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자 풍경 - 글자에 아로새긴 스물일곱 가지 세상
유지원 지음 / 을유문화사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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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자 = 글씨 + 활자
- [글자 풍경], 유지원, 2019.


"타이포그래피'는 이름 그대로 '타입(type)'을 다룬다. '글자'는 크게 손으로 쓰는 '글씨'와 기계로 쓰는 '활자'로 나뉜다."
- [글자 풍경], <붓이, 종이가, 먹물이, 몸이 서로 힘을 주고 힘을 받고>, 유지원, 2019.


취학전에 책을 끼고 다녔던 것도, 
글씨를 배우게 된 것도, 
사실 그림 그리기를 좋아한 덕이었다.

어둑한 방에 배깔고 엎드려 동물 삽화책을 펼쳐놓고는,
어머니가 출근 전 남겨준 16절 갱지에 0.7mm 모나미 볼펜으로,
공룡과 동물들을 그리다가 어느새 지겨워지면,
흰 바탕에 검게 박힌 글자들을 베껴 썼다.

아버지가 체계적으로 '가나다라'를 가르쳐주시기 전에 나는 그렇게 글씨를 그림처럼 그렸다.

글씨를 그림처럼 그리기 시작한 나의 문자 이력은 이후 청소년 시절에는 한자와 필기체 영어에 대한 선호로 나타났다.
상형지사 문자가 조합되는 한자와 흐르듯 이어지는 필기체 영어는 마치 그림을 그리듯 써야 제 맛이었다.
그렇게 나는 한글도 나만의 0.7mm 모나미 볼펜 '필체'로 직접 쓰는 걸 좋아하게 된다.
책을 읽다가 기억해 두고 싶은 문장은 꼭 내 손으로 직접, 세상 어디에도 더 없을 유일한 나만의 '필체'로 책의 속표지에 필사해 둔다.
내가 책을 빌려 읽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하다. 


독일에서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한 시각디자이너 유지원은 [글자 풍경](2019)이라는 책에서 정보와 지식을 소수 독점이 아닌 모든 사람들에게 쉽게 전달하는 일을 하고 싶어 시각디자인을, 그 중에도 '글자' 디자인으로서 '타이포그래피'를 전공하게 된 어린 시절 기억을 회상하면서 책을 연다.

'글자'는 세분화하면 손으로 쓰는 '글씨'와 인쇄 기계로 찍는 '활자'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글씨'는 사람이 손으로 계속 쓰는 한 그 '필체(type+graphy)'가 다양하게 발전할 것이고, '활자(typography)'는 14세기 우리 고려의 금속활자 직지심경과 15세기 유럽의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 이후 여러가지 인쇄체로 정형화되었으며, 현대는 컴퓨터 그래픽으로서 '폰트'라는 세계 공통 활자체들로 확장되어 왔다.

유럽의 북부에서 시작된 구텐베르크의 인쇄체는 '블랙레터(blackletter)'로서 흰 지면보다 검은 글자가 두드러지는 활자체였다. 그러나 기계적인 블랙레터는 유럽 남부의 르네상스 정신에는 맞지 않았다. 중세처럼 오로지 필사만으로는 대량 생산에 한계가 있었기에 남유럽의 활자체는 보다 필체적 요소를 가미한 결과 흰 지면의 여백이 드러나게 되어 '화이트레터(whiteletter)'가 되었다. 
[글자 풍경]의 저자 유지원은 북유럽의 '블랙레터'를 추운 북방의 '침엽수', 남유럽의 '화이트레터'를 따뜻한 남쪽의 '활엽수'에 비유한다. 구텐베르크의 활자체 '텍스투라' 등은 빽빽한 침엽수림으로, 인문주의 르네상스 활자체 '화이트레터'는 '로만체'의 이름으로 넉넉해진 활엽수림과도 같이 보이기 때문이다.

북유럽의 기계적인 인쇄체는 13~16세기 '텍스투라(Textura)'로부터 시작된다. 
구텐베르크 당시 사용된 '텍스투라' 활자체는 아마도 예전 중세 시대부터 수도사들이 성경을 필사하던 필체들을 토대로 했을 것으로 추측되며 개인의 필체적 개성을 탈각하고 대량 인쇄를 위해 정형화시킨 활자체로서 주로 라틴어 성경 인쇄에 쓰였다. '텍스투라'라는 이름 자체도 '텍스트(text)'에 쓰인 활자체의 원형임을 의미하겠다.
성경이라는 대표적인 '텍스트'가 유럽 각지의 언어로 번역되고 대중화되는 과정과 함께 이 '텍스투라' 활자체는 유럽 각지의 '방언', 즉 독일어, 영어, 프랑스어 등과 같은 각 지역의 언어로 다양화되는데, 이를 14~16세기형 '바스타르다(Bastarda)'라고 부른다. 15~17세기 독일식 르네상스 '바스타르다'는 '슈바바허(Schwabacher), 16세기부터 20세기 초반까지 사용된 독일 바로크식 활자체는 '프락투어(Fraktur)'라고 한다. 

이들 '텍스투라'-'바스타르다'-'슈바바허'/'프락투어' 등을 지금의 단순화한 활자와 폰트에 비교해 보면 상당히 장식적이다. 이 장식성의 포장은 이후 정보와 지식의 대중화와 민주화, 인쇄 문명의 발전 과정을 거치면서 서서히 벗겨지게 된다. 현대에는 '획'의 최소한의 묘미로서 획 끝의 돌기인 '세리프(Serif)' 조차도 없앤 '산-세리프(San-serif)' 활자체가 등장했다. '산(san)'은 프랑스어로 영어의 'without'을 의미한다. 글씨 쓰듯 획을 꺾는 '세리프'는 우리 한글체로는 '바탕체(명조체)', '산세리프'는 '돋움체(고딕체)'로 볼 수 있다. 컴퓨터 활자인 폰트에서는 각국의 문자들을 이런 식(바탕-돋움/세리프-산세리프)으로 정형화한 '유니코드'를 통해 현대식 '문자의 바벨탑'([글자 풍경],109쪽)을 쌓아가고 있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알베르토 망구엘은 [독서의 역사](1996)에서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은 텍스트의 대량 인쇄를 통해 활자를 확산시키는 한편으로, 손으로 쓰는 육필가들은 서체를 더욱 장식적으로 발전시켰다고 한다. 
기계 문명의 발전이 수공업적 문화를 말살하지만은 않을 수도 있다는 증거다.

