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
마루야마 겐지 지음, 김난주 옮김 / 바다출판사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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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사와 소설가


마루야마 겐지 저,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를 읽고.


나는 철학도 신학도 하지 못하는 일을 감히 소설이 할 수 있다고 믿는다.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주로 이성에 의지하여 문자로 번역해내는 작업이 철학과 신학이라면, 그 문자들이 가지는 본질을 견지하면서도, 동시에 이성뿐만이 아닌 오감이 살아 숨 쉬는 삶이라는 다양하고 다채로운 콘텍스트에 그것들을 오롯이 녹여내어 우리가 보다 깊고 풍성하게 느끼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유일한 통로가 소설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이 어렵사리 번역해낸 텍스트가 더 이상 직접적이고 일차원적인 설명이나 물음의 목소리가 아닌 총천연색의 삶이라는 옷을 입음과 동시에 곧장 가려져버려, 텍스트에 의해 소외되었던 원래 ‘무’의 신비까지 되살려내는 작업이 나는 소설에서 이뤄진다고 생각한다. 본질이 텍스트로 환원되었다가 소설이라는 장치를 통해 다시 비환원화되는 것이다. 이는 개별적인 경험이 때론 보편적인 인간의 이성과 감성을 공명시켜, 어떻게 소설이 시공간을 초월하여 작가와 독자 사이에 신비로운 소통이 가능할 수 있는지 그 메커니즘을 설명해줄지도 모른다. 비록 허구일지라도 소설은 단지 ‘허구’라는 단어가 던져주는 경박함을 거뜬히 뛰어넘어 어느새 삶의 본질까지 침투하는 것이다. 이것이 내가 믿는 소설의 힘이자 내가 소설을 사랑하는 이유다.


에세이라는 이름으로 얼마나 많은 글들이 필요 이상으로 근사한 옷을 입고 있는지 모른다. 텍스트의 홍수 속에 살아가는 이 시대를 가득 메우고 있는 글은 점점 패스트푸드처럼 인스턴트한 짧고 쉽고 빠른 메시지로 급속도로 바뀌어가고 있다. 이제 사람들은 긴 글을 읽지 않는다. 아니, 읽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읽을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고 해야 할까. 어쨌거나 이러한 시대의 조류에 아무 생각 없이 휩쓸려 가버린다면 사람들의 긴 글을 읽고 이해하는 능력이 갈수록 퇴화할 것임은 자명한 사실이다. 연일 쏟아져 나오는 글들은 점점 휘발성이 강해져 읽어도 읽은 것 같지 않고, 때론 안 읽는 게 더 유익할 때도 많다. 중언부언과 동어반복은 기본인 데다, 진부하고 뻔한 말들을 어찌 그리 현란한 수사로 치장해대는지, 아무리 모든 사람이 자기 생각을 자유롭게 풀어낼 수 있다 해도, 마치 홍수 속에 마실 물이 없는 것처럼 요즘은 넘쳐나는 글들 가운데 정작 읽을 만한 글이 별로 없어 나는 종종 읽기 자체가 혐오스러워지기까지 한다. 나는 홍수를 원하지 않고 마실 물을 원하며, 공해를 원하지 않고 깨끗한 공기를 원한다. 글은 양보단 질이라고 생각하며, 글을 쓰는 모든 사람은 이 말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누구나 글을 쓸 수 있지만, 글을 쓰는 입장에 있다면 적어도 그 글을 혹시라도 읽을 사람들을 조금만 더 배려하면 좋지 않을까 생각한다. 


논문 같은 글이 어떤 면에선 가장 쉬울지도 모른다. 생각이 깊고 풍성한 토론이 오간 뒤라면 탄탄한 논리에 의지하여 일목요연하게 정리하여 쓰면 되기 때문이다. 물론 나 역시 논문을 쓰는 과학자라는 직업을 가지고 있기에 논문 쓰는 일이 실제론 결코 쉽지 않다는 사실을 누구보다도 잘 알지만, 소설이라는 분야의 창의성에 비한다면 금세 할 말을 잃고야 만다. 과학적으로 밝혀낸 사실들을 논리 정연하게 쓰는 일과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를 텍스트에 담되 주관성과 보편성의 옷을 입혀 사람들에게 이야기를 들려주는 일은 사실 비교조차 무의미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철학과 신학의 영역보다 나는 문학의 영역에 더 깊고 풍성한 진리가 녹아있다고 믿으며, 에세이나 논문 스타일의 글보다 소설이야말로 가장 어려우면서도 쉬워야 하는 글이라고 믿는다. 그리고 언젠가는 소설을 한 편 써야지 하는 마음이 늘 마음 한편에 남아있다. 한 세계를 창조할 수 있고, 그 세계를 이루는 모든 사람은 물론 시공간까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신적인 권한을 스스로 거머쥔 채 가장 근본적이고 보편적인 인간의 그 무언가를 담아낼 수 있는 유일한 글쓰기인 소설. 나는 이 형식을 빌려 언젠간 나의 사상과 신앙을 비롯하여 모든 사유와 감상을 한데 아우를 수 있는 작품을 쓰게 될 날을 꿈꾼다.


