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국사기 1 - 두 천하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2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삼국사'를 넘어서는 '오국사'의 지정학
-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역사평설, <김영사>, 2002.


"고구려가 지녔던 '대륙성'과 백제와 왜국이 지녔던 '해양성'의 복원은 위기에 처한 우리 민족이 지향할 미래이다. 그러나 우리 선조들의 '대륙성'과 '해양성'을 복원하는 길에서 우리는 필연적으로 신라의 통일이란 장벽에 부딪친다. 함석헌 선생이 [뜻으로 본 한국역사]에서 '신라는 너무 과한 값을 주고 샀으나 그 통일은 참 보잘 것 없는 통일이다. 청천강 이북을 가보지 못한 통일이다. 통일이 아니요, 분할이다'라고 한탄한 것처럼 신라의 통일은 우리 민족에게 고구려의 '대륙성'과 백제, 왜의 '해양성'을 사장시킨 역사이기 때문이다."
- [오국사기] 1권, '책머리에', 이덕일, <김영사>, 2002.


학창시절 한 번쯤 우리 삼국 중 신라가 아닌 고구려나 백제가 통일을 이루었다면 어떠했을까 공상해 보았을 것이다. 고등학생의 나는 고구려의 강역이 요동과 만주 일대였으므로 고구려가 통일국이 되었다면 우리의 영토도 더 넓어졌을 것이고 우리나라가 더욱 강대국이 되었을 것 같다고 우긴 적 있었으나 스무살 이후 역사의 '가정'은 망상에 불과하다는 결론을 내렸다. 지금의 내 생각은 다시 시간을 되돌린데도 결과는 같다는 것이다.
역사에는 '가정'은 없으므로 서기 6~7세기로 되돌아간들 백제나 고구려나 썩은 내부 왕조체제로 인해 멸망하고, 가장 낙후된 정권이었으되 외교에 목숨걸었던 신라가 살아남는다는 사실은 변함없을 게다. 삼국 중 어느 정권이 존속했던들 역시 몇 백년 후 부패한 귀족체제로 인해 농민반란에 직면했을 것이고 말이다.

12세기 고려 시대 중기 '묘청의 난'을 진압한 당대 최고 지식인관료 김부식은 '왕명'을 받들어 [삼국사기]를 지었는데, 요동만주의 발해를 배제한 신라 중심 사관과 사대주의 사상에 기반했으되 현존하는 가장 '사실'에 기반한 제일 오래된 우리 자체 기록이다. 김부식의 [삼국사기]는 민족사학자 단재 신채호 선생에게는 역사투쟁의 주적이었고 어찌보면 이병도 무리의 근대 식민사학의 근원 같기도 하지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정사'이므로 역사적 사실의 근거가 될 수 밖에 없다. 아마도 고려왕조의 권위를 배경으로 유일한 '정사'가 되기 위해 참고했던 이전 왕조들의 기록들을 폐기시키지 않았을까 싶게 고구려-백제-신라 등 삼국의 '정사'들은 현재 존재하지 않으니 현존하는 당대 중국왕조들의 역사서와 일치한다면 '사실'로 인정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한가람역사문화연구소> 이덕일 소장은 비록 일부 주류사학자들로부터 '유사사학' 같다는 비난은 있으나, 우리 민족의 정신을 강조하며 식민사학을 극복하자는 민족사학의 뒤를 잇고 있는 재야사학자다. 서기 6~7세기 우리 역사를 '삼국'의 틀이 아닌 '오국'의 관점에서 2002년에 평가하고 해설한 [오국사기]는 그 제목에서부터 주류 [삼국사기]를 넘어선다.
[오국사기]는 '고구려-백제-신라-당-왜' 5국의 역사기록을 '사실'에 기반하여 소설형식으로 풀어냈다. 이십여 년 전 이문열의 [평역 삼국지]와 닮은 시도로 볼 수 있겠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시조 온조왕이 한성에 도읍한 것은 서기전 18년이었다. 그리고 사비성 함락이 의자왕 20년(660)이니 백제는 개국 678년만에 멸망한 것이었다.
한때 북쪽으로는 요하 서쪽을 차지해 요서군과 진평군을 설치할 정도로 흥성했던 왕국, 일본을 속국으로 삼았던 왕국, 한강 유역을 차지했던 백제왕국은 이렇게 허무하게 무너져 갔다. 의자왕과 대성 8족으로 대표되는 지배층 사이의 격렬한 내분이 나라를 멸망하게 한 것이라 할 수 있다."
- [오국사기] 3권, '제18장 사비성의 비극'.


