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지음 / 역사의아침(위즈덤하우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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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필귀정(史必歸正) : 한국 '고대사'는 '현대사'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이덕일, 2018.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이덕일, 2009.


"조선총독부 사관과 독립운동가 사관 사이의 최전선은 늘 한국 고대사였다. 한국 고대사는 나라를 빼앗긴 100여 년 전부터 지금까지 늘 이 자리의 현대사였다. '사관(史觀)'이란 말에 볼 '관(觀)' 자가 붙는 이유는 역사를 보는데는 관점이 가장 중요하기 때문이다. 역사를 보는 관점은 고대사나 현대사나 일정해야 한다. 고대사는 지배층의 관점에서 바라보는 사람이 현대사는 민중의 관점에서 바라본다면 그에게 사관(史觀)이란 용어를 써서는 안된다... 조선총독부에서 만든 '고대사'는 지금 이 자리의 '현대사'라는 사실... '고대사는 고대사 전공자에게 맡겨야 한다'는 말은 조선총독부 사관을 영원히 유지시켜야 한다는 말에 다름 아니다."
- [우리 안의 식민사관], <4.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 이덕일, 2018.


수년 전 잡지에서 '실증주의'를 앞세운 젊은 역사학자들이 '유사' 역사학을 비판한다는 기사를 읽었을 때, 역시 모든 학문(學問)에는 반드시 '철학(哲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새삼 했었다. '유물'과 '답사'를 최우선으로 한다는 그들의 '실증주의'는 역사를 '과학'으로 재정립하고 싶었겠지만, 시대와 역사에 관한 통찰이 없는 한 '역사' 또한 진정한 '과학'이 될 수 없다. 사회분석과 예측이 틀리기만 하는 '경제학'이라는 '과학'이 시대 전반을 통찰하는 '정치경제학'의 사회과학을 넘어설 수 없는 이유와도 같다. 젊은 '실증주의' 사학 전문가들은 '고대사 전공자'로서 해방 후 선배 강단 식민사학자들이 전가의 보도로 여기던 유적과 유물을 '실증적'으로 재확인하는 자들에 불과했다.

역사학자는 1차 사료들을 바탕으로 이 흩어진 사실들을 조합하는 2차 논리적 추론을 통해 해당 역사를 3차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탐정과 같다. 1차 사료는 유적과 유물, 그리고 문헌이다. 이들 사료들은 거짓을 말하지 않는다. 중국의 고대문헌이 거짓을 기록한 경우에도 당시의 종합적 문헌비교를 통해 사실을 재구성하는 것이지 당시 저자의 증인으로서의 효력이 없어지는 것은 아니다. 문헌비교에서 가장 당대와 가까운 저자가 남긴 기록이 그나마 가장 사실을 그 맥락 속에라도 담고 있다. 기록의 역사 또한 수천년의 방대한 시간을 통과하고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밥먹듯 거짓말을 하며 살지만, 유물과 유적의 건조한 사실 자체보다 당대는 물론 그 시대를 언급한 기록들을 반복하여 다루고 있는 여러 사람들의 '증언'이 더욱 풍부한 진실을 내포하고 있다. 
한가람역사연구소 이덕일 소장 또한 1차 사료로서 당대의 문헌을 중요하게 보는데, 그의 역사연구는 시종일관 '식민사관'에 맞서 현대의 '민족사관'을 바로 세우는 고난한 작업이다. 두계 이병도를 조상으로 모시는 주류 역사학계를 '식민사학'으로 규정하며 이덕일 소장이 벌이는 전투는 아래와 같은 네 개의 진지전이다.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1. '한사군 한반도설' 및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


