난처한 미술 이야기 1 -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 미술하는 인간이 살아남는다 난생 처음 한번 공부하는 미술 이야기 1
양정무 지음 / 사회평론 / 201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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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르네상스'의 힘!
- [난처한 미술이야기] 1~2, 그리고 7권, 양정무, 2016~2022.


"어떻게 보면 16세기 르네상스인들이 그리스, 로마의 '고전'에 집착한 것은 과거로 돌아가려는 현실 도피가 아니라, 불안정한 현실에서 인간의 본질적인 문제를 '고전'이라는 창을 통해 바라본 것으로 볼 수 있어요. 이런 연극 같은 미술도 새로운 인간상을 추구하기 위한 고민의 과정에서 나온 것으로, 그 고민은 결국 '르네상스' 뿐만 아니라 더 나아가 서양 근대의 저변에 배어 있는 정서가 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 이야기 7], <3. 매너리즘과 후기 르네상스>, 양정무, 2022.


1453년, 오스만 투르크의 술탄 메흐메드 2세가 동로마 제국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을 대형 대포로 함락시켰을 때, 수많은 비잔틴 문명이 서방의 그리스와 이탈리아 반도로 유입되었다. 
동로마 제국의 멸망은 '르네상스(Re-naissance:부흥/復興)'의 서막이 열리는 사건이었다.

무엇의 '부흥(復興)'인가.
그리스와 로마 문명의 '부활(復活)'이다.
비잔틴 제국으로도 불리는 동로마 제국은 1천년 이상 유지되어 온 로마 제국이 동서로 분할된 후 로마를 중심으로 했던 서로마 제국이 무너진 기원후 5세기 이후로도 콘스탄티노플을 중심으로 1천년 가까이 더 살아남아 로마 제국의 문명을 이어왔다. 이슬람 투르크 제국에 의해 점령당한 후 동로마 비잔틴 지식인들과 장인들이 유럽 지역으로 탈출하면서 유럽의 중세 기독교 문화에 균열이 시작된다.
'르네상스'는 고대 그리스-로마 '고전' 문명의 '부활'이자 '부흥'이다.
또한, 현재도 진행형인 문화운동이다.


"네안데르탈인이 멸종되어가고 있을 때, 우리 조상인 '호모 사피엔스'는 대대적인 미술 작품을 만들기 시작합니다. 석기도 그 시점에 발맞춰 급격히 발전했지요. 이걸 일컬어 '인지 혁명'이라고 부르는 학자들도 있습니다. 저는 혹시 이와 같은 발달, 정확히는 '미술'의 출현에 현생 인류 생존의 비결이 있었던 건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는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 즉 '미술하는 인간'이었기에 살아남았던 게 아닐까 하는 겁니다."
- [난처한 미술이야기 1], <1. 원시미술>, 양정무, 2016.


한국예술종합학교 미술원 교수인 미술사학자 양정무 선생은 2016년부터 [난처한 미술이야기] 시리즈를 지속적으로 출간하고 있다. 시각예술로서의 미술은 이론적으로 접근한다면 오히려 재미가 없어지는 '난처한' 상황이 될 수 있으므로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난처한) 미술이야기]라는 제목으로 원시부터 근세 16세기 '르네상스'까지 7권으로 나온 미술사 대작이다. 17세기 바로크와 18세기 로코코, 19세기 신고전주의와 리얼리즘 및 낭만주의 등을 거쳐 20세기 현대미술은 앞으로 예고되어 있으므로 이후 몇 권이 더 나올지는 알 수 없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하는 우리 둘째 딸 송은규양의 꿈은 화가였는데, 어릴적 혼자 어린이 공룡백과사전 등을 보며 '고고학자'를 꿈꾸기도 했던 아빠인 내가 '미술사학자'를 해보라고 권유하면 싫다고 손사래를 친다. '예술'로서 '그림'은 좋지만 '이론'으로서의 '미술사'는 반갑지 않단다. 한편, 책읽고 글쓰고 잘난체 하기 좋아하는 나는 '이론'으로서 '미술사'는 가장 좋아하고 환호하는 영역이다. 아빠한테 칭찬 받으려고 본인은 '역사책'을 매우 좋아한다며 책 읽는 아빠 앞에 앉아 그림으로 가득한 역사만화책을 항상 펼쳐드는 우리 막내 송혜규양은 차치하고라도, 공부는 뒷전이지만 체육 좋아하는 우리 아들 송민규군에게 체육은 '이론'으로도 즐거운 일이고, 또한 누구에게는 고전 클래식 음악은 '이론'으로도 익숙한 일이듯, 나에게는 '미술사' 이론이 감히 '취미'다.

지난해 [벌거벗은 미술관](2021)이라는 책에서 'Seria Ludo', 즉 '심각한 문제도 놀면서 풀자'라는 라틴어 건배사를 알게 해준 저자 양정무 교수는 미술사를 통해 '인문성(Humanity)'의 부활과 실패, 그리고 부흥의 영속성을 설명한다. '예술'을 이르는 'Art'는 라틴어 'Ars'를 어원으로 하고 'Ars'는 고대 그리스의 'Techne'가 어원이다. 즉, '미술(Fine Art)'은 좋은 '기술(Techne)'에서 유래한다. 그림이든 조각이든 건축이든 인류가 시작한 일체의 '시각 예술(Visual Art)'은 '좋은 기술(Fine Technic)'에서 기원하였고, 이 '기술'과 '미술'의 목적은 '인문성'의 시각화다.

저자의 [미술이야기] 대작은 그렇게 원시 미술에서부터 시작하는데, 이 장대한 미술사 속 인류는 '호모 사피엔스'를 넘어 '호모 그라피쿠스(Homo Graphicus)'가 된다.
300만년 전 만들어진 주먹도끼와 1만년 전 빗살무늬 토기는 실용적 '기술'의 도구이기도 했지만 자세히 관찰하면 원시 인류의 미적 감각이 투영된 미술 작품이기도 하다. 

기술을 발명하고 전수하는 능력은 인류 공동체 역사의 주요한 요소가 되었고 당연히 사회의 발전과 함께 사피엔스는 지금껏 진화했다. 언어는 정교해졌고 문자가 발명되기 전에는 가장 단순한 시각화 작업인 그림, 즉 '미술'이 그 매개가 되었다. 4만년 전 그려진 동굴 벽화는 원시 인류의 꿈과 협력의 사회 현실이 담겨져 있다. 고대 이집트나 메소포타미아의 초기 문자와 동아시아의 고대 한자가 그림과 같은 상형문자인 이유가 그것이다. 언어가 그림과 조각으로, 이것들이 다시 문자로 진화하는 장구한 과정이다. 
그렇게 '생각하는 인간'인 '호모 사피엔스'는 '미술하는 인간'인 '호모 그라피쿠스'로서 지구의 다수 종이 되어 이 세상을 지배했다. 물론 자연의 입장에서 인류의 지배기간이 찰나에 불과하겠지만 말이다. 

고대 이집트에서는 그림과 조각이 세상을 공부하는 과정이었고 세상을 이해하는 중요한 이론이었다. 그 옆 동네 메소포타미아는 인류 역사상 최초로 도시국가와 제국, 법전과 유일신교 등이 시작된 인류의 '본사(本史)'와도 같은데 기원전 4세기 마케도니아 제국의 알렉산더 대왕이 페르시아 전체를 파괴한 이유 또한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성대함을 반증한단다. 알렉산더 제국의 헬레니즘 문화와 같이 역사상 제국들은 '미술' 즉 그림과 조각, 웅장한 건축물 등으로 문명의 발전을 과시했고 민중들을 규합했다. 다수 민중들이 문자를 이해하고 책을 읽게 되는 시대는 15~16세기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후에야 가능했으니 그 전까지 '까막눈' 민중들은 '미술'을 통해 사회 공동체를 만들고 유지해 나갔다. 
과연 수백만 년에 걸친 '호모 그라피쿠스'의 역사는 유구하다.


"... 곰브리치는 그리스 미술이 바로 그 (다양성의) 주변부 문화였다고 주장합니다. 시도해보고 잘 안되면 고쳐나가는 게 바로 그리스 문명, 나아가 서양 문명의 근간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은 거예요. 그런 면에서 이집트와 그리스가 차이 난다는 주장이기도 하고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2], <2. 그리스 미술>, 양정무, 2016.


