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나라 정벌 - 은주 혁명과 역경의 비밀
리숴 지음, 홍상훈 옮김 / 글항아리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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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신공양제' 문명과 [역경]의 비밀
- [상나라 정벌(翦商)], 리숴,  2022.


1.

아주 오래전,
지금으로부터 4천년 전의 인류는 일종의 '어린아이' 같다고 생각했다.

미국의 심리학자 줄리언 제인스는 [의식의 기원](1976)에서 고대 인류의 '양원적 정신(Bicameral mind)'이 붕괴되는 과정에서의 '의식의 기원'을 추적했다. '양원적 정신'은 우리 두뇌가 이성-감성의 좌우 영역으로 나뉜 것처럼 인류 의식의 역사에도 이와 같은 두 가지 원천이 있다는 건데 고대 인류는 우반구가 더 활성화되어 '신의 음성'을 진심으로 들었다는 설이다. 기원전 2천년경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등장하는 고대 그리스인들은 우측 뇌 뿐만 아니라 온몸의 장기를 통해 신들의 음성을 직접 듣고 인생에서 닥치는 온갖 선택의 스트레스를 견뎠다고 한다.

그래서 나는,
기원전 신석기-청동기 문명교체기의 조상들을 '상상의 친구들'과 함께 노는 '어린아이'로 생각했던 거다.


2.

중세 유럽의 축제 '카니발'은 '식인 축제'였다고도 하고, 지금도 석기시대처럼 사는 부족은 얼마전까지 '식인'을 했을지 모른다는 설을 들으면 역겨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공포심과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다. 그래서 기원전 1천년경 고대 중국의 은-주나라 교체기 문명에서 '인신공양제사'가 만연했다는 주장을 담았다는 책을 얼마전 우연히 소개받고는 그 900쪽의 책을 덥썩 읽기 시작했다.


"초기와 중기 상(商)나라의 존속기간은 모두 합쳐서 약 300년인데, 그 사이에 '인신공양제사' 행위는 신속하게 증가했고, 도살방식도 갈수록 잔인해졌다. 인간 희생 대신 청동기를 매장하는 개혁적인 시도가 있었을 수도 있으나 잠깐 반짝했다가 사라졌을 뿐이다. 상문명의 기본 특징은 이미 틀이 정해졌다. 문자와 청동기술, 거대한 성지, 폭력을 숭상하고 '인신공양제사'에 열중하는 문화가 그것이다."
- [상나라 정벌], <7장. 인신공양제사의 번영과 종교개혁운동>, 리숴, 2022.


대략 3,400년 전 중국 최초의 왕조인 하나라를 대체한 은나라는 아마도 본격적인 청동기라기보다는 신석기 문명으로 시작했을 텐데, 초기 청동기 제련술과 대규모 군대운용으로 황하 이북의 영역에서 활발한 정복전쟁을 벌여 각 부족들에 대한 지배력을 넓혔다. 아마도 동아시아 대륙의 동쪽에서 발원했을 용산 문화의 은나라 종족은 보통 '상(商)'족으로 불리는데 은허의 중원을 장악하고는 강족의 땅인 서방으로 더 확장했다. 관중을 넘어 서쪽 깊은 땅은 청동기 문명에서 중요한 구리가 많은 지역이었다고 한다. 

청동기 문명 초기의 이 정복전쟁은 활발한 '인신공양제사'의 문화와 풍습을 남겼다. 아마도 식량이 부족했던 석기시대에는 불가피한 '식인' 풍습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나, 청동기 정복전쟁 문명에서는 지배종족의 부족장이 왕조로 확립되면서 신과의 소통을 독점하고자 했다. 왕조의 사유재산과 그 독점권을 지키기 위한 '국가권력'의 기원이다. 이 국가권력은 신에게 제사를 지내기 위해 소나 양, 개와 서부의 말을 희생물로 바쳤는데, 여기에 인간 순장과 같은 '인간 희생'도 포함시키게 되었단다.

