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치통감을 읽다 - 중국 최고 역사서로 보는 욕망과 대의, 흥망성쇠의 원리
장펑 지음, 김영문 옮김 / 378 / 2016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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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위공(天下爲公), 이인위본(以人爲本)
- [자치통감을 읽다], 장펑, 김영문 옮김, 2015.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게 된 고충도 역사를 통해 미래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하고 거기에서 더욱 양호한 정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송나라 신종은 [자치통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 치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鑒於往事 有資於治道).' 이것이 바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이란 제목의 유래다. 치국의 경험 제공을 목적으로 삼아 정치가의 안목으로 역사를 새롭게 선택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왕의 모든 사학 저작과 구별되는 [자치통감]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만약 우리가 한마디 말로 [사기]와 [자치통감]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면, '[사기]는 문학가가 쓴 역사이고 [자치통감]은 정치가가 쓴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자치통감을 읽다], <서문>, 장펑, 2015.


중국의 역사서 '24사' 또는 '25사'의 제일 앞줄은 사마천의 [사기]다. 현재는 이들 모두 '정사'로 인식되지만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가 처음부터 '정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부친의 대업을 이어받아 장대한 역사서를 완성하려던 사마천은 한무제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반고조차도 처음에는 감히 사사롭게 역사를 서술한다는 행위 자체가 불경하다 하여 환영받지 못했다. 즉, 이들은 당시 절대권력자의 명을 받은 어용역사학자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통사로서 [사기]와 전한 단대사로서 [한서]는 '기전체' 서술의 표본이 되었다. 공자의 [춘추]로부터 유래된 연대기별 '편년체'와 달리 '본기'와 '열전'이 서로 교차하는 '기전체'는 많은 역사서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에는 공자의 [춘추] 이후 여전한 '편년체'의 대표작이 하나 있다. 바로 북송 정치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다.

북송의 관리 사마광은 역사서 [통지(通志)] 8권을 지어 영종에게 바쳤다. 영종의 찬사를 받은 사마광은 이후 신종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지원 하에 총 294권 300만자의 대역사서를 완성하는데 최초 [통지]로 명명된 이 역사서는 신종의 '서문'을 따라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불리게 된다.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 치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鑒於往事 有資於治道)'라는 말에서 유래한 '자치통감'은 다스림의 자산으로 삼기 위해 역사의 거울을 통괄한다는 의미와 같다.

상하이 푸단대학 장펑 박사는 [자치통감] 전문가로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대학]의 '수신'과 '제가' 나아가 '치국' 또는 '치도'의 범주로 구분하여 읽고 해설한다. 우리 중국학자 김영문 선생님이 번역한 [자치통감을 읽다](<흐름출판>, 2016)의 원제목은 '덕의 정치에서 필요한(德政之要) 자치통감의 핵심 지혜' 정도 되겠다. 


"다스림의 요체는 사람을 잘 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 [자치통감], 제73권, 사마광, 11세기.


왕안석의 '신법' 운동 과정에서 급격한 개혁을 반대한 사마광은 얼핏 '보수파'의 영수급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자치통감]을 지원하며 제목까지 지어준 신종이 신법을 지원하면서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하던 서국을 개봉에서 낙양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이 간단치만은 않다. 왕안석은 개혁을 위해서 사람을 버리고 제도를 택했고, 사마광은 제도만이 아닌 사람을 선택한 점도 있다. 제도도 중요하고 사람도 공히 중요하다. 그러나 무릇 중요한 시기에는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장펑의 [자치통감을 읽다]에서는 사마광이 "인간과 법의 '변증법적 관계'를 매우 깊이있게 인식"(같은책, <서문>)한 점이 그의 고귀한 점이라고 쓰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인간'의 '덕'과 '인' 같은 '품성'을 앞세웠다.  '수신'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인물들과 가문을 잘 다스려 후세에 길이 남거나 사리사욕으로 가문을 망친 '제가'의 사례들, 이들에 의한 '치국'의 경험들을 각 권에 담고 있다. 물론 번잡한 역사서들의 요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자치통감] 저술을 시작했음에도 1,400년을 아우르다 보니 사마광 스스로도 294권 300만 자의 이 졸린 책을 다 읽은 자가 왕승지라는 학자 한 사람 뿐이라고 인정했듯, 일반 독자가 [자치통감]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푸창 편역, 2017) 같은 책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홀로 있을 때도 근신(신독)하고 대국적 관점으로 자기절제하는 정신으로 '수신'한다.
재능보다는 덕을 우선으로 자식교육에 힘쓰고 검약하는 '제가'를 이룬다. 
그리고 궁극에는 올바른 '치국(치도)'에 이른다는 큰 흐름은 비록 수신과 제가, 그리고 치도가 각 단계에 따라 순서대로 맞아 떨어지는 기계적 절차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자치통감] 전문가 장펑이 읽어주는 북송의 대표적인 사대부인 저자 사마광의 일관된 방향이자 흔들림 없는 지침이다.

사마광은 전국시대의 시작부터 한나라와 삼국시대 및 5호16국을 지나 당나라의 역사를 담으면서도 사마천과 같이 '문학'적 서술을 피하고 '정치가'로서 글을 이어간다. 당나라 유명시인 이백과 두보가 [자치통감]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정치가 사마광의 역사거울이 주로 비추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백성의 행복지수'(장펑의 같은책, 서문>)다. 
그러므로 장펑이 읽어주는 [자치통감]의 결론은, "천하위공(天下爲公), 이인위본(以人爲本)"이다. 즉, 천하는 사유화되면 안되고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올바른 법과 제도에 따라 국가가 운영(依法治國)되어야 하나, 그 바탕은 '문화'와 교양의 힘이다. 후한 광무제 유수가 군웅할거의 전쟁터에서도 탁무라는 유학자를 귀하게 모시면서 문화에 따른 치국을 준비하여 무식했던 한고조 유방과 달리 창업은 물론 수성에도 성공한 것이나 후한의 성공적인 수렴청정의 사례인 등태후가 외척 중 거의 유일하게 국정을 농단하지 않았던 배경이 역사와 독서, 문화와 교양을 등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대학]의 주요 내용이 바로 [자치통감]이라는 역사거울을 통해 북송의 유학자 사마광이 후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교훈인 것이다.

