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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 릴케 시 필사집 ㅣ 쓰는 기쁨
라이너 마리아 릴케 지음, 배명자 옮김 / 나무생각 / 2026년 4월
평점 :

이 아름다운 4월에 내가 좋아하는 보라색 커버를 한 릴케의 시집을 집어든 순간
한송이 꽃을 보는듯 마음이 설레였습니다.
"장미여, 오 순수한 모순이여
그 많은 눈꺼풀 아래에서
누구의 잠도 되지 않겠다는 갈망이여"
이 시를 릴케는 묘비에 새겨넣었습니다.
장미 가시에 찔려 파상풍으로 죽었다는 그의 사인은 잘못 알려진 것이고 실제로는 백혈병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과 우울증에 시달리다 스위스의 한 요양원에서 세상을 떠나고 말았죠.
낭설이었던 그의 죽음에 대한 강한 이미지 때문이었을지 모르지만 그의 시는 아름답고
서정적일거라는 생각을 늘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시집을 한장 한장 넘길때마다 그껴지는 그의 시에서는 죽음과 사랑, 고독에 관한
깊은 탄식이 담겨있었습니다.

사랑하고, 불안해하고, 고통스러워하고, 고독해하는 것들
이 모두는 인생을 살아가는 우리들이 겪는 감정들입니다.
그 모든 감정들을 릴케는 시를 통해 가시화 합니다.
고독은 비와 같습니다.
바다에서 석양을 향해 오릅니다.
아득히 외진 평원에서
고독한 하늘을 향해 오르고
하늘에 이르러서는 도시로 와서 내립니다.
비처럼 내리는 고독이라니.. 생각만 해도 마음 한견이 저릿해져 옵니다.
바다에서 들에서 하늘을 향해 오른 고독이 도시에서 비 처럼 내리네요.
회색 도시에 우중충한 색깔로 번져가는 고독의 기운이 느껴집니다.

그대에게서 내게로 밀려오는 것에
맞서볼 마음도 이젠 없습니다.
한결같고 흔들림 없으며 진지하게 내게로 전해지는 그것은
아마 사랑이라는 감정이겠죠. 맞서볼 마음도 없이 온전하게 그 사랑이라는
감정에 나를 맡기는 용기..
거대한 파도같이 밀려드는 사랑이라는 감정을 릴케의 시를 통해 음미해봅니다.

햇살 좋은 봄날.. 야외에 앉아서 릴케의 언어를 한자한자 새겨봅니다.
휘리릭 읽으면 뭔 소리야? 할 정도로 저에게는 조금 어렵지만..
마음의 여유를 갖고 읽고 있으면 아~~ 왜 릴케를 위대한 시인이라고 하는지
조금씩 알게 됩니다.
단순한 언어의 유희가 아니라 철학적 의미와 풍부한 은유의 미를 내포하고 있는
그의 시들은 100년이 지났음에도 우리들의 마음을 설레게 합니다.

이제 이 책을 다른 의미로 즐겨보고자 합니다.
릴케의 시를 한자한자 필사를 해봅니다.
생각이 좀 많아지는 릴케의 시들은, 시간을 들여 한자한자 써내려 가면
그 의미를 더 깊이 이해하고 받아들 일 수 있는 마음의 여유가 생깁니다.
눈으로 읽고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글씨를 씀으로써 나의 것으로 만들 수 있다는 점을
필사의 매력으로 꼽을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최근에는 펜을 들고 글을 쓸 일이 드뭅니다.
탁타탁탁 .. 키보드를 두들리고, 폰트도 내 마음대로 바꾸고, 지웠다 썼다하는 작업을 손쉽게
할 수 있으니 글쓰는 작업이 참 편해졌습니다.
덕분에 펜을 잡고 글을 쓸 일이 별로 없다보니 글씨체가 점점 악필로 변하고 있습니다.
안타까운 일입니다.
하지만 필사책을 앞에 두고서는 한자한자 또박또박 정성을 들여 쓰게 됩니다.
나중에 다시 펼쳐보았을때 내 자신에게 부끄러우면 안되니까요.
집중하여 정성을 들여서 써봅니다. 이 작업이 무척이나 평화롭고 마음이 안정됩니다.
효율적인 키보드 작업과 달리 좀 비효율적인 필사 작업은 디지털 시대에 아날로그같은 느낌이지만
아날로그가 주는 낭만을 알기에 이런 시간이 무척이나 다정하게 생각됩니다.

먼저 눈으로 읽고..
글씨를 써봅니다.
내가 쓴 글을 작은 소리로 읽어봅니다.
필사의 작업은 더디지만 그 어느때보다 진한 농도로 글들이 마음에서 녹습니다.

사실 많은 필사 작업을 해봤지만 릴케의 시만큼 필사의 진정한 즐거움을 느껴본 건
처음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사실 릴케의 시는 저에게는 조금 어렵게 느껴집니다.
어려운 상대를 대할때는 찬찬히 살펴봐야 할 필요성이 있거든요.
그 작업을 필사로 대신하며 한결 릴케라는 위대한 시인과 친해진듯하여
행복합니다.

텅 빈 보도 위에서 빛들이 움찔거립니다.
밤이 내려 앉은 거리..다락방 창문으로 새어나오는 빛이
울다 지친 두 눈 같은.. 릴케가 봤던 그 거리, 그 밤을 상상해봅니다.
쓰는 작업은 중독성이 있어서 멈추지 않고 자꾸 자꾸 펜을 끄적거리게 되더군요.
글이 주는 느낌에 따라 검정색으로 파란색으로 빨간색으로 써내려가며
봄날의 힐링을 마음껏 만끽했습니다.
특별한 시인이 전해준 특별한 행복을 전해 받았습니다.
마음이 흔들리며 잡생각이 많아질때면 꼭 한번 이 책을 권해보고 싶네요.
조용하고 상냥하게 내 마음을 다독일 시간에 꼭 필요한 쉼표가 되어줄 책입니다.

*본 포스팅은 문화충전과 제휴업체와의 협약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