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 - 러시아어판 완역 레닌 에센스 1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 레닌 지음, 최호정 옮김 / 박종철출판사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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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닌을 읽던 시간 : 1993~1995년
- [철학노트] / [유물론과 경험비판론] /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 / [제국주의론] / [국가와 혁명] 외


"통일물의 분열, 그리고 통일물의 모순되는 성분에 관한 인식은 변증법의 '본질'이다... 과학사를 통해 분명히 검증... 수학에서는 +와 -, 미분과 적분. 역학에서는 작용과 반작용. 물리학에서는 양전기와 음전기. 화학에서는 원자의 화합과 분해. 사회과학에서는 '계급투쟁'. 대립물들의 동일성이란 자연(여기에서는 정신과 사회도 포함)의 모든 현상과 사건들 안에 있는, 모순되고 상호배제하는 대립된 경향들을 인식(발견)하는 것을 의미한다. 세계의 모든 사건들을 그 '자기운동'에서, 그 자발적 발전에서, 그 살아있는 생활에서 인식하는데 필요한 조건은 그 모든 사건들을 대립물의 통일로서 인식하는 것이다... 상호배제하는 대립물의 투쟁은 발전과 운동이 절대적이듯이, 절대적이다... '변증법'은 다름아닌 (헤겔과) 마르크스주의의 인식론이다."
- 레닌, [철학노트], <6장. 변증법의 문제에 대하여>, 1914.


1.

- 나는 노동자의 아들이니까.

20대 내내 여차하면 내가 어금니 위에 올려놓고 혼자 잘근잘근 씹던 말이었다. 
나보다 똑똑하거나, 나보다 말을 잘하거나, 아니면 나보다 잘 사는 사람들을 보며 줄곧 혼자 내뱉던 말이었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는 진심 '보수'였다. 어른들 말씀대로 세상에서 김일성이 제일 싫었고, 사립대학 병설 사립중고등학교인 모교에서 알려준 대로 '전교조' 선생님들도 싫었다. 학교에서 학생들 패는데 비범한 기술과 특별한 조예를 갖춘 선생들은 어째 모두 '전교조' 가입했다는 소문이 몇년간 횡행했다. 그나마 유일하게 사회비판적이었던 정치경제 선생님은 다행히 제자들을 때리진 않았지만 '또라이'로 소문났다. 아마도 그 선생님도 '전교조'였을 것 같았는데, 사립고등학교의 그 어떤 교사도 '전교조'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전교조'는 말없이 음험한 소문으로 퍼지던 '학교괴담'과도 같았다. 우리 학교 운동장 지하에 공동묘지가 있었다는 전설과도 같이.
때는 1989년부터 1992년까지였다.

심지어 중학교 시절 나는, 2차대전의 무솔리니 파시즘과 히틀러 나치즘에도 관심이 많았다. 독일의 킹타이거(티거)나 야크트판더 전차와 비스마르크와 티르피츠 전함, 융커스 폭격기 및 메서슈미트 전투기등은 선망의 대상이었다. 그래도 '친일파'는 싫었던지 일본군국주의 전투기와 전함은 숨어서 좋아했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딱 '수구꼴통'이었는데 당시의 나는 아직 애기였으므로 다행히 아직 '정치'에 관심은 없었고 대부분의 시간을 오락실이나 학교운동장에서 보냈다.

스무살이 되어 대학 오리엔테이션 참가하는 버스에서 자기소개 시간에 알았다. 나와 비슷한 친구들이 이제는 더 이상 나의 일상에는 없다는 것을. 지금 생각해보면 잘 보이지 않았거나 얘기하지 않았던 것일 테지만, 아무튼 당시 내가 보기엔 그랬다. 고만고만한 동네친구들만 득시글했던 학창시절과 달리 스무살의 세상은 나보다 나이 많은 재수생과 삼수생, 군대까지 다녀온 형들도 많았고, 전국 각지에서 모인 친구들은 각지의 다양한 사투리로 가끔 통역이 필요하기도 했으며, 왠지 다들 부잣집 자제들 같아서 가난했던 나는 겉으로는 결코 아닌척 했지만 속으로 위축되었다. 하지만 더 이상 나는 우리집을 보고 친구 아닌 동급생들이 뒤에서 수군대진 않을까 찜찜해 하지 않아도 되었고 어디 가서 주눅들지 말라고 만원짜리 몇 장을 자주 쥐어주시던 가난했지만 통큰 어머니가 계셨다. 우리 동네가 아닌 학교 앞에 가면 적어도 나와 대학 사람들은 모든게 '동등'했다.

고등학교 때까지 영어를 무척 좋아했다. 전국 모의고사에서 국어와 영어만은 1%였다. 나는 '영문과' 말고 다른 과를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나중에 직장생활하면서 내 인생에도 '법대'가 있었다는 것을 왜 몰랐을까 싶기도 했고, 마흔이 넘어 '모든 책이 다 역사책'이라는 깨달음에 왜 '사학과'를 생각하지 못했을까 아쉽긴 했다. 하지만 내 지론은, 다시 그 때로 돌아간다 한들 난 역시 똑같이 살았을 거라는 거다. 다시 돌아간 나는 지금의 내가 아니라 여전히 그때의 나이기 때문이다.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문학'은 아직 잘 몰랐고, 1993년 2월의 대학 오리엔테이션 버스 안에서 만난 같은과 동기들은 다들 나보다 잘나 보였다. 충남 태안에서 온 공부 잘해 보이는 친구는 '전교조' 선생님한테 배운 <솔아 솔아 푸르른 솔아>를 불렀고, 딱 서울 뺀질이 친구들은 나보다 훨씬 잘생긴 데다가 말도 품위있게 잘했다. 경남 마산 출신 친구는 얼굴이 철면피 자체로 워낙 여기저기로 나대는 바람에 '정박아'라는 별명을 바로 득템하기도 했다. 서울 동대문구 이문동 출신임에도 시골 어디서 왔느냐, 삼수생이냐 초면에 숱한 질문을 받던 나 또한 동기들처럼 잘나 보이고 싶었지만 내세울 게 없어 최신곡 랩이었던 김건모의 <잠 못드는 밤 비는 내리고>를 전날 내내 외워서 자기소개 시간에 불렀다. 관광버스 앞뒤를 왔다리갔다리 하면서 읊은 그 노래는 반응이 나쁘지 않았고 이후 일년 내내 술집과 엠티 등지에서 나는 그 노래를 줄창 불러댔다. 
나의 궁핍함과 열등감은 가수 김건모가 대충 상쇄시켜주었지만, 영어를 좋아했던 나는 '영자신문사'에 들어갔고 신문기자를 꿈꾸고자 했다. 영자신문사 시험을 봤고 합격하여 간 첫 신고식에서 신문사의 전통과 같았던 학군단 선배들이 시키는 말도 안되는 행태에 기겁을 한 나는 바로 영자신문사를 때려치웠다. '수구꼴통' 기질에 지금으로 치면 '일베' 끼가 다분하던 내가 보기에도 영자신문사의 쓰질데기 없는 역사와 전통은 참고 봐줄 수가 없었다. 군부독재에서 벗어난 '문민정부'에서 군사문화의 잔재가 여전히 횡행한다는 게 이해가 안되었고 군부독재에 저항했던 대학의 선배들에 비하면 영자신문사의 전통이 너무도 비루해 보였다. 저렇게 영어공부나 하다가 신문기자가 되어봐야 뭐하나 싶었고 학과의 선배들과 잘나보이던 자유로운 영혼의 동기들 얼굴이 아른거렸다. 아마도 91, 92학번 선배들의 후배 '의식화'가 꽤 성공적이었던지 파시즘을 동경하던 '수구꼴통'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빌어먹을 영자신문사 덕분에 급격히 '좌경화'되었다. 신고식 며칠 후 사직서를 내는 나에게 이렇게 그만두면 후회할 거라던 영자신문사의 편집장의 말과 반대로 난 그 신문사 일을 계속 했으면 두고두고 더 크게 실망했을 거였다. 

문과대로 다시 돌아온 탕아인 나를 학과 선배들과 동기들은 반겨주었고, 난 다시 술집과 과 학생회 행사에서 소주병에 꽂은 숟가락을 김건모 마이크처럼 잡고 "쓸픈 노래는 듣고 싶지 않아~"를 불러 제꼈다.
다들 반갑고도 즐거운 일상이었다. 그럼에도 전국 각지에서 모인 나보다 잘나고 똑똑하고 말 잘하고 집도 부자인 친구들에게 가진 모종의 열등감은 여전했고, 오히려 더 강해졌는데 나를 버티게 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그래서 찾은 말이 이 말이었던 거다.

'나는 노동계급의 아들이니까', 라는.


2. 