미술사학자 에른스트 곰브리치는 [서양미술사](1950)에서 그 무어라 규정할 수 없는 '모더니즘'을 예술의 본질로 보고 있지만, 그 근원에는 '미술가'들의 혁신이 있고 그들 유럽 문명의 뿌리는 고대 그리스 '인문성'이라고 보았다. 곰브리치는 그리스 예술을 '주변부' 문화라고 보았다는데, 끊임없이 실험하고 수정하고 변화발전하는 특성으로 내린 규정이다.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에 인접한 해양국가 그리스는 크레타-미케네-그리스 문명을 이어가며 이들 양대 문명을 흡수하고 모방하는 과정에서 결국 본인들만의 문화로 발전시키게 되는데, 실로 고졸기 이전 그리스 조각들은 이집트와 메소포타미아의 그것들과 매우 흡사하거나 훨씬 조악하다. 그러다가 독자적으로 발전된 이 그리스의 유연한 '주변부' 문화는 고대 로마 제국으로까지 계승되었는데, 우리가 많이 본 그리스 조각상들은 사실 그리스 청동상들을 로마인들이 똑같이 만든 대리석 모작들이다. '트로이'의 후손들이라 자처했던 로마인들은 프로메테우스의 손자 핼렌의 후예라 생각했던 그리스인들의 미술을 따라했지만 로마인들만의 방식으로 계승했다. 트로이의 복수로써 로마인들은 그리스 문명을 대대적으로 파괴했을 수도 있겠지만 서양 유럽인들의 '고전주의' 인문성의 모델은 연속성을 매개로 하여 '그리스-로마' 문명이라 불린다.


"라파엘로의 죽음은 '르네상스' 전성기, 즉 '하이 르네상스'의 종말을 뜻합니다. 하이 르네상스를 이야기할 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그림이 원숙하게 자리잡는 시기, 예를 들어 <최후의 만찬>이 만들어진 때(1495~1498)부터 시작해서 라파엘로가 사망하는 1520년까지로 보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러한 맥락에서 하이 르네상스는 대략 30년 정도입니다. 라파엘로의 때 이른 죽음은 시대 구분의 기준이 될 만큼 미술사의 변곡점을 가져온 것이지요."
- [난처한 미술이야기 7], <1. 로마 르네상스>, 양정무, 2022.


르네상스의 시작은 마사초의 원근법과 브루넬리스키 돔지붕 성당, 보티첼리의 비너스 등과 함께 시작했지만,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다양한 연구와 그림, 미켈란젤로의 조각과 대형 천장화의 대결을 통해 미술과 미술가의 지위를 연예인급으로 승격시켰고 후기 요절한 천재 라파엘로와 노련한 미켈란젤로의 2차전으로 미술계의 '하이 르네상스(High Re-naissance)'를 구가한다. 교황과 군주 등 권력자의 친구이자 당대 최고의 셀럽이었던 미켈란젤로는 미술가의 지위를 높이면서 장수한 만큼 응큼했다. 예술가로서 자존심은 하늘을 찔렀지만 '하이 르네상스' 1차전에서 늙은 천재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경멸한 것처럼 2차전에서는 젊은 천재 라파엘로를 시기했다. 세속권력과 신교의 도전에 맞서 구교인 가톨릭 교황의 권위를 지키기 위해 그린 시스티나 성당의 제단화 <최후의 심판>은 가톨릭 주교들의 비난을 받고 성자들의 누드에 옷을 덧칠하기도 했다. 물론 대가인 미켈란젤로의 사후에 그의 제자에 의해서지만.

라파엘로의 죽음으로 꺾인 로마와 피렌체의 '르네상스'는 이후 '매너리즘'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고, 마지막 북이탈리아 베네치아에서 티치아노의 전원미술과 틴토레토의 바로크식 구도의 예고 등으로 진화한다. 양정무 교수가 르네상스 이야기를 마무리하면서 소개하는 건축가 안드레아 팔라디오는 고전 그리스-로마 건축을 중세식 바실리카 양식과 결합하여 현대의 미국 백악관이나 한국 대학 본관의 양식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고전'을 통해 '인문성'을 부흥시키고자 했던 '르네상스'의 시도와 실패, 그리고 재부흥은 '미술'이 존재하는 한 언제까지나 계속될 것이다. 
'고전주의'는 서양 제국의 권력자들의 정치예술이 아닌, 원시로부터 수백만 년간 이어져 온 '호모 그라피쿠스', 즉 '미술하는 인간'으로서 인류 전체의 꿈이다.

그것이 바로,
'르네상스'의 힘이다.

***

1. [난생 처음 한 번 공부하는 미술이야기 1 - 원시,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2. [난처한 미술이야기 2 - 그리스 로마 문명과 미술], 양정무, <사회평론>, 2016.
3. [난처한 미술이야기 7 - 르네상스 완성과 종교개혁], 양정무, <사회평론>,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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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 K. 헌트의 경제사상사 - 애덤 스미스부터 21세기 자본주의까지 비판적 관점으로 본
E. K. 헌트.마크 라우첸하이저 지음, 홍기빈 옮김 / 시대의창 / 2015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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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E.K.Hunt, 1979~2011.


"경제를 바라보는 사상과 관점을 헌트는 다음과 같은 분명한 이분법으로 대립시키고 있다.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라는 것이다."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옮긴이의 말>, 홍기빈, 2015.


1.

백발의 교수는 학생들에게는 거의 관심을 두지 않은 채 독백하듯 강의를 이어나간다. 경제학과 전공필수 과목이라 수강생의 대부분은 경제학과 학생들이었을 거다. 영문학과는 나 혼자였다. 수학적 공식과 증명은 나오지 않았다. 얼핏 지루해 보일 수 있는 조용한 강의였지만 가급적 수업에 빠지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기묘한 일이지만 '경제학'이 재미있다고 생각했다. 
'수학'이 아니라 '역사학'과 함께 듣는 '경제학', 1994년 2학기에 영문과 2학년인 내가 들었던 경제학과 강의는 '경제학사(經濟學史)'였다. 재미있었지만 학점은 'B'였다. '경제학'에 자신이 생겨 내친 김에 1995년 3학년 1학기에 신청한 경제학과 교양필수 '경제학 원론(原論)'은 주류 미시경제학을 나 나름의 마르크스 정치경제학 관점에 입각하여 노트하고 '비판'적 시험 답안지를 제출한 결과 'C+'을 맞았다. 
제대 후 복학해서는 난 더 이상 경제학과 강의를 신청하지 않았고, 주로 국문학과 전공 강의를 기웃거렸다. 여전히 마르크스주의자임을 자칭했지만 (정치)경제학에 역시 재능이 없음을 깨닫고 난 후의 내 꿈은 '소설가'였기 때문이었다. 다행히 국문과 강의는 경제학보다 재미있었다.

그래도 내게 '경제학'은 일종의 아픈 손가락과 같이 애잔하다.
잘 하고 싶지만 능력이 미치지 못한다기 보다, 
애초부터 이해할 '머리'가 없어 아쉬운 그런.


2.

"경제사상사에서 빈번하게 되풀이되는 주제 하나는 '자본주의'가 과연 '조화'를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갈등'을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라는 것인데, 이것이 이 책의 중심주제가 될 것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서문>, E.K.Hunt, 1979.


'경제학'에 아주 잠시 관심을 두었던 이십대 초반 한때 나의 관심사는 '자본주의'였다. 당시는 아직 마르크스의 [자본론] 원전을 마저 읽지 못한 상태였는데, 1990년대 초반의 대학 분위기에 편승하여 선배들을 따라 '과학적 사회주의'를 학습했고, 이에 따라 '자본주의'를 '과학'적으로 비판하는 '철학'을 지향했다.
'경제학사'가 재미있었던 이유는 경제학의 역사에서 자본주의 비판을 목적으로 했던 '비주류' 경제학 사상들과 그 기원들을 배울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시험 답안지에 자본주의 '비판'을 잔뜩 써서 내도 'B'는 맞았다. 그러나 다음 학기 '경제학 원론'은 달랐다. 수요-공급 곡선과 '한계효용',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자기조정적 시장을 이해하고 변론하지 못하면 그냥 'C'였다. 
'미시경제학'은 '주류' 경제학에서 반드시 넘어야 할 크고도 험한 산이었다.


미국의 급진적 정치경제학자인 유타대학 경제학 교수 E.K.헌트(Emery Kay Hunt : 1937~)는 그의 나이 사십대 초반이었을 1979년에 [경제사상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 초판을 낸다. 
이후 헌트는 2008년 세계 자본주의 경제위기를 거치면서 동료학자 마크 라우첸하이저(Mark Lautzenheiser)와 함께 책의 말미에 <오늘날의 경제학> 몇 장을 추가 증보하여 2011년 3판까지 발표했고, 아마도 1980년대 담배연기 자욱한 반지하 자취방에서 초판을 학습했을 우리 사회 진보적 정치경제학자 홍기빈 선생이 2015년에 이 3판을 번역했다.