"고조선이 평양 일대의 소국이었다면 두 나라가 왜 전쟁을 치렀는지 설명조차 할 수 없다. 북방의 강자 흉노와 맞서고 있던 한(漢)나라가 고조선에 위협을 느끼고 전쟁까지 일으키려면 고조선의 위치는 당연히 한나라에 위협적인 곳에 있어야 한다... 다시 정리하면 중국의 전국시대부터 한나라 시대까지 고조선과 중국의 국경은 지금의 난하와 갈석산 지역이며 이 지역이 고대의 요동이다. 곧 만리장성의 동쪽 끝은 사마천 시대에는 요동이라고 부르던 난하 지역이었지만 현재의 지리개념으로는 요하의 서쪽인 것이다... (만리장성 동쪽 끝은)... 명태조(1381) 때에야 겨우 현재의 산해관에 관문을 쌓은 것이고, 과거에는 그보다 더 서쪽이었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1. 한사군은 한반도 내에 존재했는가?>, 이덕일, 2009.


고조선이 서기전 2세기에 중국 한나라에게 멸망되고 그 자리에 한무제는 네 개의 군을 설치했다. 이른바 '한사(4)군'이다. 우리 국사교과서는 낙랑, 진번, 임둔, 현도군의 한사군이 한반도 북부에 존재한다고 가르쳤다. 단군왕검의 고조선의 출발지가 평양이었고 망할 때까지 그 자리였으니 한무제의 한사군도 한반도 내에 존재했다는 것이 두계 이병도와 그 후예들의 식민사관이다. 

이병도는 일제강점기 와세다대학에서 역사공부를 시작했다. 스승들은 당연히 일본 역사학자였는데, 이병도는 나중에 해방후 남한 역사학계의 '태두'로 칭송되었고 일본인 스승들을 '인격적으로 사랑'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그 스승들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의 식민사학자들이었다.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로 정당화되려면 근대의 후진성만으로는 모자랐다. 고대사까지 거슬러 올라가서 그 식민지성을 입증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어거지 지역비정을 위해 유물들도 조작했다. 그런데 그 후예 이병도 무리들은 '실증주의'를 앞세운다. 일제강점기 무장 독립투쟁을 했던 '민족사학'과 사회구성체 역사학설을 도입한 '사회경제사학'에 밀려 그나마 '과학'이나 '객관주의'를 갖다붙인 '실증주의'였지만 이들의 스승들은 일제 식민사학자들이었고 그들 식민사학자들은 '실증주의자'가 아니라 한반도는 일제의 식민지였다는 억지주장에 역사를 끼워맞추는 '정치'로서의 역사학 연구자였다. '실증주의'와 정반대인 식민사학이 '실증주의'로 둔갑한 것은 해방 후 분단과정에서 친일파가 다시 득세한 남한을 민족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이 떠나고 빈 자리를 이병도 무리의 식민사학자들이 차지하고 '주류'가 되었기 때문이다.

이덕일 소장이 파헤치는 이병도 무리들의 식민사학은 사료분석에 타당하게 근거한 자기와 다른 의견을 배척한다.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리지린 박사의 [고조선연구]와 1980년대 남한 역사학자 윤내현 교수의 [한국고대사신론]은 고대 문헌들을 철저하게 비교분석하여 우리 고조선의 강역을 요동을 넘어 지금의 요서지역까지 넓혔다. 중국 고대문헌인 [사기]와 [한서], [삼국지]와 [후한서] 등 고대 4서 모두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 요하를 요동의 난하 또는 그보다 더 서쪽의 대릉하로 지목하고 있다. 그러나 이병도 무리는 굳이 그 요하를 한반도의 대동강 또는 청천강으로 확정한다. 요동과 만주 일대에서 발견된 비파형동검과 고인돌 같은 유물과 유적에 이 '실증사학자'들은 아랑곳하지 않는다. 오로지 한반도 평양에서 발견된 한나라 시대 유물과 기왓장 따위가 중요하다. 북한에서는 평양의 한나라 물건은 한무제가 아니라 동한 광무제 시절 평양에 들어온 유물이라는 것을 입증했다는데 우리의 식민사학자들에게는 고조선과 한사군이 한반도를 넘어서면 안되기 때문에 평양에서 한나라 유물이 발견된 사실만 중요하다. 또한 분단반공이념으로 그동안 무시했던 북한 역사학계의 연구성과 중 유일하게 동조한 것이 평양의 한나라 유물이다. 

