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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레인송
켄트 하루프 지음, 한기찬 옮김 / 문학동네 / 2022년 3월
평점 :
지속되는 삶
켄트 하루프 저, '플레인송'을 읽고
이 작품의 제목이기도 한 '플레인송'은 '초기 기독교 교회에서 사용한 단선율로 작곡된 성가로, 모든 곡이 꾸밈없고 단순한 선율과 곡조를 특징으로 한다'라고 책 서두에 설명되어 있다. 몇 달 전 읽었던 작품 '축복'에서와 마찬가지로 '플레인송' 역시 작가가 창조한 홀트라는 가상의 공간을 주무대로 한다. 그곳은 허구의 공간이면서도 우리가 사는 이 세상의 축소판이기도 하다. 그곳에는 갑질을 해대는 천박한 인간들이 있고, 사적인 앙갚음으로 자신의 권력과 부를 이용하여 자신만의 정의를 지키려는 불의하고 비열한 인간들도 있다. 또한 그곳에는 소소하고 빛바랜 일상이 작고 따뜻한 의미를 가지는 일종의 축복이라는 깨달음을 주는 사람들도 존재하고, 가진 건 별로 없지만 기꺼이 어려운 이웃을 돕는 아름다운 사랑을 나누는 사람들도 존재한다. 선과 악이 모두 존재하는 공간. 정의와 불의가 공존하는 그곳. 홀트는 작품 속 인물들만 사는 곳이 아니라 이 작품을 읽는 모든 인간 독자들이 거주하는 시공간과 다름없는 것이다. 허구이지만 현실보다 더 현실적이기도 하고, 상상이지만 실제 상황보다 더 우리의 주목을 이끌어낸다. 그래서 현실에서 우리도 모르게 감고 있던 눈을 비로소 뜨게 만드는 역할까지 충실하게 해내는 것이다. 홀트의 힘은 곧 문학의 힘으로 생각할 수 있으며 이것은 우리가 소설을 읽고 또 읽어야만 하는 이유라고 나는 믿는다.
제목에서 느낄 수 있는 첫인상이 작품 처음부터 끝까지 지속된다. 독자들은 유독 시간이 느리게 가는 듯한 착각 속에 빠진 채 홀트에 거주하는 등장인물들을 차례로 만나게 된다. 거스리라는 남편과 엘라라는 아내, 그리고 그 부부의 두 아들 아이크와 보비. 거스리는 고등학교 선생이고 아내와의 관계는 소원하다. 엘라는 어디가 아픈지 독자로 하여금 걱정을 하게 만드는데, 아픈 곳이 몸이 아닌 마음이라는 데에 나처럼 결론을 내리게 될 즈음이면 신비감을 사라지고 저자 켄트 하루프의 부부생활 혹은 그가 바라본 부부들의 생활을 과장 없이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게 된다. 엘라는 점점 거스리와 두 아들과 멀어지게 되는데, 엘라는 남편이 지긋지긋하다는 말을 하지만 그 말은 힘이 없다는 것도 독자들은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을 것이다. 그녀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온종일 침대와 거실을 오가며 병자처럼 지낸다. 처음엔 같은 집 한 방 안에서, 다음엔 차를 타고 가야 하는 거리를 둔 어떤 집에 혼자서, 그리고 나중엔 언니가 혼자 사는 덴버의 아파트에서 엘라는 자기 안에 잠식된 삶을 살아간다. 이를 바라보는 거스리의 시선과 마음, 그리고 아직 아홉 살, 열 살밖에 되지 않아 아무것도 잘 모르는 두 아들의 시선과 마음의 변화를 조용히 따라가다 보면 대부분의 부부 생활이 이런 게 아닌가 싶은 마음에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감성에 빠져 딱히 뭐라 할 수 없는 미묘한 불편함과 어쩔 수 없음의 강 위에 부유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게 된다. 거스리와 엘라의 문제가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밝히지는 않지만, 아마도 저자는 문제가 무엇이든 상관없이 함께 일상을 공유하는 그 어떤 남편과 아내 사이에도 생길 수 있는 오해, 편견, 권태, 무기력함을 독자들이 느끼도록 의도하지 않았나 싶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이어지는 생각. 켄트 하루프는 과연 아내와 평안한 일상을 보냈을까.