***

1. [자치통감을 읽다](2015), 장펑, 김영문 옮김, <흐름출판>, 2016.
2. [한 권으로 읽은 자치통감](2017), 사마광, 푸챵 편역, 나진희 옮김, <현대지성>,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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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
사마광 지음, 푸챵 엮음, 나진희 옮김 / 현대지성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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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위공(天下爲公), 이인위본(以人爲本)
- [자치통감을 읽다], 장펑, 김영문 옮김, 2015.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편찬하게 된 고충도 역사를 통해 미래 사람들에게 자신을 비춰볼 수 있는 거울을 제공하고 거기에서 더욱 양호한 정치를 이끌어내기 위함이었다. 송나라 신종은 [자치통감] 서문에서 이렇게 말했다.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 치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鑒於往事 有資於治道).' 이것이 바로 '자치통감(資治通鑑)'이란 제목의 유래다. 치국의 경험 제공을 목적으로 삼아 정치가의 안목으로 역사를 새롭게 선택하고 새롭게 해석하는 것, 이것이 바로 기왕의 모든 사학 저작과 구별되는 [자치통감]의 가장 큰 특징이다. 만약 우리가 한마디 말로 [사기]와 [자치통감]의 차이를 구별해야 한다면, '[사기]는 문학가가 쓴 역사이고 [자치통감]은 정치가가 쓴 역사'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자치통감을 읽다], <서문>, 장펑, 2015.


중국의 역사서 '24사' 또는 '25사'의 제일 앞줄은 사마천의 [사기]다. 현재는 이들 모두 '정사'로 인식되지만 사마천의 [사기]나 반고의 [한서]가 처음부터 '정사'였던 것은 아니었다. 부친의 대업을 이어받아 장대한 역사서를 완성하려던 사마천은 한무제로부터 핍박을 받았고 반고조차도 처음에는 감히 사사롭게 역사를 서술한다는 행위 자체가 불경하다 하여 환영받지 못했다. 즉, 이들은 당시 절대권력자의 명을 받은 어용역사학자들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통사로서 [사기]와 전한 단대사로서 [한서]는 '기전체' 서술의 표본이 되었다. 공자의 [춘추]로부터 유래된 연대기별 '편년체'와 달리 '본기'와 '열전'이 서로 교차하는 '기전체'는 많은 역사서의 거울이기도 하다. 
그리고 한편에는 공자의 [춘추] 이후 여전한 '편년체'의 대표작이 하나 있다. 바로 북송 정치가 사마광의 [자치통감]이다.

북송의 관리 사마광은 역사서 [통지(通志)] 8권을 지어 영종에게 바쳤다. 영종의 찬사를 받은 사마광은 이후 신종에 이르기까지 황제의 지원 하에 총 294권 300만자의 대역사서를 완성하는데 최초 [통지]로 명명된 이 역사서는 신종의 '서문'을 따라 [자치통감(資治通鑑)]으로 불리게 된다. '지난 일을 거울로 삼아 치도에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鑒於往事 有資於治道)'라는 말에서 유래한 '자치통감'은 다스림의 자산으로 삼기 위해 역사의 거울을 통괄한다는 의미와 같다.

상하이 푸단대학 장펑 박사는 [자치통감] 전문가로서 사마광의 [자치통감]을 [대학]의 '수신'과 '제가' 나아가 '치국' 또는 '치도'의 범주로 구분하여 읽고 해설한다. 우리 중국학자 김영문 선생님이 번역한 [자치통감을 읽다](<흐름출판>, 2016)의 원제목은 '덕의 정치에서 필요한(德政之要) 자치통감의 핵심 지혜' 정도 되겠다. 


"다스림의 요체는 사람을 잘 쓰는 것보다 앞서는 것이 없다."
- [자치통감], 제73권, 사마광, 11세기.


왕안석의 '신법' 운동 과정에서 급격한 개혁을 반대한 사마광은 얼핏 '보수파'의 영수급으로 알려진다. 실제로 [자치통감]을 지원하며 제목까지 지어준 신종이 신법을 지원하면서 사마광이 [자치통감]을 저술하던 서국을 개봉에서 낙양으로 쫓아내기도 했다. 그러나 사정이 간단치만은 않다. 왕안석은 개혁을 위해서 사람을 버리고 제도를 택했고, 사마광은 제도만이 아닌 사람을 선택한 점도 있다. 제도도 중요하고 사람도 공히 중요하다. 그러나 무릇 중요한 시기에는 양자택일을 해야 할 것이다. 물론 장펑의 [자치통감을 읽다]에서는 사마광이 "인간과 법의 '변증법적 관계'를 매우 깊이있게 인식"(같은책, <서문>)한 점이 그의 고귀한 점이라고 쓰고 있으나 현실적으로 사마광은 [자치통감]을 통해 '인간'의 '덕'과 '인' 같은 '품성'을 앞세웠다.  '수신'에 성공하거나 실패한 인물들과 가문을 잘 다스려 후세에 길이 남거나 사리사욕으로 가문을 망친 '제가'의 사례들, 이들에 의한 '치국'의 경험들을 각 권에 담고 있다. 물론 번잡한 역사서들의 요점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자 [자치통감] 저술을 시작했음에도 1,400년을 아우르다 보니 사마광 스스로도 294권 300만 자의 이 졸린 책을 다 읽은 자가 왕승지라는 학자 한 사람 뿐이라고 인정했듯, 일반 독자가 [자치통감]을 다 읽을 수는 없다. 그래서 [한 권으로 읽는 자치통감](푸창 편역, 2017) 같은 책에 의지할 수 밖에 없다. 

홀로 있을 때도 근신(신독)하고 대국적 관점으로 자기절제하는 정신으로 '수신'한다.
재능보다는 덕을 우선으로 자식교육에 힘쓰고 검약하는 '제가'를 이룬다. 
그리고 궁극에는 올바른 '치국(치도)'에 이른다는 큰 흐름은 비록 수신과 제가, 그리고 치도가 각 단계에 따라 순서대로 맞아 떨어지는 기계적 절차일 수는 없다 하더라도, [자치통감] 전문가 장펑이 읽어주는 북송의 대표적인 사대부인 저자 사마광의 일관된 방향이자 흔들림 없는 지침이다.

