알튀세르 효과 프리즘 총서 7
진태원 엮음, 강희경 외 옮김 / 그린비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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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튀세르를 읽던 시간 : 1998~1999년
- [마르크스를 위하여] / [자본론을 읽는다] / [레닌과 철학] /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 [마키아벨리의 고독] 외 유고집


1.

"간단히 말해 철학은 분열한다는 냉혹하고도 기본적인 사실에 관한 의식이다. 과학이 하나로 된다면 철학은 분열한다. 철학은 분열함으로써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철학적 꼬뮈니까씨옹(communication)이란 없다. 철학적 토론이란 없다."
- 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968.


또 다시 아버지에게 대불효를 저지르고 말았다. 
설 명절연휴 전날 마감일이 잘 풀려서 즐거운 마음에 퇴근 후 오랜만에 집에서 맥주 한 잔 하며 가족끼리 대화 중 아버지가 성질을 내시고는 일어나 방으로 들어가 버리신 거였다. 
친구들과 한 잔 마시고 들어와 떠들어대던 아들과 함께 기분이 좋아진 아버지가 역시 '이 때다!' 싶어 이번 대선 얘기를 꺼내시며 남한의 '공산화'를 심히 걱정하셨고, 암환자를 모시는 삼대 가정의 평화를 위해 집안에서 정치경제와 사회문화 이야기는 하지 않겠다는 가풍을 확립해 왔던 나는 순간 뜨끔했다. 

"에이, 뭐 그런 얘기를 하세요~" 하며 예사롭게 대처해야 했다. 하지만 한 잔 마신 나도 대뜸 할 말은 하자 싶었다. 

"폐암 4기인 아버지가 중증환자로 등록되어 의료비의 5%만 지급해도 된 후로 저는 월급에서 나가는 국민건강보험료가 전혀 아깝지 않아요. 우리 식구들 힘들게 살지 않는다면 자본주의든 공산주의든 무슨 상관입니까?"

"너가 아직도 잘 몰라서 그래. 지금 나라가 공산화 다 되어 있어. 나라 다 망하게 생겼어."

"보세요. 아버지가 잘 가르쳐주신 덕분에 제가 아버지보다 조금 더 알고 정보도 많잖아요. 현실 공산주의가 아니라 모든 사람이 평등하기를 꿈꾸는 이상사회로서 공산주의는 나쁜 것만은 아니예요."

"너 지금 우리나라 안보가 다 무너진 걸 모르고 하는 소리냐?"

애초에 대화가 될 수 없는 사안의 또 다시 반복이다. 대저 부자간의 이런 대화는 서로 답을 정해놓고 주장을 펼치기에 '토론'이 성립되지 않는다. 반론을 펼수록 서로 뜻하지 않은 방향으로 꼬투리에 꼬투리를 물다가 궁극에는 아들의 태도를 지적하며 아버지가 토론종료를 선언하는 게 상례다. 우리 부자도 항상 그랬었고 젊은 시절의 나는 토론 중 퇴장전술을 주로 썼으며, 시간이 흘러 중년의 아들과 마주한 늙어진 아버지는 주로 '너는 아직 세상을 모른다'라는 말과 함께 일방퇴장을 하신다. 

암선고를 받은 아버지와 부자지간의 정을 나눌 시간도 부족하니 사회문제, 특히 정치경제 얘기 말고 신변잡기 개그를 나누자던 다짐을 잠시 소홀히 한 결과 늙고 병약한 아버지가 다시금 골방과 태극기 휘날리는 유투브 세상으로 침잠하시고 말았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자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 : 1918~1990)는 '철학자'다. 후기의 수차례 '자기 반성' 전이었던 1960~1970년대의 이 철학자는 세계의 '우연'한 현상들 속에서 '필연'의 '법칙', 즉 궁극의 '진리'를 집요하게 추구하는 정통 철학의 입장을 견지했다. '과학'의 발전과 세상의 복잡다단한 변화 속에서도 그는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인 '철학' 본연의 임무를 잊지 않으려 했고, 세상만사의 현상들을 통합하는 '과학'의 성과에 비해 이 사실들을 다시금 분열시키고 논쟁시키는 '철학'의 본질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철학'은 일관되고 통합된 '진리'를 추구함에도 불구하고 끊임없이 '과학'적 사실들 간 경계선을 긋는 역할만 하게 되고 이런 '철학'간의 분열은 새로운 '과학'의 성과로 다시금 통합되는 것이지 결코 '철학'적 '토론(커뮤니케이션/꼬뮈니까시옹)'을 통해 '진리'에 도달하지는 않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철학자' 알튀세르에게 "철학적 꼬뮈니까시옹이란 없다. 철학적 토론이란 없다".



2.

"마르크스의 이론적 혁명은 그 답의 변경에 있는 것이 아니라 문제의 변경에 있다는 것, 따라서 마르크스의 역사이론의 혁명은 마르크스가 이데올로기의 지형으로부터 과학의 지형으로 옮긴 ‘제요소의 변경’으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이다."
- 루이 알튀세르, [마르크스를 위하여], 1965.


인문대 부학생회장인 국문과 후배에게 단과대 [자본론] 읽기모임을 공식사업으로 제안했던 1999년에는 나 나름대로 '절박'했다. 제대 후 복학하니 오래전 후배들을 잡아주던 복학생 형들은 당연히 온데간데 흔적도 없이 사라졌고 학회소모임 사상운동은 무너졌다. 단과대학 각 학회에서 암약하던 정치경제, 노동사회, 문사철(文史哲) 학회들도 보이지 않았다. 뛰어난 운동가는 아니었던 나는 단과대 단위에서라도 [자본론]을 함께 읽으며 좌파사상의 단초를 다시 만드는데 작게나마 기여하고 싶었다. 수년 전 89~91학번 복학생 선배들의 자리를 어떻게든 지켜야 했다. 감감 무소식이던 부학생회장 후배는 슬금슬금 나를 피했고 나는 여전히 도서관에서 '자습'이나 하고 있었다.