"국가가 화해불가능한 계급 적대감의 산물이고 사회의 상부에 위치하면서 '사회로부터 자기를 스스로 점점 소외시키고 있는' 권력이라면, 억압받는 계급의 해방은 '폭력혁명'을 통하지 않고서는 불가능할 뿐만 아니라, 지배계급이 창출했고, 또한 이러한 '소외'를 이루고 있는 몸체인 국가권력기구의 '파괴를 통하지 않고서는' 계급해방이 불가능하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결과적으로, 나는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 공부는 안 했고, 영자신문사를 초단기간에 때려치우면서 신문기자의 꿈은 바로 접었다. 나는 영문과 내 철학학회에서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우정어린 '과학적 사회주의'를 함께 읽었고 숱하게 데모대 뒤 꽁무니를 쫓아다녔지만 전경한테 두들겨 맞고 달려갈까봐 무서워 제일 먼저 내빼기 일쑤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형님 덕분에 어느새 '노동자의 아들'에서 '노동계급의 아들'로 진화한 나는 아쉽게도 투쟁의 최전선에 파이프를 들고 서 있는 '전사'는 못 되었다. 똑똑하지도, 말을 잘하지도 못하고, 부자도 아닌 나는 '전투력' 조차도 없어 술만 마시다가 돈도 없으니 친구 자취방 앞 골목에서 새벽 깡술을 마셨다. 그때 당시 하늘과 같던 87학번 선배가 지나던 길에 '정박아', '지진아', '벅스터(내가 벅스터다)' 우리 셋의 깡술판에 앉아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가 뭐냐 물었고 횡설수설하는 우리 삼인방에게 경주 출신의 그 선배는 파시즘과 독재의 차이는 '폭력'이 있는가 없는가의 차이라면서 "공부 쫌 해라!"는 한마디를 남기고는 표표히 사라졌다. 
멋졌다. 
그 순간 '나도 공부 쫌 해서 저런 선배가 되자'고 나는 내심 결심했던 것 같다. 

대학 1학년 때는 마르크스와 엥겔스 선생의 우정이 깃든 글들을 읽어 보았다. 물론 마르크스의 주저 [자본론]은 군에서 제대한 1998년이 되어서야 제대로 읽었지만 그 외 다른 저작들은 대부분 1993년에 읽었다. 이제 '공부 쫌' 하기 위해서는 선택해야 했다. '철학'이나 붙잡고 아는 척이나 할 것인가, 아니면 그 선배처럼 후배들에게 깊은 인상을 남기는 '실천'을 할 것인가. 
그렇게 1994년의 나는 '레닌'을 읽기 시작했다.


레닌은 1917년 러시아 소비에트혁명을 이끈 사회주의 혁명가다. 나보다 말도 잘하고 오지랖도 넓었던 '정박아'는 1902년 레닌의 [무엇을 할 것인가]를 들고 다녔지만, 혼자 틀어박혀 자습을 했던 나는 1908년 레닌의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을 읽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에서 레닌은 '불꽃(이스크라)' 같은 혁명가의 지하조직과 실천을 불같이 토했지만, [유물론과 경험비판론]의 레닌은 평생 관념론과 싸운 유물론자 엥겔스의 전통에 따라 당대 오스트리아 마흐주의로 대표되는 사이비 유물론인 '경험비판론'을 맹렬하게 비판했다. 사실 양자역학의 현대과학에서 보면 20세기 초 레닌의 교조적 유물론보다 마흐의 '경험비판론'이 더 설득력 있을 수도 있겠는데 어쨌든 오스트리아 '경험비판론'은 지금이 아닌 20세기 초의 이론이었고 당시 다수 노동계급이 상속받은 '변증법적 유물론'에 의해 반박되어야 했다. 레닌은 선학인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사이비 사회주의자 오이겐 뒤링 씨를 신랄하게 까댄 [반뒤링론]의 전통을 이으며 '경험비판론'의 사이비 과학주의를 거의 욕설까지 섞어가며 짓밟아 뭉개고 있었다.

1905년 '피의 일요일' 후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가지 전술]을 쓴 레닌은 부르주아 혁명과 사회주의 혁명의 '2단계 혁명론'을 기계적으로 적용하지 않았다. 자본주의가 발전하지 않은 러시아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의 1단계를 우선 거쳐야 한다는 멘셰비키의 주장을 레닌은 역시 '반동'으로 몰면서 노동계급은 부르주아 혁명 단계에서부터 노동자-농민 독재의 전술을 펼쳐야 한다는 매우 급진적 주장을 펼친다. 이는 마르크스가 1848년 프랑스 혁명에서 계급투쟁 양상을 현실적으로 분석한 전통을 잇는다. 즉 부르주아지는 다수 프롤레타리아트를 이용하여 집권하지만 이내 다수 노동계급을 배신하는 '반혁명'의 시간이 도래하므로 체제를 전복하기 위해서는 노동자-농민 다수의 독재와 헤게모니가 강력하고 광범위적으로 유지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이후 1920년대 그람시의 '헤게모니론'이나 1940년대 마오쩌뚱의 [신민주주의론]과도 맞닿는 면이 있지만, 20세기 벽두 러시아 차르체제에서 레닌의 시간은 '폭력'에 의한 즉각적 혁명을 요구했다. 

그렇다면 이제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관한  러시아 레닌주의와 서유럽 카우츠키의 논쟁을 읽어야 할 단계에 도달하게 된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가 '의회주의'와 동일시되던 1990년대 초반의 대학가에서 칼 카우츠키는 비록 마르크스주의 '교황'의 권위에도 불구하고 널리 읽히지 않았다. 이후 1999년 노동자 정치세력화의 산물인 민주노동당이 창당되고 대중투쟁과 의회전술이 결합되어야 하고 민주주의가 단순한 전술이나 운영원리가 아니라 운동의 중심이 된 이후에야 나는 카우츠키를 읽었다. 1994년의 내게 카우츠키는 레닌이 마르크스주의의 '배신자' 또는 '배교자'로 낙인 찍었기 때문에 안중에 없었는데, 이후에 보니 지금의 진보정당 노선은 더 말할 것도 없이 카우츠키의 강령이었던 것이다. 

카우츠키는 투사나 정치인이 아니라 이론가였다. 그는 엥겔스의 '제2인터내셔널' 교리대로 자본주의가 고도로 발전하면 생산력의 사회화와 생산관계의 사유화의 모순에 의해 생산양식이 사회화되는 사회주의 경제로 자연이행된다는 매우 낙관적인 관점을 기본으로 한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이 실현되던 당시 서유럽의 자본주의 발전단계에서 가능한 시각이었다. 그러나 오랜 기간 러시아 차르의 압제 아래 살아온 러시아에서는 노동자-농민이 의회에서 다수를 점할 방법도, 가능성도 없었으니 민주주의를 보는 방식도 다를 수 밖에 없었다. 즉, 카우츠키에게 보통선거로 노동계급이 다수를 점하는 의회민주주의가 사회민주주의였다면, 레닌주의자에게 민주주의는 한 계급의 독재에 다름 아니었다. 레닌의 사회민주주의 관점에서 보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르주아 민주주의는 부르주아 독재였다. 따라서 부르주아 독재정권을 타도한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다수대중에 의한 민주주의였던 것이다. 실제로 1994년 레닌을 읽던 나에게 민주주의는 독재와 구분되지 않았다. 계급투쟁의 관점에서는 논리적으로 적합한 권력론이었던 것이다.

이제, '국가론'과 '혁명론'은 불가피했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다. 레닌을 읽는 이유는 체제를 전복하는 '혁명'을 읽기 위함이었다. 그렇다면 1916~17년 레닌의 [국가와 혁명]이 종착점이었다. 민주주의는 독재의 다른 말이므로 부르주아 민주주의에 의해 구축된 국가기구는 철저히 파괴되어야 하고 프롤레타리아 다수대중 독재에 의해 다시 건설되는 것. 이것이 [국가와 혁명]이라는 레닌의 미완의 저작이 말하고자 하는 바였다. 실제로 레닌은 마지막 장을 쓰기 전에 "난 이제 그만 펜을 놓고는 총들고 혁명하러 나간다~"며 책을 마치고 있다. 매우 위험했지만 '노동계급의 아들'인 스물한살의 나에게 이만한 매력적이고 고마운 인물과 사상이 있을 수 없었다.

"모든 부르주아 국가는 그들의 형태가 아무리 다양하더라고 끝까지 그 본질을 분석해 보면 '부르주아지의 독재'라는 동일한 본질이 드러난다. 자본주의에서 공산주의로의 이행은 풍부하고 아주 다양한 정치적 형태들을 창출하는 것과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지만, 그 본질은 필연적으로 동일하게 될 것이다.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독재'이다."
- 레닌, [국가와 혁명], 1917.


3.

"헤겔의 논리학 전체를 철저하게 연구하지 않고 또 이해하지 않고서는 마르크스의 [자본론], 특히 제1장(상품)을 완전하게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반세기를 경과하였지만 마르크스주의자 가운데 어느 누구도 마르크스를 이해하지 못하였다.”
- 레닌, [철학노트], 1914.