은나라 중후반과 말기는 '은허'라는 수도 지역을 중심으로 '은상(殷商)' 문화로 불리는데, 상나라는 관중 넘어 중국 대륙 서부를 식민지배하면서 토착부족인 강족을 포로로 잡아다가 상나라 왕족의 하느님이었던 '상제(上帝)'에게 바쳤다. 상나라 수도 은허에서 발굴된 고고학적 제사와 무덤 유적에서는 수많은 순장자의 유골이 사지가 해체되거나 머리가 잘린 상태로 더 나아가 인간 희생의 머리가 청동시루에 쪄진 상태로 발굴되었단다. 이는 제사나 장례 등의 예식 과정에서 수많은 인간 희생물이 해체되고 요리되어 먹혔다는 고대 인류의 '식인'의 증거다.

이 문화는 왕족은 물론 민간과 청동기 제련작업장에서 만연했다. 청동기 제련 작업장의 건물기반에는 수많은 인간 제물이 묻혔고 수도 은허를 너머 서부와 이어지는 식민지 숭국 같은 곳의 민간에서도 이러한 '인신공양제'와 '식인' 풍습이 횡행했다.

여기서 서부 강족의 일족인 앙소 문화의 '주(周)족'이 등장한다.


"공자는 상나라 왕족의 후예이니, 주공이 상족에게 생존의 기회를 주고, 그들을 대신해서 피비린내 나는 '인신공양제사'의 기억을 없애서 후세의 자손들이 치욕 속에서 살아갈 필요가 없게 해준 데에 감사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주공의 이런 관용과 위대한 사적은 그 자신에 의해 500년 동안 묻혀 있다가 또 결국에 공자에게 다시 암호가 해독되고 말았다."
- [상나라 정벌], <에필로그: 주공에서 공자까지>, 리숴, 2022.


중국의 역사학자 리숴(李碩)가 2022년에 발표한 [상나라 정벌(전상:翦商)]이라는 그 책 제목은 '상나라를 베다'라는 뜻이다. 

은-상나라 마지막 주왕을 치고 주나라를 연 왕은 주무왕이지만, 이 혁명을 준비한 사람은 주무왕의 부친 주문왕이다. 주족의 성씨는 '희(姬)'씨였으니 주문왕의 이름은 '희창', 주무왕은 '희발'이다. 상나라 왕족은 '자(子)'씨라고 하나 원래 은상은 성씨가 없이 종족의 성만 있었고 '자'씨는 이후 주나라가 지어준 것이라고 한다. 아무튼, 주족의 성씨인 '희'씨는 주로 여성이 썼고 남성은 '주창'이나 '주발'로 썼다. 주문왕 주창은 주족의 기반을 닦은 고공단보의 손자로서 상나라에 충성하면서 주족의 생존을 책임졌다.

역사에서 1차 사료는 '문헌'이고 '고고학' 사료는 그 다음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은상 문화에서 만연한 '인신공양제사'의 '고고학'적 증거는 제사갱과 갑골문자 등의 발견으로 차고 넘치는데 '문헌'적 증거는 없다.

그러다가 500년 후 주공단의 봉국인 노나라 출신이자 상나라 왕족의 후손인 공자에 의해 '인신공양제사'의 '문헌'적 비밀이 밝혀진다.

그 '문헌'은 바로,
[역경(易經)] 또는 [주역(周易)]이다.


"괘사와 효사의 번잡하고 어지러운 현상 이면에는 사실 세계의 운행법칙에 대한 주창(주문왕)의 탐색이 들어있었다. 괘상의 배열과 조합에 따른 변화를 통해, 현존하는 세계 질서가 영원한 게 아니라 변화할 수 있음을 발견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상왕조의 통치도 이와 같다는 사실이다... 유리의 감옥에서 주창은 몸은 도망칠 수 없었으나 64괘로 짝을 맞추는 원칙을 연역, 추론하여 스스로 신세계로 통하는 문을 열었으니 이것은 바로 '상나라 정벌(翦商)'이 가능하다는 것이었다."
- [상나라 정벌], <20장. 상나라 정벌과 [역경]의 세계관>, 리숴,  2022.


