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소년 완전판 1
우라사와 나오키 지음 / 학산문화사(만화)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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빼박못 '20세기 소년'과 일본 만화
- [소년 공작왕]과 [북두의 권], [20세기 소년]과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어찌 보면 '20세기 소년'인 나는, 20세기에 청소년기와 이십대를 몽땅 보내면서 대부분의 세계관을 지난 세기에 이미 '완성'했다. 맞는지 틀린지가 아니다. '신문명'으로 당최 수정되지 않는 내 생각의 기본 뿌리, 즉 나의 '세계관'과 나의 '철학' 일체는 '20세기'의 그것임을 부정하지 않는다. 신문명의 새시대를 따라 나의 생각과 생활을 혁신하고 변화해야 한다는 것에 수백 번 동의하지만, 그렇다고 내 나름의 가치관을 교체하고 싶지는 않다. 
어찌 보면 '신문명의 배교자'인 나는, 먹고 살기 위해, 원만하게 어울리기 위해 '신문명 과학'이라는 종교를 믿는 척 하지만 진심으로 추앙할 마음이 없는지도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 진심이 어떤지 잘 모르겠지만 수차례 명상해 보고 내린 나 자신에 관한 잠정 결론이다. 이제 중년에 접어들어 '꼰대'가 되어도 당연시될 나이가 되어 대놓고 '커밍 아웃'할 수 있게 되었다. 물론 나를 아는 사람들은 '신문명'에 기민하게 따라가지 못하고 유행에 둔감한 내 성정을 보고 이미 그리 나를 평가했겠지만 정작 얼마 전까지의 젊은 나는 그런 판정에 불복하곤 했다. "나도 당신과 다르지 않다"고 주장하고 싶었다. 
하지만 어찌 사람이 다 같을 수 있겠는가.

나는 1980년대 이전의 기억이란 것이 별로 없을 1974년 갑인년 '푸른 범'띠다. 내가 그 해 태어났다 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지금까지 짧은 시간이나마 살아오면서 지켜본 결과 나는 1974년생이 삼촌격인 1958년 무술년생 '58년 개띠' 못지 않게 향후 우리 사회에서 기염을 토할 것으로 예상한다. 내 주변에서 보았을 때 '73년생 소띠'나 '75년생 토끼띠'는 전반적으로 순해보였을 정도로 내 동갑들의 기가 세 보였다. 나이 들어 가면이 두꺼워진 지금이 아니라 거의 벌거숭이 인격에 가까웠던 20대 초반까지의 내 주변을 되새겨보면 그렇다는 말이다. 결코 보편화될 수 없는 의견이지만, 난 지난 2017년 '장미 대선'의 15명 대선후보 중 1/3 정도가 '74 갑인년 범띠'였다는 사실을 하나의 상징적 근거로 든다. 


나는 '일본 만화'를 부러 찾아서 보지 않는다. 흥미가 없다기 보다는 한 번 빠지면 도저히 헤어나오지 못할 것을 알기 때문이다. 유아 시절 TV에서 어른들이 틀어준 '어린이 명작동화'부터 청소년기 의식주와 같았던 오락실의 게임들이 전부 일본에서 만든 것이었으니 지금껏 이미 너무 많이 보기도 했겠다. 내가 좋아했던 영국소설 [보물섬](로버트 스티븐슨/1883년)의 이미지도 데자키 오사무의 1979년작 TV 방영판 일본 만화영화로 남아있다. 국산 태권브이(1976년)가 지구를 분명히 지키고 있는데도 나는 사실 일본산 마징가Z(1972년)와 그레이트 마징가(1974년)를 더 좋아했다. 


"세상에는 명(明)과 암(暗) 두 종류의 다른 세력이 있는데, 명(明)은 광명이니 선(善)이고 이(理)이며, 암(暗)은 암흑이니 악(惡)이고 욕(欲)이라는 것이다. 이 두 세력은 대립 항쟁을 하는데, 초제(初際), 중제(中際), 후제(後際)의 세 단계를 거치게 된다. 초제 단계에는 천지가 없고 명암만 있을 뿐, 명의 성질인 지혜와 암의 성질인 ‘치우(痴愚)’가 대립 상태를 이룬다. 중제 단계에는 암의 세력이 발전하고 확대되어 명의 세력을 압박하고 멋대로 내쫓아 대환(大患)이 만들어진다. 이때에 바로 명왕이 세상에 나와서 투쟁을 거쳐 암흑을 내쫓는다. 후제 단계에는 명과의 암의 이종(二宗)이 각각 제자리로 돌아가 명은 대명(大明)으로 돌아가고 암은 적암(積暗)으로 돌아가게 된다. 초제는 명암 대립으로서 과거이고, 중제는 명암 투쟁으로서 현재이며, 후제는 명암 복위로서 미래인 것이다…"
- [주원장전], <1-2. 유랑청년-행각승>, 오함, 1949.