19세기 영국의 디자이너 윌리엄 모리스(William Morris)는 산업혁명 초중기 조악했던 기계문물의 생산물에 대항하여 인간 공예의 가치를 지켜내기 위해 이른바 '미술공예운동(Arts and Crafts Movement)'를 전개했는데, 흡사 노동자들의 최초이자 최후의 기계파괴운동이었던 러다이트 운동과도 같이 "디자이너가 대량생산 기계에 저항한 최후의 운동"([글자풍경],275쪽)이었다. 그러나 이후 디자이너들은 기계문명의 한계는 물론 새로운 가치를 포괄하는 운동으로 전환하였다는데, 이것이 독일의 '바우하우스(Bauhaus)'로 대표되는 공예의 '모더니즘(modernism;근대성/현대성)'의 출현이다.

[글자 풍경]은 유럽과 세계 각국의 '타이포그래피' 역사와 현재를 돌아보며, 결국 우리의 '글자'로 돌아온다.
구텐베르크의 인쇄혁명과 동시대에 반포된 15세기 우리의 한글과 [훈민정음]에 투영된 문자 민주화의 역사. 
물론 왕조와 집현전이라는 국가기관이 시작한 위로부터의 민주화였지만 그 정신만은 다분히 근대적이었다. 다수 민중은 우리 소리에 맞는 한글을 더욱 발전시키며 진정한 한글의 민주화를 이뤄냈다. 짧지 않은 일제강점기 조선어 말살 정책에도 불구하고 한글은 끊어짐 없이 생명력을 유지했다. 
이 책 [글자 풍경]을 출판한 <을유문화사>는 해방 후 [조선말 큰사전] 전집을 발간한 출판사라고 한다. 정말 고마운 출판사다.

우리의 '바탕체'는 '명조체'라고도 불리는데, 중국 한자의 '해서체'에서 영향을 받아서 '명나라왕조'라는 뜻의 '명조'체라고 한다. 물론 그림의 성격을 여전히 많이 지니던 한나라 '예서체'와 이후 흘려 쓰기 시작하게 된 '행서체'의 중간체인 '반흘림체'로서 '해서체'는 명나라가 아닌 당나라 때 발전했지만 조선식으로 보면 중국식은 '명나라식'이었을테니 '해서체'의 우리 한글식 글씨는 '명조체'가 된 것이다. 

지금의 '명조체'는 한글의 본 바탕이 된다고 하여 '바탕체'로 불리며, 긴 글을 담은 책으로 출판할 때 기본적으로 활용하는 활자체가 된다. 우리가 문서를 작성할 때 본문은 '바탕체'로 하고, 제목은 두드러지도록 '돋움체'를 쓰는 이유도, 획의 돌기가 있는 세리프체로서 '바탕체'는 손으로 잘 쓴 글씨처럼 읽기의 피로도가 적고, 기계적인 '고딕체'는 획의 돌기를 없앤 '산세리프체'로서 '돋움체'로 불리기에 제목처럼 강조하기에 좋기 때문이다. 
이처럼 '활자(폰트)'로서 '바탕체(명조체)'는 손으로 쓴 '글씨'에서 유래하는데, 손글씨 한글체는 궁중의 여성들이 국문소설을 필사하거나 한글편지를 쓰면서 발전된 '궁(서)체'가 그 시작이다. 한글 폰트에 '궁서체'가 장착된지 오래지만, 본래 손글씨는 '명조체'로 디지털화되는 한편,, '궁서체'의 아날로그적 성격으로 발전해왔을 수도 있겠다.

획의 굵기를 조절하는 것과는 별개로 활자에 투영된 손글씨의 영향이 언제까지 갈 것인가 문제는 '책'의 존립 문제와도 같이 아련하다는 생각도 든다.

사람이 '책'을 들고 다니며 읽는 한,
'책'이라는 물질이 계속 존재할 것처럼,
사람이 '글씨'를 직접 쓰는 한,
'활자'에 녹아든 '글씨'의 영향이 지속되는 것 아니겠는가.


"'수동적인 가죽 장정 대신 능동적인 독서를'. 책이 부르주아와 귀족의 비싼 서재를 그 호사스러운 가죽 장정으로 장식하는 역할에서 벗어나, 모든 독자의 손에서 능동적으로 펼쳐지도록 함으로써, 편안한 독서를 제공하는 역할로 거듭나도록 하겠다는 것이 바로 '타이포그래피의 근대 정신'이다."
- [글자 풍경], <프롤로그 : 글자들의 숲길에서>, 유지원, 2019.


글자 역시 문자를 표현하는 '형태(type)'로서 정보와 지식을 소수 독점 지배자들로부터 다수 대중에게로 해방시켜 왔고, 
다수 민중들은 이 해방된 문자와 지식을 '글자'라는 형식을 통해 공유하며,
한편으로는 '글씨'를 쓰거나 '활자'를 읽으면서 다양한 해석과 함께 스스로 해방되어 왔다. 

다수 민중에게는 이와 같은 민주주의 확대가 바로, 
'문명'의 역사가 된다.

'타이포그래피(typography)'의 역사 또한 그렇다.

***

- [글자 풍경], 유지원, <을유문화사>, 20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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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지음, 김하현 옮김 / 어크로스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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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잠시 멈추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릭 와이너, 2020.


"좋은 철학은 느린 철학이다... 
멈춤은 실수나 결함이 아니다... 멈춤은 텅 빈 것이 아니라 잠시 유예된 상황이다. 생각의 씨앗이다. 
모든 멈춤은 인식의 가능성, 그리고 궁금해할 가능성으로 가득 차 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1-2. 소크라테스처럼 궁금해하는 법>, 에릭 와이너, 2020.


철학을 처음 접했던 소싯적에 선배들은 말했다. 철학은 끊임없이 "왜?"라고 묻는 것이라고. 영문과 철학학회 '현대철학반'은 유물론을 자처했기에 고대 그리스 이오니아 학파 탈레스처럼 "세계의 기원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이 철학의 시작이라고 생각했지만, 철학과의 유물론자 선배들조차도 철학은 "왜?"라는 질문의 반복이라고 역시 답했다. 

아마도, 서양의 전통적 철학이 고대 그리스의 플라톤을 출발점으로 삼고 있으며, 그의 [대화편]은 스승인 소크라테스와의 대화를 다루기 때문이리라. 소크라테스는 당시의 문명도시국가 아테네의 청년들과 모든 사람들을 붙잡고 계속 "왜 그렇게 생각하는가?"라는 질문을 끊임없이 던져댔다고 한다. 

