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 - 퇴근 후 15분, 편집자 아빠의 10년 독서 육아기
옥명호 지음 / 옐로브릭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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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는 가장 훌륭한 베드타임 스토리텔러

옥명호 저, '아빠가 책을 읽어줄 때 생기는 일들'을 읽고

아이가 태어나고 기어 다닐 무렵부터 아이와 놀아줄 땐 항상 책이 있었다. 그림이 전부이거나 글자라곤 단어 하나 정도 있는 책이었지만. 돌이 지나고 걸어 다니기 시작할 때에도 퇴근하면 씻고 아이를 목욕시킨 후 방바닥에 앉아 다리 사이에 품고 간단한 책을 읽어줬다. 그러면 쉬지 않고 움직이던 아이는 가만히 아빠의 품 안에 앉아 아빠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미국으로 건너가 아이가 네 살이 되었을 때부턴 본격적으로 매일 자기 전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기 시작했다. 그 후 3년간 떨어져 지내던 아내가 내 역할을 대신하게 되면서 그만두었는데 그때가 이미 ‘베드타임 스토리' 4년 차가 된 시기였다. 갑자기 영어를 사용한 이유는 내가 본격적으로 읽어준 이야기책이 모두 영어책이었기 때문이다. 미국 초창기 나는 아이에게 영어책을 읽어주면서 영어 실력을 늘릴 수 있었다. 발음도 악센트도 교정하면서 말이다. 

가장 많이 읽었던 책은 탐정소설이었다. 이제는 열여섯 살이 된 아들에게 어제 물었다. 아빠가 미국에서 책 많이 읽어줄 때 기억나? 가장 기억에 남는 책이 뭐였어? 그랬더니 역시나 ‘무슨무슨 미스터리‘ 등등을 얘기했다. 약 4년간 거의 매일 의식처럼 행하던 베드타임 스토리 시간은 나나 아들에게 깊이 뿌리내린 추억인 것이다. 어제 내게 대답하던 아들의 표정에서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사춘기 청소년이라 예전과 달리 말도 줄었고 별 이유 없이 반항도 하는 아들에게서 오랜만에 보는 아이의 얼굴이었다. 참 다행이라 생각했다. 

이 책은 아이가 중고등학생이 될 때까지 십 년이 넘도록 베드타임 스토리를 해준 한 아빠의 체험 이야기이자, 아빠가 아이에게 책 읽어주는 일의 의미와 중요성을 알리고, 이 거룩한 일에 동참하기를 바라는 권면을 담고 있다. 저자의 필력이 예사롭지 않은데 한 페이지를 읽어도 밀도 높은 양질의 글을 읽을 수 있다는 점도 이 책을 읽는 큰 매력 포인트일 것이다.

저자는 두 아이의 아빠로서 아이들이 중고등학생이 되기까지 거의 매일 밤 책을 읽어줬다고 한다. 베드타임 스토리텔러로서 베테랑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알다시피 무엇인가를 십 년간 지속한다는 건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해낸 사람은 내공이란 걸 습득하지 않을 없기에 이 책을 읽어 봐야 하는 이유는 이것으로도 충분하지 않나 싶다. 실제로 이 책엔 농축된 그의 노하우와 지혜가 녹아 있다. 아이에게 책을 읽어주고 싶은 아빠라면, 혹은 남편에게 권하고 싶은 엄마라면 꼭 읽어보길 강추한다.

저자는 여러 가지 스타일의 책을 시도해 보았는데 이야기책이 가장 괜찮았다고 말한다. 나 역시 앞에서 언급했다시피 탐정소설을 가장 많이 읽어주었지만, 그 외에도 많은 이야기책을, 그러니까 굳이 장르로 분류하자면 문학, 소설이 가장 아이와 함께 하기에 좋았다. 무엇인가가 궁금하고 더 읽어달라고 요구하는 상황을 아빠로서 단 한 번이라도 마주하게 된다면 이 말이 무슨 말인지 단박에 이해하리라 생각한다. 읽어주는 이나 듣는 이나 한 마음으로 그다음의 이야기가 어떻게 펼쳐질지 궁금해하는 상황. 문학적 상상력과 창의력이 샘솟듯 터져 나오는 그 내면의 변화는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예측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또한 아이의 나이에 따라 읽어주기에 적절한 책들의 리스트도 친절하게 제공한다. 나 같은 경우엔 아이와 함께 자주 공공도서관에 가서 영어책을 거의 닥치는 대로 빌려와 읽어주었지만, 베테랑의 엄선된 리스트는 한국에 거주하는 베드타임 스토리텔러로서 초보 아빠들에겐 유용한 가이드가 될 것이다.