[삼국사기]는 극복대상이지만, 역사적 사실 대부분에 있어서는 주요 참고문헌이다. 역사해석에 왜곡은 있을지라도 우리의 '정사'이기에 '기사'로서의 '사실성'까지 떨어지지는 않기 때문이다. 
이야기는 6세기말 고구려와 수나라 전쟁부터 시작하여  당나라 수립과 왜의 일본국 건설의 내용, 나-제 동맹의 해체와 복수를 꿈꾸는 신라의 국운을 건 외교, 고구려 내분 등이 드라마처럼 교차한다. 

망국의 군주 의자왕은 백제말기 부패한 귀족들과의 내부 권력투쟁에서 패배했기에 나-당 연합군에 대적할 수 없었다. 백제 민중들은 고구려의 대중국 전쟁의 성과를 들었기에 나라가 망한다는 생각을 못했는데 백제의 귀족들은 어차피 이길 수 없는 전쟁에서 차라리 의자왕의 항복이 기득권 유지에 유리하다고까지 판단했단다. 전형적인 매국의 논리다. 치열한 백제 부흥운동을 벌이다가 당나라로 귀순하여 서방에서 공적을 세운 망국의 장수 흑치상지 이야기도 있고 백제왕 복위투쟁을 이어간 장수 복신과 승려 도침은 백제의 고도 부여 은산별신제의 주신으로도 모셔진다.  
'해양성' 강한 지정학적 '시파워(sea-power)' 국가 백제는 왜의 불교국가 건립을 도왔다는데 왜의 친백제 정권은 왕자 부여풍을 귀국시키고 지원군까지 파병하지만 결국 또 다시 부흥군의 내분으로 백제 부흥운동의 '지도부'는 와해되고 그 민중정신만 망국의 오랜 지역을 지키게 된다.


"보장왕은 이적에게 끌려 장안성으로 가야 했다... 뿐만 아니라 무려 20여만 명에 달하는 고구려 백성들도 장안으로 끌려가야 했다. [삼국사기]는 고구려 멸망 때의 행정구역과 인구수를 '5부, 176성, 69만여 호'라고 적고 있는데, 이에 따르면 3.5가구 중 한 명씩을 끌고 간 것이니 저항능력이 있는 모든 사람들을 끌고 간 셈이었다. 고구려 부흥운동을 철저히 차단하겠다는 당의 의도였다...
보장왕을 위시해 아들과 대신들은 이 헌전에서 무릎 꿇고 머리를 조아리며 태종에게 사과해야 했다. 옛날 태종의 친정을 물리친 것이 큰 죄라는 사죄였다. 남건, 남산은 물론 오늘의 이 사태를 초래한 남생도 땅 속에 묻힌 태종의 시신에 절해야 했다. 668년 10월의 일이었다."
- [오국사기] 3권, '제22장 제국의 종언'.


고구려는 독자적 연호를 사용하며 자국 중심의 천하관을 가지고 있었다. 물론 중국을 가운데로 두고 볼 때 동북의 고구려 뿐 아니라 예전 북방의 흉노나 당시 서북의 돌궐 또한 '하늘(텡그리)'의 자식('천자')으로서 '가한(칸/한/선우)'이 있었으나 후대에 기록을 전하지 못했거나 중국 통일왕조에 의해 사장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고구려는 주체적 국제외교를 통해 자국의 존재감과 역사를 남겼던 것이다. 
수 양제의 고구려 원정이 실패하고 수나라 또한 정권 말기 농민반란으로 무너진 후 당나라가 국가의 기틀을 잡는 과정에서 당 태종 이세민은 서방의 돌궐을 제압한 자신감으로 동방의 고구려를 정복하여 진정한 '천자'가 되고자 하나 결국 실패한다. 당 태종 사후 신라의 김춘추가 아들을 동반하여 경주에서 중국 장안까지 가서 나-당 연합을 제안했을 때, 당 왕조의 참전은 이세민의 '설욕전'이었을 것이다. 삼국 중 가장 약소국이었던 신라가 국가의 명운을 걸고 고구려, 당의 강국과 동맹을 맺고자 한 건 백제에게 죽임을 당한 딸과 사위의 복수심 때문이었다는 평가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어쨌든 김춘추의 복수심과 고국인 가야를 배신하면서까지 신라에서 승진하려던 김유신 가문의 결연한 파트너십은 결국 한반도 통일이라는 대업의 기초가 되었다.

