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픈 궁예
이재범 지음 / 역사인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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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륵 중앙집권국가 '태봉' vs. 호족 지방연합국가 '고려'
- [슬픈 궁예], 이재범, <역사인>, 2011.



"궁예(弓裔)는 신라 사람으로 성은 김씨다. 아버지는 제47대 헌안왕 의정이요, 어머니는 헌안왕의 빈어로서 그 성명은 전하지 않는다. 혹은 이르기를, (궁예가) 48대 경문왕 응렴의 아들이라고도 하는데, 5월 5일에 외가에서 태어났다고 한다. 그때 옥상에서 하얀 빛깔이 마치 긴 무지개처럼 하늘 위로 뻗치니 일관(日官)이 말하기를, '이 아이가 중오일(단오)에 태어났고, 나면서부터 이(齒)가 있으며, 또 불꽃이 이상하니 장차 국가에 이롭지 못할까 염려되므로 기르지 마십시오.' 하여 왕은 중사(中使)에게 명하여 그 집에 가서 죽이라고 하였다. 사자가 강보 속에서 들어내어 다락 아래로 던졌는데, 유모가 몰래 받다가 잘못 손으로 찔러서 한쪽 눈을 멀게 하였다. 안고 도망하여 숨어서 수고하며 양육하였는데, 나이 10여 세가 되자 유희를 그치지 않으니 그 유모가 말하기를, '네가 태어나서 나라의 버림을 받았으나 나는 차마 못하여 몰래 기르고 오늘에 이르렀는데 너의 미친 행동이 이러하니 반드시 남이 알게 될 것이며, 너와 나는 함께 화를 면치 못할 것이니 어찌하느냐.' 하였다. 궁예는 울며 말하기를, '만약 그렇다면 나는 떠나서 어머니의 근심을 없게 하겠습니다.' 하며 세달사로 갔는데 지금의 흥교사가 이곳이다. 머리를 깎고 중이 되어 스스로 선종(善宗)이라 불렀다."
- [삼국사기], <열전 권10 - 궁예전>, 김부식, 1145.


우리 역사 10세기 전반 신라 말부터 고려 건국까지 약 50여 년의 기간을 '후삼국시대'라 한다. 이 시기 '고구려'를 계승한 '고려'를 재건한 사람이 궁예(弓裔)다. '고조선'이든 '조선'이든 국호는 '조선(朝鮮)'인데 구분을 위해 오래된 '조선'은 '고(古)'를 붙였고, '고구려'든 '고려'든 국호는 '고려(高麗)'인데 역시 구분을 위해 오래된 '고려'는 '구(句)'를 삽입했다. 물론 궁예의 다음 국호 '마진' 같은 고유 국명이나 우리식 나라이름이 있었을는지는 모르나 '정사' 기록이 전하는 '공식 국명' 얘기다.

역시 '후삼국시대'라는 교과서적 역사시기 구분을 벗어나 당시 남쪽의 통일신라 말 정세를 보면 골품제를 기본으로 한 고대 귀족사회의 모순이 극에 달했고 북쪽의 발해는 요동사회의 통합력을 잃어가는 시기, 이른바 한반도와 요동의 '전국시대(戰國時代)'라 할만 하였다. 고대국가의 중앙권력으로 보장받던 귀족의 정치경제적 권력이 중앙왕조의 몰락과 함께 각 지역에서 '군벌(軍閥)'의 형태인 '호족(豪族)'으로 등장하는, 지금으로 치면 '지방자치'가 더 강력한 시대일 수도 있겠다. 

박사 학위 논문이 [후삼국시대 궁예정권의 연구]인 경기대 이재범 교수는 '후삼국시대' 대신 '전국시대' 또는 우리식으로 표현한다면 '호족시대'로 따로 구분해야 한다는 제안을 하며 '후고구려' 궁예에 관한 대중서 [슬픈 궁예]를 맺는다. 단순히 '후삼국시대'로 보면 궁예, 견훤, 왕건, 신라왕조는 '삼국시대'를 잇는 피튀기는 경쟁자였지만, '전국시대' 또는 '호족시대'로 본다면 궁예와 견훤은 '호족시대'의 기틀을 다졌고 왕건은 이 '호족' 세력에 기반한 새로운 '지방자치(?)' 연합왕조를 연 개창자다. 알다시피 고려 건국 과정에서 지방 호족과 정략결혼 정책을 편 태조 왕건의 왕비는 29명이었다고 한다.

