풍기농서 - 이름 없는 영웅들의 비밀 첩보 전쟁
마보융 지음, 양성희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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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서에 바람이 인다
- [풍기농서], 마보융, 2017.


"장무 3년(223년) 봄 2월, 승상 제갈량이 성도에서 영안(백제궁)으로 왔다... 유비는 질병이 심해지자 승상 제갈량에게 아들을 부탁하고 상서령 이엄(이평)에게 보좌하도록 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선주전', 3세기.

"장무 3년(223년) 봄, 유비는 영안에서 병세가 위중하므로 성도에서 제갈량을 불러와 뒷일을 부탁했다. 유비는 제갈량에게 말했다. 
'당신 재능은 조비의 열 배는 되니 틀림없이 나라를 안정시키고, 끝내는 큰 일을 이룰 것이오. 만일 나의 후계자(유선)가 보좌할 만한 사람이면 그를 보좌하고, 그가 재능이 없다면 당신이 스스로 나라를 취하시오.'
제갈량이 눈물을 흘리며 말했다.
'신은 감히 온 힘을 다하여 충정의 절개를 바치며 죽을 때까지 이어 가겠습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3세기.

"장무 3년(223년)에 유비의 질병이 악화되자, 이엄(이평)은 제갈량과 함께 어린 유선을 보좌하라는 유조를 받았다. 이엄을 중도호로 삼고 안팎의 군사를 통솔하여 영안에 주둔하게 했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이엄전', 3세기.


관우를 죽인 오나라에 복수하기 위해 벼르던 중 장비까지 어이없이 죽자, 이성을 잃고 출정했다가 이릉에서 대패하고 영안의 백제성에 틀어박힌 유비는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못했다. 
한나라의 부흥을 명분으로 '백절불요'(진수, [정사 삼국지])의 삶을 질기게 이어오다가 파촉의 구석에서 기어이 황제가 되었으나 그 영웅의 최후는 북벌에 바쳐진 것이 아니라 의형제간의 의리에 바쳐졌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를 읽든,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읽든 '백절불요(百折不撓)'의 영웅 유비도, 유비와 본인을 천하의 진짜 두 영웅이라 떠보았다던(나관중, [삼국연의]) '시대를 초월한 영웅'(진수, [정사 삼국지]) 조조도, 삼국지 최후의 승자 사마의까지 그 모든 난세의 군웅들이 내게는 만만해 보였다. 그리고 무수한 선학들이 내린 평가에 나 또한 세치혀와 고사리손가락을 얹으며 그들을 평가해댔다. 물론 나 개인적으로 군주든 제후든 주군이든 낡아빠진 권력관계를 싫어해서이기도 하지만 우리가 아는 '삼국지'에 그들 말고는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나는 "중국역사의 원동력은 농민반란이다"라는 사회주의 혁명가 마오쩌뚱의 계급투쟁론에 동조하며 후한말 당시 황건농민반란에 주목하고 썩은 한나라를 무너뜨린 건 대다수 농민과 민중계급이라 본다. 위나라 조조 가문이든 촉한의 유비든 강동의 손씨든 민란의 거대한 바람에 올라탔다.
고대 삼국의 군웅들이 대규모 농민반란군을 진압한다는 명분으로 그 바람을 따라 갔다면, 대중민주주의가 정착된 현대의 우리 역사에서 주기적인 전국적 시위와 항쟁 후 민주당이라는 세력은 그 바람에 편승한 점만 다를 뿐. 
고대의 사회적 '군주'는 '황제'였지만, 현대의 '군주'는 다수 '민중'이기 때문이다.

민중반란이라는 계급투쟁의 거대한 바람에 숟가락 빨며 올라탄 이들은 사실, 낡은 체제를 결코 바꾸지 않는다. 황건농민반란은 세상을 뒤엎고 싶었겠지만,'황건적'을 진압하기 위해 조직된 '17로 제후연합군'은 후한 '황제'를 보위한다는 명분으로 당시 실권자 동탁을 쳤다.
현실의 정치적 영웅들은 혁명적 전환의 시대적 요구에도 '혁명'을 '개혁'으로 포장하며 오히려 본인 당파의 기득권을 공고히 한다. 결과적으로 낡은 체제는 전환은 커녕 그들에 의해 더욱 강화된다. 

2016년 촛불항쟁의 바람에 편승한 민주당 정권이 또 다시 그랬다. 역사에서 사라졌어야 할 국힘당 파시스트들이 굳이 자본가 정권이라고 할 것 없다. 민주당 정권도 그에 못지 않은 철저한 자본가 정권이었다.

역시, 후한말 황건농민반란의 난세에 군웅할거하다가 권력을 쥔 이 영웅들 또한 낡은 한나라의 군주제를 바꿀 수는 없었다. 그럼에도 굳이 구분하자면 조조의 위나라는 한나라의 건국초기 '약밥삼장'으로부터 갈수록 복잡해진 법체계나 낡은 제도 등을 개혁하기는 했다. 이는 유가와 법가를 아우르는 조조의 실용성에 기인한다. 사마의는 조조의 방식을 그대로 따랐을 뿐이다. 한편으로 촉한의 유비는 오로지 하나의 슬로건 뿐이었다.

"모든 것이 한나라 부흥을 위한 것!"
- [풍기농서], 마보융, 2007.



"[풍기농서]에... 등장하는 음모는 당연히 팩트가 아니다. 실존 인물과 실제 사건을 이용한 공상일 뿐이다. 나는 전혀 다른 세상의 관점에서 이중적으로 해석할 수 있는 새로운 가능성을 제기한 것이다. 이 가능성은 역사적 사실과 거리가 멀지만 아주 흥미롭다. 역사적 사실은 영원히 변하지 않지만 그 내막에는 수많은 가능성이 존재한다. [다빈치 코드]는 명화에 얽힌 사소한 에피소드를 아주 그럴싸한 천 년의 전설로 만들었다. 많은 사람들이 그것이 공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 안의 세계에 푹 빠지지 않았던가?"
- [풍기농서], <후기 1>, 마보융, 2007.


중국의 젊은 작가(중년이지만 나보다 젊다) 마보융의 첫소설 [풍기농서]의 부제는 <이름없는 영웅들의 비밀첩보전쟁>이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와 나관중의 [삼국연의]를 통해 알려진 역사적 사실 하나를 배경으로 삼아 댄 브라운의 [다빈치 코드]처럼 이야기를 꾸몄다. 주인공은 촉한의 창업자인 선제후 유비나 제갈량 등의 거물들이 아니라 위-촉-오를 넘나드는 가상의 간첩들과 이들을 색출하여 제거하려는 정보관리들이다.


"건흥 5년(227년), 제갈량이 군사들을 이끌고 북쪽 한중에 주둔...
건흥 6년(228년) 봄, (읍참마속 후) 겨울에 제갈량은 또 산관을 나와 진창을 포위했는데 위나라 대장군 조진이 이를 막았으며, 제갈량은 식량이 다 떨어져 돌아오고 말았다. 위나라 장수 왕쌍이 기병을 이끌고 제갈량을 뒤쫓아 왔는데, 제갈량은 그와 싸워 깨뜨리고 왕쌍의 목을 베었다.
건흥 9년(231년), 제갈량은 다시 기산으로 출격하였으며, 목우를 이용하여 군수물자를 실어 날랐는데 (이엄의 농단으로) 식량이 다 떨어져 군대를 물렸다. 위나라 장군 장합과 싸워 그를 활로 쏘아 죽였다."
- 진수, [정사 삼국지], <촉서>, '제갈량전', 3세기.


