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 않을 일 리스트
파(pha) 지음, 이연승 옮김 / 박하 / 2017년 1월
평점 :
절판


"쟤는 커서 뭐가 될려고 그러는지 몰라"

동생이 받아온 터무니 없는 산수(내가 국민학교 다닐때는 수학이 아닌 산수였다) 점수를

보고 내가 기가 차서 투덜거리자.. 어머니는 낮지만 단호한 목소리도 이렇게 말씀하셨다.

"놔둬라.. 사람은 본디 태어날 때부터 지 밥그릇은 지가 챙겨서 나오는 법이다"


어머니의 이 말씀이 얼마나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는 말인지

그 시절 나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이가 들어 그때의 어머니만큼의 세월이 쌓이고 나니..

천마디 말보다 더 힘이 되는 말이라는 걸..이제서야 깨닫는다.


[하지 않을 일 리스트]라는 책을 읽으면서 나는 몇십년 전..

어머니가 해주셨던 그 말씀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천성이 게으르고 무한 경쟁 시대를 도저히 따라갈 수 없는

사회의 루저 같은 사람들도 다 자기 밥그릇 챙기고 있다는 것을..

아무리 부자라도 하루 열끼를 먹지 못하듯..

아무리 돈이 없다해도 굶어 죽지 않은 요즘..

죽어라 일해서 돈 벌려고 바둥거리는 사람보다

빈둥빈둥 놀것 놀면서 밥먹고 사는 베짱 편한 사람들을

모자르다고 누가 손가락질 할것인가..


솔직히 나도 한게으름 하는 편이다.

이만큼 살아오다보니 나의 게으름이 덕이 된 적도 결코 적지 않지만..

왠지 나는 게으른 사람이다..라고 내 입으로 말하는게 부끄러워

(부끄럽게 만드는 사회 분위기 때문에) 나는 늘상 바쁘다..바빠 죽겠다..라는

말을 입에 달고 사면서 은근히 나는 잘 나가는 사람이다..라고

다른 사람들에게 그리고 나 자신을 쇄뇌시키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곰곰 생각해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는 일이다.


이 책의 저자인 파(phr)는 일본에서 유명한 니트족 이다.

여기서 말하는 니트족은 진학이나 취업을 하지 않으면서 직업 훈련도 

받지 않는 청년층을 가리키는 말이다.

먼 미래의 행복보다는 현재의 행복을 추구하고 세상의 기준에 

맞추기 보다는 자신의 만족을 위해 사는 새로운 삶을 추구하는 집단...을 

일컷는 말이다.

좋게 보면 아주 간지나게 멋지고..나쁘게 보면 게으른 루저다.


일본은 버블 경제가 무너지고 젊은 이들의 취업이 어려워지면서 청년 실업자들이

넘쳐났다. 죽어라 일해도 평생  내 집을 갖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긴 청년들은

집을 포기하고 결혼을 포기하고 급기야 취업도 포기하고

아르바이트만 하는 프리타가 생겨나고.. 집 안에만 틀어박혀 게임이나 하는

히키코모리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전쟁 후 미친듯이 일하는게 미덕이라 여겼던 장년층들의 눈에는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한심스럽고 심히 걱정스러운 청춘들인 것이다.

그런 3포, 4포 젊은이들을 바라보는 시선들이 고울리가 없을것이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게도 2017년 대한민국도 그런 일본의 어두운

면을 참 많이.. 부지런히 닮아가고 있다.

우리 사회는 고학력 실업자를 해마다 순풍순풍 양산하고 있고

소위 말하는 88만원 세대들의 고된 현실이 결혼도 직장도 포기하게 만든다.

사회는 또 이러한 젊은이들에게 격려랍시고

목표를 갖고 희망을 버리지 말고 눈을 돌려 해외로 나가라며 밖으로 내 몰고 있다.


솔직히 사회가 이러한 청년들을 한꺼번에 휘몰아 치지 않아도

무한 경쟁을 즐기는 진취적인 사람들도 있을 것이고

여타의 이유들 때문에 경쟁사회에서 한걸음 물러나서

유유자적 하면서 살고 싶은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은 이런 모양새로..저런 사람은 저런 모양새로 살면 되는 것이다.


