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짧았기에 더욱 빛나는 ㅣ 일본문학 컬렉션 1
히구치 이치요 외 지음, 안영신 외 옮김 / 작가와비평 / 2021년 6월
평점 :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몇일 전에 친구한테서 전화가 왔다.
"너 저번에 읽던 책..다 읽었으면 나 좀 빌려주라"
"응? 무슨 책?"
"그거, 너 책 읽다가 갑자기 울었던 그 책말야"
아이고..갑자기 얼굴이 화끈거린다. 이 나이에 책 읽다가 닭똥같은 눈물을
뚝뚝 흘리다니말이다.
그랬다. 아주 오랫만에 내 마음을 휘저은 책에 대해서 말해보고자 한다.
언제부터인가 한국의 서점가에 일본의 작품들이 번역되어 소개되기 시작하면서
많은 인기를 얻고 있다.
무라카미 하루키, 요시모토 바나나, 히가시노 게이고, 에쿠니 카오리등 소위 말하는 베스트셀러 작가들의
작품들이 속속 번역되어 나오고 있다.
현대의 일본문학 작품을 살펴보는 것도 독자들에게 새로운 재미와 호기심을 주기에 충분하지만
좀더 앞선 근현대 작품을 읽어보는 것 또한 일본 문학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것이다.
그래서 찾아서 읽게 된 책이 작가와 비평사에서 나온 [짧았기에 더욱 빛나는]이라는 제목의 책이다.
창작의 혼을 태우며 짧은 생을 살다 간
여섯명의 천재 작가가 들려주는 삶의 이야기!
이 책은 일본 문학사에 길이 빛날 천재 작가들의 단편들을 소개하고 있다.
1900년 무렵, 가난하고 고단했던 시대상은 작가들의 작품에 고스란히 나타난다.
못먹고 못입던 시절, 가난의 상징처럼 폐결핵은 흔해빠진 병이었고,
글을 쓰는 작가라는 직업이 호의호식하지 못하는 일이다보니 아쉽게도
많은 작가들이 폐결핵으로 요절하는 경우들이 많았고 불안한 현실을 비관하다가
자살하는 경우들 많았다.
이 책에 소개된 6명의 작가들은 폐결핵이나 지병, 또는 자살로 20대에 또는 30대에
요절을 한 작가들의 단편 2편씩을 소개하고 있다.
히구치 이치요(1872~1896년) 24세에 폐결핵으로 요절한 그녀는 5천엔 지폐에 얼굴이 실려있다.
그만큼 그녀가 일본 문학에 끼친 영향이 대단했음을 알 수 있다.
'기적의 14개월'이라고 불리는 1895년 섣달그믐을 발효한 후 1년 남짓한 기간중에
문학사에 길이 남을 대표작들이 쏟아졌다.
일본 최초의 여류직업 작가였고, 중국의 작가 위화는 그녀를 19세기 가장
위대한 여성 작가의 한 사람으로 꼽는다.
아쿠다카와 류노스케(1892~1927) '그저 막연한 불안'으로 35세때 스스로 목숨을
끊은 일본 최고의 문학 작가이다.
일본에는 신인 작가들을 발굴하여 상을 주는 '아쿠다카와상'이라는게 있다.
작가의 이름을 딴 상이 있다는 것만으로도 일본 문학사에서 그의 발자취가 얼마나
위대한지 알 수 있다.
가지이 모토지로(1901~ 1932) 지병으로 31살에 세상을 떠났다.
"밤하늘에 별처럼 순수하며 단단하고, 독창적이며 그 자체로도 충분히 하나의 소우주를
만들어낼 수 있는 작품을 남겼다"라고 평가받고 있다.
나카지마 아쓰시(1909~1942) 천식에 의한 심장발작으로 33세의 젊은 나이에 요절했다.
1920년 한문 교사인 아버지를 따라 경성으로 이주와서 경성중학교를 다녔고 이러한 가정환경으로
[호랑이 사냥],[순사가 있는 풍경]등 조선을 배경으로 한 소설을 썼다.
다자이 오사무(1909~1948) 신분과 사상사이에서 좌절하고 약물 중독과 자살미수를
반복하다 39세에 애인과 함께 자살하였다. 그의 작품 [사양]은 사양족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고, [인간실격]은 그의 대표적인 작품이기도 하다.