사실 주문왕의 조부 고공단보가 상나라와 타협하고 관중의 주원땅에서 종족의 생존권을 보장받은 비밀 또한 리숴는 [상나라 정벌]에서 밝히는데, 주족은 상나라 왕조의 '인신공양제사'에서 희생되는 포로들의 공급책이었다. 즉, 상나라와 그 식민지 숭국의 지시를 받고 주변 강족을 잡아다가 바치는 일을 도맡으면서 독립된 종족으로 생존했다는 것인데 아마도 할당량이 모자라면 자신의 부족으로 충당했을 수도 있다. 현재 중국 한족의 뿌리라는 '화하족(華夏族)' 문명의 시조이자 농업 문명의 신 후직의 후예인 앙소 문화 주나라 족속의 흑역사다.

실제로 주문왕은 상나라 서부에서 명성을 얻으면서 상나라 주왕의 견제를 받았고, 상나라 수도 은허의 인근인 유리라는 지역에 구금되었는데 그 전에 이미 주문왕 주창의 큰아들 '백읍고', 즉 주읍은 상나라 주왕의 인질이 되어 주왕의 마차를 몰았다. 상나라를 멸망시킨 주무왕 주발은 실제로는 주문왕 주창의 둘째 아들이었고, 주나라 건국 후 주무왕의 아들 주성왕을 섭정하며 국가의 기초를 세운 주공단 역시 주문왕의 아들이자 주무왕의 동생이었다.

상나라의 잔혹한 통치를 은허에서 목격한 주문왕 주창은 자신의 집 지하 토굴에서 몰래 상나라 갑골 점술과 그 문자를 독학하며 주족의 미래를 점쳤는데, 언제 자신의 부족이 상나라의 잔혹한 문명의 희생자가 될지 어떨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결국 문왕 자신이 구금되어 인신공양제물이 될 위험에 빠졌고 실제로 장자 주읍이 인간 제물이 되었다. 심지어 문왕과 무왕 및 주공단 부자는 아들이자 큰형인 주읍의 고기와 국물까지 억지로 먹게 되면서 상나라에 대한 피맺힌 복수를 본격적으로 기획하게 된다. 이 엽기적인 제례는 상나라 식민부족의 수령인 '백(伯)'을 임명하는 일종의 '전통'이었겠지만, 주문왕 부자들에게 이 악마같은 주왕의 패악질은 잔악하기 그지없는 상나라 멸망의 제일 명분이 된다. 
유리에 구금된 주문왕 주창은 [역경]의 기본인 64괘를 더욱 열심히 연구하면서 상나라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고, 구금에서 풀려나 관중의 주원(호경)으로 돌아간 후에 즉시 스스로 '문왕'을 칭하며 혁명을 준비한다.


리숴의 [상나라 정벌]은 문왕이 연역하고 풀이한 [역경]의 64괘 괘사와 효사의 은유적이고 난해한 내용을 통해 상나라 '인신공양제사'의 현장을 읽어내고 있다. 

주문왕은 큰아들을 비롯한 자신까지 빠져든 인간 제물의 위험 속에서 그 '인신공양제'의 현실을 일일이 [역경] 64괘 해석에 담았고 그 과정에서 세상 만물의 운동과 변화, 그리고 변증법적 전환의 원리를 읽어내고 말았다. 즉, 하나라가 상나라에 의해 대체되었듯이 상나라의 운명도 언젠가는 멸망하게 될 예정인데, 그 주역이 자신의 종족인 주족이 될지 아니면 '혁명'이 실패하여 주족 전체가 인간 제물이 될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점을 치고 64괘를 해석했다. 

'변혁'과 변화의 경전, 
[역경]의 시작이다.


