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눌프 헤르만 헤세 선집 6
헤르만 헤세 지음, 권혁준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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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착과 떠남의 경계

헤르만 헤세 저, '크눌프'를 다시 읽고

7년 전 크눌프는 산소, 천사, 혹은 닮고 싶은 그리스도인의 모습으로 다가왔다. 이번엔 달랐다. 내가 바뀌었기 때문일 것이다. 재회한 크눌프는 한없이 애처로워 보였다. '자유'를 대변한다고 말할 수 있는, 겉으로 드러난 그의 삶보다, 드러나지 않은, 혹은 드러낼 수 없었던 그의 삶의 여집합이, 그 여백이 훨씬 크게 와닿았기 때문이다. 그가 애써 채워 온 삶이 아닌 그가 끝내 채우지 못했던 삶에서 나는 깊고 깊은 외로움을 읽을 수 있었다. 크눌프에게 동경이 아닌 강한 연민을 느꼈다. 

인간은 정착과 떠남의 무한반복을 살아간다. 정착은 안정을 선사하지만 그 안정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주 올무로 바뀌곤 한다. 떠남은 불안을 야기하지만 그 불안은 종종 삶을 환기시켜 다시 자유를 동경하게 만들곤 한다. 정착이 오래되면 늪이 되고, 떠남이 지속되면 방랑이 되기 마련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이 둘 사이를 오가며 살아가게 되는데, 이 작품 속 주인공 크눌프는 후자의 삶을 지속했다. 소설이라 그럴 수 있겠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나는 그런 생각을 잠시 내려놓기로 한다. 허구라도 방랑자의 삶으로부터 무언가를 얻어내려고 애쓰는 모습은 이 작품을 읽는 독자의 최소한의 예의이기도 할 것이다. 

말하자면 7년 전에 나는 크눌프를 가끔 만나곤 하는 그의 숱한 친구 중 하나였다. 크눌프의 삶 자체를 깊이 이해하고 공감하기보다 그의 삶이, 아니 나를 방문한 크눌프 덕분에 얻을 수 있는 유익이 더 중요했다. 크눌프를 만나면 사람들은 모두 그를 반겼는데, 그를 환대하는 일을 즐거움과 영광으로 여길 정도였다. 주객이 전도되는 듯한 묘한 상황이 벌어지곤 했던 것이다. 크눌프의 인품을 알 수 있는 부분이라 생각한다. 프직묳ㄱ나도 그랬던 것 같다. 방랑자 크눌프 덕분에 정체되어 있던 내 삶을 돌아볼 수 있었고, 잊고 있던 자유와 내적 성장에 다시 눈을 돌려 갈망할 수 있었다. 꺼져가던 가슴 깊숙한 곳의 그 무엇이 다시 깨어나 숨쉬기 시작한 기분을 느꼈다. 방랑자 크눌프가 왜 그렇게 사는지 잘 이해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삶을 존중하는 차원에서 나는 그를 좋아했다. 그는 내 삶의 활력소이자 영감의 공급처였던 것이다. 

이번에 크눌프를 다시 만난 나는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는 나이가 되었다. 인생을 조금 더 살아봐서 그런 걸까? 나는 크눌프를 반기던 친구의 관점이 아닌 크눌프에게 나 자신을 더 투영하게 되었다. 그의 방랑벽이 아름답게 보이지 않았다. 무엇보다 크눌프가 자유로워 보이지 않았다. 외롭고 쓸쓸한 모습으로 홀로 노쇠해 가는 한 남자로 보였다. 그의 마지막이 담긴 장면을 수차례 읽었다. 머릿속에 장면이 그려졌고, 그의 마지막이 마치 나의 마지막인 것처럼 몰입해서 읽었다. 아, 그는 그 마지막 순간에 과연 행복과 만족을 얻었을까?

책을 덮고 잠시 먹먹한 기분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궁금해졌다. 왜 나는 크눌프에게서 동질감을 느꼈을까? 한 때 부러워하기도 했던 그가 왜 이번엔 안아주고 싶은 인물로 보였을까? 

서 있는 곳이 달라지면 보이는 풍경도 다르다고 했다. 아마도 이 이유인 듯싶다. 내가 7년간 서 있는 장소가 달라진 것이다. 7년 전 나는 인생의 가장 낮은 점을 막 통과하고 있었다. 인생은 겹겹의 우물이지만, 그 시기에 나는 내 인생 가장 커다란 우물을 탈출하고 있었다. 가치관과 세계관이 달라졌고, 모든 게 달라 보였다. 타자의 힘으로 간신히 구원을 받고 낮아질 대로 낮아진 마음이 되어 구원받은 은혜와 감사에 충만했던 시기였다. 나는 누군가를 구원하는 자의 위치가 아닌 구원을 받는 자리에 나 자신을 놓아두었기에 자연스레 크눌프를 구원받는 자가 아닌 구원을 베푸는 자로 인식했던 것 같다. 초독 감상문에 내가 크눌프의 이미지를 산소, 천사, 참된 그리스도인이라고 묘사했던 것도 다 이런 이유였다. 

