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리더 : 영조 그리고 정조 - 조선 르네상스를 연 두 군주의 빛과 그림자
노혜경 지음 / 뜨인돌 / 202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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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히 영조와 정조시대를 '조선의 르네상스'라고 말하곤 한다.

이성계는 고려를 쓰러트리고 곤룡포에 수 많은 피를 묻히며 조선을 건국했다.

조선 초기의 불안한 정세는 서서히 자리를 잡아오다가 21대 임금인 영조대에 이르게 된다. 

하지만 이때도 정치는 노론과 소론의 당파의 대립이 전쟁만큼 치열했고

정권이 바뀔때마다 피의 숙청이 시작된다.


모르긴 해도 지금의 정치와 크게 다를바 없지 않을까 싶다.

여당과 야당으로 나뉘어 반목하며 당파의 이익을 위해 반대를 위한 반대가 성행했을 것이다.


역사 드라마에서 희대의 악녀로 등장하는 장희빈과 숙종과의 사이에 태어난 경종은

후사를 두지 못하고 재위 4년만에 요절을 하였고 그 뒤를 이어

노론의 백그라운드로 하고 왕위에 오른 자가 연잉군(=영조)이다.

경종과 연잉군은 배다른 이복 형제지만 영조의 생모는 신분이 천한 궁중의 무수리였다.

이 출신 성분은 영조의 영원한 콤플렉스가 된다.


정조의 治定중 후세에 많이 칭송을 받는 것이 탕평책이다.

노론의 세력을 등에 입고 왕의 자리에 앉았을때 기세 등등해진 노론이 소론에 대한 피의 숙청을

영조에게 요청했을때 영조의 대답은 "나는 노론의 왕도, 소론의 왕도 아니다."라고 하였다.

노론에게는 실로 뒷통수 맞는 일이었겠지만 영조는 노론과 소론의 영수를 불러 화목을 권하고

호응하지 않는 신하들은 축출하였으며 노론과 소론 중 탕평책을 따르는 자들만 등용하면서

두 당파의 대립을 완화하기 위해 노력했다.

우리가 요리로 먹는 탕평채는 영조가 신하들에게 하사하였는데 녹두묵에 고기볶음과 데친 미나리,

구운 김 등을 섞어서 만든 묵무침이다. 이 음식은 서경의 탕탕평평이라는 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싸움이나 논쟁에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침이 없이 조화와 화합을 중시한다는 뜻을 가지고 있다.

조선의 왕가에서 후궁출신의 생모를 둔 왕은 더러 있었지만 영조처럼 미천한 출신의 생모를 둔

경우은 없었기에 어머니의 출신 성분으로 인한 영조의 콤플랙스는 극복하기 힘든 넓고 깊은

강과 같았을 것이다.

그래서 자신의 생각대로 대신들이 따르지 않으면 불 같이 성질을 부리며

"너희들이 내가 왕자로 들어와서 이자리에 앉았다고 종친또한 멸시하느냐"며

부들부들 떨며 소리를 치는 일이 잦았고 정승들이 혼비백산 자리를 물러나는 경우들이 많았다 한다.

​임금도 사람이지만 시도때도 없이 불뚝 성질을 부리는 것은 진정한 리더가 갖춰야할

덕목은 아닌듯하다.


영조는 후궁에 대한 대우를 개선하기에 이른다.후궁의 신분으로 왕을 배출한 생모에 대한 예우로

사당과 무덤을 격상하였으며 이들의 사당을 모아놓은 것이 '칠궁'인데 그 칠궁 자리에

현재 청와대가 자리하고 있다.


영조의 아들 사도세자의 대한 부분은 잘못된 부모의 교육과 여기에 당파의 이간질이 더해져 일어난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라 생각한다.

15개월된 어린 사도세자를 조기교육하기 시작한 것부터 영조의 실책이 시작된다.

그의 자괴감과 초조함이 어린 세자를 몰아붙였을 것이다.

겉으로는 호학의 군주이며 덕을 갖춘 영조이지만 속으로는 교활한 정도로 대단한 지략가이다.