고등학생 빅토리아 루비도는 어느 날 댄스파티에 참석한 이후 머저리 같은 한 남자와 눈이 맞아 덜컥 임신까지 하게 된다. 빅토리아의 아버지는 이미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고, 어머니는 임신 사실을 알자마자 집에 들어오지 못하게 한다. 가장 보호해주어야 할 존재가 가장 핍박하는 존재로 등극할 때의 그 기분은 어떤 것일까. 빅토리아는 체념의 강을 넘어 학교 선생님인 매기 존스의 집을 향한다. 매기는 치매 초기에 놓인 듯한 아버지와 둘이 사는데 빅토리아의 사정을 안타까워하면서도 자기 집에서 살 수 있도록 도와주고 병원에도 같이 가고 아기를 낳을지 말지에 대한 현실적인 조언까지 마다하지 않는다. 부모에게서도 버려진 빅토리아에게 매기의 존재는 구원의 문이 되지 않았을까. 비록 매기의 아버지의 정신 문제로 위협을 느낀 빅토리아는 얼마 살지 않고 맥퍼린 형제 집으로 맡겨지지만 말이다.
맥퍼린 형제는 홀트에서도 17마일이나 떨어진 외딴 시골에서 소를 키우고 팔며 단 둘이 살고 있다. 어릴 때 부모를 여의고 다니던 학교까지 그만두고 연애도 결혼도 경험하지 못한 채 단순한 농장 일을 하며 평생을 살고 있다. 매기는 빅토리아가 거주할 공간으로 맥퍼린 형제의 외딴집을 생각해 낸다. 빅토리아에게는 맥퍼린 형제의 심성을 이미 잘 알고 있는 매기가 내린 신의 한 수였지 않았나 싶다. 결코 어울릴 것 같지 않은 맥퍼린 형제와 빅토리아의 동거는 빅토리아에게는 안전을 보장해 주었고, 맥퍼린 형제에게는 소가 아닌 누군가를 보살피고 걱정하고 챙겨줄 수 있는 마지막 기회를 선사했던 것이다. 이 역시 일상에서 벌어지는 재미있고도 유쾌한, 있을 법하지 않을 것 같지만 실재하는 기묘한 운명적인 만남이 아닐까.
불쑥 빅토리아 배 속에 든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가 찾아오고, 빅토리아는 본능적으로 그를 따라 덴버로 떠난다. 아무런 말도 없이 떠난 빅토리아를 맥퍼린 형제는 물론 매기까지도 불안에 떨며 걱정하게 된다. 그러나 수개월 이후 빅토리아는 다시 제 발로 홀트를 찾아와 맥퍼린 형제 집으로 다시 들어가게 된다. 아이의 생물학적 아빠이고 결혼하면 장차 남편이 될 남자였지만, 그의 삶은 본능적이고 즉흥적이었으며 무엇보다 빅토리아를 인격적으로 사랑하지 않았다. 그의 삶에 빅토리아는 하나의 노리개이자 부속품일 뿐이었던 것이다. 빅토리아는 결심을 하고 홀로 버스를 타고 하루 종일을 걸려 홀트로 돌아온다. 그녀는 덴버가 아닌 맥퍼린 형제의 집에서 안정감을 찾을 수 있었고, 미혼모로 보낼 자신의 미래를 불안해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 것 같았던 것이다. 앞으로도 그가 다시 홀트를 찾아와 빅토리아를 힘들게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저자는 그 이상에 대해서는 침묵으로 일관한다. 그저 묵묵히 삶의 단편을 보여줄 뿐이다. 해피 엔딩 혹은 새드 엔딩 같은 것은 없다. 그저 삶은 지속될 뿐이다. 이게 바로 저자 켄트 하루프의 메시지가 아닐까 생각해 본다.
켄트 하루프의 고전문학의 냄새가 나는 문체, 특히 묘사와 절제된 문장들에 나는 매료되었다. 덤덤하게 서술하고 있지만, 그렇게 남아 이 작품의 텍스트가 되어 버린 문장들은 정제된 땀의 열매이지 않을까 싶다. 무관심한 듯 보이는 문체 속에서 나는 저자의 애정을 느꼈다. 고전문학 같은 현대문학을 지향하는 나에게 켄트 하루프의 책은 어디를 이사 가든 꼭 옆에 둘 선물이다.
2014년에 타개한 켄트 하루프의 세 작품을 읽었다. 한국어로 번역된 전부다. 총 여섯 편을 썼다고 하는데, 남은 세 편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은 것이다. 이 작품을 다 읽고 나는 나머지 세 편도 궁금해졌다. 원서로 읽어도 되겠지만, 한국어 번역을 기다려보기로 한다.
* 켄트 하루프 읽기
1. 밤에 우리 영혼은: https://rtmodel.tistory.com/1478
2. 축복: https://rtmodel.tistory.com/1671
3. 플레인송: https://rtmodel.tistory.com/18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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