그때의 관점도 나름대로 의미가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그때보다 조금은 더 성장하고 성숙해진 나는 그때 나의 관점에서 약간의 과장과 약간의 편향성을 느낀다. 높은 마음보다 낮은 마음이 좋지만, 너무 낮은 마음은 객관성 상실의 단초가 되기도 한다. 내가 그랬던 것 같다. 그때의 나는 크눌프는 물론 나 자신조차 객관적으로 바라보지 못했던 것 같다. 왜 그땐 크눌프가 그렇게 커 보였던 걸까? 똑같은 나인데도 불구하고 지금의 나는 과거의 나를 이렇게 신기해한다. 

다시 만난 크눌프는 내 머릿속에서 꽤나 왜소하게 그려졌다. 그랬더니 헤세가 묘사한 그의 외모가 객관적으로 읽혔다. 깔끔하고 신사적인 모습으로 보였던 그가 결벽증을 보일 만큼 불필요한 자기 관리를 하는 자로 느껴졌다. 남들에게 친절하고 유쾌한 기분을 선사하는 그였지만, 스스로는 언제나 결국 혼자 남겨진 채 지독한 쓸쓸함을 맛보아야 했던, 조금 과장하자면 광대와도 같은, 자로 느껴졌다. 나는 그 모습으로부터 모순을 느꼈고 자유가 아닌 타성에 젖은 가식도 느꼈다. 말하자면 작품 속 현재의 크눌프는 과거의 방랑자 크눌프와 다른 사람이 되어버린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그는 더 이상 자유로운 영혼이 아니었던 것이다. 

젊은 때의 방랑은 이십 대의 방황과 비슷한 의미를 가지지 않을까 한다. 그러나 중년이 되어서도 그 방랑을 지속하고 있다면 그 방랑은 더 이상 아름다워 보이지 않는다고 말하고 싶다. 그 나이에 걸맞은 삶을 살아낸다는 것은 일종의 구속을 택하는 용기가 필요한 법이다. 젊을 때 쫓던 자유와는 다른, 구속 가운데 느낄 수 있는 자유를 택하고 누려야 나이가 바로 중년이지 않나 싶다. 인생의 후반전이 전반전의 연장전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인지라 나는 크눌프의 삶이 초지일관 방랑자로 남게 되어 아쉬운 마음이 컸나 보다. 그래서일까? 그가 십 대 시절 한 소녀에게서 받았던 상처가 애절하면서도 씁쓸하게 다가왔다. 그럴 수도 있었겠지만, 꼭 그래야 했던 걸까, 하는 질책이 내 안에서 자꾸만 고개를 쳐들었다. 

다시 짚지만, 이 작품 속 현재는 죽기 직전의 크눌프이다. 젊은 방랑자,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 크눌프가 아니라는 말이다. 왜일까? 왜 헤세는 중년의 방랑자 크눌프를 주인공으로 삼았을까? 무엇을 말하고 싶었던 것일까? 혹시, 내가 이번에 느낀 대로, 단순한 자유가 아닌 시기에 맞는 자유를 말하고 싶었던 건 아닐까? 후반전을 전반전의 연장전으로 만들고 있는 한 사람의 안타까운 현재를 그려 보이고 싶었던 건 아닐까? 그리고 그 삶이 크눌프의 경우엔 '떠남'으로 보였을 뿐, 어쩌면 '정착'만을 고집하며 크눌프와 정반대의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도 동일한 메시지를 적용할 수 있진 않을까? 작품 속에서 진정으로 행복과 만족에 이른 사람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적어도 오십이 다 된 내 눈에는 단 한 명도 보이지 않았다. 크눌프과 그의 친구들은 양극단에 치우친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 것이다. 아마도 이 상황은 지금 우리에게도 마찬가지가 아닐까?