사실 고조선과 고구려 등 고대의 '평양'은 고유명사가 아니었다. '평양'은 수도를 의미하는 보통명사로서 요동에 위치했고 나중에 고구려 장수왕이 한반도 북부로 수도로 옮기면서 '평양'이라는 지명도 따라왔다. 즉, 고대의 '평양'은 요동에 있던 고조선과 고구려의 주요도시였다. 그러나 식민사학에게 '평양'은 현재의 평안도 평양으로 오로지 하나만 존재해야 했다. 우리 역사가 일제 식민사학 선배들이 비정한 대로 한반도 북쪽으로 더 넘어가서는 안되었기 때문이고, 모두에게 열린 학문이 아니라 그들만의 강단역사학으로서의 그 식민사학을 지키는 길이 곧 생존전략이었기 때문이다.

결국 재야역사학자들의 노고로 인해 하나하나 드러난 역사적 진실에 더 이상 버틸 수 없던 식민사학은 그 생존전략의 생리를 가동하여 타협안을 내놓았다. 바로 '고조선 중심지 이동설'이다. 위만에게 밀려 내려온 고조선 세력이 지금의 한반도 평양 등지로 중심지를 이동했다는 주장이다. 그러나 위만 또한 중국 한족이 아니라 요동지역의 독립적 실력자로서 고조선 문화의 계승자였다. 고조선 자체가 요동사의 일부였는데 위만은 중국역사고 우리 고조선은 '중심지 이동설'로 한반도에 국한될 이유가 없다. 결국 식민사학이 무슨 변형과 타협안을 시도하든 그 목적은 일제 조선총독부 식민사관의 유지일 뿐이다.

이덕일 소장에 의하면 모든 1차 사료 일체는 고조선이 요동에 있었다는 사실을 증명하고 있으며 고조선이 멸망한 자리에 세워진 한사군은 그러므로 한반도 북부가 아닌 요동에 있었다는 진실을 가리키고 있다.
'한사군 한반도설'은 허구다.


2. '임나일본부설' 및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


"[삼국사기]는 분명 신라의 건국연대를 B.C.57년, 고구려의 건국연대를 B.C.37년, 백제의 건국연대를 B.C.18년으로 기록했음에도 자의적으로 삼국 초기 국왕들의 재위연대를 누락시킨 것이다... (일본 식민사학자) 쓰다 소우키치는 임나일본부를 살리려면 [삼국사기] 초기기록을 부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안해 냈다... 그러나 (김부식의 사대주의사관을 비판했던) 신채호 주장의 핵심은 <신라본기>와 <백제본기>가 조작되었다는 뜻이 아니라 고구려의 역사가 2백년 더 올라갈 수도 있다는 것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이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자들의 주장과는 정반대의 내용이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2.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는가?>, 이덕일, 2009.


2014년 이덕일 소장은 고려대 교수 김현구의 '임나일본부' 관련 책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법정에 섰다. 1심에서 실형을 받고 2심과 대법원에서 무죄확정을 받은 이덕일 소장은 무죄확정된 2018년에 [우리 안의 식민사관] 2판을 내며 소회를 드러내는데, 2009년까지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에서 1차 문헌사료들을 바탕으로 조목조목 비판한 쟁점에서 더 나아가 이병도와 김현구를 비롯한 식민사학자 일체의 실명을 공개하는 투쟁의 새로운 장을 연다. 학문적, '실증적'으로 논쟁하고자 했으나 결코 이에 응하지도 않은채 전혀 끄떡없는 '식민사학 카르텔'은 친일파들이 그랬듯 자기가 살겠다고 자기를 비판하는 독립운동을 죽였고 그런 방식 자체가 유일한 생존방식이 되었다. 박근혜 정권은 '국정국사교과서' 재편찬을 통해 역사의 사유화를 기도했음은 물론 재야사학을 '유사' 역사학으로 싸잡아 비난하면서 법정에 세우기까지 했다. 일제의 조선총독부는 기독교, 불교 등 식민통치에 고분고분했던 종교 이외의 동학이나 대종교(단군교) 등은 '유사' 종교로 분류했다는데, 식민사학은 재야 민중적인 역사학은 그 주장이 아무리 타당하다 하더라도 '전공자'의 역사학이 아닌 '유사' 역사학이라고 매도했다. 우리 한국사 주류가 일제 식민사학의 후예들임을 증명하는 사례다. 독재자와 제국주의자들은 '정치경제학'이 아닌 독립 '경제학'을, '민족민중사학'이 아닌 '전공자'들만의 '실증사학'을 좋아한다. 그 '실증'과 '실험'에만 매달리며 사회전체적 관점에는 관심없는 '전공과학'만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 '과학자'들은 본인이 식민주의 독재자들에게 부역한다는 사실을 모르거나 알고도 모른 척 한다.