1994년 내내 레닌을 읽던 나는 우연히 같은 단과대 89학번 선배를 통해 알튀세르를 접했다. 마르크스도 엥겔스도, 레닌도 마오쩌뚱도 '철학'은 다루었지만, 그들 모두는 시대의 '사상가'였고 '혁명가'였지 '철학자'는 아니었다. 마르크스는 <포이어바흐에 관한 테제> 중 마지막 '열한번 째 테제'에서 "지금까지의 '철학'은 세계를 '해석'해 왔지만, 중요한 것은 이제부터 '철학'은 세계를 '변혁'해야 하는 것이다"라고 적었다. 이로부터 100년 후 프랑스 철학자 루이 알튀세르는 이를 수정한다. "이제 중요한 것은 '새로운 철학의 실천'이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다(루이 알튀세르, [레닌과 철학], 1968.)"라고 말이다. 
알튀세르는 마르크스의 '철학'의 '실천'과 이를 변화된 유럽정세에서 혁신하려던 그람시의 새로운 '실천철학'을 넘어 '철학' 자체로 돌아간다. 즉, '새로운 (실천)철학'이라는 것이 있는 게 아니라 '철학'의 '새로운 실천'이 필요하다는 주장이다. 그렇게 철학자인 루이 알튀세르는 '철학' 자체로 돌아가되 헝가리 미학자 게오르그 루카치처럼 '총체성'이라는 철학의 자루 안에 모든 개념들을 모호하게 쓸어담지 않고 '철학' 자체는 무엇인가 명확하게 확립을 하고는 사유의 여정을 출발한다.

알튀세르에게 '철학'은 학문적 '대상'을 갖지 않는다. 대상을 지닌 것은 '과학'으로서 비단 자연과학 뿐만 아니라 정치나 경제, 역사 등의 사회과학도 각 분야의 대상이 있고 그에 관한 연구와 혁신을 향해 나아가니 '과학'이다. '철학'은 다만 별도의 '대상'이 없이 이러한 '과학'적 성과들을 대상으로 하여 이들을 분류하고 경계선을 그으며 정리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그러므로 계급사회에서는 방향성 없이 생산된 온갖 과학적 성과들을 계급적으로 구분하고 경계선을 그으면서 "철학은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알튀세르, <마치오키와의 대담>, 1968.)"을 표현하게 된다. '철학'의 '대상'은 '학(學)' 자체라는 헤겔을 비롯한 대철학자들의 전통 위에 알튀세르도 서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루이 알튀세르는 빼도박도 못하는 '철학자'일 수 밖에 없다.
다만, 그리스 탈레스로부터 플라톤까지 고대 철학에서 발견한 첫번째 '과학'의 대륙이었던 '수학'의 대륙과 중세 데카르트로부터 갈릴레이까지 두번째 '물리학'의 대륙 발견이 인류의 철학적 여정에서 중요한 발견이었던 것처럼, 근대의 마르크스가 발견한 세번째 대륙인 '역사'의 대륙은 계급투쟁의 사회사상에서 혁신적 세계관으로서 '역사적 유물론'을 정립하게 했다. 이러한 '과학'적 패러다임의 혁신 과정에서 '철학'은 지리하고 분열적인 지적 투쟁을 노정하지만, 새로운 '과학'의 대륙이 발견된 후에야 그 경계선을 구획하는 본연의 역할을 할 뿐 '철학'적 세계관 사이의 투쟁에서 '토론'은 없다. 
이것이 알튀세르의 입장에서 '철학'과 '과학'의 상호관계이며 '과학자의 자생적 철학'이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이유다.

나는 제대 후에도 소설가의 꿈을 꾸었지만, 당시 나에게 소설이란 문학이라기 보다는 세계를 '변혁'하는 도구 중 하나였다. '혁명가'는 못 되었으니 '문학'이라는 무기를 들고 싶었으며 이 총에는 '철학'이라는 실탄을 장전하고 싶었다. 입대 전 만난 알튀세르를 전역 후에 다시 찾아 그의 저서 [자본론을 읽는다](1966)를 통해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읽게 되었다. 내가 단과대 학생회에 제안했던 '[자본론] 읽기' 모임은 실상 루이 알튀세르와 그의 동지 에티엔 발리바르처럼 [자본론]을 '철학'적으로 읽는 모임이었다. 알튀세르와 동지 철학자들의 공동저작인 [자본론을 읽는다]는 당시 표준적인 자본주의국가 영국을 분석하되 그 나라의 구체적인 체제를 대상으로 하지 않는다. 저자들은 영국이 아니라 "표준적이고 이상적인 모델(같은책)"로서 자본주의체제 자체를 연구하며 영국을 표본으로 삼은 것 뿐이었다. 이는 역시 100년 전 칼 마르크스가 [자본론] 1권을 통해 당시 최고로 발전한 자본주의국가 영국을 분석하면서 자본주의체제 일반의 성격과 비밀을 폭로한 '철학'적 전통을 잇고 있다.
레닌과 알튀세르 모두 "모든 진리는 구체적이다"라는 명제와 함께 '철학'의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실천'을 주장했지만, '알튀세리앵(알튀세르주의자)'을 자처하던 나는 다시금 알튀세르를 앞세워 예전처럼 '철학'의 가면을 쓰고자 했을지도 몰랐다.

결국 단과대 학습모임은 불발되었는데, 설령 공식출범했다 한들 당시의 내가 알튀세르의 [자본론을 읽는다]를 잇는 그 '철학'적 위업을 흉내나 제대로 낼 수 있었을지 잘 모르겠다. 구체적이지도 현실적이지도 못했던 당시의 나는 '혁명가'도 '소설가'도, 그렇다고 '철학자'도 아니었다. 내가 학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신춘문예로 등단할 소설이나 몇 편 써보는 것 뿐이었다. 물론, 학보사 문예상에서도 나의 '사회주의적 리얼리즘'은 먹히지 않았고 마지막 교문을 나서기 전 제출한 신춘문예 신문사들로부터 답신은 오지 않았다. 
'실천'도 '철학'도 못했던 나는 결국 '소설' 마저도 제대로 못했다.

알튀세르는 20세기 말 남한에서 그렇게 잊혀졌다. 소비에트의 붕괴 이후 "다시 마르크스 자체로 돌아가자!"는 슬로건을 내건 좌파의 흐름에서 1990년대를 휩쓴 '포스트 모더니즘' 등의 사조를 타고 잠시 머물다 떠나간 이론가 중 하나로서 잠시 명멸했다가 사라졌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인데 평생 정신분열증으로 살다가 아내를 목졸라 죽이고 정신병원에 유폐된 그는 1970년대 후반까지 프랑스 공산당에 대한 비판을 끝으로 더이상 저작을 발표하지 못하나, 이후 편집자들에 의해 '유고'들이 속속 출간된다.

