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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 여행자의 아내 1
오드리 니페네거 지음, 변용란 옮김 / 살림 / 2009년 8월
평점 :
품절
많은 시간 여행물들이 시공을 초월한 남녀 간의 사랑이나, 다시는 함께 할 수 없는 연인과의 마지막 순간을 바꾸고 싶어 하는 간절한 소망을 드러내왔다. 시간 여행 이야기에서 가장 중심이 되는 플롯이 개변으로 인한 현재 (또는 미래의) 변화라고 생각할 때, 인간의 일생에서 사람과 사랑에 대한 아쉬움과 추억은 누구에게나 한번 쯤 다시 돌아가고픈 아련한 순간인 것이다. 『타임머신』에서도 미래를 여행하고 허탈한 마음으로 돌아온 시간 여행자에게 남은 단 한 가지는 바로 미래세계에서 사랑에 빠졌던 위나가 주었던 꽃 한 송이로, 인간의 문명은 쇠퇴하고 몰락하여도 영원불변한 한 가지는 바로 사랑이라는 것을 암시하고 있다.
만약 어떤 순간이 그 사람과의 마지막이 될 줄 미리 알았더라면 우리는 그런 식으로 시간을 보내지 않았을 것이다. 로저 젤라즈니 Roger Joseph Zelazny의 단편 『성스러운 광기 Divine Madness』는 마지막 순간을 말다툼으로 끝낸 채 부인을 죽음으로 떠나 보내야했던 한 남자가 알 수 없는 힘으로 시간을 거꾸로 되돌리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 작품은 남편이 시간을 되돌려 부인에게 ‘미안하다’는 말을 전하는 것으로 끝맺으며 강렬한 여운을 남긴다. 그 후에 그들이 어떻게 되었을지는 독자의 상상으로 남겨졌지만, 다시는 만날 수 없을지도 모르는 사람에게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를 남길 수 있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가 예기치 못하게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고통과 절망의 짐을 어느 정도 벗어버릴 수 있다는 사실을 공감할 수 있다. 영화 「이프 온리 If only」나 프랑스 작가 기욤 뮈소 Guillaume Musso의 장편, 『당신, 거기 있어줄래요? Seras-tu la?』 역시 모두 과거에 목숨을 잃은 연인을 향한 애절한 마음을 그리고 있다. 미안하다는 말로 마음의 짐을 덜든, 후회가 남지 않도록 최고의 하루를 선물하든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만 하는 가혹한 운명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한 마음은 모두 같을 것이다.
『시간 여행자의 아내』는 사람들이 시간 여행에 대해 기대하는 모든 공식들을 여지없이 파괴한다. 시간 여행자 헨리는 유전자적 장애에 의해 비의지적, 비규칙적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게 되고, 과거도, 미래도 알지만 그 어떤 것도 자신이 원하는대로 바꿀 수 없다. 방금까지도 현재에 존재하던 헨리는 바로 다음 순간 스르르 사라져 과거 혹은 미래 어딘가에 알몸으로 내던져지고, 그런 남편이 행여 낯선 곳에서 다치거나 죽지는 않을까 기약 없이 기다려야 하는 아내의 평생에 걸친 인내와 사랑은 헨리의 고통만큼이나 아프고 절절해서 읽는 내내 안타까움을 자아낸다.
헨리가 시간 여행을 하는 곳은 주로 자신의 과거와 미래에서 중요하거나 흥미로운 사건이 일어났던 (혹은 일어날) 곳이다. 대개 현실에서 이미 경험하거나 경험할 순간을 다시 한 번 가는 것이다. 그러나 보통의 작품들과는 달리 그의 시간 여행은 철저히 무기력하다. 어머니가 교통사고로 죽음을 맞이하던 순간에 수없이 반복해 돌아가게 되지만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비참한 확인만 되풀이 될 뿐이었다. 그는 자신이 운명의 구경꾼일 뿐이라는 사실을 재차 확인하면서 반복되는 절망을 경험한다.
하지만 헨리의 시간여행은 우리에게 기억과 회상이 갖는 의미를 되새겨볼 기회를 제공한다. 우리 역시 자주 좋았던 옛 추억을 떠올리며 회상에 잠기기도 하고, 원치 않는 순간에도 불쑥 불쑥 떠오르는 잊히지 않는 트라우마를 가지고 살아가기도 하지만 벌거벗어 항상 오해받고 무기력한 헨리처럼 이미 한번 자리잡은 기억에 대해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 아무리 간절히 원한다고 해서 강렬하게 남겨진 지난 기억을 지울수는 없다. 그런 헨리가 마음을 다잡고 삶을 다시 살게 되는 건 바로 클레어 때문이다. 클레어는 상처에 대한 치유이자 보상을 의미한다. 그녀는 세기를 거듭해도, 언제 어디서든 영원히 부정될 수 없는 가치는 바로 사랑이라고 이야기한다. 시간이 흐르고 시간 여행의 횟수가 늘어나게 되면서 헨리는 서서히 그녀와의 추억을 공유하게 되고, 그들의 사랑은 비로소 완전한 하나가 되어간다. 소설은 시간 여행이라는 장치를 단순히 이야기를 위한 이야기, 혹은 뒤틀린 물리적 현상으로써 다루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랑할 때 우리의 시간에 대한 인식, 상처에 대한 치유, 그리고 과거의 기억과 미래의 기다림에 대한 메타포로 전달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