정권 말기 부패한 귀족들을 진압하고 왕까지 갈아치운 '도교'적 대막리지 연개소문 사후 자식들의 내분은 고구려 멸망의 결정적 요인이겠으나, 민생은 살피지 못했을 무리한 상무정신은 내부의 적들을 제압하기 위함이었을 뿐 국제정세에는 무능력 자체였을 것이다. [삼국사기]의 매도에도 불구하고 연개소문은 분명, '영웅'적 기질을 선보이나 결국 민생을 돌보지 못하는 권력자는 결코 '영웅'이 될 수 없는 것이다.
'대륙성'을 지향했던 '랜드파워(land-power)' 고구려는 결국 '하트랜드(heart-land)' 쟁탈전에서 거꾸러지고 말았다. 강대국들과의 '전투'에서는 승리했으나 제국과의 '전쟁'에서는 패배했던 것이다.

무능한 고구려 '상무 정신'의 끝은 보장왕과 연개소문의 망할 놈의 자식들을 포함한  망국의 위정자들이 당 태종의 무덤까지 끌려가 '사죄'함으로써 죽은 이세민의 복수전으로 마무리되었다. 
또한 잊혀진 고구려의 강토는 요동만주에서 그 뒤를 이은 발해의 역사까지 지우면서 한반도 역사를 신라의 역사로 국한시키고 말았다. 
[삼국사기]의 가장 큰 과오가 또한 여기에 있다.


"427년에 통구(집안/국내성)에서 평양으로 천도한 장수왕은 475년 3만 대군을 동원해 백제를 공격했는데, 백제 개로왕은 이 공격을 격퇴하지 못하고 수도였던 위례성, 지금의 서울을 함락당하고 만다. 나라가 멸망의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한 백제 개로왕은 왕통을 잇기 위해 아들 문주를 남쪽으로 피신시키는데, [삼국사기]에는 이때 문주가 목협만치와 조미걸취라는 두 인물을 데리고 피신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고구려가 웅진까지 함락시킬지 모를 극한 상황에서 문주왕과 목협만치 사이에 일종의 역할분담이 이루어져 문주왕은 공주(웅진)를 사수하되 목협만치를 일본에 보내 최악의 상황에 대비한 것이라는 추측이 가능하다. 이렇게 문주왕에 의해서 일본에 파견된 목협만치는 일본에 미리 와 있던 백제계 세력을 규합해 정권 장악에 나서게 된다."
- [오국사기] 2권, '제10장 태극전의 비극'.


왜는 고구려까지 멸망한 후인 670년 '일본'으로 국호를 고친다. 백제 부흥투쟁 파병도 실패하고 일본 본토에 백제식 산성을 증축하여 나-당 연합군에 대항한 농성에 들어가는데, 당시 왜국은 백제 이민자들의 정권인 '소아'가가 불교 이데올로기를 앞세워 토착종교 세력인 '물부'가와의 권력투쟁에서 승리한 백제의 '식민정권'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왜에는 3세기 가야문화가 이식되었고 이후 '해양국가' 백제로부터 이식된 불교식 '아스카' 문화의 영향을 받은 정권이 권력을 잡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 백제의 멸망으로 왜국은 진정한 독립단계에 이르러 '태양이 뜨는 근본'이라는 의미의 '일본'국이 된다. 그들의 대표적 역사서 [일본서기]는 '왜'가 아닌 '일본'이 세상의 '중심'이라는 그들 최초의 기록이다.