아들이 이제 열여섯이다. 아이를 보면 언제나 미안하고 고맙다는 생각이 앞선다. 못났던 내가 성장하고 변화하는 시기를 그대로 옆에서 목격한 산 증인이 바로 아들이었다. 나름대로는 최선을 다했지만 충분히 사랑해주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면 마음이 무너지기도 한다. 그래도 나 만큼 아이와 함께 아빠로서 시간을 많이 보낸 경우가 또 있을까 싶은 마음에 약간은 뿌듯한 기분도 느낀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들에게 유일하게 잘해준 것 하나가 바로 책을 꾸준히 읽어주었다는 사실이다. 절대 손해 볼 일 없다. 하루에 십오 분에서 삼십 분 정도만 내면 된다. 그것의 수백 배 수천 배의 기쁨과 만족을 맛볼 수 있을 것이다. 아직 기회가 있는 아빠들은 오늘부터 당장 시작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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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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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식 -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
마르바 던 지음, 전의우 옮김 / IVP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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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인생에서 온전함을 경험하는 삶


마르바 던 저, '안식'을 읽고


한 해의 마지막 날 이 책을 손에 들고 생각에 잠겼다. 모든 것이 멈추는 듯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무엇인가를 해야 한다는 생각, 시간을 아껴서 하나라도 더 채워 넣어야 한다는 생각, 그리고 그 생각들로부터 오는 강박으로 인해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또 쫓기고 있었던 것 같다. 쫓는 자가 누구인지 모르는 상태에서 쫓기는 자는 자신이 쫓기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법이다. 그 사실을 알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일단 멈추는 것이다. 자기 객관화는 멈춘 다음에 온다. 쫓는 자의 정체를 파악하는 건 또 그다음이다. 멈추니 깨달아졌다. 아, 내게 필요한 건 안식이었구나.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을 살겠노라고 다짐을 하고 나름대로 그 모토에 부합하는 삶을 살려고 부단히 애쓰고는 있지만, 아직 초보 혹은 아마추어여서 그런지 무엇을 해도 잔뜩 힘이 들어가는 것 같다. '되어지는 상태' 이전에 뭔가를 자꾸 '하는 상태'에서 나는 여전히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이런 상태로는 그 어떤 선하고 아름다운 일을 해도 내겐 일이 될 뿐이다. 온전히 누리며 나누는 삶이 아니라 여전히 성취하고 채우려는 삶을 연장하고 있는 것이다. 일단 멈추는 것. 그리고 돌아보는 것. 나에게 필요한 건 안식이라는 것. 2024년 마지막 날에 이런 순간을 맞닥뜨려 감사하다는 생각이다. 


이 책은 안식일 지키기가 가져다주는 많은 결과를 소개한다. 안식일 지키기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잘 알다시피 십계명에 하나로 제시되어 있다. 그만큼 그리스도인의 정체성과 사명, 나아가 존재 자체와 깊은 연결이 될 만큼 중요한 사항이다. 그러나 이 시대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은 이 계명을 밥 먹듯이 무시하고 거절한다. 복음이 아닌 율법주의에 매이지 말아야 한다며, 십계명은 구약의 유물이라며, 시대착오적인 계명일 뿐이라며 나름대로의 합리적인 변명도 이미 시스템화되어 있는 듯하다. 그러나 이 책의 저자 마르바 던은 당당하게 말한다. 안식일 지키기는 우리를 율법주의에 매이게 하는 게 아니라 오히려 율법주의에서 자유케 한다고. 


물론, 저자도 강조하다시피, 안식일 지키기는 결코 법적인 강제가 아니다. 구약의 유대인들이 하던 방식을 나를 포함한 많은 개신교도들이 그대로 답습할 수는 없다. 그러나 시대와 문화와 상황에 맞춰, 나아가 각자 자신의 환경과 헌신에 맞게 서로 다른 방법으로 안식일을 지킬 수는 있다. 예수가 안식일에 병자를 치유하고 사람을 살렸던 것처럼, 우리도 안식일을 지키라는 하나님 말씀의 본질을 살리면서 우리의 상황에 맞춰 안식일을 지킬 수 있다는 말이다. 이 책은 안식일 지키기의 개념이 얼마나 실제적이고, 안식일을 지킬 때 얼마나 많은 유익을 얻을 수 있는지 분명하게 보여 준다. 저자는 이를 총 네 가지로 설명하는데, 곧 그침, 쉼, 받아들임, 향연이 그것이다. 아래 발췌문은 그것들의 요약이다. 


