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상 까치글방 130
에릭 홉스봄 지음, 이용우 옮김 / 까치 / 199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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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1994) - 에릭 홉스봄
- 불확실한 시대의 '묵시록'


"오직 이러한 도전세력(파시즘)으로부터 자신을 방어하기 위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와 공산주의의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만이 민주주의를 구했다. 히틀러 독일에 대한 승리는 기본적으로 적군(赤軍)에 의해서 쟁취된 것이었고, 오직 적군에 의해서만 쟁취될 수 있었던 것이다. 파시즘에 맞선 자본주의-공산주의 동맹의 이 시기-기본적으로 1930~1940년대-는 여러 점에서 20세기사의 중심이자 결정적인 시기이다. 여러 점에서 그 시기는 세기 대부분 동안-짧았던 반파시즘 시기를 제외하고는- 화해할 수 없는 적대적 상태였던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관계로 볼 때 역사적인 '역설'의 시기이다... 전세계 자본주의의 전복을 목표로 하는 10월 혁명의 가장 지속적인 결과가, 전쟁에서나 평화에서나-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자신의 적대자들에게 자극과 공포를 줌으로써 그들 자신을 개혁시키고, 경제계획의 인기를 확립하여 그들에게 개혁절차들 중 일부를 제공해 줌으로써- 자신의 적대자들을 구한 것이었다는 점은 이 '기묘한' 세기의 아이러니들 중 하나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20세기 : 개관>, 에릭 홉스봄, 1994.


19세기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쓴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이 바라본 20세기는 '극단의 시대(Age of Extremes)'였다. 
'극단(extreme)'의 시대는 또한 '역설(paradox)'의 시대였다. 1914년 촉발된 제1차 세계대전과 1939년 개시된 제2차 세계대전의 '세계전쟁' 시대는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과 제3세계 '혁명'의 시대였고, 미-소 초강대국 간 '냉전(Cold War)'의 시대였다. 1991년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정권들이 무너진 후 더이상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자본주의 세계체제에 대한 대안이 보이지 않는 '불확실'한 '새로운 천년기'인 21세기를 앞둔 시기였다.

'장기 19세기(1789~1914)'를 돌아본 [혁명/자본/제국의 시대]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 역사를 통해 에릭 홉스봄이 내린 결론은 그래도 '희망'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중 70년 이상을 살아본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기록하는 이 [극단의 시대]는 한마디로 '불확실성'으로 가득한 '묵시록(默示錄/Apocalypse)'이다.
그리고, 21세기의 사반세기를 지나는 지금도 이 노회한 역사가의 전망은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듯 하다.


"(전쟁과 대공황)... 경제붕괴가 없었다면 확실히 히틀러도 없었을 것이고, 거의 확실히 루스벨트도 없었을 것이다... 요컨대 경제붕괴의 충격을 이해하지 않고는 20세기 후반의 세계를 이해할 수 없다... 대공황은 서방정부들로 하여금 자신의 국가정책애서 경제적 고려(자유시장)보다 사회적 고려(보호무역)를 우선시하도록 했다... 양대 군사강국-일본(1931)과 독일(1933)-에서 민족주의적이고 호전적이며 매우 공격적인 체제가 거의 동시에 승리한 것이, 가장 영향력 크고 가장 불길한, 대공황의 정치적 결과였다는 점만큼은 말하고 넘어가야 할 것이다. 제2차 세계대전에 이르는 문이 1931년에 열린 것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3. 경제적 심연 속으로>, 에릭 홉스봄, 1994.


러시아 소비에트 '10월 혁명'은 "전쟁에 대한 혐오"(같은책, <1-2. 세계혁명>)로 발생한 혁명이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이 일어난 배경은 제국주의 '러-일전쟁'이었고 1914년에 제1차 대전 참전한 러시아 차르체제는 1917년 '2월 혁명'으로 끝장났다. 러시아 농촌공동체(미르)를 모태로 한 노동자/농민/병사 소비에트의 광범위한 '이중권력'의 반전투쟁을 기민하게 지도하며 케렌스키의 '2월 임시정부'를 타도한 볼셰비키 '10월 혁명'은 19세기 내내 세계를 지배했던 자본주의와 그 '최고 단계'로서의 제국주의에 대한 당대의 거대한 대안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시기에는 파시즘에 반대하는 "일시적이고 기묘한 동맹"(같은책, <20세기 : 개관>) 관계를 자본주의와 맺었던 공산주의는 20세기 내내 서방 자유주의 초강대국 미국과 '냉전'을 벌였지만, 실질적으로 자본주의 세계체제인 이들 '제1세계'를 위협한 것은 소련이 지도하던 '제2세계'도, "경제와 과학기술의 발전"(같은책, <1-7. 제국들의 종식>)과 "전세계에 분포한 혁명지대"(같은책, <3-15. 제3세계와 혁명>)인 '제3세계'도 아니었다. 
"위협은 (좌파가 아닌) 우파로부터만 나왔다."(같은책, <1-4. 자유주의의 몰락>) 즉, 제1차 제국주의 세계대전이 만든 자유주의 세계의 괴물 '파시즘'은 본질적으로는 폭력으로 지배했지만 자유주의 대의민주주의 선거를 통해 집권했다. 자유주의의 적으로 간주된 '파시즘'은 자본주의 세계 대공황이 낳은 괴물이었다. 홉스봄에 의하면, "1930년대에 '파시즘'은 '미래의 물결'로 보였던 것"이고 대중동원 포퓰리즘으로서 "파시스트들은 반(反)혁명의 혁명가"(이상 같은책, <1-4>)였다. 
에릭 홉스봄에 의하면, 결국 20세기 역사는 '경제대공황'과 '세계전쟁', 그리고 '혁명'을 빼고는 설명할 수 없는데, 이 모든 '위협'은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자체로부터 나온 것이지 결코 제2세계 '공산주의'의 위협이 아니었다. 자본주의 초강대국 미국과의 '핵전쟁'으로서 제3차 세계대전의 가능성을 품은 '냉전' 시기 소련은 실질적으로 결코 그런 위협이 되지 못했는데, 소련의 '제2세계'는 단지 미국(레이건주의)과 영국(대처주의)의 보수주의자들이 반대파를 꺾고 집권하기 위한 과장된 '위협'이었다. 소련(스탈린주의)은 이미 1930년대에 '일국사회주의'를 선언하며 '세계혁명'의 의도를 포기한 채 세계의 절반을 지배하는 것에 그쳤다. 소련은 중국과 베트남, 쿠바 등지의 '제3세계' 혁명을 원칙적으로 반대했고 그들의 자력 혁명 이후에 마지못해 그들의 혁명국가를 지지했다. 

그렇게 본질적으로 20세기 '자유주의'의 적은 '공산주의'가 아니라 '자유주의'와 '자본주의' 그 자체에 내재된 '대공황' 및 '파시즘'과 '전체주의'였다.

소련과 동유럽 공산주의 '제2세계'는 미국과 서유럽의 '제1세계'와 경쟁했지만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았으므로, '제2세계'가 파산한 이유는 '냉전'이 아니라 '데탕트(해빙)'였다. 공산주의의 '위협'은 자본주의를 약화시키기는 커녕, 오히려 '자유시장'보다는 '보호무역'과, 작은 '야경국가'보다는 강한 '복지국가'를 강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홉스봄은 "냉전의 '역설'은 소련을 패배시키고 결국 파산시킨 것이 결국 '대결'이 아니라 '데탕트'였다는 데에 있었다"(같은책, <2-8. 냉전>)라고 쓰고 있다. 

자본주의는 그 자체 모순인 경제적 대공황과 그 상황이 낳은 파시즘으로 인해 위기에 빠졌고, 그 대안 체제로 등장했던 공산주의는 '역설'적으로 '케인스주의' 또는 북유럽 사회민주주의와 같은 자본주의 '혼합경제'의 모티브가 되면서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했다. 그러므로 "냉전의 종식은 국제분쟁의 종식이 아니라, 한 시대의 종식인 것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모든 이들이 낡은 시대가 끝났다는 것을 알 수 있었지만, 새로운 시대의 성격과 전망은 전혀 불확실했다."(같은책, <2-8. 냉전>)
즉,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이자 일종의 '사회민주주의자'로 추정되는 홉스봄이 보기에 인류의 '미래'인 '혼합경제'가 폐기되는 '냉전의 종식'은 또 하나의 '20세기 불확실성'의 시작이었다. 공산주의 몰락 후 힘을 얻은 하이에크나 프리드먼의 '주류경제학'과 대처리즘이나 레이거니즘의 '신자유주의 정부'는 '자유시장'의 신화를 앞세웠지만 실상은 자국 보호주의로 연명했다. 자본주의 세계체제 천년왕국의 사제들 조차 그 체제를 통제할 수 없었다. 
홉스봄이 말한 20세기의 '불확실성'의 실체가 바로 그것이다.


"위기의 몇십년에 관한 중심적인 사실은 자본주의가 더이상 '황금시대'만큼 잘 기능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작동이 통제할 수 없게 되었다는 것이다... 위기의 몇십년(1973~)은 국민국가가 경제적 힘을 잃은 시대였던 것이다... (경제적) '자유시장'과 정치적 '민주주의' 사이에 선천적인 관계가 전혀 없음을 증명하는 것이었다... 위기의 몇십년의 역사적 비극은 이제는 생산에서 인간들이 기계에 밀려나는 속도가, 시장경제가 그들을 위해서 새로운 일자리를 낳는 속도보다 훨씬 더 빨라졌다는 데에 있었다... (포퓰리즘/개인숭배/배외주의 정치세력 등의 부상으로 인한) '배타적 정체성 정치의 비극은... 어떠한 경우에도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는 데에 있었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4. 위기의 몇십년>, 에릭 홉스봄, 1994.