하지만 사도세자는 이와 반대로 우직한 스타일이었는데 영조는 억지로 사도세자를 자신의 스타일로 만들려고

하였고 자신의 기대에 미치지 않자 직접 아들 교육에 나서며'교육'이 아닌 '인간개조'를

할려고 하였다. 화를 내고 야단을 치며 칭찬에는 인색하기만 한 호랑이 같은 아버지의 과한 기대와

강요는 사도세자에게 숨 막히는 압바감과 억압으로 가가왔고 감내하기 힘든 정신적인 고통이

결국 그를 정신병자로 만들게 되었다.

여기에 사도세자가 역모를 꾀하여 왕위를 쟁탈하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나돌아

결국 아들을 뒤주 속에 8일이나 가두어 죽게 만들었으니, 보통의 아버지와는 정도가 다른 사람인것 같다.

사도 세자의 아들 정조는 어릴때부터 총명하여 영조는 손자에게 기대를 걸게 된다.

아들을 교육하며 자신의 과오를 몸소 경험했던 영조는 손자인 정조에게는 사도세자때와는

다른 교육을 실시한다.

칭찬을 아끼지 않았으며 자신이 직접 교육을 하지 않고 선생을 두어 교육을 ​하게 하였으며

경연에도 참석을 하게 하는등 일찌감치 왕으로 키우기 노력한다.

영조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오른 정조도 왕위에 오르기까지 두어번의 죽음을 겪을뻔했다.

왕이 되기까지 지난 여정이었다. 그가 왕위에 올라 처음 한 말이 '나는 사도세자의 아들이다'라는

말이었으니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내몰게 했던 관료와 당파에겐 실로 가슴 서늘한 말이

아닐 수 없을 것이다. 정조 또한 출신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었고 이로 인해 정조의 안위도

보장받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다.

하지만 정조는 즉위하고 곧 규장각을 설치하였고, 아버지의 죽음을 지켜보며

당파 싸움에 대해 극도의 혐오감을 가졌기에 왕권을 강화하고 체제를 재정비하기 위해

영조의 탕평책을 계승하였다.

문화 정치를 펼치며 문물제도를 재 정비하며 조선의 르네상스를 이끈다.

또한 정조는 아버지 사도세자의 복권과 어머니 혜경궁 홍씨에 위해 수원에 새로운 도시"화성"을

축조하고 1797년 음력 1월에 화성으로 능행을 떠나게 된다. 정조의 오랜 숙원사업을 이루었으니 얼마나

뿌듯했을까.. 음력 1월의 추위에 하루 왠종일 화성 안팎을 돌며 ​끝도 없는 연설을 쏟아내었는데

신하들에겐 말은 못하지만 참 고역이었을것이다.

정조는 이날 리더로써 실수도 많이하였는데 본인의 치정을 너무 내세우는 것도 리더답지 못한 행동

인듯 하다.

이처럼 영조와 정조는 신분출신의 콤플렉스를 가지고 있었고 때로는 그로 인해 인간다운

실수도 하지만 벗어나기 위해 부단히 노력도 하였고, 당파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암살의 위험도

있었지만 꿋꿋하게 자리를 지키며 어디에도 쏠리지 않고 화합을 이뤄내기 위해 애썼다.

정치적 이익보다 백성을 위했고 공평한 인재 등용으로 지식인들을 옆에 두었기에

비교적 제대로 된 정치를 하지 않았나 싶다.

현재의 정치를 보면 정말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고 있는지 의문이 들때가 있다.

여전히 노론과 소론같은 당파가 존재하며 민생안정보다 우선시 되는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또한 뛰어난 인재를 당파및 출신계급과 상관없이 등용했던 과거보다 못하는건 아닌지

이 책을 읽으면서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나라가 부국하고 안정을 찾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정치가 제대로 되어야한다.

다만 한가지 참 다행인 점은 국민들이 적극적으로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목소리를 낼 수

있다는 점이다. 깨어있는 국민 의식이야 말로 정치를 깨끗하고 바르게 이끌 수 있는

가장 큰 힘이 되지 않을까 한다.

 

 


본 포스팅은 네이버 카페 문화충전200%의 서평으로 제공 받아 솔직하게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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