는 빠졌지만 우리의 2016년 촛불항쟁의 시초도 거의 '3.5%'였을 게다. 
그래서 사이토 고헤이의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이 말하는 당장의 실천 또한 기다릴 것 없이 '3.5%'부터 시작하자는 것이다.


"최근 들어 이뤄지는 마르크스 재해석의 핵심개념 중 하나는 '커먼(common)' 혹은 '공(共)'이라고 불리는 것이다. '커먼'이란 사회적으로 사람들에게 공유되고 관리되어야 하는 부(富)를 가리킨다. 20세기의 마지막 해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라는 두 마르크스주의자가 [제국]이라는 책에서 제기하여 단숨에 유명해진 개념이다... '제3의 길'인 '커먼'은 수도, 전력, 주택, 의료, 교육 등을 '공공재'로 삼아서 사람들이 스스로 민주주의적으로 관리하는 것을 목표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 '인신세'의 마르크스>, 2020.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에서 사이토 고헤이는 마르크스의 초고들을 추적한다. 1844년의 '파리노트'에서는 '소외' 개념을 중심으로 포이어바흐로부터 영향을 받은 '청년 헤겔학파'의 철학적 경향이 두드러진다. '노동'에 기초한 사회혁명의 '과학적 사회주의'를 기획한 1848년 유럽 노동계급 혁명의 정국에서 [공산당선언]으로 역사유물론의 기초를 잡았지만 현실의 혁명은 실패했고, 1849년 영국 망명 이후 작성된 1851년의 '런던노트'에서는 정치경제학에 관한 방대한 연구를 통해 '철학자'에서 '정치경제학자'로 진화한다. 자본주의 체제에 관한 과학적이고 비판적인 분석으로서 [자본론]은 자본주의 총생산 분석의 틀은 잡았으나 마르크스는 이 [자본론]의 기획을 한꺼번에 완성할 수 없었다. 인간의 합목적적 노동을 통해 생산된 사용가치와 교환가치의 이중성과 그로 인한 노동의 '소외', 교환가치를 매개로 하면서 인적 관계를 물적 관계로 은폐하는 '물신화(물상화)'로 나타나는 자본주의적 생산관계, 노동으로 이어지는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의 왜곡은 지구환경에 대한 자본주의적 약탈로 이어지지만 지구환경이 망한다 해도 결코 멈추지 않는 자본의 자기증식 경향에서 마르크스의 [자본론] 작업은 막히고 말았다. 그로 인해 마르크스는 '잉여가치'와 국가, 그리고 국제정치와 세계사를 아우르는 [자본론]의 대기획을 완성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의 이 기후위기 '인류세'에서는 더 이상 연구만 할 시간이 주어지지 않는다. 
결국 지구와 인류문명의 멸망으로 멈추기 전에 다수 대중의 '3.5%'부터 시작되는 당장의 실천으로 이 자본주의 체제에 제동을 걸어야 한다. 

[자본론] 1권이 나온 다음해인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는 '자연과학'을 심도깊게 공부한다. 그는 '생태학'이라는 용어를 쓰지 않았으나 당시 그가 연구하던 '자연과학'은 '지대'에 관한 연구를 심화시키기 위해 참고하던 '농업학'이었다. 유스투스 본 리비히와 칼 니콜라우스 프라스라는 농학자들을 우리는 잘 모른다. 이들은 '인클로저' 운동를 비롯한 자본주의적 대량생산 농축산업에 의한 토지생산성 약탈을 우려했고 마르크스는 이들의 이론을 통해 자본주의가 자연에 미치는 영향에 대해 통찰했다. 따라서 지금까지의 [자본론] 연구에서 "너무나 큰 이론적 전환"([지속불가능 자본주의], <4>)이 이루어졌고 그의 정치경제학 비판이 미완으로 남았다. 따라서 우리가 이어받아야 할 마르크스의 [자본론]은 엥겔스와 카우츠키가 남긴 그것을 넘어서 마르크스가 완성하지 못한 '인간과 자연과의 물질대사'를 다시금 잇는 실천에서 그 유산을 이어받아야 한다. 사이토 고헤이의 주장은 한가한 이론적 선택이 아니다. 기후위기의 '인류세'에서 우리 다수대중에겐 다른 선택지도 없고 기다릴 시간도 없기 때문이다. 

최근 신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의 '불평등'에 맞서 미국에서조차 젊은이들 과반수가 '사회주의'를 지지하고 있다. 우리나라를 포함하여 젊은 세대들은 더 이상 이 체제의 '지속성장'을 기다릴 만한 여유가 없다. "먹고 사는 게 제일 우선"이라고 선전하던 이 자본주의 체제는 다수를, 특히 우리의 미래세대인 젊은이들을 궁핍의 나락으로 내몰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까지 모두 경제성장으로 번 돈으로 화성에 가서 살 수 있을지 모른다는 자본주의적 희망은 그 실현 가능성이 너무도 희박하다. 그리하여 현재 자본주의가 이룬 경제성과를 배분하는 'FALC'도 등장했다. 아론 바스타니의 [완벽하게 자동화된 화려한 공산주의 선언(FALC)](2019)은 바로 자본주의적 공공재를 절대다수가 재전유하여 불평등 체제를 타파할 수 있다는 매우 낙관적인 전망까지 내놓았다. 그러나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아론 바스타니의 주장은 그 바람직한 목표에도 불구하고 '경제성장'과 '생산력(기술발전)'의 함정에 걸린 "가속주의라는 현실도피"([지속불가능 자본주의], <5>)에 불과하다. '노동의 종말'이나 '엔트로피 법칙' 따위로 '미래학자' 행세를 하는 제레미 리프킨 같은 학자가 내놓는 대안들이나 '그린 뉴딜' 또한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에 기반한 '가속주의' 또는 '기후 케인즈주의'로 분류된다.

