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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평점 :
시작은 사랑이었다. <세계의 끝 여자친구>에 등장하는 모든 이들의 이야기는. 그것이 빛바랜 연인의 사랑이든, 인간과 인간 사이에서 일어날 수 있는 다른 어떤 양상의 사랑이든.
이야기를 읽어 내려가는 나 역시 그랬다. 「기억할만한 지나침」에서는 고통을 수반하는 사랑에 매혹되는 십대 여자 아이였다가, 「당신들 모두 서른 살이 됐을 때」에서는 ‘베란다에 내놓고 까먹어버린 신문지 속의 파처럼 시들’한 사랑을 하릴 없이 지속하고 있는 서른 살의 여자였다가, 「모두에게 복된 새해-레이먼드 카버에게」에서는 아이를 간절히 원하며 혼자서 외로움을 삼켜야했던 누군가의 부인이었다가.
어떤 상황에서도 불안정함을 느끼며 내일 모레 서른이야, 를 후렴구처럼 반복해대는 이십대 후반의 보통 여자에게는 아직 모든 종류의 사랑이야기가 중요하고, 또 내 이야기처럼 느껴질 수 있는 때이니까. 그래서 계속 읽어 내려갔다. ‘그건 전적으로 우리가 사랑했던 나날들이 이 세상 어딘가에서 이해되기만을 기다리며 어리석은 우리들을 견디고 오랜 세월을 버티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와 같은 구절에 열심히 밑줄 쳐가면서. 내가 미처 아직까지 껴안지 못한 뭇사랑들의 나날을 떠올리면서. '아무것도 아니었지만, 바로 그 이유로 세상 모든 사람인 양 행동' 했던 나이에 시작해 6년이라는 긴 시간동안 이어져왔던 우리의 사랑이 어느날 '꿈과 돈 사이에서 갈등하는 청춘' 의 문제로 변질되었다는 걸 알아버렸을 때, 그렇지만 익숙하고 고통 없는 무미건조한 사랑이라는 생각에 이별을 결심한 결정적인 순간에는 '견딜 수 있는 고통이 아니었기에 그토록 끌렸던 것이라는 걸' 알아버린 나의 기억들을 되새기면서.
그러나 만약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내게 이야기 해 준 것들이 이런 ‘사랑’이 전부였다면, 혹은 내게 마지막으로 남은 바람이나 고민이 ‘사랑’ 뿐이었다면 독자는 되었을지언정 결코 이야기 속 주인공들이 되어 읽어내지는 못했을 것이다. 말하자면 김연수의 이야기들이 우리에게 던지는 메시지는 등장인물들의 사랑에서 시작하여 그들에 공감할 때 비로소 읽어낼 수 있는 더 큰 세계라는 것이다. 이야기 속에 등장하는 산업폐수로 오염된 냇물, ‘말하자면 친구’ 인 외국인 노동자, 최저 임금을 받으며 영화판에서 일하는 남자친구, 고문으로 사람을 죽인 전직 형사는 모두 내가 ‘사랑’에 울고 웃고 마음 쓸 수 있는 세계의 발판이자 모든 것의 시작이었다. 그들을 이해할 수 있을 때 내 사랑의 의미를, 고민하는 문제들의 실마리를, 거대한 세계 속에 내가 지금 어디쯤 와 있는지를 찾을 수 있었다.
사랑으로 시작하여 ‘먼저 세계라는 이야기에 대해, 그리고 나라는 이야기에 대해, 결국에는 우리라는 이야기에 대해’ 말하며 끝나는 이야기. 그것이 바로 <세계의 끝 여자친구>가 가진 의미이자 매력이다. 사랑으로, 사랑 때문에, 사랑을 고민하지만 단 한번도 ‘나’의 이야기나 ‘우리’의 이야기, 그리고 ‘세계’의 이야기라고 느껴지는 사랑이야기를 읽어보지 못한 이들에게 이 책을 권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