1995년 10월에 군대 가기 전, 3학년 1학기를 마치고 휴학했을 때 나와 놀아주는 선후배나 동기는 더더욱 없었다. 입대 전까지 나는 아마도 마오쩌뚱의 [모순론]과 [지구전론], [신민주주의론]을 읽었지만 그 속에 온통 레닌 뿐이었다. 19세기 마르크스와 엥겔스의 유럽식 사회주의가 1917년 러시아 억압 문명에서 레닌주의로 실현되었고 1949년 중국의 유교 문명에서 마오쩌뚱주의로 실현되었기에 내 사상의 경로는 마오주의로까지 가야했지만 사실 그리 정치적이지 못하고 실천적이지도 못했던 나는 레닌에서 멈췄다. 더구나 '우리식 사회주의'라는 '주체사상'까지 가고 싶지는 않았다. 나는 '인성론'이니 '품성론' 따위를 거론하며 주석을 옹립하고 세습시키는 북조선은 애초에 사회주의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내가 마오주의까지 가지 못하고 1995년까지도 레닌에 머물렀던 건, 그의 [철학노트] 때문이었다. 
1914년 1차 세계대전의 목전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앞세웠던 '배신자' 카우츠키의 후예들 대부분이 전시공채 발행에 찬성표를 던지며 국수주의(쇼비니즘) 제국전쟁을 옹호하던 그 암울한 시대에 레닌은 마르크스가 그랬듯 대영도서관에 틀어박혔다. 노동자 보통선거권으로 의회에 들어간 진보정당 의원들 중 제국주의 전쟁에 반대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자는 소수였다. 카우츠키도 전시공채 법안에 반대하며 독일 사회민주당의 분당을 이끌었지만 법안에 찬성한 다수 사회민주당 의회주의자들은 카우츠키의 사회민주주의 후예들이었다. 
1914년의 레닌은 이들 모두가 [자본론]을 오독했고 진정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아니었다고 규정했다. 레닌은 헤겔의 [대논리학]을 다시 연구하면서 그 거대 관념론 체계 속에서 '유물론' 사상을 읽어내고자 했다. 변증법적으로 전도되는 그 유물론('변증법적 유물론')의 혁명적 성격을 규명하지 못하는 한 "어느 누구도([철학노트])" 마르크스의 [자본론]을 이해할 수 없을 것이었다. 얼마 동안이었을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1914년의 암울한 제국주의 전쟁의 세계 정세에서 레닌은 제국주의 심장 런던의 도서관에서 아리스토텔레스를 읽었고 데모크리토스와 에피쿠로스는 물론 헤겔 철학을 다시 읽으며 '유물론'을 재정립하고 '혁명'의 무기로서의 철학의 칼날을 갈았다.

1916년 1차 세계대전이 한창일 때 레닌은 '독점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 [제국주의론]을 썼는데 사실 볼셰비키 최고의 경제두뇌 부하린의 '제국주의 이론'을 따른 것이지만 레닌 특유의 신랄함과 이론적 단순화의 미학을 담고 있어 내가 가장 최고로 치는 레닌의 저작이다.

한편, 1920년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은 소비에트혁명으로 권력을 잡은 후 '프롤레타리아 독재(민주주의)'를 옹호하기 위한 논쟁서라 집권세력의 변명은 그리 마음에 들지는 않았다.


영어를 좋아했지만 영문학은 공부하지 않았고 그래도 문학은 좋았으나 철학책을 들고 다녔던 이십대 초반의 나는 그렇게 혁명가 레닌의 1914년 [철학노트]에서 멈추고 말았다.
엄밀히 말하면 레닌의 [철학노트]는 정식 출간을 위한 저작이 아니라 자습을 위한 학습노트였고 나는 '혁명가'로서의 레닌이 아닌 '철학자'로서의 레닌을 읽었다. 
잠시의 공백 후 1998년 내게 알튀세르의 시간이 오기 전까지 적지 않은 시간 동안 무엇을 읽든 내게는 언제나 레닌이 보였다.

레닌을 읽던 시간, 
1993년부터 1995년 10월까지의 이야기다.


***

1. [철학노트](1914), 레닌, 홍영두 옮김, <논장>, 1989.
2. [유물론과 경험비판론](1908), 레닌, 박정호 옮김, <돌베개>, 1992.
3. [무엇을 할 것인가 -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1902), 레닌, 최호정 옮김.
4. [민주주의 혁명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두 가지 전술](1905), 레닌, 이채욱/이용재 옮김, <돌베개>, 1992.
5. [제국주의 – 자본주의의 최고단계로서](1916), 레닌, 박상철 옮김, <돌베개>, 1992.
6. [국가와 혁명](1917), 레닌, 김영철 옮김, <논장>, 1994.
7. [공산주의에서의 '좌익 소아병'](1924), 레닌, 김남섭 옮김, <돌베개>, 1989.
8. [민주주의와 독재](1976), 에티엔 발리바르, 최인락 옮김, <연구사>, 1988.
9. [에르푸르트 강령](1891), 칼 카우츠키, 서석연 옮김, <범우사>, 2003.
10. [프롤레타리아 독재/테러리즘과 공산주의:혁명의 자연사에 관한 고찰](1918), 칼 카우츠키, 강신준 옮김, <한길사>, 2006.
11. [신민주주의론](1940),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12. [실천론/모순론](1937), 마오쩌뚱, 이등연 옮김, <두레>, 19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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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의 슬픔 - 근대의 문턱에서 좌절한 중국 문명을 반성하다
샤오젠성 지음, 조경희 외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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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주의자'의 중국문명사 비판
- [송나라의 슬픔](2009), 샤오젠성, 조경희/임소연 옮김, <글항아리>, 2021.


"(진나라의) 일원화된 정치 설계는 권력에 대한 끝없는 탐심을 지닌 역대 왕조의 욕구를 만족시켜 주었기 때문에 이후 역대 왕조의 제도적 모델이 되었다. 하지만 이러한 사회구조는 서주처럼 천자, 제후, 대부, 국인이라는 다극적 힘으로 서로를 견제하고 균형을 이루는 체제가 아니었다. 이 체제 아래서는 황제와 관료(통치자), 그리고 백성(피통치자)이라는 양극의 힘만 있을 뿐이어서 사회는 매우 불안정해졌다. 통치자가 우위를 점하면 전제이고 피통치자가 우위를 점하면 혁명이었다."
- [송나라의 슬픔], <3장. 폭력과 전제로 비롯된 재난>, 샤오젠성, 2009.


냉전 이후 미-중 간 대립이 치열하다.
미국은 '자본주의', 중국은 '사회주의' 대국인 듯 하나, 바야흐로 21세기는 체제의 대립이라기 보다는 '불평등'의 세계체제에서 각국의 이익만이 충돌한다. 전세계 민중들은 '불평등'을 타파하기 위해 결집하는데 국가권력들은 이에 편승하는 듯 하면서도 기후위기가 임박했든 말든 '국가자본주의' 이익을 위해 전쟁도 불사한다. 
미국이든 중국이든 모두 '국가자본주의' 체제라는 점에서 대동소이하다.


중국의 언론인 샤오젠성(1955~)은 중국의 문명사를 비판적으로 돌아보는 책 [중국문명적반사(中國文明的反思)](2009)에서 현대 중국의 체제를 신랄하게 비판한다. 중국사를 큰줄기로 하여 서술하는 이 책은 2007년에 중국 당국의 심의에 걸려 대폭 삭제된 채 출간되었다가 2009년 홍콩에서 무삭제로 재출간되었다. 
결론적으로 저자는 지금의 '사회주의' 중국을 '자유주의'적 관점에서 맹렬하게 비판하는데 그 비판적 근거는 진시황의 진나라로부터 설계된 중앙집권적 전제와 독재적 정치체제다. 2021년 한국어판의 제목은 [송나라의 슬픔]이다. 샤오젠성이 보기에 중국 문명사에서 가장 전성기는 5대10국 이후 조광윤이 건국한 송나라였고 원-명-청의 전제 독재가 다시 들어서면서 중국문명과 인권이 재차 무참하게 짓밟혔으므로 그에게 중국사는 그 자체로 '송나라의 슬픔'이었다.


"송나라는 자유롭고 개방적인 정책을 펴는 한편 우민정책을 타파했다. 송나라 백성은 언론의 자유, 사상의 자유, 종교의 자유를 보장받았고 나라의 법제는 완비되었으며 사회는 나날이 번영했다. 뛰어난 인재가 대거 배출되었음은 물론이다. 하지만 명나라가 건국되고 주원장이 전제통치를 펴면서 송나라의 사회상은 철저히 파괴된다. 주원장은 송나라의 자유롭고 개방적 정책을 계승하는 대신 남송때 나타난 도학(성리학)을 수용하고 발전시켰으며 그렇게 인성파괴의 시대가 도래했다."
- [송나라의 슬픔], <6장. 황권지상 인권추락의 시대>, 샤오젠성, 2009.


샤오젠성이 중국문명사를 돌아보는 결론은 하나다.
지금의 '사회주의' 중국은 사회적으로 개인의 인권을 짓밟고 정치적으로 견제받지 않는 일당독재 국가이므로, 영미 서구사회처럼 바뀌어야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주장은 첫째 개방적 인재선발과 둘째 사유재산 보호, 셋째 언론자유와 개방정책, 넷째 '인권보장법' 제정(같은책, <결론>)이다.