'인간주의'적 청년 마르크스와 '구조주의'적 노년 마르크스 사이의 '인식론적 단절(절단)', '이론에서의 계급투쟁'으로서의 '철학'과 '유물론'일 수 밖에 없는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 '주체 없는' 사회구성체에서의 경제적 '최종심급'을 인정하면서도 상부구조와 상호관계되는 복합적 '중층결정', '이데올로기'의 '현실적 힘'으로 확장한 '국가론', 그리고 '과학'으로서의 '프롤레타리아 독재' 등은 알튀세르가 한국에 들여온 사상들이었다. 이후 몇 번의 '자기 비판'과 에티엔 발리바르 등 제자들과의 결별이 그의 '정신분열'의 영향이었는지는 나는 알 수 없었고 관심도 없었다. 무엇보다 그의 글과 사상은 어렵다.


3.

"'구체적 상황에 대한 구체적 분석'은 레닌주의의 용어로 말하자면 프롤레타리아 계급의 위치, 계급관계, 그러므로 세계적 차원과 국민적 차원에서 동시적으로 제국주의적이고 프롤레타리아적인(이 두 측면은 분리 불가능하죠) 계급투쟁의 상태로 필연적으로 향하는 그러한 분석을 말하는 것입니다."
- 루이 알튀세르, [검은 소], <2장. 22차 당대회의 모순>, 1976.


1976년 프랑스 공산당은 22차 당대회를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 개념을 폐기한다. 스탈린의 '일국사회주의'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완성'을 선언하고 하나의 '현실 정치체제'가 된 후 유럽 선진 자본주의 각국에서 '의회주의'를 병행하는 유럽 공산당들은 노선 전환을 시도한다. 마르크스주의 '과학'인 '역사유물론'에서 '필연'적 이행기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포기하고 '인간적인 자본주의'로 수정하는 '유로 코뮤니즘'의 출현이었는데, 이런 정국에서 루이 알튀세르와 에티엔 발리바르 등의 마르크스 철학자이자 공산주의 이론가들은 이 기획에 '이론적'으로 반박하기 시작한다. 그 중심 테마가 바로 '프롤레타리아 독재'다.

알튀세르를 비롯한 일련의 공산주의 '철학자'들에게 계급투쟁의 인류역사에서 '민주주의'와 '독재'의 개념은 '구체적'으로 또는 현실적으로 동일했다. 그러므로 다수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라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인 결론을 도출한다. 이러한 체제이행의 필연적인 개념을 포기한 1976년 프랑스공산당 22차 당대회는 역시 100년전 마르크스의 [고타강령비판]의 정세의 현대적 반복이었다. 알튀세르와 동지들은 '프롤레타라아 독재'의 '철학'적 '필연성'에 관한 일련의 저작들과 주장을 열심히 제기했지만, '철학'은 결코 당대 현실 '정치'를 이길 수 없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프랑스공산당 강령에서 결국 삭제되었고 알튀세르는 공산당에서 사라졌으며 그의 동지들은 분열하고 결별했다.

이후 알튀세르는 '자기 비판'을 통해 후기 사상으로 접어들었다. '계급투쟁'의 '이론적 무기'로서의 '철학'의 '새로운 실천'을 지향했지만, 구체적 진리를 담보하지 못한 채 1980년대에는 사변적 골방 철학자가 되었고 프랑스 구조주의와 포스트모더니즘 따위에 소환되는 처지가 되었다. 그리고 결국 정신분열로 아내를 목졸라 죽이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는 아무도 몰라주는 '고독'에 싸인 자신을 선학인 마키아벨리나 마르크스에 빗대어 '마키아벨리의 고독'이나 '마르크스의 고독' 따위를 언급하고 그들의 '침묵'처럼 본인도 '침묵'의 철학자가 되었다. 이것이 그의 후기 사상으로서 '고독'과 '침묵', 그리고 '우연'의 철학이다.

한참 후 1990년대에 남한사회 '알튀세리앵'을 자처했던 일련의 학자들이 [알튀세르 효과]라는 책을 엮었고, 21세기 초 [마키아벨리의 가면](2001) 이후 잊고 살던 알튀세르를 2018년에 나는 그의 '유고집'으로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검은소]는 1976년의 어두운 정국에서 앞길을 가늠해볼 수 없었던 은유('검은소')로서 '프롤레타리아트 독재'에 관한 알튀세르의 철학적 고뇌를 담고 있으며, [무엇을 할 것인가]는 마르크스주의 계급투쟁론과 국가론을 견지하면서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을 역시 '철학'적으로 결합한 알튀세르 후기 글들을 엮었다. 
이미 [마키아벨리의 가면] 당시 내가 읽은 알튀세르는 더이상, 세계의 '필연'적 '법칙'으로서 '진리'를 집요하게 추적하던 정통 '철학자'가 아니었다. 자기 비판과 자기 반성을 통해 '고독'과 '침묵'이라는 '가면' 뒤에 숨은 알튀세르는 '필연'을 버리고는 우연'적 '만남'과 '유물변증법'을 혼란스럽게 접목시켰고 그가 추구하던 '진리'는 그의 정신분열적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아마도 정통 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을 넘어 확률과 우연의 양자 물리학의 '과학'적 성과를 의식해서였을는지도 모른다.

이전의 나와 '단절'된 지금의 나는 폐암 4기인 아버지의 주장이 아닌 마음을 읽으려 노력하고, 주변 동료들에게도 나의 주장만이 아닌 그들의 생각을 들으려 노력한다. 
중요한 건 '철학'이 아니라 '사람'이라는 사실을 20세기말 알튀세르와 결별하면서 깨닫기 시작했지만, 사실 나의 '철학'은 변함이 없다. 끊임없이 분열하고 토론도 불가한 '철학'의 전장에서 세상을 바라보는 '불변의 진리' 혹은 '단 하나의 방정식'을 찾는 노력을 기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실천'도 부족하고 '철학'도, '소설'도 부진했던 내가 지금껏 모자란 머리로 책을 읽는 이유다.

알튀세르를 읽던 시간이었던 지난 세기말 이후로도 내가 버리지 못하는 습성이다.