시 같은 소설, 읽고 나면 한 편의 그림 같은 소설, 내겐 여전히 아름다움으로 기억되는 ‘달에 울다’를 쓴 마루야마 겐지의 에세이, 이 책 ‘아직 오지 않은 소설가에게’는 제목에서 쉽게 알 수 있듯 저자가 미래의 소설가에게 하는 당부가 오롯이 담겨 있으며, ‘소설가’라는 직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치밀하면서도 꽤나 강한 어투로 풀어놓은 책이다. 


앞부분만 읽어도 소설과 소설가에 대한 마루야마 겐지의 철학을 쉽게 파악할 수 있다. 호흡이 빠르진 않아도 다분히 꼿꼿한 그의 자세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독자들은 아마도 소파에 아무렇게나 기대어 앉거나 누운 채 편한 마음을 가질 수는 없을 것이다. 왠지 정자세를 취해야 할 것 같은 기분이 들 수 있고, 왠지 가벼운 운동복이 아닌 정장을 차려입고 옷매무새를 가다듬어야 할 것만 같은 기분이 들 수도 있다. 글쓰기의 무사 같은 이미지의 마루야마 겐지는 적어도 내겐 그런 인상을 남겼다. 어쩌면 미래의 소설가가 되어 있을지도 모를 나에게 그는 책의 시작부터 끝까지 일관성 있게 나를 환기시켜줬고 내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소설과 소설가의 정체성에 대한 마음까지도 가다듬게 만들어 주었다. 


저자가 바라는 소설가의 가장 크고 중요한 자질은 ‘자립’이다. 그는 소설가는 금전적인 문제로부터, 성공과 인정으로부터, 권력으로부터, 그 이외에도 자립을 방해하는 것들이면 무엇이나 다, 심지어는 도시와 가족과 친구들로부터도 독립적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진정한 소설가란 백사장 근처, 파도가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얕은 바닷가가 아닌 망망대해의 깊은 물 위에서 홀로 고독을 숙명으로 받아들이고, 두려워하거나 좌절하지 말고 무사처럼 그 길을 담담히 걸어가야만 하는 사람이라고 강조한다. 지고하면서도 교만하지 않은 모습으로, 글쓰기로 인해 파생되는 것들에 연연하지 않고 글쓰기의 본질과 문학의 정수를 향해 몸과 마음을 건강하게 관리하며 순수한 마음으로 끝까지 정진하라고 요구한다. 


조금은 강한 어조와 단정적인 말투 때문에 이 책을 읽다가 도중에 내려놓는 독자들도 충분히 있으리라 생각한다. 그러나 끝까지 읽게 된다면, 아마도 나와 비슷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을까 싶다. 소설이 가진 신비하고도 강력한 힘을 제대로 사용하기 위해선, 즉 진정한 소설가가 되기 위해선 먼저 자기 자신과 솔직하게 정면으로 맞서서 소설에 대한 자신의 마음과 자세를 가다듬어야 한다고 말이다. 이는 어느 분야든 깊은 우물까지 파내려 가기 위해선 꼭 필요한 준비과정이기도 할 것이다. 소설 쓰는 일을 그저 돈벌이나 second job처럼 경히 여기면서 소설을 통해 문학이 아닌 결국 자신의 은밀한 사적 욕망이나 채우는 사람이 되지 않기를 간절히 바라는 저자의 마음도 충분히 느낄 수 있지 않을까 한다. 물론 저자가 한창이던 시대보다 이 시대는 훨씬 먹고사는 게 힘들어지기도 했고, 우린 전문가라는 단어조차 무색해지는 흐름 속에 살아가고 있다는 현실적인 면을 감안해서 저자의 바람을 이해해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를 통해 소설가와 무사의 이미지를 조용히 마음속에서 연결시켜본다. 조금 더 숙연한 마음을 갖게 된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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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송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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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속되는 삶