그가 주장하는 중국사의 적폐로서 황제 개인독재의 전제정치는 동서고금을 막론한 심각한 역사적 병증임에 틀림없다. 
하늘과 땅을 나눈 반고 시대 이후 삼황오제 시기부터 중국인은 서양인과 같은 '신앙'이 없이 '인간화된 신'을 믿은 결과 하-상나라의 독재적 왕권을 신성시했고 주나라와 춘추전국시대의 봉건제도를 통해 '민주적' 가능성이 잠시 나타나기도 했지만 진시황이 전국의 민중들을 몰살시키면서 이룩한 '대일통' 이후 독재자를 신격화('천자')하는 정치문명적 전통을 이어왔다는 것이다. 마오쩌뚱은 이러한 전제정권을 뒤집어 엎은 숱한 농민혁명이 중국역사를 이끌어온 주된 동력이라고 했다. 그러나 마오쩌뚱의 중국 사회주의 혁명을 이러한 중국적 전제정치의 대단원으로 보는 샤오젠성에게 농민혁명은 문명의 파괴행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2천만명의 춘추전국시대 인구가 진나라의 통일과 8년간의 초한전쟁을 거치면서 반토막 났고 유방이 건국한 전한시기에 회복된 인구수는 후한 말 황건농민반란과 삼국쟁투 과정에서 1/7 정도 남았으며 수나라 초 다시 회복된 인구가 수나라 말기 군웅반란을 거치며 1/3 토막 났다가 당나라의 정관의 치와 개원성세를 거쳐 다시 회복되는 과정이 반복되었다는 것이다(같은책, <7장. 기형의 사회>). 부패한 왕조의 타도 후 들어선 새로운 왕조는 황권 독재의 반복이었을 뿐이므로 다수에 의한 혁명은 신문명을 건설한 것이 아니라 '문명파괴'에 불과하다는 것이 샤오젠성의 일관된 역사관이다. 

이 중 예외는 한나라 문제와 수나라 문제 양견, 송나라 태조 조광윤 정도였다. 유방 사후 외척인 여후가 타도되면서 귀족들에 의해 '민주'적으로 옹립된 한나라 문제는 이후 경제에 이르기까지 '문경의 치'를 열었는데 사대부의 '공화'적 지배가 가능하도록 노장사상의 '무위'를 실현한 황제였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수나라를 건국한 문제 양견은 5호16국과 위진남북조의 성과를 딛고는 검소한 통치로 경제를 발전시켰으며 당나라 멸망 후 5대10국의 마지막 강국 후주의 세종 시영이 급사하고 어린 왕으로부터 선양을 받은 조광윤의 송나라는 무리한 '대일통'이나 북벌이 아닌 열린 내치를 통해 나라의 상공업을 장려하고 사상을 자유롭게 하여 중국문명의 최대 번영을 이루었다고 샤오젠성은 평가한다. 
현재의 중국공산당을 비판하기 위한 답을 정해 놓았기에 저자가 보는 송나라의 번영은 '사상과 언론의 자유'와 '사유재산 보호'의 유토피아와도 같다. 문치와 사유재산 보호의 천국 송나라는 북쪽 요나라와의 '전연의 맹' 조차도 굴욕이 아닌 평화의 정책이었단다. 북송 마지막 황제 휘종은 이러한 사유재산 보호정책을 거스르며 사욕을 채우다가 망국의 군주가 되었다는데, 전반적으로 황권독재를 비판하는 '공화주의'적 시각에는 나 또한 동감해 마지 않으나 저자가 워낙 현대 중국공산당의 독재를 비판하는 것에 치중한 나머지 '사유재산 신성화'의 18세기 부르주아 혁명정신에 집착하는 것으로 보이기도 한다. 저자는 그러면서도 프랑스혁명 식의 다수 혁명이 아니라 미국 독립전쟁처럼 정치체제에 국한된 혁명이 바람직하다고 결론과도 같은 장황한 <8장. 실패로 끝난 문명전환>에서 강조한다. 송나라 문명이 몽골의 야만에 의해 파괴되고 한족의 반원 독립투쟁으로 세워진 명나라 홍건반란 또한 주원장의 독재로 마무리되었으며 만주족의 청나라는 명나라의 썩은 황권정치 위에 더 공고한 황권독재를 세우면서 중국 근대문명이 결과적으로 파탄났다고 보는 샤오젠성은 '공화주의'적 근대혁명인 1911년 신해혁명 조차도 대규모 반청운동이 됨으로써 중국의 민주주의 혁명이 실패했다고 본다. 나아가 쑨원의 신해혁명이 반청운동에 몰입하지 않고 청나라 황실 주도의 '입헌군주국'이 되었다면 영국처럼 발전된 자본주의가 되었을 수도 있었으며, 지방자치 분권을 기획한 '연성자치'를 쑨원이나 장제스, 마오쩌뚱이 지켜나갔다면 미국과 같은 민주적 정치제도가 가능했을 수도 있다고 본다. 
참으로 자의적인 역사해석이다.  


"헌정의 비밀은 '한 천사의 통치보다 두 마귀의 공정한 경쟁이 낫다'는 데 있다. 민주, 법치, 공화, 헌정제도를 싹 틔울 수 있는 우선적인 조건은 국민의 참정이 아닌 사회 상층세력의 다원화다."
- [송나라의 슬픔], <8장. 실패로 끝난 문명전환>, 샤오젠성, 2009.


'사유재산 신성화'와 그 핵심으로서 '토지 사유화'를 일관되게 틈만 나면 주장하고 중국역사 속 서주나 송나라 등을 지방분권과 상업발전의 국가체제로 미화하는 샤오젠성의 역사관은, "한 천사의 통치보다 두 마귀의 '공정한' 경쟁이 낫다"는 한 줄의 문장이 잘 표현해 주고 있다. 그에게 국가권력은 상업과 자본의 성장에 기여해야 하고 다수 민중의 참정권은 '사유재산'을 보호해야 하는 국가권력을 파괴하므로 제한되어야 하는 것이 된다. 법치와 헌정의 이름으로 민중혁명은 상층 정치가들의 '다원화'로 대체되어야 하는데, '평등'한 이상사회를 꿈꾸는 '천사' 하나보다는 자본의 탐욕에 찌든 '마귀' 두 마리가 '공정'하게 경쟁하는 정치체제가 더 낫다고 말한다. 
중국의 체제가 너무도 싫은 나머지 자본주의 미국과 한국 같은 보수자본가 양당정치를 동경하는 듯 하다. 샤오젠성이 보기에 양당정치의 두 '마귀'들의 경쟁이 '공정'해 보이나 본데, 신성한 '사유재산' 보호를 최고의 존재가치로 여기는 자본주의 국가권력이 다수 민중들에게 현실에서 얼마나 '공정'한지 모르는 소리로 들린다.


"열린 정치 없이는 인권의 보장을 논할 수 없다... 서구의 민주헌정 제도는 권력에 대한 불신임, 즉 인치(人治)에 대한 불신임이라는 중요한 사상에서 기원했다... 1911년 중국은 아시아 최초로 공화국을 세웠고, 1949년 다시 한 번 공화국을 건립했다. 당시 중국인들은 민주가 진정 도래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결국 여전히 이긴 자는 왕이 되고 진 자는 역적이 되는 정권교체에 다름 아니었다. 민주와 자유의 꿈은 또 다시 물거품이 되었으며 헛수고가 되었다."
- [송나라의 슬픔], <서문>, 샤오젠성, 2009.


전제적 '황권독재'를 비판하다가 '사유재산 신성화'의 신앙과 민중혁명에 대한 혐오 앞에서 '입헌군주제'를 옹호하기도 하는 갈짓자 역사관에도 불구하고, 샤오젠성의 '중국문명사비판'은 자의적인 '인치(人治)'보다 '법치(法治)'를 중시하고 독재보다 인권을 앞세우며 폭력보다는 평화를 강조하는 관점에서 동감하지 않을 수 없다. 다수의 혁명이 역사를 이끌어가는 주요 동력이지만, 권력자만 바꾼 채 '불평등'의 체제를 전환하지 않는 한 결국 반쪽짜리 혁명에 불과하다는 사실은 우리도 2016~17년의 '촛불항쟁'을 통해 또 한번 배웠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중국사를 관통한 권모술수와 폭력 미화의 정수인 [삼국지연의]와 [수호지]를 비판하는 대목(같은책, <7장. 기형의 사회>)에서는 역시 중국체제를 비판하는 '자유주의' 지식인 류짜이푸의 [쌍전]과도 맥을 같이 한다.


'민주'와 '인권', '평화'는 '불평등' 체제의 전환이 반드시 수반되어야 한다. 
아마도 샤오젠성의 갈짓자 역사관 또한 중국 체제전환의 '자유주의'적 과정이리라.