사이토 고헤이에 의하면 중요한 것은 '경제성장'이나 '생산력(기술) 발전'이 아니라 '탈성장'이며 다수들의 연대에 기반한 '연합체(association)'다. 지금의 성장으로도 다수 인류가 충분히 번영을 이루며 살 수 있으니 후진국(글로벌 사우스:global south)의 자연과 노동력에 대한 선진국(글로벌 노스:global north)의 약탈과 착취를 멈추고 소수에 독점된 '커먼(common)'을 다수가 재전유하는 '연합'이 필요하다. 이야말로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선언]에서 말한 '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다. '탈성장'을 지향하는 다수 개인들이 연합하여 지구가 망하든 말든 자본주의적으로 경제를 성장시키기만 하다가 안되면 지구를 떠나겠다는 소수의 발상에 강력한 제동을 걸어야 한다. '커먼(common)'이라는 용어 또한 정해진 번역어는 없다. 이탈리아 정치학자 안토니오 네그리와 마이클 하트는 [제국](1998), [어셈블리](2017)를 통해 다수대중인 '다중'(multitude/mass worker/people)'이 '공통적인 것(common)'을 재전유하는 '연합(association)'을 이야기한다. 즉 '커먼'을 더 많이 만들어 봐야 결국 소수가 독점하는 '결핍의 자본주의'를 벗어나, 현재의 '커먼'과 공공재를 그것을 만든 다수가 재전유하는 '풍요의 코뮤니즘'으로 이행시키는 열쇠는 '평등'과 '탈성장'을 공유하는 전세계적 연합체인 것이다. 
[공산당선언]에서 지향하는 '자/개/연(자유로운 개인들의 연합체)'의 현대화다.


"지금 사람들이 당사자로서 능동적으로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수 있는 영역이 남아 있다면 바로 '생산'일 것이다. 그러니 '변혁'을 형한 첫걸음은 '생산(노동)'에서 시작해야 한다."
- 사이토 고헤이,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7. '탈성장 코뮤니즘'이 세계를 구한다>, 2020.


[21세기 자본]의 '자유주의'에서 [자본과 이데올로기]의 '참여사회주의'로 이행한 토마 피케티에 대한 사이토 고헤이의 평가는 긍정적이다. 여기에 기후위기 문제에 기반한 '생태주의'를 결합하되, 피케티처럼 마르크스를 구닥다리로 보지 않고 지속적으로'현대화'시키는 당장의 실천을 위해 그 이론적 기초를 추적하는 것이 사이토 고헤이의 지적 여정이다. 그리하여 일본의 젊은 마르크스주의자가 쓰는 '인신세(인류세)의 [자본론]'의 결론은 '노동'과 '생산'에 여전히 기반하면서 다음과 같이 정리된다.

1) '사용가치 경제로의 전환' : 자연에 대한 무한한 착취를 멈추기 위해 인간과 자연의 본래적 '물질대사'로서의 '사용가치'가 양적이고 '물신화(물상화)'된 '교환가치'보다 우선될 것.
2) '노동시간 단축' : '노동일' 단축과 '생산혁신'을 통해 '교환가치'의 양적 생산영역이 아닌 '사용가치'의 질적 생산영역인 여가노동(시간)을 더 많이 확보할 것.
3) '획일적인 분업폐지' : 노동자가 생산의 일부만이 아니라 생산과정 일체를 통제함으로써 자신의 노동으로 만든 생산물을 함께 전유할 것.
4) '생산과정의 민주화' : 노동자 자주관리와 상호부조에 기초한 민주적인 생산과정은 '경제성장'의 덫에 빠지지 않는 '탈성장'의 기본 운영구조이므로 더디더라도 생산과정 일체를 민주화할 것.
5) '필수노동 중시' : '교환가치' 우선의 '물신화'를 극복하고 인간을 중심으로 하는 돌봄(감정)노동과 공공재 생산의 '필수노동'은 기계화의 경향에도 불구하고 중시하고 지켜낼 것.


막연한가?
언제 어느 시절에도 '변혁'과 '혁명'은 그래 왔다. 그럼에도 '인류세'에서의 근본적인 전환을 위한 인류의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지구환경의 운명을 책임지는 임무는 우주 먼 별에서 그랜다이저를 타고 온 '듀크프리드' 왕자나 소수 독점자본가와 정치권력이 아니라 화성으로 도망갈 가능성이 전혀 없는 절대다수에게 있다.

사이토 고헤이는 '소비주의'적 운동만으로는 부족하다고 했지만, 나부터 플라스틱 줄이기와 일회용품 안 쓰기 운동 등을 실천하면서 더 나아가 진지하게 '탈성장'과 다시금 '평등'을 곱씹어 봐야겠다.
[자본론]의 전체적인 윤곽은 잡았지만 인류와 자연과의 관계 복원에 머리를 싸맨 채 도서관에 처박혀 '자연과학(생태학)'과 게르만 '마르크공동체', 러시아의 '미르' 등과 같은 '지역공동체' 등을 공부하며 여전히 '런던노트'를 쓰던 1868년 이후의 마르크스를 떠올리면서 말이다.
지금 이 글을 쓰는 커피숍에서도 플라스틱 빨대는 받지 않았다.

그것이 내가 쓰는 '인류세의 [자본론]'이다.

***

1. [지속불가능 자본주의 - 기후위기 시대의 자본론](2020), 사이토 고헤이, 김영현 옮김, <다다서재>, 2021.
2. [마르크스의 생태사회주의 - 자본, 자연, 미완의 정치경제학 비판](2017), 사이토 고헤이, 추선영 옮김, <두번째테제>,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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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2 한길그레이트북스 64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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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을 읽던 시간 : 1997년 가을
- [정신현상학](1806), G.W.F. Hegel,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97.


1.

"말하자면 이제 '의식'은 오직 자기 자신을 음미하고 검증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순수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기만 하면 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의식'은 한편으로는 '대상'의, '대상'을 향한 '의식'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만 관여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 G.W.F. Hegel, [정신현상학], <서론>, 1806.