"... 무왕은 자기로서는 부친(주문왕)이 열어놓은 이 정의롭지만 미친 사업을 계승할 역량이 없음을 절감했다. 그래서 주(周)나라 왕의 지위를 계승하고도 감히 자기 연호를 쓰지 못하고, 여전히 문왕이 천명을 받은 이후의 연호를 이어서 썼다. 그는 신과 소통할 능력이 없으니, 그저 하늘에 있는 부친의 영령이 계속해서 주나라를 보우해 주기만 기원할 뿐이었다... 주공(단)도 분명히 자기의 위상을 진지하게 고려했을 것이다. 그는 부친(주문왕)이 시작한 이 정의롭지만 미친 사업을 혼자 감당할 역량이 없음을 알았으나, 이 사명과 거기에 수반된 압력은 그들 형제(주발/주단)가 함께 감내할 수밖에 없었다."
- [상나라 정벌], <25장. 목야에서 용맹을 떨치다>, 리숴, 2022.


문왕이 상나라를 멸하기 위해 가장 먼저 한 일은 그들의 신을 빼앗는 것이었다. 즉, 상나라가 인신공양을 하면서까지 모신 '상제'와 직접 소통하기 위해 왕처럼 갑골점을 직접 치고 직접 갑골문을 남기는 것이었다. 그러나 문왕 주창은 '상나라 정벌'의 준비과정에서 죽었고 그의 뒤를 이은 무왕 주발은 부친의 '정의롭지만 미친'([전상], <25장>) 혁명사업을 감당하기 버거워 했다. 

주무왕은 아버지 문왕처럼 상제신과 직접 소통하지 못했고 [역경]의 비밀도 풀지 못해 하루하루가 불안했다. 그래서 참모 같은 동생 주공단에게 의지했다. 주공단 역시 내심 불안하긴 마찬가지였지만 형과는 다른 방법을 고안했다. 즉, [역경]을 통한 '혁명 이론'을 구축한 것인데, 주공단의 이념은 바로 '덕(德)'이었다. 

500년 후 춘추시대 공자가 제창한 '유가' 또는 그 후세 '유학'의 기본이념 중 하나로서 '덕'의 기원이다.
'인신공양제사' 풍습의 잔혹한 '상(商)'나라 문명을 '베었던(翦/전)' 기원전 1046년 목야의 대전은 한순간이었다. 상나라 권력은 이미 내부로부터 와해되었고 주나라를 건국한 주족은 강족과도 화해했지만 중요한 것은 새로운 문명의 창조였다. 

'인문주의'의 출현이다.


"... 왕조의 흥망과 교체의 교훈... 
그(주공단)는 이 일의 배후에 '하늘(天)-상제(上帝)'의 변화의지가 있으나, '천명(天命)'에 영향을 줄 수 있는 유일한 요소는 바로 사람의 '덕(德)', 그러니까 현실 문제를 처리하는 인간의 준칙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주공은 '하늘을 믿을 수 없다(天不可信)'라고 하면서, 사람이 상제의 뜻을 짐작하려는 것은 지나친 욕망이니, 그저 인간 세상에서 해야할 의무를 잘 이행해야 할 뿐이라고 했다."
- [상나라 정벌], <26장. 주공의 새시대>, 리숴,  2022.


'인(仁)'을 강조한 춘추시대 역사문헌학자 공자는 '덕(德)'의 이념을 강조한 주공단으로부터 500년 후학으로서 주공단의 유학 이념을 더욱 확대발전시켰다. 물론 주공단 시대에는 본격적인 유학이라 할 수는 없었지만, 신석기 시대부터 상나라까지 2~3천년간 이어져온 잔혹한 '인신공양제'와 '식인'의 문명 일체를 동아시아에서 끝장냈다. 비록 국가권력에 의한 정복전쟁을 멈추지는 못했지만 '상제' 같은 인격적 신이 아닌 '하늘'로부터의의 '천명'으로 대체했다.

주나라의 새로운 국가를 건설한 후 '인신공양제' 문명을 철저히 파괴하면서 향후 그러한 풍습의 재발을 방지하고, 변화의 경전 [역경]에서 '인신공양제' 해석을 삭제하고 재편하면서 주공단이 의도한 것은 잔인하고 포악한 문명의 종말은 물론 '인신공양제'에 부역했던 주나라 종족의 흑역사를 은폐하기 위함이기도 했다.


3.