1945년 종전 후 1970년대 초반 오일쇼크 전까지 '냉전'에도 불구하고 세계는 '황금시대(Golden Age/같은책, <2부>)'를 열었다.  1914년부터 두 차례 세계전쟁으로 '파국의 시대(The Age of Catastrophe/같은책, <1부>)'를 통과한 20세기는 '냉전'에도 불구하고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혼합경제'를 통해 강력한 "공적 권위체"(같은책)로서의 국가의 전성기였다. 그러나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공황주기(콘드라티예프의 대략 10년주기)에 따라 1973년 '오일쇼크'는 이후 이 책이 씌어진 1994년까지 '위기의 몇십년(The Crisis Decades)' 또는 '산사태(The Landslide/같은책, <3부>)'라는 모호한 용어로 명명된다. 
역사가로서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규정하기 어렵기 때문이겠지만, 기존 '장기 19세기(The long nine-teenth century)'의 '응집된 전체로서의 역사'를 통해 힘들지만 '희망의 시대'를 전망하던 이 노회한 역사가의 눈에 당장 본인이 살고 있는 '극단'과 '역설'의 '단기 20세기(The short twentieth century)'는 그 자체로 자기통제가 불가능한 일종의 '불확실성'의 시대로 보인다고 쓰고 있다.

21세기의 10년 이상을 더 살았지만, 20세기 말에 가까워지면서 "새로운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같은책, <3-19>) 흘러가던 1994년의 에릭 홉스봄은 당시의 '극단'적이고 '역설'적인 20세기를 돌아보며 이렇게 결론짓는다.

"단기 20세기에는 아무도 그 해결책을 가지지 않았거나 심지어 해결책을 가졌다는 주장조차 하지 않는 문제들을 남기는 것으로 끝났다. 세기말의 시민들이 자신들을 둘러싸고 있는 전지구적인 안개를 뚫고 세번째 천년기(21세기)를 향하여 나아갔을 때 그들이 확실히 아는 것은 오직 역사의 한 시대가 끝났다는 것 뿐이었다... 20세기는 그 성격이 불분명한 전지구적 무질서(신자유주의) 속에서 그리고 그러한 무질서를 끝내거나 통제할 수 있는 분명한 장치가 없는 상태에서 막을 내렸다... 인간사회의 구조 자체...가 인류의 과거로부터 물려받은 것의 잠식을 통해서 이제 막 파괴되려 하고 있다. 우리의 세계는 외적 폭발과 내적 폭발 둘 다의 위험에 처해 있다. 세계는 바뀌어야 한다... 그리고 실패의 대가는, 즉 사회를 변화시키지 않을 경우의 결과는 암흑 뿐이다."
-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3-19. 새로운 천년기를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94.


과학기술을 진보시키고 대량생산체제를 발전시킨 대량전으로서 '총력전'(같은책, <1-1. 총력전의 시대>)의 20세기 '세계전쟁'을 거치며 발전한 과학기술은 문예 분야에서 '전위예술' 및 혁신적 '모더니즘'의 패퇴와 현실괴리적 '포스트-모더니즘'의 등장(같은책, <3-17. 전위예술의 사멸-1950년 이후의 예술>)과는 달리 '민주주의'적 '대중소비사회'의 '마법사'가 되었는데, 이 '과학기술'이라는 이름의 '마법사'의 '도제'로서 다수 소비대중은 "더 이상 자신의 (과학기술적) 지식 부족에 대해서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것"(같은책, <3-18. 마법사와 도제-자연과학>)이란다. 과학자가 아닌 소비자 대중 그 누구라도 자동차를 구매할 수 있다면 자동차의 과학원리를 몰라도 운전할 수 있고 그로 인해 먹고사는데 지장이 없었던 것이다. 

20세기의 경제기적은 '자유주의'적 주류경제학의 '자유방임'이 아니라 케인스주의적 '보호무역'과 완전고용 및 수요창출에 기인했다(같은책, <3-19>).
'국민국가'는 약화된 반면, 사회 재분배의 주체로서 '공적 권위체'인 '국가' 자체는 강화된 '단기 20세기'의 세계정치는 '인구 문제'와 '생태학적 (환경)문제'에 직면해 있지만, 에릭 홉스봄은 자기통제력을 상실한 20세기 자본주의 체제를 바꾸지 않으면 미래는 더이상 '희망'이 아닌 '암흑' 뿐이라는 '묵시록(默示錄)'으로 이 책을 끝맺고 있다.

19세기를 전공하고 20세기를 관통했던 역사가 에릭 홉스봄의 세기간 엇갈리는 '희망'과 '암흑'의 전망은 과연 21세기 후세 역사가들에게 어떻게 이어질 것인가.
그래도 인류는 살아야 하니 세계의 미래는 '희망'일 수 밖에 없지만, 문제는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이다.

***

1. [극단의 시대 : 20세기 역사, 1914-1991(
Age of Extremes : The Short Twentieth Century, 1914-1991)](1994), Eric Hobsbawm, 이용우 옮김, <까치글방>, 1997
2.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3.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4.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5. [20세기 이데올로기(Ideologies in the Age of Extremes)](2011), Willie Thomson, 전경훈 옮김, <산처럼>, 2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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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지음 / 논형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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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위작(僞作)인가?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광개토왕과 장수왕의 통치기간은 391년부터 491년까지 정확히 백년 간이다. 광개토왕은 391년 18세(374년생)로 등극하여 21년을 통치하고 412년 39세에 사망하며, 장수왕은 412년 19세(394년생)로 등극하여 80년을 통치하고 491년 98세로 사망한다. 광개토왕이 '굵고 짧은' 응축의 역사를 펼쳤다면 장수왕은 '가늘고 긴' 발산의 역사를 펼친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서문>, 이석연/정재수, 202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역사서인 김부식의 [삼국사기](1145)의 <고구려본기> 제8권 '영양왕'편에는 고구려 영양왕 11년인 600년도에 태학박사 이문진이 왕명을 받아 [유기] 1백권을 모아 [신집] 5권으로 요약했다는 기록이 있다. 그러나 이 고구려 역사서는 현재에 전하지 않는다. 당나라 장수 이적은 고구려 멸망 후 평양성에 있던 고구려 사서 일체를 불태웠다는데, 김부식 또한 신라 이전 역사서 중 대부분의 주체적인 열국의 역사서들을 없앴을지도 모른다는 의혹도 있다.
역사는 '승자의 기록'이고, '승자'만이 '기록'되어야 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 남당(南堂) 박창화(朴昌和:1889~1962) 선생은 일제의 왕실도서관에서 촉탁사서로 근무하던 10여년 간 일제가 약탈해 간 우리 역사서들을 발췌하고 필사하였다. 신라 문인 김대문이 썼다는 [화랑세기] 필사본은 1989년과 1995년 순차 공개 후 지금까지도 진위 논란이 있다는데, 박창화 선생의 또 다른 필사본 [고구려사략(高句麗史略)]은 지금은 전하지 않는 '고구려왕조실록' [유기(留記)] 100권의 발췌본일 수도 있단다. 
역사는 그 누가 지우려 한다 해도 모조리 없앨 수는 없다. 수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대를 이어 지켜나가기 때문이다. 설령 이적과 김부식이 분서를 했다고 해도 망국의 열신들이 그 역사서들을 보존하기 위해 분투했을 것이다. 19세기 말부터 한반도를 식민지화하려던 일제는 만주를 포함한 우리의 강역을 측정하고 역사를 추적하며 그 과정에서 사대주의사관의 [삼국사기] 이전 역사서들을 약탈해 갔을 수도 있다. 지금까지도 반환되지 않은 일제왕실도서관의 그 자료들 중 고구려와 백제 등의 주체적 역사서들이 남아 있을 수 있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 [고구려사략]은 [삼국사기]와 다른 시각을 전하며 그 내용은 '광개토대왕릉비'와 같다고 한다. 
[고구려사략]의 원본이 고구려의 주체적 역사서 [유기]로 추정되는 이유다.


1. '정복군주' 광개토왕 고담덕


"영락 10년 신라구원은 한반도 왜잔국(부여백제)이 광개토왕에게 무참히 깨진 영락 6년 왜잔국 정벌(396년)을 배경으로 한다. 그 결과로 왜잔국의 주류세력이 일본열도에 급히 망명하여 야마토정권을 수립하고(397년), 이를 뒤따르던 옛 부여백제(왜잔국)의 삼한백성(궁월군과 120현민)이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위해 한꺼번에 경남 남해안에 집결한다(400년). 광개토왕은 5만 군사를 보내 삼한백성의 소요사태를 진압하고 신라를 구원한다. 이후 야마토는 군사를 파견하여 신라를 압박하고 또한 협상을 통해 삼한백성의 엑소더스를 완결한다(402년). 다만 이 과정 속에 백제(한성백제)는 옛 왜잔국(부여백제)의 삼한 땅을 얻기 위해 전지태자를, 신라는 삼한백성의 엑소더스를 보장하기 위해 미사흔왕자를 각각 야마토에 볼모로 보낸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1-2-2. 광개토왕의 정복사업>, 이석연/정재수, 2022.


[유기]는 일종의 '고구려왕조실록'이었을 것이라 한다. 원래는 [대경]이라는 왕의 기록이 광개토왕 대에 [유기]라는 이름으로 대략 70권에 이르렀고, 수나라의 침공을 막아낸 또 다른 전성기인 영양왕 대에는 100권에 이르니 영양왕은 태학박사 이문진에게 [신집] 5권으로 요약하라 명했다. 이적과 김부식이 불태웠으나 남은 이 고구려의 기록들은 일제의 식민화 과정에서 약탈되어 갔을 의혹이 짙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필사본을 '소설'로 보기에는 그 내용이 광개토대왕릉비가 전하는 역사와 너무도 동일하기에 그 원본이 [유기]일 가능성 또한 높다는 것이다.