소크라테스가 던진 무한반복 질문의 목적은 단 하나, 당신이 얼마나 무지한지 깨닫게 하기 위함이었다. 소크라테스가 대화의 마지막에 진짜 그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그의 고전철학적 유행어 "너 자신을 알라"는, 무한반복되는 "왜?" 질문을 통해 그동안 확실한 것처럼 보였던 나의 생각이 얼마나 불확실한 것인가, 그러므로 나는 얼마나 아는 게 없는가를 깨닫게끔 하고, 무지한 나 자신을 알라는 결론으로 항상 이끌었단다. 잘난체 해야하는 문명도시 아테네의 궤변론자들과 시민들은 소크라테스의 집요한 질문공세에 짜증이 났고 풍기문란죄 아니면 괘씸죄나 하다못해 반역죄 같은 걸 씌워서 독약을 마시게 했다. 역시 "악법도 법이다"라는 유언을 남겼는지 어땠는지 모르겠지만, 소크라테스는 서양철학의 아버지와도 같이 궁극의 근원을 파고드는 사고실험의 본좌로 남게 되었으며 그의 제자 플라톤은 스승과의 대화를 통해 서양철학의 맏형이 되었다.


'철학적 여행자'를 자처하는 미국의 기자출신 작가 에릭 와이너(Eric Weiner)의 철학 관련 책 제목 또한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2020)다. 에릭 와이너에 의하면 소크라테스에게 철학은 곧 질문이었다고 한다. 어떤 것의 근본을 향해 천천히, 집요하게, 가끔은 멈춰서게 하면서 파고드는 인간의 사고실험, 특히 상대방과의 대화를 통해 실천하는 정신수양이 바로 소크라테스와 에릭 와이너가 규정하는 철학인 것이다.

그들 '소크라테스주의자'들에게 질문은 단순히 던지는 것에 멈추지 않는다. 그들 철학자들에게는 질문은 경험하는 것이고 살아보는 매우 심오한 것이다.

에릭 와이너의 철학 여행은 그가 좋아하는 기차(익스프레스/express)와 함께 한다. 지금은 비행기보다 느리지만 철도가 처음 길을 연 19세기의 근대에만 해도 기존의 속도 개념을 혁명적으로 바꿔버린 기차가 철학과 닮았다고 보는 듯 하다. 철학이란 항상 개념을 갱신하면서 사고의 틀을 바꿔왔기 때문이리라.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Socrates Express)]의 부제는 <죽은 철학자들로부터 배우는 삶의 지혜(In Search of Life Lessons from Dead Philosophers)> 정도로 번역할 수 있겠다. 
저자는 일반인처럼 아침에 침대에서 벗어나기 싫어 끊임없이 자신이 일어나야 하는 이유를 사유했던 로마황제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같은책, <1-1>)부터 철학의 성인 소크라테스(<1-2>), 부지런히 걸으면서 자연과의 조화를 꿈꾼 루소(<1-3>), 미국의 초월주의자 헨리 데이비드 소로(<1-4>),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1-5>)와 영원회귀 속 초인주의자 니체(<3-11>), 동양의 싸우는 간디(<2-8>)와 친절한 공자(<2-9>) 등을 거치면서 에피쿠로스(<2-6>)의 쾌락과 에픽테토스(<3-12>)의 스토아학파도 경유했다가 시몬느 보봐르(<3-13>)의 노화와 몽테뉴(<3-14>)의 죽음까지, 저자 스스로 엄선한 14명의 '죽은 철학자들(Dead Philosophers)'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물론 역자의 실력이 출중하기에 가능한 것으로 믿어지나, 저자의 글솜씨 원문 자체가 재미있고 구성진 게 번역본임에도 느껴진다. 책은 기차의 속도만틈이나 빠른 속도로 넘어간다. 그러나 에릭 와이너가 하고자 하는 말은 그런 현대식 속도를 제어하는 것이 바로 '철학'이라는 것. 길거리에서 우연히 소크라테스를 만난 것처럼 잠시 멈출 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 또한 일부러 '익스프레스'는 아니지만 출퇴근길 덜컹거리는 전철 안에서 천천히, 아주 천천히 곱씹어 읽어본다. 그리고 나의 마음을 들여다보려 노력해본다.

철학 여행자 에릭 와이너의 철학책 [소크라테스 익프레스]를 한 문장으로 요약하자면,
'좋은 철학은 멈춰서 다시 생각할 수 있는 느린 철학이며, 그 철학적 사유의 근원은 인식의 주체인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이다.


"우주가 똑같이 반복된다는 주장을 니체가 처음 한 것은 아니었다. 그리스 철학자 피타고라스는 그보다 약 2,500년 전에 비슷한 발상을 내놓았고, 인도 경전인 [베다]는 그보다 더 빨랐다. 니체도 분명히 이 사실을 알았을 것이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처럼 니체 역시 먼 곳까지 두루 살피며 지혜를 찾아 헤맸다. 
니체는 그 아이디어를 한 단계 더 끌어올리고자 했다. 니체는 '영원회귀'를 신화가 아닌 과학으로 만들고 싶었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11. 니체처럼 후회하지 않는 법>, 에릭 와이너, 2020.


인도의 독립보다는 독립할 자격이 있는 인도를 목표로 평생 싸움을 했다던 간디와, [논어]에 105번 등장한다는 '인(仁)', 즉 에릭 와이너가 보기에 '인간다운 마음'으로 번역되어야 하는 그 '인'과 도덕적 자기수양으로서의 평생 공부를 설파한 공자는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가 강조하는 주관주의 관념론의 동양적 경유지로 보인다. 

사실 동아시아의 유학과 성리학은 "세계의 근원은 무엇인가?"를 탐구하는 유물론적 성향도 분명하나, 인간 세상의 현실적 정치철학을 더욱 중시하면서 심성과 도학을 수양하는 후기 성리학의 심성론적 성격이 점차로 강화되어 왔다. 근대성의 문 앞에서 자연철학 또는 과학과 구분되는 인문학적 성격의 철학이다. 물론 고대의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와 힌두교, 자이나교 등은 말할 것도 없이 나 자신을 똑바로 직시하는 '직지심성론'이다. 본래 '유물론'적 경향도 있던 유학이 도학적 '관념론'으로 변화되는 현상은 동양적 '유-불-선', 즉 성리학이 불교 및 도교와 융합되는 일련의 과정이기도 하다.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를 탄 인식의 주체철학은 이렇게 동서양을 횡단한다.