***

1. [자본론을 읽는다](1966), 루이 알튀세르, 김진엽 옮김, <두레>, 1991.
2.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 루이 알튀세르, 고길환/이화숙 옮김, <백의>, 1990.
3. [레닌과 철학](1968), 루이 알튀세르, 이진수 옮김, <백의>, 1991.
4. [철학과 과학자들의 자생적 철학](1967), 루이 알튀세르, 김용선 옮김, <인간사랑>, 1992.
5. [마키아벨리의 가면](1972~1986), 루이 알튀세르, 오덕근/김정한 옮김, <이후>, 2001.
6. [검은 소 - 알튀세르의 상상 인터뷰],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생각의 힘>, 2018.
7. [무엇을 할 것인가? - 그람시를 읽는 두 가지 방식], 루이 알튀세르, 배세진 옮김, <오월의 봄>, 2018.
8. [알튀세르 효과], 에티엔 발리바르/서관모 외, 진태원 엮음, <그린비>, 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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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술사'를 읽던 시간 : 2016년
- 곰브리치와 하우저, 뵐플린과 파노프스키, 그리고 진중권 등


"대수학(代數學/algebra)-아라비아인과 페르시아인에 의해 후기 르네상스 학자들에게 전해진, 자연의 법칙과 변수를 숫자와 문자로 표시하는 훌륭한 도구-의 경우, 레오나르도는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이로 인해 그는 자연에서 포착한 패턴을 그림으로 그리면서 방정식이라는 붓을 사용할 수 없었다... 오늘날의 용어로 말하자면 그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아니라 '아날로그' 도구가 더 편한 사람이었고, 형태를 통한 '유추(analogies)'도 그 도구 중 하나였다(그렇다, '아날로그analog'라는 단어는 여기서 파생되었다). 그는 (자신의 노트에) 다음과 같이 썼다. '산수는 참되고 완벽한 단위를 사용하는 산술적 계산과학이지만, 연속적 성질을 다루는 데는 무용하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13. 수학>, 월터 아이작슨, 2017.


1.

취학 전 어린 시절의 나에게는 16절 누런 갱지와 모나미 볼펜만 있으면 되었다. 
인천직할시 동구 송림동의 2층집은 지금도 아련하게 창밖 풍경이 떠오르는데, 아마도 네다섯살 세상 풍경에 눈을 뜬 첫 그림이었을게다. 위로 누나만 셋이었던 나는 국민(초등)학교 입학 전까지 나가서 놀 친구가 없었다. 그 당시 1층에서 고무신 가게와 만화방 등을 운영하다 망한 어머니는 직장을 다니셨고 누나들이 학교 간 시간 집에 혼자 있던 내게 어머니는 예의 갱지 몇 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주고는 일을 나가셨다. 그렇게 나는 이층 창을 열어놓은 어두운 방에 엎드려 혼자 글씨도 베껴 써보기도 했고, 주로 그림을 그렸다.

그림을 그리고 어머니의 만화가게 영향이었던지 나만의 스토리로 만화책을 만들어보기도 했다. 우연히 밖에 나갔다가 보게 되거나 운좋게 주워 온 영화 '산딸기'나 '애마부인' 포스터의 여주인공의 나체를 몰래 그려보기도 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같은 15세기 르네상스 미술가들은 고대 그리스-로마의 고전주의로 돌아가('부흥'/'Renaissance') 이상적인 인체를 그리고 조각하는 '시각예술(Visual Arts)'을 발전시켰다. 그들 고전주의 예술가들은 여체보다는 우람한 남성의 육체를 이상화하였다지만, 예닐곱살의 나는 그림을 통해 신비한 여성의 육체를 넘보기 시작했다. 어린 내가 몰래 그렸던 '춘화'들은 이층 창가방의 다락방에 숨겨두었지만 아마도 부모님과 누나들에게 들켰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기억엔 없지만 '춘화'는 아주 가끔 그렸고 주로 백과사전 삽화에 나오는 공룡 같은 걸 그렸던 것 같다. 할머니 집 티비에서 보았던 마징가도 그렸는데 내가 봐도 꽤 잘 그렸다고 생각했던 기억은 있다.

매일 방구석에 엎드려 갱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그림을 그렸지만 당시 나의 장래희망은 '화가'가 아니었다. 아마도 '화가'였다면 채색을 시도했겠으나 나의 꿈은 '화가'가 아니라 '고고학자'였기에 스케치만 했다. 아마도 어린 시절 꿈이 '대통령'이나 '과학자'가 아닌 소박한 '고고학자'였던 이유는 갱지에 스케치한 공룡들과 화석들을 직접 발굴하고 싶어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마징가Z에 나오던 헬박사가 실은 고대 그리스의 미케네 문명을 재발굴하던 '고생물학자'였기 때문이었을 수도 있겠다. 닥터 헬이 부활시킨 '기계수'는 크레타 문명의 '청동거인' 탈로스들이었고, 더 진화된 악당들이자 그레이트 마징가의 천적인 '전투수'들은 미케네 문명의 부활한 전사들이었다.
고고학자의 동기는 바로 공룡과 화석. 그리고 마징가였다.


2.

말은 그럴싸 했지만 사실 '고고학자'의 장래 희망은 그리 오래 가지 않았다. 학교 다니기 시작하며 혼자 방에서 그림 그리며 공상하는 시간이 줄었고 대부분 밖에 나가서 친구들과 놀게 되었기 때문이겠다.

정확하지는 않으나 다시금 '고고학자'를 생각하게 된 중고등학교 시절에는 장래 희망이나 꿈은 아니었고 단순한 호기심이었다. 나는 이미 그렇게 되지 못할 것이란 걸 알게 된 나이였고, 어린 시절 그 갱지에 모나미 볼펜으로 그림을 그릴 게 아니라 숫자와 수학공식을 가지고 놀았었더라면 '문과'적 인간이 아닌 '이과'적 신인류가 되었을 지도 몰랐겠다는 망상을 하던 시기였다. 
내가 다시 '고고학자'를 상기한 동기는 아마도 고대 그리스 미케네 문명을 발굴한 독일의 상인 하인리히 슐리만과 아랍의 페르시아 문명 등을 발굴한 영국의 군인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알게 된 후였을 것이다. 말할 것도 없이 슐리만은 마징가의 모티브였고, 로렌스는 애거서 크리스티의 나일강과 메소포타미아 살인을 다룬 추리소설의 모티브라고 난 생각했다.