***

1. [송나라의 슬픔(中國文明的反思)](2009), 샤오젠성, 조경희/임소연 옮김, <글항아리>, 2021.
2. [진붕(秦崩) - 진시황에서 유방까지](2015), 리카이위안, 이유진 옮김, <글항아리>, 2021.
3. [초망(楚亡) - 항우에서 한신까지](2015), 리카이위안, 김영문 옮김, <글항아리>, 2021.
4. [쌍전(雙典)], 류짜이푸, 임태홍/한순자 옮김, <글항아리>, 2012.
5. [주원장전;朱元璋傳],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6. [위진풍도 - 이중톈 중국사 11](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18.
7. [남조와 북조 - 이중톈 중국사 12](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0.
8. [수당의 정국 - 이중톈 중국사 13](2015), 이중톈, 김택규 옮김, <글항아리>,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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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 - 상
박영규 지음 / 교유서가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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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인(活人)', 사람을 살리는 삶
- [활인(活人)], 박영규, <교유서가>, 2022.


"그렇습니다. 활인(活人), 즉 사람을 살리는 일을 하기 위해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 유학이든 불교든 모두 사람을 살리기 위해 있는 것입니다. 단지 어떻게 살릴 것인지 방법론이 조금 다를 뿐입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적은 모두 같습니다. 세상에 나온 모든 학문과 경전은 사람 살리는 법을 가르치고 있습니다."
- [활인], <8. 인연의 실타래>, 박영규.


조선 태종 이방원의 셋째아들 충녕대군이 '활인원'의 탄선대사에게 찾아가 왜 불교에 귀의했는가 묻는다. 성리학 이념국가 조선의 왕자에게 불교는 온갖 요설로 백성을 현혹하는 '불씨잡변'에 불과했다. 할아버지인 조선의 태조 이성계도, 자신의 부인 심씨도 자주 부처를 찾았지만 조선은 엄연히 성리학의 나라였고 그럼에도 왕족의 불심은 예외였다. 젊은 충녕은 이러한 모순을 내심 비판하면서 탄선대사를 마주하고 앉았다.

'활인원(活人院)'은 역병과 질병으로부터 민중들을 구하기 위해 중앙정부의 지원 아래 한성부에서 관할하던 공공의료기관이었다. 태종이 고려때부터 있던 수도 개경의 동서 '대비원(大悲院)'을 조선 수도 한양(한성부)의 동쪽과 서쪽에 '활인원'으로 이름을 바꿔 설치한 일종의 '지방공공병원'이다. '제생원(濟生院)'이 조선 태조때 생긴 전국적인 각지의 국립의료원이자 약방이었다면 '활인원'은 태종때 설립한 국립서울의료원인 셈이다. 소설 속 탄선대사는 한양 사대문 중 사람이 죽어나가던 서대문(돈의문)의 '서활인원' 소속 의료원장이자 의사인 스님이다. 
성리학 왕자 충녕의 비판적 질문에 대한 탄선대사의 답변은 결국 사상과 종교, 신분과 계급을 떠나 '활인', 즉 '사람을 살리는 삶'은 모두 같다는 지극히 동양적 사상이다.

[조선반역실록](2017)의 저자인 역사작가 박영규 선생의 최신 근간 예정인 소설 [활인]의 배경은 조선 초기다. 고려말에 함경도 변방의 무인집안이었던 이성계의 5남으로 열일곱에 과거급제했던 이방원이 정도전 등 개국공신들과 형제들을 죽이고 조선이라는 공적인 국가권력을 이씨왕조 사유화하는 조선 최초 반역 쿠데타를 일으켰지만, 태종도 본래는 유생이었다. 그가 빈민의료기관 '대비원'의 이름을 고친 이유도 '큰 자비(大悲)'라는 불교용어를 없애기 위함이었다. 성리학의 국가는 내세가 없다. 바로 현세에서 정치가 민중을 구한다. 유교에서 '귀신'은 절대자로서의 신(神)이 아니다. 나를 낳고 나와 현세에 함께하는 조상의 혼(魂)일 뿐이다. 유학과 성리학이 말하는 '하늘'은 내세가 아닌 온 우주 운동의 근본원리를 의미한다. 그러므로 성리학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기도가 아니라 정치다. 고려말 급진적 성리학자들의 유혈 역성혁명은 결국 다수 민중을 살리기 위한 불가피한 과정으로 합리화되었다. 맹자를 따랐던 고려말 급진적 신진사대부들의 '살인'은 '활인'을 위한 성리학적 해답이었지만 이방원이 후에 몸소 보여준 것처럼 이 대규모 '살인'은 결국 전주 이씨가문의 탐욕으로 귀결되었다.

소설의 주인공은 예의 서활인원장 탄선 스님과 그의 여제자 소비, 남제자 노중례다. 배경은 일단 '가제본'인 <상권>에서는 15세기 태종이 상왕으로 군림하던 세종 즉위 초년이다.

탄선대사는 고려말 유학을 공부한 궁정의원인 태의였다가 이성계의 역성혁명 후 불가에 귀의하며 한양의 국립의료원인 활인원에서 무급으로 역병과 질병에 시달리는 빈민들을 돌본다. 고려말 자신보다 신분이 낮았던 동문 양홍달은 조선의 이씨왕조에 붙어 조선 최고의 태의가 되었으나 고려말 권문세족의 일원이었던 탄선은 이씨에 대항하고 왕씨를 지키는 '충신'이 되지 못했기에 유학을 버린다. '살인(殺人)'의 삶을 산 이성계와 그 아들에 비해 본인은 '활인(活人)'의 삶을 살 것이며 그 사상은 유교든 불교든 방법론이 다를 뿐 모두 한 가지라는 깨달음이 그를 부처의 품으로 인도했다. 탄선이 제자들에게 말하는 의술은 사람을 억지로 살리는 것이 아니다. 사람 몸의 균형을 맞춰주면서 원래의 명줄대로 살 수 있도록 지켜주는 것이다. 최근 다시 번역된 미국 내과의사 리처드 거버의 [파동의학](1987)은 '과학'의 힘으로 생명을 연장하는 현대의학을 넘어 양자역학의 관점에서 서양적 '에테르체' 또는 동양적 '기'의 균형을 통해 질병을 예방하고 극복하는 길을 열고자 한다. 15세기 조선의 의사 탄선의 길이 그것이다.

시체를 검안하는 천민인 '오작인' 노중례는 열여섯에 원래 생원시 장원까지 했던 양반집 자제였다. 그러나 성균관에 입학하여 대과를 준비하려던 때 의주에서 관직을 하던 부친이 억울한 살인 누명을 쓰고 옥에서 의문사한 후 가족은 흩어져 관비가 되고 말았다. 천민 중 천민이라는 오작인이 되어 검시로 연명하며 부친의 누명을 벗기기 위해 나름의 조사를 하던 중 우연히 탄선을 만나고 그 총명함으로 인해 활인원 소속 의원으로서 탄선의 제자가 된다. 탄선의 제자가 된지 2년 만에 각지에서 그 의술을 인정받아 대군의 연경행(명나라 사신단)을 수행하는 과정에서 부친을 음모로 죽인 원수들의 목숨을 의술로 살리게 되는데, 부모의 원수라도 목숨은 살리는 게 참된 의술이라는 것이 스승 탄선대사의 가르침이었다. 한편으로 중례는 동문인 소비를 차츰 연모하게 된다.

궁정무녀인 가이의 집앞에 버려진 고아소녀 소비는 매우 뛰어난 의술을 부리는 탄선의 수제자로 충녕의 큰아들(문종)을 애기때 살리고 부인 심씨가 안평군을 낳는데 도움을 주면서 궁정의 내의녀까지 오르는 실력있는 여의사로 태의 양홍달의 시기를 사는 여인이다. 소비는 세종인 충녕과 주인공 노중례와의 삼각관계 구도를 암시하며 소설 속 뛰어난 존재감을 과시하는데, <상권> 중후반을 지나며 그녀가 버려지게 된 내력이 서서히 벗겨지면서 소설의 재미를 더욱 깊어지게 한다.
나 개인적으로는 이 소설 끝까지 봐야겠다는 생각을 굳히는 이 플롯은 수년 전 이미 죽은 삼봉 정도전의 등장이다. 소비는 바로 거의 멸족의 화를 입은 정도전 가문의 손녀였다. 

이렇게 박영규 작가의 역사소설 [활인]은 '반역의 나라' 조선에서 의술과 추리소설의 기법을 토대로 무한반복 '반역의 정치'를 그리게 될 것으로 예상된다.


[활인]의 '가제본'을 받고 처음 몇 장을 읽을 때는 오래전 드라마 '허준'이나 '대장금'처럼 당시 의술이나 궁정 주변생활에 관한 신변잡기 이야기 아닐까 싶었다. 그런데 <상권>의 중후반부로 갈수록 조선 초기 정치사회 전반을 다루는 역사소설의 징후를 보았다. 
더욱이 내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존숭하는 삼봉 정도전이 부활할 분위기니 당최 마저 읽지 않을 도리가 없다.
역시 역사작가 박영규 선생이다 싶다.
<하권>이 기다려진다.