저자 에릭 와이너는 서양 에피쿠로스의 최고선으로서 '쾌락'을 동양의 불교에서 추구하는 '평정심'과 동일시하고, 스토아학파 에픽테토스의 금욕을 내 주관적 의지로 어찌할 수 없는 객관세계의 운동에 스트레스 받지 않고 내 생각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자기통제로서 우리의 철학적 본보기로 삼는다.

그렇지만, 
주관적 관념론이므로,
결국 다시 프리드리히 니체다. 

니체에게 세계사는 무한반복 가능성의 '영원회귀'이고, 불확실한 통계로서 수만 가지 가능성의 '영원회귀'는 니체에게 일종의 철학적 사고실험이다. 이를 이겨내는 것은 차라투스투라 같은 선지자적 초인이고 이를 위해 니체는 죽기 전 기존의 '모든 가치의 재평가'를 위한 저서를 준비했다고 한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라고 단정한 극단적 주관론자 쇼펜하우어의 후예답다.
역시, 근현대철학에서 '욕망'을 아우르는 '주관적 관념론'의 본좌는 프리드리히 니체다.
대부분의 현대철학자들이 니체를 피해가지 못하고 있다.


"... 오래된 격언들 사이에 몽테뉴가 직접 적은 글귀가 보인다. '크세주(Que sais-je)', '나는 무엇을 아는가?' 이 짧은 문장은 몽테뉴의 철학과 그가 살아온 방식을 깔끔하게 압축해 보여준다."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3-14. 몽테뉴처럼 죽는 법>, 에릭 와이너, 2020.


에릭 와이너의 종착지는 '에세이'를 남긴 16세기 프랑스 철학자 몽테뉴다. 
소크라테스가 에릭 와이너의 머리라면 몽테뉴는 심장이다.

부연하자면, 소로는 눈, 쇼펜하우어는 귀, 루소는 발, 에픽테토스는 그의 손이다. 
결국, 이 모든 철학적 신체들은 주체의 마음으로 수렴된다.

몽테뉴는 절대적 진리를 부정한 회의론자였고 철학의 끝인 '죽음'에 천착했지만 결국 죽음이 뭔지 알 수는 없었다. 프랑스어로 '해보다'라는 뜻이라는 '에세이(essay)'는 몽테뉴가 고안한 철학적 글쓰기가 그 유래라고 하는데, 몽테뉴는 '죽음'이 뭔지 알 것 같다고 생각이 들다가도 다시금 제기되는 "과연 그런가?"라는 질문을 통해 부단히도 사고실험을 이어갔단다. 그의 철학적 '시도(essay)'는 '크세주(Que sais-je)'라는 자문으로 시작하여 '죽음'이라는 생각을 계속 가지고 놀아보는 궁극의 철학적 사고실험이었다. 


"... 내가 이번 여행에서 배운 점이 있다면 그건 바로 '인식은 선택'이라는 것이다. 세계는 내가 만들어낸 생각이다. 그 생각을 좋은 생각으로 만들면 되지 않나?"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나오는 말 - 도착>, 에릭 와이너, 2020.


니체의 '영원회귀' 세상에서 인식의 주체인 나의 '인식전환'을 통해 '최고선'으로서의 '행복'을 추구하자는 에릭 와이너의 '주관적 관념철학 기차'의 슬로건은 "인식은 선택이다"라는 명제였다.

맛깔난 글솜씨와 동서양 횡단을 통해 확인한 그의 철학적 지혜의 결론은 결국,
이 세계는 주체인 내가 생각하기 나름인 그 무엇이 되었다.


"지금까지 철학자들은 세계를 다양한 방식으로 '해석'하기만 해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세계를 '변혁'시키는 것이다..."
- 칼 마르크스, [루드비히 포이어바흐에 관한 제11번째 테제], 1845.


19세기 세계를 해석하기만 하던 철학이,
20세기 세계를 변혁하는 임무를 맡더니,
21세기 다시금 주체 안으로 침잠해 간다.

철학이 다시금,
여기 잠시 멈춘다.

***

-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Socrates Express)](2020), Eric Weiner, 김하현 옮김, <어크로스>, 2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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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주받은 미술관 - 그림으로 보는 재앙의 역사
나카노 교코 지음, 이희재 옮김 / 영진.com(영진닷컴)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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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모두에게도 놀이터
- [저주받은 미술관]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나카노 교코.


다시, 
나카노 교코다.

몇 해 전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알게 된 일본의 미술사학자인데, 그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림이 묘사하고자 한 인간군상의 무서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후 그녀가 엮은 몇 권의 미술사 책을 읽었고, 이제 미술사를 좋아하는 내게 나카노 교코는 접하는 대로 무조건 읽게 되는 작가다.

이번에는,
[저주받은 미술관]과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이다.


[저주받은 미술관](2022)에서 나카노 교코는 코로나 팬데믹 후인 지금, 인류사에서 오래된 감염병인 흑사병과 콜레라는 물론 결핵, 스페인 독감과 지금은 정복된 질병인 천연두 등을 그린 그림들과 30년 종교전쟁, 1차 세계대전 등을 통과했던 명화들을 소개한다. 물론 고대로부터 천재지변의 대명사인 대홍수와 화재 및 화산폭발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지상의 신이나 다름없는 왕, 그리고 신과 가장 가까운 성직자조차 제 수명만큼 살지 못하고 역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죽음의 평등주의'가 견고한 계급사회에 길들어 있던 소박한 민중을 얼마나 각성시켰을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특히 성직자에 대한 환멸은 컸다. 신자를 구하기는커녕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면서 방관만 하던 교회의 권위가 형편없이 실추되었으니, 페스트 종식과 함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의 탄생, 나아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역사의 흐름은 자못 자연스럽다."
- [저주받은 미술관], <4장. 중세의 역병 - 팬데믹과 죽음의 무도>, 나카노 교코, 2022.


중세를 극복한 건 르네상스이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이는 문명교체의 인문학적 징후였을 테고, 실제로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는 존재"(같은책, <8장>)로서의 역병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어떨지 모르지만 중세의 지배계급은 민중들과마찬가지로 역병에 취약했고 그래서 역병은 '죽음의  평등주의'를 통해 기존 계급사회에 균열을 냈다.