정착과 떠남, 그 어느 하나에 매몰되지 않는 삶을 소망한다. 언제든 떠날 수 있을 정도의 가벼운 삶을 동경한다. 그러면서도 동시에 정착의 시기에는 거기에서만 누릴 수 있는 인생의 맛을 여유 있게 즐길 수 있길 바란다. 언제 다시 떠나야 할지, 언제 다시 정착해야 할지에 대한 답은 그 누구도 모를 것이다. 하지만 나는 그 불가능성의 가능성을 바라게 된다. 아니, 불가능하기 때문에 바라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 불가능 속에 지혜라는 열매가 숨어 있을 것이다. 나는 그 열매에 목이 마르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1951
6. 데미안: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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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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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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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터 카멘친트 헤르만 헤세 선집 10
헤르만 헤세 지음, 김화경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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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의 힘


헤르만 헤세 저, '페터 카멘친트'를 다시 읽고


이 작품을 처음 읽었을 땐 주인공 페터 카멘친트의 성장에 눈이 갔다. 깊은 산골에서 천연의 자연과 동화되어 투박하나 순수하게 자란 한 청년의 내면에 시가 깃들고, 그 시가 사람과 사랑, 삶과 죽음을 경험하며 조금씩 성숙해져 가는 과정에 주목했었다. 특히 글 쓰는 사람, 즉 작가로 성장해 가는 이야기여서 그랬는지 나는 페터로부터 동질감을 느끼기도 했다. 나도 작가가 되고 싶었다.


그로부터 7년이 지났다. 나의 외부세계는 물론 내부세계에도 많은 변화가 있었다. 글쓰기모임과 함께 이 작품을 다시 읽으면서 나는 자연의 힘에 더 큰 매력을 느꼈다. 반면, 페터의 성장 이야기는 예전보다 공감하기가 어려웠다. 나 역시 성장하고 성숙했다고 여겼건만, 실은 그저 허무하게 늙어버린 건 아닌지, 혹은 너무 현실적이 되어버려 헤세 특유의 낭만성에 무뎌져버린 건 아닌지 우려가 될 정도로 말이다. 아마도 재독 때의 나는 초독 때의 나와 달리 오십을 코앞에 두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고, 그동안 읽어온 수백 권이 넘는 책들의 영향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페터의 근간을 이루고, 페터를 옆에서 든든히 지켜주고, 페터를 성장시킨 자연만은 겹겹의 세월을 뚫고 한층 더 매력적이고 한층 더 응축된 존재로 나를 압도했다. 페터는 지나가도 자연은 오래 남은 것이다. 아마도 자연은 또 다른 페터를 잉태하고 있으리라. 


이 글에서는 역동적으로 살아있고, 또 그 어느 생명체보다 다양하고 다채로운 변화를 끊임없이 겪으면서도 언제나 변함없는 존재로 인식되며, 때론 천재지변의 수괴가 되어 삶을 송두리째 앗아가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겐 고향으로 느껴질 만큼 삶의 보금자리이자 안식처로 각인되곤 하는 자연의 신비한 힘에 대해 페터의 삶을 기반으로 해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헤세를 읽는다는 것은 자아의 발견, 성찰, 성장, 성숙, 그리고 분열과 합일 과정을 찬찬히 간접 경험하는 것과 같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또 다른 관점에서는 예술 (미술, 음악, 글쓰기)과 자연을 치열하게 탐구하고 찬양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예술은 헤세의 여러 작품 속에서 다뤄지는 주제를 대변하는 인물의 직업으로 자주 등장하는 반면, 자연은 주로 그런 주인공의 내면에 조용히 영향을 끼쳐 주인공에게 위로와 치유를 선사해 주는 고마운 존재로 등장하는데, 다른 작품들과 비교해서 헤세의 데뷔작이라고 알려진 ’페터 카멘친트‘에서 이는 더욱 도드라진다. 이 작품의 구조를 단순화시켜 볼 때, 페터의 성장과 성숙을 도모한 궁극적인 존재는 그의 단짝이었던 리하르트도, 그의 가슴을 울리며 사그라들었던 아그네스도, 그가 목숨을 걸고 절벽 위에 핀 알펜로제를 꺾어 바치려고 했던 첫사랑 기르타너도, 잔잔한 보트 위에서 사랑을 고백하려고 맘 속으로 시도했으나 할 수 없었던 알리에티도, 그가 그다음으로 사랑을 느꼈으나 다른 남자의 아내가 된 엘리자베트도, 그에게 사랑과 미덕을 가르쳐준 불구자 보피도, 심지어 그에게 지대한 영혼의 스승이었던 아시시의 성 프란체스코도 아니었다. 바로 자연이었다. 이 작품 속에서 말없이 숨어 움직이는 주인공이 자연이라 해도 그리 틀린 말은 아닐 것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페터가 태어나고 자란 작은 산골 마을 니미콘을 둘러싸고 있는 웅장한 산과 골짜기, 그리고 호수가 보이는 것만 같다. 젠알프 봉우리를 오르며 페터의 얼굴에 흐르는 구슬땀과 그것에 반사되어 반짝이는 뜨거운 햇살, 각양각색으로 모양을 바꾸며 페터 위를 계속해서 내려다보며 그를 감싸주는 구름, 페터 옆에 피어있는 수많은 이름 모를 꽃들과 나무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관통하는 푄 바람까지, 모두가 산과 목장에서 뛰어놀던 나의 어린 시절과 겹쳐지며 눈앞에 펼쳐진다. 