| 안식일 지키기의 그침은 우리가 하나님을 신뢰하지 못하고 스스로 자신의 미래를 창조하려고 한 여러 가지 방법을 뉘우치는 회개의 깊이를 더한다. 안식일 지키기의 쉼은 하나님의 완전한 은혜에 대한 우리의 믿음을 강하게 해 준다. 안식일 지키기의 받아들임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믿음의 진리를 취하여 우리의 가치관과 삶의 방식에 실제적으로 적용하도록 우리를 초대한다. 안식일의 향연은 우리의 종말론적 소망 의식을 고취시킨다. 하나님의 사랑을 현재에 경험하는 기쁨을 누리며 오는 기쁨을 미리 맛볼 수 있게 한다. |


기독교 내부의 안식일과 상관없이 모든 사람에게 나는 안식일 혹은 휴일이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엿새 일하고 하루 쉬는 패턴은 하루도 쉬지 않고 일하는 패턴보다 장기적인 관점에서 더 효율적이고 건강하며 지속 가능한 시스템이라고 생각한다. 그 하루를 어느 날로 정할지는 각자의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그렇게 멈추고 (그치고) 쉬고 돌아보는 시간은 전체 삶을 더 윤택하게 할 것이라는 생각이다. 여기에서 그리스도인이라면 한 걸음 더 나아가면 된다. 멈추고 쉬고 돌아보는 시간을 하나님의 임재를 오로지 경험하는 시간으로 받아들이고 누리는 것이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 창조주이자 구원자이신 하나님이 주인이라는 영적인 사실을 다시 각인시키며 모든 것을 점검하고 다시 하나님을 향한 방향키를 바로 잡는 것이다. 


그리고 이런 안식일은 엿새 일한 뒤 찾아오는 휴식일이라는 의미를 넘어서, 새로운 한 주를 위한 시작일의 의미를 가진다는 사실도 숙지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안식일을 일주일 중 가장 중요한 날로 삼는 일. 전체 삶의 속도를 맞추고 삶의 주인이 누구인지 기억하며 내가 누구인지, 지금, 여기에서 나는 무엇을 해야 하는지를 살펴보는 시간으로 안식일을 삼는 일. 그리고 나 혼자가 아니라 교회 공동체와 함께 사랑을 나누며 하나님 나라를 맛보는 시간으로 안식일을 삼는 일. 깨어 있지 않으면 언제나 쫓기는 삶을 살 수밖에 없는 이 시대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다시 숙지해야 할 일이라 믿는다. 이런 삶이야말로 세상에 속하지만 세상에 속하지 않는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서의 구별된 삶을 살아내는 초석이지 않을까 싶다. 깨달음을 넘어 구체적인 실천으로 넘어가 실제로 살아있는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모든 그리스도인이 되길 간절히 소망한다. 불투명하고 불완전한 삶을 살아내는 우리들도 안식일의 온전함을 매주 경험하게 되면 소망과 기쁨을 잃지 않을 수 있을 것이다. 


#IV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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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북꾸 에디션)
무라카미 하루키 지음, 홍은주 옮김 / 문학동네 / 202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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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상상력을 넘어서는 모호함

무라카미 하루키 저,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을 읽고

무려 761 페이지 장편소설을 8시간 정도에 독파할 수 있었던 건 순전히 하루키의 필력 때문일 것이다. 역시 하루키는 타고난 이야기꾼인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의 작품들을 수차례 시도만 했을 뿐 이 작품을 포함하여 지금껏 네 편밖에 읽지 않았는데 거기에 내 본심이 있을 것이다. 어쩌면 그가 너무 유명해서일지도 모르겠지만, 하루키 작품은 다분히 관념적이고 몽환적이며 이 작품의 핵심 메시지라고 생각되는 '현실과 비현실이 중구난방으로 섞여 있는 모호함'이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그의 작품을 끝내 읽지 않게 되는 나를 설명하기에 더 적절하지 않나 싶다. 여기서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단어는 '모호함'이다. '난해함'이 아닌 '모호함'. 이 벽돌책에 대한 나의 감상의 단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그의 작품을 네 편밖에 읽지 않은 독자의 성급한 일반화일지도 모르겠지만,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이 그의 모든 작품 중 가장 (혹은 탑 3 이내) 모호한 작품이지 않나 싶다. 집중해서 읽어냈음에도 여전히 이 작품이 무슨 말을 하고 싶은지, 어떻게 해석해야 하는지, 단순한 문학적 상상력이 허락하는 자유를 거뜬히 넘어서는 모호함이 내 안에 가득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참 이상한 노릇이다. 읽는 내내 지루함을 느낀 적이 단 한 번도 없었으며, 오히려 책 속으로 빨려 들어 술술 읽어냈으니 말이다. 아마도 이것이 하루키의 매력이지 않나 싶다. 