켄트 하루프 저, '플레인송'을 읽고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플레인송'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한 단선율로 작곡된 성가로, 모든 곡이 꾸밈없고 단순한 선율과 곡조를 특징으로 한다'라고 책 서두에 설명되어 있다. 몇 달 전 읽었던 작품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레인송' 역시 작가가 창조한 홀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주무대로 한다. 그곳은 허구의 공간이면서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갑질을 해대는 천박한 인간들이 있고, 사적인 앙갚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정의를 지키려는 불의하고 비열한 인간들도 있다. 또한 그곳에는 소소하고 빛바랜 일상이 작고 따뜻한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가진 건 별로 없지만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하는 공간. 정의와 불의가 공존하는 그곳. 홀트는 작품 속 인물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인간 독자들이 거주하는 시공간과 다름없는 것이다. 허구이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도 하고, 상상이지만 실제 상황보다 더 우리의 주목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현실에서 우리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비로소 뜨게 만드는 역할까지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다. 홀트의 힘은 곧 문학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첫인상이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독자들은 유독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진 채 홀트에 거주하는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거스리라는 남편과 엘라라는 아내, 그리고 그 부부의 두 아들 아이크와 보비. 거스리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아내와의 관계는 소원하다. 엘라는 어디가 아픈지 독자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만드는데, 아픈 곳이 몸이 아닌 마음이라는 데에 나처럼 결론을 내리게 될 즈음이면 신비감을 사라지고 저자 켄트 하루프의 부부생활 혹은 그가 바라본 부부들의 생활을 과장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엘라는 점점 거스리와 두 아들과 멀어지게 되는데, 엘라는 남편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은 힘이 없다는 것도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침대와 거실을 오가며 병자처럼 지낸다. 처음엔 같은 집 한 방 안에서, 다음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를 둔 어떤 집에 혼자서, 그리고 나중엔 언니가 혼자 사는 덴버의 아파트에서 엘라는 자기 안에 잠식된 삶을 살아간다. 이를 바라보는 거스리의 시선과 마음, 그리고 아직 아홉 살, 열 살밖에 되지 않아 아무것도 잘 모르는 두 아들의 시선과 마음의 변화를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대부분의 부부 생활이 이런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감성에 빠져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미묘한 불편함과 어쩔 수 없음의 강 위에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거스리와 엘라의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저자는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함께 일상을 공유하는 그 어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생길 수 있는 오해, 편견, 권태, 무기력함을 독자들이 느끼도록 의도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켄트 하루프는 과연 아내와 평안한 일상을 보냈을까.


고등학생 빅토리아 루비도는 어느 날 댄스파티에 참석한 이후 머저리 같은 한 남자와 눈이 맞아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된다.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가장 보호해주어야 할 존재가 가장 핍박하는 존재로 등극할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것일까. 빅토리아는 체념의 강을 넘어 학교 선생님인 매기 존스의 집을 향한다. 매기는 치매 초기에 놓인 듯한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빅토리아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기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병원에도 같이 가고 아기를 낳을지 말지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서도 버려진 빅토리아에게 매기의 존재는 구원의 문이 되지 않았을까. 비록 매기의 아버지의 정신 문제로 위협을 느낀 빅토리아는 얼마 살지 않고 맥퍼린 형제 집으로 맡겨지지만 말이다. 