헌트의 입장은 명확하다. '중립'적이거나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대놓고 자본주의 '비판'의 관점에서 자본주의를 정의하고 계급투쟁을 이야기하며, 아담 스미스부터 현재의 주류-비주류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서술한다. 역자 홍기빈 선생에 의하면 헌트가 영미권 경제학자라는 한계로 인해 유럽의 막스 베버와 조지프 슘페터, 북유럽 사민주의 사회의 '제도주의' 경향들을 다루지 않아 아쉬운 점은 있지만,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결로 주류 경제학에 대항하고 반론을 펼친 소스타인 베블런(같은책, <12장>)과 피에로 스라파(같은책, <16장>) 같은 경제학자들의 사상을 재조명하고 있어 경제학에서 "정녕 철학적으로나 과학적으로나 소중하게 붙들어야 할 진실의 고갱이가 무엇인지"(같은책, <옮긴이의 말>) 고민하는 이들에게 "꼭 읽으라고 간곡히 권하고"(같은책, 같은곳) 있다.

E.K.헌트의 이 250년 경제학 역사 이야기책 제목은 '경제학사(History of Economics)'가 아닌 '경제사상사(History of Economic Thought)'이다. 즉, 경제학에 관한 헌트의 기본 관점은 '개인들의 교환'이 아니라 '노동가치론'에 기반한 '사회적 생산'으로서의 그것이다. 따라서 '신고전파'라 분류되는 주류 경제학이 가정하는 '합리적 개인'이 아닌 '사회적 관계' 속에서의 인간을 바탕으로 깔고 있다.
그렇기에 헌트의 '경제학' 역사는 추상적인 경제학 '이론'(Economics)의 역사가 아니라, 경제학 '사상'(Economic Thought)의 '역사'(History)가 된다.
역자는 역시 <옮긴이의 말>에서 헌트의 [경제사상사]는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이냐, 개인들의 교환이냐"라는 주제를 화두로 둔다고 말한다. 저자 E.K.헌트는 <서문>에서 현재 자본주의 특정 사회체제를 "과연 '조화'를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 아니면 '갈등'을 향해 가는 시스템인가?"라는 질문에 수많은 경제학자들이 어떠한 대답을 제출했는지가 그의 [경제사상사]에서 '중심주제'가 되고 있다고 쓰고 있다.
결론적으로, [경제사상사]에서 '경제학'은 '사회적 생산'이며, '자본주의'는 계급간 '갈등'을 향해 가는 체제이다.


"공리주의 이데올로기는 토지와 자본 또한 노동과 똑같은 방식으로 상품을 생산하며, 따라서 토지 소유자와 자본가도 노동자가 임금을 받을 자격이 있는 것처럼 자신들의 생산요소 덕분에 나온 생산물의 가치 등가물을 가져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도록 우리를 훈련... 
인간 노동이 상품의 지위로까지 추락한 자본주의와 같은 사회에서만 여타의 상품이 인간의 수준으로 격상될 수 있으며 그래서 인간들이 생산하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생산을 행하는 것인양 여겨질 수 있다. 하지만 이는 공리주의 경제학에서 생겨나는 반(反)계몽주의일 뿐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19. 오늘날의 경제학 III :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활>, E.K.Hunt/Mark Lautzenheiser, 2011.


본인을 "편파적이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같은책, <19장>)이라고 공언하며 신고전파 주류경제학과 그들의 이데올로기인 '공리주의(Utilitarianism)' 철학을 시종일관 비판하고 있는 저자 E.K.헌트는, 내가 읽기로 철저한 마르크스주의자이다. 저자가 마르크스를 [경제사상사] <9장>에서 [정치경제학 비판요강(그룬드뤼세:Grundrisse)]과 [자본론(Das Kapital)] 중심으로 각별하게 다루는 것은 물론, 개인들의 '효용'을 중심으로 한 주류경제학에 대한 비판의 기본 관점이 사실상 사회적 생산의 기본적인 정치경제학 이론으로서의 '노동가치론'이라는 점, 마르크스에 대한 헌트의 유일한 비판이 자본주의 '종말론'의 '잘못된 예측' 한 가지 뿐인 점, 마르크스의 후예로서 '경제학자'는 아니지만 20세기초 '제국주의'를 '자본주의 본원축적론'의 관점에서 탁월하게 분석한 로자 룩셈부르크와 '자본주의 최고의 단계'로 규정한 레닌까지 충실하게 다루고 있다는 점(같은책, <13장>) 등이 내가 보기에 이 책의 주요한 특색이다. 이는 물론 개인 '효용'의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시장의 '자기조정성'을 갖는다는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제국주의'를 탐구하지 않는다는 이유도 있지만, 아담 스미스와 데이비드 리카도와 같은 18~19세기 전통적인 '고전파' 경제학의 '노동가치론'을 '효용'과 '한계주의(marginalism)'로 치환하면서 자본주의 체제의 계급 '갈등'을 '합리적'인 개인들의 '조화'로 '살균처리'해 버린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 철저히 비판적인 관점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편파적"인 헌트는 '경제학'을 '사회적 생산'의 '노동가치론'에 입각하여 '자본주의'를  '갈등'의 체제로 분석한다. 모든 것을 '수학'적으로 증명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주류경제학이 '신고전파'인 이유는 자본주의 체제를 옹호했던 '고전파'의 정치경제학 이론과 '공리주의' 철학을 '신비화'시켰기 때문인데, '신(新)'을 접두사로 쓴 사상 일체는 기존 사상을 '신비화'시키고 '교조화'시키는 특징이 있다. '신고전파' 경제학은 '고전파'의 정치경제학을 경제학이라는 '과학'으로 수치화했고, 생물처럼 유기적인 '시장'을 '보이지 않는 손'의 '자기조정성'이라는 신화로 만들었다. 주류경제학은 '수학'과 '과학'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상 현체제인 자본주의를 '종교'로 하는 신학에 불과하다. 
19세기 존 스튜어트 밀과 20세기 폴 새뮤얼슨 같은 경제학자들은 '신고전파'이기는 했으나 자본주의 체제의 '갈등'을 인정한 '절충주의'였는데, 그들의 '철학' 사상은 영국의 제레미 벤담과 존 스튜어트 밀 등 자본주의 체제 변호론자들로 이어지며 정리되는 '공리주의'라는 이데올로기였다. 인간의 필요와 욕구 일체를 '효용'과 '쾌락'으로 치환하고 일반화시킨 '공리주의'는 경제학을 '노동가치'가 아닌 '효용가치'로만 파악하므로 "압정이든 시든", "자본가나 지주든 노동자든" 그 어떤 차이나 일체의 '갈등'을 탈색시키고 만다. 사회적 관계가 탈각된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의 효용과 쾌락만 남은 '공리주의' 철학은 실재하지 않는 개인만을 상정하고 있기에 현실을 변호하고 있음에도 실제로는 쓸모없는 공허한 철학에 불과하다. 
자본주의 천년왕국의 천상에 자리한 '신고전파' 경제학의 철학이 '공리주의'라는 사실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1930년대 대공황에서 '유효수요론'으로 주류경제학의 한 분파로 편입된 케인스주의는 '신고전파'의 '자기조정' 시장을 기각하고 정부의 시장조정 기능을 강조하며 이후 거시경제학의 기초가 되었고(같은책, <15장>), 폴 새뮤얼슨은 '신고전파'의 '미시경제론'과 '케인스주의'적 '거시경제론'을 '절충'하여 주류경제학의 양대 기둥이 되도록 역할을 했다(같은책, <18장>). 그럼에도 이들의 철학은 공통적으로 '공리주의'였으며 '노동'보다는 '(한계)효용'에 주목했다. 
자본주의 신화에서 '공리주의' 철학은 '반계몽주의' 또는 '반지성주의'에 불과하다.


"(피에로) 스라파가 [상품에 의한 상품생산]을 쓴 주된 목적은 신고전파 '한계효용이론'을 대체할 이론으로서 리카도의 '가격이론'을 발전시키는 것이었다. 그렇게 하는 가운데 그는 '불변의 가치척도'를 찾고자 한 리카도의 문제를 해결했다... 그가 말하는 '표준산업'의 생산의 기술조건만 알 수 있다면 우리는 상품의 가격에 대해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도 경제 전체의 이윤율을 결정할 수 있게 된다."
- [E.K.헌트의 경제사상사], <18. 오늘날의 경제학 II : 제도주의와 포스트 케인스주의>, E.K.Hunt/Mark Lautzenheiser, 2011.