나름대로의 해석을 펼쳐보고 싶은 생각도 잠시 했으나 그러지 않기로 마음을 고쳐먹었다. 별 의미가 없을 것 같기도 하고, 무엇보다 작가인 하루키 역시 어떤 특정한 메시지를 전달하고자 쓴 작품 같다는 생각이 들지 않기 때문이다. 필력이 좋은 이야기꾼이 자신의 상상력을 계속해서 따라가며 텍스트로 받아 적은 이 작품은 장편소설이 아니라 어쩌면 한 편의 거대한 시라는 장르에 속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든다. 이성으로 냉철하게 이해하려고 애쓰기보다 흠뻑 빠져들어 느끼는 작품이 바로 이 소설의 본질이지 않을까.

그렇다면 나는 제대로 읽은 듯하다. 한 편의 꿈을 꾼 듯한 느낌이 아직 남아 있다. 몽상 속의 몽상, 관념 속의 관념, 꿈속의 꿈 이야기 같다는 생각이 강하다. 만약 냉철하게 이성적으로 이 작품을 분석하려고 시도를 한다면 정신분석학이라는 채널이 적당하지 않을까 한다. 하루키라는 이야기꾼의 오랜 세월에 걸친 집요한 상상력의 시작과 과정과 끝이 이 장편 속에 녹아있지 않나 싶기 때문이다. 물론 하루키 자신도 명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내면 깊숙한 곳에서 들려오는 마음 (혹은 잠재의식)의 이야기로 이 작품을 읽고 하루키라는 이야기꾼의 정신을 분석하는 시도가 얼마나 의미가 있을진 모르겠지만 말이다. 어쨌거나 나는 이 작품을 읽고 한 편의 꿈같은 이야기를 들은 것 같으면서도, 그것보다는 창작자인 하루키의 정신세계를 들여다본 기분이다. 

내가 이 작품을 '모호함'으로 압축하는 중요한 이유는 작품 속에서 사용되는 몇 가지 단어의 의미의 모호성 때문이다. 도시, 벽, 그림자, 시간, 사랑, 믿음, 의식과 무의식, 현실과 비현실 등, 익숙한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내가 아는 의미와 다른 의미를 지니기 때문에 생겨나는 불가항력적인 모호함이 나에겐 이 작품을 읽으며 느낀 지배적인 인상이었다. 또한, 이 단어들을 한 번에 꿰는 어떤 일관된 논리랄까 관점이랄까 하는 것도 모호하여 각 단어들이 만들어내는 이미지와 작은 메시지들이 파편적으로 산재되어 있다는 느낌이 강했다. 하나의 파편적인 이야기를 읽을 땐 뭔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가도 그것들을 한데 모아 하나의 이야기로 종합하려는 시도에서 여러 번 막히고 말았다. 이것은 내가 이 작품을 읽고 어떤 하나의 큰 메시지가 잡히지 않는다고 말한 근본적인 이유이기도 하고 '역시 하루키는 하루키구나'라는 생각을 공고히 하게 된 이유이기도 하다. 

관념과 몽상으로도 인간의 본성이나 심리를 해부하여 드러내는 도스토옙스키를 떠올렸다. '하루키는 역시 하루키'라는 말속엔 뼈가 있다. 그가 뛰어난 이야기꾼인 것은 인정할 수 있지만,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라는 결론에 나는 결국 다다르게 되기 때문이다. 하루키만의 매력이 분명히 있지만, 내겐 뭔가 부족하다. 아쉽다는 마음이 지배적이다. 앞으로 내가 하루키를 더 읽을진 잘 모르겠다.