사마광은 전국시대의 시작부터 한나라와 삼국시대 및 5호16국을 지나 당나라의 역사를 담으면서도 사마천과 같이 '문학'적 서술을 피하고 '정치가'로서 글을 이어간다. 당나라 유명시인 이백과 두보가 [자치통감]에 등장하지 않는 이유다. 정치가 사마광의 역사거울이 주로 비추고자 하는 것은 오로지 '국가의 흥망성쇠와 백성의 행복지수'(장펑의 같은책, 서문>)다. 
그러므로 장펑이 읽어주는 [자치통감]의 결론은, "천하위공(天下爲公), 이인위본(以人爲本)"이다. 즉, 천하는 사유화되면 안되고 모든 사람이 공유해야 하며, 이 과정에서 사람이 근본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올바른 법과 제도에 따라 국가가 운영(依法治國)되어야 하나, 그 바탕은 '문화'와 교양의 힘이다. 후한 광무제 유수가 군웅할거의 전쟁터에서도 탁무라는 유학자를 귀하게 모시면서 문화에 따른 치국을 준비하여 무식했던 한고조 유방과 달리 창업은 물론 수성에도 성공한 것이나 후한의 성공적인 수렴청정의 사례인 등태후가 외척 중 거의 유일하게 국정을 농단하지 않았던 배경이 역사와 독서, 문화와 교양을 등한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 보고 있다. 

[대학]의 주요 내용이 바로 [자치통감]이라는 역사거울을 통해 북송의 유학자 사마광이 후세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교훈인 것이다.

***

1. [자치통감을 읽다](2015), 장펑, 김영문 옮김, <흐름출판>, 2016.
2. [한 권으로 읽은 자치통감](2017), 사마광, 푸챵 편역, 나진희 옮김, <현대지성>,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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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변과 만변 거젠슝, 중국사를 말하다
거젠슝 지음, 김영문 옮김 / 역사산책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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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변(萬變)'의 역사 속 '불변(不變)'의 진리
- [불변과 만변](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분열 시기에 어떤 정권이 통일을 목표로 삼았거나 최종적으로 통일을 실현했다면 그 정권은 반드시 자신을 '중국'으로 간주하는 동시에 상대방을 '비중국'으로 간주했다. 다시 통일을 이룬 뒤 앞의 정권은 이후 정권에 의해 중국으로 인정되었다. 예컨대 당나라는 (남북조 시대의) [북사]와 [남사]를 동시에 편찬했고 원나라도 [송사]와 [요사]를 동시에 편찬했다. 이 역사책들이 후세에 모두 '정사'로 인정된 것은 이들 정권의 포괄 범위가 일찍부터 '중국'으로 인정되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 [불변과 만변], <8장 11절>, 거젠슝, 2021.


10세기 중국에서 5대10국을 끝내고 송나라를 건국한 송태조 조광윤에게 남쪽의 남당국 군주 이욱과 오월국 군주 전숙은 스스로의 땅을 보전하기 위해 납작 엎드렸다. 후주 세종이 죽자 세종이 신임하던 대장군 조광윤이 후주의 왕족인 시씨를 배반하고 새왕조를 개창한 후 중국의 북쪽을 장악하자 남쪽의 두 소국들은 스스로를 왕이 아닌 제후로 셀프강등시키면서 목숨을 구걸한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눈물겨운 노력들은 송나라 조씨 가문의 확고한 계획을 바꿀 수 없었다. 남당의 군주와 그보다는 조금 운이 좋았던 오월국 군주는 '배주석병권(杯酒釋兵權)'에서 보듯 부드러운 천하통일 카리스마의 끝판왕인 송태조 조광윤의 '아량' 덕에 목숨은 부지했지만 이후 그의 제위를 이은 송태종에 의해 직간접적으로 죽임을 당하고 만다. 
송나라의 목표는 단 하나였기에 이 소국들의 운명은 시기가 문제였지 이미 필연적으로 정해져 있었다.
조광윤이 개국한 송나라 '불변'의 목표는 바로 중국의 '천하통일'이었다.


중국의 역사, 지리, 인구사에 정통하다는 푸단대학 교수 거젠슝은 2021년에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이라는 책을 통해 중국 역사 속 '불변'의 개념들로 '만변'의 역사를 꿰뚫고자 한다.

그는 3천년 전 주무왕이 낙양에서 선포한 '중국'이라는 중심어를 시작으로 이 '중국'을 지속시키려 했던 '뼈대(같은책, <1편>)'로서 강역과 도성(수도), '혈육(<2편>)'으로서 인구이동, '정신 중추(<3편>)'로서 '천하(<8장>)' 가치관의 세 가지 바늘을 무기로 장대하고 복잡한 중국사를 씨실날실로 간단하게 엮어낸다.

저자에 의하면, 중국의 강역이나 인구는 기존 중화주의로는 제대로 설명할 수 없다. 
흉노와 선비, 거란 및 여진과 몽골 등 유목민족이라 하더라도 중원의 농경민족인 한족의 문화와 습속을 따르고 이에 동화되는 한 이것이 미치는 강역은 '중국'이었고, 이 '중국'으로 이주하여 모인 수많은 민족들이 모두 '중국인'이었다는 주장이다. 당연히 결론은 '일대일로' 정책으로 실크로드와 해상무역로를 새로 연결하여 아시아를 넘어 유라시아 대륙 전체를 '중국'으로 포괄하려는 현재 중국주의의 역사적 정당화다. 주지하다시피 우리 한반도와 요동의 역사를 중국의 지방정권사로 포섭하려는 동북공정이 그 지류다. 따라서 '만변'의 역사를 '불변'의 키워드로 해석하고 서술하는 저자의 보편적 역사관은 동의할 만 하다 해도 이 책은 조선의 오랜 역사를 중국사의 일부로 인식하는 내용을 일부 포함하고 있다. 이 부분은 이 책의 역자이자 견위의 [초한연의]와 [삼국지평화] 등을 번역한 중국학자 김영문 선생님이 세세하게 각주를 달아 비판하고 있으므로 이를 통해 걸러서 읽으면 된다.

이 책은 중국의 강역과 최초 통일 정권인 진시황의 진나라, 초한전쟁의 분열을 끝낸 유방의 한나라, 전제군주 체제의 가장 한심한 말로를 보여준 사마씨 진나라의 분열과 이로 인해 본격적으로 등장한 소수민족의 이동이자 격렬한 분열 시기로서 5호16국과 당나라 및 5대10국, 그 이후의 송-명-청나라 권력교체기 등의 역사를 조명한다.
저자가 '분열'의 역사를 특히 강조하는 이유는 명확하다. 바로 '천하통일'의 결론을 말하기 위해서다.