이야기는 회사원인 작가 마보융이 좋아하는 추리소설들의 중국식 '패러디'([풍기농서], <후기>)이라고는 하나 배경이 엄연한 역사적 사실이다.
[풍기농서]는 유비 사후 제갈량의 북벌을 큰 배경으로 삼고 228년(촉한 후주 건흥 6년) 위나라 장수 왕쌍의 죽음에서 시작하여 231년(건흥 9년) 역시 위나라 장군 장합의 죽음으로 끝난다. 그렇다고 위-촉 북벌전쟁의 주역들인 촉한의 강유와 조위의 장합 등 조조, 유비, 제갈량보다 한등급 아래 영웅들이 한중에서 벌인 치열한 전투 이야기는 아니다. 진수의 정사 [삼국지] <열전>에서 다루는 위나라 장군 장합, 촉나라 승상 제갈량 및 제갈량과 함께 유비로부터 후사를 부탁받은 탁고대신 이엄(이평) 등은 조연에 불과하다. 다만, 탁고대신 제갈량과 이엄(이평) 간의 촉한 최고 지고층 내부의 권력투쟁 과정에서 제갈량이 자신을 모함한 이엄을 탄핵하고 승리한 역사적 사실이 주요 배경이며 그 중간에 촉한 내부 양의와 위연의 알력 등의 역사적 양념이 뿌려졌다. 

마보융의 [풍기농서]는 이들이 주로 등장하던 제갈량의 4차 북벌 과정에서 암약한 것으로 그려지는 가상의 간첩들과 정보관들이 주인공이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물론 정보전 일체는 공상이고 픽션이다. 마치 댄 브라운의 소설 [다빈치 코드]에서 유일한 역사적 사실은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모나리자>를 그렸다는 것 하나 뿐인 것처럼. 그러나 촉한의 정보관 순후나 호충, 위나라에 파견된 촉나라 간첩 '흑제' 진공(두필)이나 촉나라에서 활동하는 이중간첩 '촉룡' 등의 특정 인물들이 가상인 것이지 전시의 그러한 첩보전쟁 상황까지 가상으로 보이진 않는다. 즉, 작가 마보융이 소설 <후기>에서 밝히듯 "삼국 역사 소설이 아니라 삼국 역사를 차용한 공상 소설"이기는 하나, 정사와 구전, 문헌과 기록에 없을 뿐 충분히 개연성 있는 이야기의 구성이다.



추리소설 형식이므로 내용 전개가 빠르다. 재미있기도 하여 하마터면 밤 꼬박 새며 다 읽을 뻔 한 걸 정신차리고 불을 껐다. 다음날 출근은 해야 하니까. 최근 읽은 재미진 소설을 하나 추천하라면 아마도 가장 먼저 떠오를 것 같고 조만간 마보융의 역사소설을 나도 모르게 더 찾아 읽을 것으로 예상된다.

다만, 한 가지 아쉬운 점은 주인공의 결론이 "모두 한나라의 부흥을 위해!"라는 것.
작가 마보융의 생각이라기 보다는 '촉한정통론'의 춘추필법을 따르는 [삼국연의]의 흐름을 따른 것으로 보인다. 작가가 주장하듯 "소설은 재미있어야" 하고 이를 위해서는 가장 대중적인 바람을 타야 하기 때문이겠다. 이 대풍의 흐름에서는 제갈량은 여전히 신적인 존재이고 황건농민군의 잔당 일파인 '오두미교'의 반란정신은 진압의 대상이거나 간첩들의 이용대상에 불과하다. 

즉, 재미있고 흥미로운 '촉한정통론'과 '삼국지영웅론'의 이야기 바람은 농서의 전장에서 쉴새없이 불어대나 그 바람에 민중은 없다. 더구나 가상의 소영웅들이 판치는 첩보전쟁에서 그 동안 만만했던 거물들은 더더욱 독자들과 멀어지고 거리감까지 생긴다.

결국, 농서에 부는 간첩들의 바람에는 '민중'도 '영웅'도 없다.
[풍기농서]의 이야기는 가상이지만 '민중'도 '영웅'도 없는 실제 현실을 본의 아니게 보여주는 소설같은 '리얼리즘'이 있다.

***

1. [풍기농서(風起隴西)](2007~2017), 마보융, 양성희 옮김, <RHK>, 2021.
2. [정사 삼국지 - 촉서](3세기), 진수, 김원중 옮김, <민음사>, 2007.
3. [조조 평전](2000) / [유비 평전](2004), 장쭤야오, 남종진 옮김, <민음사>, 2010~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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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찰 속 숨은 조연들 -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노승대 지음 / 불광출판사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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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를 접는 시간 - 2 : 2022년~


1.

오늘도 종이를 접는다.

A4 용지 긴면을 4등분하고 정사각형 대칭면만큼 재단하여 자르면 A4 한 장에 지폐와 같은 비율의 종이가 4장이 나오고 짜투리로 좀더 작은 걸 2장 더 얻을 수 있다. '동청룡(東靑龍)'을 접으려면 재단된 종이 '원자재'가 8~9장 필요하니 A4 2장 이상이 필요하다. '서백호(西白虎)'는 7장이니 A4 3장, '남주작(南朱雀)'도 7장이니 A4 2장, '북현무(北玄武)'는 5장이니 A4 2장으로 동서남북 '4방신(四方神)'을 다 접는데 A4 용지가 총 7장 필요하다. 7장으로 '원자재'를 재단 후 그 짜투리로 좀더 작은 걸 총 14장 남길 수 있으니, 동서남북 사신 한 세트를 완성하는데 A4 용지 총 7장이 필요하다. A4 용지 14장을 재단하여 사신 두 세트를 접으면 그 짜투리 28장으로 조금 작은 사신 한 세트를 더 만들 수 있다.
정리하면, A4 용지 14장이면 동서남북 사신 두 세트와 조금 작은 한 세트로 총 세 세트의 '사신(四神)'을 접어서 동서남북의 사방을 지킬 수 있다.

나는 마치,
미켈란젤로가 고전적인 조각의 원자재가 되는 대리석을 다듬듯,
하얀 A4 용지를 여러 장 재단해 두고,
마치 그 르네상스 거장이 돌 속에 숨은 영혼을 깨우듯,
지폐 크기의 하얀 종이를 조각하듯 접어댄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사신'을 접는다.


2.

작년 12월, 경기도 오산에서 홀로 자취를 시작했을 때는 '주간 문사철'에 올리는 서평이나 습작글들이 넘쳐났다. 매주 책 한 권 읽고 글 한 편 쓰는 '주간 문사철'을 넘어 퇴근 후 남아도는 혼자만의 시간으로 그 동안 미뤄두었던 온갖 어려운 책들을 거의 다 씹어먹고 나름의 서평으로 정리했다. 휴대폰에 미리 써 둔 것을 블로그에 저장했다가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한 편씩 다듬어서 브런치에 올렸다. 자취 전에는 한 주를 마무리하고 매주 금요일 밤이나 토요일 아침에 글을 쓰는 시간이 기다려지는 묘미가 있었는데 자취생활에서는 그런 재미는 좀 덜 했지만 그래도 매 시간시간이 온전히 책읽고 글쓰는 시간이라 좋았다.

그러던 어느날, 읽은 책과 써둔 글이 넘쳐난다는 생각에 다른 취미를 생각하다가 우연히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1984년 경부터 익혔던 종이접기가 생각났고 '인지(人紙)' 산업, 종이와 사람이 전부인 보험사 근무의 특징을 살려 A4 용지를 이용하여 오랫만에 종이접기를 해 보았다. 38년만에 접어보는데도 불구하고 신기하게 거의 전부 기억이 났다. 어려서 얼마나 접어댔으면 40년 가까이 손이 기억할까 싶었다. 그 손을 따라서 머릿속을 뒤져보니 오래전 종이접기 비법을 전하던 책의 도면이 무의식의 저 구석에 먼지를 뒤집어 쓴 채 이미지 파일로 저장되어 있는 듯 했다.