고등학교 때 문방구 해적판으로 불법유통되던 일본 만화 중 가장 즐겨본 건 오기노 마코토의 [소년 공작왕](1985년)이었다. 친구들은 남성미 철철 넘치는 [북두의 권](하라 테츠오/1983년)에 더 열광하며 연속 주먹을 날리거나 손가락으로 혈을 찌르고는 "넌 이미 죽어 있다"는 대사를 읊고 돌아서곤 했지만, 나는 [공작왕]의 배경인 밀교(密敎)와 성배(聖杯), 나치의 악마적 부활과 이를 막는 지옥신(地獄神)의 강림(降臨) 등과 같은 신비적 요소에 더 빠져들기 일쑤였다. 선악(善惡)과 명암(明暗)이 확연히 구분되지 않는 현실, 악마를 처단하는 것이 천상의 존재가 아니라 지옥(명부;冥府)의 '공작명왕(孔雀明王)'이라는 설정이 마음에 들었다. 

3세기경 페르시아의 '마니교(摩尼敎)'는 서방의 기독교와 인도의 '조로아스터교', 불교 등의 교리가 결합하여 창시되었는데 이는 '명(明)교'의 기원이다. 중국 원나라 말기 '명태조' 주원장은 이 '명교'와 백련교 등의 혼합 이데올로기를 지도이념으로 한 '홍건(紅巾)' 농민반란군에서 '한(漢)족 독립투쟁'을 통해 명(明)나라를 건국한다. 고대로부터 중앙아시아를 통해 동서양의 종교가 서로 섞이면서 '미륵불(彌勒佛)'이나 '명왕(明王)' 같은 초인적 '구세주(救世主)'를 앞세워 부조리한 세상을 뒤집어 엎고 다수 민중의 손으로 새로운 세상을 연다는 것이 이러한 민간신앙으로서 '밀교(密敎)'의 역사이기도 하다. 태권브이는 한없이 착했으나 마징가는 꼭 그렇지만은 않았고 '공작명왕'은 지옥에 살았으니 동아시아 왕조 말기에 농민반란의 종교이자 혁명이념으로 등장한 마니교나 백련교, 명교나 미륵불하생교 등의 '구세주'는 '하느님'의 대리자만은 아니었다. 그들은 현실에서 치열한 계급투쟁을 통해 악마의 피를 손에 묻혀야 하는 존재였는데, 실제 마니교가 뿌리인 명교에서 '선악'과 '명암'은 처절한 전쟁을 치르지만 결국에는 서로를 뿌리뽑는 게 아니라 서로 대체하며 공존하는 '변증법'적 관계다. [주원장전](1949년)을 쓴 중국의 역사학자 오함은 이런 고대 밀교의 이론적 한계로 인해 역사 속 농민전쟁이 '혁명'을 끝까지 밀어부칠 수 없었다고 하는데, 이는 아마도 '혁명(革命)'과 '개혁(改革)'에 관한 인류의 오래된 숙제이기도 하리라. 
애초에 '밝음'은 '어둠'이 있기에 존재 가능했다. 독일 철학자 헤겔(G.W.F.Hegel)은 어딘가에서 "철학은 형식은 다르나 그 내용에서 종교와 같다"고 규정했다는데, '선'과 '악'을 이분법적으로 인식하는 사유를 근본으로 하는 기원전의 '조로아스터교' 이래의 모든 종교는 '명암'과 '선악'의 명확한 구분을 기본 전제로 한다. 이분법적인 종교적 사유의 기원인 '조로아스터교(배화교/拜火敎)'가 인류 문명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킨 '불(火)'을 숭배한 이유 또한 '불'이 태초의 '어둠'을 밀어내는 '밝음'의 표상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최초의 '어둠'이 없었다면 '밝음'도 없었고 그 역 또한 마찬가지다. 서양의 근대 관념론을 집대성한 헤겔의 거대한 변증법 체계의 시작과 끝도 이와 같다. 동양의 유학(儒學)을 집대성하고 체계화한 성리학(性理學) 또한 '리/기(理氣論)', '체/용(體用論)','성/명(性命論)', '심/성(心性論)', '미발/이발(未發/已發論)', '지/행(知行論)', '격물/치지(格物致知論)' 등의 대립쌍들이 주요 개념을 이룬다. 이 대립개념이 '일원론(一元論)'인가 '이원론(二元論)'인가 하는 논쟁은 이후 철학의 발전과정이었다. 
종교든 철학이든 인류의 사유에서 '선악'과 '명암'은 이분법적 관계이면서도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다.


"형이상학적 우주론의 이론체계... 최종의 완성은 주희의 '리기일원론(理氣一元論)'... '리기(理氣)'는 성리학의 모든 개념 중에서 가장 기본적인 개념이다... 성리학자들이 비록 자연계의 최종적인 근원을 찾고자 했다 할지라도 그들은 결코 존재를 강조하지 않고 그것의 속성과 기능 그리고 그것의 전개과정을 더욱 강조했다... 성리학에 나타난 '변증법(辨證法)'적 사유의 특징은 여기에서 충분히 표현되고 있다...성리학자들은 이 (관계적) 개념들을 통해 '대립'과 '통일'의 '변증사상'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들은 '대립'과 '통일' 가운데 '통일'을 결정적 요소로 간주하여 모든 '대립'은 결국 '합일(合一)'에 이른다고 생각하였다."
- [성리학의 개념들], '1부. 리기론(理氣論) - 총론', 몽배원, 1989.