헌법학자 이석연, 역사작가 정재수 선생은 남당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략]과 '광개토대왕릉비'를 토대로 '영락대제기'와 '장수대제기'를 다시 돌아보는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2022)을 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 류 '사대주의' 역사관을 벗어나 대륙의 제국 고구려의 기상을 다시 세우고자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정복사업과 유물, '수성군주 장수왕'의 치세 및 외교와 유물 등을 새롭게 조명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릉비는 고구려 시조 추모왕의 이야기부터 시작하여 '영락'을 연호로 한 '영락대제' 광개토대왕의 정복사업을 기록한다. 때는 광개토왕 사후 2년 동안 내부 권력투쟁을 통해 왕위계승을 확정한 장수왕에 의해서 414년에 국내성에 세워진다. 

이 책에 의하면 압록강변의 국내성은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다. 북부여에서 독립한 '주몽(추모)'의 졸본성(환도/해성)과 유리(유류)왕의 위나암성(철령), 그리고 장수왕이 천도한 5세기의 한반도 평양성이 역대 고구려의 수도였다. 길림(집안)의 국내성은 수도가 아니라 왕릉의 집합도시인 네크로폴리스(nekropolis : 死者의 도시)였다. 광개토왕의 할아버지 고국원왕부터 아버지 소수림왕, 삼촌인 고국양왕을 비롯하여 광개토왕 본인은 물론 아들 장수왕의 무덤과 이들을 지키는 수묘인 일가들의 도시였던 것이다. 

남당 박창화 선생의 [고구려사략]과 국내성의 '광개토대왕릉비'에는 고구려의 7대 외적 중 '백잔(百殘)'과 '왜잔(倭殘)' 등이 나온다. '백잔'은 고구려가 원래 같은 핏줄이었던 백제를 비하하는 말이고, '왜잔'은 '왜적'과 비슷해 보이나 실상 백제다. 그 외 '비려', '백신', '신라', '가라(임나)' 등도 나오는데, '비려'는 부여의 잔여세력, '백신'은 이후 여진족의 조상 숙신족, 나머지는 '신라'와 '가야(임나/가라/아라)' 등이다. 그 중 '왜잔'은 일본 열도의 '왜적'이 아니라 전술했듯 충남 이하의 백제 세력이다. 즉, 백제는 4세기 말 아신왕 때에는 지금의 서울 하남지역인 '한성백제'와 충남과 전라도 일대를 아우르는 '부여백제'로 분열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4세기초 백제 근초고왕 시기였던 고구려 고국원왕 시기에는 고구려가 위나암성을 중심으로 서북방 정벌을 시도했으나 성과가 크지 않았다. 그러던 중 4세기말 광개토왕의 첫번째 정벌이 '비려' 정벌이다. '비려'는 고조선 이전 '고리국'의 후손으로 추정되는 부여족 일파들이다. 광개토왕에게 쫓겨난 '비려' 사람들이 바로 '부여기마족'인데 이들이 한성백제의 아래로 이주하여 '부여백제'로 정착한다. 이 '부여백제' 세력이 바로 '왜잔국'이다. 이들이 토벌된 후 충주 '중원고구려비'가 세워졌을 것으로 추정되며 또다시 고구려에 의해 쫓겨난 '부여백제' 지배층은 일본 열도로 건너가 '야마토' 정권을 세웠고 이 '야마토' 세력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아마도 패잔세력으로서 일본 후쿠오카와 오사카 등지로 건너가 7세기 후기에 '일본'을 세운 '야마토(大和)' 정권일 것이다. 한편, 광개토왕이 그 다음으로 정벌한 '백신'은 신라 정권의 뿌리였을 수도 있는데, 내물왕 때부터 시작된 신라의 '김'씨 정권은 선비족 모용씨의 후손인 숙신 세력이 내려와 석씨 정권을 몰아내고 김씨 세습왕조를 세운 결과다. 한참 후 여진족의 국명이 '금(金)'인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용의주도한 광개토왕은 '백신'을 먼저 토벌하고는 신라를 복속시킨다. 또한 광개토왕은 5만의 정병을 남쪽으로 보내 진짜 '왜구'인 일본의 '왜적'을 진압하면서 '고구려-신라' 연합 대 '부여백제-가야-왜' 연합의 전선을 형성한다. 
거슬러 올라가면 요동과 한반도를 둘러싼 '고구려-한성백제-신라'의 주류세력과 '비려(부여기마족)-부여백제-가야-왜'의 패잔세력의 거대전선이다.

요동은 물론 한반도 일대, 나아가 일본 본토까지 진출할 수 있었던 '정복군주' 광개토왕의 정복사업은 그러나 재위 20여 년만에 멈춘다.


2. '수성군주' 장수왕 고거련


"장수왕의 대외정책 '4대 원칙'이다. 1) '원자교지(遠者交之)', 멀리 있는 자와 교류한다, 2) '근자공지(近者功之)', 가까이 있는 자는 공격한다, 3) '접자할지(接者割之)', 붙어있는 자는 떼어낸다, 4) '이자근지(離者近之)', 떨어진 자는 가까이 둔다. 이 원칙은 대외정책의 전술적 핵심가치들이다. 또한 기록은 전략적 비전도 명확히 설정하고 있다. '이수계정(以守繼征), 이화계수(以化繼守)', 즉 수성함으로써 정복을 이어가고 치화함으로써 수성을 이어간다... 장수왕의 미션('부국강병':富國強兵)은 광개토왕의 미션과도 일맥상통한다. 광개토왕의 미션은 '국부민은(國富民殷)'이다. 나라는 부강하고 백성은 부유하다. 다만 지향점은 다소 차이가 있다. 광개토왕은 '부유한 백성(民殷)'에, 장수왕은 '강성한 군대(強兵)'에 방점을 둔다. 장수왕의 수성은 외교와 정복을 병행한 '능동적 수성(守城)'이다."
-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2-1. 수성군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2022.


광개토왕의 뒤를 이은 장수왕의 이름은 '거련'이다. 고구려 시조 추모왕부터 태조왕 전까지는 북부여(해모수)와 동부여(해부루)의 왕족인 '해'씨였다. 태조왕부터 마지막 보장왕까지는 '고'씨였으니 광개토왕은 고담덕이고 장수왕은 고거련이었다. 남당 선생의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에 의하면 98세까지 산 장수왕 고거련은 늙을 수록 아버지 고담덕이 아닌 삼촌 고용덕을 닮아갔다고 하는데, 광개토왕 담덕의 둘째 부인 평양왕후와 담덕의 동생 용덕이 사통한 결과 장수왕 거련이 태어났을 것이란다. 또한 어느 스님이 바친 동자모양 산삼을 광개토왕 대신 아들 거련이 먹은 게 장수의 비결이라고도 하는데, 본인 아들이 아닐 수도 있다는 걸 안 광개토왕이 다른 태자를 세웠으나 그 탑태자가 요절하면서 천익이라는 장수왕 삼촌이 찬탈했던 2년 동안 장수왕 거련이 이를 타도하고 실력자로 부각되면서 고구려의 제위를 잇게 되었다고 한다.

중국의 역사서들을 인용한 [삼국사기]는 장수왕 기록을 조공의 역사로 남긴다. 모든 역사서는 자국 중심으로 서술되므로 고구려 장수왕이 중국 5호16국 및 남북조와 교류한 중국과 [삼국사기]의 기록은 '조공'의 기록이 된다. 반면에 마찬가지 논리로 [고구려사략] <장수대제기>는 '조공'이 아닌 '외교'의 기록이다. 그러므로 '수성군주' 장수왕은 '수성'만 한 게 아니라 '정복'을 이어갔다.
이것이 바로, "이수계정(以守繼征), 이화계수(以化繼守)", 즉 "수성함으로써 정복을 이어가고 치화함으로써 수성을 이어간다"는 장수왕의 대외정책 전략이다. 장수왕은 광개토왕과 달리 '남하정책'을 폈다지만 그래도 중국의 북연을 흡수했고 몽골의 선조인 '지두우'와 '실위'를 분할하고 정복하기도 했으며 5천 킬로미터 서방의 '선선(누란)'과 외교를 하기도 했다.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은 장수왕의 '평양 천도'(427년)를 국내 정치세력의 정리 및 국내외 지리적 여건 등 네 가지 요소로 들고 있다. 그러나 4~5세기 급격한 기후변화로 인해 요서와 요북 및 서북 등지의 북방 유목민들이 지속적으로 중국쪽으로 남하한 것처럼 요동의 다민족적 고구려 세력이 한반도로 남하한 것 또한 이 시기 소빙하기 기후변화와 무관하지는 않을 것이다. 

불상의 스님이 광개토왕 담덕에게 바친 동자승 모양 산삼이 의심스러워 친아들이 아닌 장수왕 거련에게 먼저 먹였을 수도 있겠다. 처음 산삼을 먹은 거련이 정신을 잃자 담덕은 그 스님을 죽이려 했는데 곧 나아질 거라는 말에 지켜보니 거련은 멀쩡해졌고 나중의 일이지만 담덕은 39세에 죽은 반면 거련은 98세까지 장수했다. 

이 책이 강조하는 고구려의 새로운 역사를 저자들은 책의 말미에서 '태왕차자릉비'를 통해 상징적으로 말하고자 한다. '광개토대왕릉비'와 '집안고구려비'를 잇는 '태왕차자릉비'의 유적물 일체를 통해 [유기]로 추정되는 [고구려사략]의 기록을 역사적 사실로 확정하고자 한다. 그리고 이 '태왕'의 '차자', 즉 둘째아들은 '광개토왕 담덕'(태왕)의 차자 '장수왕 거련'이 아니라 '소수림왕'(태왕)의 둘째아들인 '용덕'이다. 
광개토왕 담덕의 동생 용덕은 장수왕 거련의 친아버지일 가능성이 높다.

