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반역실록 - 12개의 반역 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
박영규 지음 / 김영사 / 2017년 8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
- [조선반역실록] /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성계는 역적인가, 아니면 혁명가인가? 그는 조선왕조에서는 왕실을 일으킨 국조이고 새로운 왕조를 일으킨 혁명가이지만 고려왕조 입장에선 나라를 훔친 역적이었다. 우왕과 창왕을 죽이고, 스스로 옹립한 공양왕과 그의 세자를 죽였으며, 수많은 고려 왕씨들을 바다에 수장시킨 장본인이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고려왕조를 지키려던 정몽주를 충신이라 부르고, 두문동에 숨어 살며 조선의 신하되기를 거부한 72현을 고려의 마지막 충절로 기리는 것이다.
...
그렇듯 조선은 고려왕조의 마지막 역적의 피묻은 손에 의해 세워진 나라였다. 하지만 조선을 세웠을 때만 해도 '혁명'의 성공에 도취되어 자신이 다시 '역적'에 의해 쫓겨날 줄은 꿈에도 몰랐을 것이다. 인과응보라고 했던가? 그 역시 반역에 의해 쫓겨날 운명이었던 것을! 그것도 다름 아닌 자신의 아들에게 쫓겨날 줄을 어찌 알았으랴!"
- [조선반역실록], <1. 고려의 마지막 역적 이성계>, 박영규, <김영사>, 2017.


고려말 권문세족의 토지경제 전횡과 지배 이데올로기 불교의 부패 등의 폐단을 뒤집어 엎기 위해 '계민수전(計民授田)'의 경제토대와 '민본주의(民本主義) 성리학(性理學)' 이념으로 새로운 국가를 설계한 '혁명가' 정도전(鄭道傳)은 본인이 건설한 '조선왕조 5백년' 내내 '역적(逆賊)'이었다. 그처럼 조선왕조 마지막까지 신원(伸冤)되지 못한 이씨 왕조의 불구대천의 원수이자 영원불멸의 역적은 광해군 시기 [홍길동전]의 허균(許筠) 정도였다. 선조 때 역적 정여립(鄭汝立)도, 조선 후기 계룡산 일대를 중심으로 퍼진 비기(祕記) [정감록(鄭鑑錄)]도 그 뿌리는 정도전의 '정(鄭)씨'였다.



"고려 말기에 이씨 왕조 예정설이 떠돌았는데 조선 중후기에 접어들면서 정씨 왕조설로 변형되었다. 원래 조선 개국의 일등 공신인 정도전이 역적으로 몰려 죽자 그의 후손과 세력들이 이를 애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고도 하고 정도전을 죽인 이방원이 정도전을 모함하기 위해 정씨 왕조설을 퍼뜨렸다는 설도 있다 하나 확실한 근거는 없다... 정씨 왕조설을 담은 비기는 조선 후기에 들어 다른 비기들을 압도하며 유행을 탔다. 본격적으로 등장한 것은 조선 후기인 숙종 시기였다.
... 
한편 조일전쟁(임진왜란, 정유재란) 직전 정여립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1,000여 명이 죽었다. 정여립이 지리산에 묻힌 옥판을 찾아냈는데 여기에 정씨 왕조설과 계룡산이 도읍지라는 얘기가 적혀 있었다고 한다.
... 
숙종과 영조 시기까지도 [정감록(鄭鑑錄)]이라는 책명은 공식 기록에 나타나지 않다가 18세기 말엽인 정조 말년에야 나타난다. [일성록]에 의하면 정조는 [정감록]이 '요서(妖書)와 방서(方書)를 섞어 모은 책'이라 하고 이어 '영조 연간에 이루어졌을 것'이라고 말했다. 19세기 문벌정치(세도정치) 시기에 들어와 [정감록]은 크게 유행을 탔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친일인명사전] 편찬에 참여하고 22권 한국통사 [한국사이야기]를 집필한 재야사학자 이이화 선생은[정감록]과 '홍경래의 난'을 비롯하여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과 의병(義兵) 투쟁까지 조선 후기 다수 민중들의 '혁명'의 역사를 2017년에 [민란의 시대]로 엮었다. 한편, [한권으로 읽는 조선왕조실록]으로 우리 역사를 대중화시킨 작가 박영규는 같은 해 '12개의 반역사건으로 읽는 새로운 조선사'라는 부제의 [조선반역실록]에서 고려의 최후 역적 태조 이성계부터 태종과 세조, 억울한 청년 장수 남이, 정여립과 허균, 이괄 등 12건의 '반역사건'을 통해 조선 역사를 돌아본다.