"태종이 고려라는 말을 내뱉자 좌중은 갑자기 긴장했다. 사실 고구려를 정복하지 못하는 한 아직 천하가 태종의 발 아래 들어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다만 신하들은 고구려만큼은 잊고 싶었던 것이다.
고구려는 자신들만의 천하관을 갖고 있는 나라였다. 고구려는 자신들이 천하의 주인이라는 생각에서 거란과 말갈 등을 속국으로 두었다. 중국에 사신을 보내는 것도 다른 민족들처럼 중국의 천하관에 소속된 조공관계에 따른 것이 아니라 중국 남, 북조와 각기 외교관계를 맺었던 것처럼 서로 견제하려는 것이었다. 수 양제가 여러 차례 쳐들어간 것도 그가 단순히 폭군이어서가 아니었다.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는 천하를 다스린다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당 태종도 마찬가지였다. 그도 고구려를 정복하지 않고서는 진정한 천자가 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마지막 전쟁이 고구려가 될 것임을 알고 있었다."
- [오국사기] 2권, '11장 생애의 마지막 과업'.


[오국사기]는 한반도와 요동의 당대 역사 외에도 수-당 교체기의 중국 역사라든가, 일본 천왕가의 권력투쟁 역사 또한 '외전' 형식이 아닌 주내용으로 전개시킨다. 수 문제와 양제, 당 고조 이연이나 수나라 말기 혁명가 양현감과 이밀, 당 태종 이세민 등도 [오국사기]의 엄연한 주인공으로 그들 중심의 사건 전개도 생생하다. 역사학자의 실증적 역사평설이므로 [수서], [신/구당서] 등 중국측 '정사'에 기초한 사실적 내용에 극적인 요소를 가미했다. 
'주인공' 이세민의 '생애 마지막 과업'인 고구려 정벌은 그가 죽어 땅에 묻힌 후에야 신라의 도움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신라의 문무왕은 재위 21년(681) 7월 초하룻날 세상을 떠났다. 그야말로 격동의 시대를 보낸 임금이었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부왕(무열왕/김춘추)을 따라 전쟁터를 전전하다 부왕 사후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당나라와 싸워 국체를 보존한 임금이었다...
그는 전쟁터를 전전하면서 자신을 버릴 줄 아는 세계관을 터득한 임금이었다...
... 문무왕은 중국 삼국시대 오왕 손권의 북산 무덤과 위왕 조조의 서릉을 예로 들며 화려한 무덤을 만들지 말라고 유언했다...
신문왕은 문무왕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을 화장했다. 삼국통일을 완성하고 대당전쟁을 승리로 이끈 문무왕의 시신은 한줌 재가 되어 바람에 날려 출렁이는 동해에 흩뿌려졌다."
- [오국사기] 3권, '제23장 나당대전'.


이제 , '오국사'의 마지막 주인공 신라의 '남은 이야기'다.
신라와 관련된 이야기는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차고 넘친다. 태종 무열왕 김춘추와 김유신은 각각 <본기>와 <열전>의 하이라이트 같기도 한데, 신라는 [삼국사기]의 진짜 '주인공'이기 때문이다. 아마도 나-당연합군의 승리 후 신라의 당나라로부터 독립투쟁이 필연적이었던 것이 지금 한반도 남한에서의 '한-미 연합작전'처럼 당시의 강대국 당나라는 약소국 신라와의 연합작전에서 늘상 주도권 싸움을 걸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신라가 역사에서 인정받아야 하는 이유는 이런 반외세 해방투쟁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라는 일반적인 평가에 덧붙여 저자 이덕일 박사는 김춘추의 아들이자 대당 투쟁을 승리로 이끈 마지막 '주인공' 문무왕의 유언으로 6세기 말부터 7세기 말까지 약 80여 년간의 장대한 이야기를 마무리짓는다. 

복수심에 물불 안 가리는 아버지 김춘추와 성공욕에 불타는 김유신을 보며 냉철한 군주로 성장한 신라 제30대 문무왕 김법민은 오랜 전쟁으로 피폐해진 민중들을 위로하고자 각 주현의 과세를 줄이고 군역을 줄였으며 불필요하고 번거로운 제도를 간소화하라는 유지를 남긴다. 그 중 가장 번거로웠을 국왕 본인의 장례 간소화를 위해 불교식 화장을 하고 동해바다에 묻혔다. 

우리가 익히 '동해바다의 용'이 되었다고 들어 온 '대왕암'이 그의 무덤이다.


***

1. [오국사기(五國史記)], 이덕일, <김영사>, 2002.
2.[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삼국유사(三國遺事)], 일연,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1.
4. [지정학의 힘], 김동기, <아카넷>, 20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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