페터에게 자연은 친숙함과 온화함을 겸비한 안식이었다. 그 역시 니미콘을 이루고 평생 니미콘에 갇혀 사는 숙명을 지닌 여러 카멘친트 중 하나로 인생을 마무리할 수도 있었지만, 우연찮게 쓴 편지 한 통 덕분에 공부를 하게 되었고 끝내 작가의 길을 걷게 된다. 그 길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인생처럼 순탄하지 않았다. 페터만의 방식으로 우정과 사랑을 경험하고, 인간관계에서 상처도 받아보고, 생계 걱정도 해보면서 조금씩 성장을 해나가는 과중 중 삐걱거리는 순간들을 마주할 때마다 그는 늘 마음의 고향인 자연을 찾았다. 그러면 자연은 그의 내면으로 들어가 따뜻한 손길로 상처받은 영혼을 어루만져 주었으며 다시 일어설 수 있는 힘을 제공했다. 그때마다 페터는 회복을 경험했고 현실을 버티고 초월할 수 있었으며 조금씩 강인해져 갔다. 자연은 그에게 있어 가장 훌륭한 상담가이자 위로자요 치유자였던 것이다. 


자연은 페터에게 두려움과 경외감도 선사했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페터는 자신이 작디작고 유한한 인간이라는 존재임을 실감할 수밖에 없었고, 그래서 겸손할 수 있었다. 자연은 그가 무릎 꿇고 찬양할 수밖에 없는 초월적인 존재로 다가갔던 것 같다. 사실 작품 속에서 ‘자연’이라는 단어를 ‘신’으로 바꿔 읽어도 의미상으로는 같은 맥락의 이야기가 될 것이라는 게 내 지론이다. 실로 자연은 페터에게 두렵고 떨리는 존재, 그래서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신과 같은 이미지가 아니었나 싶다. 자신을 압도하면서 한없는 사랑으로 끌어안아주는 자연을 힘을 페터는 어릴 적부터 느껴왔으며 그 열매로 그는 시인이 되었던, 아니 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시인 페터 카멘친트는 자연의 두 가지 속성, 즉 친숙함/온화함 그리고 두려움/경외감으로 빚어진 열매였던 것이다. 


우리 주위에서도 아름다운 자연을 즐길 수 있지만, 우리가 흔히 즐기는 자연은 친숙함과 온화함의 속성만을 띠는 것 같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생각이다. 성장하려는 자는 자연의 두 번째 속성, 즉 두려움과 경외감을 불러일으키는 자연 앞에 설 필요가 있다고 나는 믿는다. 자신을 능히 압도하고 초월하는 존재 앞에 홀로 신을 벗고 맨발로 설 때만 느낄 수 있는 그 무엇이 있다고 믿는다. 한때는 안정적인 세계라 믿었으나 어느새 나를 가두고 있는 우물이 되어버린 나의 작은 지경을 넓히고 넘어서서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는 첩경은 바로 그 순간을 경험할 때 시작될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에서는 구체적으로 쓰여있지 않지만, 나는 페터 역시 그것을 경험했다고 믿는다. 그것은 곧 내 안에 숨겨진 나를 발견하고 성찰하여 보다 성숙한 나로 설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할 것이다. 시기가 다를 뿐 우리는 누구나 인생에서 언젠가는 그런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나는 여전히 목이 마르다. 나는 다시 압도되길 원하고 무릎 꿇길 원한다. 나를 넘어서고 더 큰 세상으로 나아가고 싶다. 시인이 되고 싶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1946

5. 크눌프:

6. 데미안:

7. 황야의 늑대: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9. 싯다르타:

10. 유리알 유희: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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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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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에게 뻬쩨르부르그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고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거의 다 섭렵한 이 시기에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뻬쩨르부르그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작품을 읽고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열린책들에서는 '뻬쩨르부르그'로 표기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이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21-1881년 당시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며, 1918년 수도가 200년 만에 다시 모스크바로 복귀하면서 뻬쩨르부르그는 제2의 도시로 밀려났다. 1924년 레닌의 사망을 기점으로 이름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고 한다. 뻬쩨르부르그는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도시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숨 쉬며 살았던 뻬쩨르부르그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도시였다. 러시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서구 유럽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남발하는 서구주의자들이 슬라브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했던 이유도 이러한 공간적 배경이 한몫을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소년 시절, 시베리아 유형 시절, 그리고 유럽에서 보낸 수년간을 제외하고 뻬쩨르부르그는 언제나 도스토옙스키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뻬쩨르부르그가 그의 모든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세계의 바탕, 즉 그의 사상, 그가 창조한 등장인물의 캐릭터, 그리고 작품 저변에 깔린 다소 음울한 분위기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소설이 아닌, 다시 말해 허구적 장치 없이 도스토옙스키의 실제 목소리가 가감 없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어 문장은 더 크고 깊게 울린다. 이 짧은 연대기는 네 차례에 걸쳐 날짜가 적힌 산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하나씩 짚어 보려 한다.