"후한 원년(25년) 8월 5일, 호현(허베이 바이샹현 북쪽) 남쪽 토단 위에서 유수가 황제 보위에 올라 연호를 건무라고 선포했다. 하지만 당시 유수의 일부 모사와 장군을 제외하고는 그가 십몇 년 후 천하를 통일하고 한나라를 회복해 국운을 다시 200년 더 연장하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 [불변과 만변], <8장 8절>, 거젠슝, 2021.


특히, '천하통일' 가치관의 중요성을 서술한 이 책 3편 8장의 <천하> 장에서 진시황의 표준화 통일정책과 한고조 유방의 유연한 전략은 다소 진부한 내용이나 후한을 건국한 광무제 유수가 전반부 2백년에서 끊어졌던 한나라 유씨 정권을 부활시켜 후반부 2백년을 이어나갈 수 있게 한 요인으로 그의 비타협적인 '통일관'을 들고 있다. 전한의 맥을 끊은 왕망의 신나라가 무너진 후 민중들이 다시 한나라 부흥을 꿈꾸며 하나같이 유수를 추대한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녹림군과 적미군 등의 다수 농민반란군의 봉기 과정 및 유씨 황족으로서 왕망 이후 제일 먼저 장안을 점령한 경(갱)시제 유현이나 두융과 외효, 공손술 같은 여러 반란 지도자들간 치열한 쟁투에서 결코 유수가 유력한 후보가 아니었다는 객관적 배경을 강조한다. 그럼에도 결국 광무제 유수가 승리한 이유는 결코 지역할거에 머물지 않고 경쟁자들을 철저히 복종시키거나 섬멸해 버리는 타협없이 뚜렷한 천하통일 의지였다. 이 '불변'의 목표는 진시황과 한고조 유방, 광무제 유수와 송태조 조광윤, 명태조 주원장과 청나라 강희제 등이 중국의 강역과 인구를 '만변'으로 번창하게 했던 주요 동력이었다.

유방과 주원장, 조광윤 못지 않게, 격변하는 분열 정국에서 비타협적 통일관으로 역사의 획을 그은 광무제 유수의 매력을 새삼 발견한 건 이 책을 통해 내가 개인적으로 얻은 수확이다. 


"한고조 유방은 저속했고, 한무제는 패기가 있었다. 지식인 출신이었던 광무제 유수는 문화적 소양이 풍부했다. '유학자는 나라의 보배'라는 이치를 잘 알고 있었다... 유수는 유학자를 중시하고 격려했기 때문에 후한시대 군신들은 유학자다운 기상을 지니고있었다. 백정, 도적, 무뢰배 출신으로 이뤄진 전한시대의 개국공신들과 비교하자면 천양지차였다. 문신을 장려하고 발탁하는 '문치'의 풍조 때문에 후한시대에는 강직하고 절개있는 문인 대신들이 많이 배출되었다. 또 이 때문에 후한이 위기 상황이나 힘들고 혼란한 상황 속에서도 무너지거나 멸망하지 않고 200여 년을 버틸 수 있었다."
- [후한서], <광무제기>, 범엽, 5세기.


남북조 시기 남조 유송의 역사가 범엽의 [후한서]는 사마천의 [사기]와 반고의 [한서], 그리고 진수의 [삼국지]와 함께 중국 역사 '25사' 중 최고의 '4대 정사'로 꼽히는데 이 중 후한의 개국자 유수의 일대기를 다룬 본기인 <광무제기>를 보면, 유수는 한고조 유방의 9대손이었으나 전한 개국 후 이미 10만명 가까이 되던 유씨 집안 일족에 불과하여 유수의 부친은 지방 현령직이었다. 다만 유수는 어려서부터 책을 가까이 했고 난세를 맞아 어쩔 수 없이 거병을 했지만 유학자를 중시한 지식인 출신이자 문화적 소양이 풍부했다. 농사일에도 성실하여 그의 형 유연이나 경(갱)시제 유현과 달리 유수가 28세에 거병을 했을 때 민중들은 '조심성 많고 신중한 사람까지 그런 일을 벌이다니'라면서 수긍했다고 한다. 역시 유수는 다니는 지역마다 민중들의 지지를 받을 수 있었다. 유수는 난세의 군웅할거 시기에 군사를 일으켜 유일한 '천자'가 되고자 하는 확고한 신념과 의지를 결국 실현했지만 천하를 평정하고 후한의 황제가 된 후에는 부드러움으로 국가를 운영했다. 
범엽은 비록 광무제 유수가 도참설 같은 미신에 다소 의지하기는 했지만 후한이 이후 200년을 이어갈 수 있었던 토대를 광무제 유수의 너그러운 문치주의로 평가하고 있다.

역사서가 권력의 정당성을 보증하는 중요한 근거이며, 그 시초가 공자의 춘추필법임을 명백히 하고, 이 편집된 승자의 역사기록이라는 "사료 가운데서 표면을 뚫고 내면의 진상을 파악할 수 있으며 역사에 대한 오늘날의 가치관으로 옛 역사를 해석하고 인식"(같은책, <맺음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저자 거젠슝의 결론은 내가 믿고 읽는 역자 김영문 선생님의 지적(같은책, <옮긴이의 말>)처럼 현대판 중국주의를 내포한 이 책 자체의 역사서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러므로 동북공정처럼 우리에게 불편한 내용 일부를 담고 있기는 해도 '만변'의 역사 속 '불변'의 진리를 찾고자 하는 저자 거젠슝의 역사서술 기법의 매력은 참신하게 읽힌다.

중국의 인기 역사가 이중톈이 추리소설의 기법으로 장대한 중국사의 주요 에피소드를 엮어 새로운 중국 '통사'를 집필하는 것처럼, 더 많은 역사가들이 사마천의 [사기]식 '기전체'와 사마광의 [자치통감]식 '편년체'를 교차하고 넘어서는 창의적이고 재미있는 역사서술을 무궁무진하게 발전시켜 나가기를 기대한다. 
물론, 어느 역사기록이든 거젠슝의 말대로 공자의 '춘추필법'의 본성을 감출 수는 없을테지만.

진실이 그러하니 역시,
'만변'의 역사를 꿰뚫는 '불변'의 진리를 추려내는 무기는 사료의 맥락 속 역사적 진실을 볼 수 있는 비판적 관점이다.