맥퍼린 형제는 홀트에서도 17마일이나 떨어진 외딴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팔며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연애도 결혼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순한 농장 일을 하며 평생을 살고 있다. 매기는 빅토리아가 거주할 공간으로 맥퍼린 형제의 외딴집을 생각해 낸다. 빅토리아에게는 맥퍼린 형제의 심성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매기가 내린 신의 한 수였지 않았나 싶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맥퍼린 형제와 빅토리아의 동거는 빅토리아에게는 안전을 보장해 주었고, 맥퍼린 형제에게는 소가 아닌 누군가를 보살피고 걱정하고 챙겨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선사했던 것이다. 이 역시 일상에서 벌어지는 재미있고도 유쾌한, 있을 법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재하는 기묘한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불쑥 빅토리아 배 속에 든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가 찾아오고, 빅토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따라 덴버로 떠난다.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빅토리아를 맥퍼린 형제는 물론 매기까지도 불안에 떨며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수개월 이후 빅토리아는 다시 제 발로 홀트를 찾아와 맥퍼린 형제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이고 결혼하면 장차 남편이 될 남자였지만, 그의 삶은 본능적이고 즉흥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빅토리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빅토리아는 하나의 노리개이자 부속품일 뿐이었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결심을 하고 홀로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을 걸려 홀트로 돌아온다. 그녀는 덴버가 아닌 맥퍼린 형제의 집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고, 미혼모로 보낼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앞으로도 그가 다시 홀트를 찾아와 빅토리아를 힘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저 묵묵히 삶의 단편을 보여줄 뿐이다. 해피 엔딩 혹은 새드 엔딩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삶은 지속될 뿐이다. 이게 바로 저자 켄트 하루프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켄트 하루프의 고전문학의 냄새가 나는 문체, 특히 묘사와 절제된 문장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렇게 남아 이 작품의 텍스트가 되어 버린 문장들은 정제된 땀의 열매이지 않을까 싶다. 무관심한 듯 보이는 문체 속에서 나는 저자의 애정을 느꼈다. 고전문학 같은 현대문학을 지향하는 나에게 켄트 하루프의 책은 어디를 이사 가든 꼭 옆에 둘 선물이다.


2014년에 타개한 켄트 하루프의 세 작품을 읽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부다. 총 여섯 편을 썼다고 하는데, 남은 세 편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는 나머지 세 편도 궁금해졌다. 원서로 읽어도 되겠지만, 한국어 번역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3. 플레인송: https://rtmodel.tistory.com/1832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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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맨
필립 로스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09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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꺼져가는 불꽃 앞에서


필립 로스 저, ‘에브리맨’을 읽고.

“현실은 소설 같기도 하고 개연성이 없어도 되지만, 소설은 그러면 안 된다. 소설은 현실적이어야 한다.”

언젠가 누군가가 내게 해 준 말이다. 어렸던 난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이해하지 못했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나름대로 인생의 높은 점과 낮은 점을 모두 지나보고, 한 여자의 남편으로 15년 이상 살아도 보고, 한 아이의 아빠로서 10년 이상 아이의 성장과정을 옆에서 모두 지켜보기도 하며, 절망의 늪에 오래 빠져 있는 대신 소망의 가느다란 끈을 잡으려고 여전히 애쓰며 빠듯한 삶을 살아가는, 이제 나이 마흔 중반에 접어든 나는 그 말이 지니는 의미를 조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활활 타오르던 불꽃도 꺼져가는 즈음에서야 비로소 자신의 숙명을 깨닫게 되는 법이다. 허구임이 분명하지만, 때론 너무 현실 같은 소설, 나는 이 작품을 통해 한 인간의 인생에 대하여, 아니 모든 사람(에브리맨)의 인생에 대하여 조용히 곱씹어볼 수 있었다.

이렇게 현실적인, 지극히 현실적인 소설을 만날 때마다 나는 내 인생을 이루고 있는 모든 것들, 심지어 은밀하게 숨겨진 것들까지도 모두 발려져 공개된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때 느껴지는 수치심과 두려움이란 마치 고백성사를 해야 할 것만 같은 당혹스러운 심정까지도 들게 만들고, 실제 현실에선 미처 느끼지 못했던 인생의 무게를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침묵 이외에는 모든 게 경박스러워 보일 정도의 그 무게. 가끔 아이의 어린 시절 사진을 훑어보며 애잔한 감정에 빠지곤 할 때 문득 느껴지는 시간의 무게 또한 함께 찾아와 나를 짓누른다. 시간은 계속해서 앞으로 나아가지만, 방향이 세로여서 이전 것들은 사라지지 않고 켜켜이 쌓여가는 것이다. 그 인생과 시간이라는 깊은 우물로부터 물을 길어 마실 때면 언제나 나는 모든 개별적인 사람(에브리맨)에 대해 경건한 마음을 갖게 된다.