중국사회과학원 철학연구소 몽배원 박사는 성리학의 개념쌍들은 '대립'을 통해 결국 '통일'에 이르는 '변증법'적 관계임을 유학의 계보학적 추적을 통해 증명하려는데, 20세기 '과학적 사회주의' 철학사상가답게 궁극의 '통일'과 '합일'의 증거를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이미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슬라보예 지젝 등의 '변증법적 유물론'은 그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에 따라 '통일'될 일 없이 끊임없이 '대립'하는 세기로 접어든지 오래 되었다. 
20세기말의 이런 '포스트-모더니즘'을 넘어 21세기도 이미 1/5이 지나고 있다. 이제 '변증법적 유물론'의 '철학'은 더 이상 '통일'의 '총체성'이 아닌, '대립'의 '영속성'만을 확인하고 있는 중이다.
그런 이유로 아마도 현대철학은 다시 '명암'과 '선악'의 이분법이자 서로의 다른 얼굴이었던 그 태초의 시원으로 다시 돌아갈 때가 되었는지도 모른다.

일본 만화에 빠지면 헤어나오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 복잡하고 신비로운 소재들이 많았기 때문 아닐까 싶은데, 굳이 찾아서 읽지 않음에도 약 15년 전 쯤 동네 비디오와 책 대여점에서 마지막으로 빌려 읽은 우라사와 나오키의 [20세기 소년](1999~2007)은 [소년 공작왕]과 함께 지금도 가끔 생각나는 만화다. 록밴드의 노래에서 모티브를 딴 제목이나 어린 시절의 이야기가 한참 잊힌 후 재연되는 이야기, 열심히 읽고 다시 들춰봐도 가면쓴 '친구'가 누구였는지 심증은 가되 물증을 못 찾은 복잡한 구성 등이 오래도록 잊히지 않는다. 이후 영화화된 [20세기 소년] CD까지 구입하여 여러 번 돌려보기 했으나 나는 결국 '친구'의 물증을 찾지 못했다. 
이토 준지의 '공포 만화'의 기괴함과 토미에의 신비로운 마력의 잔상 또한 한 번 보면 절대 잊을 수 없는 이미지다. 현실의 악마를 물리는 퇴마승려 '공작왕'의 힘을 빌리기 위해서는 지옥(명부)의 문을 열어야 했고, 인류가 망친 암울한 지구의 미래에서 '북두의 권' 계승자는 '구세주 전설'의 표현이었다. '토미에'라는 미소녀로 상징되는 현실의 치명적 악을 숭상하는 인간의 기괴함은 이토 준지 이상으로 무섭게 그릴 수는 없어 나는 어지간하면 야밤에 포털사이트에 검색어로 떠올리지 않는다. 그나마 가장 현실적인 이야기 같아 집어들었던 [20세기 소년]은 소년적 감성의 현실우화 같으면서도 복잡미묘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내게 일본만화는 '혼돈' 속에서 가끔 피우고 마는 고대 '밀교'적 아편이다.


어김없이 '종말론'이나 '휴거', 'Y2k' 등이 난무했고 그럼에도 아무일 없이 찾아왔던 새로운 밀레니엄 21세기도 4분의 1이 지나고 있다. 아마도 나는 22세기를 보지는 못하리라. 결국 내가 이 세상에서 본 시간은 20세기와 21세기 일부가 될테지만, 운좋게도 두 세기를 거치면서 왠지 20세기를 다 살아본 것 같은 느낌으로 죽을 것 같다는 생각을 한다. 아마도 21세기만 살아보았을 후배들을 앞에 두고 무슨 '현자(賢者)'라고 되는 듯 20세기의 혁명과 전쟁 등 모든 역동적이고 격변적이었던 역사적 사건을 마치 겪어보기나 한 것처럼 구라나 쳐보려고 책이나 읽으며 '역사'를 운운하는지도 모르겠다. 이대로 가다가는 더 늙어 지금의 '태극기 할아버지' 같은 '꼰대'가 될 상이다. 남은 생 살면서 극히 주의해야 할 일이다.
그러나 어쩌겠는가. 20세기와 21세기 일부를 스쳐가는 과정에서 앞선 20세기는 책으로나마 '역사'로 알 수 있겠지만 앞으로 펼쳐질 21세기 후반부는 예측할 수 없는 것을.

그래서,
나는 이제 나를 인정하기로 했다.
빼도 박도 못할 '20세기 소년'으로.


***

1. [20세기 소년], 우리사와 나오키, 1999~2007.
2. [소년 공작왕(孔雀王)], 오기노 마코토, 1985.
3. [북두(北斗)의 권(拳)], 하라 테츠오, 1983.
4. [이토 준지 공포 만화 컬렉션], 이토 준지, 1987.
5.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지음,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6. [성리학의 개념들](1989), 몽배원 지음, 홍원식 외 옮김, <예문서원>, 2008.
7. [시차적 관점(The Parallax View)](2006), 슬라보예 지젝 지음, 김서영 옮김, <마티>, 2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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