남당 선생의 필사본들은 정식 역사가 아니라 한문소설가 박창화 선생의 창작물이라는 의심을 받고 있단다. [화랑세기]가 그렇고, [유기]의 요약본으로 추정되는 [고구려사략] 또한 그렇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광개토대왕릉비'와 '태왕차자릉비' 등의 유물유적이 있다. 고고학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유적물과 일치한다는 기록으로서 남당 박창화 선생의 유작을 재차 생각하며 다시금 물어본다.

과연, [고구려사략] 또한 '위작'인가.

***

1. [새로 쓰는 광개토왕과 장수왕], 이석연/정재수, <논형>, 2022.
2.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진인진>, 2020.
3.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4. [삼국사기(三國史記)](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5. [고구려왕조실록] / [백제왕조실록] / [신라왕조조실록], 이희진, <살림>, 2016~2017.

* 추신 : 좋은 내용의 책인데, 오자가 좀 많은 편이니 저자 및 출판사의 관심과 수정을 기대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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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더 디퍼런트 - 사람과 숫자 모두를 얻는, 이 시대의 다른 리더
사이먼 사이넥 지음, 윤혜리 옮김 / 세계사 / 2021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리더는 가장 나중에 먹는다"
- [리더 디퍼런트], 사이먼 시넥, 2014.


"리더가 된다는 것은 일을 덜 해도 되는 자격을 얻는 것이 아니라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는 책임을 안는 것이다... 리더는 일을 많이 해야 하고 시간과 에너지를 들여야 한다. 그 효과는 쉽게 측정하기도 어렵고 바로바로 나타나지 않을 수도 있다. 리더십이란 사람을 향한 '헌신'이다."
- [리더 디퍼런스], <8. 리더가 된다는 것>, 사이먼 시넥, 2014.


미 해병대는 식사 시간에 계급이 제일 낮은 쫄병부터 먹는다고 한다. 지휘관은 가장 나중에 먹는다. '장유유서'가 높은 덕목인 동아시아 유교 문화권에서는 익숙하지 않다. 그러나 5만년 전 수렵채집 사회에서는 강한 성인남성들이 사냥해 온 고기를 부족의 노약자들이 먼저 먹었다. 암사자들이 잡아온 먹이를 힘센 숫사자가 먼저 먹는 것과 인간 공동체가 다른 점이다. 
결론부터 말하면, "가장 나중에 먹는 자가 진정한 리더"(Leaders Eat Last / 같은책, <2-8>)라는 말이다.


미국의 조직운영 강연자 사이먼 시넥(Simon Sinek)은 2014년에 [리더는 가장 나중에 먹는다(Leaders Eat Last / 국역 : 리더 디퍼런트)]라는 책에서 조직의 '리더'가 갖추어야 할 덕목으로 '인간성'을 강조한다. '수치'와 '성과'로 표현되는 조직 목표의 '추상성'을 벗어나서 '인간성' 또는 "사람을 향한 헌신"(같은책, <8-27>)이 '진정한 리더'를 만든다는 것이다.
당장 실적이 안 좋은데 무슨 '인간성'인가 반론의 지점일 수 있겠다. 그러나 저자는 수만년에 걸쳐 공동체를 이루고 살아온 인류의 '본성'이라는 '장기적' 안목에서 논의를 시작한다.
다른 개체에 비해 힘도 약한 호모 사피엔스가 척박한 자연환경에 맞서 지금의 인류로 진화한 이유는 '공동체'를 통해 '안정성'을 추구할 수 있었고, 그 과정에서 언어나 신화 등의 '인지혁명'([사피엔스], 유발 하라리)을 통해 씨족과 부족을 형성하며 '자기 통제력'을 발전시켰기 때문이다. 사이먼 시넥에 의하면 수만년 전 우리 조상들이 지금의 우리만큼 똑똑하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다만 자연환경이 더 험악했을 뿐이다. 장기적으로 인류가 더 잘 살기 위해서는 단기적인 실적경쟁이 아니라 서로 보듬어주고 헌신하며 지켜주는 '안전망'과 '자기 통제력'을 강화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이 우리의 DNA인 것이다.
사이먼 시넥이 말하는 최초의 핵심어가 바로, '안전망'과 '자기 통제력'이다.

저자는 '진화인류학'에서 멈추지 않는다. 
그는 더 나아가 이를 '화학적'으로 증명하고자 하는데, '엔도르핀'과 '도파민', '세로토닌'과 '옥시토신' 호르몬 이야기로 이어진다.
'엔도르핀'은 일종의 '진통제' 같은 것으로 웃으며 손뼉치는 등의 행위로 힘든 일을 잠시 잊는 것이고, '도파민'은 힘든 일 중에도 좀더 해보려는 노력을 유발한다. 이 호르몬들은 일종의 "이기적 호르몬"(같은책, <2-6>)으로서 개인의 성취를 촉진한다.
'세로토닌'은 주변 사람들의 응원과 지지를 받으면서 그 힘든 일들을 기어이 해내는 역할을, '옥시토신'은 그런 사람들과의 유대감과 동지애를 이끌어내게 만드는 힘으로서, 이른바 "이타적 호르몬"(같은책, <2-6>)의 영역이다. 
이 두 영역의 조화와 균형으로써 인간은 '코르티솔'(같은책, <2-7>)이라는 '스트레스' 호르몬 상태를 딛고 공동체를 통해 여러가지의 성취를 해 왔고 그 과정에서 지금의 우리로 진화하고 성장했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필요하다'는 속언처럼, '이타적 호르몬'에 의해 적절히 통제되는 '이기적 호르몬'이 역시 적절한 '코르티솔(스트레스)'을 이겨내고 때로는 즐기며 모종의 성과를 내게 한다는 이야기다. 
여기서 또 하나의 중요한 핵심어가 등장하는데, 바로 '추상성'(같은책, <5장>)이라는 '적(敵;enemy)'이다.


"문제는 인간성을 '추상화'하는 일이 우리 경제에 단순히 나쁜 영향을 주는 수준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아주 치명적일 수도 있다는 점이다."
- [리더 디퍼런스], <4. 우리는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을까>, 사이먼 시넥, 2014.


'물신성(物神性;fetishism)'이라는 사회과학 용어가 있다. 칼 마르크스의 [자본론] 1권(1867)에서 '인간관계'를 '상품관계'로 표현하고 은폐하는 자본주의적 관계형태를 이르는 말이다. 모든 것이 '인간 노동'의 산물임에도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상품'이나 '화폐' 등의 '물(物)적' 관계로서 거꾸로 왜곡되어 나타난다는 의미다. '물신숭배' 또는 성적인 '집착' 등으로 확장되는 개념이다. 
사이먼 시넥에게는 단기적 성과와 숫자에 집착하는 행태가 바로 "'추상적'이라는 적"(같은책, <5장>)에 매몰되는 관계이고 이러한 인간관계는 장기적으로는 우리 공동체에 "치명적"(같은책, <4~5장>)이다.

GE의 회장 잭 웰치는 '주주의 이익 극대화'를 명분으로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통해 단기적 성과를 냈지만, GE의 기업문화는 구성원들이 '이기적 호르몬'만 믿는 조직문화가 되어 버렸다. 반면, 코스트코의 공동 창업자 시니걸은 어려운 시기에 직원복지에 더 힘쓰고 그래도 어려우면 정리해고 없이 고통을 분담했다. 단기적인 성과는 못 내더라도 장기적으로 구성원들의 진심어린 '충성심'을 얻었다. 나만 살면 된다는 직원이 고객들을 진심으로 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다. '안정감'과 '자기 통제력'의 인간적 본성과 호르몬 '증명'을 거친 사이먼 시넥은 기업들의 '비교경영학'을 통해 '인간성'을 지킨 조직이 장기적으로 지속된다는 점을 증명하고자 한다.

신자유주의 '주류' 경제학인 시카고학파의 거두 밀턴 프리드먼은 정치경제체제와 무관한 숫자와 수학으로서의 경제학을 강조했는데, 그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를 좋아했단다. 즉, 단기적이고 '추상적'인 성과를 위해서는 "법의 테두리 내에서"는 허용된다는 인식인데, 대단히 합리적으로 보이는 이 말은 결국 법망을 피해가는 온갖 '편법'의 학문적 근거가 되었다. 단기적이고 '추상적'인 성과만 중시하는 조직이 '옳은 일'보다는 '편법'의 유혹에 빠지는 근거이기도 하다(같은책, <6-21>).

기업과 군대 같은 거대 조직운영에 관한 강연을 하는 사이먼 시넥이 '반체제' 인사일리는 없다. 고도로 추상화된 수치와 목표로 운영되는 지금의 자본주의를 부정할 수가 없는 저자는 흡사 '원시공동체'적 '본성'을 강조하면서 놀랍게도 '역설'을 발견한다.
'물신성'으로 돌아가는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인간성'을 강조하다보니, "역설"적으로 "자본주의가 더 효과적으로 작동"(같은책, <1장>)하더라는 것이다.


"여기서 엄청난 역설이 하나 드러난다. 이렇게 인간의 바람직한 행동이 자연스럽게 발현되는 환경에서 오히려 자본주의가 더 효과적으로 작동한다는 점이다."
- [리더 디퍼런스], <1. 우리는 안전한 직장을 원한다>, 사이먼 시넥, 2014.


물론, 이 '역설'이 맞는지 여부는 우리가 각자의 공동체 내에서 서로에 대해 얼마나 '헌신'할 수 있으냐 하는 그 실천력이 증명할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출발점은 그렇게 이 책의 원제목이 된다.

"리더는 가장 나중에 먹는다(Leaders Eat Last)"는 상징적인 문장이 바로 그것이다.