가톨릭에 대항한 개신교 전통의 북유럽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 민중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대대로 화가를 배출시킨 '브뤼헐가'의 시조다. 그는 종교 제단화나 신화화, 역사화 같은 대작 의뢰가 드문 북유럽 시민사회 출신이라 농민과 민중들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 [죽음의 승리](1562)에 담긴 페스트(흑사병)는 [로마의 페스트](1869)를 그린 19세기 화가 쥘 들로네 같은 비장함은 없다. 페스트가 만연하여 죽음의 우의로서 해골들이 마을 전체를 뒤덮었지만 엄중하다기 보다는 죽음을 쟁반에 올려놓고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하는 코믹한 장면을 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피터르 브뤼헐의 스승은 북유럽의 이단아 히에로니무스 보스였단다.

[저주받은 미술관]의 표지 그림은 19세기 화가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1833)이다. 영국의 헨리8세 사후 메리 여왕과 왕위 다툼에서 밀려 즉위 9일만에 처형된 열여섯 살 제인 그레이의 처형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홍수의 재난을 담은 게 아니라 1928년 런던 템스강의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45년이 지난 1973년에 어느 신입 학예사의 성실한 탐사 끝에 부활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 후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었을 때 인기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몰리던 통에 이 작품 앞 바닥이 무너지기도 했단다.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는 그 특유의 풍만한 여체가 여전히 돋보이는 '알레고리', 즉 '우의'적 표현을 담아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휴전기에 [전쟁과 평화](1629~1630)를 그렸고 개전 후에는 [전쟁과 공포](1637~1638)를 통해 또 다시 닥쳐온 전쟁을 역시 우의적으로 담았다. 루벤스의 신화적 알레고리 명작들은 출연자들이 담고 있는 신화적 상징을 읽고 해석하는 재미를 감상자들에게 선사한다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루벤스 특유의 여체 그림은 당시의 유명한 포르노그래픽으로서 주문자의 성적 취향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화가들의 '마지막 그림'들은 어땠을까.

나카노 교코의 2015년작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 르네상스부터 종교화, 신화화를 그린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치아노, 엘 그레코와 루벤스의 전성기 그림들과 마지막 작품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중세를 벗어난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금욕주의에 빠진 말년의 작품에서는 건조한 여체로 변했고 루벤스의 화려한 색채와 구도는 마지막 작품의 회색빛 풍경화에서는 더 볼 수가 없다.

벨라스케스와 반다이크, 고야 같은 궁정화가의 생애와 마지막 작품은 절대군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화가 개인의 신분과 지위가 르네상스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못지 않게 더욱 높아지는 절정기를 보냈지만, 어느덧 그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절대왕정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동양은 마침 그 무렵 크게 인기를 끌었던 인상파 작품을 회화의 교과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화폭에서 주제와 의미, 은유를 모두 걷어낸 채 오직 보고 느끼는 그림이 좋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인상파는 긴 회화사 가운데 그저 최신의 조류일 뿐이다. 서양회화는 먼저 신과 함께 존재했고, 왕후 귀족과 함께 존재했으며, 각 시대에 따른 민중의 생활과 함께 존재했다. 이 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그림을 감상할 수 없다."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3부. 화가와 민중 - 시민사회를 그리다>, 나카노 교코, 2015.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태동기와 함께 등장한 일련의 민중화가들은 이른바 풍속화를 그렸고, 신분이나 지위 상승보다는 화가로서 독립적으로 개별화된 화가 개인들의 삶 또한 미스테리 일색이다. 

피터르 부뤼헐의 그림은 그를 모작한 아들 피터르와 구분하기 어렵기도 하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페르메이르의 마지막 작품인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여인](1670~1672)에 대한 위작 논란도 있단다. 남프랑스에서 고요한 농민 풍속화를 그린 밀레의 마지막 그림 [야간의 새사냥](1874)은 그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역동적이다. 아마도 한 번은 그렇게 그려보고 싶었다는 듯이. 

고흐의 고단했던 예술가의 생애야 더 말해야 무엇할까마는, 마지막 그림 [까마귀 나는 밀밭](1890)의 노란색은 그 절정기의 색감과 어울리지 않게 죽음의 불길함을 예견한다. 고흐는 역시 그 해에 죽었다.


명화들은 미술사 작가에게는 화수분과 같다.
내가 믿고 읽는 우리나라 김선지 작가도 그렇고 일본의 나카노 교코도 명화를 중심으로 미술가와 그의 생애,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이 글들을 엮어 무한한 미술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전이 된 명화들은 이처럼 미술가의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자, 그림을 그리는 자 뿐만 아니라 보는 자들에게도 끝없는 감상과 해석의 보고가 된다.

명화는 작가나 감상자 모두의 놀이터가 맞는가 보다.

***

1. [저주받은 미술관](2022), 나카노 교코, <영진닷컴>, 2024.
2. [내 생애 마지막 그림](2015), 나카노 교코, <오브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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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생애 마지막 그림 - 화가들이 남긴 최후의 걸작으로 읽는 명화 인문학
나카노 교코 지음, 이지수 옮김 / 다산초당(다산북스) / 2016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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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화는 모두에게도 놀이터
- [저주받은 미술관]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나카노 교코.


다시, 
나카노 교코다.

몇 해 전 [무서운 그림] 시리즈로 알게 된 일본의 미술사학자인데, 그림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그림이 묘사하고자 한 인간군상의 무서움에 관한 이야기였다. 이후 그녀가 엮은 몇 권의 미술사 책을 읽었고, 이제 미술사를 좋아하는 내게 나카노 교코는 접하는 대로 무조건 읽게 되는 작가다.

이번에는,
[저주받은 미술관]과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이다.


[저주받은 미술관](2022)에서 나카노 교코는 코로나 팬데믹 후인 지금, 인류사에서 오래된 감염병인 흑사병과 콜레라는 물론 결핵, 스페인 독감과 지금은 정복된 질병인 천연두 등을 그린 그림들과 30년 종교전쟁, 1차 세계대전 등을 통과했던 명화들을 소개한다. 물론 고대로부터 천재지변의 대명사인 대홍수와 화재 및 화산폭발 등도 빼놓을 수 없다.


"지상의 신이나 다름없는 왕, 그리고 신과 가장 가까운 성직자조차 제 수명만큼 살지 못하고 역병으로 죽었다. 이러한 '죽음의 평등주의'가 견고한 계급사회에 길들어 있던 소박한 민중을 얼마나 각성시켰을지 가히 짐작할만 하다. 특히 성직자에 대한 환멸은 컸다. 신자를 구하기는커녕 스스로도 구하지 못하면서 방관만 하던 교회의 권위가 형편없이 실추되었으니, 페스트 종식과 함께 중세가 끝나고 르네상스의 탄생, 나아가 종교개혁으로 이어지게 된 역사의 흐름은 자못 자연스럽다."
- [저주받은 미술관], <4장. 중세의 역병 - 팬데믹과 죽음의 무도>, 나카노 교코, 2022.