***

1. [활인(活人)-가제본], 박영규, <교유서가>, 2022. 예정.
2.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3.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4. [파동의학](2001), 리처드 거버, 최종구/양주원 옮김, <에디터>,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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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역사 - 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지음 / 돌베개 / 2018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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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서술'의 역사 : 역사가 역사다워지는 '서사의 힘'
- [역사의 역사], 유시민, <돌베개>, 2018.


"이 책은 굳이 분류하지면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에 넣을 수 있을 듯 하다. '히스토리오그라피'는 역사학 이론과 역사서술 방법의 발전과정을 연구하는 학문인데 우리말로는 보통 '사학사(史學史)'라고 한다. 하지만 이 책은 '역사학의 역사'가 아니라 '역사서술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에 초점을 맞추었으니 '사학사'는 잘 어울리는 말이 아니다. '역사학'과 '역사서술'은 밀접한 관련이 있지만 목적과 성격과 작업방식이 다르다. '역사학'은 학술연구 활동이지만, '역사서술'은 문학적 창작행위로 보아야 한다. 그래서 나는 독자들이 이 책을 '역사 르포르타주'로 받아들여주기를 기대한다."
- [역사의 역사], <서문 - 역사란 무엇인가>, 유시민, 2018.


20세기 말에는 세기말 징후로 여전히 '종말'과 '휴거'가 거론되기도 했지만, 신세기에 대한 막연한 '희망'도 가득찼다. 우리 '20세기 소년'들은 어려서부터 왠지 21세기가 되면 갑자기 새로운 세상이 열릴지도 모른다는 기대와 두려움 등을 무의식 중에 가지고 있었을는지도 모른다. 20세기 후반부 격동의 시대에 30~40대 청장년을 보낸 1960년대생 '20세기 청년' 선배들이 어린 우리 1970년대생 '20세기 소년' 후배들에게 남긴 자취였을 수도 있다. 
소소하지만 인류의 '역사'란 이런 계기들의 집합이다.

내가 스무살 청년기에 접어들었을 때 역시 우리를 각성시킨 것은 여전한 현실과 이런 세상을 분석해주는 '20세기 청년' 선배들이었다. 일면식은 없지만 군부독재에 용감하게 항거하고 새세상의 대안들을 치열하게 학습하며 노동현장에서 스러져간 사람들과 잠시 서구로 탈주했다 돌아왔다는 그 지식인들의 멋진 글들이었다. 일제강점기 목숨을 건 독립투사들은 너무 멀었지만, 어찌보면 나와 한 세대임에도 치열했던 '20세기 청년'들의 후일담은 가깝게 느껴졌다.
스무살의 나는, 이들의 '역사서술'에 매료되었다.

21세기 하고도 사반세기를 통과하는 지금 보니, 그 용감했던 '역사서술가'들은 다들 그들끼리 동지였고 친구였다. 1980년 '서울역 회군' 과정에서 노선투쟁을 했고, 비합법 지하 패밀리에서 이래저래 다들 아는 사이였고, 그렇게 비판하던 이 자본주의 체제에서 부동산을 비롯한 자산관리에 성공했고, 그들의 80년대생 자녀들 스펙과 세습자산을 불려줬다. 그렇게 그들은 본인들이 그토록 비판했던 이 자본주의 체제를 강화하며 지금 우리 사회를 아예 부동산과 금융투기, 학벌중심의 '세습자본주의'로 고착시켰다. 
지금 시대는 이들을 정치권 여야를 떠나 공통되게 '586 세대'라 칭한다.

그렇지 않은 선배들이 더 많다는 것도 나는 안다.
20세기 말에 세계의 '종말'이 아닌 민중의 '희망'을 말하며 노동자 진보정당을 만들고 분투했던 사람들 대부분은 길을 찾기 더 어려운 지금도 그 '희망'을 놓지 않고 산다. 
그 당시에도 역시 '선구적'이었던 사람들이 있었다. 유시민이 그랬고, 진중권이 그랬고, 조국도 그랬다.
유시민은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진보정당을 존중했지만 그 유려한 말발과 글발로 소수 진보정당의 고군분투를 허망한 '사표'로 만들어줬다. 진중권은 같은 편인 것 같지만 다수와 함께 하기에는 너무 읽은 책이 많아 내부의 적을 늘 만들고 동지들을 조롱했다. 조국은 잘생기고 똑똑하고 그 중 가장 급진적이고 싶었겠으나 그러기에 너무 부자집 출신이었던 것 같다. 어찌보면 이 세기의 '천재'들이 자본가가 아닌 다수 노동자 민중의 편에 서 있어준 것 자체가 나쁘지 않았을 수도 있었지만, 그러기에는 이들 '20세기 천재들'은 다수 민중을 너무 비웃고 우롱했다. 
나 개인적으로 매우 아쉬운 점이다. 일단 글쓰기로만 보면, 유시민과 진중권은 당최 미워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사회 '지식소매상'을 자처하는 유시민은  선거철만 되면 노무현식 '좌파 신자유주의'를 다시금 유행시키기 위해 묵직한 주제의 책들을 가볍게 내곤 하는데, 유투브로 갈아타기 전 2018년의 저서 [역사의 역사]는 그래도 내가 그 중 유일하고도 유익하게 생각하는 책이다. 물론  사무금융 산별노조 독서회 '수요회'에 추천했다가 좌파 동지로부터 '손절' 당할 뻔도 했지만, 여전히 다른이들에게 주저없이 추천하고 싶은 책 중 하나다. '정치'가 아닌 '역사'를 다루는 위험한 자유주의자 유시민은 그래도 아직 참고할 만하다고 생각한다.

유시민은 [역사의 역사](2018)에서 기원전 5세기 고대 그리스 '역사가의 시조' 헤로도토스와 투키디데스로부터 기원전 1세기 중국 한나라 사마천의 [사기], 14세기 이슬람 '문명사학자' 이븐 할둔, 19세기 프로이센 제국의 '천생 역사가' 레오폴트 랑케, 유물사관의 칼 마르크스를 비롯하여 20세기 우리의 박은식과 신채호, 백남운 선생, [역사란 무엇인가]의 에드워드 카와 '문명의 충돌'로 인한 서구중심사관의 몰락을 징후하는 슈펭글러, 토인비, 헌팅턴의 20세기 역사학을 거쳐 최근의 '빅히스토리' 역사가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 등의 '역사서술(writing history)'의 역사를 충실하게 요약하고 있다.
21세기의 유시민은 이제 더 이상 다수 민중이 '승리'하는 당위론적이고 목적론적인 역사를 이야기하지 않는다. '역사학자'가 아니라 '역사 르포작가'로서 '역사' 자체가 아닌 '역사서술'을 주제로 하여 [역사의 역사]에서 다루는 기라성 같은 역사가들이 '역사'라는 사실적 소재를 빚어 문학적 창작을 이루어낸 성과물로서의 그들의 저서들과 그 사실들의 연속성의 '역사'를 파헤친다.

'역사'란 19세기 독일의 반동적 군주제 역사가인 레오폴트 랑케(같은책, <4장>)의 건조한 문헌적 역사가 추구한 '사실 그대로'의 서술이 불가능하며, 각 '역사가' 개인들의 시대적 한계와 나름의 '철학'적 관점, 정치적 성향에 따라 '취사선택'되어 기록되고 기억되는 것이므로 '역사서술의 역사'인 '히스토리오그라피(historiography)' 또는 '사학사(史學史)'를 주제로 하는 이 책 [역사의 역사] 저자인 유시민 본인의 '글쓰기'는 학술적인 것이 아니기에 '역사 르포르타주(르포)'라고 <서문>에서 명확히 규정한다.


"헤로도토스에게 역사서술은 돈이 되는 사업이었고(낭독회), 사마천에게는 실존적 인간의 존재증명이었으며("하늘의 도는 무엇인가!"), 할둔에게는 학문연구였다. 마르크스에게는 '혁명적 무기'를 제작하는 활동이었고, 박은식과 신채호에게는 민족의 광복을 위한 투쟁이었다. 사피엔스의 뇌는 생물학적 진화의 산물이지만 뇌에 자리잡는 철학적 자아는 사회적 환경을 반영한다. 그들은 각자 다른 시대에 살면서 다른 경험을 하고 다른 이야기를 남겼다. 그 이야기들을 읽으면서 즐거움과 깨달음을 얻게 되는 이유가 무엇일까? 그들의 철학적 자아와 공명하기 때문이다."
- [역사의 역사], <6장 - 민족주의 역사학의 고단한 역정, 박은식/신채호/백남운>, 유시민, 2018.