4월 27일
도스토옙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사람 하면, 잠옷에다가 침실용 모자를 쓰고 꼭 닫힌 방 안에서 두 시간마다 무슨 약인가를 한 스푼씩 떠서 먹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곤 했다고 쓴다. 어찌 이런 상상과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이 문장을 읽고는 "역시 도스토옙스키답다!"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가 아닌 뭔가 어둡고 어딘가 아픈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내가 수백 시간을 들여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의 이미지와도 묘하게 겹쳐졌다. 도스토옙스키도 직접 뻬쩨르부르그를 '흐리고, 음산하고, 화가 난 듯하고, 사악해진 듯하며, 축축하고, 습기가 많고, 창백하며, '살아 움직이는'과 반대되고, 하품을 하며 지루한 도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은 모두 정열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즐기기를 좋아한다고 쓴다. 뻬쩨르부르그나 그 도시 사람들은 뭔가 범상치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뜬금없이 '선한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역겨운 성격을 가진 신사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작품 속에서 등장시켰던 여러 인물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대표적으로 '약한 마음'의 바샤 숨꼬프를 들 수 있다. 그 작품을 읽었을 당시 나는 약한 마음이 어떻게 악한 마음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고찰했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도 바로 이 연대기에서 그 점을 정확히 꼬집는 것이다. 나로서는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가 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째선지 지금은 갑자기 가장 선한 사람, 정말 악한 행동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런 착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악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 누구도 그에게 얘기해 줄 수 없어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일없이 살아가다가…(후략)"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선한 마음, 혹은 착한 마음, 혹은 약한 마음은 본래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뉘앙스를 거세하고 해석해야 하는 듯하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 

"그 (앞에 언급한 선한 마음만을 가진 신사를 지칭한다)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갈수록 초췌해져 가고, 결국에 가서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끔찍하고 거북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순수했던 그의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그녀의 존재 자체를 독살시킨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에서 느껴지던, 뭔가 정신분열적이고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던, 그러나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느낌이 도스토옙스키가 가졌던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인상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 당시 뻬제르부르그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5월 11일
작가답게 도스토옙스키는 스토리텔러 혹은 창작가가 자본가보다 더 낫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 문장 역시 뻬쩨르부르그가 어떤 도시인지 감을 잡아야 공감할 수 있는 듯하다. 또한 그가 창조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온순함이랄까 순진함이랄까 하는, 때론 광대로도 표현되고, 때론 몽상가로도 표현되는, 딱히 어떤 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어느 작가의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히 도스토옙스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나 싶다. 다음 문장을 읽어 보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건 말할 여지도 없다. 뻬쩨르부르그 사람은 서둘러서 자신이 알고 있는 희귀한 소식을 얘기하려 할 때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달콤한 열정 같은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약해지면서 만족감에 떨린다. 그의 심장은 마치 장밋빛 버터 속에서 헤엄치는 듯하다. 평소 지병조차 말끔히 치유되거나 혹은 이 순간만큼은 자기의 적들에게조차 관대해진다. 그는 아주 온순해지고 위대해진다. 어째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런 장엄한 순간 뻬쩨르부르그 사람은 모든 장점과 소중함을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공평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연신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뻬쩨르부르그를 떠올려 본다. 그 지루한 일상에 구원의 손길은 아무래도 돈이 아닌 이야기여야 할 것 같은 강한 생각이 드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이야기꾼을 자처하고 시대적 사명을 띠고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조금은 과장된 듯하고 익살스럽기도 한 문장을 다음과 같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뻬쩨르부르그에서 하품은 감기나 치질, 열병과 같은 병으로, 지금까지도 아무런 치료 방법, 예를 들어 뻬쩨르부르그의 그 어떤 유명한 치료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뻬쩨르부르그는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고 하품을 하면서 일을 하고, 하품을 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하품을 하는 곳은 가면 무도회장과 오페라 극장이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로, 사건 사고의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그들의 사상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된 뻬쩨르부르그의 인상이 조금씩 더 와닿는다.