중세를 극복한 건 르네상스이기도 했지만, 어찌보면 이는 문명교체의 인문학적 징후였을 테고, 실제로는 "사회의 어두운 부분을 들추는 존재"(같은책, <8장>)로서의 역병의 역할이 컸을 것이다. 현대사회는 어떨지 모르지만 중세의 지배계급은 민중들과마찬가지로 역병에 취약했고 그래서 역병은 '죽음의  평등주의'를 통해 기존 계급사회에 균열을 냈다.

가톨릭에 대항한 개신교 전통의 북유럽 플랑드르에서 활동한 16세기 민중화가 피터르 브뤼헐은 대대로 화가를 배출시킨 '브뤼헐가'의 시조다. 그는 종교 제단화나 신화화, 역사화 같은 대작 의뢰가 드문 북유럽 시민사회 출신이라 농민과 민중들을 주로 그렸다. 

그의 작품 [죽음의 승리](1562)에 담긴 페스트(흑사병)는 [로마의 페스트](1869)를 그린 19세기 화가 쥘 들로네 같은 비장함은 없다. 페스트가 만연하여 죽음의 우의로서 해골들이 마을 전체를 뒤덮었지만 엄중하다기 보다는 죽음을 쟁반에 올려놓고 사람들을 놀래키거나 하는 코믹한 장면을 담고 있다. 
아니나 다를까 피터르 브뤼헐의 스승은 북유럽의 이단아 히에로니무스 보스였단다.

[저주받은 미술관]의 표지 그림은 19세기 화가 폴 들라로슈의 [제인 그레이의 처형](1833)이다. 영국의 헨리8세 사후 메리 여왕과 왕위 다툼에서 밀려 즉위 9일만에 처형된 열여섯 살 제인 그레이의 처형 장면을 그린 작품인데, 홍수의 재난을 담은 게 아니라 1928년 런던 템스강의 대홍수로 유실되었다가 45년이 지난 1973년에 어느 신입 학예사의 성실한 탐사 끝에 부활한 작품이라고 한다. 그 후 내셔널 갤러리에 전시되었을 때 인기가 좋아 사람들이 많이 몰리던 통에 이 작품 앞 바닥이 무너지기도 했단다.

17세기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는 그 특유의 풍만한 여체가 여전히 돋보이는 '알레고리', 즉 '우의'적 표현을 담아 네덜란드 독립전쟁의 휴전기에 [전쟁과 평화](1629~1630)를 그렸고 개전 후에는 [전쟁과 공포](1637~1638)를 통해 또 다시 닥쳐온 전쟁을 역시 우의적으로 담았다. 루벤스의 신화적 알레고리 명작들은 출연자들이 담고 있는 신화적 상징을 읽고 해석하는 재미를 감상자들에게 선사한다고 하는데, 그러거나 말거나 루벤스 특유의 여체 그림은 당시의 유명한 포르노그래픽으로서 주문자의 성적 취향도 고려하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면 이 화가들의 '마지막 그림'들은 어땠을까.

나카노 교코의 2015년작 [내 생애 마지막 그림]은 르네상스부터 종교화, 신화화를 그린 보티첼리, 라파엘로, 티치아노, 엘 그레코와 루벤스의 전성기 그림들과 마지막 작품들을 비교하며 소개한다. 중세를 벗어난 보티첼리의 비너스는 금욕주의에 빠진 말년의 작품에서는 건조한 여체로 변했고 루벤스의 화려한 색채와 구도는 마지막 작품의 회색빛 풍경화에서는 더 볼 수가 없다.

벨라스케스와 반다이크, 고야 같은 궁정화가의 생애와 마지막 작품은 절대군주의 후원을 배경으로 화가 개인의 신분과 지위가 르네상스의 다빈치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못지 않게 더욱 높아지는 절정기를 보냈지만, 어느덧 그들의 든든한 배경이 되어주었던 절대왕정의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근대에 이르러 서양문화를 적극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동양은 마침 그 무렵 크게 인기를 끌었던 인상파 작품을 회화의 교과서로 여기는 경향이 있다. 화폭에서 주제와 의미, 은유를 모두 걷어낸 채 오직 보고 느끼는 그림이 좋다는 인식이 생겼다. 그러나 지금까지 살펴보았듯이 인상파는 긴 회화사 가운데 그저 최신의 조류일 뿐이다. 서양회화는 먼저 신과 함께 존재했고, 왕후 귀족과 함께 존재했으며, 각 시대에 따른 민중의 생활과 함께 존재했다. 이 점을 알아두지 않으면 그림을 감상할 수 없다."
- [내 생애 마지막 그림], <3부. 화가와 민중 - 시민사회를 그리다>, 나카노 교코, 2015.


부르주아 시민사회의 태동기와 함께 등장한 일련의 민중화가들은 이른바 풍속화를 그렸고, 신분이나 지위 상승보다는 화가로서 독립적으로 개별화된 화가 개인들의 삶 또한 미스테리 일색이다. 

피터르 부뤼헐의 그림은 그를 모작한 아들 피터르와 구분하기 어렵기도 하고 요하네스 페르메이르 등의 생애는 잘 알려져 있지도 않으며 페르메이르의 마지막 작품인 [버지널 앞에 앉아 있는 여인](1670~1672)에 대한 위작 논란도 있단다. 남프랑스에서 고요한 농민 풍속화를 그린 밀레의 마지막 그림 [야간의 새사냥](1874)은 그의 작품이라고 하기엔 너무 역동적이다. 아마도 한 번은 그렇게 그려보고 싶었다는 듯이. 

고흐의 고단했던 예술가의 생애야 더 말해야 무엇할까마는, 마지막 그림 [까마귀 나는 밀밭](1890)의 노란색은 그 절정기의 색감과 어울리지 않게 죽음의 불길함을 예견한다. 고흐는 역시 그 해에 죽었다.


명화들은 미술사 작가에게는 화수분과 같다.
내가 믿고 읽는 우리나라 김선지 작가도 그렇고 일본의 나카노 교코도 명화를 중심으로 미술가와 그의 생애, 역사적 배경을 주제로 글을 연재하고 이 글들을 엮어 무한한 미술 이야기를 들려준다.