마르크스주의는 자본주의에 관한 '과학'적 종합분석으로 인류 사상계에서 지대한 영역을 점하고 있지만, 사실 그러거나 말거나 주류경제학은 마르크스주의 사회사상을 무시한채 '수학'의 영역에서 따로 놀아왔다. 그런데 1960년대 피에로 스라파(Piero Sraffa)는 '신고전파'의 '수학'의 영역에서 이들의 '자본이 측정 가능한 생산성을 가진다'는 '신화'와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한 시장의 '일반균형론'을 깼다고 한다. 즉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존립할 수 있었던 주요 근거들을 '수학'적으로 무너뜨렸기에 이에 당황한 '신고전파'들이 논쟁의 장으로 들어오게 되었다는 것인데, 기존 마르크스주의 정치경제학(같은책, <9,13,19장>)이나 소스타인 베블런(같은책, <12장>) 등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은 지금껏 '신고전파' 경제학(같은책, <6,8,10,11,14,17장>)과는 다른 차원에서 아주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즉, 서로 자기 주장만 할 뿐 '철학적 토론' 자체가 불가능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제 1960년대 이탈리아 경제학자 피에로 스라파에 의해 이러한 '대치'가 깨졌다. 전통적 '노동가치론'에 입각한 스라파가 '신고전파'가 성역화한 '수학'의 영역에서 '표준산업'이라는 '불변의 가치척도' 개념을 가지고 '자본측정성'과 '일반균형성'의 오류를 증명했다고 하는데, 사실 헌트도 인정하듯이 이러한 '수학'의 증명과 논쟁 과정은 일반인에게 매우 난해한 과정이므로 [경제사상사]에서 상세히 다룰 수 없다고 한다. 실제로 소략하게 소개되고 있는 스라파의 '표준산업' 중심 증명식을 내가 온전히 이해했다고 말할 수 없다. 다만, 저자는 물론 역자가 높이 평가하는 피에로 스라파의 업적은 마르크스주의와 다른 방식으로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에게 '수학'적 찬물을 끼얹었고 그들 자체적인 반성과 '이론'적인 수정을 가능케 했다는 점이다.

아마도 1979년 E.K.헌트의 [경제사상사] 초판의 피날레가 피에로 스라파가 아니었을까 싶게 헌트의 스라파 평가는 매우 높다. 
비록 자본주의를 좀더 '인간적인' 체제로 수정하게끔 했던 마르크스주의와 케인스주의였지만 주류경제학이 이를 통해 채용한 것은 '이론'적 수정이 아니라 '정책'적 수정이었다. 마르크스주의자로 추정되는 이 책의 저자 E.K.헌트는 토론 자체가 불가능하기에 '신고전파' 주류경제학이 '이론'적으로 무시하고 침묵하는 마르크스보다, '수학'의 전장에서 정면으로 반론하고 논쟁하는, 그리하여 결국 적들의 학문적인 수정까지 이끌어낸 피에로 스라파를 그의 비판적 [경제사상사]에서 무심하고 건조하게 대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역자인 홍기빈 선생 또한 이 책의 <16장> 피에로 스라파 이야기를 적극 추천하고 있다. 
스라파는 '잉여가치론'을 수용하지 않았기에 비판적 정치경제학자였음에도 마르크스주의자가 아니었고 자신만의 독자적 힘으로 '수학'의 전장에서 강력한 '신고전파' 대군을 물리친 역전의 경제학자였다. 21세기 현재는 다시 '주류경제학'과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토론이 사라진 시대로 회귀했다고 이 책의 <19장>에서는 말하고 있는데, 여전히 주류경제학이 '수학'의 천상에서 내려오고 있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천상의 '효용'이 지상으로 내려오지 않는 한, 현실에서 다수 사람들이 생산해내는 '노동'의 가치와 만나는 날은 없을 듯 하다. 그럼에도 역시 여전히도 천상으로 직접 올라가 '수학'의 무기를 들고 자본주의 십자군들과 싸울 '이단적 경제학(heterodox economics)'이 절실하다.
비록, 그 전투의 생생함을 절대로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일반인의 지능을 지닌 나지만, '수학'의 영역에서 나를 대신하여 싸우는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전사들을 기다리고 응원한다.


3. 

"나는 편파적이며,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다."
- E.K.Hunt, [경제사상사], <결론 :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 1979.


백발이었지만 그리 늙어보이지는 않았던 1994년 2학기 '경제학사' 교수님의 성함은 잊었다. 그리 활력 넘치는 강의는 아니었지만 나는 저 교수가 경제학과 '비주류'라서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내심 했고, 강의내용에 '비판적 정치경제학'이 많이 언급되어 나는 나름대로 그 강의에 'A+' 이상을 줬다. 비록 내가 받은 결과는 'B'였지만 내가 돌려주는 평가에는 여전히 변함이 없다. 뭐 'B' 정도면 틈틈이 제도 밖으로 땡땡이를 치고 싶어하던 그 당시 나의 평균으로 따졌을 때 그래도 나쁘지 않은 편이었다. 

스스로를 "편파적"이라고, '비판적 정치경제학자'로 공공연히 선언한 헌트는 [경제사상사] 초판(1979)을 마무리하는 절인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에서 추상적인 '합리적' 개인이 아니라 사회적 생산관계를 이루는 인간 보편의 필요욕구와 수단이 아닌 목적으로서의 인간관을 인정하는 '사회적 관점'을 재차 강조한다. 
아마도 피에로 스라파와의 '수학'적 전투를 거쳐 수정되면서 절충주의(폴 새뮤얼슨)와 오스트리아학파(프리드리히 하이에크)/시카고학파(밀턴 프리드먼)로 '양분'(같은책, <17장>)되는 '정통파 경제학' 이야기에서 마무리되었을 1979년 초판의 결론은 헌트의 자본주의 비판 '12개 테제들' 아닐까 싶다. 
중복되기도 하여 12가지 모두 열거할 수는 없지만, 헌트가 보는 자본주의는, 
1) 갈등과 착취 기반 시스템, 2) 계급투쟁의 근본성, 3) 노동의 상품성으로 인한 소외, 4) 시장의 무정부성과 만성실업으로 인한 경제적 불안정성, 5) 정서적 파편화로 인한 인종주의와 성차별주의로의 왜곡, 6) 멈출 줄 모르는 소비주의, 7) 공공성 부재, 8) 소외계층 만연, 9) 체제 영속의 도구로서의 교육, 10) 오로지 이윤만이 목적이기에 발생하는 기후위기 등으로 정의된다.

이후 2008년 세계 자본주의 체제위기를 거쳐 <18장>의 '제도주의'와 '포스트 케인스주의', <19장>의 '비판적 정치경제학'의 부활이 마크 라우첸하우어에 의해 증보된 듯 한데, 40년이 더 지난 3판에서도 헌트의 초판 결론은 변함이 없거나 오히려 더 강화되었을 수도 있다.

나는 비록 '경제학'과 담을 쌓은지 오래지만, 설령 마르크스주의 '잉여가치론'을 따르지 않더라도 지금의 체제만이 아닌 좀더 사람사는 세상을 만들려는 '비판적 정치경제학'과 '노동가치론'은 언제고 환영하고 응원할 것이다. 
매우 방대하고 어렵지만 경제학 '백과사전'처럼 항상 곁에 두고 사안마다 찾아보고 참고하는 '경제사상사' 한 권이 있다는 생각에 마음 든든하다.
수년 전 사놓고 곁에만 두고 있다가 이제야 이해가 되든 안되었든 통독이나마 마쳤다는 점도 물론.

어쨌든,
1994년의 청년이었던 내가 '경제학사'에게 'A+' 이상을 주었듯,
2022년의 중년인 나는 '경제사상사'에게도 'A+' 이상을 주었다.


"... 나는 중립적이지도 불편부당하지도 않다. 나는 자본주의가 인간 합리성의 절정이라고 믿지 않는다. 나는 역사적으로 볼 때 자본주의가 자연에 대한 인간의 통제력을 증가시킴으로써 대단히 중요하고 진보적인 기능을 했다고 믿는다. 하지만 그 가운데서 자본주의의 진보적이고 합리적인 것은 결국 퇴행적이고 비합리적인 것으로 되었다. 오늘날 존재하는 시스템은 인간들이 스스로의 잠재적 가능성을 충분히 발전시키는 것을 체계적으로 좌절시킨다. 이러한 이유에서 이 (자본주의) 시스템은 비효율적이며 비합리적이다."
-[E.K.헌트의 경제사상사], <결론 : 이 책의 근저를 이루는 사회적 관점>, E.K.Hunt, 1979.

***

- [E.K.헌트의 경제사상사](1979~2011), E.K.Hunt/Mark Lautzenheiser, 홍기빈 옮김, <시대의창>,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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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 삶의 변곡점에 선 사람들을 위한 색다른 고전 읽기
최봉수 지음 / 가디언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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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古典)'의 내공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최봉수, <가디언>, 2022.


"하늘과 인간의 관계를 탐구하고 고금의 변화에 통달하여 '일가의 말'을 이루고자 합니다."
("究天人之际 通古今之變 成一家之言.")
- 사마천, <보임안서>, BC.1C.