그 해 여름이 더웠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해 12월이면 전역이었고, 전 해 가을에는 생전 처음 '사랑'이란 걸 시작한 터였기에, 스물다섯 내 청춘은 가장 뜨거웠을 거란 기억만이 남은, 
1997년의 늦은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독일 사변철학을 완성했다는 19세기 '객관적 관념론' 철학자 헤겔(Georg W. F. Hegel)의 [정신현상학]을 사서 보내달라고 보낸 편지의 수신인 미선이는 이제 더 이상 나의 학교 후배가 아니었다. 
1996년 10월, 상병 진급휴가 복귀 전날 새벽까지 손을 잡고 함께 별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구박하고 골려먹던 대학 2년 후배였다. 하지만 '취중진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한 술취한 군바리의 사랑고백에 흔쾌히 응해준 그날 밤부터 미선이는 나의 실질적 '첫사랑'이 되었다. 그건 사실, 두 사람이 동의한 '객관적' 현상부터의 이야기였고, 나의 '주관적' 의식 속에서는 아마도 오래 전부터 그녀가 줄곧 떠나지 않은 터였다. 신병훈련소에서 빡세게 구르거나 자대배치 후 야간보초를 설 때 온통 내 머릿속에는 '자주국방'이나 '멸공방첩'이 아닌 소주 한 잔과 그녀 뿐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싫던 군대가 아니었다면 헤겔 철학의 원전인 [정신현상학] 따위는 읽을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게다. 헤겔의 거꾸로 물구나무 선 '변증법'은 이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유물변증법)'으로 150년 전에 바로 세워진지 오래고,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으로 완성된 19세기 독일 사변철학은 부르주아의 유산일 뿐, 진정한 철학인 '유물론'의 유산은 엥겔스에 의하면 이미 19세기에 독일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이 물려받은지 오래였다. 엥겔스는 아예 내친 김에 1888년에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선언했다. 1분에 5백타 이상 치는 한글타자 실력으로 운좋게 사령부처 행정병 보직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옆 공병대로만 갔어도 나는 공구리 치고 삽질하며 짬밥 더 먹기 위한 전우들과의 생존투쟁에 치어 철학책 따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시 돌아보면 인생이란 '우연'으로 점철된 거 아니면, 헤겔의 아이였던 '의식'이라는 꼬마가 '이성의 간지(奸智:간교한 지혜)'에 의한 길고 긴 여행을 통해 '절대정신'이라는 궁극의 '일자(一者)'를 만나는 '필연'의 과정일 터였다.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썼다는데, 그에게 '현실'은 '이성의 간지'에 의해 '절대정신'이 궁극에 실현되는 '필연'의 과정이었다. [정신현상학]으로 시작된 그의 방대한 세계관은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대논리학]으로, '법철학'과 '골상학', '미학'과 '역사철학'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순환되고 확장되었다. 어쨌든, '현실'이란 그게 무엇이었든 스물다섯의 한 젊은이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중년의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이지만, 세상 모든 철학적 이치를 다 안다고 자부하던 이십대의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의하면 이제 겨우 '2장' 자기의식의 즉자성을 지나 대자적 관계에 접어들어 '이성'의 '3장'에 들어선 '의식'이라는 작은 아이였다.


헤겔이 주저 [정신현상학]을 탈고한 때는 그가 독일에 나타난 나폴레옹을 보고는 "저 분이야말로 말을 탄 '절대정신'이다"라고 일갈한 그날 밤이란다. 오래전부터 철학의 주체인 '의식'이 절대적 일자로서 '절대정신'을 만나 그야말로 신과 같이 절대적인 '학(學)적 지식'이 되는 철학적 여정을 고민했을 헤겔이 그 일단의 철학 프로그램을 후다닥 완성한 순간이었다. 18~19세기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근대주의'를 접했던 당대의 혁신적 '모더니즘' 철학자 헤겔에게 지적 혁명은 철학과 종교가 결국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성'적 논증이었다. 헤겔로 인해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을 벗어나 세상의 운동원리인 '변증법'과 일치하는 거대한 '객관적' 세계관이 되었다. 물론 마르크스에 의하면 '거꾸로 선' 관념론자였지만. 
[정신현상학]으로 사상의 개관을 마친 헤겔은 '의식'이 아닌 '개념'의 동일한 여정을 그리는 [(대/大)논리학]을 완성하고 또한 마지막에 같은 논리로 돌아가는 '역사철학'까지 진격하는데, 과연 이 거대한 일관성의 철학자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서양 철학사에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대(大)사상가였다.

나중에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세기를 넘긴 장대한 '5년 연애'를 얘기하는 나에게 "웃기지 말라. 3년도 안된다"고 말하던 그녀는 나름의 셈법이 있었나 본데, 아무튼 새롭게 만난지 10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생뚱맞게 '100일 기념(?)'으로 미선이는 [정신현상학] 두 권을 소포로 부치면서 "성경책만큼이나 빡빡한 이 두 권의 책을 보기에는 100일은 커녕 1000일도 모자랄 듯..."이라고 앞 속지에 썼다. 아마도 '니 제대할 때까지 읽는다고 다 보겠느냐'는 의구심이었겠지만, 미선이는 결코 사령부 민심처 행정병의 남아도는 시간까지는 알 수 없었으리라. 마르크스가 엄청 욕해대면서도 영향을 크게 받았고 넘어서야 했던 철학의 큰 산,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나는 1차 세계대전의 전야였던 1914년의 좌파 사회민주당 의원들마저 '조국'의 제국주의 전쟁공채에 찬성표를 던지던 암울한 유럽 정세에서의 레닌이 하라는 혁명은 하지 않고 바로 앞 선배인 마르크스처럼 대영도서관에 짱박힌 채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고 [철학노트]로 정리했을 그 마음으로 열심히 줄치고 메모하며 읽었다. 


2.