고전이 된 명화들은 이처럼 미술가의 삶과 죽음을 포괄하는 끝없는 이야기의 원천이자, 그림을 그리는 자 뿐만 아니라 보는 자들에게도 끝없는 감상과 해석의 보고가 된다.

명화는 작가나 감상자 모두의 놀이터가 맞는가 보다.

***

1. [저주받은 미술관](2022), 나카노 교코, <영진닷컴>, 2024.
2. [내 생애 마지막 그림](2015), 나카노 교코, <오브제>,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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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에서 나오다 :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 - 정보라·이경희·박애진·남세오·전혜진·구슬·박해울
정보라 외 지음 / 구픽 / 2022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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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책에 갇히고 만다
- [책에 갇히다] / [책에서 나오다], SF 앤솔러지, <구픽>


1.

내가 '책'을 들고 다니기 시작했던 건 예닐곱 살 적부터였다. 
그렇다고 그 나이부터 활자 읽기를 좋아했다는 말은 아니다. 내 손에 들려져 있던 건 주로는 공룡이 나오는 어린이 백과사전 같은 책이었다.

어릴적 어머니는 집에 혼자 남을 나를 위해 16절 갱지 한 묶음과 모나미 볼펜 한 다스를 주고는 일을 나가셨고 나는 어두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들고 다니던 책을 펼치고는 공룡 따위 삽화들을 따라 그렸다. 
어린 시절 내 꿈이 잠시 '고고학자'였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공룡은 그 나이 때 나만 좋아했던 건 아니었을 테지만, 우연히 우리 집에 공룡이 나오는 생물 대백과사전 비슷한 책이 있었고 글을 잘 몰랐을 취학 전의 나는 그 유일한 어린이책을 들고 다니며 공룡 그림을 들여다 보았을 것이며 그것들을 따라 그려대는 나를 보며 어머니는 내개 종이와 펜을 쥐어주었을 거다. 모자라지 않던 갱지와 모나미 볼펜은 어린 나의 친구였고 그 속에서 노닐던 수많은 공룡들과 얼마전 할머니집에 살 때 텔레비전에 빠져들어서 보던 마징가, 태권브이 같은 로봇들은 나에게 어렴풋이 '고고학'이나 '과학자' 같은 꿈을 막연히 새겼으리라. 

책을 읽게 된 건 그 후로도 한참이나 지난 후였지만 나는 그 덕에 취학 전에 글을 읽을 줄 알게 되기는 했던 것 같다. 지금도 갱지의 냄새와 모나미 볼펜의 촉감은 내가 좋아하는 코드들이다. 

스무살이 되었을 때, 내 손에는 여전히 '책'이 들려져 있었다. 
대학에 들어가 전국 각지에서 모인 동기와 선배들을 보며 나도 모를 모종의 위축감을 느끼지 않기 위해 내가 선택한 게 아마도 '책'이었던 것 같다. 일종의 열등감 극복을 위한 차별전략이었을 텐데, 집안 형편도, 외모도, 말주변도, 그렇다고 지능도 변변치 않던 나는 항상 '책'을 손에 들고 다녔다. 그리고 전철이든 버스든 그 어디서든 읽었는데 어떨 때는 읽는 척도 많이 했다. 의도는 여러 가지였다. 뭔가 있어 보이려는 신비주의 전략이었고, 아무하고나 대화하지 않는다는 자기보호 수작이었으며, 환경을 주체적으로 주도하려는 작전이기도 했다. 타인들은 나를 늘 책을 들고 다니며 읽어대는 녀석으로 인식했고, 내성적인 나는 타인들과 있을 때 눈을 어디에다 두어야 할지 고민하지 않아도 되었으며, 내가 뭔가를 하고 싶거나 말하고 싶을 때 내 마음대로 책을 잠시 덮었다. 그러다가 다시 책을 펼치면, 나는 눈과 마음을 둘 곳이 자연스레 생겼고 더 이상 뻘쭘하거나 어색해하지 않아도 되었다.

그러다보니 한편으로는 네모난 '책' 자체가 주는 물질적 만족감 같은 게 생겼다. 
어릴 때와 달리 성년의 내게 네모진 '책'은 한 손에 딱 들어맞는 악세서리가 되었다. 21세기인 지금은 휴대폰이 들려져 있을 때도 많지만, 휴대폰이 없던 '90년대 초부터는 한 손에 딱 알맞춤한 그립감의 장신구이자 장난감이기도 했다. 

그렇게 지금도 나는 한 손에 잡히는 '책'을 매우 사랑한다.
이 지식을 담은 장신구로서 '책'의 기원은 약 1,700년 역사의 '코덱스'다.

"코덱스의 편리함은 가히 혁명적이었다. 서기 400년 경이 되자, 고전적인 형태의 두루마리는 거의 사용되지 않고 대부분의 책들은 사각형으로 여러 장 모은 형태로 제작되었다."
- [독서의 역사], <책의 형태>, 알베르토 망구엘.

서기 4백년대에는 소장하고 읽기 불편했던 두루마리 형태에서 양피지를 접어 지금의 책 형태로 만든 '코덱스'가 발명되었다. 동양의 죽간이나 서양의 두루마리는 원자재 자체가 고급이라 복제가 쉽지 않았을 테니 기원전 1세기 죽간본이었던 사마천의 [사기]만 해도 세 번 베껴서 분리보관했단다. 그러다가 상대적으로 대량보급이 가능했을 원자재인 동양의 종이나 서양의 양피지에 베껴쓰는 '코덱스(codex)',  즉 지금의 '책'은 개인 소장의 편리성과 유용성이 한층 용이한 형태로 변형되어 왔다.

'코덱스' 시대와 함께 '문자'와 '지식'은 비단 외우는 것만이 아니라 소지하고 다니며 그 권위를 인용할 수 있게 되었는데, 14세기에는 '안경'도 발명되었고, 드디어 15세기에는 구텐베르크의 인쇄기술이 [성경]의 대량생산과 대중화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한편, 15세기 인쇄술의 대중화는 육필 필사본의 화려한 장식적 필체 또한 대중화했기에 16세기에는 인쇄술의 발전이 육필 필사의 기술도 함께 발전시키게 된다. 
'책'의 주요한 역사다.