'고려'라는 이름의 '후고구려'를 건국하고 지금의 비무장지대에 갇힌 '철원'을 중심으로 '마진(摩震)', 태봉(泰封)'국을 이어가다가 고려 태조 왕건에 의해 쫓겨난 궁예에 관한 기록은 거의 '악담'만이 유일하다. 고려 충렬왕 때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 세종조 [고려사] 등의 역사서 뿐만 아니라 그 이전 12세기 고려 김부식의 [삼국사기] '열전' 등에 등장하는 궁예는 역사 속 '위인'이라기 보다는 '악당'에 가깝다. 한 나라를 개창하고 중국으로부터 독립된 연호까지 내세웠으나 막판에는 배고파서 보리이삭을 훔쳐먹다가 농민들에게 맞아 죽었다는 '고려왕' 궁예의 출생과 최후에 관한 기록은 우리 '정사' [삼국사기]의 '열전 권10'에서 유일하게 전한다. [삼국사기] '열전'의 마지막 권10은 '신라의 적' 궁예와 견훤에 관한 이야기다. [삼국사기]를 지은 김부식은 주지하다시피 '신라의 후예'였다.

'궁예 박사' 이재범 교수는 KBS 대하드라마 [태조 왕건]을 통해 '후삼국시대'와 궁예가 재조명되던 2000년도에 [슬픈 궁예]라는 책으로 궁예에 관한 짧은 역사 기록과 전승되는 관련 이야기들 속에서 그 왜곡된 기억 이면의 이야기를 전개한다.


"... 궁예의 패망을 알려주는 흔적들이 철원에는 더 많이 흩어져 있다. 궁예가 항전했던 최후의 격전지인 '보개산성', 왕건과 힘겨운 싸움을 벌였다는 '성동리성', 그리고 궁예가 왕건과 싸우다 달아났다고 해서 이름붙여진 '패주(敗走)골'이 그곳이다. 실제 보개산성에서는 지금도 신라 말 고려 초의 것으로 추정되는 기와조각 등이 출토되고 있다. 이외에 궁예의 군사가 '명성산'으로 한탄을 하며 쫓겨갔다고 하여 '군사들의 한탄'이라는 뜻의 '군탄리'라는 지명도 있다. 
이러한 여러 지명 가운데서도 궁예의 최후 은거지로 알려진 '명성산(鳴聲山)'은 궁예의 역사를 가장 잘 대변한다. 명성산의 다른 이름은 울음산인데 이는 궁예와 그 부하들이 왕건에게 쫓겨간 것이 서러워 슬피 통곡한 데서 유래했다고 한다. 또 궁예가 도망가다가 피신했던 곳이라고 전하는 개적(바위)봉굴, 궁예가 쫓겨가다 흐느껴 울었다고 하여 이름붙여진 느치골, 왕건에게 쫓기던 궁예가 한숨 돌리고 잠깐 쉬어간 골짜기라고 하여 이름붙여진 한잔모텡이(골), 적정을 살피기 위하여 망원대를 세우고 봉화를 올렸다는 망봉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는 야전골은 당시 궁예와 왕건의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지 짐작케 한다."
- [슬픈 궁예], '1. 어떻게 읽어야 할 것인가', 이재범, <푸른역사>, 2000.


역사에서, 특히 '승자의 기록'으로서 '정사(正史)'에서 '패자(敗者)'들은 잊혀질 뿐 아니라 왜곡되기도 하는데, 동서양을 막론하여 조선왕조 오백년 '불구대천'의 역적 정도전이 그랬고, 스탈린의 숙적 트로츠키가 그랬으며, 프랑스 왕정복고 귀족들의 원수 로베스피에르가 그랬다. 20세기말 조유식 선생의 [정도전을 위한 변명]을 통해 깨달음을 얻듯 '역적' 정도전을 '혁명가'로 새롭게 만났던 나는 2000년도 대하드라마를 통해 '폭군' 궁예의 '미륵(彌勒)불'로서 면모를 보았고 이를 뒷받침해준 책이 이재범 교수의 [슬픈 궁예]였다.

물론, 민중을 돌아보지 못하여 쫓겨난 '폭군' 궁예가 '미륵불'이라 평가하기에는 그 근거로서 역사의 기록이 없다. 일반인에게 궁예에 관한 기록은 [삼국사기]가 전부라고 보면 된다. 일생을 일제에 대항한 독립투쟁과 주체적 역사관 정립투쟁으로 일관하신 존경하는 단재 신채호 선생은 [일목대왕의 철퇴]라는 미완의 역사소설을 지으셨다. '일목(一目)대왕' 즉 눈이 하나인 '애꾸눈' 대왕이 바로 고려왕 궁예다. 궁예에 관한 악의적 기록 이면에 흘러온 전승구담과 소설적 상상력을 더해 우리 주체적 역사를 이어간 인물을 재조명하려던 단재 신채호의 소설은 궁예가 북원의 양길 휘하에 들어가는 대목에서 그친다는데, 그 외 궁예의 출신과 생애에 관한 궁금증은 당최 풀 수가 없다.

