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쁜 손글씨에 아름다운 시를 더하다
큰그림 편집부 지음 / 도서출판 큰그림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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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초등학교에 갓 입학하였을때 교장선생님이셨던 아버지는

사람은 필체가 좋아야 어디가서라도 대접 받는다며 고사리 같은 손에

연필하고는 비교도 안되는 굵은 붓을 들려주셨다.


나는 책상에 무릎을 꿇고 앉아서 화선지에

아버지, 어머니, 우리나라, 대한민국 이라는 글을 써내려갔다.

다리는 저려오고 어린 아이 손에 익숙치 않은 붓때문에 옷소매에도 바지에다

먹칠을 하기 일쑤였다.

학교 백일장에 나가 상도 받았다.

상을 받아가면 아버지는 무척 기뻐하시며 장하다고 용돈을 주시곤 했다.


한참 나이가 든 후에 동사무소에 인감증명서를 떼러 갔다.

신청 대장 같은 곳에 이름을 한자로 적어라고 하길래 한자한자 차분히 적어서 내밀었더니

나이가 좀 지긋하신 동사무소 직원은 내 얼굴과 글씨를 몇번이나 번갈아보더니

글씨를 너무 잘 쓴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


또 이런 일도 있었다.

갤러리에서 미술 작품을 감상하러 갔다가 방명록에 이름을 적어주시면 감사하겠다고 해서

잠시 고민하다가 한자로 이름을 적었더니 미술관계자분께서 서예하시는 분이시냐며

내 글씨를 한참 들여다보셨다.

그때 깨달았다. 아버지가 어린 나에게 왜 붓을 들려주셨는지..

내 글씨는 어디다 내놔도 부끄럽지 않을 정도는 되고, 글씨체가 수려하면

어디가서도 대접(?)받는 다는 것을..아버지의 말씀은 틀리지 않으셨던 거다.







그런데 시대가 바뀌었다.

펜을 들고 글을 쓰는 일을 더물어졌고, 컴퓨터에 앉아 키보드를 두들기거나

핸드폰을 두들기며 글을 쓰다보니 한때 나의 자부심이었던 글씨도 악필처럼 볼품없어지고 말았다.

그래서 캘리그라피라도 배워야겠다는 생각에 없는 시간을 쪼개 문화센터도 다녀보았지만

바쁜 업무때문에 수업에 빠지는 일이 잦아서 그런지 별반 나아지는 것 같지 않았다.

용불용설이라는 말이 절로 떠올랐다.


그러던 차에 예쁜 솔글씨로 시를 적을 수 있는 책이 나왔길래 눈이 번쩍 뜨였다.

때마침 가을이 한창이라 이 좋은 계절에 아름다운 시 한편 외우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터였기 때문이다.

돌아서면 잊어버리는 볼품없는 기억력을 가졌기에 한자한자 또박또박 적어내려가며

시를 필사한다면 어느새 시 한편쯤은 멋지게 외울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 설레는 마음으로

책을 마주하게 되었다.






이 책에는 윤동주, 김소월, 정지용, 권태웅, 김영랑, 이육사, 이상화, 한용운 시인의 시가

소개되어 있다. 이름만 들어도 고개가 절로 끄덕여지는 시인들의 시를 필사할 수 있다니

깊어가는 가을밤, 차 한잔을 두고 앉아 흔들리는 마음을 다 잡기에 이보다 더 좋은것

없을 것 같다.






장인은 도구를 탓하지 않는다고 하지만 글을 쓸때 이쁘게 적을 수 있는 펜 종류를

친절하게 적어놓았다.

서랍을 열어보니 손글씨는 잘 안쓰는 주제에 이런저런 팬들이 가득하다.

잔뜩 꺼내에 책상에 올려두고 맘에 드는 색깔의 펜을 쥐어본다.





눈 - 윤동주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이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 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나리지






얼마만에 이렇게 정성들여 적어보는지 모르겠다.

펜을 쥔 손에 어찌나 힘을 주었는지 손톱 끝이 하얗게 될 정도였다.

마음에 글을 새기며 나에게 온전히 몰입해 본다.






자화상이라고 하는 윤동주 시인의 시다.

좋아하는 시인이라 윤동주 시인의 시는 몇편은 외우고 싶다.

정자체로 연습하는데 마음이 삐뚤어졌나 글이 살짝씩 삐쳐나간다.

정신일도!






먼후일 - 김소월

먼 훗날 당신이 찾으시면 그때에 내 말이 '잊었노라'

당신이 속으로 나무라면 '무척 그리다가 잊었노라'

그래도 당신이 나무라면 '믿기지 않아서 잊었노라'

오늘도 어제도 아니잊고 먼 훗날 그때에 '잊었노라'








청포도 - 이육사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 가는 시절

이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먼 데 하늘이 꿈꾸려 알알이 들어와 박혀

하늘 밑 푸른 바다가 가슴을 열고

흰 돛단배가 곱게 밀려서 오면

내가 바라는 손님은 고달픈 몸으로

청포를 입고 찾아온다고 했으니

내 그를 맞아 이 포도를 따 먹으면

두 손은 함북 젹셔도 좋으련

아이야 우리 식탁엔 은쟁방에

하이얀 모시 수건을 마련해 두렴


이서윤체로 써보는 이육사의 시 한편.

각 행마다 각각 다른 색깔의 펜으로 적어본다.

청포도 색깔을 담은 색깔로 적어내려가는 시에서 달콤한 포도 향이 나는것 같다.

8명의 시인의 49편의 시가 실려있고, 정자체, 심경하체, 늦봄체, 이서윤체의 4가지

필체로 필사할 수 있다.


어수선한 세상, 자극적인 뉴스들에 마음이 지쳤을때 내가 좋아하는 펜을 손에 쥐고

좋아하는 시인의 시 한편을 가만가만 적어보다보면

차가운 이 계절에 마음은 따듯해지지리라.

오랫만에 힐링 할 수 있었던 소박하지만 소중했던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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