***

1. [불변과 만변(不變與萬變)](2021), 거젠슝, 김영문 옮김, <역사산책>, 2022.
2. [후한서 - 범엽의 인물열전], 범엽, 유홍유 편저, 이미영 옮김, <팩컴북스>, 20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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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화와 칼 - 일본 문화의 틀
루스 베네딕트 지음, 김윤식.오인석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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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ake one's proper station"
- [국화와 칼], 루스 베네딕트, 1946.


"... '국화(The Chrysanthemum)'는 철사 고리를 떼어 버리고, 그처럼 철저한 손질을 하지 않아도 충분히 아름답게 피어 자랑스러울 수 있다... '칼(The Sword)'이란 공격의 상징으로서가 아니라, 이상적이며 훌륭히 자기 행위에 책임을 지는 인간의 비유이다."
- [국화와 칼], <12. 어린아이는 배운다>, 루스 베네딕트, 1946.


1.

내가 중고등학생 시절이었던 1980년대에 우리나라는 일본과 정식 문화교류를 하지 못했다. 
일제강점기의 식민지 시절을 벗어난지 반세기도 채 안되었던 당시에는 대놓고 일본의 대중문화를 국내로 들여오고 공유할 수 없었다고 한다. 물론 그보다 더 어렸던 1970년대의 나는 매일 TV에서 '일본만화'를 보고 자랐고 부산 같은 데서는 '코끼리 밥솥' 같은 일제 전자제품들이 밀매되었으며 중동에 세 번 다녀온 나의 아버지는 귀국할 때 '소니' 전축과 '카시오' 전자오르간을 사오셨지만, 1998년 전까지 우리는 대놓고 일본문화를 접할 수 없었다.

그러나 어린 시절부터 그때까지도 줄곧 보고 자란 만화가 전부 일본만화라는 사실을 알게 된 1980년대 후반의 우리들은 학교 친구들과 자연스레 대놓고 일본문화를 접하게 되었다. 어른들이 막아봐야 소용없다. 중고생인 우리들은 청계천 일대를 다녀온 친구들을 통해 일본만화와 잡지, 소설 등을 몰래몰래 '대놓고' 돌려보았다. 어려서부터 시각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나였지만 기이하게도 나는, 해적판 일본만화는 [공작왕]과 [북두의권], [드래곤볼] 외에는 몰랐는데, 나는 어쩌다 내 차례로 돌아온 일본 음란소설을 좋아했다.

학교 동급생을 통해 알음알음 몰래몰래, 그러나 대놓고 유통되던 일본 춘화잡지나 음란만화는 자극적이었으나 왠지 모를 죄의식을 동반한 반면 소설은 '독서'라는 행위 아래 두고두고 곱씹게 되는 맛이 있었다. 나는 번역도 엉망이었을 해적판 일본 음란소설을 통해 '육봉'을 알았고 '69(식스나인) 자세'가 뭔지 알게 되었으며 미찌꼬가 남자의 얼굴을 'M'자 다리로 깔고 앉은 장면을 상상했다.

돌이켜 보면, 시각예술을 더 좋아하던 내가 춘화나 만화보다 소설을 더 선호했던 이유는 '부끄러움' 때문이었다.


2.

2차 대전의 태평양전쟁은 소련이 동유럽 전선을 방어하고 동아시아로 진출하면서 점차 아시아 대륙에서 밀려나던 일제가 태평양 너머 미국을 직접 타격한 사건이다. 1942년부터 미국과 일본의 대전이 불붙었고 1944년 미국무부는 대체 이 아시아 인종의 실체가 무엇인가 궁금했는지 인류학자 루스 베네딕트(Ruth Benedict : 1887~1948)에게 의뢰하여 국책 '연구서'를 낸다. 
전쟁 중이었으므로 베네딕트는 일본인을 연구하면서 일본땅 한 번 밟지 않고 미국에 사는 일본인들과의 인터뷰와 관련 문헌들을 토대로 펜대를 굴려서 중대한 국책 용역사업을 완수했는데, 이 책이 바로 미국인이 처음 일본인을 연구한 '고전'인 [국화와 칼](1946)이다.

지금이야 세계인들이 서로서로 교류하니 별 것 아니겠지만, 태평양 미일전쟁 중의 미국인들이나 1980년대의 나같은 중고생들이나 일본에 대해 대중적으로 알 길이 묘연했을 게다. 
1980년대의 내게 일본은 자체가 '음란의 제국'이었다. 1940년의 미국은 루스 베네딕트의 연구를 통해 일본을 '국화'와 '칼'이라는 상반된 이미지의 모순덩어리로 이해한 듯 하다. 요컨대, 서구인에게 정체불명의 일본인은 나라의 꽃인 사쿠라보다 천왕의 상징인 '국화'를 더 좋아하고 겉으로는 겸손한 것 같지만 속으로는 오랜 봉건시대 사무라이의 '칼'도 지니고 있다는 그런 식. 
지금이야 그게 어쨌다는 거냐 싶겠는데, 당시는 기독교적 선악 이분법에 익숙한 서구인에게 동양인의 '이원성'(같은책, <12장>)'과 양면성은 이해하기 힘든 모순이라고 본 듯 하다. 

[국화와 칼]의 우리말 완역은 내가 태어난 1974년에 되었다는데 이 때 <해설>을 쓴 국내 인류학자 이광규 교수는 이 책을 두 번은 읽어야 일본과 우리의 차이를 알 수 있다고 해설하고 있다. 즉, 처음에는 서양과 동양의 차이가 보이고 다음에야 같은 동양인 일본과 우리의 차이가 보인다는 말이겠다. 아무튼, 서양인 루스 베네딕트의 결론은 일본인들은 '국화'와 '칼'로 상징되는 동양적 '모순'을 지니고 있지만 메이지유신 같은 빠른 근대화를 보면 '천왕'이라는 허위에 얽매인 '국화'도 제대로 피어낼 수 있고, 세평에 얽매여 스스로를 옭죄는 '칼' 또한 책임있는 인격으로 전환할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전제조건은 일본으로 대표되는 '동양'이 '서양'의 지배와 영향을 잘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일게다.
[국화와 칼]의 배경은 19세기말 메이지유신으로 서구적 '근대화'를 잘 받아들인 일본인들과 결국 서양에 대들다가 패전하고 미국의 지배를 받게 된 일본이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일본은 유럽의 패전국인 독일이나 이탈리아와 달리 패전을 순순히 받아들였단다. '정신승리'로 무장하고 목숨걸고 항전하던 사무라이 '칼'이 천왕의 '국화'가 이제 그만 싸우자고 선언한 순간 일사분란하게 순종적으로 돌변하여 미국의 지배를 달게 받아들이기까지 했단다. 일본은 전후 재건과 유럽 '68 혁명'의 여파 속에서도 '혁명' 같은 상황은 없었다. 변화와 발전, 그리고 퇴보 속에서도 여전히 고요한 정체된 사회 같은 무언가가 있는 듯 하다. 왠지 항상 그 자리가 '알맞은 위치 갖기(Take one's proper station)'인 듯이 말이다.