리숴는 [상나라 정벌]에서 집요하게 '인신공양제사'를 파고든다.

그 잔인한 식인 문명은 수천년 이상 이어 내려온 인류의 자취였다. 식량이 부족한 선사시대에는 어떤 면에서는 생존을 위해 불가피했을 수도 있다. 벼농사가 정착하기 전의 상고시대에는 노동력이 많이 필요하지 않았고 전쟁에 필요없는 이른바 '잉여' 인력을 제사나 식량으로 소모했을 수도 있다. 국가의 출현 이후로는 신이나 종교를 명목으로 반역자나 '잉여' 인간들을 처분하는 주요 방식이었을 수도 있다.

은상에서 주나라로의 문명교체기를 통해 '인문주의'는 이렇게 수천년 이어진 잔혹한 문명을 끝장낸 이력이 있다. 인간의 일은 어찌 되었든 인간 사이에서 해결책을 찾아야 하는 피할 수 없는 운명이다.

우리 역사에서도 수많은 '혁명'이 있었다.
그 중 삼봉 정도전은 고려말 잔혹한 현실을 혁파하는 이념으로 성리학을 채택했다. [대학]과 [중용]은 물론 '변화의 경전'인 [역경] 또는 [주역]의 현실주의적 원리에 따라 변혁을 실천한 그 중심 사상 또한 '인문주의'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주무왕 같은 권력자는 매일 전전긍긍하며, 혁명은 실천했으되 상나라문명을 실제로 혁파하지 못했다.실제로 문헌에 의하면 주무왕이 상제에게 처음 제사를 올릴 때 '인신공양'으로 상나라 지배계급에게 복수를 했다고 하며 그의 아우 주공단은 이러한 상나라 풍습을 철저히 혁파하겠다는 의지를 '덕'의 '인문주의' 이념을 통해 더욱 강화했고 이후 그의 치세 기간에 '인신공양'의 역사 자체를 없애버렸다.
조선을 건국한 태조 이성계는 주무왕 같은 현실 권력자로서 정치적 손익을 재었겠지만, 삼봉 정도전은 민중을 중심으로 한 공자의 '인(仁)'과 맹자의 '의(義)', 더 거슬러 올라가 주공단의 '덕(德)'을 현실에서 혁명으로 실현하고자 했기에 흔들리지 않았다. 
현실 정치를 넘어서는 '인문주의'의 힘이다.

국가권력에 의한 대규모 정복전쟁이 여전히 수많은 '인신공양'을 해대고 있는 현재까지도 '인문주의'는 변함없이 필요하다.


"이와 같은 '인신공양제'와 검투사 산업의 소멸은 모두 외래문화의 간섭에서 비롯되었다. 로마인은 나중에 기독교에 귀의했고, 전통적인 아즈텍 종교는 식민주의자들의 천주교로 대체되었으나, 은상(殷商)은 그와 달랐다. 주나라가 상나라를 멸한 뒤에 '인신공양제사'는 주나라 사람들에 의해 소멸했으나, 주나라 사람들은 새로운 종교를 만들지 않고 세속적인 '인문주의' 입장을 채용하여 극단적인 종교 행위와 거리를 두고, 그것이 현실 생활에 관여하도록 허락하지 않았다. 이른바 '귀신을 경외하되 멀리하라(敬鬼神而遠之)'는 것이었다. 이것은 후대 중국문화의 토대를 닦아놓았다."
- [상나라 정벌], <프롤로그>, 리숴, 2022.

***

1. [상나라 정벌(翦商/전상/Conquest of the Shang Dynasty)](2022), 리숴(李碩), 홍상훈 옮김, <글항아리>, 2024.
2. [의식의 기원](1976), 줄리언 제인스, 김득룡/박주용 옮김, <연암서가>, 2017.
3. [주역 - 왕필 주](3세기), 왕필, 임채우 옮김, <길>, 1998~2013.
4. [운명 앞에서 주역을 읽다], 이상수, <웅진지식하우스>, 2014.
5. [정도전을 위한 변명], 조유식, <푸른역사>, 19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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