6월 1일
우리나라에서 초여름에 해당되는 6월의 첫날은 뻬제르부르그에서도 여름으로 막 넘어가는 시기인 듯하다. 이 연대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와 비교하여 뻬쩨르부르그의 특징을 이야기한다. 그는 뻬쩨르부르그를 다소 어둡게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이고 사회전반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면서 러시아의 중심 도시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뻬쩨르부르그를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스크바는 과거의 역사적인 그 무엇이 있는 곳인 반면, 뻬쩨르부르그는 어디를 가도 현재의 이 순간, 그리고 현재의 이상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 이곳에는 모든 것이 카오스인데,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캐리커쳐의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삶이요, 움직임이다.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의 머리요, 심장이다."

"도시의 미래는 아직도 이데아 속에 있다. 이데아란 뾰뜨르 1세의 것으로써 국민 모두가 그의 정책의 힘과 진가를 확인했다. 공업, 무역, 과학, 문학, 교육, 사회, 체제 정비 등 모든 부문에서 뻬쩨르부르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생부터가 서구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인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의 민족성까지도 변질되지 않았나 고찰했던 것 같다. 그는 러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상당했던 것 같다. 그가 슬라브주의자라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성이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유럽의 영향으로 쉽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재를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민족이야말로 온전하고 건강한 민족이며, 바로 그런 민족이야말로 현재를 진실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 민족이야말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으며, 생명력과 원칙 또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6월 15일
"날씨는 덥고 도시는 텅 비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별장에서 감흥에 젖어 자연을 만끽하고 있다."라고 쓴 걸 보면 6월 중순 뻬쩨르부르그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듯하다. 이 연대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독일인과 러시아인을 비교한다. 독일인은 꼼꼼히 분석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인 반면, 러시아인은 순진 무구하고 때론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형식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의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인을 비난하는 듯한 뉘앙스로 글을 써나가는데, 러시안인 중 애정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 극소수일 거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일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렇게 되면 활동을 갈망하고, 실천적인 삶을 갈망하고, 현실을 갈망하는, 그러나 약하고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그런 성격에서는 우리가 공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움트게 되고, 이런 사람은 결국 사람이 아닌 뭔가 중성적이고 이상한 주체, 즉 '몽상가'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여러분은 몽상가가 뭔지 아는가? 그것은 뻬쩨르부르그의 악몽이요, 구체화된 죄악으로서, 모든 끔찍한 비극과 모든 참사, 대단원, 그리고 발단과 결말을 가진 말 없고 비밀스러우며, 음산하고, 야만적인 비극인데, 이것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당신은 이따금 초점을 잃은 눈빛에 창백하고 피로가 누적된 표정의 주의가 산만한 사람, 항상 마치 무언가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뭔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일에 빠져 있으며, 이따금은 고통 속에 찌든 데다가 마치 힘든 노동으로 피로에 지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사람이 몽상가의 겉모습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서 관념적인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건 그의 작품 두세 편만 읽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끝도 없는 생각의 실타래를 통해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게 되는 인물들의 다른 이름은 몽상가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연대기에서 몽상가들의 출현 배경 역시 뻬쩨르부르그가 낳은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듯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도발적인, 그러나 아니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몽상가는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뻬쩨르부르그에서 태양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건강을 쉽게 잃게 되고, 병약하고 불가사의하게 침울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누구라도 그곳에 거주하게 되면 뻬쩨르부르그의 강력한 힘에 순응하여 몽상가가 되는 걸까? 뻬쩨르부르그라는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특징이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많은 인물들의 캐릭터에게 숨을 불어넣은 게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당시의 뻬쩨르부르그를 보고 느끼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는다 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2% 일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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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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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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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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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8.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by 윤새라):
49.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by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50. 죽음의 집에서 보다 (by 석영중, 손재은, 이선영, 김하은):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11.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1921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3.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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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할데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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늪에서 삶으로

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다시 읽고

7년 전 ‘로스할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인 화가 요한 페라구트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을 버리고 일을 선택한 그의 결단을 도무지 지지할 수 없었다.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니 7년 전 나의 관점이 다소 가벼웠을 뿐 아니라 다소 치우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를 가족과 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한 페라구트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가족 대신 일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을 진중하게 고려했을 때 그는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을 걸을 용기를 마침내 낸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요한 페라구트에게 과연 가족을 선택할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가?‘ 요컨대 초독 땐 여전히 선택권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재독 땐 이미 손을 떠났다고 보았던 것이다. 과연 그런가?