사마천이 친구 임안에게 보내는 편지 <보임안서(報任安書)>에서 본인이 아버지 사마담에 이어 역사서 [사기]를 짓는 이유를 말한 대목이라고 한다. 
기원전 1세기 한무제 시절에 흉노에 중과부적으로 항복한 장수 이릉을 변호하다가 억울하게 사형을 받았지만 궁형을 자처하면서까지 목숨을 보전한 이유가 [사기]를 완성하기 위함이고, [사기]를 지은 이유가 세상 이치를 깨달아 "일가의 말(一家之言)"을 이루기 위함이라고 사마천은 토로했다. 
[사기]는 중국역사의 족보를 세운 최고의 역사서로 평가받고 있지만 한무제 당시에는 '정사'가 아니었다. 수세기 후 후한시대 반고의 [한서]는 전한의 단대사로서 왕명에 의해 유학의 관점에서 역사를 다룬 '정사'였던 반면, 사마천은 130권의 죽간의 원본은 명산 산속 깊이 보관하고 부본을 세간에 돌려 후세 성인군자들의 평가를 구해야 했다. 한나라의 지배 이데올로기인 유학의 관점만이 아니라 역사적 인물들의 입체적 삶을 <본기>와 <열전> 등에서 교차적으로 서술하면서 "과연 하늘의 도란 무엇인가?"라는 심오한 질문을 던지는 사마천의 [사기]를 보고 당시의 절대권력자 한무제는 자신과 선왕의 본기를 폐기하라고 지시까지 했단다. 사마천이 살아서는 세상에 인정받아 '일가지언'을 이루지는 못했다는 말이다. 그러나 결국 사마천의 [사기]는 후세에 의해 중국 '25사'의 첫번째 '정사'로 인정받게 된다.
현재로서는 과연 동서양을 막론하고 역사가로서 사마천만큼 '일가지언'을 이룬 사람을 꼽을 수가 없다.


김영사와 중앙M&B 등의 출판사에서 편집자와 경영자를 지낸 최봉수 선생은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에서 서양의 '그리스-로마 신화',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 '그리스 3대 비극', 그리스 역사가 '헤로도토스'와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 '플루타르크 [영웅전]', 동양의 '사마천 [사기]', '[열국지]', '[초한지]'와 [삼국지]'를 거쳐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와 '[일본서기]'까지 동서양의 '고전(古典)' 13편을 통해 각 상황 속 사람들이 그려낸 '역사'를 읽어주고 있다. 원래 2020년에 나온 [내 맘대로 고전읽기]의 개정증보판이라고 한다.


내가 쓰고 있는 '내 맘대로 서평'과 비슷한 면이 있는 듯 하여 읽어보니 저자의 내공이 대단하다. 내가 쫓고 넘어서야 할 모델이 또 하나 있다는 것을 직접 읽으며 확인한 건데, 단순한 '서평' 수준을 넘어 해당 고전이 담고 있는 내용을 독자적이지만 보편적 인간군상을 묘사하고자 하는 탁월한 시각에서 분석하고 해석해 준다.

이 중 내가 읽은 것은 9가지다. 서양편의 '그리스 비극'과 '헤로도토스의 [역사]',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동양편의 '[일본서기]' 등 4가지를 뺀 나머지 9종의 고전들이다. 
이 중 대학 영문과 1학년 때 멋도 모르고 읽어제낀 호메로스의 [일리아드]와 [오딧세이]는 필수과목 숙제라 역시 아무 생각없이 원고지에 필사했던 기억이 있다. 당시 스무살 또는 그 언저리였던 우리 신입생들에게 영문과 필수교양과목인 '그리스-로마 신화'와 '성서'를 가르치시던 이재호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생각난다. '어떤 어려운 책이라도 그냥 끝까지 읽으라'는 그 한 마디는 지금까지 내가 '고전'을 읽는 주요한 방식이다.
어쨌든 호메로스의 두 장편 서사시를 제외하고 나중에 서평이든 그 비슷한 형식이든 나만의 글로 정리해 놓은 게 대략 아래의 7가지 정도다.


1. [그리스-로마 신화] 
: 최봉수 선생은 창조와 투쟁의 반복을 통한 인류 진화의 보편적 이야기의 서양식 최초 전형으로 '그리스-로마 신화'를 든다.

2. 플루타르크 [영웅전] 
: 그리스와 로마를 통과하며 시대를 초월하는 삶들의 '비교열전'이다. 원제가 '비교열전' 또는 '대비열전'이다.

3. [사기] 
: [사기] 집필 5백년 전 공자의 [춘추]를 기리면서도 그를 넘어서려는 사마씨 가문의 '일가지언'이다. 사마천의 화두는 "과연 하늘의 도란 과연 무엇인가?"이다.

4. [열국지] 
: 중국 고대 고사성어의 요람인 춘추전국시대 열국들과 인물들의 다양한 삶을 그려내고 있다. 출처는 주로 [사기]의 <열전>과 공자의 [춘추], 좌구명의 [전국책] 등이며 명나라 시기 풍몽룡이 집대성한 [동주 열국지]가대표적이다.

5. [초한지] 
: 비루하지만 유연한 건달황제 유방과 진격의 천하장사인 뼛속무골 항우의 대전쟁이자 중국 '건곤일척' 영웅전의 전형을 토대로, 저자는 '전한 3걸'인 소하-한신-장량 3인의 삶을 해석하고 있다.

6. [삼국지] 
: 위-촉-오 삼국지라는 중국 고대사의 에필로그를 전조한 후한 시기 하진-원소-동탁의 삼자구도를 저자는 삼각구도의 한 원형으로 소개한다.

7. [삼국사기] 
: 단재 신채호 선생의 평가와는 다르게 김부식은 사대주의 유학자라기 보다는 당시 기득권 전쟁에서 피아를 확실히 구분한 철저한 현실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다는데, 어쨌거나 [삼국사기]는 우리 역사에서 가장 오래된 '정사' 역사서다.


탁월한 저자에 비교할 바는 못되지만 '나도 이 정도  수준의 내 맘대로 서평을 쓸 수 있을까?' 싶어 나름대로 톺아보았는데 춘추시대 오나라의 대장부 오자서의 말마따나 '아직 갈 길은 멀기만 한데 해는 저물고(日暮途遠)' 있으니, 더욱 박차를 가해 '고전'을 열심히 읽고 나의 '일가지언'을 조금이라도 실천하기 위해 더욱 정진해야겠다는 생각을 한다. 
혹시 글쓰기로 이 세상에서 '일가지언'은 결국 이룰 수 없을지라도 난 어느덧 이미 사마천이 [사기]를 완성하기 위해 살아남고자 치욕을 무릅쓰고 궁형을 자처했던 나이인 '불혹(不惑)'의 끝줄 마흔아홉이고, 
중국을 최초로 전국통일했던 진시황이 불로장생을 꿈꾸며 자신이 닦은 고속도로로 전국 순행 중 급사한 나이이자 최봉수 선생의 이 책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2022)가 콕집은 '지천명(知天命)'의 나이 오십을 앞두고 있으니 말이다.

온갖 조작 투성이로 보이는 [일본서기]와 영문과 다닌 덕에 대략 주워들은 '그리스 3대 비극'은 원전으로 읽을 마음이 아직은 눈꼽만치도 없다.
그러나, 오십줄에 들어설 즈음까지 서양 최초의 역사가라는 그리스 작가 헤로도토스의 [역사], 그리고 토머스 불핀치의 [그리스-로마 신화] 및 에디스 해밀턴의 [Mythology]의 모티브가 된 로마 시인 오비디우스의 [변신이야기] 두 고전은 꼭 읽고 '내 맘대로 서평'을 써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최봉수 선생만큼의 내공에는 미치지 못할지라도 '고전'에 대한 '서평'을 앞으로 더 그럴듯하게 잘 써보겠다는 쉽지 않은 목표로 삼아서 말이다.

'고전(古典)'을 통해 인간 보편의 문제를 읽어내는 저자 최봉수 선생의 내공 또한, 
그가 '화수분'으로 비유하는 '고전(古典)' 자체가 지니는 무한한 내공이 원천이다.