[역사의 역사]에서 개인적으로 인상깊은 역사가는 이슬람의 이븐 할둔(같은책, <3장>)이다. 그는 '역사'를 '이야기'나 서사가 아닌 '학문'의 대상으로 설정한 아마도 최초의 역사가였단다. 그의 [역사서설]은 이슬람 공동체의 사회문화인 '아싸비야'를 중심으로 기후와 자연 등 외부 환경에 영향을 받는 복합다단한 역사 이야기 이전에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물음에 학문적이고 체계적인 이론화를 시도한 '서설(무깟디마)'이었다. 14세기 이슬람 문화인 북아프리카 튀니지 출신의 이븐 할둔의 이 '역사학'은 칭기스 칸의 세계제국이 분할된 후 이슬람권의 칸으로부터 공식 역사서가 되고 할둔 본인도 '칸의 스승'과 같은 대우를 받기도 했다. 만년의 할둔은 역시 말년의 티무르와 독대했지만, 그가 티무르에게 어떤 교훈을 남겼는지는 알 수 없다. 중앙아시아 일대를 제패하고 동아시아 중국대륙의 명나라를 정벌하려던 티무르는 죽었고 할둔 또한 그 이듬해인가 죽었으므로 후세는 칭기스 칸의 후예를 자칭한 정복자 티무르가 한 도시 정복의 대가로 역사가 이븐 할둔과의 접견을 요청했다는 사실만 알 뿐이다. 정복자의 스승인 '역사학의 아버지' 이븐 할둔은 오만한 정복자들도 우러러 본 역사가였다.

유시민에게 칼 마르크스는 아마도 '애증의 대상'이 아닐까 싶다. 마르크스는 전세계 수많은 청년들에게 그랬던 것처럼 어쩌면 자유주의자였던 '20세기 청년' 유시민에게도 세계를 변혁하라는 가르침을 처음으로 준 역사가였을 테고, 그로 인해 적어도 마르크스의 저서만큼은, 최소한 [공산당선언](1848)만큼은 유시민은 그 누구의 번역이 아닌 원전을 통한 스스로의 번역만을 인정하고 싶었을는지도 모른다. 유시민은 비록 마르크스주의 역사유물론이 '역사를 비껴간 역사법칙'(같은책, <5장>)이었다고 결론짓고 있지만, 칼 마르크스는 유시민의 자유주의적 사상경로에서도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가'임에 틀림없는 듯 하다. 자유주의자든, 사회주의 또는 공산주의자든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적으로 보는 사람들에게 19세기 유럽의 칼 마르크스는 늘 그런 선학이다. 마르크스가 철학자였든 역사가였든 정치경제학자였든 아니면 백수나 문학가였든, 그는 우리 인류 사상사에 항상 그런 역사적 '서사의 힘'을 유산으로 남겼다.

20세기 초 우리 식민지 조선의 역사가 박은식, 신채호, 백남운 선생(같은책, <6장>)은 더욱 인상깊다. 
성리학 선비였던 박은식 선생의 피를 토하는 역사학과 [한국통사]는 아마도 식민지 조선이라는 조건이 아니었다면 없었을 것이다. 식민지 조선이 아니었다면 이 개명 유학자가 왕정이 아닌 민주정을 주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역사는 아와 비아의 투쟁"이라며 일제에 끝까지 항거한 신채호 선생의 [조선상고사]와 [조선혁명선언] 또한 마찬가지다. 의열단의 강령이었던 단재 신채호 선생의 [조선혁명선언](1923)은 20세기 조선판 [공산당선언]이라고 하기에 손색이 없다. 역시 유학자였던 신채호 선생은 민주주의자 박은식 선생보다 더 급진적으로 사회주의 또는 아니키즘 성향까지 보이나 이들 또한 역사가였기에 고대 문헌의 철저한 고증과 비교분석을 통해 가장 개연성이 높은 역사이론을 채택한 것이었다. 이들은 외세를 물리친 을지문덕과 연개소문, 강감찬과 이순신 등의 민족적 영웅전을 쓰면서 식민사학에 대항한 우리 고유의 민족사학을 바로 세우기 위해 일생을 바쳤다. 
해방공간에서 북조선으로 넘어간 백남운 선생은 우리의 역사를 마르크스주의 '역사단계론'에 끼워 맞추기는 했으나 아마도 우리 역사학계에서 최초로 '역사유물론'을 정초한 역사학자일 것이다. 백남운 선생의 [조선사회경제사]는 우리 역사를 '고대노예제-중세봉건제-근대자본주의'의 '역사단계발전론' 틀에서 해석하면서 식민지 조선은 '특수한 단계'로 서구의 마르크스주의를 우리 사상계에 이식하여 식민사관과 투쟁하는 유물사관(역사유물론)을 정립하자는 시도였다. 
우리 역사가인 이들 선학들의 '민족사관'과 '유물사관'이 지금 후세들에게 다소 과격하고 도그마적으로 보일 수는 있다. 그러나 식민지 조선의 특수단계에서는 필연의 역사학이었다. 
[역사의 역사] 저자 유시민은 말한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들이 쓴 역사를 읽으면 가슴이 아리다"라고. 
나 또한 그렇다. 식민지 시대든 군부 파시즘 시대든 그 시절 지식인들의 역사는 슬프다. 
내게는 유시민 작가도 그렇다.

이후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오랜 질문에 현재와 과거와의 끊임없는 대화"라고 답변한 에드워드 핼릿 카(같은책, <7장>)가 정초한 '현대 역사학'과 제러드 다이아몬드와 유발 하라리의 지구환경 역사학 및 미래지향적 '빅히스토리'(같은책, <9장>)는 세간에 너무 많이 언급되고 있어 유시민의 이 책에서 그리 새롭지는 않다. 다만, [역사란 무엇인가]라는 화두와 '빅히스토리'는 '역사서술'의 역사를 돌아볼 때 반드시 거쳐야 할 현대사의 한 단계가 되었다. 이들은 이미 지난 '역사서술'이 아니라 지금도 한창 진행 중인 '현대사'이기 때문이다.


유시민은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로서 '역사'는 걸출한 역사가들의 탁월한 안목으로 취사선택된 서사를 통해 비로소 역사다워진다고 소감을 밝히며 [역사의 역사]를 마무리한다. 
인류의 역사는 역사가들의 "서사의 힘"(같은책, <에필로그>)으로 '발전'한다고 믿기에 유시민은 '역사서술의 역사'를 묵직하게 엮어냈다.
사회과학 저서 출판의 역사와 전통을 지닌 <돌베개> 출판사의 편집과 디자인 또한 이 책의 가치를 더욱 높여준다.


"나는 역사를 역사답게 하는 것이 '서사의 힘' 또는 '이야기의 매력'이라고 생각한다. 역사는 사람과 세상에 대한 이야기다... (역사는) 변하지 않는 인간의 욕망과 본성, 예측할 수 없는 우연, 사회제도와 자연환경이 뒤엉켜 빚어낸 과거의 사건들 가운데 당대의 역사가들이 주목할 가치가 있다고 판단한 것을 언어로 엮어낸 서사다. 역사의 역사가 드러내 보이는, '발전'이라고 하는 몇 가지 역사서술 환경과 내용과 관점과 방법의 변화는 힘있는 서사로 구현할 때만 독자의 생각과 감정을 움직이는데 도움이 될 수 있다. 이것이 역사의 역사에 남은 역사서들을 만나본 소감이다."
- [역사의 역사], <에필로그 - 서사의 힘>, 유시민, 2018.

***

1. [역사의 역사(History of Writing History)], 유시민, <돌베개>, 2018.
2.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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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 불확실한 삶을 돌파하는 50가지 생각 도구
야마구치 슈 지음, 김윤경 옮김 / 다산초당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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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의 '무기(武器)'로서의 '철학(哲學)'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2018), 야마구치 슈, 김윤경 옮김, <다산북스>, 2019.


"지옥으로 가는 길은 이상적인 사회를 추구하는 선의로 깔려 있다. 그렇다고 해서 더 나은 세상을 구축하기 위한 노력이 자기기만에 불과하다고 한다면 우리는 허무주의에 빠질 수밖에 없다. 더 좋은 세상을 구축하고자 하는 이상을 잃지 않은 채 그러한 '이상 사회'를 꿈꾸며 운동을 벌이는 일이 독선과 기만에 빠질 위험성 또한 동시에 의식할 수밖에 없다. 이는 매우 어려운 일이다. 그렇기에 더더욱 과거의 철학자가 남긴 사회에 대한 고찰이 우리에게 중요한 길잡이가 되는 것이다."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1부. 무기가 되는 철학>, 야마구치 슈, 2018.


