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르트루트 헤르만 헤세 선집 5
헤르만 헤세 지음, 황종민 옮김 / 현대문학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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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열과 합일, 개성과 창조성

헤르만 헤세 저, ‘게르트루트’를 다시 읽고 

우리 안에는 어두움도 밝음도 있다. 우리는 고통도 기쁨도 느낀다. 그렇다면 우리 안에는 부정적인 자아와 긍정적인 자아가 따로 있는 것일까? 부정적인 자아는 어두움과 고통에, 긍정적인 자아는 밝음과 기쁨에 각각 반응하는 것일까? 그게 아니면, 하나의 자아가 양극단의 자극에 모두 반응하는 것일까? 우리 안의 자아는 하나인 걸까, 둘 이상인 걸까? 지금 내가 인지하고 느끼고 있는 나는 어떤 나일까? 헤세를 읽을 때마다 하게 되는 질문들이다. 헤세의 초기작 중 하나이자 한국 독자에게는 잘 알려지지 않은 '게르트루트'를 7년 만에 다시 읽으며 그때와 동일한 질문을 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자아의 분열과 합일을 나는 다시 숙고했고, 그것과 예술과의 관계를 작품 속 주인공을 포함한 여러 음악인들을 통해 관찰할 수 있었다. 또한 초독 때 놓쳤던, 아니 그땐 잡아낼 수 없었던 부분에 대해서도 이 글에서 조금 풀어볼까 한다. 

작품 속 화자인 쿤, 그리고 오페라 가수 무오트는 각각 열등감과 오만함의 상징이다. 열등감과 오만함은 정반대의 감정처럼 보이지만 근원은 같다. 바로 교만이자 자기애다. 자칫 열등감이 어떻게 교만이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자기중심적인 세계에서 벗어나지 못한 미성숙함을 그대로 대변한다는 점을 상기하면 이해할 수 있으리라 생각한다. 잘난 척하는 오만한 자만이 자기중심적이지는 않다. 또한 열등감과 오만함은 모두 자존감이 현저히 낮아진 상태에서 비롯된다. 여기서도 어떻게 오만함을 낮은 자존감과 연결시키냐고 물을 수도 있겠지만, 그건 자존감과 자존심을 분별하지 못한 처사다. 오만한 자는 자존심을 부리는 것일 뿐이다. 그 이유는 자존감이 낮기 때문이다. 즉, 자존감이 낮은 자는 자존심을 부려 자신을 크게 보이려고 애쓴다. 우리는 그런 사람을 오만하다고 말한다. 가지지 못한 자가 가진 것처럼 보이기 위해 가진 척하는 모습을 떠올리면 이해가 쉬울 것이다. 진짜 가진 사람은 가진 척하지 않으며 그럴 필요를 느끼지 못한다. 그리고 자존감이 높은 사람은 허세를 떨지 않을뿐더러 오만방자한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그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정리하자면, 교만은 사람의 천성과 상황에 따라 두 가지 중 하나로 발현되기 쉽다. 즉, 교만이라는 뿌리는 열등감과 오만함이라는 두 열매를 맺는다. 

재독을 하면서 이 작품에서 다뤄진 음악이라는 존재와 그 의미에 대해서 생각해 볼 수 있었다. 처음 읽을 땐 그저 헤세가 예술에 조예가 깊고 음악을 사랑했기 때문이라고 여겨 묻지도 않았지만, 이번에 내 머릿속에 떠오른 질문은 '왜 음악이어야 했을까?'였다. 이 질문을 달리 하면 다음과 같다. '열등감과 오만함이라는 양극의 감정을 다루며 자아의 분열과 합일을 보여주는 작품에서 음악의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나는 양극에 위치한 쿤과 무오트가 친구가 될 수 있었던 유일한 매개체가 음악이었다는 점을 중요하게 생각한다. 음악이 아니었다면 과연 이 두 사람이 친구가 될 수 있었을까? 음악이 아니었다면 서로가 서로를 가장 혐오하거나 거리끼는 스타일의 사람으로 여기며 평생을 살아가지 않았을까? 그렇다면 헤세는 왜 이 둘을 굳이 친구로 만들었으며, 그 매개체로 음악을 선정했을까? 나는 그 이유를 작품 초반에 소개되는, 쿤이 홀로 스위스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다고 손꼽히는 어느 마을 여관에서 가을까지 몇 주간을 묵는 동안 경험했던 사건에서 찾는다.