***

- [리더 디퍼런트(Leaders Eat Last)](2014), Simon Sinek, 윤혜리 옮김, <세계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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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트] 에릭 홉스봄 대표작 세트 - 전3권 - 자본의 시대 + 제국의 시대 + 혁명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에릭 홉스봄 지음, 김동택 옮김 / 한길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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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본 '희망의 시대'
[혁명/자본/제국의 시대 3부작] - 에릭 홉스봄


"앞서 출간된 두 책([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제국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자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 [제국의 시대], <서문>, 에릭 홉스봄, 1987.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20세기 초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어머니와 유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국주의'의 아이였던 홉스봄은 1987년 자신의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저작인 [제국의 시대]의 <머리말>을 본인의 부모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만난 국제주의적 연애로 태어난 70세의 노학자가 돌아본 '제국의 시대'에 관한 개인적 기억으로부터. 
저자는 이를 '여명의 지대'라 하는데, 역사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건의 나열이 아니며,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해온 인류 근대사에서 '여명의 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 자본주의 사회를 통과하던 70대의 홉스봄 개인을 만든 '여명의 지대'는 [제국의 시대]였고, 역시 이 시대를 거슬러오르는 '여명의 지대'는 1789년부터 시작하는 [혁명의 시대]와 1848년부터 시작하는 [자본의 시대]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초까지 돌아보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 '장기(長期)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의 정치경제, 사회문예 등 당대 모든 문명의 역사를 통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고자 한다.
3부작의 시작인 1부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2부는 1848년 유럽혁명부터, 3부가 1875년 유럽 대공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이 홉스봄이 주목하는 사건은 자본주의 '공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혁명'이다. 
첫 권의 제목이 [혁명의 시대]인 이유다.


1. [혁명의 시대 : 1789~1848](1962)


"1789~1848년의 위대한 혁명은 '공업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였으며, '자유', '평등' 일반의 승리가 아니라 '중류계급' 또는 '부르주아적 자유사회'의 승리였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 및 (영국) 랭커셔에서 근대 최초의 공장제도 건설('이중혁명')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 역사적 시기는, 최초의 철도망 건설 및 [공산당선언]의 출간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혁명의 시대], <머릿말>, 에릭 홉스봄, 1962.


홉스봄은 새삼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학자로서 새롭게 평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근대 부르주아혁명의 배경인 1780년대 정치경제적 토대에 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이 [혁명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이다. 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공화정을 건설한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증기기관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과 대공장제의 시초를 연 영국의 경제혁명을 지칭한다. '이중혁명'을 통해 영국은 중세농업을 청산하고 도시 중심의 대공업이 시작되었고, 프랑스는 대중민주주의의 두려움을 각국의 지배계급에 선사했다. 물론 '이중혁명'으로 신흥 부르주아지가 곧바로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지주와 귀족, 몇 나라를 빼고는 왕족이 정치적으로 지배했지만 부르주아는 경제영역에서 자본가로서 부상하고 있었고, 이 시대에는 아직 다수가 아니었던 도시 노동빈민들(프롤레타리아의 기반)은 먹고살기 힘들때 언제든 정치권력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혁명'의 담지자가 되었다. 

[혁명의 시대] 전반부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중혁명' 이야기, 1815년부터 이어진 나폴레옹의 유럽전쟁과 나폴레옹 실각 후의 평화시기와 왕족과 귀족이 아닌 혁명을 통한 국민국가 형성의 <전개과정>을 살핀다. 후반부는 그 <결과>로서 토지 문제와 산업사회, 초기 부르주아의 '능력주의'와 노동빈민 문제는 물론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축으로 예술과 과학의 영역까지 설명한다. 당시 지배적 정치권력이 왕족, 귀족 또는 지주에게 있었으므로 토지 문제는 2부인 [자본의 시대]까지 이어지나 주내용은 봉건세습이 아닌 상품으로 전환되는 경제학 3요소 중 하나로서 토지 형태 분석이다. 봉건세습을 혁파한 초기 부르주아지는 오로지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하기도 했다는 사실과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의 다수화는 "이제는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계급, 즉 노동계급인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또 하나의 계급인 고용자 또는 자본가와 맞서고"(같은책, <11. 노동빈민>) 있는 상황을 분석한다. 과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홉스봄은 이 [혁명의 시대]에 출현한 '낭만주의'에서 그 혁명성을 보는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를 쓴 미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와 맞닿는 지점이다. 
물론 '낭만주의'에 '혁명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 19세기'의 전반부를 거치면서 1840년대 후반에는 아직 자본주의적 공황까지는 아니지만 농업사회 대기근이 발생했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다수 농민들과 도시빈민들은 또 다시 혁명을 시작한다. 

[혁명의 시대]는 이 1848년 유럽혁명을 앞두고 끝을 맺는다.
그리고 아직, 혁명을 지도하는 '사회주의'는 그 과정에서 지배적인 지도이념은 아니었다.


"지주적 귀족제와 절대군주제가,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발전해가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유산으로서 대중에게 정치의식과 정치적 활동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은 조만간 이들 대중에게 필연적으로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을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1848년에 마침내 폭발했다."
- [혁명의 시대], <16. 결론 : 1848년을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62.


2. [자본의 시대 : 1848~1875](1975)


"1848년의 혁명은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세계적인 혁명이었으니...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혁명이었다... 2월 혁명은 단지 (수적으로 아직 부족했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수행됐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사회혁명으로서도 수행됐던 것이다. 그 목표는 그저 아무 공화국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2월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대결의 판가름은 2월의 파리에서가 아니라 6월의 파리에서 일어났다."
- [자본의 시대], <1. '여러 국민들의 봄'>, 에릭 홉스봄, 1975.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도시빈민들의 유럽혁명을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 1부 전체를 할애하여 '여러 국민들의 봄'이라 명명하고는 그 시작과 실패를 고찰한다. 아마도 '프라하의 봄'을 연상하는 이 1848년 유럽 '여러 국민들의 봄'은 아직 다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를 소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과학적 사회주의)가 지도했다지만 이는 결과적인 분석일 뿐 혁명에 참여했던 다수의 노동자들은 아마도 사회적 민주공화국을 바랬을 게다.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혁명을 배반하고 다시 되돌린 왕정체제를 다시금 타도했지만 공화국의 권력을 잡은 후 부르주아는 칼끝을 돌려 6월까지 이어진 다수 노동자투쟁을 진압하면서 결국 노동계급의 혁명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후 칼 마르크스는 이 1848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양상을 고전적으로 분석했다. 구체제가 아니라 '질서'를 외친 부르주아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노동계급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를 증명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은 대놓고 [자본의 시대]를 '혐오' 또는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대가 이룩한 그 엄청나게 거대한 물질적 성취에 대한 경탄과, 또 좋아하지 않는 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같은책, <머리말>)으로 이 [자본의 시대]를 돌아본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대공업 및 산업 대기업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세계화되는 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유럽의 '발전된 국가(선진국)'와 세계 각지의 '주변부'를 나눈다. 미국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고립된 '먼로 독트린'으로 성장 중이었고 당시 19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세계의 공장'은 단연 영국이었다. 산업혁명의 종주국이자 농업을 자본주의적으로 해체해 버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차지했다. 1867년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이 체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전까지는 사실, 당시의 체제가 '자본주의'였는지 그 무언지 사람들은 관심 없었다. 1848년 유럽혁명이 실패하고, 부르주아 대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이로 인한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성장이 진행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였던 [자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자본주의'가 회자되었다. 홉스봄은 이렇게 혐오스러운 자본의 역사 일체를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일련의 '여명의 지대'를 보여준다. [혁명의 시대]에 부르주아는 '이중혁명'을 했지만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위치짓지 못했고, [자본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인식도 부족했으며, 1848년의 혁명과 1871년의 파리코뮌을  거치면서도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다수'로서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여명의 지대'를 통과하는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종합하면서 이후에나 얻게 되는 통찰들이었다. 
홉스봄과 같은 역사가는 개인적 호불호나 감정을 절제하면서 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줄 뿐이다.

홉스봄이 정리하는 1848~1875년까지의 2부 [자본의 시대]는 그럼에도 명백한 '진보'의 시대였다. 부르주아지는 철도를 깔고 전선을 놓으며, 엄청난 석탄을 태우고 금광을 캐면서 인류 문명의 양적 성장을 성취했고,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과 생산의 주역으로서 그 다수의 계급의식을 각성하고는 변혁의 주인공으로 역사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1848년 이전, 부르주아지의 안정성은 사회혁명의 공포로 말미암아 제약"되었고 "1870년 이후로는 날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공포가 또다시 그들의 안정성을 적지않게 뒤흔들게 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8년과 1870년 사이"의 이 [자본의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의심과 동요의 여지도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고 홉스봄은 이 시기를 규정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 시대의 기본적 동인을 대표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이상 같은책, <13. 부르주아지의 세계>)라고 말이다.


"세계는 광의와 협의의 두 의미에서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섰다. 넓은 의미의 그것은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 예컨대 '독점자본주의'를 포함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의 그것은 '선진국' 지배 하의 세계경제에 '저개발국(식민지)'을 종속적으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보'는 확실하게 지속했다... '대불황'은 단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혐오스럽지만) 경제성장, 기술적, 과학적인 전진과 향상,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 [자본의 시대], <16. 결론>, 에릭 홉스봄, 1975.