"이제 '이성'은 그 자신이 곧 전체를 포괄하는 실재라는 데 대한 확신이 진리의 단계로까지 고양되며 또한 자기자신을 바로 자기의 세계로, 그리고 다시 이 세계를 자기자신의 세계로 의식하는 가운데 스스로 '정신'이 된다... 이제 (즉자대자적 존재로서의) '의식'으로서의 구체성을 띠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기자신을 표상하는 즉자대자적 실재는 다름아닌 '정신'인 것이다."
- Hegel, [정신현상학], <3장 이성, 6절 정신>, 1806.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은 사물의 '현상'적 흐름을 추적하는 서술기법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필연'이라는 '이성의 간지'를 부리는 '절대정신'은 절대로 '의식'의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지옥에서 단테를 안내하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도 같이 "순수한 방관자"(같은책, <서론>)이자 관찰자인 헤겔의 손을 잡고 높은 곳에 서서 '의식'(1장)이라는 작은 아이가 스스로를 깨닫는 즉자적 '자기의식'(2장)을 거쳐 타자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이성'(3장)으로 발전하는 현상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간다. '의식'에서 '이성'으로 성장하는 이 철학적 아이는 '정신'(3장 6절)과 '종교'(3장 7절)를 거치며 '절대정신' 또는 '절대지'를 만나는데, 이 궁극의 단계에서는 '이성'이라는 아이 자신이 곧 '절대이성'이 된다. '즉자'(의식)-'대자'(이성)-'즉자대자'(절대정신)로 완성되는 헤겔 철학은 후대에 의해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도식화되었고 이러한 완성의 체계를 비판한 마르크스는 물질로부터 시작하는 유물론을 역시 변증법적으로 완성하나 결국 말년의 주저 [자본론]에서 그렇게 비판하던 헤겔의 '현상학'적 서술방식을 따른다. 즉, '상품'이라는 작은 아이가 '생산'과 '노동착취', 그리고 '잉여가치'와 교환 및 확대재생산 등의 형태와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생산'이라는 거대한 체제의 비밀을 폭로하는 과정이 마르크스 [자본론]의 서술체계다. 
19세기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방식으로 헤겔을 뒤집었고, 20세기 레닌은 그런 헤겔의 [대논리학]의 '개념 운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헤겔의 '유물론'적 측면을 발견하면서 [철학노트]를 작성했다. 혁명을 준비하던 레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물구나무 선' 철학 스승 헤겔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스물다섯의 나 또한 포천의 군부대 구석에서 하라는 '자주국방'은 아랑곳 없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팠다.


3.

"실제로 지(知)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적작용을 하는 보편적 요소일 뿐더러 이것이 궁극적 의미에서는 다름아닌 '절대정신'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절대정신'은 신앙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순수의식이나 혹은 사유한다는 것 그 자체로서만 본다면 오직 절대적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의식'으로 보면 이것은 바로 자기에 관한 지(知)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 Hegel, [정신현상학], <3장 이성, 6절 정신>, 1806.


이십대 초반의 나는 '소설가'를 꿈꾸었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으나, 사실 '연애'를 하고 싶었다. 입대 후 일년 간 짧은 머리카락만 쥐어 뜯다가 휴가 때 구박은 했지만 귀엽게 아끼던 후배 미선이한테 다가갔고 전역을 하고도 그 후로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상처만 주다가 결국 헤어졌다. 
아프기도 했고 당시 나로서는 어쩔 수 없기도 했던 미안함이 가장 크지만, 다시 그 때로 되돌아 갈 수 있다 해도 나로서는 더 잘해볼 도리는 없었을 게다. 

그 당시 나의 '절대정신'이었던 그녀는 결국 그녀를 통해 투영했던 나 자신이라는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식'이 타자를 만나 대자적 관계를 맺으며 '절대정신'으로 성장하는 잊지 못할 청춘의 과정. 
미안함에도 가끔 그 때가 문득 떠오른다면, 그 당시 모자랐던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상념이리라.

헤겔을 읽던 시간,
1997년 가을의 이야기다.

***

1. [정신현상학](1806), G.W.F.Hegel, 임석진 옮김,<지식산업사>, 1997.
2. [자본론] 1권(1867), K. Marx,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1996.
3.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4. [철학노트](1914), V.I. Lenin,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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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현상학 1 한길그레이트북스 63
게오르크 W.F. 헤겔 지음, 임석진 옮김 / 한길사 / 200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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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겔을 읽던 시간 : 1997년 가을
- [정신현상학](1806), G.W.F. Hegel, 임석진 옮김, <지식산업사>, 1997.


1.

"말하자면 이제 '의식'은 오직 자기 자신을 음미하고 검증하는 것이라고 할 때 바로 이 점에 있어서도 우리는 순수한 방관자의 입장을 취하기만 하면 되게 되었다. 왜냐하면 이제 '의식'은 한편으로는 '대상'의, '대상'을 향한 '의식'이면서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바로 자기 자신의, 자기 자신에만 관여하는 '의식'이기 때문이다."
- G.W.F. Hegel, [정신현상학], <서론>, 1806.


그 해 여름이 더웠던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 해 12월이면 전역이었고, 전 해 가을에는 생전 처음 '사랑'이란 걸 시작한 터였기에, 스물다섯 내 청춘은 가장 뜨거웠을 거란 기억만이 남은, 
1997년의 늦은 여름이 지나가고 있었다.


독일 사변철학을 완성했다는 19세기 '객관적 관념론' 철학자 헤겔(Georg W. F. Hegel)의 [정신현상학]을 사서 보내달라고 보낸 편지의 수신인 미선이는 이제 더 이상 나의 학교 후배가 아니었다. 
1996년 10월, 상병 진급휴가 복귀 전날 새벽까지 손을 잡고 함께 별을 바라보던 그녀는 그 바로 몇 시간 전까지만 해도 내가 구박하고 골려먹던 대학 2년 후배였다. 하지만 '취중진담' 노래를 배경음악으로 한 술취한 군바리의 사랑고백에 흔쾌히 응해준 그날 밤부터 미선이는 나의 실질적 '첫사랑'이 되었다. 그건 사실, 두 사람이 동의한 '객관적' 현상부터의 이야기였고, 나의 '주관적' 의식 속에서는 아마도 오래 전부터 그녀가 줄곧 떠나지 않은 터였다. 신병훈련소에서 빡세게 구르거나 자대배치 후 야간보초를 설 때 온통 내 머릿속에는 '자주국방'이나 '멸공방첩'이 아닌 소주 한 잔과 그녀 뿐이었다.