1888년, 죽은 칼 마르크스의 살아남은 동지 프리드리히 엥겔스는 '독일 고전철학'에 '종말'을 고한다. 
본래 '철학(哲學)'은 고대 인류의 의식이 각성하면서 "세계는 무엇(what)으로 이루어졌으며, 어떻게(how) 돌아가는가?"에 관한 답을 찾는 '학(學)' 자체였다. 자연과학이 발전하기 전인 고대에는 '철학'이 당연히 학문의 최고 지위였고, '과학'이나 '종교'가 곧 '철학'이었다. 이 궁극의 학문으로서 철학은 인간의 주체가 외부 세계를 인식하는 과정으로 주관적 관념은 객관적 대상에 1차적 영향을 받는다. 그에 따라 '주체'가 먼저라 보는 철학을 '관념론', '객체'가 우선이라 전제하는 철학을 '유물론'이라 했다. '양자역학'의 현대과학 시대인 지금은 무엇이 1차적이고 우선인지가 중요한 것은 아니지만, '종교'와 '신화' 또는 '이데올로기'로 당대 지배체제를 옹호하는 집단이나 계급의 철학이 '관념론'인 한, 다수 민중의 '유물론'은 언제나 되살아난다. 근대 이전 썩은 왕조를 무너뜨린 수많은 농민반란이 종교적인 '관념론'의 이데올로기 아래로 모였을지는 몰라도 사실 다수 민중은 먹고사는 문제가 가장 우선이었던 현실적 '유물론자'들이었다. 이 다수 유물론자들에게 선택지는 늘 둘 중 하나였다. "이대로 굶어 죽느냐, 아니면 뒤집어 엎느냐?"
엥겔스가 종말을 고한 '독일 고전철학'은 바로 고대로부터 19세기 당시까지 철학사를 지배해 온 '관념론' 및 독일 사변철학이었다. 자연과학은 발전하고 대다수 노동계급이 자본으로부터 대규모 착취당하는데 더 이상 철학은 세계를 '해석'하기만 해서는 안되었다.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하는 철학이었다. 따라서 이제 철학은 '관념론'에 종말을 고하고 '유물론'의 힘으로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어야 했다. 엥겔스에게 인류의 위대한 유산인 '철학'의 상속자는 바로 자본주의 착취로 억압받는 다수 노동계급이었다.
19세기 말에 이미 '철학'은 그렇게 세상을 바꾸는 '무기'가 되었다.


일본의 기업경영 컨설턴트 야마구치 슈는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원제 : 무기가 되는 철학)](2018)라는 책에서 지루한 철학사를 돌아보지는 않는다. 근대 철학의 분기점이라는 칸트를 건너뛰고 과학철학의 맹아를 담은 스피노자를 무시한다. 으레 철학사 서적이 다루듯 고대 그리스 철학 이야기로부터 시작하지 않는다. 기업 컨설팅 그룹 소속답게 비즈니스에서 '실용'적으로 중요한 철학 개념 50가지를 추려 '사람', '조직', '사회', '사고'의 네 가지 범주에 각 콘셉트(개념)들을 배치하여 설명한다. 그가 말하는 '철학'은 기업경영과 비즈니스 세상에서 '혁신'을 통해 '영속'하고자 하는 기업가들의 인문학적 '무기'이자 다수 기업 실무자들 삶의 '무기'가 된다. 그는 인용한다. "교양이 없는 CEO는 '위험천만'하다"고.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창조하는 것이다."
- 앨런 케이, 야마구치 슈의 같은책 <4-49> 중.


자본가로부터 비용을 받고 기업경영 컨설팅을 하고 보고서를 작성하지만, 저자는 언뜻 경영자의 입장에서만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성과급을 목표로 하는 것보다 자율적인 상황에서 목표 달성이 더 용이하다는 근거를 미국의 사회심리학자 에드워드 데시(같은책, <1-3>)에서 찾고, 기업 의사결정에도 끝까지 집요하게 이의를 제기하라며 존 스튜어트 밀의 '악마의 대변인'(<2-16>) 이야기를 한다. 열심히 노력하면 결국 성공한다는 '1만번의 법칙'은 틀렸다며 질 들뢰즈의 '파라노이아(편집증)'와 '스키조프레니아(분열증)'를 거론하며 여의치 않으면 현실 직장으로부터 탈주하라(<3-33>)고 말한다. 온갖 '능력주의'로 포장된 기업의 인사평가는 애초에 공정할 수 없다며 캐나다 심리학자 멜빈 러너(<3-37>)의 '공정한 세상 가설'을 소개한다. 즉, '능력주의'가 전제하는 '공정세상'이라는 가설은 틀렸다고 본다. 자본주의 모순을 과학적으로 분석한 칼 마르크스까지 다루는 이 기업 컨설턴트는 그러나 마르크스주의 자본주의 체제비판의 핵심인 '물화'가 아니라 초기 마르크스 철학의 인간적 요소였던 '소외'(<3-25>)를 소개하는데 그친다. 저자가 철학적 사고에서 중요하게 소개하는 사고방식은 헤겔의 '변증법'(<4-42>)인데, 서로 대립하고 모순되는 사물이 '맞서고 얽혀('맞얽힘')' 새롭고 창의적인 사고로 '나선형 발전'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야마구치 수는 기업의 돈을 받고 컨설팅 보고서를 쓰기는 하나, 기업 담당자들에게 '미래'가 어떨지 묻지 말란다. 그는 미국의 퍼스널 컴퓨터 선구자인 앨런 케이(<4-49>)의 말을 빌어 답한다. "미래를 예측하는 최선의 방법은 미래를 만들어내는 일이다"라고.


"평범한 인간이야말로 극도의 악이 될 수 있다. 스스로 생각하기를 포기한 사람은 누구나 아이히만처럼 될 가능성이 있다. 그 가능성에 관해 생각하는 것은 두려운 일일지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그 가능성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고하기를 멈추면 안된다고 아렌트는 호소했다. 우리는 인간도 악마도 될 수 있다. 그리고 인간이 되느냐 악마가 되느냐는 시스템을 비판적으로 사고할 수 있는 능력에 달려 있다."
-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 <1-10. 한나 아렌트_악의 평범성>, 야마구치 슈.


야마구치 슈가 50명의 철학자와 사상가들을 빌어 소개하는 '삶의 무기'로서의 철학 개념들의 핵심은 결국 체제와 시스템에 대한 '비판적 사고'다. 
미국의 정치학자이자 평론가인 한나 아렌트(같은책, <1-10>)는 나치 독일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기획한 아돌프 아이히만의 전범재판을 방청하고는 [예루살렘의 아이히만]이라는 책을 썼다. '악'은 히틀러나 무솔리니, 일본 천왕처럼 거대악으로 상징될 수 있으나 정작 이러한 악의 집행은 지배 시스템이나 이데올로기에 무비판적으로 '실무'를 맡아 처리한 평범한 자들이 자행했다. 1960년 예루살렘에서 재판받고 처형된 아이히만이 법정에 등장하는 것을 본 한나 아렌트는 그 살인자가 '악마'가 아닌 지극히 나약해보이고 평범한 모습이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았단다. 
히틀러의 나치즘과 무솔리니의 파시즘은 폭력으로 집권하지 않았다. 1차대전 패전국의 전후 경제위기에 불만을 품은 다수 민중들이 그 파시스트들에게 합법적으로 권력을 주었고, 자기들 눈앞의 이익을 위해 콘크리트처럼 단단하게 그 권력을 지지했다. 그리고 먹고 살기 위해 악마와 같은 권력자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만 한 그 평범한 '악마'들은 결국 수천만 명을 살육했다. 한나 아렌트는 무비판적 실무자들에 의해 자행된 이 악행들을 보며 '악의 평범성'이라는 유명한 말을 지어냈다.
 이 '악의 평범성'은 절대악을 이상화하면서 '지옥으로 가는 길'을 열었고, 스스로의 맹목성과 무비판성을 현실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했다. 그들의 평범하기 그지없는 '실무능력'은 주변의 다수 지지자들의 이익이라는 '선의'로 포장되는데, 이것이 가능하게 한 건 현실 체제와 제도, 지배 시스템과 이데올로기에 대한 무비판적 수용이었다. 연말에 폭탄과 같이 사면복권된 박근혜가 절대권력을 휘두를 때 대한문 앞에 있던 금속노조 쌍용자동차지부의 농성장을 갈아엎고 화단을 만든 서울 중구청 공무원 실무자들의 삽질이 떠오른다. 그들은 오직 가족을 위해 열심히 일한 공무원이었지만, 29명의 정리해고 조합원 사망자들과 유족들에게, 그리고 그들과 연대하는 시민들에게 '평범한 악마들'이었다.


기업경영 컨설턴트인 야마구치 슈가 말하는 비판적 사고로서의 철학이 '삶의 무기'가 된다는 주장에 깊이 동감한다. 이 비판적 무기를 벼리기 위해 저자가 소개하는 개념들 또한 매력적이다. 그러나 거기까지다. 그가 칸트와 스피노자 등을 제끼면서 돌아보는 철학사 또한 재미있고 유익하나 '비판'은 얘기하되 '변혁'을 담지 못하는 철학은 역시 공허하다. 그냥 '철학'이라는 주제로 책과 강연을 팔아 명성을 사기 위한 '교양'에 불과할 수도 있다.
'철학'이 삶의 '무기'가 되기 위해서는 현 체제와 시스템을 "왜 비판하는가"에 관한 분명한 이유가 있어야 한다.

다시, '무기'로서의 '철학'의 상속자가 체제의 전환을 요구하는 다수 대중이 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

1. [철학은 어떻게 삶의 무기가 되는가](2018), 야마구치 슈, 김윤경 옮김, <다산북스>, 2019.
2.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와 독일 고전철학의 종말](1888), 프리드리히 엥겔스, 남상일 옮김, <백산서당>, 1989.
3. [맞얽힘 : 맞선 둘은 하나다], 이철, <움직이는책>,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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