식민사학의 거두 두계 이병도의 일본사학자 스승 중 쓰다 소키치라는 자가 있다. 조선총독부 산하 조선사편수회 위원으로서 식민사학 확립을 위해 한반도와 요동의 역사를 조작한 이 자는 이병도의 일본 유학시절 스승이었던 인연으로 귀국한 이병도를 조선사편수회에서 일할 수 있도록 알선하였다. 생계는 무엇보다 제일 중요한 것이지만 이병도는 생계와 생존을 위해 우리 역사까지 팔아먹었다. 
이병도의 일본인 스승 쓰다 소키치는 한반도 남부의 고대사에서 일본이 가야지역과 그 이상을 실질적으로 지배했다는 '임나일본부설'을 퍼뜨려야 했는데 [일본서기]에 나오는 구절이 우리의 [삼국사기] 기록에는 언급도 없다는 것에 주목하고는 이른바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설'을 주장한다. 즉 8세기 [일본서기]에 나오는 임나는 사실 한반도 남부가 아니라 가야인들이 일본으로 건너가서 세운 지역임에도 [일본서기]를 앞세운 근대의 일제에 의해서는 고대 한반도 남부에 조선총독부와 같은 '임나일본부'가 반드시 존재했어야 했는데 12세기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임나일본부'가 기록되지 않았으므로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조작되었다'는 주장이었다. 사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중국 사대주의의 온상이라 단재 신채호 선생은 김부식과의 역사투쟁을 독립투쟁 못지않게 전개하셨다. 그런 김부식에게조차도 '일나일본부 한반도 지배설'은 나타나지 않는다. 2011년 북한 역사학자 조희승 박사의 연구에 의하면, 고대 삼국시대 한반도와 요동의 고구려-백제-신라-가야 세력은 동쪽의 일본땅에 각자의 식민지를 세우는 경쟁을 했고 실제 고구려-백제-신라-가야(임나) 식민지들은 서로 경쟁하는 과정에서 현지의 일본정부와도 교류했다는 역사가 바로 [일본서기]에 나오는 기록들임을 문헌과 현지 유물유적의 1차 사료들을 통해 입증했다. 그것이 1960년대 북한 역사학자 김석형의 가야사 연구이며 2011년 조희승 박사의 '임나일본부' 해체설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 이병도의 스승 쓰다 소키치는 '임나일본부'가 고대 한반도 남부에서 한반도 일대를 지배했다는 주장으로 '[삼국사기] 초기기록 불신론'을 창조했고 남한 식민사학은 이에 따라 고구려는 고씨 태조왕, 신라는 김씨 내물왕, 백제는 고이왕부터 고대국가를 건설하면서 그 역사를 시작했다고 가르쳐왔다. 물론 [삼국사기]는 '단군설화'가 없고 동명왕' 조 등은 모호한 면이 있다. 그러나 고구려-백제-신라의 건국연대는 비교적 명확하다. 아마도 이는 당대 이전 중국은 물론 현전하던 역사사료 일체가 증명하는 사실이었다는 것을 말해준다. 사대주의자 김부식 조차도 무시할 수 없던 역사적 사실이었다는 말이다. 그런데 일제강점기 아래 있지도 않았던 한반도 남부 '임나일본부'를 위해 [삼국사기] 초기기록은 불신되었고 남한 식민사학은 생존을 위해 일제 스승의 학통을 이었다.