이후 정사각형으로 재단한 종이 한 장으로 필살기 6종을 접다가 더 난이도 높은 게 없나 싶어 유투브를 검색하던 중 'LQD'라는 베트남 유투버의 영상를 보고는 이번에는 외려 '이 어려운 걸 접는 게 과연 사람인가' 자문을 하며 자취방에서 시간가는 줄 모르고 따라 접었더니 어린 시절 알았던 1950년대 일본괴수 고질라와 킹기도라는 물론 '바하무트'라 불리는 루시퍼도 접게 되었다. 
마침내 서양의 드래곤(dragon)이 아닌 동양의 용(龍)을 필살기 10호로 마무리할 즈음, 새벽의 자취방으로 '사신(四神)'이 찾아왔다.

처음 자취를 시작할 때 며칠간 잠자리가 심히 뒤숭숭하여 동서남북 방향을 보았더니 서쪽으로 머리를 두고 잤음을 알았다. 
예로부터 북쪽은 춥고 어둡고 막혔으며 서쪽은 죽어나가는 자리라고 나는 배웠다. 우리 조선의 한양 사대문 중 북쪽의 숙정문은 아예 산으로 막혀서 사용하지도 않았고 서쪽의 돈의문은 노량진이나 마포 등지를 통해 들어온 서역의 신문물이 사대문 안으로 들어오는 관문인 한편 나갈 때는 이미 죽은 사람이 실려나가거나 사형수들이 나가 죽는 문이었다. 그래서 나는 머리를 남쪽으로 바꾸었는데 심리적인 이유겠으나 그 이후로 잠을 잘 자게 되었다. 아마도 자취생활에 적응하게 된 것이리라. 
해가 뜨는 동쪽도 길하지만 풍수지리 관점에서는 볕이 잘 드는 밝은 남쪽이 좋다. 왕은 항상 남면하는 상석에 앉았다. '배산임수(背山臨水)'도 그러한데 산을 중심으로 그 남쪽과 물을 중심으로 그 북쪽이 바로 그 밝은 땅이다. 그곳의 대표가 바로 '한양(漢陽)'이다. 무학대사가 삼각산 남쪽과 한강의 북쪽의 길한 지금의 서울 강북 땅을 지정했고 정도전이 성리학에서 사방을 지키는 덕목인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을 각 포스트로 삼아 신국가 조선의 수도로서 한양의 도시개발계획을 닦았다.
사대문의 동쪽 흥인지문과 서쪽의 돈의문, 남쪽의 숭례문과 북쪽의 숙정문은 각 동서남북의 '인의예지'를 상징한다. 북쪽의 꾀할 '정(靖)'은 꾀 '지(智)'와 같다. 서울 종각인 '보신각'의 '신(信)'은 중앙을 상징한다.

아무튼, 문득 나를 찾아온 '사신'을 떠올리며 베트남 유투버 'LQD'로부터 사사받은 용머리와 피닉스 머리, 호랑이 머리 및 각종 기괴한 다리와 발톱, 그리고 날개와 비늘 등의 기술을 응용하여 용과 봉황, 범과 거북까지 내처 완성하고 말았다. 서책을 멀리하여 '주간 문사철'이 거의 '까막눈' 수준까지 이르렀으나 손이 오래도록 기억할 수 있게 나는 홀로 끊임없이 접고 또 접었다. 그리고 완성된 작품들은 고마운 사람들에게 주었다. 그들이 나를 기억하기 위해 간직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으로 말이다. 또한 내가 수십년 후 지금은 거동을 거의 못하시는 연로한 내 아버지처럼 되었을 때, 눈도 침침하고 정신도 혼미하여 문자와도 멀어졌을 때, 손의 습관으로나마 고마운 사람들에게 접어서 건넬 수 있도록 한 살이라도 젊을 시간에 접고 또 접어대는지도 모른다. 한참을 이러고 나면 근 40년 후에도 정확하게 기억난 내 종이접기 필살기 1호처럼 나의 '사신'들 또한 나중에 한 30년이 지난 후에 어렴풋이 기억나도록.


3.

"사천왕은 원래 인도 재래의 민간신이었다. 수미산 높은 곳에 살며 제석천의 명을 받들어 중생의 세상을 지켜주는 호세신이자 방위신이었다. 불교가 일어나며 인도 재래의 신인 제석천이나 범천을 받아들였둣 사천왕도 불교에 흡수되어 부처님을 호위하고 불법을 지키는 신으로 변모한다."
- [사찰 속의 숨은 조연들], '2. 절집의 외호신-사천왕', 노승대, <불광출판사>, 2022.


연로하신 내 아버지가 앉아계신 서울 우리집 거실과 오산의 자취방, 사무실의 내 책상과 동료들을 지키는 '사신'은 음양오행과 도교의 신들이다. 

도교적 영향으로 유행한 '사신도'는 동쪽은 '청룡(靑龍)', 서쪽은 '백호(白虎)', 남쪽은 '주작(朱雀)', 북쪽은 '현무(玄武)'이며, 가운데는 '황룡(黃龍)'이다. 전설의 동물인 용과 봉황을 등장시켰으되 지상에서 가장 강한 호랑이와 가장 오래 사는 거북을 등장시킬 때도 '신화화'된 모습이다. 우리가 중고등학교 미술교과서에서 본 고구려 '사신도' 고분벽화의 표본은 진파리 고분이나 평양 대동강 서쪽의 강서대묘와 중묘다.

한편으로 오행'은 각기 '동서남북(東西南北)'과 '중앙(中央)'을 이른다. '동(東)'은 '목(木)'이요 '청(靑)색', '서(西)'는 '금(金)'이요 백(白)색', '남(南)'은 '화(火)'요 '적(赤)색', '북(北)'은 '수(水)'요 '흑(黑)색'이며, 만물을 낳는 '토(土)'는 '중앙(中央)'이요 '황(黃)색'이다. 위에서 말한 유교의 '인(仁)-의(義)-예(禮)-지(智)'와 '중앙'의 '신(信)'이며, 불교의 '사천왕(지국-광목-증장-다문)'과 '중앙'의 부처에 대비되는데, 각 방향에 색깔을 입히면 '도교'적 색채가 함께 입혀진다. 동쪽을 지키는 용은 청룡이며 지국천왕은 얼굴이 푸르다. 북쪽을 지키는 거북은 현무이고 북쪽 다문천왕의 얼굴은 검다. 서쪽의 범은 백호이고 광목천왕은 희다. 남쪽의 봉황은 붉은새 '주작'이고 증장천왕의 표정은 붉다.

불교의 사천왕은 인도 재래신에서 기원한다. 원래는 부처를 지키는 야차들을 이르는 금강역사들이 동서남북 사방의 신으로 변천한 듯 하다. 불법을 지키는 무적의 독고저라는 무기는 아마도 제우스의 번개와도 같을텐데 이 독고저는 매우 단단하여 금강이라 불렸고 인도의 제석천이나 불교의 부처 대신 이 독고저(금강)를 들고 신을 호위하는 야차들이 금강역사의 기원이었다. 이들이 역시 인도의 재래신앙인 '사천왕'으로 대체된 것이다.

 사천왕이 사는 곳은 불교 세계관의 중심산인 수미산의 8부 높이 즈음에 한 줄기 산맥으로 돌출하여 수미산을 감싸고 있는 건타라산이다. 건타라산은 동서남북 사방에 큰 봉우리가 있고 이곳에서는 마이산을 포함한 칠금산 너머 먼 바다의 사대주가 바라다보인다. 사천왕은 각각 이 동서남북 봉우리에 궁전을 짓고 수많은 자식과 부하들을 거느리며 산다는 것인데 각각의 방향에서 그 땅을 관할하는 불가의 사방신이다.

얼마전 우리 영화 '사바하'에서 사이비종교가 믿는 신이 사천왕신이었는데 세평과는 별개로 내가 딱 좋아하는 스타일의 영화라 나는 두 번 이상 보았다. 


4.

나이가 들수록 '귀신'을 믿게 된다.
젊어서는 스스로 '유물론자'로 부르며 온갖 종교와 신앙, 제례와 의식을 거부했다.
중년의 지금에 비로소 신앙이 생겼다는 건 아니다.
다만, 내 주변의 보이지 않는 '물질'들을 믿는 종교적 '유물론자'가 된 듯 하다.