어쩔 수 없는 시대적 한계이겠지만, [국화와 칼]이 일본문화 이해의 '고전'인 이유는 서양의 관점에서 처음 정리된 동양에 대한 인류학적 보고서이기 때문이자 더 나아가 승전국인 미국의 '국책보고서'였기 때문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즉, 수십년 전 지식인들에게는 귀한 책이었을지 모르나 지금의 내게는 '고전' 치고는 별로 배울만한 게 없는 책이다.


3. 

"Take one's proper station..."
- [국화와 칼], <3.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 루스 베네딕트, 1946.


일본이 단지 '음란의 제국'만이 아니었음은(물론 어린 내가 본 일본문화가 음란문화 뿐이었기 때문이었지만), [국화와 칼]에 의하면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같은책, <3장>)'로 설명될 수 있다. 
뒤에서는 호박씨 다 까고 살지만 기독교적 서양이나 유교적 동양(중국과 우리)에서는 '성(性)'을 대놓고 까발리지 않는다. 그러나 [국화와 칼]의 분석에 의하면 일본인에게 성적인 억압은 없다. 아주 성의 노예가 되지 않는 한, 사람이 '충'이나 '효' 또는 '의리'나 '의무'와 같은 세인의 평판에 체면을 상하지 않는 한, 음란한 것들은 얼마든지 허용된다. 즉, '인의'가 주요덕목인 중국식 가치관과 달리 세상의 평판에 '오명(같은책, <8장>)'을 입지 않는 한, 모든 도덕률과 덕목이 '각자 알맞은 위치(proper station)'에 있는 한, '성' 뿐만 아니라 무엇이든 대놓고 허용되는 것이다. 

[국화와 칼]에 따르면, 이런 문화의 뿌리는 일본의 오래된 봉건적 신분제에서 유래한다.  
일본에서 봉기는 있어도 '혁명'은 없는 이유도 그렇고, 메이지유신이 '진보'라기 보다는 봉건적 막부정치를 탈피하여 천왕정치의 '복고'였다는 [국화와 칼]의 관점 또한 그렇다. 세상의 체면을 중시하고 그것을 지키는 것이 자기에 대한 '의리'이자 '의무'라 생각하며, 자신을 모욕한 자에 대한 극단적 복수도 은혜를 갚는 것과 동일하게 '의리'로 인식되고 어쩔 수 없이 '의리'를 지킨 후 집단 할복이나 자살 등을 기꺼이 행하는 문화 또한 '각자 알맞은 위치'에서 이뤄지는 한 바람직한 것이라고 일본인들은 판단한다는 거다.


"어린 새는 먹이를 찾아 울지만,
사무라이는 이쑤시개를 물고 있다."
- 일본속담.

근대화에 맞서 칼을 물고 거꾸러진 일본의 사무라이들의 '가오'는 지금도 겸손한 표정의 일본인들 습성을 지배하고 있을는지도 모르겠다.

전력이 안되면서도 천왕을 향한 '충'에 목숨을 걸고 육체적 한계를 정신으로 극복한다는 가미가제식 '정신승리'의 근원은 먹은 게 없지만 배고픔 따위는 정신력으로 이겨내며 '이쑤시개를 물고' 있는 사무라이 정신이다.

'선악'의 이분법에 얽매이지 않고, 선이든 악이든 '각자 제자리'에만 있다면 용인한다는 일본인의 정신은 악 또한 선에서 나오고 어둠이 없다면 밝음도 없다는 보편적인 '모순'의 인식과 그리 달라 보이지는 않는다. 이는 동서양을 막론한 사고가 된지 오래다. 다만 [국화와 칼]을 통해 일본인들의 경우 굳이 그 특성을 꼽자면 '각자 알맞은 위치 갖기(Take one's proper station)'가 되겠다. 그런데 봉건적 습성인 그 특성이 무슨 대수인가. 나 또한 개인적으로 루스 베네딕트처럼 전근대적인 일본식 봉건 '신분제'보다 '평등'을 더욱 중시하나 내가 보는 '평등'은 베네딕트 여사가 추앙하는 미국의 자본주의식 법적 '평등'과 다르다. 나 또한 '천왕' 같은 어이없는 군주제 따위는 개나 줘버려야 한다고 생각하지만 영국이나 북유럽에도 아직 낡아빠진 '군주제'가 건재하고 우리나라도 왕은 없지만 제왕과도 같이 공고한 정치권력과 자본권력을 중심으로 한 뿌리깊은 신분의식이 있는데. 

지금은 [국화와 칼] 식의 잣대나 들이대는 게 아니라 세계체제에 속한 그 어느 민족이 되었든 낡은 계급체제와 신분의식을 무너뜨리고 실질적으로 '평등'하게 다시 세워야 할 시기 아닌가.

'알맞은 위치'란 그 낡은 것들의 파괴를 통해 다시금 정립된다.

***

- [국화와 칼(The Chrysanthemum and the Sword)](1946), Ruth Benedict, 김윤식/오인석 옮김, <을유문화사>, 1974~2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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빅 슬립 레이먼드 챈들러 선집 1
레이먼드 챈들러 지음, 박현주 옮김 / 북하우스 / 200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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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리얼리즘'으로서의 '개그'
- [깊은 잠(The Big Sleep)], 레이먼드 챈들러, 1939.


"나는 아주 영리한 사람이오. 감정도 없고 양심의 가책도 없지. 오로지 아쉬운 것은 돈뿐이라고... 그 돈에 내 인생을 걸고 경찰들이나 에디 마스와 그 부하들한테 미움 사는 일도 감내하며 총탄에 돌진하고 곤봉에 머리를 얻어 맞고 (돈많은 의뢰인인) 당신 같은 사람에게도 고맙다고 하는 거요... 그런데 그렇게 하려다 보니 나 자신은 개자식이 되는군. 괜찮소. 별로 신경쓰진 않으니까."
- [빅 슬립], <32>, 레이먼드 챈들러, 1939.