* 하루키 읽기
1. 노르웨이의 숲: https://rtmodel.tistory.com/655
2.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 https://rtmodel.tistory.com/820
3. 양을 쫓는 모험: https://rtmodel.tistory.com/1211
4. 도시와 그 불확실한 벽: https://rtmodel.tistory.com/1913

#문학동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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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5
헤르만 헤세 지음, 황종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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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합일, 개성과 창조성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다시 읽고 

우리 안에는 어두움도 밝음도 있다. 우리는 고통도 기쁨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부정적인 자아와 긍정적인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일까? 부정적인 자아는 어두움과 고통에, 긍정적인 자아는 밝음과 기쁨에 각각 반응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하나의 자아가 양극단의 자극에 모두 반응하는 것일까? 우리 안의 자아는 하나인 걸까, 둘 이상인 걸까? 지금 내가 인지하고 느끼고 있는 나는 어떤 나일까? 헤세를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헤세의 초기작 중 하나이자 한국 독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게르트루트'를 7년 만에 다시 읽으며 그때와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아의 분열과 합일을 나는 다시 숙고했고, 그것과 예술과의 관계를 작품 속 주인공을 포함한 여러 음악인들을 통해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초독 때 놓쳤던, 아니 그땐 잡아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 글에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작품 속 화자인 쿤, 그리고 오페라 가수 무오트는 각각 열등감과 오만함의 상징이다. 열등감과 오만함은 정반대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근원은 같다. 바로 교만이자 자기애다. 자칫 열등감이 어떻게 교만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함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잘난 척하는 오만한 자만이 자기중심적이지는 않다.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은 모두 자존감이 현저히 낮아진 상태에서 비롯된다. 여기서도 어떻게 오만함을 낮은 자존감과 연결시키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존감과 자존심을 분별하지 못한 처사다. 오만한 자는 자존심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그 이유는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이 낮은 자는 자존심을 부려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애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만하다고 말한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가진 척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진짜 가진 사람은 가진 척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허세를 떨지 않을뿐더러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교만은 사람의 천성과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로 발현되기 쉽다. 즉, 교만이라는 뿌리는 열등감과 오만함이라는 두 열매를 맺는다. 

재독을 하면서 이 작품에서 다뤄진 음악이라는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땐 그저 헤세가 예술에 조예가 깊고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겨 묻지도 않았지만, 이번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왜 음악이어야 했을까?'였다. 이 질문을 달리 하면 다음과 같다. '열등감과 오만함이라는 양극의 감정을 다루며 자아의 분열과 합일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양극에 위치한 쿤과 무오트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매개체가 음악이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음악이 아니었다면 서로가 서로를 가장 혐오하거나 거리끼는 스타일의 사람으로 여기며 평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헤세는 왜 이 둘을 굳이 친구로 만들었으며, 그 매개체로 음악을 선정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작품 초반에 소개되는, 쿤이 홀로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손꼽히는 어느 마을 여관에서 가을까지 몇 주간을 묵는 동안 경험했던 사건에서 찾는다.

쿤은 이미 썰매 사고로 인해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된 상태였다. 바닥까지 내려앉을 수 있었던 자존감을 다행히 어느 정도 회복하여 괴로워하지 않고 체념과 유머로 견뎌 내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전에 없던 자신의 결함을 기꺼이 끌어안고 살아갈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그 고지대에서 보낸 몇 주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라고 고백할 정도로 쿤은 홀로 떠난 여행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체험하게 된다. 나는 그 가치가 바로 음악이 가지고 있는 본질, 그리고 음악이 만들어낸 합일의 열매인 창조성이라고 보았다. 쿤은 그곳에서 첫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는데, 그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겪은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낮의 찬란함과 밤의 비참함 모두를 들었고, 그 목소리에 마음 상하지 않고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며, 향락과 고통을 분간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똑같이 느껴졌으며, 둘 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했다고 적는다. 또한, 그가 달콤함이나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동안 창조력은 초월적인 곳에서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빛과 어둠은 한 형제이고 고뇌와 평화는 한 위대한 음악의 박자인 동시에 힘이자 일부임을 깨달았다고도 쓴다. 양극단의 가치들이 한데 모여 하나가 되는 상태, 즉 합일을 그의 내면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창조성이 발현되어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쿤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합일이 창조성으로 발현되어 작곡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바로 음악이라는 영역 안에서 말이다. 