'신'을 믿는 게 아니다.
제사를 지내겠다는 것도 아니다.
다만, 모든 '물질'은 하나의 형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다양한 모습과 방식으로 돌아다닌다는 믿음이다.
'귀신'이라 해서 머리를 풀어헤친 사람의 형상이 아니라 지금의 나와는 다른 형상으로 이 세상에 또 다른 '물질'의 형태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도교의 '신선'이 저 먼 곳이기는 해도 우리와 같은 세계에 사는 존재인 것처럼 '혼비백산'한 귀신, 즉 하늘로 날아간 '혼'과 땅으로 흩어진 '백'은 다양한 형상으로 우리 곁에서 공존하므로 종교적 신처럼 누가 누구를 심판하고 자시고 할 건 없다.

그저 나는,
나와 다른 모습으로 존재하고 공존하는 그 모든 것들을 '관념'이 아닌 '물질'로 인정하는 '유물론자'일 뿐이다.

그렇게 나는,
오늘도 홀로 종이를 접는다.

***

1. [잊혔거나 알려지지 않은 사찰 속 숨은 조연들], 노승대, <불광출판사>, 2022.
2. [고구려 고고학], 중앙문화재연구원 엮음, <진인진>, 2020.
3. [고구려의 황홀, 디카에 담다], 이태호 글/사진, <덕주>,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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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테 『신곡』 강의 교유서가 어제의책
이마미치 도모노부 지음, 이영미 옮김 / 교유서가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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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치, 단테처럼.
- [단테 '신곡' 강의], 이마미치 도모노부, 2002.


"우리의 생명길 한가운데에서,
어두운 삼림에 있음을 알았으나,
올바른 길에서 벗어나 있었다."
- 단테 [신곡], 첫 3행, 이마미치 도모노부 번역.


1.

군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단테를 읽지 않았을 거다.

입대한지 일년이 넘었고 상병을 달았지만 대놓고 책을 읽을 짬밥은 아니었다. 읽을 책이 없어 내무반 책꽂이에 있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 벌]을 몰래몰래 틈틈이 읽은 경험으로 단테의 [신곡]을 읽었다. 소설을 읽으면서 '라스콜리니코프' 따위의 러시아 이름이 익숙하지 않아 고생했는데, 단테를 읽을 때는 상황 자체가 머릿속에 그려지지 않았다. '지옥'과 '연옥', 그리고 '천국'을 순례하는 단테를 따라가는 길은 결코 쉽지 않았다.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던 베르길리우스는 단테 자신이 존경해 마지않던 선학 시인이었던 반면, 
나는 나를 그 길로 안내하던 단테를 그닥 존경하지 않았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오래된 책으로 군대 내무반 책꽂이에 거의 버려지다시피 방치된 것이었으니 번역이 형편없기 때문이었다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다.

그럼에도 나는,
단테(Dante)에게 천국을 보여줬던 그의 이념 속 연인 '베아트리체(Beatrice)'를 따라 끝까지 읽고 말았다.
뭐 어차피, 군대 상병이었던 당시 나에겐 그 책 말고는 딱히 읽어볼 문자도 없었다.


2.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의 이메일 아이디는  'beatrice'로 시작하지 않았을 게다.

나름 '문학도'였으니 군대에서도 이등병에서 일병을 거치며 러시아 소설을 집어들었고 단테까지 펼쳐보았을 텐데 어디선가 들어보았을 이름 '베아트리체'가 눈에 확 들어왔다. 먼저 들춰본 [신곡]의 결말에서는 온통 '베아트리체'만 보였다. 그러나 번역이 도무지 눈에 들어오지 않아 난 차라리 생경한 러시아 이름들로 가득한 도스토예프스키를 먼저 읽기로 했다.

그녀가 아니었다면, 
나는 단테를 다시 펼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상병 진급 정기휴가를 나갔던 난 학교 2년 후배인 그녀에게 사귀자고 했고 뜻밖에도 그녀는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도 그녀 인생에서 가장 후회되는 순간이었는지도 모를 그 시간이 나에게는 지금까지도 가장 행복한 장면 중 하나였다. 

나에게도 단테처럼,
나만의 '베아트리체'가 생겼다. 

부대로 복귀한 나는 내무반 책꽂이에 아무렇게나 버려져 있던 단테의 [신곡]을 다시 꺼냈고, 
단테와 나는 각자의 '베아트리체'를 따라 순례를 이어갔다. 
단테는 지옥과 연옥이라는 고난을 견뎠고, 
나는 거지같던 번역문의 고난을 견뎌냈다. 
우리에겐 '베아트리체'라는 공동의 '별'이 있었다.

그렇게 스물세살의 군장병인 내게,
사랑이 왔다.


3.

"영어 'history'의 뿌리가 된 라틴어 'historia'는 그리스어 '히스토리아'에서 유래하였다. 이것은 '발자취를 따라 대상을 쫓아가다'를 의미하며 사냥용어로 쓰인 동사에서 비롯되었다. 즉, '발자취를 보고 동물이 도망친 방향을 안다는 것이며 그것과 동일선상의 사건으로 설명하는 것이 역사해석의 방법이었다."
- [단테 '신곡' 강의], <14강. 천국편 3>, 이마미치 도모노부, 2002.


전역 후 예전에는 후배였던 그녀를 본격적으로 만나면서,
처음 만든 내 이메일 아이디로 'beatrice'를 선택했다. 

군복무 후반기 일년을 헌신적으로 기다려주고 나를 위해 희생했던 그녀는,
여전히 나의 '베아트리체'였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내게든, 단테에게든, 
'베아트리체'는 현실의 사랑이 아니었다. 
그냥 동경하고 소망하는 마음 속 '별'이 되었다.


일본의 고전인문학자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2002년에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1265~1321)의 14세기 장편 서사시 [신곡(神曲/Divina Commedia)]에 관한 강의 15편을 책으로 엮어냈다.

지옥 34곡 1,540여 행과 연옥 33곡 1,540여 행, 천국 33곡과 역시 1,540여 행의 단테 [신곡] 100곡을 전부 해석할 수는 없지만, 주요 구절을 이탈리아어 원어와 그 유래로서 라틴어 및 그리스어를 상세히 열거하며 갖가지 일본식 번역을 소개하고 필자 본인의 번역도 곁들인다. 이탈리아어도, 일본어도 모르는 나는 그런 구절은 눈으로만 훑고는 빨리 넘어간다. 그랬더니 6백 페이지의 이 책은 짧은 시간에 마지막 장을 덮고 만다. 

[신곡]의 주요 싯구에 관한 세밀한 번역은 차치하고 이 책의 묘미는 사상가이자 시인인, 즉 '시인철학자'로 묘사되는 단테의 굵직한 선학들로서 그리스 문명의 호메로스와 로마의 키케로를 거쳐 베르길리우스에 이르는 인문학적 계보를 설명하는 초반부 1~3강이다.

우선, 단테는 로마의 키케로처럼 현실 정치가였다. 그것도 피렌체 공국의 '총리' 또는 장관급 되는 거물 정치인이었는데 교황권과 세속왕권의 정쟁에 휘말려 실각을 하고 망명생활까지 한다. 결국 망명지에서 생을 마감하기 전에 라틴어가 아닌 고국의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적어내린 서사시가 [신곡]이다. 베아트리체로 상징되는 천상의 종교관의 내용과 별개로 루터의 독일어 성경 못지 않게 단테의 이탈리아어 서사시 [신곡]은 서양 인문학 고전사에서 의미가 깊다. 
단테 이후로 독실한 종교사상을 꼭 라틴어로만 적을 필요가 없어졌다. 이는 호메로스로 대표되는 고대 그리스 고전을 로마식 라틴어로 번역한 키케로의 인문주의를 이어가는 길이었고 이로 인해 로마 최고 시인의 경지에 오른 베르길리우스의 인문학을 단테는 존경하며 따르게 된다.
이것이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지옥과 연옥을 안내해달라며 베르길리우스를 찾아간 이유다. 물론 천국에 오르지 못한 베르길리우스는 천국의 문 앞에서 단테를 베아트리체에게 인계한 채 사라져 버리지만, 단테가 사랑이 아닌 존경으로서 마음 속에 '별'로 삼았던 사람은 단연 [아이네이스]라는 로마건국 서사시로 로마의 주체적 역사관을 열었던 베르길리우스였다.