나와는 아주 다른 '이과'적 인류였을 스티브 잡스의 전기를 쓴 미국의 언론인이자 역사학자 월터 아이작슨(Walter Isaacson)이 2017년에 출간한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전기는 피렌체와 밀라노 등지에서 르네상스의 문을 열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생애를 주로 레오나르도의 방대한 노트를 토대로 서술해 나간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피렌체의 공증인이었던 아버지 피에로 다빈치의 사생아였지만 아버지의 영향으로 종이와 펜을 늘 가까이 할 수 있었는데, 사실 노트와 펜을 지참하는 습관은 당시의 지식인들에게도 일종의 유행과도 같았으므로 레오나르도만의 특징은 아니었다. 다만, 레오나르도의 메모와 필기노트는 세상만물 모든 것에 대한 호기심으로 가득했고 분량이 많았으며 집요했기 때문에 유명하다. 인체해부학과 전쟁무기, 수학적 비례와 인력으로 하늘을 나는 비행기, 딱따구리의 혀까지 묘사하는 무한한 호기심과 창의력의 보고였다.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활동하던 당시는 오스만 투르크에 의해 멸망한 동로마 비잔틴제국에서 탈출한 학자들이 서양에 이식한 '르네상스'의 시작점이기도 했지만,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의 저자인 월터 아이작슨에 의하면 당시 "레오나르도, 콜럼버스, 구텐베르크가 활약한 15세기는 발명, 모험, 신기술을 통한 지식 전파의 시대였다. 다시 말해, 지금 우리가 사는 시대와 비슷했다"(같은책, <머리말>). 중세를 극복하려던 그 당시의 시대는 '사생아, 동성애자, 왼손잡이'였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를 포용했고 이들 '르네상스주의자'들은 왕성한 호기심과 창의력을 발휘해 인류 문명을 한층 발전시켰다.


3. 

그림은 열심히 그렸으되 꿈이 화가는 아니었던 나는, 어릴적 '숫자(number)'가 아니라 '시각화된(visualized) 그림'을 우연히 접하게 되었기에 '수학'보다는 '미술'을 더 사랑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수학경시대회는 못 나갔지만 미술경시대회에서 작으나마 상장을 받은 기억도 난다.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겠지만, '미술'과 '수학'은 상극과 같다고 생각해 왔는데, 그 역사적 증거는 창의력과 호기심의 천재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위대하게 보여주고 있다. 구텐베르크의 인쇄술과 그로 인한 출판업의 비약적 발전으로 레오나르도는 선배들처럼 라틴어를 완벽하게 배우지 않아도 갖가지 신문물과 정보들을 접할 수 있었고, '신성비례(황금비례)'와 복식부기의 창안자였던 수학자 루카 파치올리와 친구 먹기도 했다. 그러나 그림으로 표현되는 '시각화'에 능했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단순한 산수를 틀리기도 했으며 세상만사 법칙을 숫자 대신 변수와 공식으로 표현하는 아라비아의 '대수학(代數學/algebra)'에는 더더욱 약했다. 멈추지 않는 호기심과 관찰력에도 불구하고 그의 '수학'과 '군사학' 따위는 밀라노 시절 스포르차 공국으로부터 채용되지 못했고 결국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후세에게 '화가'로 남았다.

레오나르도는 천재였지만 보티첼리나 미켈란젤로 같은 경쟁자들에 비해 '완성작'이 별로 없다. 경쟁자들은 권력자들로부터 의뢰받은 작품을 무수히 찍어대는 공장과도 같은 공방을 운영했다. 레오나르도 또한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이나 밀라노 스포르차 가문,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의 모델이었던 체사레 보르자 등의 권력자로부터 후원을 받으며 조수와 장인을 거느렸지만 결국 '화가'인 그가 완성한 그림은 [최후의 만찬] 외 거의 없다. [동방박사의 경배]나 [모나리자] 같은 작품은 평생 들고 다니며 생각날 때마다 수정에 수정을 거듭했다. 아마도 초기작 [수태고지]나 중기작 [최후의 만찬]과 [암굴의 성모] 같은 그림도 그가 보기엔 '완성작'이 아니었을 정도로 그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럼에도 그의 호기심은 그의 '완벽주의'를 넘어섰다. 의뢰받은 그림을 그리다가도 인체나 말의 움직임 등에서 막히면 그림을 중단하고 노트를 통한 관찰과 연구로 빠져들었다. 아이작슨은 이런 레오나르도의 습성은 지금으로 치면 '주의력 결핍'일 수도 있겠다고 진단한다. 평생 강박증과 집요함에 시달렸지만 관심사가 너무도 많았던 그에게 '완성작'은 죽어서야 가능한 거였을 테다. 


4.

"결국 우리는 출발점으로 다시 돌아왔다. 미술(Art)이라는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그들은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그것을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가지고 있으며, 드물기는 하지만 어중간한 해결방식에 머물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인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뛰어난 남녀들이다. 미술가는 계속해서 태어날 것이라고 확신한다. 그러나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우리들 자신, 즉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 있다. 우리가 관심을 갖느냐 아니냐에 따라, 편견을 갖느냐 이해심을 갖느냐에 따라 미술의 운명을 좌우하게 되는 것이다. 전통의 흐름이 끊이지 않게 하고 미술가가 과거로부터 대대로 물려받은 이 미술이라는 보물에 귀중한 것을 하나 더 보탤 수 있게 하는 것도 바로 우리들 자신이다." 
- [서양미술사], <27장. 실험적 미술 - 20세기 전반기>, 에른스트 곰브리치, 1950.


