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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스할데 ㅣ 헤르만 헤세 선집 8
헤르만 헤세 지음, 윤순식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5월
평점 :
늪에서 삶으로
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다시 읽고
7년 전 ‘로스할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인 화가 요한 페라구트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을 버리고 일을 선택한 그의 결단을 도무지 지지할 수 없었다.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니 7년 전 나의 관점이 다소 가벼웠을 뿐 아니라 다소 치우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를 가족과 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한 페라구트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가족 대신 일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을 진중하게 고려했을 때 그는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을 걸을 용기를 마침내 낸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요한 페라구트에게 과연 가족을 선택할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가?‘ 요컨대 초독 땐 여전히 선택권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재독 땐 이미 손을 떠났다고 보았던 것이다. 과연 그런가?
초독 때의 관점은 그 당시 여전히 빠져 있던 나의 개인적인 상황의 연장선에서 나온 해석이었던 것 같다. 당시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9살 아이였고, 엄마 없이 아빠인 나와 3년을 살아낸 후 다시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성공이라는 구름을 잡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나의 욕망은 이미 꺾인 상태였고, 그와 함께 나의 성공지향적인 가치관도 무너졌던 때였다. 반대급부로 나는 일과 성공이 아닌 일상과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고 그것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생을 걸고 지키겠노라고 다짐하던 차였다. 그랬던 내 눈에 자신의 일을 위해 가족과의 이별을 선포하는 요한 페라구트의 결연함이 좋아 보였을 리가 없었다. 내겐 그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일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성공지향적인,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떤 하나의 견고한 세상에 살다가 그 세상이 가진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다른 세상이 추구하는 이상을 쫓아 탈출한 자는 보통 용수철의 반동적인 힘에 의해 자신이 거했고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을 필요 이상의 증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거부하는 과정을 한동안 거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속했던 세상의 반대쪽으로 지나칠 정도로 치우쳤던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이 재독 후 요한 페라구트에 대한 나의 관점이 달라진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먼저 요한 페라구트와 그의 아내 사이에 난 갈등의 깊은 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은 상태인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가 좀 더 자상하려고 노력하거나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작품 속에서도 이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나는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았다. 요한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내에겐 그 행동이 가진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것 같았다. 요컨대 요한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아델레도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별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오해와 또 다른 오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것이 하나의 관점이 되어 상대방을 원래 알던 그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요한과 아델레는 바로 이 길 위에, 아니 더 이상 합칠 수 없을 만큼 갈라진 두 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에게 남은 건 이별, 즉 이혼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초독 땐 보이지 않았지만 재독하고 나서야 보였던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둘은 진작 이혼을 하지 않았던가. 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고 이름만 부부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가. 이 질문 역시 오래된 부부 관계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명확한 답을 가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적당한 존중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무시하는, 모순된 삶에 그들은 수년간 이미 친숙해 보였다. 그것이 물 흐르듯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다만, 요한의 오랜 친구 오토의 방문으로 인해 그 잘못 끼워 맞춘 옷이 실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오토의 방문이 가진 중요한 의미가 되겠다. 말하자면 객관성의 재발견, 혹은 비뚤어진 상태를 비뚤어진 상태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발화점이 되었던 것이다.
제1의 인생이 실패했다더라도 제2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미련과 자책 (아들 피에르는 가장 큰 상징이리라)으로부터 해방받아 용기를 내어 새 삶을 시작하기로 결단한 요한 페라구트를 내가 이젠 응원하게 된 이유다. 작품 속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냉철한 제삼자로 등장하는 요한의 오랜 친구 오토 역시 요한에게 다시 부부 사이를 예전처럼 돌이켜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나는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요한에겐 이미 더 이상 합칠 수 없는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연극하는 삶, 그 늪과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때였던 것이다.
가끔 우리에겐 오토의 방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뒤틀린 영점을 가지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합리화한 채 기울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점검해 봐야겠다. 요한에게 오토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헤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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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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