비록 물리적으로는 하룻밤이라는 아주 짧은 찰나에 불과했지만, 나는 이 책을 통해 한 사람의 인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다녀온 기분이다. 그래서 아주 긴 여행을 하고 온 것만 같은 기분은 물론 여독을 풀어야만 할 것 같은 기분까지 들 정도다 (한 인생을 하룻밤에 여행했으니 오죽하랴). 오후부터 시작해서 새벽이 되어서야 마지막 장에 다다를 수 있었고, 나는 너무 피로한 나머지 곤하게 잠이 들어버렸다. 그러나 주인공과는 달리 나는 다시 아침의 햇살을 받으며 하루를 시작할 수 있었다. 그는 영원한 잠들었지만, 나는 그저 매일 본능적으로 그것을 연습하는 것에 그치고는, 오히려 그 연습 때문에 재충전되어 오늘이라는 현재로 다시 돌아와 이렇게 글을 남긴다. 조금은 지혜로워진 것 같은 느낌으로 말이다.

이 책은 한 인생의 서사를 조각조각 보여주며 독자로 하여금 자기 자신을 포함한 보편적인 인생을 관조할 수 있는 조용한 자리로 내몬다. 그래서 이 책은 조금이라도 나이가 든 이후에 읽으면 좀 더 풍성하게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은 책이기도 하다. 또한 이 책은 새벽이나 아침에 읽기보다는 밤에 읽어야 하는 책이다. 치열했던 삶의 해가 저물어 가는 풍경을 놀랍도록 잘 절제된 목소리로 조곤조곤 들려주는 책이기 때문이다. 영원한 잠에 들기 전의 이야기를 하루 정도 잠들기 전에 들어 보는 것도 해볼 만한 경험이지 않을까 한다. 어차피 모든 사람의 인생은 한 번 불이 붙었다면 점점 꺼져가는 불씨와 같아서, 두텁기만 하던 초의 높이가 갈수록 낮아져 가고, 등잔 아래를 가득 채우던 기름도 점점 사라져 가는, 한낱 유한한 육체에 갇힌 신세이니까 말이다. 하루쯤 궁극의 끝에 선 사람처럼, 자신이 살아온 인생을 톺아보는 시간은 아마도 살면서 좀처럼 쉽게 가질 수 없는 소중한 성찰의 시간이 되어주리라 믿는다.

책의 삼분의 일 쯤을 읽다가 섬광처럼 어떤 느낌이 내 기억의 저장고를 강타했다. 어딘가 흩어져있을 그 조각이 무엇인지도 모른 채 나는 계속해서 그 조각을 찾으려는 시도와 함께 책을 읽어나갔다. 그 느낌. 그 애틋하면서도 쓰라린 느낌. 묵직하게 가슴 한복판을 치고 지나가, 휑한 심정으로 나를 덩그러니 외딴곳에 떨어뜨리는 그 느낌. 동시에, 지극히 평범해서, 인생을 살아본 사람이라면 누구나 본능적으로 공감할 수밖에 없는 그 느낌. 그렇다. 바로 작년 여름, 제임스 설터의 ‘가벼운 나날’을 한 달가량 힘들게 읽어내며 매일 같이 느끼던 바로 그 느낌이었다.

이 책 ‘에브리맨’으로 내게 다가온 필립 로스의 문체는 ‘가벼운 나날’로 만났던 제임스 설터의 문체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느낌이었다. 말하자면, 조금 더 남성적이었다. 그 이유는 아마도 ‘에브리맨’의 주인공이 한 남자에 맞춰져 있는 반면, ‘가벼운 나날’에서의 주인공은 한 부부, 그중에서도 아내 네드라에게 초점이 맞춰져 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렇게 서로 다른 문체에도 불구하고 제임스 설터와 필립 로스의 목소리는 마치 한 사람의 서로 다른 목소리인 것만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모두 비슷한 톤을 가지고 있었다. 흥분하여 격양되지도, 절망하여 허무해지지도 않고, 있는 그대로를 가감 없이, 때론 건조하게 느껴지기도 할 정도로 절제된 목소리로 일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시간의 우물은 갈수록 깊어지지만, 인생의 우물은 언젠간 바닥이 난다. 깊어지다가 바닥에 이르는 기나긴 여정이 우리네 인생이지 않을까. 나는 언제쯤 성숙하고 눈이 깊은 사람이 될 수 있을까. 나는 언제쯤 그 끝을 예감한 지혜로운 사람으로 현재의 삶을 살아낼 수 있을까. 그리고 나는 그 끝에 섰을 때 과연 어떤 모습을 하고 있을까.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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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라진 것들
앤드루 포터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4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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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수, 권태, 공허, 그리고 뜻밖의 위로