현재의 일본 젊은층에서도 다자이 오사무의 광팬들이 많다고 한다.
미야자와 겐지(1896~1933) 37세의 나이로 폐결핵으로 사망했다.
일본의 국민적 작가로 사랑받은 동화작가이며 국외에서도 많은 작품들이 번역소개되고 있다.
총 6명의 작가와 12편의 단편, 그리고 각 작가에 대한 소개및 작품에 대한
설명이 있어서, 익숙치 않은 일본 작가와 작품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이 된다.
여러 작품들이 눈에 들어왔지만 나의 원픽은 뭐니뭐니해도
아쿠타가와 류노스케의'밀감'이라는 작품을 최고의 작품으로 꼽고 싶다.
피로와 권태로움으로 모든것이 우울해 보이는 산골 마을의 기차 안.
모든 것이 회색인 그 곳에 낡고 꽤재재한 옷을 입고, 온통 살같이 트고
두 뺨은 눈에 거슬릴 정도로 벌겋게 달아오르고
동상 걸려 시커먼 손을 한 계집 아이가 이등칸에 올라탄다.
누가보다도 시골뜨기였다.
손에는 3등칸 차표인 빨간색 차표를 꼬옥 쥐고 커다린 보따리를 끌어안고 있다.
이등칸과 삼등칸도 구별못하는 미련함이라니,'나'를 더욱 짜증나게 만들었다.
기차가 출발을 하고 터널을 막 빠져나올려고 하는 그 참에
그 아이는 내 앞으로 와 기차의 창문을 열어젖힌다.
창문으로 시꺼먼 연기가 한가득 기차안으로 들어오고 나는
눈물이 쏙 빠질 정도로 기침을 한다.
터널을 막 빠져나온 기차는 어느 산골짜기 가난한 마을의 건널목을 지나고
있었고 기차 건널목 울타리 너머로 얼굴이 빨간 사내아이 셋이 조르르
늘어서 기차를 향해 손을 들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그 순간이었다.
창 밖으로 몸을 반쯤 내밀고 있던 계집아이가
동상 걸린 손을 쭉 뻗어 힘차게 흔드는가 싶던 바로 그때,
가슴을 설레게 할 만큼 따스한 햇살에 물든 밀감 대여섯 개가
기차를 지켜보던 아이들 머리 위로 흩어져 내렸다.
나도 모르게 숨을 죽였다.
해질녘 철길 옆에서 남의 집살이를
떠나는 누이를 배웅하러 나온 어린 동생들에게 품에서 밀감을 몇개를 꺼내
힘껏 던지는 어린 계집 아이.
아마 그 밀감 몇알은 고된 남의 집 살이를 떠나는 딸아이가 안스러워
할머니나 어머니가 마지막으로 챙겨준 사치스러운 간식거리였을지도 모른다
그걸 배웅 나와준 남동생들에게 던져주고 가는 누나의 마음은 햇살을 닮아
빛나는 밀감같았다.
나는 그제야 비로소 이루 말할 수 없는 피로와 권태,
그리고 이해할 수 없는 저속하고 따분한 인생을 겨우 잊을 수 있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며 우는 나를 보고 친구는 당황해했다.
나는 설명대신 떨리는 목소리로 나는 이 작품을 읽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잠시 아무말도 하지 않았다.
한참 후에 입을 뗀 친구는 나에게 물었다.
"그걸 쓴 작가 이름이 뭐야?"
"아쿠타가와 류노스케..라고 하는 일본 작가야"
"참 대단한 작가구나"
그리고 우리는 밀감에 대해서 아주 오랫동안 서로의 생각을 나누었다.
한편의 문학 작품이 우리에게 주는 영향을 고스란히 보여준 일이었다.
책이라면 고개부터 절래절래하던 친구가 이제부터 책과 좀 친해질려나..
작가와 비평사에서 일본문학 컬렉션으로 처음 발간된 책이라는데
앞으로 2편, 3편도 기대가 된다.
새로운 작품을 읽는 즐거운 흥분이 한동안 내 마음속에서 요동을 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