초독 때의 관점은 그 당시 여전히 빠져 있던 나의 개인적인 상황의 연장선에서 나온 해석이었던 것 같다. 당시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9살 아이였고, 엄마 없이 아빠인 나와 3년을 살아낸 후 다시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성공이라는 구름을 잡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나의 욕망은 이미 꺾인 상태였고, 그와 함께 나의 성공지향적인 가치관도 무너졌던 때였다. 반대급부로 나는 일과 성공이 아닌 일상과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고 그것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생을 걸고 지키겠노라고 다짐하던 차였다. 그랬던 내 눈에 자신의 일을 위해 가족과의 이별을 선포하는 요한 페라구트의 결연함이 좋아 보였을 리가 없었다. 내겐 그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일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성공지향적인,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떤 하나의 견고한 세상에 살다가 그 세상이 가진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다른 세상이 추구하는 이상을 쫓아 탈출한 자는 보통 용수철의 반동적인 힘에 의해 자신이 거했고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을 필요 이상의 증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거부하는 과정을 한동안 거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속했던 세상의 반대쪽으로 지나칠 정도로 치우쳤던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이 재독 후 요한 페라구트에 대한 나의 관점이 달라진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먼저 요한 페라구트와 그의 아내 사이에 난 갈등의 깊은 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은 상태인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가 좀 더 자상하려고 노력하거나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작품 속에서도 이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나는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았다. 요한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내에겐 그 행동이 가진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것 같았다. 요컨대 요한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아델레도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별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오해와 또 다른 오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것이 하나의 관점이 되어 상대방을 원래 알던 그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요한과 아델레는 바로 이 길 위에, 아니 더 이상 합칠 수 없을 만큼 갈라진 두 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에게 남은 건 이별, 즉 이혼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초독 땐 보이지 않았지만 재독하고 나서야 보였던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둘은 진작 이혼을 하지 않았던가. 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고 이름만 부부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가. 이 질문 역시 오래된 부부 관계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명확한 답을 가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적당한 존중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무시하는, 모순된 삶에 그들은 수년간 이미 친숙해 보였다. 그것이 물 흐르듯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다만, 요한의 오랜 친구 오토의 방문으로 인해 그 잘못 끼워 맞춘 옷이 실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오토의 방문이 가진 중요한 의미가 되겠다. 말하자면 객관성의 재발견, 혹은 비뚤어진 상태를 비뚤어진 상태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발화점이 되었던 것이다.

제1의 인생이 실패했다더라도 제2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미련과 자책 (아들 피에르는 가장 큰 상징이리라)으로부터 해방받아 용기를 내어 새 삶을 시작하기로 결단한 요한 페라구트를 내가 이젠 응원하게 된 이유다. 작품 속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냉철한 제삼자로 등장하는 요한의 오랜 친구 오토 역시 요한에게 다시 부부 사이를 예전처럼 돌이켜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나는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요한에겐 이미 더 이상 합칠 수 없는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연극하는 삶, 그 늪과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때였던 것이다. 

가끔 우리에겐 오토의 방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뒤틀린 영점을 가지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합리화한 채 기울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점검해 봐야겠다. 요한에게 오토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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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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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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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저,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을 아직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한 권만 읽고도 나는 그가 예사롭지 못한 필력가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다. 그의 전작을 기어이 읽어낼 계획이지만 최근에 그의 미공개 에세이집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과 브라질로 건너간 이후,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2년 동안 남긴 기록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짧지만 묵직한 기분이었다. 

완독을 하고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역시 비범한 필력가라는 확인, 다른 하나는 책장에 꽂힌 그의 작품을 서둘러 읽어보고 싶은 욕구였다. 원주로 오가는 짧은 여정에서 남긴 감상을 옮긴다.

1. 걱정 없이 사는 기술
지극히 평범하나 누구보다도 비범한 인물, 안톤에 대한 이야기다. 안톤은 직업도 없고 아무런 고정 수입이 없었으며 집도 없었다. 그는 자는 곳이 매일 달랐고, 그날그날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거리를 산책하며 세심한 눈으로 주위를 관찰한 뒤 필요한 곳에 선뜻, 당당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보수를 요구해서가 아니라 진정 그 사람을 돕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언제나 그의 도움을 감사히 받았고 그가 원하는 최소한의 사례를 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일종의 초월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화자는 안톤 같은 사람만 있으면 법도 필요 없을 거라고 말하며 이 특별한 존재에 대한 회상을 마무리한다. 