앤드루 포터 저, ‘사라진 것들’을 읽고


제임스 설터와 켄트 하루프를 섞어 놓은 느낌이랄까. 처음 읽는 앤드류 포터의 글은 덤덤한 일상을 기술하면서도 놓치기 쉬운 순간들을 세밀하게 포착하여 읽는 이로 하여금 깊은 한숨을 쉬게 하고 먹먹한 가슴이 되게 만든다. 인생의 절반을 이미 살아낸, 마흔이 넘은 중년 남성이 매 단편의 주인공인데, 주인공과 비슷한 연배라면 아마도 나처럼 책 속의 문장들만이 아닌 행간까지도 자연스레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싶다. 거기서 나는 설터의 '가벼운 나날'에서 맛보았던 반짝이는 권태와 공허를 느꼈고, 켄트 하루프의 '축복'에서 들을 수 있었던 일상의 소중함을 더욱 감사하며 소망하게 되었다. 


미국 생활을 11년간 해보아서 그런지 이 작품은 굉장히 미국적인 것 같았다. 남녀 관계가 다 그렇고 그렇지 않냐고, 사십 대 중년 남성이 겪는 권태감과 무력감은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는 게 아니냐고 할 수도 있겠지만, 아는 만큼 보이는 법. 남편과 아내의 일상적인 대화나, 일터에 다녀온 이후 가정에서 보내는 시간들은 한국에서는 좀처럼 공감할 수 없고 미국에서는 쉽게 공감할 수 있는 정서가 흐른다. 간단히 말하자면, 적어도 저녁이 있는 삶, 혹은 적어도 먹고살 만한 환경에 처한 사람만이 고민하고 갈등할 수 있는 여유(?)가 전제가 되어야 이 작품이 내뿜는 은은하면서도 자칫 중독될 수 있는, 고요한 허무감에 제대로 당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나이 들어간다는 것, 한때 그렇게나 열정적이었던 자신의 모습도 빛바랜 사진 한 장으로 추억된다는 것. 불쑥 찾아온 삶의 권태, 그 권태와 함께 조용히 스며드는 공허감. 그리고 이 모든 것들을 가만히 바라보며 한숨 짓기도 하고, 과거로 돌아가고 싶은 욕망에 때때로 휩싸이기도 하며, 다 소용없다는 무기력함으로 오지도 않은 미래마저도 회색빛으로 물들여 버리는 건 아마도 욕망하고, 사유하고, 기억하는 인간만이 가진 공통된 속성일 것이다. 


우울할 수 있지만 아련한 기억이 만들어내는 잔잔한 우수에 잠겨보고 싶은 독자라면 이 책을 권한다. 의외로 위로를 받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참고로 이 소설집은 짧은 단편이 15편 수록되어 있는데, 순서는 상관이 없고 모든 단편을 다 읽지 않아도 되니 아무 데나 펼치거나 끌리는 제목의 글만 읽어도 무방하다. 마흔이 넘었다면, 조용히 혼자 있는 밤에 이 책을 삼십 분이라도 읽어보면 내 말이 무슨 의미인지 단번에 알 것이다.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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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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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라리 골랴드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쁘로하르친 씨‘를 읽고


이 작품은 제목 그대로 담백하게 세묜 이바노비치 쁘로하르친이라는 한 남자의 삶의 잠시 보여주며 그의 숨겨진 정체를 밝히는 데 초점을 맞춘 단편소설이다. 단순할뿐더러 작품 구성이나 묘사와 서사 모두에서 내가 알고 사랑하는 도스토옙스키다운 면모를 찾아보기 힘들어 읽는 내내 어리둥절했다. 나름 반전이라고 주인공의 정체가 거지가 아닌 알부자였다는 결말 역시 내겐 놀랍기는커녕 진부하게 느껴졌다. 내가 지금까지 읽은 도스토옙스키 작품들과 비교할 때 눈에 띄게 미성숙한 글, 혹은 완성도가 떨어지는 작품이라는 나의 인상은 그리 과장되진 않을 것이다.