현재는 순천 김씨와 광산 이씨의 족보에 궁예가 일가였다는 기록이 있다는데, 그의 출신에 관해서는 [삼국사기] 기록처럼 궁예가 신라 왕족의 후예였다는 설이 통설이다. 신라 하대는 수많은 왕위쟁탈전의 시대였다. 이 와중에 밀려난 왕족의 피붙이라는 그의 배경은 왕위쟁탈전에 끼어들다가 암살당한 청해진의 장보고를 등장시키기까지 한다. 즉 궁예의 외가가 장보고 집안이고, 장보고 숙청 과정에서 쫓겨간 애기 궁예가 장성하여 찾아간 세달사는 영주 부석사이며, 당시 그곳은 장보고 가문의 지지를 받고 있었다는 설, 이후 궁예가 통일전쟁에서 소백산 부석사를 접수한 후 신라왕의 초상화에 칼집을 내면서 신라 구체제 전복을 대대적으로 선언한 이야기들이 줄줄이 이어진다. 물론 '기록'으로 확인할 수 없는 상황적 추리에 불과한 이야기일 수 있다. 그럼에도 당시 군벌 호족들을 대규모로 통합하면서 한반도 중남부를 석권하고 왕건의 고려 개국의 기틀을 다진 궁예가 단지 '미친 짓'과 '관심법' 등의 일탈로 인해 쫓겨났다고 보기에는 역사의 개연성이 너무 굳건하다. 개성의 상인호족 왕건의 집안은 치밀하게 '반역'을 준비했으며, '고려'를 넘어서 '마진(큰 진인)'과 '태봉(큰 영토)'의 국호를 내걸고 새로운 통일국가를 기획하던 궁예의 '미륵불' 세상과 현실적인 '지역 호족 연합'의 '고려'를 붙들고 견훤과 정복전쟁를 하던 왕건 세력의 대전쟁에서 '이상'적이었던 궁예가 '현실'적이었던 왕건에게 패배했다는 그 역사적 개연성 말이다. '미륵'과 '현실'의 치열한 세계관의 대전투에서 승리한 현실의 왕건은 그렇게 패주 궁예를 역사에서 지우고 악마화하였으나, '호족 연합국가'로서 '고려'와 '미륵 중앙집권국가'로서 '태봉' 중 어떤 체제가 민중을 위한 국가였을지는 알 수 없다. 다만, 신라 중앙귀족왕조를 칼로 내려친 궁예의 새로운 '미륵불' 세상은 한낱 종교적 이데올로기로 가능한 게 아니라 당시 신흥 호족 세력의 발호라는 시대정신을 담았어야지 구시대적 중앙집권체제로는 어려웠을 것이라는 역사단계적 추정이 가능하다. 궁예 또한 대호족 양길의 휘하에서 하나의 호족 세력으로 성장하였고 그가 명주(강릉)를 접수한 894년에 스스로를 '장군'이라 칭한 것은 그 자신이 당시 중국 당나라 말기 각 지역 군벌인 '절도사'와 같은 한반도의 지역 군벌인 '호족'임을 천명한 것이었다. 승자인 왕건은 그 집안 자체도 호족이었던 덕에 당시 '호족시대'의 흐름을 탈 수 있었고, 패자인 궁예는 왕족이었으되 탁발승과 반란군 이력에 따라 호족을 통합했음에도 구시대적인 중앙집권왕조를 선택했다.


"음양오행설의 원리에는 오행상승(극)설과 오행상생설 두 가지가 있다. 이 두 원리는 오행의 운동원리를 기준으로 역사를 합리화하는 점에서는 같다. 그에 따르면 제왕은 오행의 운행에 의해 지위를 얻는다고 하는데, 운행의 순서는 상승(극)설(수-화-금-목-토)과 상생설(목-화-토-금-수)로 구분된다. 오행상승(극)설은 이전의 덕을 극복하고 나아간다는 것이며, 오행상생설은 이전의 덕을 보완하며 계승해 나간다는 의미이다. 쉽게 말하면 오행상승(극)설은 '혁명'의 원리, 오행상생설은 '선양'의 원리라고 할 수 있다."
- [슬픈 궁예], '5. 미륵의 나라', 이재범.