2016년에 유독 '미술사(美術史)'를 파고들었던 계기는 에른스트 곰브리치와 아르놀트 하우저, 그리고 진중권 덕분이었다.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아이들을 위한 세계사 이야기로 알게된 오스트리아 출신 예술사가다. 아르놀트 하우저는 문과대에서 영문학을 전공한 내가 도서관에서 몇 번인가 뒤적이고 발췌도 해보았을 문예를 전공하던 학생이라면 한 번쯤 들어보았을 헝가리 태생 마르크스주의 예술사학자다. 진중권은 우리가 잘 아는 그 좌충우돌 논객으로 내가 대학 신입생 때 [미학 오디세이]로 유명한 바로 그 사람인데, 발췌와 인용을 중심으로 박식한 해설을 풀어내는 글쓰기 방식은 내가 가장 좋아하고 애용하는 구성과 스타일이다.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를 읽던 그 시기는, 바야흐로 내가 노동조합 사무국장 임기를 마치고 위원장 후보가 되기 위해 준비하던 시기였다. 박근혜 정권의 노동개악 광풍이 매섭게 몰아치던 시기였고, 내가 활동했던 집행부는 임금피크제 도입과 신인사제도 개편 합의로 인해 조합원 지지도가 바닥을 치던 시절이었다. 파업의 실력이 없는 노동조합은 노사협상에서 결코 승리할 수 없다는 진리를 다시금 되새기던 시기였고, 그 집행부 사무국장이 위원장 후보로 나온다는 것은 이미 예정된 패배라고들 예측하던 시절이었다.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주역점'을 쳤고 온통 물에 빠지는 '택수곤'과 '중수감' 괘가 나와 무척 실망하였지만, 내 결정을 되돌리지 않았다. 손자는 고전적 병법에서 "먼저 이겨놓고 싸운다"는 원칙 아래 이기는 싸움만 하라고 전했지만, 내가 아는 인류의 역사는 지는 싸움에도 뛰어들어야 하는 거였다. 
결국 나는 패배했지만, 혼자 결정하고 만류하는 주변을 거스르면서 세상에 나 혼자 밖에 없다고 생각되던 그 외로운 시기에 대뜸 떠오른 게 아주 오래 전 어두운 방에 배를 깔고 엎드려 그림을 그리던, 꿈이 화가는 아니었지만 고고학자를 바라며 모나미 볼펜을 휘두르던 어린 시절의 나였다. '미술'과 '고고학'은 '미술사학'이었고 그렇게 나는 곰브리치와 하우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읽으며 그림에 빠져들었고 곰브리치의 말대로 '미술'이 아닌 창의적이고 도전적이었으며 성공도 했지만 더 많은 실패자들로 남은 '미술가'들을 만났다. 
'미술사'는 '미술'을 좋아하고 '역사'도 좋아하는 사람들이 놀기 딱 좋은 놀이터였다.

곰브리치 [서양미술사]의 주제는 '모더니즘'이다. 20세기 중반만 해도 지성계에서 '모더니즘'은 '혁신'의 다른 말이었다. '미술'은 없고 '미술가'만 존재한다는 곰브리치에게 미술사는 창의적 도전과 실패로 점철된, 그러나 늘 새롭게 혁신되는 시공간이었으며 다양한 예술사조를 돌아보기는 하지만 결국 큰 관점에서는 이 모든 것이 '모더니즘'의 승리였다.

하우저는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라는 제목이 말해주듯, 문예의 역사만이 아닌 '사회사'를 풀어내는 마르크스주의자였다. 즉, 문예 자체가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라 사회의 정치경제적 배경을 그 나름의 형식으로 반영하고 투영한다는 관점이다. 20세기 중반의 서양 마르크스주의자였음에도 그리 교조적이거나 도식적이지 않은 시선으로 문학과 예술 일반의 사회적 역사를 서술하는 하우저의 저작은 박정희 군사독재가 한창이던 1974년, 내가 태어난 그 해에 백낙청과 염무웅 같은 진보적 지식인들이 처음 국역본으로 우리 사회에 소개했고, 1980~1990년대 대학생 사회에서 문예 전공자들의 필수도서가 되었다. 물론 나는 당시 다 읽지는 못했고 곰브리치로부터 촉발된 [서양미술사]로 인해 처음으로 하우저를 다 읽을 수 있었다. 곰브리치에게 '모더니즘'이 있었다면, 하우저에게는 모든 것이 '낭만주의'였다. 그가 말한 문예계의 '혁명'은 모두 '낭만주의'적 혁명이었다.

물론, [서양미술사]의 '원조'로 치면 영국의 미술비평가이자 시인이었던 허버트 리드의 [예술의 의미](1931)를 들 수도 있다. 리드는 1부 '예술의 정의'부터 2부 각종 '문예사조'를 비롯하여 3부 예술의 주체인 '예술가의 관점'까지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미술사의 고전인 허버트 리드의 이 저작은 그럼에도 매우 무미건조하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독일 미술사학자 하인리히 뵐플린의 [미술사의 기초개념](1915)이 있다. 빙켈만의 18세기 미술비평은 너무 직선적이고 고전주의적이며 시대 변화에 따라 오류도 많아 나는 부러 찾아 읽지는 않았는데, 20세기 초 뵐플린의 미술사는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를 통해 원전으로 읽고자 마음 먹고 열심히 메모하면서 읽었다.

뵐플린은 15세기 조토, 마사초, 보티첼리 등의 고전기 르네상스(콰트로첸토)에서 16세기 레오나르도 다빈치,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티치아노, 뒤러 등의 전성기 르네상스(친퀘첸토)를 지나 17세기 렘브란트, 루벤스 등의 바로크(세이첸토)로 이어지는 시각표현양식의 이행을 다음의 다섯가지 개념쌍으로 이론화한다.

1. '선적인 것(소묘)'에서 '색채적인 것(회화)'으로의 이행
2. '평면성'에서 '깊이감'으로의 이행
3. '폐쇄적 형태'에서 '개방적 형태'로의 이행
4. '다원적 통일성(개별적 완성미)'에서 '단일적 통일성(전체적 완성미)'으로의 이행
5. '절대적 명료성(명료성)'에서 '상대적 명료성(불명료성)'으로의 이행

독일 근대 관념철학의 관점에서 미술사를 서술하는 뵐플린이 칸트 철학에서 차용했을 '직관 범주'로서 이 개념쌍들은 상호 중첩되기도 하고 "서로 긴밀히 연결되어 있으며 동일한 사태에 대한 다섯 가지 관점"(같은책, <결론>)이라고 하는데 뵐플린의 이 역작은 딱딱한 이론서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매력적인 미술사의 고전이다.

역시 내 글쓰기의 교본과도 같은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1권인 <고전예술편>에서 자주 인용하는 에르빈 파노프스키는 미술사와 미술비평의 최고봉이다. 

"과학이 자연현상의 혼돈의 다양성을 이른바 자연의 질서(cosmos)로 바꾸려고 노력하는 반면, 인문학은 인간기록(문헌)의 혼돈의 다양성을 이른바 문화의 질서(tabula)로 바꾸려고 노력한다... 마치 자연과학이 현상이라 불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하듯이, 인문학은 역사적 사실이라 불리는 것을 무의식적으로 선택한다... 결국, 자료가 자연의 질서로 조직화되는 연속단계들과 자료가 문화의 질서로 조직화되는 연속단계들은 서로 유사하다. 또한 그 과정에서 함의되는 연구방법의 문제들도 마찬가지이다. 첫번째 단계에서는 앞에서 얘기했듯이 자연현상의 관찰과 인간기록의 검토가 행해진다. 그 다음 단계에서는, '자연으로부터의 메시지'가 관찰자에게 받아들여지듯이, 기록도 '판독되고' 해석되어야 한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관찰과 검토의 결과가 '의미를 지니는' 일관된 체계로 분류되고 정의되어야 한다."
- [시각예술의 의미], <서장: 인본주의적 학제로서의 미술사학>, 에르빈 파노프스키, 1955.