쿤은 이미 썰매 사고로 인해 다리를 저는 불구자가 된 상태였다. 바닥까지 내려앉을 수 있었던 자존감을 다행히 어느 정도 회복하여 괴로워하지 않고 체념과 유머로 견뎌 내는 습관을 들이고 있는 상태였다. 전에 없던 자신의 결함을 기꺼이 끌어안고 살아갈 준비가 되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그 고지대에서 보낸 몇 주를 인생에서 가장 아름다운 한때라고 고백할 정도로 쿤은 홀로 떠난 여행에서 소중한 가치를 발견하고 체험하게 된다. 나는 그 가치가 바로 음악이 가지고 있는 본질, 그리고 음악이 만들어낸 합일의 열매인 창조성이라고 보았다. 쿤은 그곳에서 첫 소나타를 작곡하게 되는데, 그가 어떤 내면의 변화를 겪은 결과로 나타났다. 그는 낮의 찬란함과 밤의 비참함 모두를 들었고, 그 목소리에 마음 상하지 않고 귀 기울일 수 있었으며, 향락과 고통을 분간하지 않게 되었고, 이것이나 저것이나 다 똑같이 느껴졌으며, 둘 다 고통스럽기도 하고 감미롭기도 했다고 적는다. 또한, 그가 달콤함이나 괴로움을 느끼고 있는 동안 창조력은 초월적인 곳에서 조용히 아래를 내려다보며, 빛과 어둠은 한 형제이고 고뇌와 평화는 한 위대한 음악의 박자인 동시에 힘이자 일부임을 깨달았다고도 쓴다. 양극단의 가치들이 한데 모여 하나가 되는 상태, 즉 합일을 그의 내면에서 경험했던 것이다.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그의 내면 깊숙이 자리 잡고 있던 창조성이 발현되어 작곡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쿤의 내면세계에서 일어난 합일이 창조성으로 발현되어 작곡이라는 형태로 가시화되었던 것이다. 바로 음악이라는 영역 안에서 말이다. 

그 이후 쿤에게는 어릴 적부터 느꼈던 뜻 모를 자신감이랄까 운명이랄까 하는 강한 자기 계시를 확신하게 되고 음악인의 정체성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쿤은 음악에서 만큼은 어떤 초월적인 세계를 경험한 자가 되었던 것이다. 나는 이 경험이 없었다면 무오트와의 관계가 지속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한다. 비록 무오트와 만나게 된 동기가 가시적으로는 그가 쓴 가곡 때문이라고 볼 수 있겠지만, 쿤에게는 무오트의 인정이 단순히 자신의 곡이 인정받았다는 사실을 훨씬 뛰어넘는 의미가 있었을 거라는 생각이 든다. 비록 불구가 되었지만 그 불구를 전혀 느끼지도 못하고 불구이든 아니든 아무 상관이 없는 어떤 초월적인 합일을 경험한 자신의 존재가 받아들여지고 인정받게 되는 시작이지 않았을까. 그렇기 때문에 오만한 무오트의 무례함도 견딜 수 있지 않았을까. 음악은 실로 쿤에게 자신의 결함도 초월할 수 있을뿐더러 정반대의 세계도 받아들일 수 있는 통로가 되었던 것이다. 물론 나중에 게르트루트 앞에서는 그의 열등감이 도져 끝내 사랑을 잡을 용기를 내지 못하게 되지만, 어쨌거나 쿤은 완벽하진 않지만 성장을 이뤄냈던 거라 해석할 수 있겠다. 