한(漢)나라 고조 유방은 (음양)오행설((陰陽)五行說) 중 '화덕(火德)'이자 붉은 '적제(赤帝)'로서 검은 물의 '수덕(水德)'을 상징하는 진(秦)나라 시황제의 뒤를 이었다. 즉, '오행상승설'에 따르면 물 '수(水)'를 이기고 대체하는 것이 불 '화(火)'니 '혁명'의 원리로서 '오행상승(극)설'로 보면 '혁명가' 유방은 물을 이긴 불의 제왕인 '적제'가 된다. 그러나 사마천의 [사기], <고조본기> 등에서는 노역을 가다가 도망친 유방이 술이 덜 깬 상태에서 길가를 막은 큰 뱀의 목을 베었을 때, 그 큰 뱀은 '백제(白帝)'인 바, 자신과 상극인 쇠 '금(金)'을 미리 친 것일 수 있겠다. 결국 유방이 항우를 물리치고 세운 한나라 역사가들에게 한나라는 오행의 이치를 거스르면서 영원불멸해야 하는 권력이었을 것이다. 
이는 모든 권력자들의 욕망일 텐데, 유방은 '오행상승(극)설'에 의해 혁명을 일으켰으나 권력의 안정을 위해 '오행상생설'을 더 따랐다고 하며, 이는 궁예를 몰아낸 고려 태조 왕건도 마찬가지였다고 한다. '미륵불'이 되고자 했으나 절대권력을 꿈꾼 궁예는 진시황처럼 '수덕(水德)'을 표방하며 마지막 왕국 '태봉'국의 연호를 '수덕만세'로 지었다. 궁예가 신라왕조를 오행 중 무엇으로 보았는지는 모르나 신라왕의 초상을 칼로 베고 천년고도 경주를 '멸도'라 부르며 극복의 대상으로 규정한 것으로 보아 '토덕'이나 '화덕'으로 보았을 수 있지만, 왕건은 신라를 멸망 대상으로 보지는 않았던 것이다. 하긴 견훤도 포석정까지 쳐들어가 신라 경애왕을 죽였으나 감히 스스로 왕이 되지 못한 것을 보면 당시 '천년왕국' 신라의 위상은 '썩어도 준치'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러한 상황에서 궁예의 처신과 행각은 '혁명가'로서 그의 자유분방한 성정을 엿보이기도 할 터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역사의 물결 속에서 비틀려진 궁예를 재조명하는 이유는 '현실'에 패배한 '이상'의 상징이기 때문이리라.


"... 이 책을 내면서 이런 질문을 수 없이 받았다. 왜 하필 이 시점에서 궁예인가? 그 대답은 간단하다. 현재는 우리에게 도전과 모험을 요구하고 있다. 또 현재 우리의 내적 당면 과제는 통일이다. 이러한 과제와 사명을 잘 실천했던 인물 가운데 하나가 바로 궁예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시기와 환경은 다르지만 현실에 대해 가장 절실하게 고민했고, 실천했던 인물이 바로 궁예였던 것이다. 궁예는 천 년 동안 지속되어 왔던 신라의 모순을 극복하고자 했다. 신분보다 능력을 우선하고자 했다. 지역주의를 탈피한 통일을 갈구하였다. 마진과 태봉으로 상징되는 이상사회로의 통합을 원했다. 그러나 단지 정권이 지속되지 못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궁예는 너무 왜곡되어 있다. 그러나 우리에게 바르게 다가오지 못하고 있다. 궁예가 오늘도 우리의 테마가 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 [슬픈 궁예], '6. 궁예 최후의 재해석', 이재범.


9~10세기 '후고구려' 궁예의 삶은 14~15세기 중국 '명(明)나라' 태조 주원장과 비슷하다. 물론 단명정권 '태봉'과 장수왕조 '명'의 차이는 있으나 부패한 왕조말기의 불우한 어린 시절, 탁발승과 반란군의 이력, 강력한 중앙집권을 통해 주변 권력자에게는 가혹했던 반면 민중에게는 상대적으로 긍휼하게 대한 마키아벨리식 '군주론'의 면모 등 삶의 궤적이 비슷하다. 

비록, '현실'의 왕건에게 패배하여 역사의 서재에 쳐박혔을지라도, 굳이 남의 역사 속 주원장의 '현실'적 혁명을 찾는 대신, 우리 역사의 궁예의 '이상'적 혁명을 상상할 일이다.

***

1. [슬픈 궁예], 이재범, <역사인>, 2011.
2. [삼국사기](1145), 김부식, 최호 역해, <홍신문화사>, 1994.
3. [주원장전(朱元璋傳)](1949), 오함, 박원호 옮김, <지식산업사>,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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