아마도 그렇게 싫던 군대가 아니었다면 헤겔 철학의 원전인 [정신현상학] 따위는 읽을 엄두도 내지 않았을 게다. 헤겔의 거꾸로 물구나무 선 '변증법'은 이미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변증법적 유물론(유물변증법)'으로 150년 전에 바로 세워진지 오래고, 헤겔의 객관적 '관념론'으로 완성된 19세기 독일 사변철학은 부르주아의 유산일 뿐, 진정한 철학인 '유물론'의 유산은 엥겔스에 의하면 이미 19세기에 독일 프롤레타리아 노동계급이 물려받은지 오래였다. 엥겔스는 아예 내친 김에 1888년에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을 선언했다. 1분에 5백타 이상 치는 한글타자 실력으로 운좋게 사령부처 행정병 보직을 받았기에 망정이지 옆 공병대로만 갔어도 나는 공구리 치고 삽질하며 짬밥 더 먹기 위한 전우들과의 생존투쟁에 치어 철학책 따윈 생각지도 못했을 것이다. 역시 돌아보면 인생이란 '우연'으로 점철된 거 아니면, 헤겔의 아이였던 '의식'이라는 꼬마가 '이성의 간지(奸智:간교한 지혜)'에 의한 길고 긴 여행을 통해 '절대정신'이라는 궁극의 '일자(一者)'를 만나는 '필연'의 과정일 터였다. 헤겔은 [법철학] <서문>에서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인 것이며, '이성'적인 것은 '필연'적인 것"이라고 썼다는데, 그에게 '현실'은 '이성의 간지'에 의해 '절대정신'이 궁극에 실현되는 '필연'의 과정이었다. [정신현상학]으로 시작된 그의 방대한 세계관은 '개념'의 변증법적 운동으로서 [대논리학]으로, '법철학'과 '골상학', '미학'과 '역사철학'으로 나선형을 그리며 순환되고 확장되었다. 어쨌든, '현실'이란 그게 무엇이었든 스물다섯의 한 젊은이로서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물론 중년의 지금도 여전히 알 수 없는 인생이지만, 세상 모든 철학적 이치를 다 안다고 자부하던 이십대의 나는,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의하면 이제 겨우 '2장' 자기의식의 즉자성을 지나 대자적 관계에 접어들어 '이성'의 '3장'에 들어선 '의식'이라는 작은 아이였다.


헤겔이 주저 [정신현상학]을 탈고한 때는 그가 독일에 나타난 나폴레옹을 보고는 "저 분이야말로 말을 탄 '절대정신'이다"라고 일갈한 그날 밤이란다. 오래전부터 철학의 주체인 '의식'이 절대적 일자로서 '절대정신'을 만나 그야말로 신과 같이 절대적인 '학(學)적 지식'이 되는 철학적 여정을 고민했을 헤겔이 그 일단의 철학 프로그램을 후다닥 완성한 순간이었다. 18~19세기 프랑스 대혁명 시대의 '근대주의'를 접했던 당대의 혁신적 '모더니즘' 철학자 헤겔에게 지적 혁명은 철학과 종교가 결국은 동일한 것이라는 사실에 대한 '이성'적 논증이었다. 헤겔로 인해 철학은 '주관적 관념론'을 벗어나 세상의 운동원리인 '변증법'과 일치하는 거대한 '객관적' 세계관이 되었다. 물론 마르크스에 의하면 '거꾸로 선' 관념론자였지만. 
[정신현상학]으로 사상의 개관을 마친 헤겔은 '의식'이 아닌 '개념'의 동일한 여정을 그리는 [(대/大)논리학]을 완성하고 또한 마지막에 같은 논리로 돌아가는 '역사철학'까지 진격하는데, 과연 이 거대한 일관성의 철학자 게오르그 빌헬름 프리드리히 헤겔은 서양 철학사에서는 반드시 거쳐야만 하는 대(大)사상가였다.

나중에 1996년부터 2000년까지 세기를 넘긴 장대한 '5년 연애'를 얘기하는 나에게 "웃기지 말라. 3년도 안된다"고 말하던 그녀는 나름의 셈법이 있었나 본데, 아무튼 새롭게 만난지 10개월이 지나는 시점에 생뚱맞게 '100일 기념(?)'으로 미선이는 [정신현상학] 두 권을 소포로 부치면서 "성경책만큼이나 빡빡한 이 두 권의 책을 보기에는 100일은 커녕 1000일도 모자랄 듯..."이라고 앞 속지에 썼다. 아마도 '니 제대할 때까지 읽는다고 다 보겠느냐'는 의구심이었겠지만, 미선이는 결코 사령부 민심처 행정병의 남아도는 시간까지는 알 수 없었으리라. 마르크스가 엄청 욕해대면서도 영향을 크게 받았고 넘어서야 했던 철학의 큰 산,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나는 1차 세계대전의 전야였던 1914년의 좌파 사회민주당 의원들마저 '조국'의 제국주의 전쟁공채에 찬성표를 던지던 암울한 유럽 정세에서의 레닌이 하라는 혁명은 하지 않고 바로 앞 선배인 마르크스처럼 대영도서관에 짱박힌 채 헤겔의 [대논리학]을 읽고 [철학노트]로 정리했을 그 마음으로 열심히 줄치고 메모하며 읽었다. 


2.