비록 쿤이 오만한 무오트를 친구로 받아들였고, 그 무례한 무오트만이 가진 강점, 즉 아이처럼 순수한 음악에의 동경, 열망, 그리고 현재를 누릴 줄 아는 능력을 알았지만, 그의 모든 점을 받아들일 수는 없었다. 쿤을 사로잡은 음악이 쿤에게서 사람을 보는 객관성까지 빼앗지는 못했던 것이다. 쿤이 사랑했으나 자신의 결함 때문에 용기 내지 못했던 게르트루트를 무오트에게 빼앗긴 후 무오트를 향한 그의 감정은 폭발 직전까지 가게 된다. 나는 이 부분이 꽤 맘에 들었는데, 아무리 어떤 것을 빠지게 될 정도로 사랑하게 되어도 그것으로 모든 것을 덮어버리는 주관적인 판단에 쿤이 사로잡히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것은 이 작품 속에서 유일하게 내면의 성장과 성숙을 경험하는 인물이 쿤 밖에 없다는 내 해석의 중요한 근거가 되기도 한다. 쿤은 자신의 결함을 극복해 냈고, 사랑하는 여자를 빼앗겼음에도 불구하고 극단적인 감정으로부터도 끝내 이겨냈으며, 객관성을 유지하여 결말에서는 미망인이 되어버린 게르트루트마저도 연민의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었다. '삶의 양극을 구부려 서로 다가가게 하고 삶의 이중 화음을 기록하는 일'을 자신의 사명이라 여긴 작가 헤세는 쿤의 인생 여정을 통해 자아의 성장과 성숙, 분열과 합일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그 이외에 한 가지 흥미로운 점은, 쿤이 절친 둘을 비교하는 부분이었다. 타이저와 무오트의 대비는 눈여겨볼 만하고 생각한다. 타이저는 놀랄 만큼 음악에 밝았다. 그는 예술에서 어떤 중요한 역할을 하지 않아도 거기에서 만족을 느끼는 그런 사람이었다. 명인도 아니었고 작곡도 하지 않았지만 바이올린을 만족스럽게 연주했고 그 기법에 통달하고 있다는 걸 내심 기뻐했다. 어느 지휘자 못지않게 전주곡이라는 전주곡은 다 꿰고 있었으며, 정교하거나 화려한 대목이 나오거나, 어떤 악기가 아름답고 독창적으로 찬란히 울리는 대목이 나오면, 환하게 웃으며 극장의 어느 누구보다 더 즐겼다. 타이저는 행복했다. 도달할 수 없는 것에 대한 욕망으로 괴로워하지 않았다. 그는 예술에 예민하게 넋을 잃고 기쁨을 느꼈지만, 예술이 그에게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욕망하지 않았다. 예술 밖에서는 훨씬 쉽게 만족을 느꼈다. 친구 몇 사람이 있고, 때때로 좋은 포도주 한 잔을 마실 수 있으면 됐다. 맑은 공기를 마시며 걷기를 좋아했으므로 휴일에는 야외로 소풍만 갈 수 있으면 충분했다. 신지학의 가르침이 믿을 만하다면, 이 사내야말로 거의 완벽한 인간임에 틀림없었다. 본성이 더없이 착했고, 격정이나 불만은 그의 마음속에 들어서지 못했다. 

인생의 후반전을 살고 있어서 그런지 헤세가 묘사한 타이저 같은 사람은 내게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나이가 들수록 타이저와 같은 삶을 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그러나 쿤은 나와 다른 눈으로 타이저를 바라보는 것 같다. 쿤은 타이저와 같이 되고 싶지 않았다고 쓰고 있기 때문이다. 가치관의 차이일 수도 있겠으나 쿤이 연이어한 말을 들어보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그는 '나 아닌 어느 누구도 되고 싶지 않았으며, 가끔 너무 꽉 낀다고 느끼기는 했지만, 나 자신의 껍질을 벗고 싶지 않았다'라고 쓴다. 그는 타이저의 장점을 잘 파악했지만 자신은 다른 사람이라고 규정하고 있었던 것이다. 자신만의 개성을 발견하고 그 개성을 따라 고유한 삶을 살아가겠다는 다짐이 의미심장하고 결연하게 느껴지는 부분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그 고유한 개성이 타이저의 장점을 어느 정도 흡수하는 행위를 배제해야만 얻을 수 있는 건 아니라는 생각을 한다. 오히려 타이저와 같은 사람이 되려고 어느 정도 노력하는 건 아름다운 시도가 아닐까 싶은 생각도 한다. 내게 타이저는 열등감과 오만함으로 이루어진 양 갈래의 늪에 빠지지 않고 건강한 자존감을 가진 사람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십 대의 쿤에게는 타이저의 모습이 그저 두루뭉술하고 아무런 개성이 없이 느껴졌을 수도 있겠다 싶다. 그러나 예상컨대 아마 쿤도 나이가 사십 대가 되면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게 되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어쩌면 타이저가 쿤의 미래일 수도 있지 않을까 싶으며, 그렇게 되면 좋겠다는 바람도 가져보게 된다. 나의 개성을 찾았다면, 나의 목소리를 찾았다면, 이젠 내가 아닌 남을 향한 삶으로 나아가야 한다고 믿기 때문이다. 나의 인생 후반전은 그렇게 살아가리라.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8.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https://rtmodel.tistory.com/579
9. 데미안: https://rtmodel.tistory.com/469
10. 유리알 유희: https://rtmodel.tistory.com/708
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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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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