1.

어린 시절, 오락실에서 아주 살았다.
참새가 방앗간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다는 말에게 당시의 나는 진심이었다. 등교길과 하교길에 무조건 들렀다. 돈은 없었으니 어쩌다 운좋게 주머니에 동전이 있으면 한판 50원 하던 게임 몇 판을 했지만, 어머니가 주신 용돈을 초반에 오락실에서 탕진하고는 대부분 빈털터리로 살던 나는 오락실의 '그림'을 주로 보러 갔다. 

미술과 그림을 좋아하긴 했던 나는 이론은 몰랐거나 아예 그런 게 있는지 조차 몰랐으니 가장 가까이에서 언제든 갈 수 있던 오락실에서 '그림 감상'을 했다. 더 어렸던 시절 1970년대 인천 십정동 할머니의 화투장 그림에서 시작했던 나의 '미술관'은 1980년대 들어 서울 이문동의 어머니 서랍속 화투장 그림에서 우연히 다시 열렸고 노년의 지금과 달리 한창 일하던 젊은 시절의 어머니는 어린 내가 화투장 들여다 보는 걸 금지하셨다. 결국 나는 아버지가 '남자는 이것저것 해봐야 한다'고 하시며 집에만 틀어박혀 있던 나를 처음 데려가서 갤러그를 처음 시켜줬던 오락실을 혼자 가게 되었다. 
오락실이 나를 이끌었던 이유는 '게임'이 아니라 '그림'이었다. 
그러던 1985년에 나는 동양의 화투그림 또는 서양의 팝아트 따위를 연상시키던 운명의 '너클 죠'를 만났다. 본격적으로 '나만의 오락실 미술관'은 그렇게 문을 열었다.


2. 

오락실에서 그림감상을 하던 나는 중학교 2학년이었던 1988년에 오락실 들렀다가 거기서 만난 동네 구씨 형제네 집에 가서 라면을 얻어먹었고 민화투를 배웠다. 부모님이 일나간 오후의 구씨 형제 빈집에서 나는 그렇게도 좋아하는 화투그림을 실컷 보았고 그조차 질려서 19세기말 애거서 크리스티의 장편 추리소설을 처음 읽었으며 엘러리 퀸을 비롯한 20세기초 미국 추리소설을 읽어보았다. 나보다 한살 많고 또 한살 어린 동네친구 구씨 형제는 전혀 책을 읽지 않았지만 기이하게도 그 형제의 방 책꽂이에는 팬더 로고로 된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영미 추리소설이 몇 권 있었다. 물론 그 책들을 사주었을 것으로 추리되던, 내가 한번도 뵙지 못한 구씨 형제의 아버지께서는 꽤 두꺼운 포르노잡지를 아들형제의 책꽂이에 같이 꽂아둘 만큼 대담하시진 않았다. 나는 구씨 형제의 노력 덕택에 그 집 다락방 어느 구석에 수줍게 숨어있던 아주 두꺼운 미국 포르노잡지라는 걸 생전 처음 볼 수도 있었다. 여섯식구 중 여자가 넷인 집에 살았던 난 너무도 당연한 얘기긴 하겠지만 여자의 성기가 그렇게 생긴 건지 그 미국 포르노잡지에서 처음 보았다.

어린 시절의 나를 지배했던 주요한 감각은 시각이었다. 나중에 '시각예술(Visual Art)' 분류로 알게 된 '그림'이 어린 나의 주된 관심사였던 것 같다.

해문출판사에서 나온 미국 추리소설의 삽화는 미국의 화가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 풍의 '팝아트(pop-art)' 류의 그림이었다. 20세기초 미국의 DC 코믹스를 통해 등장한 배트맨과 수퍼맨 따위의 만화들 장면을 미술작품처럼 그려서 대량으로 찍어낸 후 대중유통하는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미술상품 생산방식이다.우리나라 삼성재벌 회장 같은 요즘 자본가 집안 미술 컬렉션에서 수십억에 거래될 리히텐슈타인의 팝아트는 아마도 20세기초 미국 신흥자본주의에서는 '페이퍼백' 책처럼 박리다매 마케팅을 그 유통의 기원으로 한다. 초기에는 미술유통의 혁명이었을 팝아트 또한 시대의 흐름에 편승하면 그토록 경멸했을 소수 지배계급의 매혹적인 포로가 되어 버린다. 생계와 연결된 예술의 숙명이다.


3.

리히텐슈타인 풍의 미국식 '팝아트' 그림을 떠올릴 때마다 내 머릿속에는 중절모를 쓰고 권총을 든 백인남성과 삐딱구두를 신은 금발의 아가씨가 헤집고 다니는 미국의 대도시가 겹쳐지는데, 1980년대 해문출판사의 문고판 미국 추리소설 덕분이다. 책 뒷표지의 목록에서 보았을 [몰타의 매]나 [깊은 잠] 등속의 소설을 당시에는 직접 읽어보지는 못했지만 아마도 그 삽화들 자체가 미국식 팝아트의 향연이었을 것으로 상상한다. 실제로 그렇지 않았다 한들 상관없다. 나는 미국의 사립탐정 필립 말로의 활약과 함께 연상되는 머릿속 팝아트의 전시관이 그리 싫지는 않다.

자본주의 체제는 경멸하지만, 일본의 1970년대 자본주의적 영웅 그레이트 마징가를 좋아하는 나는, 가진 게 돈밖에 없는 의뢰인들을 맘껏 비웃으며 대도시를 활보하고 모험하는 탐정 필립 말로와 함께 연상되는 미국식 팝아트 그림도 좋아한다. 아마도 그 기원은 원색의 화투그림일 테고 말이다.


4.

"그는 나를 향해 빙글 돌았다. 전통있는 학교의 신사들처럼 그가 한두발 더 쏘게 해주었다면 멋졌을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그의 총구는 여전히 들려 있었고 나는 더이상 오래 기다릴 수 없었다. 전통있는 학교의 신사가 되기에는 시간이 모자랐다."
- [깊은 잠], <29>, 레이먼드 챈들러, 1939.