"이제 '이성'은 그 자신이 곧 전체를 포괄하는 실재라는 데 대한 확신이 진리의 단계로까지 고양되며 또한 자기자신을 바로 자기의 세계로, 그리고 다시 이 세계를 자기자신의 세계로 의식하는 가운데 스스로 '정신'이 된다... 이제 (즉자대자적 존재로서의) '의식'으로서의 구체성을 띠면서 동시에 스스로 자기자신을 표상하는 즉자대자적 실재는 다름아닌 '정신'인 것이다."
- Hegel, [정신현상학], <3장 이성, 6절 정신>, 1806.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은 사물의 '현상'적 흐름을 추적하는 서술기법이다. 헤겔의 [정신현상학]에서 '필연'이라는 '이성의 간지'를 부리는 '절대정신'은 절대로 '의식'의 운동에 직접 관여하지 않는다. 그저 지옥에서 단테를 안내하던 로마 시인 베르길리우스와도 같이 "순수한 방관자"(같은책, <서론>)이자 관찰자인 헤겔의 손을 잡고 높은 곳에 서서 '의식'(1장)이라는 작은 아이가 스스로를 깨닫는 즉자적 '자기의식'(2장)을 거쳐 타자와의 관계를 인식하고 경험하는 '이성'(3장)으로 발전하는 현상의 궤적을 묵묵히 따라간다. '의식'에서 '이성'으로 성장하는 이 철학적 아이는 '정신'(3장 6절)과 '종교'(3장 7절)를 거치며 '절대정신' 또는 '절대지'를 만나는데, 이 궁극의 단계에서는 '이성'이라는 아이 자신이 곧 '절대이성'이 된다. '즉자'(의식)-'대자'(이성)-'즉자대자'(절대정신)로 완성되는 헤겔 철학은 후대에 의해 '정-반-합'의 '변증법'으로 도식화되었고 이러한 완성의 체계를 비판한 마르크스는 물질로부터 시작하는 유물론을 역시 변증법적으로 완성하나 결국 말년의 주저 [자본론]에서 그렇게 비판하던 헤겔의 '현상학'적 서술방식을 따른다. 즉, '상품'이라는 작은 아이가 '생산'과 '노동착취', 그리고 '잉여가치'와 교환 및 확대재생산 등의 형태와 과정을 거치면서 '자본주의 생산'이라는 거대한 체제의 비밀을 폭로하는 과정이 마르크스 [자본론]의 서술체계다. 
19세기 마르크스는 [자본론]을 통해 헤겔의 [정신현상학]의 방식으로 헤겔을 뒤집었고, 20세기 레닌은 그런 헤겔의 [대논리학]의 '개념 운동'을 통해 역설적으로 헤겔의 '유물론'적 측면을 발견하면서 [철학노트]를 작성했다. 혁명을 준비하던 레닌이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들의 '물구나무 선' 철학 스승 헤겔로 돌아가야 했다. 
그렇게 스물다섯의 나 또한 포천의 군부대 구석에서 하라는 '자주국방'은 아랑곳 없이 헤겔의 [정신현상학]을 팠다.


3.

"실제로 지(知)의 근원을 이루는 것은 어디까지나 지적작용을 하는 보편적 요소일 뿐더러 이것이 궁극적 의미에서는 다름아닌 '절대정신'인 것이다. 다만 이러한 '절대정신'은 신앙이라고 하는 추상적인 순수의식이나 혹은 사유한다는 것 그 자체로서만 본다면 오직 절대적 존재에 지나지 않지만 그러나 '자기의식'으로 보면 이것은 바로 자기에 관한 지(知)를 의미하는 것이 된다."
- Hegel, [정신현상학], <3장 이성, 6절 정신>, 1806.


이십대 초반의 나는 '소설가'를 꿈꾸었고, '마르크스주의자'를 자처했으나, 사실 '연애'를 하고 싶었다. 입대 후 일년 간 짧은 머리카락만 쥐어 뜯다가 휴가 때 구박은 했지만 귀엽게 아끼던 후배 미선이한테 다가갔고 전역을 하고도 그 후로도 짧지 않은 시간 동안 그녀에게 상처만 주다가 결국 헤어졌다. 
아프기도 했고 당시 나로서는 어쩔 수 없기도 했던 미안함이 가장 크지만, 다시 그 때로 되돌아 갈 수 있다 해도 나로서는 더 잘해볼 도리는 없었을 게다. 

그 당시 나의 '절대정신'이었던 그녀는 결국 그녀를 통해 투영했던 나 자신이라는 '의식'이었는지도 모른다. '자기의식'이 타자를 만나 대자적 관계를 맺으며 '절대정신'으로 성장하는 잊지 못할 청춘의 과정. 
미안함에도 가끔 그 때가 문득 떠오른다면, 그 당시 모자랐던 나 자신에 대한 깊은 상념이리라.

헤겔을 읽던 시간,
1997년 가을의 이야기다.

***

1. [정신현상학](1806), G.W.F.Hegel, 임석진 옮김,<지식산업사>, 1997.
2. [자본론] 1권(1867), K. Marx, 김수행 옮김, <비봉출판사>, 1989~1996.
3.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F. Engels,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4. [철학노트](1914), V.I. Lenin,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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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 정치적 종족성과 민족주의, 그 오랜 역사와 깊은 뿌리
아자 가트 외 지음, 유나영 옮김 / 교유서가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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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 현상학' : 시민적 민족주의 vs. 종족적 민족주의
- [민족](2013), 아자 가트/알렉산더 야콥슨, 유나영 옮김, <교유서가>, 2020.


"프랑스혁명은 프랑스 민족을 만들어낸 게 아니라 '민족'의 주권자를 '군주'에서 '인민'으로 교체한 과정이었고, 이 과정에서 민족에 대중적 에너지와 충성심을 불어넣은 건 덤이었다... 전면적 '근대화' 과정은 '민족주의'를 출범시킨 게 아니라 '해방'시키고 '변화'시키고 '강화'하는 동시에 그 정당성을 크게 높여주었다. 그러니까 '대중주권(민주주의)'은 '민족주의'에 기여하는 동시에 '민족주의'가 '해방'될 출구를 제공했다."
- [민족], <6. 근대 : 해방되고 변형되고 강화된 민족주의>, 아자 가트, 2013.


한때 '민족'과 '민중'이 '대립'되는 개념으로 인식되던 시절이 있었다. 분명, 국가와 사회의 주인은 '민중'이었는데 소수의 권력자들이 앞세웠던 '민족'과 '민족주의'는 다수 인민/국민/민중들을 억압하는 '이데올로기'로 기능했다. 군부독재정권에서 '해방'을 위한 가장 주요한 가치는 '민주주의'였고, '민주'를 중심으로 '민족'과 '민중'의 운명은 엇갈리는 것만 같았다. 