전자산업 발달에도 불구하고 '종이책' 고유의 양식과 질감, 냄새는 늘 인류와 함께 해왔다. 아르헨티나 국립도서관장 알베르토 망구엘 또한 그랬던 것처럼, 사실 내게도 '독서'란 '문자'나 '지식'을 얻는 행위를 넘어 '책'이란 물질에 대한 일종의 '집착'이기도 하다. 
지금도 한 손에 '책'이란 물질이 없으면 허전하다.

그렇게 나는 오랜 동안 '책'에 갇혔다.


2.

출판사 <구픽>은 며칠 전 '프롤레타리아 장르 단편선'이라는 신예 단편소설 선집(앤솔로지)으로 알게 되었다. 최근 수년 전 놓고 살았던 소설이 땡겨서 몇 권 읽어본 김에 검색해 보니, '책'에 관한 신예 작가들의 단편소설들을 엮은 선집이 두 권 보였다.

한 권은 [책에 갇히다](2021).
전자문명의 발달로 인해 '코덱스' 형태의 네모난 '책'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지는 오래되었다. 그러나 아직 '책'이라는 물질을 통해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세대가 살아있다. 같은 세대라도 신문명 적응이 빠른 사람들은 어느새 빠르게 고전적 '책'을 폐기처분했겠지만, 나 같은 문명 부적응자는 마치 총포 앞에 검을 들고 선 사무라이처럼 무모하게 '책'이란 물질을 한 손에 집고 버틴다.

이처럼, 1,700년 역사와 전통의 '코덱스'로서 '책'을 지키는 건 일종의 문명전쟁의 성격도 있다. 그래서 [책에 갇히다]라는 주제로 모인 신예 소설가들의 영역은 대부분 SF다. 그렇다고 과학적이고 미래주의적이지만은 않다. 기왕에 닥쳐오기 시작한 '코덱스'와 물질적 '책'의 종말 앞에서 진정한 '책'을 찾기 위해 먼 길을 떠나지만 결국 오래전 그대로의 '책'을 찾지는 못하는 내용들이다. 물론 예상하다시피 물질적 '책'을 찾는 건 더 이상 불가능할 앞으로의 미래에서 우리가 찾아야 할 진정한 '책'이 무엇일지 현재에 고민해 보자는 시도들로 가득하다. 전통적 형태의 '코덱스'로서 '책'에 갇혔지만, 그 '책'은 진정하고도 보편적인 '책'으로서 앞으로도 인류와 함께할 진리의 보고를 의미한다. 

진리를 추구하는 한, 
'책'은 영원하다.

'책'에 갇혔으니, 이제 나올 시간이다.
[책에서 나오다](2022)는 아예 대놓고 SF다. 주제 또한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로 잡았다. 신예 SF 작가들에게 주제를 던져주고 고전 SF 한 권을 선정하여 이와 관련한 SF 오마주 소설을 쓰게 해서 모았다. 예를 들어 전혜진 작가는 메리 셸리의 [프랑켄슈타인](1818)을 뽑아 19세기 가부장제가 양산한 억압된 여성이라는 '괴물'을 소설을 쓰기 시작하는 메리 울스턴크래프트 또는 메리 셸리의 당시 일상으로 재구성하면서 보여준다. [프랑켄슈타인]에서 진짜 '괴물'은 피조물이 아니라 자신을 신문명 창조자로서 '프로메테우스'라고 믿었던 인간들의 확신과 오만이었다.

결국, [책에 갇히다]에서 [책에서 나오다]의 기획 속에서 나는 '책'의 영원성을 본다.

우리가 '갇혔던' 책은 '진리'와 동일자인 보편으로서의 '책'이었다.
한편, 우리가 '나오고'자 한 책은 결코 보편자로서의 '책'이 아닌, 개별적인 고전 SF 소설에서 그린 인류의 기존 문명이었다.

결론적으로,
우리에게 1,700년 동안 익숙했던 '코덱스'는 언젠가 사라질지라도,
현재 문명의 개별성을 극복하고 '나오면서'  보편적 진리의 담지자이자 전달자로서의 '책'에는 '갇힐' 수 밖에 없는 인류의 운명을 이야기한다.


3.

"스크립타 마네트(Scripta manet),
베르바 볼라트(Verba volat)"

중세 시대만 해도 '독서'는 눈으로만 하는 게 아니라 입으로 소리내어 암송을 동시에 해야 했단다.
읽지 못하는 사람들이 다수라 '신의 말씀'을 함께 읽고 들어야 했기 때문인데, 구텐베르크 인쇄 혁명을 통해 '문자'를 다수가 공유한 이후로 독자들은 어디에서든 혼자서도 조용히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글로 쓰여진 것은 영원히 남고, 말로 표현된 것은 공기 속으로 사라진다(Scripta manet, verba volta)"는 라틴어 문구는 원래, 중세 암송 시대에는 "글은 조용히 죽은 것이고, 말은 생생히 날아오른다"는 의미였다지만, 근대 이후 묵독 시대에는 "글은 영원히 남고, 말은 공허히 날아간다"는 뜻이 되어 '지식'을 공유함에 '문자'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장이 되었다.

[독서의 역사]를 쓴 알베르토 망구엘에 의하면, 책은 '간단한 도구의 상징적 의미보다 훨씬 복잡한 상징적 의미를 독서가에게 부여'함으로써, '무지, 맹신, 지성, 기만, 교활함, 그리고 계몽을 통해 책읽는 사람은 원전과 똑같은 단어로 그 텍스트를 다시 쓰면서도 원본과는 다른 이름으로 재창조'한다고 말한다.
인류의 모든 문명은 문자로 남고 독자들은 다양한 상상력으로 그 문명을 발전시키기도 하고 퇴행시키기도 하지만 말이다.

인류와 '책'의 관계는 바로 이거다.
다수의 읽기와 쓰기를 통해 다양해지는 진리 추구로 소수의 지식과 정보 독점을 해체해 온 역사.

설령 '책'이라는 네모진 물질이 한 손에 착 감기는 그립감이 결국에 사라지고 말지언정,
낡은 것은 사라지고 새로운 것이 온다는 역사에서도 진정한 '책' 찾기는 멈추지 않는다.

그래서 나는 여전히,
'책'에 갇히고 만다.

***

1. [책에 갇히다], '책과 서점에 관한 SF 앤솔로지', <구픽>, 2021.
2. [책에서 나오다], SF 작가의 고전 SF 오마주, <구픽>, 2022.
3. [독서의 역사(A History of Reading)](1996), 알베르토 망구엘, 정명진 옮김, <세종>,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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