***

- [오십, 고전에서 역사를 읽다], 최봉수, <가디언>,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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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의 기원 드디어 다윈 1
찰스 로버트 다윈 지음, 장대익 옮김, 최재천 감수, 다윈 포럼 기획 / 사이언스북스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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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생명은 처음에 창조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여러가지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는 견해, 그리고 이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계속해서 돌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매우 아름답고 놀라우며 무한한 형태로 수없이 생겨나고 또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생명관)에는 '장엄한 점(장엄미)'이 있다."
- [종의 기원], <15. 요약과 결론>, 찰스 다윈, 1859.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 1809~1882)이 1859년에 [종(種)의 기원(起源)]을 출간했을 때는 사실 '진화론'이라는 것의 첫 출현은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신이 세상만물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의 시대였지만 칼 폰 린네 같은 생물학자들이 생물 분지학 및 계통분류학을 정립했고, 라마르크와 같은 초기 '진화론자'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후 본격적으로 열린 '진화론'의 세계는 생명체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다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에이브리엄 링컨과 같은해 같은날 태어난 찰스 다윈은, 링컨이 미국 전근대식 흑인노예들을 근대식 노동자계급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생물학을 신의 '초자연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도 하는데([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이는 물리학에서 아이작 뉴턴의 '중력 이론'이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이룬 '과학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생물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로서의 '진화' 사실과 이러한 유구한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서 '자연선택'([종의 기원], <4.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아직 '화석'이라는 주요 증거가 많이 발견되지 못했고 고생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주류 '창조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종의 기원]의 원제는 '자연선택 방식에 의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다윈은 비록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생명체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이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다"고 [종의 기원] <머리말>과 <15장 요약과 결론>에서 강조한다. 새로운 객관적 '증거'에 의해 반박되고 만약 오류가 드러나면, 즉 다윈이 "... 유익한 개체적인 차이와 변이의 보존 및 자기에게 유해한 형질을 가진 생물은 멸망된다는 것"([종의 기원], <4>)을 의미하는 '자연선택'이나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 외에 다른 '진화'의 요인이 발견되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임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당시 '화석'과 고생물학의 발전이 더딘 관계로 '인간'의 '진화'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다윈은 '중력'과 같은 자명한 '사실' 못지않게 생명의 '진화' 사실 자체에는 '장엄미'가 있다는 감탄과 함께 [종의 기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미국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최근의 '화석' 발굴 결과에 맞춰 수정해가면서 발표한 [화석은 말한다]라는 책에서 아직도 미국의 정치권 및 교육계에 만연한 '창조론'을 최근 화석과 고생물학의 증거를 토대로 강력 반박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들을 토대로 잠정적 '가설'들을 세우지만 새로운 증거들에 의한 '실험' 및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미련없이 폐기되는 '잠정적 가설'인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진화론'에 기반하여, 온통 '도그마'로 점철된 '창조론'을 박살내는 과학자 프로세로의 이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1878)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못지 않게 다분히 논쟁적이다. 프로세로에 의해 '창조과학'은 논리로도 부정되고 '창조과학자'들은 인격적으로도 모독된다. 단, '창조론' 또한 하나의 '의견'이기에 '민주적'으로는 존중될 수는 있으나 '창조론'이 증거도 공부도 과학훈련도 없이 감히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ID : Intelligent Design)' 같은 '과학'적 외피를 둘렀을 때는 '과학적'으로 무참하게 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과학자'인 프로세로 또한 생명의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다. 이는 '중력'이 왜 발생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논하자면, '진화'는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에 가깝다. 실제로 초기 '진화론자'들은 신을 믿는 자들이었고 [화석은 말한다]의 저자인 프로세로도 교회에 다니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즉, '진화론자'라고 해서 '무신론자'는 아니다. 다만, '과학'도 아니면서 감히 '과학'을 참칭하는 '창조과학'은 쌍욕을 들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분히 '미국'적인 시각에서 '창조론'이 끼치는 해악으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면모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공화당 트럼프와 같은 인종주의 등을 예로 들며 '창조론'이 미국의 정치권과 교육계에 더이상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결론'([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으로 남기고 있다.


"다윈의 책([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오고 불과 두 해 뒤인 1861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졸른호펜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이 하나 발견되었다... 대영박물관 학예사였던 리처드 오언(Richard Owen)-'공룡(Dinosauria)'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화석을) 서술할 책임을 맡았다. 그보다 앞서 그 표본은 이미 '시조(始祖)새'(Archeopteryx : '고대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오언도 기본적으로 그걸 '새'라고 서술하기는 했으나, '공룡'이 가진 모든 형질들이 그 골격에 담겨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명한 생물학자 가운데에서 '진화론'에 반발한 마지막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언은 이 화석을 그 친척(공룡)들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언의 맞수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이 무렵에 그는 '다윈의 불독'이 되어 말과 글로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시조새'에서 보이는 그 '공룡' 형질들을 놓치지 않았다. 현생 조류를 처음으로 해부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자 콤프소그나투스 같은 공룡도 여럿 연구한 헉슬리는 '시조새'가 '새'와 '공룡'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빠진 고리'임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
- [화석은 말한다], <12. 공룡이 진화하다. 그리고 하늘을 날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그렇다고 해서 프로세로의 책 [화석은 말한다]가 비난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진화론'의 사실적 정당함을 '잠정적'으로나마 증명하는 '과학책'인만큼 흥미로운 '화석'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은 <1부. 진화와 화석 기록>에서 '증거'로 세워지고 수정되며 과감하게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로서의 '과학적 지식'의 본성(1장)'과 '창조과학'의 허위성(2장), '화석'의 의미(3장)와 '진화생물학'의 발전과정 등(4~5장)에 관하여 서술하고, 
<2부. 화석은 진화를 말한다>를 통해 5억년 전 '생명의 기원들(6장)'과 5억5천만년 전 고생대 초 '캄브리아기 대진화'라는 '폭발'이라기 보다는 미생물에서부터 시작된 8천만년 동안의 점진적이고 '느린 도화(7장)' 과정을 거쳐 '무척추동물(8장)'로부터 '물고기(9장)',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10장)'와 '양막류(11장)'와 같이 '땅 위로 올라오거나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로 이어지는 생명체 '진화'의 과정, 중생대의 '공룡과 조류(12장)', 백악기 말기부터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으로 폭발적 진화를 이룬 '포유류(13장)'와 거대 '말굽동물(14장)'인 유제류(有蹄類)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유인원의 반영(15장)'으로서 인류의 '진화사'를 돌아보며 '결론(16장)'으로 치닫는다.

과연 이 '진화사'의 '장엄'한 과정은 '창조과학'의 허위성을 밝혀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서 '화석'의 역사다. 라틴어로 명명된 온갖 학명들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 5억년 이상의 '장엄'한 역사에서 '진화'라는 것이 '사다리'처럼 직선적 변화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이 우거진 광경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다윈의 '진화론'을 '점진적'인 과정으로 정의하고 옹호하던 '신다윈주의'도 있었지만 이는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원래의 학설을 신비화시키거나 보수적으로 해석했던 경향이었다. 다윈 '진화론'의 본질은 '진화의 덤불' 속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혁명'적 '진화'의 과정이었다. 
고대 해양 '미생물'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하고, 바다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오거나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도, 공룡이 조류로 변신하는 과정 및 포유류와 인류의 폭발적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 모두는 '사다리'처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은 공존과 공생의 과정이었다.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10.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도널드 프로세로, 2017.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은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지만 변화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종의 기원], <머리말>과 <15. 요약과 결론>)라고 강조했듯, 2017년의 도널드 프로세로도 현대판 [종의 기원]인 [화석은 말한다]에서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화석은 말한다], <10장>부터 <16장>까지)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화석 진화의 '중간 단계'를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진화는 예를 들어 6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 및 1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사다리'처럼 이어진 것은 아니다. 6천만년 전까지 2억년 동안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공룡이 대멸종을 맞고 중생대(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가 끝난 후 신생대 초기인 팔레오세에서 '진화 방산'을 시작한 소과 말과인 '말굽동물(유제류)'이 '덤불'처럼 분화하고 에오세에 개과 동물이, 올리고세에 고양이과 동물들이 분화 방산된 과정 자체도 '사다리'처럼 곧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었다. 고래의 조상인 '암불로케투스'도 3천만년 전 올리고세에 바로 고래로만 진화한 것은 아니고 고래와 가장 비슷한 친척인 하마로 '덤불'처럼 분화했다. 인류 또한 600~700만년 전 지금은 '투마이(Toumai)'로 불린 화석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와 320만년 전 '최초의 인간 루시(Lucy)'로 불린 화석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진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 방식의 폭발적 '진화 방산'이었다. 오늘날 밝혀졌다시피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은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이 아니라 동시대 유라시아에서 공존했다. 4만5천년 전 아프리카 더운 지역에 살던 사피엔스가 추운 북쪽 유라시아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두 종은 9천년 이상 공존하며 이종교배도 한 결과 현대인의 3% 정도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역시 '직립인간'인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도구인간'인 '하빌리스(Homo habilis)' 또한 '사다리' 형태가 아니라 190만년 전부터 3만년 전까지 '덤불'처럼 퍼져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피엔스'와의 '사회성' 경쟁에서 밀렸을 수도 있을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을지라도 '에렉투스'가 '하빌리스'를 경쟁에서 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세로에 의하면 "사람족 가운데에서 (180만년 이상 존속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처음으로 널리 퍼진 종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번성하고 가장 오래 존재한 종에 해당"([화석은 말한다], <15장>)한다고 하는데, 46억년 지구의 역사와 5억년 이상의 생명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제 겨우 10~20만살 정도 되는 '사피엔스'가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덤불'과도 같은 '장엄'한 '진화사'에 담겨 있다. 

도날드 프로세로의 다분히 논쟁적이지만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화석' 정보로 가득한 이 책 [화석은 말한다]의 원제는 '진화 : 화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것이 중요한 점(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이다. 즉, '과학적 가설'은 객관적 '사실' 및 '증거'로 인해 언제든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이기는 하나, '창조과학'처럼 '과학'도 아니면서 '증거'와 '사실'까지 조작하는 도그마와 달리 '사실'과 '증거'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지적 훈련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던 19세기와 달리 20~21세기 현대는 '진화'를 증거하는 '화석'들은 아주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리고 미지의 '화석' 증거에 의해 '진화론'이라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 자체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화석'의 객관적인 '증거'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명체의 '진화' 자체는 '중력' 못지 않게 자명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화석'이 지금껏 우리에게 '말'하는 것(What the fossils say)이 바로 이 '진화(evolutio)'의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중요(Why it matters)'한 것이다.