작품 속 주인공인 쁘로하르친은 아무나 상대하기 힘들 만큼 독특한 성격의 소유자이자 구두쇠이기도 하다. 세상과 담을 쌓고 지내는 사람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의 일상적인 거짓과 가식들을 유머로 받아쳐낼 마음의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그는 허름한 집 여주인의 방구석에 자리를 잡고 수십 년을 살았는데, 도무지 그가 하루 종일 뭐 하고 지내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조용한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그는 인생의 지혜를 깨우쳐 입이 무거운 것도 아니었다. 한 번 입을 열면 상스러운 말투와 제한된 단어를 사용하여 비난과 욕지거리를 해대곤 했다. 식사도 남들보다 절반 이하로만 했으며 의식주 모든 것에서 찌질할 만큼 돈을 쓰지 않았다. 사람들은 당연히 그가 돈이 없어서 그런 줄 알았다.


그가 죽고 나자 그의 침대 요 안에서 수천 루블의 돈이 발견되었다. 사람들은 입을 다물 수 없었다. 모두 가난한 사람들이라 갑작스러운 큰돈 앞에서 놀라기도 했겠지만, 아마도 그것보다는 왜 쁘로하르친은 죽기 전까지 그렇게나 궁상맞게 살았는가 하는 의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졌기 때문일 것이다. 그는 도대체 종 잡을 수 없던, 신비하면서도 혐오스럽고, 다가가기 쉬울 것 같았지만 어느 술주정뱅이 말고는 친한 사람이 아무도 없던, 게다가 순수하다고 하기에는 너무나도 무식했던, 마치 이 세상에 존재할 것 같지 않던, 묘한 인물이었던 것이다. 작품은 그의 죽음과 더불어 남게 된 수천 루블의 돈으로 끝이 나는데, 도스토옙스키가 무슨 의도를 가지고 이 작품을 썼는지조차 이런저런 해석을 해 보려 했지만 적어도 내가 가진 배경지식으로는 딱히 집히는 게 없었다.


작품 해설을 보니 이 단편소설은 도스토옙스키가 ‘분신’을 쓰고 면박을 당한 직후에 썼다고 한다. 도스토옙스키 스스로는 걸작이라고 믿었던 '분신'이 현실에서는 처참한 실패를 가져왔다는 사실을 나는 이미 잘 알고 있다. 그래서일까? 다급해진 도스토옙스키의 그 당시 심정이 이 작품에 그대로 담긴 것일까? 쁘로하르친을 창조해 냄으로써 골랴드낀의 실패를 극복하고자 했던 것일까? 그렇다면 어떤 시도를 했단 말인가? 이 작품은 그러한 선상에 있는 연습작 정도의 의미만을 지니는 것일까? 나는 알 수 없었다. 골랴드낀의 변주인 것 같은 느낌도 들긴 했지만 무언가 이가 빠진 듯한 느낌이 강했기 때문이다. 적어도 쁘로하르친은 골랴드낀처럼 정신분열증 환자는 아닌 듯했다. 하지만 인물의 매력도에 있어서 나는 차라리 골랴드낀에게 더 끌린다.


물론,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스토옙스키가 자주 사용한 인물의 배경 (이를테면, 가난한 하급관리, 미혼, 고립된 성격의 소유자 등등)이 유지되어 여전히 도스토옙스키 작품이라는 것은 변함이 없는 것 같다. 어쩌면 이 짧은 소설이 어떤 큰 장편의 일부라면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도 해보았다. 주인공이 어떤 사람인지 보여주기에는 터무니없이 분량이 부족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장편이라면 여러 정황 속에 주인공을 배치함으로써 좀 더 입체적으로 인물 상을 보여줄 수 있었을 것 같기 때문이다. 어쨌거나 이 단편 역시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를 시도하지 않는 한 굳이 읽을 필요가 없는 작품이라 할 수 있겠다.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을 읽으며 ‘도스토옙스키도 이렇게 작품을 엉성하게 쓸 때도 있었구나’하는 생각도 하게 되어 뜻밖의 위로를 받게 된다. 좋아하는 한 작가의 전작을 읽는 사람만이 느낄 수 있는 기쁨 중 하나일 것이다. 이 작품으로부터 유작인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이 쓰이기까지 약 30년의 시간이 더 필요한데, 나는 그 시간이 얼마나 도스토옙스키를 변화시켰는지 잘 아는 사람 중 하나이다. 그래서 그런지 이 실망마저도 하나의 작은 즐거움이 된다.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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