또한 단테의 종교관은 그리스도교에서 천국과 지옥으로 양분되는 이분법이 아니라 '연옥'의 존재로 특화된다. 
12세기경부터 구체화된 모습으로 등장했다는 '연옥'은 '지옥'과 '천국' 사이에 놓인 '희망'의 공간이다. 단테가 지옥문을 들어설 때 지옥문은 '희망을 버리라', 또는 '두고 오라'고 말한다. 지옥은 그 누구도 구원받지 못하는 절망의 공간이다. 그러나 연옥에서는 불로써 정화된 영혼이 천국으로 들어설 수도 있는 '희망'이 존재한다. 그러므로 단테는 연옥에서 비로소 '별'을 본다. [신곡]의 연옥편에 나오는 '별'은 '희망'의 다른 이름이다. 별을 쫓다보면 천국의 문 앞에서 베아트리체를 만나게 된다.

일본의 단테 전문가인 이마미치 도모노부는 단테의 [신곡]을 매개로 서양 고전의 인문학적 기원을 돌아본다. 여신 무사(뮤즈)가 부르는 노래를 서사시로 옮겨적은 호메로스부터, 그리스와 로마의 인문주의를 번역의 형태로 매개했던 사상가 키케로, '나는 노래한다'고 선언하며 여신이 아닌 인문학자로서 시인 본인이 역사를 읊는 베르길리우스의 주체적 인문주의의 맥을 잇는 단테는 당대 지배이념인 그리스도교의 역사관을 장편 서사시 [신곡]에 담았다. 원래 제목이 '극(劇)'이나 '곡(曲)' 자체인 'commedia'였던 이 서사시는 이후 단테를 추앙하던 보카치오가 '신성하다(divine)'라는 의미로 앞에 'Divina'를 붙여 '신곡(神曲/Divina Commedia)'이 되었다. 
고매한 라틴어가 아닌 대중적인 이탈리아어 방언으로 적어내려간 단테의 [신곡]은 구텐베르크의 인쇄술 혁명 이전에 씌어졌으나 루터의 독일어 성경 못지 않게 서양 인문주의 사상사에서 사상의 대중화를 이끈 가히 '혁명'적인 계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신곡]의 절정은 베아트리체를 향한 단테의 사랑이다. [신곡]의 첫머리에서 절망의 숲을 헤매던 단테에게 신의 거대한 프로그램인 지옥과 연옥을 안내하며 절망을 너머 희망으로 이끈 베르길리우스 또한 베아트리체의 계획이었고 인간으로 하여금 원죄를 짓게 한 아담과 인류를 대표하여 속죄한 예수 그리스도, 예수를 살해한 예루살렘을 멸망시킨 로마의 복수 또한 신의 역사라는 단테의 세계관의 중심에는 베아트리체가 오롯하게 서 있다. 

그렇게 단테가 천국에 들어서면서 비로소 만나게 되는 베아트리체는, 
단테에게는 희망의 '별'인 동시에, 
신의 역사를 증명하는 단테 자신이었다.

40대에 현실에서 길을 잃고 '숲을 헤매던' 단테가 지옥과 연옥을 거친 후 천상에서 만난 베아트리체는 아마도 20대에 요절한 그 모습 그대로였을 게다.
단테의 마음 속에 남은 '희망'의 '별'로서의 그녀는 그가 '소망한 바의 실체'인 것이지 더이상 연모의 대상으로서의 여인이 아니었다.

베아트리체는 단테의 이루지 못한 사랑을 너머 신의 역사를 보여주는 상징인 동시에 그 '희망의 실체'를 믿는 단테 본인인 것이다.


4.

"신앙이란 바라야 하는 것(소망/희망)들의 실체이다."
- 토머스 아퀴나스, [신학대전].


천상의 안내자 베아트리체 조차도 따라오지 못한 천국의 대단원에서 신의 대리자가 단테에게 '믿음은 무엇인가?'라고 물었다. 이에 대한 그의 답변은 중세 스콜라철학자 아퀴나스의 대답과 같다. 철학적으로 단테는 아퀴나스를 따르고 궁극으로 거슬러 오르면 아리스토텔레스에 닿는다. 도식적인 해석이기는 하나 플라톤의 이분법이 아닌 아리스토텔레스의 현실적 '형이상학'의 전통이다. 유물론 사상이 발전한 현대에 들어와서야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이 관념론으로 분류되지만 단테까지의 중세의 아리스토텔레스는 세계를 가장 이단적이고 현실적이며 체계적으로 설명하는 최고의 '과학'이자 '철학'이었을 수도 있다. 다만 신학적 역사관과 철학을 견지하는 단테는 토머스 아퀴나스의 뒤를 따랐을 뿐.

그렇게 단테에게도 아리스토텔레스나 아퀴나스처럼 '신앙'이란 '희망'의 다른 이름이었고, 
베르길리우스를 통해 지옥과 연옥을, 
'베아트리체'를 쫓아 천국을 우리에게 보여준 이유가, 
바로 우리들 마음 속 '희망'이라는 '별'을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5.

결국 그녀는 떠났지만, 
'베아트리체'는 여전히 남았다. 

이후로도 'beatrice'는 내 이메일 계정이고 각종 아이디의 대표명이다.

그녀는 아마 나를 만났던 젊은날을 지워버리고 싶은 아픈 시간으로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돌이켜보건대, 
당시 나의 '베아트리체'는 그녀가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녀에 대한 미친 듯한 사랑도 결국 그녀를 사랑하던 젊은 나 자신에 대한 그것이었음을, 
내가 쫓던 마음 속 '별' 또한 젊은날의 나 자신이었음을, 
지금에서야 어렴풋이 알겠다. 
당시 부대에서 그녀와 주고받던 수백통의 군사우편에서도 비슷한 말을 해댔겠지만, 
당시야 뭐 열에 들뜬 나머지 뭔가 있어 보이려고 끄적인 거였다면, 
중년의 지금에서는 그것이 우리의 '역사(history)'였다는 걸 진정 알 것도 같다.


결국, 
당시 나의 '베아트리체'는, 
내가 한때 사랑했던 '그녀'가 아니라, 
젊음이라는 열병을 신앙과도 같이 앓던, 
나 자신이었다. 

당시 내가 단테의 [신곡]을 읽으며 쫓던 '베아트리체'는, 
스스로에 대한 막연한 '희망'이었고, 
내 마음 속 '별'이었던 거다.

마치,
연옥을 해매던 단테처럼.

***

- [단테 '신곡' 강의](2002), 이마미치 도모노부, 이영미 옮김, <교유서가>, 2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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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 메이지 일본, 이순신을 신으로 받들다
사토 데쓰타로 외 지음, 김해경 옮김 / 가갸날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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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로 극장엘 갔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세키코세이 외, 1892~1927.



"나는 그 같은 사실을 잘 알고 있으며, 우리의 수치심을 크게 해야 할 까닭이 여기에 있는 것이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그 웅지가 세상을 덮고 하늘에 닿을 호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불구의 몸으로 지하에 누워 있게 된 것은 수군 때문이었다. 또한 그 수군이 패한 수치는 다름 아닌 조선의 한 사내 '이순신' 때문이었다. 이 같은 사실을 알고 있거늘, 어찌 오늘은 물론 옛일을 돌이켜보며 자리에서 일어나 의연히 분발하지 않을 수 있으랴."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1.