[혁명의 시대]가 '정(正)'이라면, [자본의 시대]는 '반(反)'의 시대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3부 [제국의 시대]는 '합(合)'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부정의 부정'을 반복하는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3. [제국의 시대 : 1875~1914](1987)


"... 단순하게 시대구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시점이 존재한다면, 1914년 8월이 그것일 것이다. 그 시점은 부르주아를 위해 그리고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이 책이 마지막이 될 세 권의 책들이 주제로 삼아온 '장기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에 대한 종말을 상징한다... '역설'은 끝이 없었다. '제국의 시대'는 그러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에서도 나타나겠지만, 사실 그와 같은 역설의 기본적인 전형은 자본주의가 극점에 도달함에 따라 그 진보에 내장되어 있는 모순 자체의 희생자로서, 그것의 '이상한 죽음(strange death)'이라고 불리는 것을 향해 내닫고 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세계와 사회였다."
- [제국의 시대], <머리말>, 에릭 홉스봄, 1987.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유럽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분할지배하면서 '하나가 된 세계'([자본의 시대], <2-3>)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는 1871년 짧은 기간 후 "경이적, 영웅적, 극적"이자 "비극적"으로 남은 "확실한 사회주의 혁명"([제국의 시대], <2-9. 변화하는 사회>)으로서의 파리코뮌을 묘사하지만 1871년의 파리코뮌 '혁명'이 아닌 1870년대의 중반 어디쯤인 1875년에서 마무리된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1870년대의 상징이다. 가난하고 비참한 '노동빈민'에서 노동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각성된 산업노동자들은 그 시기까지도 아직 전세계의 다수를 점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지도이념으로 '혁명'의 주역이 되고 있었다. 단일하거나 통일되지 못한 이 계급은 '혁명'의 시기를 기다린다. 이 시기는 바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는 '대공황'의 시간이다.

3부작의 마지막 권인 [제국의 시대]는 이 '대공황' 시기의 중반 즈음인 187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즉 최초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목전이었던 1914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한다. 
미국 독립전쟁(1776년)과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100주년' 기념은 19세기의 산물인데, 때는 발전된 문물을 만방에 전시하는 '만국박람회'의 세상이었다. 이 [제국의 시대]는 돌아보면 노동계급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젠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에게는 '황금시대(Golden Age)' 또는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이었다. 1815년부터 15년간 이어졌던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만연했다지만, 내적으로는 계급 불평등이 격화되었고, 외적으로는 민족 불평등이 확대심화되었다. 우리나라도 겪었듯, 굳이 1차 세계대전의 개전이 아니더라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세계 자본주의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탈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시절'은 유럽의 자본가만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제국의 시대] 자본가들은 반세기 전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를 이룬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부의 세습과 귀족적 문화에 빠진 상태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문명의 '진보'가 아니었고, 기득권을 위해 여전히 왕정복고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체제에서 식민지는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할 운명이었고 지배계급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국제적 상황은 상존했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사라예보의 총성이 아니었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은 필연이었다. 레닌은 1916년의 팜플렛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최후(latest)'의 단계로 규정했는데, 그의 사후 이 수식어는 '최고(highest)'의 단계로 수정되었다. 어쨌든 '제국주의'는 당시 일련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가 분석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우연'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집중과 금융자본 과두제 및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에 이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의 단계였다. "황제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새롭고도 낡은 '제국의 시대'"(같은책, <3.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이었고, 이 '황제'들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로 말려들었다. 

1917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경험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아마도 1914년을 당시 레닌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보았을 것처럼 '문명'의 종말로 진단한다. '진보'의 이름으로 지속 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은 아니라도, '장기 19세기' 내내 이룩해 온 문명은 "한 세계의 내재적인 죽음과 다른 세계에 대한 필요성이라는 각성"(같은책, <머리말>)의 시간을 지난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의 주역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대중정당, 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민주주의와 식민지 민족주의 해방투쟁이었다.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불확실성"(같은책, <7장>)과 "혁명을 향하여"(같은책, <12장>) 전진하는 다수 노동계급의 운동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노동계급이 죽고 혁명성이 꺾이기를 바랐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은 1차 대전이 주요 배경이었고, 홉스봄은 말하지 않지만 1949년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배경도 2차 대전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배경은, "30년간의 장기적 평화기에 영국의 석탄광부들은 연평균 1,430명이 사망했고 16만5,000명(전체 노동력 가운데 약 10퍼센트 이상)이 부상"을 당한 '아름다운 시절'과 '평화'의 실체였다.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생과 사가 엇갈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군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었다"(같은책, <13. 평화에서 전쟁으로>)고. 지금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사를 넘나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자본가의 뜻대로 누더기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에릭 홉스봄은 '혁명'을 존중하고 '자본'을 혐오할 것이지만, 역사학자 홉스봄은 이 자본주의 근대사 일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한 점이 여실하다.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은 각 권의 사상이나 철학, 이성이나 예술 등을 논할 때 틈만 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행적과 사상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당장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마르크스 조차도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 후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는 아주 오랜 후의 일이며, 어쩌면 러시아 차르체제의 농노 촌락공동체(미르공동체)로부터 혁명의 동력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후기의 사유행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 역사는 가장 혁명에 "적실성"(같은책, <12. 혁명을 형하여>)을 가졌던 러시아혁명의 주요 동력이었던 '소비에트'의 원형이 이 러시아식 '촌락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책이 보여주려고 했듯, 어떤 이들에게 '제국의 시대'는 커져가는 어려움과 두려움의 시대였지만 부르주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희망의 시대'였다... '희망의 여지'... 인류에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막혀있지 않다."
- [제국의 시대], <글을 마치며>, 에릭 홉스봄, 1987.


'장기 19세기'를 1962년부터 1987년까지 25년에 걸쳐 정말 장기적으로 돌아본 역사학자로서 에릭 홉스봄의 결론은 이렇다.
1789~1914년으로 특징지어졌던 그 시대는 '진보'의 '유토피아'를 누구나 꿈꾸었던 시대였던 바, "부르주아는 멈추지 않는 물질적, 지적, 도덕적 진보를 기대"했고, "프롤레타리아들 또는 그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혁명'을 통해 달성되기를 기대했다"(같은책, <글을 마치며>). 
그 속에서 이 노회한 역사가는 '희망의 시대'를 말한다. 

결국, 홉스봄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 3부작을 읽는 내내 나는,
흡사 런던의 대학에서 값진 역사학 강의 한과목을 들은 듯 했다.

***

1.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2.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3.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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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의 시대 한길그레이트북스 14
에릭 홉스봄 지음, 김동택 옮김 / 한길사 / 199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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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본 '희망의 시대'
[혁명/자본/제국의 시대 3부작] - 에릭 홉스봄


"앞서 출간된 두 책([혁명의 시대], [자본의 시대])에서도 그랬지만, 이 책([제국의 시대])에서도 마찬가지로 필자가 시도하려 했던 것은...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려는 데 있었다."
- [제국의 시대], <서문>, 에릭 홉스봄, 1987.


영국의 역사가 에릭 홉스봄(Eric Hobsbawm : 1917~2012)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자다. 20세기 초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오스트리아계 어머니와 유태계 아버지 사이에서 태어난 '제국주의'의 아이였던 홉스봄은 1987년 자신의 자본주의 근대사 '3부작'인 [혁명의 시대](1962), [자본의 시대](1975), [제국의 시대](1987)를 마무리하는 마지막 저작인 [제국의 시대]의 <머리말>을 본인의 부모 이야기로 시작한다. 영국의 식민지에서 만난 국제주의적 연애로 태어난 70세의 노학자가 돌아본 '제국의 시대'에 관한 개인적 기억으로부터. 
저자는 이를 '여명의 지대'라 하는데, 역사는 어느 한 시기에 갑자기 나타난 사건의 나열이 아니며, 현재 자본주의 체제를 구축해온 인류 근대사에서 '여명의 지대'가 존재하기 때문이다. 20세기 후반기 자본주의 사회를 통과하던 70대의 홉스봄 개인을 만든 '여명의 지대'는 [제국의 시대]였고, 역시 이 시대를 거슬러오르는 '여명의 지대'는 1789년부터 시작하는 [혁명의 시대]와 1848년부터 시작하는 [자본의 시대]였다. 1789년 프랑스 대혁명부터 1914년 제1차 세계대전 시초까지 돌아보는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이 '장기(長期)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의 정치경제, 사회문예 등 당대 모든 문명의 역사를 통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주고자 한다.
3부작의 시작인 1부가 1789년 프랑스혁명부터, 2부는 1848년 유럽혁명부터, 3부가 1875년 유럽 대공황으로부터 시작되는 것과 같이 홉스봄이 주목하는 사건은 자본주의 '공황'과 이를 극복하려는 '혁명'이다. 
첫 권의 제목이 [혁명의 시대]인 이유다.


1. [혁명의 시대 : 1789~1848](1962)


"1789~1848년의 위대한 혁명은 '공업 자체'의 승리가 아니라 '자본주의적' 공업의 승리였으며, '자유', '평등' 일반의 승리가 아니라 '중류계급' 또는 '부르주아적 자유사회'의 승리였다... 1789년의 프랑스혁명 및 (영국) 랭커셔에서 근대 최초의 공장제도 건설('이중혁명')과 더불어 시작되는 이 역사적 시기는, 최초의 철도망 건설 및 [공산당선언]의 출간과 함께 끝을 맺는다."
- [혁명의 시대], <머릿말>, 에릭 홉스봄, 1962.


홉스봄은 새삼 프랑스 대혁명을 역사학자로서 새롭게 평하지는 않는다. 다만, 마르크스주의자로서 근대 부르주아혁명의 배경인 1780년대 정치경제적 토대에 관한 분석으로 시작한다. 이 [혁명의 시대]에서 가장 중요한 개념은 '이중혁명(dual revolution)'이다. 왕정을 타도하고 부르주아 공화정을 건설한 프랑스의 정치혁명과 증기기관의 산업혁명으로 대량생산과 대공장제의 시초를 연 영국의 경제혁명을 지칭한다. '이중혁명'을 통해 영국은 중세농업을 청산하고 도시 중심의 대공업이 시작되었고, 프랑스는 대중민주주의의 두려움을 각국의 지배계급에 선사했다. 물론 '이중혁명'으로 신흥 부르주아지가 곧바로 지배계급이 되지는 않았다. 여전히 지주와 귀족, 몇 나라를 빼고는 왕족이 정치적으로 지배했지만 부르주아는 경제영역에서 자본가로서 부상하고 있었고, 이 시대에는 아직 다수가 아니었던 도시 노동빈민들(프롤레타리아의 기반)은 먹고살기 힘들때 언제든 정치권력을 뒤집을 수도 있다는 '혁명'의 담지자가 되었다. 