2.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
화자의 고등학생 시절의 회상기인 이 글에서는 메테르니히라는 인물로 인해 깨달았던 시기적절한 용기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는 금수저였으나 고상하고 사려 깊고 친절하여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사기죄로 체포되어 전국적으로 메테르니히를 포함한 가족의 신상공개가 되었다.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거대한 금융 사기였던 것이다. 몇 주간 보이지 않던 메테르니히가 학교로 돌아온 날 화자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메테르니히는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친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메테르니히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화자는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용기 없음을 반성하고 후회한다. 함부로 말했다간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지만, 메테르니히를 도울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린 이유를 화자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3. 나에게 돈이란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던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졌던 때를 상기하는 글이다. 화자는 놀라움과 함께 두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는 돈의 가치가 사라져도 삶을 지탱하려는 힘은 유지되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떨어진 돈 (물질)의 가치 덕분에 반대급부로 비물질적인 가치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화자의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을 압축한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4. 센강의 낚시꾼
프랑스혁명 시기,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처형되는 순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센강에서는 낚시꾼들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유유히 찌만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느낀 놀라움을 토로하며 화자는 그것으로 인해 얻은 인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센강의 낚시꾼들은 사회에 무관심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거나 사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은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자연주의적인 가치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말이다. 화자는 자신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임을 밝힌다. 너무나도 많은 사건 사고들이 터지는 시대에 개별적인 인간은 그 모든 일에 공감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일부 파괴되더라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연의 연속성에 화자는 큰 의미를 둔다. 센강의 낚시꾼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5. 영원한 교훈
‘생각하는 남자’ 조각상으로 유명한 로댕과의 짧은 만남으로부터 화자가 얻은 영원한 교훈 두 가지를 소개하는 글이다. 첫 번째 교훈은 위대한 사람은 거의 항상 매우 친절하다는 것, 그리고 과하게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관대하다는 것. 두 번째 교훈은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은 바로 집중이라는 것. 로댕을 찾아갔던 날, 로댕은 화자에게 작업실을 소개해주다가 화자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 시간 반 동안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의도치 않게 보여주었는데, 화자는 바로 그 시간 동안 책으로도 수업으로도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6.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를 위한 추도사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라는 작가의 죽음을 추도하는 글이지만 나는 츠바이크가 자신을 위한 추도사를 미리 쓴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기리는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와 그의 작품이 남긴 의의가 츠바이크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가진 의의라고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기 때문이다. 츠바이크 역시 조국을 국경 너머 널리 알리고, 자신의 세계문학과 조국을 연결하여 그 위상을 높인 사람으로서 조국에 봉사한 사람이었다.

7. 거대한 침묵
화자는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육체적 폭력을 넘어선, 스스로 가장 잔인한 영혼 훼손이라 정의하는, 침묵의 고문을 이 글에서 고발한다. 한 사람 (히틀러이리라)을 제외한 모두의 입을 틀어막은 일이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책이 불태워졌고, 학자들은 연구실에서 쫓겨났으며, 성직자들은 설교단에서, 배우들은 무대에서 쫓겨났다. 언론이 통제되었고, 창작으로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사람들은 야생동물처럼 사냥당했다. 모두 나치의 소행이었다. 츠바이크의 이 글을 읽으며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나치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고 섬뜩한 기분을 느낀다. 특히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힘을 가진 한 인간이 나머지 힘없는 인간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입을 틀어막는 행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도 두려운 일로 다가왔다. 

8. 이 어두운 시절에
유럽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했던 츠바이크의 연설문인 것 같은 글이다. 먼저 그는 나치의 국가 독일인으로서 독일어는 쓰는 작가들이 괴롭고도 비극적인 우선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사용하는 독일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말한다.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맞이하여 인간이 존엄이 땅에 떨어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간의 영혼에 자유가 필수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의 소중함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이 책의 제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결연히 외친다. 망명한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주요한 의무는 도덕의 힘과 무적의 정신을 흔들림 없이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츠바이크는 독일어 작가로서 공적인 책임감과 사명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꼈던 게 틀림없다.  

9. 하르트로트와 히틀러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라는 작가가 쓴 ‘묵시록의 네 기사’라는 책을 우연히 다시 접한 뒤 작중 인물인 독일 역사학 교수 율리우스 폰 하르트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그는 독일인의 정치적 열망을 히틀러에 앞서 먼저 선포한 작자였다. 25년 전에 읽었을 땐 그가 반미치광이 캐리터로 여겨졌으나,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에는 그가 그 어떤 인물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로 보였다고 한다. 하르트로트의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들이 히틀러를 통해 7,000만 독일인의 공식 신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우생학적인 독일인 우월주의는 히틀러에 와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히틀러의 광기는 하르트로트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츠바이크의 놀라움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상 아홉 편의 짧은 에세이를 읽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작가의 사명에 대한 숭고하고도 결연한 의지에 적잖은 감동을 느낀다. 시대를 대변하는 목소리, 그것이 갖는 고유한 의미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츠바이크가 타국으로 망명을 간 이후 자살로 생을 끝내기까지 얼마나 깊은 고뇌에 휩싸였을지 짐작이 되어 가슴이 아려오기도 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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