김부식의 [삼국사기]가 비판받아야 할 지점은 그 '사대주의' 사상으로 인한 우리 '민족사학'의 탈각에 있지, '임나일본부'를 기록하지 않아 '조작되었다'는 식민사학의 '불신설'이 아니다. '임나일본부'는 가야가 일본에 세운 소국이었지 한반도 남부에 존재했던 적은 없다. 
[삼국사기]가 '임나일본부'를 기록할 이유 자체가 없었던 것이다.


3. 조선후기 주류 '노론사관'


"한국 주류사학계를 관통하는 두 가지 사관(史觀)이 있다. 하나는 지금까지 살펴본 일제 식민사관이고 다른 하나는 조선후기 노론사관이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정설인 한국사의 확대재생산 구조를 바꾸지 않는 한 한국사회는 미래로 나갈 수 없다... 이제 한국사는 소수 학벌 카르텔의 당파적 해석에서 벗어나 시민들 곁으로 돌아가야 한다."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3. 노론사관은 어떻게 조선후기사를 왜곡시켰는가?>, 아덕일, 2009.


조선을 일제에 팔아넘긴 주요 세력은 왕실이었다. 고종과 외척 민씨는 조선말 동학농민반란을 청나라와 일본의 외세의 힘을 빌어 진압함으로써 일제에게 날개를 달아줬다. 이씨 조선왕조는 압제를 당하던 다수 당사자인 조선민중들의 손으로 끝장나야 했는데 순순히 목을 내놓을리 없는 이씨왕조는 외세보다 조선민중을 더 두려워 했고 외세의 힘을 빌어서라도 구차한 권력투쟁을 이어갔다. 이완용 같은 왕실인사가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것은 이 더러운 권력투쟁의 귀결이었다. 

인조반정으로 단독집권한 서인세력은 이후 남인과의 당파투쟁을 거치며 이 '거대양당' 체제에서 최후승자가 되었다.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분열했을 때 이미 노론은 국왕를 독살하고 정권을 바꿀 정도의 유일당 집권세력이 되었다. 말로만 북벌을 외치던 송시열은 실제 북벌에는 관심없었다. '북벌' 위기론을 이용해 국내 권력을 계속 유지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소론과 노론 거대정파 기득권동맹을 이용해 성리학 지배자들의 부를 늘렸고 민중을 피폐하게 만들면서 조선을 부패시켰다. 지금의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뿌리가 바로 노론정치다.

일제에 나라를 팔아먹은 매국노 이완용은 왕실 친척이었고 조선 고위관료였으며 노론 당수였다. 노론사관과 식민사관이 결국 같은 것들이라는 증명이 이보다 더 적나라할 수는 없다. 여기에서 '한사군 한반도 북부설'과 '임나일본부 한반도 남부설' 따위가 주류 정설로 뿌리내리는 근본 토양을 본다. 

지금도 건재한 '조선후기 노론사관'을 뿌리뽑지 않으면 현재 '거대양당 기득권동맹'의 정치도, '식민사학'의 역사도 극복할 수 없다. 이 소수 기득권은 오로지 다수 민중의 직접민주주의 정치로 뒤집는 수 밖에 없다. 
노론사관과 식민사학은 민주주의의 적이다.