[혁명의 시대] 전반부는 1789년 프랑스혁명으로부터 '이중혁명' 이야기, 1815년부터 이어진 나폴레옹의 유럽전쟁과 나폴레옹 실각 후의 평화시기와 왕족과 귀족이 아닌 혁명을 통한 국민국가 형성의 <전개과정>을 살핀다. 후반부는 그 <결과>로서 토지 문제와 산업사회, 초기 부르주아의 '능력주의'와 노동빈민 문제는 물론 당시 '고전주의'와 '낭만주의'의 대립을 축으로 예술과 과학의 영역까지 설명한다. 당시 지배적 정치권력이 왕족, 귀족 또는 지주에게 있었으므로 토지 문제는 2부인 [자본의 시대]까지 이어지나 주내용은 봉건세습이 아닌 상품으로 전환되는 경제학 3요소 중 하나로서 토지 형태 분석이다. 봉건세습을 혁파한 초기 부르주아지는 오로지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하기도 했다는 사실과 농촌에서 쫓겨난 도시빈민의 다수화는 "이제는 가난한 자가 부자에게 맞서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특정계급, 즉 노동계급인 노동자 또는 프롤레타리아가 또 하나의 계급인 고용자 또는 자본가와 맞서고"(같은책, <11. 노동빈민>) 있는 상황을 분석한다. 과학과 예술에도 조예가 깊은 홉스봄은 이 [혁명의 시대]에 출현한 '낭만주의'에서 그 혁명성을 보는데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1951)를 쓴 미학자 아르놀트 하우저와 맞닿는 지점이다. 
물론 '낭만주의'에 '혁명성'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장기 19세기'의 전반부를 거치면서 1840년대 후반에는 아직 자본주의적 공황까지는 아니지만 농업사회 대기근이 발생했고, 먹고 살기 힘들어진 다수 농민들과 도시빈민들은 또 다시 혁명을 시작한다. 

[혁명의 시대]는 이 1848년 유럽혁명을 앞두고 끝을 맺는다.
그리고 아직, 혁명을 지도하는 '사회주의'는 그 과정에서 지배적인 지도이념은 아니었다.


"지주적 귀족제와 절대군주제가, 강력한 부르주아지가 발전해가고 있는 모든 나라에서 물러나야만 한다는 것은 필연적인 것이었다... 게다가 프랑스혁명의 위대한 유산으로서 대중에게 정치의식과 정치적 활동이 주입되었다는 사실은 조만간 이들 대중에게 필연적으로 공식적인 정치적 역할을 허용할 수 밖에 없게 되는 것임을 의미했다... 그리고 1848년에 마침내 폭발했다."
- [혁명의 시대], <16. 결론 : 1848년을 향하여>, 에릭 홉스봄, 1962.


2. [자본의 시대 : 1848~1875](1975)


"1848년의 혁명은 잠재적으로 최초의 전세계적인 혁명이었으니... 그것은 가장 광범위하게 파급된 혁명이었으나, 또 가장 성공적이지 못한 혁명이었다... 2월 혁명은 단지 (수적으로 아직 부족했던) '프롤레타리아트'에 의해서 수행됐을 뿐만 아니라, 의식적인 사회혁명으로서도 수행됐던 것이다. 그 목표는 그저 아무 공화국이면 된다는 것이 아니라 '민주적/사회적 공화국'을 수립한다는 것이었다. 2월 혁명의 지도자들은 사회주의자와 공산주의자였다... 1848년의 혁명은 구체제와 진보적 세력들의 연합군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아니라 '질서'와 '사회혁명' 사이의 결정적 대결이 되고 말았기 때문에 실패로 돌아간 것이었다. 대결의 판가름은 2월의 파리에서가 아니라 6월의 파리에서 일어났다."
- [자본의 시대], <1. '여러 국민들의 봄'>, 에릭 홉스봄, 1975.


1848년 2월 파리에서 시작된 도시빈민들의 유럽혁명을 홉스봄은 [자본의 시대] 1부 전체를 할애하여 '여러 국민들의 봄'이라 명명하고는 그 시작과 실패를 고찰한다. 아마도 '프라하의 봄'을 연상하는 이 1848년 유럽 '여러 국민들의 봄'은 아직 다수가 아닌 프롤레타리아를 소수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과학적 사회주의)가 지도했다지만 이는 결과적인 분석일 뿐 혁명에 참여했던 다수의 노동자들은 아마도 사회적 민주공화국을 바랬을 게다. 그 과정에서 나폴레옹이 혁명을 배반하고 다시 되돌린 왕정체제를 다시금 타도했지만 공화국의 권력을 잡은 후 부르주아는 칼끝을 돌려 6월까지 이어진 다수 노동자투쟁을 진압하면서 결국 노동계급의 혁명은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후 칼 마르크스는 이 1848년 프랑스에서의 '계급투쟁' 양상을 고전적으로 분석했다. 구체제가 아니라 '질서'를 외친 부르주아와의 투쟁에서 패배한 노동계급은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를 증명한다.
마르크스주의 역사가인 홉스봄은 대놓고 [자본의 시대]를 '혐오' 또는 '경멸'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 시대가 이룩한 그 엄청나게 거대한 물질적 성취에 대한 경탄과, 또 좋아하지 않는 일도 이해하려고 하는 노력"(같은책, <머리말>)으로 이 [자본의 시대]를 돌아본다. 부르주아지의 지배력이 강화되고 대공업 및 산업 대기업의 발전으로 자본주의가 세계화되는 이 시대는 본격적으로 유럽의 '발전된 국가(선진국)'와 세계 각지의 '주변부'를 나눈다. 미국은 아직 아메리카 대륙에 고립된 '먼로 독트린'으로 성장 중이었고 당시 19세기 자본주의 시대에 '세계의 공장'은 단연 영국이었다. 산업혁명의 종주국이자 농업을 자본주의적으로 해체해 버린 영국은 '해가 지지 않는 나라'로서 세계 각지의 식민지를 차지했다. 1867년에 마르크스가 [자본론]을 통해 이 체제를 과학적으로 분석하기 전까지는 사실, 당시의 체제가 '자본주의'였는지 그 무언지 사람들은 관심 없었다. 1848년 유럽혁명이 실패하고, 부르주아 대산업의 폭발적 성장과 이로 인한 도시 프롤레타리아의 계급적 성장이 진행되면서 마르크스주의의 '과학적 사회주의'와 공산주의가 주목받기 시작했을 때였던 [자본의 시대]에 와서야 비로소 '자본주의'가 회자되었다. 홉스봄은 이렇게 혐오스러운 자본의 역사 일체를 담담하게 서술하면서 일련의 '여명의 지대'를 보여준다. [혁명의 시대]에 부르주아는 '이중혁명'을 했지만 지배계급으로 스스로를 위치짓지 못했고, [자본의 시대]에는 '자본주의' 체제인식도 부족했으며, 1848년의 혁명과 1871년의 파리코뮌을  거치면서도 프롤레타리아는 결코 '다수'로서 자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 모든 것은 '여명의 지대'를 통과하는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종합하면서 이후에나 얻게 되는 통찰들이었다. 
홉스봄과 같은 역사가는 개인적 호불호나 감정을 절제하면서 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보여줄 뿐이다.

홉스봄이 정리하는 1848~1875년까지의 2부 [자본의 시대]는 그럼에도 명백한 '진보'의 시대였다. 부르주아지는 철도를 깔고 전선을 놓으며, 엄청난 석탄을 태우고 금광을 캐면서 인류 문명의 양적 성장을 성취했고, 프롤레타리아는 노동과 생산의 주역으로서 그 다수의 계급의식을 각성하고는 변혁의 주인공으로 역사의 무대에 오르기 시작했다. 
"1848년 이전, 부르주아지의 안정성은 사회혁명의 공포로 말미암아 제약"되었고 "1870년 이후로는 날로 성장하는 노동자 계급운동의 공포가 또다시 그들의 안정성을 적지않게 뒤흔들게 된다"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1848년과 1870년 사이"의 이 [자본의 시대]에는 "부르주아지의 승리가 의심과 동요의 여지도차 없는 것으로 보였다"고 홉스봄은 이 시기를 규정한다. 그리고는 묻는다. "이 시대의 기본적 동인을 대표한 것이 '자본주의'가 아니라면, 부르주아지에 의해서, 그리고 부르주아지를 위해서 만들어진 세계가 아니라면 그 무엇이었단 말인가?"(이상 같은책, <13. 부르주아지의 세계>)라고 말이다.


"세계는 광의와 협의의 두 의미에서 제국주의 시대로 들어섰다. 넓은 의미의 그것은 경제체제의 구조적 변화, 예컨대 '독점자본주의'를 포함하는 것이고, 좁은 의미의 그것은 '선진국' 지배 하의 세계경제에 '저개발국(식민지)'을 종속적으로 통합시키는 새로운 움직임을 가리킨다... 그러나 '진보'는 확실하게 지속했다... '대불황'은 단지 막간극에 지나지 않았다. (혐오스럽지만) 경제성장, 기술적, 과학적인 전진과 향상, 그리고 평화가 지속되었다."
- [자본의 시대], <16. 결론>, 에릭 홉스봄, 1975.


[혁명의 시대]가 '정(正)'이라면, [자본의 시대]는 '반(反)'의 시대로 볼 수 있겠다.
그렇다면 이어지는 3부 [제국의 시대]는 '합(合)'인가? 
결론부터 말하면 그렇지는 않다.
'부정의 부정'을 반복하는 끊임없는 과정일 뿐이다.