'민족주의'도 시대를 풍미한 '이데올로기'였다. 영국의 역사학자 윌리 톰슨은 자신의 저서 [20세기 이데올로기](2011)에서 20세기 '극단의 시대'를 관통한 '자유주의', '보수주의', '공산주의(사회주의)', '파시즘'의 역사적 계보학을 그리면서 '해방'을 약속하는 이데올로기의 실천을 서술한다. '자유주의'가 '승리'한 듯 했던 1991년 이후 "가장 가공할 만한" 이데올로기로서 "공격적인 '민족주의'"(윌리 톰슨, 같은책, <3-15.>)를 언급하지만 정작 [20세기 이데올로기]에서 '민족주의'는 본격적으로 다루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민족주의' 또한 다른 주요 이데올로기들 못지 않게 '해방'을 약속하는 실천적 이데올로기다.


이스라엘 역사학자 아자 가트(Azar Gat)는 [민족(Nations)](2013)이라는 책을 통해 '시민적 민족주의'와 '종족적 민족주의'의 대립체계의 틀로 '민족의 현상학'을 서술한다. '민족주의'는 보통 근대화의 산물로 여겨지는데, 아자 가트에 의하면 '민족'은 아주 오래전부터 존재해 왔다. 전자는 '시민적 민족주의'이고, 후자인 아자 가트의 관점은 '종족적 민족주의'에 가까운데 실질적으로 저자의 입장은 '절충주의'의 모양새다. 즉, '민족'은 아주 오래전 선사/원사 시대부터 '종족'의 모습으로 존재해 왔고, 근대화의 산물인 '민주주의'와 함께 '민족주의'가 '해방'되고 '변형'되며 '강화'되었다는 주장이다(아자 가트, 같은책, <6>). 지금의 '민주주의'자들에게 '민족주의'는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 같은 '파시즘'에 의해 배타적 인종주의 형태로 '변형'되고 '강화'되며 특정 민족의 '해방'만을 주장하는 왜곡된 모습이 된 결과 '민주주의'의 적(敵)이 되었지만, 원래 '민족'은 '종족성', '인족' 등으로 면면히 이어져 왔다는 이야기다. 다분히 이론적인 책이지만 그만큼의 이론적인 근거는 별로 보이지 않는다. 그저 선사시대와 고대로부터 근대와 현대에 이르는 세계 각지의 종족과 국민(민족)국가의 역사적 현상을 따라 서술하는 일종의 '민족 현상학(現象學/phenomenology)'이다. '종족성(ethnicity)'에서 출발한 인류가 '인족(people)'을 거쳐 궁극에 '민족(nation)'으로 완성되는 장구한 '현상학'. 책이 불필요할 만치 장황하고 두꺼운 이유는 대사상가 헤겔의 [정신현상학]에 대한 오마쥬 또는 유발 하라리, 토마 피케티 같은 현대의 인기 사상가들에 대한 '민족'적 도전일 수 있겠다.


"민족국가는 전근대 국가 중의 일부였지 전부가 아니었고 심지어 대부분도 아니었다. 나머지는 더 넓은 공간을 여럿이 나누어 가진 소국들이었다. 하지만 제국들도 있었는데, 한 '인족'이나 '종족'이 팽창해서 다른 인족이나 종족들을 지배하는 경우가 가장 전형적이었다... 민족태를 정치적 종족성의 특정한 형태로 보는 이 책에서 제국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건 두 가지 이유에서다. 첫째로 제국은, 국가 형성 과정에서 일찍부터 어디에나 싹트고 있던 '민족(nation)'국가들을 우세한 무력으로 파괴한 강력한 엔진이었다. 많은 민족국가들이 제국이라는 '블랙홀'로 빨려들어가 사라졌다... 둘째 이유는,... 거의 모든 제국은 (명시적 혹은 암묵적으로) 특정 '인족(people)'이나 '종족(ethnicity)'의 제국이었다. 그 인족/종족의 군사력과 정치적 지배력이 제국의 주춧돌이었다."
- [민족], <4. 전근대 세계의 종족, 인족, 국가, 민족>, 아자 가트, 2013.


역사학자이자 이스라엘 방위군 예비역 소령인 아자 가트가 보는 '종족적 민족주의'에 가까운 '민족'은 오랜 세월 핍박받고 떠돌다가 근대화의 결과로 근동에서 땅따먹기 민족투쟁을 끊임없이 이어가는 '유대' 민족주의의 그것 아닐까 싶기도 하다. 저자의 '절충주의'는 근대 '민주주의'가 필연적으로 결합된 결과이기도 하다. 아무리 유대 민족주의에 사상적 뿌리를 두었더라도 '종족주의'에 머물 수 없는 까닭은 '민주화'된 세상이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그의 '민족 현상학'의 주체인 '종족(ethnicity)'은 '인족(people)'을 만난다. 역자가 말하기로도 어색한 번역어인 '인족'의 원어는 'people'이다. '민중'이나 '인민'은 '민족'적 색체가 적기 때문에 선택된 번역어겠지만 내가 읽기로 아자 가트의 '인족'은 '민중(인민)'에 다름 아니다. 

선사시대부터 존재했던 씨족과 부족 등의 '종족'은 평상시에는 서로 싸움을 멈추지 않던 원수들이었으나 사회 발달 과정에서 자연스레 공동체를 형성하고 외부의 다른 종족에 대항하여 비슷한 종족들끼리 단결하면서 연맹체나 초기 국가를 만들었다. 모든 역사의 소국들이 연맹체가 되고 사유재산과 잉여가치의 축적을 위한 군사력으로 고대국가가 되는 과정은 동서고금을 막론한다. '국가'의 출현에 관한 아자 가트의 현상학은 여기까지는 프리드리히 엥겔스의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의 정치경제학적 분석틀을 따른다. 그러나 [민족]의 저자 아자 가트는 결코 '계급투쟁의 역사'를 말하지 않는 '자유주의자'다. 미리 말하자면, 아자 가트의 [민족]의 결론은 "종족/민족 감정이 '자유주의'적이고 계몽된 상태로 유지되기만 한다면, (민족 감정과) 전 인류에 대한 사랑이 근본적으로 모순된다고 보지 않았다"(같은책, <6>)라는 명제에 들어 있다. 아자 가트에게 '민주주의'는 '자유주의'와 같은 말이고 '자유주의' 이데올로기의 힘으로 '민족주의'는 비로소 '해방'된다. 그래서 아자 가트의 [민족]에서 놓치지 말아야 할 가장 중요한 개념이 바로 '인족(people)'이 된다. '민중'은 곧 '민주주의'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 민족적 친밀감, 정체성, 연대감이... 매우 의미있는 정치적 힘으로서 존재하지 않았다고 주장하는 것은 근대주의적, 이분법적 이론화의 근본적 오류다... 민족현상에 큰 힘을 부여하여 이를 의미있는 정치변수에서 '민족주의 시대'의 핵심에 위치한 지배적 정치변수로 바꾸어놓은 것은 '대중주권', 시민권, 시민적-법적 평등, '민주화', 그리고 지역 정체성의 약화라는 교의였다."
- [민족], <5. 전근대 유럽과 민족국가>, 아자 가트, 2013.