조선태조 이성계는 정도전 등 급진개혁파의 혁명이론에 따라 고려말 '3단계 혁명 단계'를 거치는데, 1차는 위화도 회군 후 우왕과 최영 처단, 2차는 '폐가입진(廢假立眞:가짜를 폐하고 진짜를 세운다)' 논리로 우왕과 창왕을 공민왕 시기 승려 신돈(辛旽)의 자식으로 규정하여 '진짜 왕(王)씨' 공양왕 옹립, 마지막 3차는 일종의 '상생협정'을 맺고자 찾아온 공양왕을 그 자리에서 폐위시킨 전략단계였다. 
정도전이 [조선경국전]과 [경제문감] 등에서 설파한 새로운 국가는 '천명'을 받은 '인군(人君,人主)'을 중심으로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士大夫)'가 이끌어가는 체제였는데, 이에 따르면 건국의 공로가 있는 왕자라도 사병을 거느리면 안되었기에 당시 혁명국가의 설계자 정도전은 '요동정벌'을 이유로 중앙군을 강화하기 위해 사병들을 혁파하였다. 그러나 '혁명가' 정도전은 결국 조선을 온전히 '이(李)씨'의 국가로 만들려는 태조 이성계의 5남 이방원이 일으킨 '2단계 쿠데타' 중 '1차 왕자의 난'을 통해 가장 먼저 숙청된다. 이방원은 '2차 왕자의 난'으로 형인 정종으로부터 왕위를 물려받아 조선 3대 태종이 되는데, 7백여 년 전 중국의 당태종 이세민과 비슷한 경력으로 아버지를 도와 '혁명'에 공헌한 왕자로서 왕권을 강화하고 조선왕조의 기틀을 잡았다는 후대의 평가는 받지만, 고려 최후의 '역적'인 아버지 이성계와 같이 '반역'은 하였으되 '체제변혁'과 무관하므로 '혁명'이 아닌 '쿠데타'였다. 이후 태상왕 이성계는 개국 당시 정5품 형조의랑을 지낸 조사의(趙思義)라는 수하를 통해 본인의 복위를 위한 반란을 도모하나 태종에 의해 진압되었고 결국 아들의 쿠데타를 인정하게 된다.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는 마지막 화해의 자리에서도 이성계는 이방원을 보자마자 활을 쏘았으나 기둥을 맞추고 술잔을 따르려는데 신하를 시켜 받으니 소매에서 철퇴를 꺼내놓고는 "하늘의 뜻이로다!"라고 한탄했다는 야사를 전한다. 
'역적' 태조의 아들 태종은 아버지의 '반란'을 진압한 후 살기 위해 처남들인 민씨형제들도 '역적'으로 숙청한다. 후대는 이방원이 이룬 '왕권강화'의 결과를 말하지만, 당시로 보면 피묻은 칼을 쥔 자가 개죽음 당하지 않기 위해 평생 본인 주변의 '역적'을 만든 생애였다. 


"단종 1년(1453년) 10월 19일 새벽, 수양대군 이유의 집 지게문으로 세 명의 갓 쓴 사내들이 찾아들었다. 권람, 한명회, 홍달손이 그들이었다. 권람은 조선 개국공신이자 대제학을 지낸 권근의 손자였고, 한명회는 개국 당시 명나라로 가서 '조선'이라는 국호를 확정짓고 돌아온 한상질의 손자였다. 말하자면 두 사람은 명문집안 출신들인 셈인데, 그들과 달리 홍달손은 내금위장 출신의 무장이었다. 그들의 공통점이 있다면 모두 한명회와 친밀한 자들로서 몇 년 전부터 수양대군과 부쩍 가깝게 지낸다는 것이었다. 그들의 벼슬살이로 보자면 권람은 36세의 늦은 나이에 문과에 장원급제하여 사헌부 감찰을 역임했고, 홍달손은 내금위장을 거쳐 수군첨절제사를 지내다가 파직당한 처지였고, 한명회는 조상의 공덕에 힘입어 문음으로 겨우 종9품 경덕궁직으로 있었다."
- [조선반역실록], <6. 단종을 내쫓고 왕위를 찬탈한 수양대군>, 박영규.


'역적'의 자손이라 그 유전적 형질로 인해 계속 쿠데타를 일으킨 것은 아니리라. 왕조만이 유일한 정치체제였던 당시로서는 필연적인 과정의 반복이었을 뿐이다. 
'민본주의' 이념으로 무장한 '사대부'가 이끌어가는 체제가 정도전의 죽음으로 작동하지 못한 것도 아니리라. 후대의 분분한 이견들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마지막까지 견고한 관료체제로 왕권을 끊임없이 견제했던 나라였고 유일하게 이를 완전히 무시했던 연산군부터 시작하여 관료들의 '반란'으로 왕을 갈아치운 '반정(反正)'이 반복되었다. 수양대군의 계유정난(癸酉靖難) 쿠데타는 아마도 왕자가 일으킨 마지막 반란일 것인데 마치 오늘날 윤석열 검찰총장을 연상시키는 권람과 과거 급제도 못한 채 '사대부'의 자격조차 미달이었던 한명회 등을 끌어들인 수양대군이 '역적'의 중심이었다. 이후 '반정'으로 즉위한 진성대군 중종이나 능양군 인조는 실질적 중심 '역적'이 아니었고 권력투쟁을 위해 결사한 '사대부' 무리가 '반정'의 중심이었다. 