혼자 영화를 보았다.
폐암 말기 아버지의 호스피스병원을 누나들과 함께 알아보고 오랫만에 삼남매가 모였으니 서울 도심 구경도 하고 영화도 한 편 볼까했지만 비오는 종로의 횟집에서 낮술만 좀 마셨고 영화는 시간표가 맞지 않았다.

딱히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던 건 아니었다.
누이들을 버스 태워 보내고 전철로 수유역에 내린 나는 집으로 걸어가다가 부러 극장 앞을 지났고 내처 들어가 영화시간표를 보았다. 

사실 보고싶은 영화가 있었던 것도 같았다.
[한산 - 용의 출현]. 이순신 장군의 한산대첩 이야기를 같이 보러 가자고 며칠전 아내를 잠시 꼬셔보았지만 아내는 귀찮다며 결국 영화관에 가지 못했다. 처와 함께 극장을 가본 일이 까마득하다. 그렇다고 누나들하고 꼭 [한산]을 보겠다는 건 아니었고 시간 맞는 영화 한 편 보고 싶은 정도였다. 

그렇다.
나는 영화가 보고 싶은 게 아니고 극장에 가보고 싶었던 거다. 그러다가 떠오른 게 [한산]이었던 거다. 나 사는 방식이 늘 이렇다. 뭐 하나 절실한 게 없다. 그냥 절실하더라도 아닌 척, 준비했더라도 안한 척. 그렇다 보니 삶에 딱 절실하게 하고 싶은 게 없다. 그러다 보니 삶의 통증도 무디어져 가는 느낌이다.

결국 비오던 목요일 오후 처음으로, 
홀로 극장엘 갔다.
나는 영화 [한산]을 보고 싶었던 게 아니고 극장에 가고 싶었던 걸로 정리했다.

그리고 우연히 이순신 장군을 만났다.


2.

"견내량 전투에서 좁은 해협 입구를 피해 넓은 바다로 나간 다음 재빨리 함대의 진법을 바꾸어 일제 공격을 퍼부은 점과 야간에 척후선을 파송하여 우리 수군의 동정을 정찰한 일 같은 경우는 실로 현대 함대 전쟁의 상규와도 은연중 부합한다. 그 지략의 탁월함과 용의주밀함은 우리 장수들보다 훨씬 뛰어났다. 그런즉 두 나라 군대의 승패가 어찌 이유가 없다 하겠는가. 나의 말이 얼토당토 않다면 모르되 만일 불행히도 맞다면 나중에 해군에 종사하려는 사람은 잘 새겨두지 않으면 안될 것이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이순신전]을 쓰신 게 1908년이라고 한다. 경술국치 한일합방을 목전에 둔 풍전등화의 조선에서 단재 선생께서는 고구려 광개토대왕과 신라 태종무열왕, 그리고 조선의 이순신 장군을 소환하고자 했다. 고대 동북아시아 대륙의 제패자 광개토대왕과 삼한일통 후 당나라 외세를 몰아낸 김춘추, 임진년과 정유년 일본이 촉발한 동북아 대전쟁이 낳은 불세출의 영웅 이순신이다. 아마도 단재 선생의 [이순신전]이 우리나라 최초의 이순신 장군 전기 아니었을까 싶고, 우리 어릴적 읽었을 이순신 장군 위인전의 모본이 아니었을까 싶은데, 사실 최초의 [이순신전]은 조선이 아닌 일본에서 먼저 나왔단다.

필명 '세키코세이'라는 일본인은 19세기말에 [조선 수군통제사 이순신전]을 집필하여 친구인 시바야마 나오노리에게 보냈고, 일제 외무성 관리로 조선에서 근무하던 시바야마가 이를 1892년에 소책자로 발간한다. 필명 '세키코세이'는 1891년까지 조선에 근무하다가 상해 총영사를 지낸 일본 외무성 관리 오다기리 마스노스케라는 추측이 있는데 정확하지는 않다. 아마도 이 소책자의 '감수자'로 되어있는 시바야마 나오노리가 실제 저자일 수도 있겠다.

아무튼, 1908년 단재 선생의 [이순신전]은 조선을 구하는 영웅을 소환하기 위해 집필된 반면, 1892년 일본인의 [조선 이순신전]은 일본의 치욕을 곱씹으며 앞으로 같은 패배가 반복되지 않도록 뼈에 새기기 위함이었다.

집필의 목적이 확연하게 다름에도 결과는 같다. 16세기말에 위기의 조선을 구했던 단 한 사람은 바로 '이.순.신' 장군 그 한 분이었다는 사실의 확인과 재확인이다. 아마도 노론 벽파와 이완용 같은 전주 이씨 왕족 일부까지 야합하여 바야흐로 조선을 일제에 팔아먹으려 하던 19세기말 그 당시의 조선에서는 덕수 이씨 순신 장군을 영웅으로까지 평가하지 않았던가 보다. 일본 또한 영웅 이순신이 아닌 3백년전 일본의 패배를 복기하는 과정에서 어쩔 수 없이 이순신 장군을 성웅으로 묘사할 수 밖에 없었던 것 아닌가.

'세키코세이'의 [조선 이순신전]은 한산대첩과 명량대첩, 그리고 장군의 마지막 노량대첩을 중심으로 원균의 패착과 일본 수군대장들의 무력함, 패전 원인의 분석과 그래도 결국 조선을 구한 단 한 사람은 이순신이라는 결론으로 한편 조선의 무능을 드러내고자 한다. 이후 메이지 시대 해군 교관 오가사와라 나와나리가 1902년에, 해군대장 사토 데쓰타로가 1927년에 이순신에 관한 비슷한 짧은 글을 발표했고 이렇게 세 글들을 하나로 묶은 게 국역본으로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가갸날>, 2019.)라는 책이다.

우리가 익히 아는 이순신 이야기, 나폴레옹을 막은 영국의 해군제독 넬슨이 있다면 조선에는 도요토미 히데요시를 막은 성웅 이순신이 있다는 이야기, 변방에서 여진족을 막던 이순신을 수군통제사로 추천한 유성룡과의 인연, 원균과 이순신의 악연 등등이 19세기말 다른 사람도 아닌 일본인에 의해 정리되고 평가되었다. 물론 유성룡의 [징비록]이나 이순신 장군 본인의 [난중일기]에 나오는 이야기일 수는 있겠으나 대중서로 본격 집필된 게 조선인이 아니라 일본인이라는 사실이 좀 씁쓸하기는 하다. 그래도 얼마 안 지나 위대한 조선인 단재 신채호 선생께서 나서주심에 깊이 감사하다.

어쨌거나 일본인에게든 조선인에게든 '이순신'은 조선을 홀로 구한 영웅임에 틀림없다.


3.

"후세의 누군가 이순신을 위해 붓을 쥐게 된다면 조선의 운명은 이순신 덕분에 회복될 수 있었고, 이순신의 용기와 지략은 유성룡 덕분에 세상에 드러날 수 있었음을 기록해야 할 것이다."
-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 <조선 이순신전>, 세키코세이, 1892.


비오는 목요일,
홀로 극장엘 갔다.
그리고 성웅 이순신 장군을 우연인 듯 만났다.

김한민 감독은 이순신 영화 3부작을 기획하고 있단다. 
1부 [명량]은 가장 극적인 승리를 이룬 '상유12척'의 명량대첩을 그렸고, 이를 기점으로 2부 [한산]은 이전으로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임진전쟁 최대 승전인 한산대첩과 거북선의 출현을, 예정된 3부 [노량]은 명나라 제독 등자룡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가 전사한 이순신의 최후 노량대첩을 그릴 예정이라고 한다.

명량대첩에서 이순신을 두려워하던 일본 수군대장 와카자키가 이전의 한산대첩에서 조선수군을 깔보던 바로 그 장수다. '세키코세이' 등 일본 이데올로그들이 조선 영웅 이순신전을 지은 관점이 바로 일본 수군제독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시각이다. 