"... '과학적 가설'이란 반드시 시험 가능하고 반증 가능해야 하며, '과학자'들은 제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잘못임을 '데이터'가 보여주면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요점은, '과학'은 '이념'에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며, 정치지도자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진실을 억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 도널드 프로세로, 2017.

***

1.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2. [종(種)의 기원(起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 Charles R. Darwin, 김창한 옮김, <집문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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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
도널드 R. 프로세로 지음, 류운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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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생명은 처음에 창조주에 의해 소수의 또는 하나의 형태로, 여러가지 능력과 함께 불어넣어졌다는 견해, 그리고 이 지구가 확고한 중력의 법칙에 의해 계속해서 돌고 있는 동안에, 그렇게 단순한 발단에서 매우 아름답고 놀라우며 무한한 형태로 수없이 생겨나고 또 지금도 생겨나고 있다는 견해(생명관)에는 '장엄한 점(장엄미)'이 있다."
- [종의 기원], <15. 요약과 결론>, 찰스 다윈, 1859.


찰스 다윈(Charles Robert Darwin : 1809~1882)이 1859년에 [종(種)의 기원(起源)]을 출간했을 때는 사실 '진화론'이라는 것의 첫 출현은 아니었다. 당시는 아직 신이 세상만물을 만들었다는 '창조론'의 시대였지만 칼 폰 린네 같은 생물학자들이 생물 분지학 및 계통분류학을 정립했고, 라마르크와 같은 초기 '진화론자'들도 이미 있었다. 그러나 과학사에서 다윈의 [종의 기원] 발표 후 본격적으로 열린 '진화론'의 세계는 생명체가 '신의 법칙'이 아니라 '자연법칙'에 따른다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에이브리엄 링컨과 같은해 같은날 태어난 찰스 다윈은, 링컨이 미국 전근대식 흑인노예들을 근대식 노동자계급으로 '해방'시킨 것처럼 생물학을 신의 '초자연적 구속'으로부터 '해방'시켰다고도 하는데([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이는 물리학에서 아이작 뉴턴의 '중력 이론'이나 앨버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 이론' 등이 이룬 '과학혁명'에 비견될 수 있다. 생명체의 역사에서 생물이 변화해 왔다는 '증거'로서의 '진화' 사실과 이러한 유구한 '진화'가 일어나는 방식으로서 '자연선택'([종의 기원], <4.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이라는 메커니즘을 밝히는 다윈의 [종의 기원]은 아직 '화석'이라는 주요 증거가 많이 발견되지 못했고 고생물학의 발전이 이루어지지 못한 상황에서 주류 '창조론'의 비웃음을 사기도 했지만, 의심할 여지 없는 생물학의 '혁명'이었다. 
[종의 기원]의 원제는 '자연선택 방식에 의한 종의 기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이다. 다윈은 비록 '자연선택(natural selection)' 또는 '적자생존'의 법칙이 생명체 '진화'의 역사에서 "가장 중요한 변이의 방법이기는 하지만, 유일한 방법도 아니라는 것도 확신하고 있다"고 [종의 기원] <머리말>과 <15장 요약과 결론>에서 강조한다. 새로운 객관적 '증거'에 의해 반박되고 만약 오류가 드러나면, 즉 다윈이 "... 유익한 개체적인 차이와 변이의 보존 및 자기에게 유해한 형질을 가진 생물은 멸망된다는 것"([종의 기원], <4>)을 의미하는 '자연선택'이나 '자연도태' 또는 '적자생존' 외에 다른 '진화'의 요인이 발견되면 언제든 폐기될 수 있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임을 재차 강조한 것이다.
당시 '화석'과 고생물학의 발전이 더딘 관계로 '인간'의 '진화'에 관해서는 본격적으로 다룰 수는 없었지만, 다윈은 '중력'과 같은 자명한 '사실' 못지않게 생명의 '진화' 사실 자체에는 '장엄미'가 있다는 감탄과 함께 [종의 기원]을 마무리하고 있다.


"'중력'이 일어나는 방식을 우리는 아직도 정확히는 알지 못한다. 그래도 물체가 땅으로 떨어진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진화'가 어떤 식으로 일어나는지 어쩌면 완전히는 알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래도 생명은 계속 '진화'하고 있다... '진화'를 설명하는 이론은 '신다윈주의'가 전부는 아니다. '진화'는 과거에도 일어났고 바로 지금도 일어나고 있다."
- [화석은 말한다], <4. 진화론의 진화>, 도널드 프로세로, 2017.


미국의 고생물학자이자 지질학자인 도널드 프로세로(Donald R. Prothero)는 2007년부터 2017년까지 최근의 '화석' 발굴 결과에 맞춰 수정해가면서 발표한 [화석은 말한다]라는 책에서 아직도 미국의 정치권 및 교육계에 만연한 '창조론'을 최근 화석과 고생물학의 증거를 토대로 강력 반박하고 있다. 객관적 증거들을 토대로 잠정적 '가설'들을 세우지만 새로운 증거들에 의한 '실험' 및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미련없이 폐기되는 '잠정적 가설'인 '과학'적 지식으로서의 '진화론'에 기반하여, 온통 '도그마'로 점철된 '창조론'을 박살내는 과학자 프로세로의 이 책은 엥겔스의 [반뒤링론](1878)이나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못지 않게 다분히 논쟁적이다. 프로세로에 의해 '창조과학'은 논리로도 부정되고 '창조과학자'들은 인격적으로도 모독된다. 단, '창조론' 또한 하나의 '의견'이기에 '민주적'으로는 존중될 수는 있으나 '창조론'이 증거도 공부도 과학훈련도 없이 감히 '창조과학'이나 '지적설계(ID : Intelligent Design)' 같은 '과학'적 외피를 둘렀을 때는 '과학적'으로 무참하게 깨져야 한다는 주장이다.

물론, '과학자'인 프로세로 또한 생명의 '진화'가 왜 일어나는지 알 수는 없다. 이는 '중력'이 왜 발생하는지 알 수 없는 것과 같다. 따라서 엄밀하게 '과학'적으로 논하자면, '진화'는 '이론(theory)'이라기 보다는 '사실(fact)'에 가깝다. 실제로 초기 '진화론자'들은 신을 믿는 자들이었고 [화석은 말한다]의 저자인 프로세로도 교회에 다니는 전형적인 '미국인'이다. 즉, '진화론자'라고 해서 '무신론자'는 아니다. 다만, '과학'도 아니면서 감히 '과학'을 참칭하는 '창조과학'은 쌍욕을 들어 마땅하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 다분히 '미국'적인 시각에서 '창조론'이 끼치는 해악으로 미국 사회의 '반지성주의'적 면모인 기독교 근본주의와 공화당 트럼프와 같은 인종주의 등을 예로 들며 '창조론'이 미국의 정치권과 교육계에 더이상 개입하지 못하도록 해야 한다는 강력한 메시지를 '결론'([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으로 남기고 있다.


"다윈의 책([종의 기원])이 세상에 나오고 불과 두 해 뒤인 1861년, 독일 남부 바이에른주 졸른호펜의 석회암 채석장에서 놀라운 화석이 하나 발견되었다... 대영박물관 학예사였던 리처드 오언(Richard Owen)-'공룡(Dinosauria)'이라는 이름을 지은 사람-이 (이 화석을) 서술할 책임을 맡았다. 그보다 앞서 그 표본은 이미 '시조(始祖)새'(Archeopteryx : '고대의 날개')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고, 오언도 기본적으로 그걸 '새'라고 서술하기는 했으나, '공룡'이 가진 모든 형질들이 그 골격에 담겨있음을 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저명한 생물학자 가운데에서 '진화론'에 반발한 마지막 인물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오언은 이 화석을 그 친척(공룡)들과 결부시키려 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언의 맞수였던 토머스 헨리 헉슬리(Thomas Henry Huxley)-이 무렵에 그는 '다윈의 불독'이 되어 말과 글로 다윈의 이론을 지지하고 있었다-는 '시조새'에서 보이는 그 '공룡' 형질들을 놓치지 않았다. 현생 조류를 처음으로 해부학적으로 연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이자 콤프소그나투스 같은 공룡도 여럿 연구한 헉슬리는 '시조새'가 '새'와 '공룡' 사이를 이어주는 훌륭한 '빠진 고리'임을 놓치지 않고 알아보았다."
- [화석은 말한다], <12. 공룡이 진화하다. 그리고 하늘을 날다>, 도널드 프로세로, 2017.