나와 같지 않다고..다수와 다르다는 이유로 배척할 이유도

손가락질 할 이유도 없고 그래서도 안되는 것이다.


솔직히 내가 처음 이 책을 읽기 시작했을 때는..속으로 이런 생각도 했었다.

"차암.. 팔자 좋은 소리 하시네.. 사회에 부적응자들 소위 말하는 덕후나

히키코모리들의 자기 합리화에 불과하다. 너네들이 결혼을 안해서 그렇지

결혼을 해봐라.. 당장 입이 몇개나 늘어나는데 팔자 편하게 하고 네가 싶은거나 하면서

그렇게 살 수 있을것 같아? "


삐딱선이라고 할지..아님 나는 그렇게 못하고 사는데..

일주일에 달랑 2~3일 일하고 딩굴거리며 시간을 맘껏 쓰고 사는

니트족에게 질투가 난건지 솔직히 잘 모르겠다.

아무튼 처음에는 뭔 얼토당토 않은 소리하냐..라는 생각이 들었던 건

사실이다. 그러나 참 특이하게도 책을 읽고 있는 동안 저자의 말이

틀린게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묘하게 공감이 가면서 굉장히 우호적으로 바뀌는 나를 발견 할 수

있었다.

" 엄청 부럽네,가능하면 나도 그렇게 살고 싶다.."아주 솔직한 심정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책을 읽으면서 속이 후련해지는 면도 있었다.


노후까지 생각하여 제대로 된 직업을 찾아야 한다.

아이들을 어엿하게 키우고 나이든 부모님을 착실히 부양해야 한다.

언제 닥칠 모를 사고에 대비해서 보험도 들어야하고

저축도 해야하고 자격증도 따둬야 한다.

취미생활도 해야지 삶이 쓸쓸하지 않는다.

명품 한두개씩은 가져야지 어딜 나가도 낯이 선다..등등..

하지 않으면 안되고 해야 할 일들 투성이인 삶이 참 퍽도 고되다 싶다.


까이거 그런거 없다고 해서 당장 죽는것도 아닌데...

조금만 내려놓으면 세상이 노골노골 해지는데...

저자는 그렇게 나에게 너무 애쓰지 않아도 된다. 다 길이 있다..라고

말하는 듯 하다.


수 많은 자기 개발서들이 이렇게 해야한다. 이렇게 살아야한다..라고

강요하는 것에 반해..

이 책은 그딴거 다 필요없어. 안해도 안굶어죽어. 네가 하고 싶은것을 해봐..

라고 말한다. 당연히 귀가 솔깃 해진다. 읽다보면 피식피식 웃게 된다.


몇 일전 지인을 만나서 술을 한잔 했다.

죽어라 일했는데도 좌천되다 시피해서 전보다 낮은 보직으로 배치를 받았단다.

있는대로 낙담한 지인은 뭐할려고 돈벌려고 아둥바둥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내가 요즘 읽고 있는 책이 있는데 그 책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서 죽어라 일을 하고 일하면서 받은 스트레스를

풀기 위해 돈을 쓴다..결국 평생 그렇게 돈을 벌고 돈을 쓰면서 아둥거리며

살아가는 것이다..라고" 내 말을 어느 정도 이해했을지 모르겠지만

쓰임새만 좀 줄이고 욕심만 좀 줄여도 숨통 조이는 숨막힘은 좀 덜할 것이다.


여담이지만 턱도 없는 산수 점수를 받아오던 내 동생은..

지 밥그릇 지가 가지고 태어난다고 하시던 어머니의 믿음과 기다림 덕분인지

중학교때 반에서 1~2등을 하더니 고등학교때는 전교에서 1~2등을 하고

명문 대학원까지 나와서 지금은 고등학교 선생님을 하고 있다.

밥그릇으로 치자면 제대로 철밥그릇을 가지고 있는 셈이니

어찌보면 나보다 훨씬 낫다.


다르다고 모자르다고 닥달하지 말자.

[하지 않을 일 리스트]는 세상을 보는 눈이 넉넉해지는 책임에 분명하다.

꼭 한번 읽어보시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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