그림, 조각 등의 '시각예술(Visual Arts)'에서 '일차적-자연적 주제'를 넘어 '이미지', '일화', '알레고리' 등을 구분하는 '이차적-관습적 주제'를 파악하는 것, 즉 "미술작품의 형식에 대비되는... 주제 또는 의미에 관련된 미술사 분야"(같은책, <1장. 도상학과 도상해석학 : 르네상스 미술연구에 관한 서문>)로서 '도상학(iconography)'에 그치지 않고 '도상해석학(iconology)'을 개척한 미술사학자가 바로 독일 출신의 미국 미술사학자 에르빈 파노프스키(1892-1968)이다.

그의 '도상해석학'은 미술작품에 등장하는 '이미지', '일화', '알레고리' 등의 관습적 의미 등을 밝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관련 문헌과 당시 예술사조 등을 바탕으로 시대의 '문화적 징후' 또는 '상징'을 읽어내고 해석하는 단계까지 나아가는데 철학과 역사를 아우르는 방대한 '인문학적 지식'을 바탕으로 한다. 
그러므로 그림 자체를 읽고 해석하는 '도상학'을 넘어 당시 시대적 상황과 문헌 등을 토대로 미술의 역사적 의미까지 '해석'하는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은 자연과학과 인문학에 미술 또는 예술 일반을 접목시키는 위대한 작업임에도 불구하고 매우 어렵고도 난해하다. 만약 내가 '미술 고고사학자'를 꿈꾸었다면 문헌적이고도 서지학 분야를 아우르는 에르빈 파노프스키의 '도상해석학'을 로망으로 삼았을 가능성이 있었겠지만, 다행히도 '미술사학자'의 꿈은 내 인생에서 멀리 빗겨나간 후였다.


5. 

"... 하지만 그(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가장 주된 재능은 여전히 화가로서의 그것이었다. 피렌체에서 지내던 시절에도 그랬고, 그의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그럴 터였다."
- [레오나르도 다빈치], <15. 암굴의 성모>, 월터 아이작슨, 2017.


결국 '외로운 결단'에도 불구하고 나는 2016년의 노동조합 위원장 선거에서 패배했다. 그러나 그 시간 동안 나를 버티게 해주었던 [서양미술사]의 시간들은 지금껏 내 독서와 글쓰기 리스트 윗 줄에 있다. '숫자'를 갖고 놀지 못했던 바람에 수학이나 더더욱 대수학과는 먼 길을 걸어왔지만 어릴 적부터 '미술'과 함께 컸고 중년 이후 독서와 글쓰기를 통해 깨닫게 된 '역사'라는 영역이 '미술사'만큼이나 더 어우러지게 접목되는 교차지점은 없다. 

이제 [서양미술사] 관련 고전들을 찾아 읽지는 않지만, 일본의 미술사학자 나카노 교코와 우리나라 신예 미술사 작가 김선지 선생의 책은 꼭 우선 읽어보려고 한다. 다른 미술사학자들도 많겠지만 더 관심을 넓히고 싶지는 않다. [무서운 그림] 시리즈를 통해 고전 명화들의 의미와 역사를 이야기하는 나카노 교코와 '그림속' 시리즈로 천문학과 그리스 별자리신화 등을 고전명화 해설과 접목시킨 김선지 작가의 글쓰기 또한 내 글쓰기의 표본이다.

오래전 군대에서 읽었던 우리나라 미술사 전공학생 송대방 작가의 [헤르메스의 기둥](1996)과 일본 미술사학자 아키타 마사코의 [그림을 보는 기술](2019) 또한 그 유익한 미술 이야기와는 별도로 매우 훌륭한 '미술사' 이야기다.

또한 '미술사'에서 빼놓을 수 없는 작가가 있으니 16세기 이탈리아 건축가이자 화가인 조르조 바사리(Giorgio Vasari)다. [가장 저명한 화가, 조각가, 건축가 열전](1550)이라는 미술사 고전은 해당 분야에서 단연 [플루타르크 영웅전]이나 사마천 [사기열전]과 비슷한 반열일 수 있겠는데, 분량이 너무 많고 역시 오류도 많아 일부러 찾아 읽을 엄두를 못내던 참이었다. 그러던 중 회사 동기의 책소개로 읽게 된 월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라는 전기는 레오나르도 다빈치 뿐만 아니라 바사리가 역시 추앙하던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의 열전까지 대신 읽을 수 있는 매우 유익하고 귀한 책이었다. 어차피 바사리의 책 목차를 보니 내가 알만한 예술가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보티첼리 정도였는데, 아이작슨의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바사리의 원전을 읽지 않고도 그 내용을 맛볼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어준다.


다양한 관심사에도 불구하고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우리에게 '화가'로 남았다.
나 또한 몇 가지 관심사에 도전해 보았지만 이제 중년을 지난 내게 남은 건 '독서'와 '글쓰기' 뿐이다.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화가'였음에도 완성작이 별로없었고 그러나 천재였기에 역사에 이름과 수많은 노트를 남겼다.
결코 천재가 아닌 나는 '글쓰기'를 좋아하지만 그리 대중적이지 못해서 이번 생은 망했다.
그래서 나에게 '독서'와 '글쓰기'는 매우 즐겁기는 하나 만만치 않게 고독한 작업이다.
그나마 '미술사'를 읽던 2016년 이후로 '미술'과 '역사'는 나의 독서와 글쓰기가 한바탕 신나게 뛰어노는 무한한 놀이터라 다행이다.