'종족성' 자체가 다분히 정치적인 개념이다. 아자 가트는 부정하겠지만 모든 '종족'은 계급사회의 정치권력으로 역사의 전면에 부상했고 국가권력이 된 후로는 '민족'으로 치장했다. 물론 근대 이전에는 '민족'을 대표하는 정치권력이 '군주(왕권)'였다. 18세기 프랑스 대혁명과 같은 '민주화' 이후 국가의 주권이 형식상이나마 '민중(인족/people)'의 것이 되었다. 아자 가트의 '민족주의'에서 '인족'이 중요한 개념인 이유다. 메소포타미아의 도시국가나 제국도 기본 이데올로기는 공통 언어와 종교에 기반한 "범문화적 유대감"(같은책, <6>)을 공유하는 '민족'이었고, 이집트를 포함하여 고대 세계에서 이민족 왕이 집권했다 하더라도 해당 '인족'들이 믿는 '민족주의'로 자신의 권력을 정당화했다. 그러지 않았다가는 그 '민족적 민중'이라 할 수 있는 '인족'들에 의해 언제 쫓겨날지 몰랐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유럽 최초 '민족국가'의 원형이었던 고대 알렉산더의 마케도니아 또한 방대한 영토를 정복했던 제국이었지만 여러 지역을 직접 지배할 수 없었다. 마케도니아나 로마를 포함한 대제국의 권력자들은 '민족'이 여러 개일 수 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해당 지역의 실질적 주인은 그곳에 사는 해당 '인족'이었기 때문이다. 동아시아에서도 중국을 차지한 이민족들은 '한족'으로 동화되었는데 해당 지역의 다수 '인족'이 한족이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저자에 따르면, "과거의 농민들에게도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을 찬성했던 유럽의 프롤레타리아들 못지 않게 엄연히 '조국(민족)'이 있었던 것이다"(같은책, <5>). 

프랑스 대혁명을 필두로 한 근대 '민주주의'가 등장한 이래 건설된 '국민국가'는 바로 이 '민족국가' 또는 '민족'에 기반한 제국이 해체되고 발전한 근대적 '민족국가'였다. 근대국가는 더 이상 '군주'가 주인이 아닌 '국민'이 주인이라고 헌법에 명시했고, 이 '국민'이 바로 '민족'으로 뭉친 '인족'들이었다. 아자 가트는 미국과 같은 '다민족 국가'에 관한 서술도 이어가고 역시 이스라엘 역사학자 알렉산더 야콥슨은 [민족]의 7장에서 '민족'과 '국가', '종족성' 관련한 헌법적 측면을 서술하고 있으나 사실 이 책을 이해하는데 꼭 필요한 챕터 같지는 않으므로 건너뛰어도 무방할 듯 하다.


"근대 민족주의의 쇄도는 인민이 자신들의 선택을 표출하고 행동에 옮기게 해준 민주화, 자유화 과정의 한 작용이다... 계몽주의 가치를 옹호하는 이들은 민족주의의 해방적 측면과 공격적, 폭력적인 측면을 둘 다 인식해 왔다. 전자(해방적 측면)를 극대화하고 후자(공격적 측면)를 억제하려면 그 '현상'을 제대로 이해하는 것이 결정적으로 중요하다."
- [민족], <결론>, 아자 가트, 2013.


국가는 오래전 고대로부터 '종족'과 '민족'에 기반해 왔고, '민주주의'가 등장한 근대 이후로 다수 '인족'의 힘을 기반으로 '국민(민족)국가'를 형성해 왔다. 아자 가트의 '민족주의'는 이 과정에서 현대의 공격적이고 폭력적인 민족주의(인종주의)로 인해 부정적 변화는 겪었지만 결국 '자유주의'와 함께 할 때 '전 인류에 대한 사랑'과 '해방'을 실현할 수 있다는 결론이다. 

'자유주의'와 '민주주의'가 거의 동의어인 이스라엘 역사학자 아자 가트로서는 근대의 '시민적 민족주의'와 전통의 '종족적 민족주의'를 적절히 절충시킨 최적의 '민족주의'가 되겠다. 그러나, 부족이 국가가 되고 제국의 팽창과 국민국가의 출현에서 '계급투쟁'의 인류 역사를 보지 않으려 하는 유대인 '자유주의자' 아자 가트와 알렉산더 야콥슨의 '민족 현상학' 너머로 본다면, '민족'과 '민중'의 역사적 길항에서 '종족'이나 '민족' 같은 개념보다는 어색한 번역어이기는 해도 '인족(people)'에 더 방점이 찍힐 수 밖에 없다. 

'인족(people)'의 정체는 다시 말하지만 '민주주의'의 주체인 '민중(인민)'이다.

***

1. [민족(Nations) - 정치적 종족성과 민족주의, 그 오랜 역사와 깊은 뿌리](2013), Azar Gat/Alexander Yakobson, 유나영 옮김, <교유서가>, 2020.
2.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3. [가족, 사유재산, 그리고 국가의 기원](1884), F. Engels. 김대웅 옮김, <아침>, 1987.
4. [정신현상학](1806), G.W.F.Hegel, 임석진 옮김,<지식산업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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