해저괴물 '복카이센'으로 묘사된 조선의 최첨단 전선 거북선과 함께 역사에 등장한 '해룡(海龍)' 성웅 이순신 장군을 추억한다.

***

1. [이순신 홀로 조선을 구하다](1892~1927), 사토 데쓰타로/세키코세이/오가사와라 나가나리, 김혜경 옮김, <가갸날>, 2019.
2. [이순신전], 신채호, <대한매일신보>, 19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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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이 고고학, 나 혼자 전주 여행 일상이 고고학 시리즈 5
황윤 지음 / 책읽는고양이 / 202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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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2022.


"892년, 나라에 도둑 무리가 벌떼처럼 일어나고 백성들은 정처없이 흩어지자, 이때를 기회로 삼아 '견훤(甄萱)'은 자신을 따르는 동료를 모아 서남 해안에서 당당히 하나의 세력으로 등장했다. 그러자 불과 한 달 만에 5,000명의 무리가 그에게 모여든다. 견훤은 무주(武州), 즉 현재의 광주를 함락시키고... 앞으로 백제 영역을 완전히 장악하여 백제 왕에 오르겠다는 야심을 보이고 있을 때, 견훤의 나이 불과 스물다섯이었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후백제 왕이 된 견훤>, 황윤, 2022.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경하는 인물을 꼽으라면 나는, 주저없이 삼봉 정도전을 꼽는다. 우리 한반도를 넘어 동아시아 전체 역사를 통틀어 성리학의 [대학]이 말한 '3강령 8조목'을 '혁명'을 통해 현실화시킨 인물로 나는 생각한다. 물론 유방의 한나라를 전한과 후한으로 나눈 '신'나라의 왕망도 유교 이상국가를 지향하다 단명했다지만 당시의 유학은 후대의 성리학만큼 정교한 이론이었다고 볼 수 없다. 주희 이래 성리학은 전 우주를 통찰하려는 세계관이었고, 그 이데올로기로 무장하여 새왕조를 개창한 유일한 인물이 내 생각에는 정도전이었다. 술에 취한 정도전은 말했단다. 한고조가 장자방을 쓴 것이 아니라, 장자방이 한고조를 쓴 것이라고. 이성계의 주먹이 없었더라면 정도전의 머리가 없었듯, 정도전의 머리가 없었다면 이성계의 주먹은 고려의 주먹으로 썩고 말았을 것이다.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로서 그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혹은 이르기를,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때 옥상에서 하얀 빛깔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단오)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으며, 또 불꽃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기르지 마십시오.' 하여 왕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라고 하였다. 사자가 강보 속에서 들어내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 손으로 찔러서 한쪽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수고하며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유희를 그치지 않으니 그 유모가 말하기를, '네가 태어나서 나라의 버림을 받았으나 나는 차마 못하여 몰래 기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너의 미친 행동이 이러하니 반드시 남이 알게 될 것이며, 너와 나는 함께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느냐.' 하였다. 궁예는 울며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는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을 없게 하겠습니다.' 하며 세달사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가 이곳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열전 권10 - 궁예전>, 김부식, 1145.


그 다음으로 주목하는 인물을 톺아보라면 그 수많은 영웅들 중 후고구려의 궁예를 뽑겠다. 어린 시절의 궁핍을 딛고 본인의 이념과 실천으로 일가를 이룬 입지전적 인물의 전형이라고 나는 본다. 사료에는 신라왕족이라 적고 있으나 아버지가 무슨왕인지도 정확하지 않고 이를 뒷받침할 근거도 [삼국사기] <열전 10권> 말고는 빈약하다. 정도전 또한 서얼의 한계로 사회적 승진의 한계를 안고 있었으나 고려말 난세에 급진적 성리학으로 무장한 신진사대부로 출사했고, 궁예는 이보다 5백년 전 '선종'이라는 세달사 탁발승에서 난세에 무장호족이 된다. 내가 중국사에서 서민황제인 한고조 유방과 궁예처럼 탁발승에 거의 극빈민에 가깝던 거지황제 명태조 주원장에 주목하는 이유도 비슷하다. 난세의 시대적 배경도 있었지만 절대적으로 본인의 실력만으로 천하를 호령했던 자들이라는 공통점 때문이다. 결과의 성패를 떠나서 말이다. 물론 출신이 비슷하더라도 당말 난세의 배신의 아이콘이자 양아치황제였던 후량의 주전충 같은 자는 얘기가 다르다.


소장 역사학자이자 '나 혼자 여행' 시리즈의 작가 황윤 선생이 2022년 3월에 낸 여행기는 [나 혼자 전주 여행]이다. 전주 하니 일단 조선왕조를 개창하여 정도전을 비롯한 고려말 급진적 성리학자를 처단한 후 왕가를 확고히 한 이씨 본향의 이야기만 나올 줄 알았건만, 생각치 못했던 '견훤(甄萱)'이 등장한다. 후백제를 건국한 바로 그 견훤이다. 저자는 이성계와 견훤을 '도플갱어'로 삼아 전주 기행문을 이어가고 있다. 이 책은 신라말기 후삼국시대 군웅할거의 난세 속에서 궁예 및 왕건과 마지막까지 천하를 다투다가 고려태조 왕건에게 항복하여 자기가 세운 후백제를 본인의 손으로 멸망시킨 견훤의 최후와 함께 논산에서 이야기를 마치는데, 단순히 '전주'라는 오래된 도시 뿐만 아니라 통일신라 시기 '9주 5소경' 중 하나였던 '전주'와 남원(남원경) 및 백제와 후백제 공히 멸망의 고장 논산까지 아우르는 후백제 이야기이기도 하다. 즉, 현재까지도 전주를 지배하는 이성계와 오래전 잊혀졌지만 백제땅을 다시 지배했던 견훤의 시차적 약전(略傳)이기도 하다. 저자가 추적한 바에 의하면 견훤은 신라시대 '이씨'였고 그의 아버지였던 상주의 아자개의 본명도 '이원선'이었는데 신라의 서남쪽 해안에서 왜적을 막는 군인이었다가 장수가 된 후 백제땅에서 일가를 이룬 견훤은 본래의 '이씨' 성을 버리고 백제의 귀족성인 '견씨'를 택한다. 즉, '견훤'은 본래 '이씨'의 후예라는 추정으로 이성계의 조상일 수도 있음을 은연 중에 암시하고 있다.


"마침 이 당시 견훤은 전유와 비슷하게 892년부터 신라 서쪽을 통치하는 공(公)의 지위에 스스로 올라 있었으며, 900년부터 935년까지는 옛 백제 지역에서 후백제 왕으로 활동했다. 즉, 오월 왕 전유와 시기가 거의 겹치는 것이다. 그뿐만 아니라 오월과 후백제는 900년 전후부터 외교 관계를 수립하여 적극적으로 교류를 이어갔다... 이에 최승우는 고민 끝에 오월과 비슷한 분위기를 지닌 후백제를 자신의 정착지로 선택한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신라 3최(崔) 중 최승우>, 황윤, 2022.


이성계에게 삼봉 정도전이 있었다면, 견훤에게는 최승우가 있었다. '신라 3최(崔)'로 불리는 최치원, 최언위와 최승우는 모두 당나라 빈공과에 합격한 신라의 수재들인데 6두품의 한계로 진골이나 성골의 벽을 넘지 못했다. 신라 말기는 골품제로 대표되는 중앙집권적 귀족제의 모순이 심화되어 새로운 체제의 대두를 요청하고 있었다. 견훤의 부친인 상주(지금의 경북 문경)의 호족 아자개(이원선)도 진골이나 성골이 아니면서 1두품 각간을 자칭하던 시대였으나 신라 최고 천재 최치원은 끝까지 신라에 충성했고 그의 사촌 최언위는 고려태조 왕건에 귀부하여 이름을 날렸다. 기록에는 없으나 이들의 친척뻘로 추정되는 또 다른 수재 최승우는 후백제의 견훤을 통해 새세상을 기획한다. 당시는 중국 대륙 역시 당나라 말기 군웅할거 시대였기에 중국의 동부 오월땅에는 전유라는 자가 '오월왕'을 자칭하였는데 최승우는 당나라 시절 한때 오월왕 영향권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신라로 귀국한 최승우는 최치원이나 최언위와 다른 길인 후백제왕 견훤을 선택한다. 이후 결말은 달랐지만 최승우와 최언위는 각각 견훤과 왕건의 서신을 통해 경쟁을 했고 알다시피 패자는 견훤을 선택한 최승우였다. 