그 이후 쿤에게는 어릴 적부터 느꼈던 뜻 모를 자신감이랄까 운명이랄까 하는 강한 자기 계시를 확신하게 되고 음악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쿤은 음악에서 만큼은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경험이 없었다면 무오트와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무오트와 만나게 된 동기가 가시적으로는 그가 쓴 가곡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쿤에게는 무오트의 인정이 단순히 자신의 곡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불구가 되었지만 그 불구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불구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초월적인 합일을 경험한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게 되는 시작이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오만한 무오트의 무례함도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음악은 실로 쿤에게 자신의 결함도 초월할 수 있을뿐더러 정반대의 세계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게르트루트 앞에서는 그의 열등감이 도져 끝내 사랑을 잡을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되지만, 어쨌거나 쿤은 완벽하진 않지만 성장을 이뤄냈던 거라 해석할 수 있겠다. 

비록 쿤이 오만한 무오트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그 무례한 무오트만이 가진 강점, 즉 아이처럼 순수한 음악에의 동경, 열망, 그리고 현재를 누릴 줄 아는 능력을 알았지만, 그의 모든 점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쿤을 사로잡은 음악이 쿤에게서 사람을 보는 객관성까지 빼앗지는 못했던 것이다. 쿤이 사랑했으나 자신의 결함 때문에 용기 내지 못했던 게르트루트를 무오트에게 빼앗긴 후 무오트를 향한 그의 감정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꽤 맘에 들었는데, 아무리 어떤 것을 빠지게 될 정도로 사랑하게 되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주관적인 판단에 쿤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는 인물이 쿤 밖에 없다는 내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쿤은 자신의 결함을 극복해 냈고,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감정으로부터도 끝내 이겨냈으며, 객관성을 유지하여 결말에서는 미망인이 되어버린 게르트루트마저도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작가 헤세는 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자아의 성장과 성숙, 분열과 합일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이외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쿤이 절친 둘을 비교하는 부분이었다. 타이저와 무오트의 대비는 눈여겨볼 만하고 생각한다. 타이저는 놀랄 만큼 음악에 밝았다. 그는 예술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아도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명인도 아니었고 작곡도 하지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만족스럽게 연주했고 그 기법에 통달하고 있다는 걸 내심 기뻐했다. 어느 지휘자 못지않게 전주곡이라는 전주곡은 다 꿰고 있었으며, 정교하거나 화려한 대목이 나오거나, 어떤 악기가 아름답고 독창적으로 찬란히 울리는 대목이 나오면, 환하게 웃으며 극장의 어느 누구보다 더 즐겼다. 타이저는 행복했다.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에 예민하게 넋을 잃고 기쁨을 느꼈지만, 예술이 그에게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욕망하지 않았다. 예술 밖에서는 훨씬 쉽게 만족을 느꼈다. 친구 몇 사람이 있고, 때때로 좋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됐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기를 좋아했으므로 휴일에는 야외로 소풍만 갈 수 있으면 충분했다. 신지학의 가르침이 믿을 만하다면, 이 사내야말로 거의 완벽한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본성이 더없이 착했고, 격정이나 불만은 그의 마음속에 들어서지 못했다. 

인생의 후반전을 살고 있어서 그런지 헤세가 묘사한 타이저 같은 사람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수록 타이저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쿤은 나와 다른 눈으로 타이저를 바라보는 것 같다. 쿤은 타이저와 같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쿤이 연이어한 말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나 아닌 어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았으며, 가끔 너무 꽉 낀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나 자신의 껍질을 벗고 싶지 않았다'라고 쓴다. 그는 타이저의 장점을 잘 파악했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그 개성을 따라 고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의미심장하고 결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고유한 개성이 타이저의 장점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 행위를 배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타이저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어느 정도 노력하는 건 아름다운 시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한다. 내게 타이저는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이루어진 양 갈래의 늪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의 쿤에게는 타이저의 모습이 그저 두루뭉술하고 아무런 개성이 없이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예상컨대 아마 쿤도 나이가 사십 대가 되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타이저가 쿤의 미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며,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나의 개성을 찾았다면, 나의 목소리를 찾았다면, 이젠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후반전은 그렇게 살아가리라.

* 헤세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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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세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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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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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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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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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포처럼 나이 들 수 있다면 - 탄생, 노화, 다양성을 이해하는 발생생물학 수업
김영웅 지음 / 생각의힘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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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양과학과 통찰 뿐 아니라 연말연시 가슴 따뜻해지는 책이예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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