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유의 손글씨, 시를 쓰다 - 따라쓰기로 연습하는 캘리 라이팅북
허수연 지음 / 보랏빛소 / 2015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아주 어렸을 때.. 정확히는 내가 초등학교 1학년이었을 때..

아버지는 나에게 무릎을 꿇게하고선 먹을 가는 방법부터 알려주셨다.

그리고 초등학교 1학년이 쥐기에는 너무 굵은 붓 한자루를 쥐어주시고는

화선지에 아버지, 어머니, 우리나라, 대한민국...이라는 글자를 붓으로 쓰게 하셨다.

나는 솔직히 내가 왜 붓글씨를 배워야 하는지도 모른 채...

쥐가 나는 다리를 두들기며 끙끙거리며 글씨를 써내려 갔다.


그리고 한참 나중에서야 필체가 좋아야지 어딜 가도 대접 받는다고 생각하신

아버지의 치밀한 "이쁜 글씨 쓰기" 조기 교육이였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또래 친구들에겐 자칫 지루가기 짝이 없는 붓글씨 쓰기 일지 몰라도 

어린 나에겐 한자 한자 먹물로 써내려 가는 그 시간이 싫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차분해지는 걸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나는 나이에 걸맞지 않게 "애 늙은이"라는 소리를 듣기도 했지만

학교 백일장에서 붓글씨 쓰기 부분에서 늘 상을 휩쓸다시피 했다.

상장을 넣어두는 상자에는 백일장에서 받아온 상장으로 가득했다.


어른이 되어서도 필체가 좋다는 소리를 종종 들었다.

나에게는 조그마한 자부심이였다.


하지만 요즘엔 붓은 고사하고 볼펜을 잡고 글을 쓰는 시간이 턱없이 부족다.

업무상 키보드를 두들기는 일이 늘어나면서

점점 필체가 형편없어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알량한 자부심이 무너지고 있었다.


사실 나에겐 요최근에 심하게 마음의 상처를 입는 일이 있었다.

하루에도 수십번씩 내 마음속에서 미움과 슬픔과 분노와 자기 모멸감이 들끓어

도저히 주체하기 버거웠다. 무슨 짓을 해도 상처입은 내 마음을 회복되기 어려울것 같다는

불안감에 시달리던 그때 나는 문득 어렸을 때 내 마음을 차분하게 다독거려 주었던

그 먹 냄새가 떠올랐다.

그리고 아픈 마음에 위로를 받을 수 있을까 하는 한가닥 희망을 갖고 캘리그라피 수업을 수강하게 되었다.


 


나의 선택은 탁월했다.

붓을 잡는 그 순간부터 들끓던 내 마음이 차분해지는 것을 느꼈다.


하지만 겨우 자음 모음, 곡선도 끙끙거리며 쓰는 왕초보인 나에겐

쉽게 쓸수 있고, 참고 할 수 있고, 따라서 쓸수 있는 교과서 같은 책이 필요했다.

그러던 차에 "시를 쓰다" 라는 책을 만났다.


[느끼면서!! 따라쓰기만 하면 된다.]

책의 서두에 적혀있는 작가의 그말이 적잖은 힘이 되었다.

잘쓰지 않아도 된다.따라쓰기만 해도 된다.부담감이 줄어드니 한결 만만해보인다.

따라쓰지만 지루하지 않고 내가 썼구나 하는 뿌듯함을 느낄 수 있는 책이라는 것을

나는 책장을 넘기면서 금방 알 수 있었다.

 


그건 주옥같은 시를 쓰기 때문이였다.

내 마음을 위로해주는 캘리그라피로 시를 따라 쓴다는 것은 몇배의 시너지 효과가

있었다.

 


붓 펜을 구입했다.

바로 따라서 써보고 싶었다.

잘쓰든 못쓰든 그건 문제가 되지 않는다.

내가 느낀 바대로..한자씩 쓰면 되는 것이다.


 


 


김상용 <남으로 창을 내겠소> 중에서 -

여기서 왜 사냐고 묻는 사람에게 시인은 그냥 피식 웃음을 흘린다.

그래서 웃지요..라는 글자는 뭔지 모를 허무함이 느껴진다.

좋아서..행복해서 웃는 것과는 뭔가 다르기 때문에 동글동글 하게 쓰지 않았다는

저자의 설명에 절로 고개가 끄덕여진다.


 


나호열 <당신에게 말 걸기> 중에서 -

작고 앙증 맞은 꽃을 닮은 당신.. 동글동글 귀여운 글씨체로 표현했다.

보기만 해도 사랑스러운 모습이 떠오른다.

 


이 병률 <새날> 중에서

작가는 자고 일어나듯, 무거운 몸을 일으키듯, 상쾌하진 않더라도 일어나듯 그렇게 썼지만..

나는 자고 일어나면 무거운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지고 날서 있던 나의 마음도 한결 부드러워질거라는

희망을 갖고 조금 둥글게 써봤다.


 


신경림 < 가난한 사랑노래 >중에서-

내가 쓴 글씨체..정확히는 따라 쓴 글씨체..

가난한, 헤어져 돌아오는 축 처진 어깨의 느낌을 담은 글씨체..왠지 서러움이 묻어 있는 듯하다.



정호승 < 수선화 >중에서 -

울지마라...울지마라.. 외로우니까 사람이다..



박 남준 < 흰 부추꽃으로 > 중에서 -

그러게나 말이다. 언제쯤이면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부족한게 많고 서툰 삶, 정돈되지 않은 마음 같을 글씨체를 보면서

언젠가 조금 더 바르고 반듯한 삶을 꿈꿔본다.


아래는 교본..

역시 교본에 나온 글씨체가 더 멋지게 느껴진다.



 


 


함 민복 < 가을> 중에서 -

가을이다.. 누구든 마음 한구석에 그리운 사람 한명쯤은 간직하고 있기 마련이다.

잠자리에 누었을 때 눈앞에 둥실둥실 아른거리는 그 사람을 생각하며 포근한 글씨체로 표현되었다.



이 책은 부제목 처럼 "치유의 손글씨"라고 할 수 있다.

상처받고, 외롭고, 지친 사람들에게 작지만 큰 위로를 주는 책..

아름다운 시 한구절을 되뇌이며 따라쓰도 되고.. 또 자신만의 느낌으로 써내려 가도 된다.

어떻게 쓰든 어떻게 표현하든 자신의 느낌을 표현 해 볼 수 있는 책..


손으로 쓰는 그 아름다운 작업에 푹 빠져서 어느새 내 마음이 위로 받는 다정함을 느끼게 해준 책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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