우리는 결과를 알고 있지만 아마도 신라말 군웅할거 정세의 당시는 견훤이 더 유력자로 보였을 수도 있다. 궁예가 초기에 의탁했던 죽주(죽산)의 기훤이나 북원(원주)의 양길, 후에 명주(강릉)에서 독립한 궁예보다도 먼저 스물다섯살에 이미 무주(광주)를 점령하고 8년 후인 900년 서른셋에 전주(완산주)를 장악하여 후삼국 최초로 왕을 자칭한 영웅이 바로 견훤이었다. 기훤이나 양길의 수하였다가 이들 모두를 평정한 '일목(一目)대왕' 궁예가 부랴부랴 후고구려왕을 자칭한 게 901년이니 이보다 한해 먼저 후백제왕이 된 견훤은 신라말 군웅할거 시대를 정리하고 이른바 '후삼국시대'를 연 장본인이었다. 물론 북쪽에서 급격히 팽창하던 궁예를 의식하여 선수를 쳤을지는 모르지만 그만큼 당시는 견훤이 최고의 실력자였을 수도 있고 신라 천재 최승우가 귀부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정도전도 최승우도 난세에 자신의 운명은 스스로 개척해야 했다. 정도전도 장자방을 존숭했듯 자신을 한고조의 책사 장자방에 견주었던 제갈량의 주군 유비도 역사에서 승자는 아니었다. '후삼국시대'는 궁예와 견훤이 각각 고구려(고려)와 백제를 동경하여 부흥운동을 한 것이 아니다. 이미 이들 나라가 멸망한지 2백년 이상 지났으니 망국의 복위운동이었다기 보다는 각자의 할거 지역 정서에 따라 정치적 이데올로기로서 앞세운 것이리라. 종교적 이념은 불교의 미륵불사상, 정치적 이념은 각지의 정서를 반영하여 각각 고구려(궁예-왕건)와 백제(견훤)를 슬로건으로 내건 것이다. 당시는 당말의 중국대륙과 신라말의 한반도를 통틀어 동아시아 전체가 군웅할거의 난세였다. 이들로부터 5백년 전 광개토대왕이 대륙으로 뻗어나간 5호 16국 시대처럼 궁예와 견훤 또한 대륙의 난세 속에서 천하제패를 꿈꿀 수 있었다. 9세기말 10세기초의 한반도에서 그 첫 출발은 견훤이었고 최승우라는 신라 천재가 주군으로 선택할 만한 영웅이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역사의 승자는 견훤과 궁예가 넘어서지 못했던 삼국과 통일신라의 고대 중앙집권 귀족체제를 끝장내고 새로운 지방 호족연합권력을 정립했던 왕건의 포용력이었다. 왕건은 궁예를 몰아냈지만 궁예가 기틀을 다진 국가체제를 부정하지 않았고 아들의 쿠데타로 인해 자신이 세운 국가를 버리고 귀의한 견훤을 내치지 않았다. 물론 궁예의 후고구려의 최대 기반이 송악(개성)의 왕건 호족집안이었고 고려의 마지막 최강숙적 후백제의 사기를 꺾을 자가 견훤 밖에 없었다는 배경은 있었겠지만 지방호족 연합정권 시대의 창시자 왕건의 내공이 그냥 주어진 것은 아니다. 신라말과 고려초(나말여초)는 신라의 삼한일통의 왕조통합과 다르게 고대 중앙집권 귀족체제에서 중세 지방호족 연합체제로 이행하는 체제의 시대적 교체기였던 것이다.


"이처럼 견훤은 자신이 세운 후백제가 멸망하는 모습을 확인한 직후 등창이 터져 이곳(황산) 사찰(논산 개태사로 추정)에서 더는 움직일 수 없게 되었으며, 왕건만 병력을 이끌고 남으로 내려가 전주에 도착하게 된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고려군이 최종승리를 만끽하고 돌아왔을 때는 이미 견훤은 세상을 뜬 상황이었다."
-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개태사와 왕건>, 황윤, 2022.


이성계의 다섯째 아들 이방원이 두 차례 '왕자의 난'으로 왕권을 찬탈한 쿠데타 후 '함흥차사'의 소문으로 남은 시기에 사실 이성계는 의정부(양주) 회암사에 머물며 함흥의 수하 조사의로 하여금 1만의 동북면 군대를 모아 반란을 사주했다. 당시는 1만의 조사의(이성계) 반란군과 5만의 조선군 사이 내전의 상황이었는데 이방원의 빠른 대처와 총력대응으로 인해 반란은 진압되었고 역사는 '이성계의 난'이 아닌 '조사의의 난'으로 기록한다. 이후 아버지 이성계는 아들 이방원을 조선의 왕으로 인정했고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에서 태종 이방원은 다행히 불효의 죄를 면할수 있었다.

견훤의 맏아들 신검이 아버지를 폐위시켜 금산사에 가두었고 나이가 들어 무력이 아닌 술책으로 금산사를 탈출한 견훤이 왕건에게 항복했을 때 그의 나이는 이미 일흔을 바라보고 있었다. 논산에서 대치한 신검의 후백제 정예군은 고려군의 선봉에 선 후백제 건국자 견훤을 보고 창칼을 내려 놓았다. 쉽게 후백제군의 주력을 무너뜨린 왕건은 내처 후백제의 근거지인 완산주(전주)로 내달렸고 견훤은 병에 걸려 논산에 주저앉는다. 괘씸한 아들에게 복수하고 싶었겠지만 차마 자신이 만든 국가의 멸망을 직접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왕건이 후백제를 복속하고 돌아왔을 때 일흔의 견훤은 이미 자신의 나라 후백제와 함께 죽은 후였다.

똑같이 칠십대까지 살았지만 이성계는 아들에 대한 복수는 실패했으되 자신이 만든 국가 조선은 보존하면서 장수한 반면, 5백년 전 그의 '도플갱어' 견훤은 아들에게 복수는 했으나 자신이 세운 국가 후백제와 함께 역사의 무대에서 퇴장했다.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의 저자 황윤 선생은 명시적으로 말할 수 없다. 사료적 근거가 없이 역사학자는 주장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원래 '이씨'였고 전주를 장악하며 후백제를 열었던 견훤이 그로부터 한 5백년 지난 후 '도플갱어' 이성계를 만나게 한 이유는 아마도 견훤이 이성계 일족의 먼 조상이라 암시하는 것은 아닐는지. 

궁예나 견훤은 정도전이나 이성계와 달리 초상화가 남아있지 않아 얼굴이나 풍모를 상상할 수 밖에 없다. 한편, 고려 무신반란 초기 권력자 중 하나였던 이의방은 조선태조 일족의 조상이라는데 오래전 대하사극의 각각 다른 극 중에서 이의방과 견훤을 맡은 배우가 동일했던 것 또한 참으로 우연스럽기도 하다. 

그래서 역사학자가 아니라 소설이나 쓰고 싶은 나는 감히 추측한다. 
소장 역사학자의 이 책을 통해 내가 찾은 견훤(甄萱)은 이성계 일족의 '할아버지'라고 말이다.

***

1. [일상이 고고학 - 나 혼자 전주 여행], 황윤, <책읽는고양이>, 2022.
2. [슬픈 궁예], 이재범, <푸른역사>, 2000.
3. [삼국사기](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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