그렇다고 해서 프로세로의 책 [화석은 말한다]가 비난으로만 일관하고 있는 책은 아니다. '진화론'의 사실적 정당함을 '잠정적'으로나마 증명하는 '과학책'인만큼 흥미로운 '화석' 이야기를 풍부하게 담고 있다.

이 책은 <1부. 진화와 화석 기록>에서 '증거'로 세워지고 수정되며 과감하게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로서의 '과학적 지식'의 본성(1장)'과 '창조과학'의 허위성(2장), '화석'의 의미(3장)와 '진화생물학'의 발전과정 등(4~5장)에 관하여 서술하고, 
<2부. 화석은 진화를 말한다>를 통해 5억년 전 '생명의 기원들(6장)'과 5억5천만년 전 고생대 초 '캄브리아기 대진화'라는 '폭발'이라기 보다는 미생물에서부터 시작된 8천만년 동안의 점진적이고 '느린 도화(7장)' 과정을 거쳐 '무척추동물(8장)'로부터 '물고기(9장)',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10장)'와 '양막류(11장)'와 같이 '땅 위로 올라오거나 바다로 돌아간 동물'들로 이어지는 생명체 '진화'의 과정, 중생대의 '공룡과 조류(12장)', 백악기 말기부터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으로 폭발적 진화를 이룬 '포유류(13장)'와 거대 '말굽동물(14장)'인 유제류(有蹄類)의 진화 과정을 설명한다. 마지막으로 '유인원의 반영(15장)'으로서 인류의 '진화사'를 돌아보며 '결론(16장)'으로 치닫는다.

과연 이 '진화사'의 '장엄'한 과정은 '창조과학'의 허위성을 밝혀내는 객관적이고 '과학'적인 증거로서 '화석'의 역사다. 라틴어로 명명된 온갖 학명들은 몰라도 상관없다. 그저 이 5억년 이상의 '장엄'한 역사에서 '진화'라는 것이 '사다리'처럼 직선적 변화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이 우거진 광경이라는 점만 기억하면 된다. 다윈의 '진화론'을 '점진적'인 과정으로 정의하고 옹호하던 '신다윈주의'도 있었지만 이는 이른바 '신플라톤주의'와 같이 원래의 학설을 신비화시키거나 보수적으로 해석했던 경향이었다. 다윈 '진화론'의 본질은 '진화의 덤불' 속에서 폭발적으로 퍼져나간 '혁명'적 '진화'의 과정이었다. 
고대 해양 '미생물'이 '무척추동물'로 진화하고, 바다 물고기가 지상으로 올라오거나 다시 바다로 돌아가는 과정도, 공룡이 조류로 변신하는 과정 및 포유류와 인류의 폭발적 '진화 방산(evolutionary radiation)' 모두는 '사다리'처럼 직선적 과정이 아니라 '덤불'과도 같은 공존과 공생의 과정이었다.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
- [화석은 말한다], <10. 물 밖으로 나온 물고기>, 도널드 프로세로, 2017.


1859년에 찰스 다윈이 "자연선택은 변화의 중요한 요인이지만 변화의 유일한 수단은 아니다"([종의 기원], <머리말>과 <15. 요약과 결론>)라고 강조했듯, 2017년의 도널드 프로세로도 현대판 [종의 기원]인 [화석은 말한다]에서 "진화는 덤불이지 사다리가 아니다"([화석은 말한다], <10장>부터 <16장>까지)라고 수차례 강조하고 있다.

'창조론자'들은 '진화론자'들을 공격하기 위해 화석 진화의 '중간 단계'를 끊임없이 요구하지만, 진화는 예를 들어 600만년 전 '오스트랄로피테쿠스'에서 70만년 전 '호모 에렉투스'를 거쳐 5만년 전 '네안데르탈인' 및 1만년 전 '호모 사피엔스'로 '사다리'처럼 이어진 것은 아니다. 6천만년 전까지 2억년 동안 이상 지구를 지배했던 거대 공룡이 대멸종을 맞고 중생대(트라이아스기-쥐라기-백악기)가 끝난 후 신생대 초기인 팔레오세에서 '진화 방산'을 시작한 소과 말과인 '말굽동물(유제류)'이 '덤불'처럼 분화하고 에오세에 개과 동물이, 올리고세에 고양이과 동물들이 분화 방산된 과정 자체도 '사다리'처럼 곧은 직선의 과정이 아니었다. 고래의 조상인 '암불로케투스'도 3천만년 전 올리고세에 바로 고래로만 진화한 것은 아니고 고래와 가장 비슷한 친척인 하마로 '덤불'처럼 분화했다. 인류 또한 600~700만년 전 지금은 '투마이(Toumai)'로 불린 화석인 '사헬란트로푸스 차덴시스(Sahelanthropus tchadensis)'와 320만년 전 '최초의 인간 루시(Lucy)'로 불린 화석인 '오스트랄로피테쿠스 아파렌시스(Australopithecus afarensis)'의 진화 '사다리'가 아니라 '덤불' 방식의 폭발적 '진화 방산'이었다. 오늘날 밝혀졌다시피 '네안데르탈인(Homo neanderthalensis)'은 '사피엔스(Homo sapiens)의 '조상'이 아니라 동시대 유라시아에서 공존했다. 4만5천년 전 아프리카 더운 지역에 살던 사피엔스가 추운 북쪽 유라시아에 살던 네안데르탈인의 영역으로 이주하여 두 종은 9천년 이상 공존하며 이종교배도 한 결과 현대인의 3% 정도는 호모 사피엔스보다 네안데르탈인의 형질을 가지고 있다고도 한다. 역시 '직립인간'인 '에렉투스(Homo erectus)'와 '도구인간'인 '하빌리스(Homo habilis)' 또한 '사다리' 형태가 아니라 190만년 전부터 3만년 전까지 '덤불'처럼 퍼져 공존했을 가능성이 있다. '사피엔스'와의 '사회성' 경쟁에서 밀렸을 수도 있을 '네안데르탈인'과 같은 운명은 아니었을지라도 '에렉투스'가 '하빌리스'를 경쟁에서 밀어냈는지는 모르지만 프로세로에 의하면 "사람족 가운데에서 (180만년 이상 존속했던) 호모 에렉투스는 처음으로 널리 퍼진 종이었을 뿐 아니라, 가장 번성하고 가장 오래 존재한 종에 해당"([화석은 말한다], <15장>)한다고 하는데, 46억년 지구의 역사와 5억년 이상의 생명체 '진화'의 과정 속에서 이제 겨우 10~20만살 정도 되는 '사피엔스'가 더욱 겸손해야 할 이유가 바로 이 '덤불'과도 같은 '장엄'한 '진화사'에 담겨 있다. 

도날드 프로세로의 다분히 논쟁적이지만 매우 유익하고 재미있는 '화석' 정보로 가득한 이 책 [화석은 말한다]의 원제는 '진화 : 화석이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것이 중요한 점(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이다. 즉, '과학적 가설'은 객관적 '사실' 및 '증거'로 인해 언제든 폐기될 수도 있는 '잠정적 가설'이기는 하나, '창조과학'처럼 '과학'도 아니면서 '증거'와 '사실'까지 조작하는 도그마와 달리 '사실'과 '증거' 자체를 매우 중시하는 지적 훈련 과정이라는 것이다. 
다윈이 [종의 기원]을 발표하던 19세기와 달리 20~21세기 현대는 '진화'를 증거하는 '화석'들은 아주 풍부하다 못해 차고 넘친다. 그리고 미지의 '화석' 증거에 의해 '진화론'이라는 '잠정'적인 '과학적 가설' 자체가 폐기되거나 수정될 수도 있겠지만, 현재까지 발견된 '화석'의 객관적인 '증거'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생명체의 '진화' 자체는 '중력' 못지 않게 자명한 '사실'이라는 점이다.

'화석'이 지금껏 우리에게 '말'하는 것(What the fossils say)이 바로 이 '진화(evolutio)'의  '사실'이다.
그것이 바로 '중요(Why it matters)'한 것이다.


"... '과학적 가설'이란 반드시 시험 가능하고 반증 가능해야 하며, '과학자'들은 제 아무리 소중히 여기는 생각이 있다 할지라도 그게 잘못임을 '데이터'가 보여주면 기꺼이 포기해야 한다는 것... 여기서 요점은, '과학'은 '이념'에 무릎을 꿇을 수 없으며, 정치지도자들을 즐겁게 할 목적으로 진실을 억지로 훼손할 수 없다는 것이다."
- [화석은 말한다], <16. 무엇이 중요한가?>, 도널드 프로세로, 2017.

***

1. [화석은 말한다 - 화석이 말하는 진화와 창조론의 진실(EVOLUTION : What the Fossils Say and Why It Matters)](2017), Donald R. Prothero, 류운 옮김, <바다출판사>, 2019.
2. [종(種)의 기원(起源)(Origin of Species by Means of Natural Selection)](1859), Charles R. Darwin, 김창한 옮김, <집문당>,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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