***

1. [레오나르도 다빈치](2017), 월터 아이작슨, 신봉아 옮김, <북이십일 arte>, 2019.
2. [서양미술사(The Story of Art)](1950), 에른스트 곰브리치, 백승길/이종숭 옮김, <예경>, 2003.
3.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Social History of Art)](1951), 아르놀트 하우저, 백낙청/염무웅 외 옮김, <창비>, 1974~2016.
4. [미술사의 기초개념(Kunstgeschichtliche Grundbegriffe)](1915), 하인리히 뵐플린, 박지형 옮김, <시공사>, 1994~2016.
5. [예술의 의미(The Meaning of Art)](1931), 허버트 리드, 임산 옮김, <에코리브르>, 2006.
6. [시각예술의 의미(Meaning in the Visual Arts)](1955), 에르빈 파노프스키, 임산 옮김, <한길사>, 2013.
7. [서양미술사], 진중권, <휴머니스트>, 2008~2016.
8. 나카노 교코, [무서운 그림] 시리즈, <세미콜론>, 2008~2019.
9. 김선지, [그림속 천문학]/[그림속 별자리신화], <아날로그>, 2020~2021.
10. [그림을 보는 기술](2019), 아키타 마사코, 이연식 옮김, <까치>,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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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세트 - 전4권 (리커버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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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에르빈 파노프스키, 하인리히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2018년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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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인상주의 편 (리커버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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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에르빈 파노프스키, 하인리히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2018년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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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중권의 서양미술사 : 고전예술 Classical Art 편 (리커버판)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진중권 지음 / 휴머니스트 / 202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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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근법'과 '인상주의'로 미술사를 돌아보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흔히 투시법은 서구 미술에만 있다고 생각하기 쉽다. 하지만 르네상스의 원근법이 유일한 투시법은 아니다. 파노프스키가 지적한 대로 그것은 가능한 많은 투시법 가운데 하나일 뿐이다. 그리하여 서구의 원근법과는 다른 투시법도 얼마든지 존재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예가 바로 러시아 성상에 적용된 역원근법이다. 
르네상스 원근법은 움직이지 않는 시점을 전제한다. 러시아 성상에서는 시점이 움직인다. 이렇게 움직이는 시점으로 본 장면들을 하나로 통일시킬 때, 외려 가까이 있는 것일 수록 짧게 묘사되는 흥미로운 표현이 등장한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고전예술편>, 5장 '물구나무선 원근법'


'미학'을 대중적으로 풀어쓴 진중권이 '서양미술사'를 개괄한 대중서 4편이다. 
통시적으로 '고전예술편', '모더니즘편', '후기 모더니즘과 포스트 모더니즘편'으로 '서양미술사'를 돌아봤던 기존 3편에 최근 '인상주의편'을 추가하였다.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아르놀트 하우저의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 등이 미술이나 예술 전문가들을 위한 학술고전 같은 성격이라면, 진중권의 [서양미술사]는 미술사를 처음 접하는 일반 대중들이 읽어도 좋은 책이다.

미술의 역사이다 보니 여러 가지 내용들이 있지만, 이 책을 관통하는 두 가지 테마는 '원근법'과 '인상주의'다.

2차원 평면에 잠겨있던 고대와 중세의 그림에 3차원적 혁명을 불러온 것이 르네상스의 원근법이다. 진중권은 이 혁명이 하나의 시선으로 사물을 보는 '고전적 원근법'에 불과하며, 실제 과학적인 사실은 여러개의 다양한 시선으로 대상을 보는 것으로서 '러시아의 역원근법'을 거쳐 '후기 인상주의' 화가로 알려진 폴 세잔의 '체험된 원근법'으로 풀어낸다.
즉, 우리의 안구와 지각을 통해 보이는 사물이나 대상은 하나의 고정된 시선이 아닌 다양한 시선으로 현상한다는 것이다.

미술사 또한 인류 역사처럼 '부정의 부정', 끊임없는 변증법적 혁명의 과정이다.
이런 미술사를 관통하는 첫번째 테마가 바로 '원근법'인 것이다.

'고전예술편'은 에르빈 파노프스키, 하인리히 뵐플린 같은 저명한 미술비평가들의 논문을 한편 한편 소개하는 방식으로 모더니즘 이전까지를 정리한다.
유시민도 2018년 신작 [역사의 역사]에서 헤로도토스, 사마천, 마르크스, 카, 박은식과 신채호, 다이아몬드와 하라리, 아랍 역사가 이븐 할둔까지의 역사서를 소개하면서 비슷한 서술방식를 취하고 있는데, 개인적으로 이런 서술방식이 좋아 진중권의 4편 중 ‘고전예술편’을 가장 추천한다.

역사도 그렇지만 미술사라는 것이 갖가지 '예술사조'로 도식화될 수 없다. 곰브리치나 하우저도, 진중권은 특히 그러한 도식화를 경계하고 있지만 전문가가 아닌 일반인이 전문분야의 역사를 이해하려면 그런 도식화가 불가피하기도 하다. 
마르크스주의자는 주로 '사실주의(또는 ‘리얼리즘’)를, 곰브리치는 '모더니즘'을, 하우저는 '낭만주의'를 분명하게 지지하는데, 진중권이 미술사를 읽는 두번째 테마는 '인상주의'다.

과학과 산업의 혁명적 발전을 배경으로 기존 '고전주의'를 부정한 쿠르베의 '사실주의'로부터 시작하여 진중권은 대상의 객관적 묘사에 복무하는 '사실주의'보다는 인간의 지각에 묘사된 사물을 그린 '인상주의'에 주목한다.

특히, 진중권은 '인상주의'를 넘어서 현대미술을 시작하는 '모더니즘'으로 이어지는 폴 세잔에게서 현대미술의 '혁명'을 본다.

고전적 미술로부터 "색채를 해방시킨 '야수주의' 앙리 마티스"와 "형태를 해방시킨 '입체주의' 파블로 피카소" 둘 다 '후기 인상주의' 폴 세잔의 ‘자식’이라는 것이다.

진중권은 폴 세잔을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 규정한다.


"인상주의와 모더니즘의 가교로서... 세잔의 작업은 고전미술이 현대미술로 이행하는 과정의 마지막 단계였다. 그의 화면에서 발견되는 '색채의 놀라운 풍부함'과 기하학적으로 단순한 형태, '고전적 원근법'과 다른 '체험된 원근법'은 20세기 현대미술의 초석이 된다. 마티스는 그에게서 색채의 효과를, 피카소는 그에게서 형태의 기하학적 단순화와 고전적 원근법의 파괴를 배웠다. 현대미술의 두 위대한 이정표 모두 세잔을 '아버지'라 부른 것은 그 때문이다...
마티스와 드랭의 야수주의, 피카소와 브라크의 입체주의, 현대미술의 두 이정표도 세잔이 없었다면 탄생할 수 없었거나, 혹은 그 탄생이 뒤로 한참 늦춰졌을 것이다. 세잔은 마지막 고전주의자이자 최초의 현대주의자였다."

- 진중권의 [서양미술사], <인상주의편>, 11~12장 '세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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