소설의 처음부터 끝까지 이런 식의 개그 또한 팝아트 못지 않게 난무한다. 
1930년대 미국의 '하드보일드(hard-boiled)' 추리소설의 거장 레이먼드 챈들러(Raymond Chandler : 1888~1959)의 대표작 [깊은 잠(Big Sleep)](1939)의 주인공인 사립탐정 필립 말로(Philip Marlowe)는 본인에게 "당신도 양아치인가요?"라 묻는 매혹적인 여성에게 "나도 양아치오"라고 숨도 안쉬고 바로 인정한다. 상대방이 총으로 위협하는 순간에도 상대방이 모르지만 필요하다고 판단되는 본인이 가진 정보를 믿고 협잡하며 끊임없이 개그를 날린다. 모든 여자는 사실 멋진 외모보다는 용기와 개그를 남자의 최고 덕목으로 본다는 잘생기지 못한 우리 남자 부류들의 신앙이 맞을 수도 있다는 대목인데 실제로 소설 [깊은 잠]에 등장하는 대부분의 여자들은 이 양아치 탐정 필립 말로를 경멸하는 척 하면서 동시에 끌린다. 물론 말로가 외모도 잘생겼으며 키도 180센치 중반이라는 건 공공연한 비밀이지만, 궁지에 몰려 피를 흘리면서도 끊임없이 개그를 나불대는 말로를 몰래 풀어주던 '은빛 가발의 여인' 모나 마스는 '숨쉴 때마다 농담을 해대는' 그 입 좀 다물고 열심히 두시간 쯤 도망치면 살 수 있다는 식의 충고를 잊지 않는데 그녀가 말로에 끌려서 풀어준 주된 이유가 아마도 그의 가늘고 긴 개그정신에 기인한 것은 아닌가 추정된다.
[깊은 잠]에서 말로가 부유한 의뢰인 스턴우드 장군의 명시적 의뢰가 없었음에도 사라진 장군의 사위 러스티 리건을 찾는 이유도, 그 과정도 명확하게 와닿지는 않는다. 고전 추리소설의 탐정들의 연역적이고 논리적인 추리기법은 필립 말로와 같은 자본주의 대도시 프롤레타리아 탐정에게는 사치다. 지방검사 수사관보였지만 상명하복 따위는 술 한잔으로 털어버리고 줄담배 연기에 비아냥을 썪어 내뱉어대다가 쫓겨나 사립 탐정사무소를 차린 그는 일거리가 떨어질까봐 불안해서 휴가도 못가고 일당 25달러에 기름값과 술값 같은 경비에 목숨을 거는 철저한 프롤레타리아지만, '개그'라는 인류의 아주 중요한 유산을 가늘고도 질기게 이어가는 위인이다. 

험프리 보가트가 주연했다는 영화는 보지 못했지만 절체절명의 위기 순간에도 어쩌면 유언이 될지도 모르는 자잘한 개그를 상대방에게 남기는 이 위대한 정신은 어쩌면 007 같은 영화에서도 언뜻 본 듯 하기도 하고, 아마도 그 최극강은 영화 [데드풀]이 쉬지않고 날리는 개그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개그를 유언으로 남길까 가끔 고민하는 내가 사실 살고 싶은 삶이기도 하다. 아쉽게도 내게는 말로나 데드풀 같이 소설이나 영화같은 담대한 용기가 부족하니 언제 한 번 오즈에서 도로시와 방금 헤어진 사자를 만나봐야 할 것 같다.

헤밍웨이의 소설기법이라는 '하드보일드'는 계란 완숙노른자처럼 딱딱하고 비정하며 냉혹한 현실을 묘사한 '리얼리즘'의 일종이지만 지천명을 2년 더 넘긴 추리소설가 레이먼드 챈들러의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은 이런 '리얼리즘'은 위스키와 줄담배, 총소리와 개그로 날려버린다. 세부묘사는 추상적이라 독자가 따라잡기 쉽지 않기도 하지만, 결국 자본주의 대도시 삶의 현실을 생생하게 구현하는 '리얼리즘'을 담아낸다.


5.

만일 내가 소싯적부터 도박을 잘 했거나 게임에 일가견이 있었다면, 아마도 지금의 나는 모든걸 탕진한 빈털터리 술주정뱅이가 되었거나 차가운 감옥방 또는 서늘한 오동나무 관 속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었을는지도 모르겠다.

오락실에서 아예 살던 나는, 그러나 다행히도 이미 빈털터리였고 간도 작아서 게임이나 도박에는 도전도 못해보고 오로지 '그림'만 구경했다. 고스톱은 아주 가끔 늙은 어머니와 점백으로 치기는 하지만 번번이 잃기 일쑤고, 테트리스는 한판에 99판 세시간반 기록이 있고 비행기 오락은 곧잘 했지만 그 외에 오락실에 자주 간 이유는 '팝아트'와 같은 오락 '그림' 하나하나에 이끌렸기 때문이었다.
물론 컴퓨터 게임 좀 그만하라는 내게 고딩아들이 "그러는 아버지는 제 나이 때 과연 어떠셨습니까?"라고 작정하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그림감상'을 위해 오락실에서 주로 살았다는 답변은 부자지간에서는 뭔가 궁색할 게 뻔하다.

'하드보일드' 추리소설이 냉혹한 당대 현실을 날것 그대로 보여주는 '리얼리즘'은 아니다. 그러나 끊임없이 날려대는 얄미운 개그를 통해 결국 비정한 자본가계급과 이들의 뒤를 닦아주면서 뽑을 건 뽑아먹고는 비아냥대는 프롤레타리아 탐정, 부패한 계급을 따라 탐욕과 욕정에 몸을 맡기다가 지배계급을 대신하여 타락의 희생양이 되는 팜므파탈 여성을 통해 부조리한 현실의 단면을 폭로하는 '리얼리즘'은 구현하고 있다.

나에게 '하드보일드' 추리소설과 함께 늘 따라붙는 '팝아트' 이미지 또한 실제 만화가보다도 못한 그림 솜씨일지언정 '시각예술'로서의 '그림'을 대중화시키기 위한 예술적 '리얼리즘'의 한 형태로 언제나 각인되어 있다.

그 '리얼리즘'은 재벌들이 몇백억을 들여 원작을 소유하든 말든 상관없이 존재하는 현실이다.

***

1. [빅 슬립(The Big Sleep)](1939), Raymond Chandler, 박현주 옮김, <북하우스>, 2004.
2. [범죄소설의 계보학], 계정민, <소나무>, 2018.
3. 로이 리히텐슈타인(Roy Lichtenstein)의 1960년대 '팝아트(Pop-art)' 그림들 인터넷 갈무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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