3. [제국의 시대 : 1875~1914](1987)


"... 단순하게 시대구분을 위해 필요로 하는 것 이상의 중요한 시점이 존재한다면, 1914년 8월이 그것일 것이다. 그 시점은 부르주아를 위해 그리고 부르주아에 의해 만들어진 세상의 종말을 고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진다. 그것은... 이 책이 마지막이 될 세 권의 책들이 주제로 삼아온 '장기 19세기(long nine-teenth century)'에 대한 종말을 상징한다... '역설'은 끝이 없었다. '제국의 시대'는 그러한 것들로 가득 채워져 있다. 이 책에서도 나타나겠지만, 사실 그와 같은 역설의 기본적인 전형은 자본주의가 극점에 도달함에 따라 그 진보에 내장되어 있는 모순 자체의 희생자로서, 그것의 '이상한 죽음(strange death)'이라고 불리는 것을 향해 내닫고 있던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세계와 사회였다."
- [제국의 시대], <머리말>, 에릭 홉스봄, 1987.


19세기 중반을 지나며 유럽의 강대국들이 세계를 분할지배하면서 '하나가 된 세계'([자본의 시대], <2-3>)로서 자본주의 세계체제를 확립하기 시작하였다. 홉스봄의 [자본의 시대]는 1871년 짧은 기간 후 "경이적, 영웅적, 극적"이자 "비극적"으로 남은 "확실한 사회주의 혁명"([제국의 시대], <2-9. 변화하는 사회>)으로서의 파리코뮌을 묘사하지만 1871년의 파리코뮌 '혁명'이 아닌 1870년대의 중반 어디쯤인 1875년에서 마무리된다. 이 시기는 자본주의 발전과정에서 '대공황'을 맞이한 1870년대의 상징이다. 가난하고 비참한 '노동빈민'에서 노동계급으로서 '프롤레타리아트'로 각성된 산업노동자들은 그 시기까지도 아직 전세계의 다수를 점하지 못했지만, 마르크스주의 지도이념으로 '혁명'의 주역이 되고 있었다. 단일하거나 통일되지 못한 이 계급은 '혁명'의 시기를 기다린다. 이 시기는 바로 자본주의 내적 모순이 드러나는 '대공황'의 시간이다.

3부작의 마지막 권인 [제국의 시대]는 이 '대공황' 시기의 중반 즈음인 1875년부터 제1차 세계대전, 즉 최초의 제국주의 세계전쟁 목전이었던 1914년까지의 역사를 서술한다. 
미국 독립전쟁(1776년)과 프랑스 대혁명(1789년)의 '100주년' 기념은 19세기의 산물인데, 때는 발전된 문물을 만방에 전시하는 '만국박람회'의 세상이었다. 이 [제국의 시대]는 돌아보면 노동계급에게는 그렇지 않았으나 이젠 지배계급이 된 부르주아지에게는 '황금시대(Golden Age)' 또는 '아름다운 시절(Belle Epoque)'이었다. 1815년부터 15년간 이어졌던 나폴레옹 전쟁 후 유럽은 '평화'와 '번영'이 만연했다지만, 내적으로는 계급 불평등이 격화되었고, 외적으로는 민족 불평등이 확대심화되었다. 우리나라도 겪었듯, 굳이 1차 세계대전의 개전이 아니더라도 19세기 말과 20세기 초는 세계 자본주의 열강들의 제국주의 침탈로 전쟁은 시작되었다. '아름다운 시절'은 유럽의 자본가만의 이야기였다. 실제로 [제국의 시대] 자본가들은 반세기 전 '능력'과 '재능'으로 신분상승를 이룬 그들이 아니었다. 그들은 이미 부의 세습과 귀족적 문화에 빠진 상태였다. 그들은 더 이상 문명의 '진보'가 아니었고, 기득권을 위해 여전히 왕정복고도 결코 마다하지 않았다. 세계화된 자본주의체제에서 식민지는 분할과 재분할을 거듭할 운명이었고 지배계급들이 원하든 원하지 않든 제국주의 세계전쟁의 국제적 상황은 상존했다. 오스만 제국의 해체 과정에서 유럽의 화약고 발칸 반도 사라예보의 총성이 아니었더라도 제1차 세계대전은 필연이었다. 레닌은 1916년의 팜플렛에서 '제국주의'를 '자본주의'에서 '최후(latest)'의 단계로 규정했는데, 그의 사후 이 수식어는 '최고(highest)'의 단계로 수정되었다. 어쨌든 '제국주의'는 당시 일련의 유럽 사회민주주의자가 분석한 것처럼 '자본주의' 체제의 '우연'한 '정책'이 아니라 자본집중과 금융자본 과두제 및 식민지 분할과 재분할에 이르는 '자본주의' 체제에서 '필연'의 단계였다. "황제들의 수가 가장 많았던... 새롭고도 낡은 '제국의 시대'"(같은책, <3.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또한 이 시대의 특징이었고, 이 '황제'들은 모두 전쟁의 소용돌이로 말려들었다. 

1917년생으로 제2차 세계대전까지 경험한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은 아마도 1914년을 당시 레닌을 비롯한 유럽의 사회주의자들이 보았을 것처럼 '문명'의 종말로 진단한다. '진보'의 이름으로 지속 성장하는 자본주의 체제 자체의 종말은 아니라도, '장기 19세기' 내내 이룩해 온 문명은 "한 세계의 내재적인 죽음과 다른 세계에 대한 필요성이라는 각성"(같은책, <머리말>)의 시간을 지난다. 전쟁의 참화 속에서 다른 세계의 가능성의 주역은 노동자계급과 노동자 대중정당, 이들을 중심으로 한 대중민주주의와 식민지 민족주의 해방투쟁이었다. [제국의 시대]의 '역설'은 지배계급인 "부르주아의 불확실성"(같은책, <7장>)과 "혁명을 향하여"(같은책, <12장>) 전진하는 다수 노동계급의 운동을 동시에 내포하고 있었다는 사실이다.

지배자들은 전쟁으로 수없이 많은 노동계급이 죽고 혁명성이 꺾이기를 바랐겠지만, 실상은 그렇지 않았다.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은 1차 대전이 주요 배경이었고, 홉스봄은 말하지 않지만 1949년 중국 사회주의 혁명의 배경도 2차 대전이라는 제국주의 전쟁이었다. 전쟁보다 더 중요한 배경은, "30년간의 장기적 평화기에 영국의 석탄광부들은 연평균 1,430명이 사망했고 16만5,000명(전체 노동력 가운데 약 10퍼센트 이상)이 부상"을 당한 '아름다운 시절'과 '평화'의 실체였다. 홉스봄은 다음과 같이 논평한다. "생과 사가 엇갈리는 가장 위험한 순간은 군복을 입었을 때가 아니었다"(같은책, <13. 평화에서 전쟁으로>)고. 지금 우리 사는 세상에서도 비정규직 노동자들은 그렇게 생사를 넘나든다.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자본가의 뜻대로 누더기가 되었다.

마르크스주의자 에릭 홉스봄은 '혁명'을 존중하고 '자본'을 혐오할 것이지만, 역사학자 홉스봄은 이 자본주의 근대사 일체를 최대한 '객관적'으로 서술하고자 노력한 점이 여실하다. 
마르크스주의자 홉스봄은 각 권의 사상이나 철학, 이성이나 예술 등을 논할 때 틈만 나면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의 행적과 사상을 언급하고자 한다. 그렇다고 당장 '혁명'의 당위성을 주장하지는 않는다. 이미 마르크스 조차도 1848년 유럽혁명의 실패 후 '혁명'은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는 아주 오랜 후의 일이며, 어쩌면 러시아 차르체제의 농노 촌락공동체(미르공동체)로부터 혁명의 동력이 나올 수도 있겠다는 후기의 사유행적도 있다고 한다. 실제 역사는 가장 혁명에 "적실성"(같은책, <12. 혁명을 형하여>)을 가졌던 러시아혁명의 주요 동력이었던 '소비에트'의 원형이 이 러시아식 '촌락공동체'였다는 사실을 입증했다. 
 

"이 책이 보여주려고 했듯, 어떤 이들에게 '제국의 시대'는 커져가는 어려움과 두려움의 시대였지만 부르주아가 만들어놓은 세계에 살고있는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그것은 거의 확실하게 '희망의 시대'였다... '희망의 여지'... 인류에게 유토피아로 가는 길은 막혀있지 않다."
- [제국의 시대], <글을 마치며>, 에릭 홉스봄, 1987.


'장기 19세기'를 1962년부터 1987년까지 25년에 걸쳐 정말 장기적으로 돌아본 역사학자로서 에릭 홉스봄의 결론은 이렇다.
1789~1914년으로 특징지어졌던 그 시대는 '진보'의 '유토피아'를 누구나 꿈꾸었던 시대였던 바, "부르주아는 멈추지 않는 물질적, 지적, 도덕적 진보를 기대"했고, "프롤레타리아들 또는 그들의 대변자임을 자처했던 사람들은 그것이 '혁명'을 통해 달성되기를 기대했다"(같은책, <글을 마치며>). 
그 속에서 이 노회한 역사가는 '희망의 시대'를 말한다. 

결국, 홉스봄이 '응집된 전체로서의 과거'를 통해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한 것은 다름아닌 '희망', 바로 그것이었다.

지난 일주일간 이 3부작을 읽는 내내 나는,
흡사 런던의 대학에서 값진 역사학 강의 한과목을 들은 듯 했다.

***

1. [혁명의 시대](1962), 에릭 홉스봄, 정도영/차명수 옮김, <한길사>, 1998.
2. [자본의 시대](1975), 에릭 홉스봄, 정도영 옮김, <한길사>, 1998.
3. [제국의 시대](1987), 에릭 홉스봄, 김동택 옮김, <한길사>, 199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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