4. 무장 독립투쟁 말살 위한 '현대사 연구금지론'


"청동기 시대가 되어야 고대국가가 시작된다는 '국사교과서'의 공식이 단군조선을 부인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뒤늦게 깨달은 것처럼 한국에만 있는 '현대사 연구금지' 원칙 또한 독립운동사를 말살하기 위한 의도라는 사실을 깨달은 것도 한참 후였다... 독립운동사는 무장투쟁사를 우선하는 것이 원칙이다... 한국사를 바로잡는 데서부터 시작... 일제 식민사학을 극복하면 동북공정은 자연히 무력화한다... 현재의 식민사관과 노론사관을 극복하는 것이 국내적으로는 올바른 역사관을 확립하는 길이자 국외적으로는 동북아 평화체제를 구축하는 지름길..."
-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4. 독립군의 항일 무장투쟁은 존재하지 않았는가?>, 이덕일, 2009.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도시국가와 제국, 이집트와 중국 하-상-주나라, 아메리카의 마야-잉카-아즈테크 문명 등은 서기전 5천년~2천년부터 번성한 역사로 인정받고 있다. 이들 문명은 다른 지역보다 좀 이른 신석기와 청동기 문화였을 수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신석기 시대부터 고대국가 또는 제국으로 인정된다. 그런데 유독 우리 고조선은 청동기 이전의 역사는 국가가 아닌 부족부락이라 일축된다. 중국에서 철기문화가 이식된 후에 고대국가가 된 고조선이 중심지를 한반도로 이동했다가 망한 한반도 북부에 '한사군'이 존재했다거나, '원삼국' 시대라는 모호한 용어로 부족국가로 산재하던 한반도 남부에 일본의 '임나일본부'가 존재했다고 우기기 위해 [삼국사기]조차 불신하는 남한의 식민사학은 노론사관과 이복형제다. 해방 후 친일파가 친미파로 변신하여 다시 득세한 남한에서 그나마 박정희 정권에 이르러 독립유공자 선정위원회를 운영할 때 남한에는 남아있는 독립운동 투사가 거의 없었다. 김승학, 김창숙 같은 얼마 안되는 무장 독립투사가 그나마 '역사학자'랍시고 위원회에 이름을 건 조선사편수회 출신 학자들에게 "임자가 독립운동을 암만?"이라고 물었던 것은 무리가 아니었다. 만주로 이주했던 무장 독립투사들은 박은식, 신채호 뿐만 아니라 모두가 살아있는 '역사가'였는데, 해방 후 남한에는 '독립투쟁사'를 증언할 역사학 '전공자'는 이미 씨가 마른 후였다. 

이런 식민사학에는 '현대사 연구금지론'이 있었다는데, 현대사는 아직 평가하기 어려움이 있다는 핑계였지만 실은 현대사를 연구할수록 무장 독립투쟁사가 부각될테고 그럴수록 식민사학의 생존이 어려워지기 때문이었다. 남한 이승만 정권과 죽이 맞는 식민사학계에서 독립투사들은 설 곳이 없어졌고 대거 북으로 향했다. 그렇게 남은 유일한 식민사학 기득권 세력의 '실증주의' 과학의 입장에서는 '현대사'는 '실증'이 어려우므로 연구가 금지되었단다. 그래서 '유사' 역사학일 수 없는 '민족민중민주사학'과 '식민사학'의 전쟁은 '고대사'의 전장에서부터 치러져 왔다.

이덕일 소장이 "한국 고대사는 늘 현대사였다"([우리 안의 식민사관], <4장>)고 주장하고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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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한국사, 그들이 숨긴 진실 - 이덕일의 한국사 4대 왜곡 바로잡기], 이덕일, <역사의아침>, 2009.
2. [우리 안의 식민사관 - 해방되지 못한 역사, 그들은 어떻게 우리를 지배했는가], 이덕일, <만권당>, 2014~2018.
3. [한국 고대사 신론], 윤내현, <만권당>, 2017.
4. [고조선 연구](1962), 리지린, 이덕일 해역, <도서출판 말>, 2018.
5. [북한학계의 가야사(伽倻史) 연구], 조희승, 이덕일 해설, <도서출판 말>, 2020.
6.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7. [당쟁으로 보는 조선역사], 이덕일, <석필>, 1997.
8. [조선상고사], 신채호, <일신서적>,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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