이후 선조 시기 정여립은 고향 전주로 낙향하여 유학 경전에 대한 자유분방한 해석과 호방한 행보로 '대동계'라는 조직을 중심으로 활동하다가 '역적'이 되어 처단되었고, '율도국'이라는 이상세계를 건설한 의적 [홍길동전]의 허균도 광해군 시기 여당이었던 북인 중 대북파의 정파투쟁 과정에서 국문도 없이 능지처참 당했다. 정여립이나 허균 모두 명문 집안 출신 자제로서 수재들이었고 남보다 특출한 인물들이었으되 '반역'의 증거는 없다. 그들을 '역적'으로 만든 건 '혁명'으로 건설된 나라였던 조선왕조의 '역적' 왕자들 및 그들을 중심으로 권력을 쟁탈하려던 '사대부' 관료들의 반복적 출현과 끊임없이 반복되는 '반역'에 대한 권력자들의 두려움이었을 것이다.


"홍경래는 평안도 용강 출신이다. 그의 아버지는 진사라 했으나 어떻게 그 칭호를 얻었는지는 모른다. 아무튼 그는 어릴 때부터 외숙인 유학권에게 글을 배웠다. 그런 끝에 뜻을 품고 서울로 와 과거에 응시했다. 서북 출신들이 비록 등용은 되지 않으나 문과는 진사, 무과는 출신(무과 합격자)이라도 되기 위해 과거를 보는 일이 종종 있었다. 홍경래는 몇 차례 과거를 보았지만 번번이 낙방했고 자신보다 형편없는 글재주와 학식을 가진 남쪽 출신의 양반붙이들이 합격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했다. 20대의 혈기왕성한 나이에 문벌집단이 벌이는 차별과 부정을 직접 눈으로 보고 피부로 접한 홍경래는 과거 합격을 단념했다. 그리고 절로, 산으로 떠돌며 유랑생활을 했다. 그는 길흉을 점치는 술수를 익히기도 하고 풍수를 배워 지사(地師) 노릇을 하기도 했다. 
이렇게 떠돌이 생활을 하는 중에 평안도 박천의 청룡사에서 자신보다 다섯 살 아래로 서자 출신인 우군칙을 만났다. 이 만남이야말로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었다.
...
홍경래는 민중의 영웅이 되었지만, 체제를 근본적으로 개조하고자 한 그의 혁명가적 의지는 실현되지 않았다. 구체적인 변혁지향의 이론이나 실천운동이 민중에게 절실하게 부각되지 않았던 것이다. 역사에도 운수가 있을까? 뒤이어 나타난 전봉준은 이 한계를 극복하려 했다."
- [민란의 시대], <1. 문벌정치의 등장과 관서농민전쟁>, 이이화.

나름대로 왕권을 견제하면서 유지되던 '사대부' 관료체제가 실질적으로 무너지고 오로지 왕권에 기생하여 부를 축적하는 데만 혈안이 된 19세기 세도정치(勢道政治)에 이르러 '혁명(革命)'이 만든 나라 조선에서는 진정한 '혁명(革命)'의 움직임이 일어난다. 이 당시 '역적'은 부패정치로 인해 억압받고 수탈당하는 다수 농민 민중들이었고, 조선 최초의 '혁명가'들은 관서의 과거시험 낙방생 홍경래와 서자 우군칙, 지식인 김사용과 김창시, 장사 홍총각, 부호 이희저 무리였다. 
홍경래 이후 같은 관서지방의 유흥렴, 삼남지방의 이필제 등의 '직업혁명가'들이 그를 이어 조선의 마지막 1백년 '민란의 시대'에 등장하기도 한다.

'새로운 세상',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기 위한 그들의 계획이 감히 '혁명'인 이유는 다수 민중을 동력으로 했기 때문이며, 이후 왕조의 몰락 과정에서 갑오농민전쟁(甲午農民戰爭)으로 '반역' 역사의 절정을 맞는다. 
물론 '근대화'라는 당시 시대정신에 휘말린 갑신정변(甲申政變) 등의 쿠데타도 있었고 국가 주도의 갑오경장(甲午更張,갑오개혁)도 있었지만, 썩어빠진 왕조를 결과적으로 무너뜨린 것은 다수 민중 '역적(逆賊)'들의 '반역(叛逆)', 즉 '혁명(革命)'이었다.


반봉건(反封建) 투쟁으로 시작된 갑오농민전쟁은 당시 정세에 따라 반외세(反外勢) 투쟁이 되었고 결국 조선말 '혁명' 운동은 '의병 투쟁' 등의 반침략 투쟁의 형태를 띄게 되는데, 역사에 가정은 없겠지만 조선왕조 내부 체제 '혁명'이 이루어졌다면 우리 역사 마지막 왕을 끌어내린 혁명가는 과연 누가 되었을지 자못 궁금해진다.


'혁명(革命)'이 만든 '반역(叛逆)'의 나라, 조선(朝鮮)의 로베스피에르와 쑨원은 어디에 있었을까?

***

1. [조선반역실록], 박영규, <김영사>, 2017.
2. [민란의 시대 - 조선의 마지막 100년], 이이화, <한겨레출판>, 20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