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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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토옙스키에게 뻬쩨르부르그란?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고

한국어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 작품을 거의 다 섭렵한 이 시기에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를 읽게 되어 다행이라 생각한다. 그렇지 않았다면 뻬쩨르부르그가 도스토옙스키에게 어떤 의미인지 이 작품을 읽고도 풍성하게 이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성 베드로의 도시'라는 뜻의 상트 페테르부르크 (열린책들에서는 '뻬쩨르부르그'로 표기한다)는 도스토옙스키의 거의 모든 작품에서 공간적 배경이 된다.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1821-1881년 당시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제국의 수도였다.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면서 러시아 제국이 붕괴되고 소련이 들어서며, 1918년 수도가 200년 만에 다시 모스크바로 복귀하면서 뻬쩨르부르그는 제2의 도시로 밀려났다. 1924년 레닌의 사망을 기점으로 이름도 레닌그라드로 바뀌었다고 한다. 뻬쩨르부르그는 역사적으로 우여곡절이 많았던 도시였다. 

도스토옙스키가 보고 듣고 느끼고 숨 쉬며 살았던 뻬쩨르부르그는 그 당시 러시아에서 가장 문명화된 도시였다. 러시아의 가장 서쪽에 위치하며 서구 유럽의 영향을 가장 직접적으로 받았던 곳이기도 했다. 프랑스어를 남발하는 서구주의자들이 슬라브주의자였던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에 빈번하게 등장했던 이유도 이러한 공간적 배경이 한몫을 했으리라 짐작해 본다. 그뿐만이 아닐 것이다. 소년 시절, 시베리아 유형 시절, 그리고 유럽에서 보낸 수년간을 제외하고 뻬쩨르부르그는 언제나 도스토옙스키를 둘러싸고 있는 공간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때, 뻬쩨르부르그가 그의 모든 작품에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는 해석은 충분히 가능할 것이다.

'뻬쩨르부르그 연대기'는 도스토옙스키 작품 세계의 바탕, 즉 그의 사상, 그가 창조한 등장인물의 캐릭터, 그리고 작품 저변에 깔린 다소 음울한 분위기의 근원을 이해할 수 있는 단초가 되는 중요한 작품으로 보인다. 소설이 아닌, 다시 말해 허구적 장치 없이 도스토옙스키의 실제 목소리가 가감 없이 전면에 부각되어 있어 문장은 더 크고 깊게 울린다. 이 짧은 연대기는 네 차례에 걸쳐 날짜가 적힌 산문 형태로 구성되어 있다. 의미가 있다고 판단되기에 하나씩 짚어 보려 한다.


4월 27일
도스토옙스키는 뻬쩨르부르그 사람 하면, 잠옷에다가 침실용 모자를 쓰고 꼭 닫힌 방 안에서 두 시간마다 무슨 약인가를 한 스푼씩 떠서 먹는 모습을 머리에 떠올리곤 했다고 쓴다. 어찌 이런 상상과 표현을 할 수 있는지 나는 이 문장을 읽고는 "역시 도스토옙스키답다!"라고 조용히 혼잣말을 했다. 밝고 건강한 이미지가 아닌 뭔가 어둡고 어딘가 아픈 이미지가 떠올랐는데, 내가 수백 시간을 들여 읽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의 이미지와도 묘하게 겹쳐졌다. 도스토옙스키도 직접 뻬쩨르부르그를 '흐리고, 음산하고, 화가 난 듯하고, 사악해진 듯하며, 축축하고, 습기가 많고, 창백하며, '살아 움직이는'과 반대되고, 하품을 하며 지루한 도시'라고 표현한다. 그러면서도 뻬쩨르부르그 사람들은 모두 정열적으로 조국을 사랑하고 무슨 일이 생기면 함께 즐기기를 좋아한다고 쓴다. 뻬쩨르부르그나 그 도시 사람들은 뭔가 범상치 않다는 인상을 받게 된다. 

뜬금없이 '선한 마음' 외에는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역겨운 성격을 가진 신사를 묘사하는 장면이 나오는데, 도스토옙스키가 작품 속에서 등장시켰던 여러 인물들이 저절로 떠올랐다. 대표적으로 '약한 마음'의 바샤 숨꼬프를 들 수 있다. 그 작품을 읽었을 당시 나는 약한 마음이 어떻게 악한 마음으로 변질될 수 있는지를 고찰했었다. 그런데 도스토옙스키도 바로 이 연대기에서 그 점을 정확히 꼬집는 것이다. 나로서는 섬뜩할 정도로 놀라운 경험이었다. 그가 쓴 문장은 다음과 같다. 

"어째선지 지금은 갑자기 가장 선한 사람, 정말 악한 행동과는 아주 거리가 먼 그런 착한 사람이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장 악한 사람이 되어 버린다.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것은, 그 누구도 이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고, 그렇기에 그 누구도 그에게 얘기해 줄 수 없어서 그는 그렇게 오랫동안 아무 일없이 살아가다가…(후략)" 

도스토옙스키가 말하는 선한 마음, 혹은 착한 마음, 혹은 약한 마음은 본래의 순수하고 긍정적인 뉘앙스를 거세하고 해석해야 하는 듯하다. 다음의 문장을 보면 이는 더 확실해진다. 

"그 (앞에 언급한 선한 마음만을 가진 신사를 지칭한다)가 사랑하는 여인은 그의 사랑으로 인해 갈수록 초췌해져 가고, 결국에 가서는 그와 함께 있는 것이 끔찍하고 거북스럽게 느껴지게 된다. 순수했던 그의 사랑하는 마음이 결국 그녀의 존재 자체를 독살시킨 것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에 빈번하게 등장하는 인물들의 심리에서 느껴지던, 뭔가 정신분열적이고 좀처럼 이해하기가 쉽지 않던, 그러나 말로는 정확히 표현할 수 없었던 그 느낌이 도스토옙스키가 가졌던 뻬쩨르부르그에 대한 인상으로부터 기인했다고 생각하니 한층 더 도스토옙스키를 이해한 것만 같은 기분이다. 그 당시 뻬제르부르그를 체험해 보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이다. 


5월 11일
작가답게 도스토옙스키는 스토리텔러 혹은 창작가가 자본가보다 더 낫다고 당당히 말한다. 이 문장 역시 뻬쩨르부르그가 어떤 도시인지 감을 잡아야 공감할 수 있는 듯하다. 또한 그가 창조한 작품 속 등장인물들의 온순함이랄까 순진함이랄까 하는, 때론 광대로도 표현되고, 때론 몽상가로도 표현되는, 딱히 어떤 한 단어로 표현하지 못하는, 그 어느 작가의 작품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가히 도스토옙스키적이라고 할 수 있는, 캐릭터의 근원이 바로 여기에서 기인하지 않나 싶다. 다음 문장을 읽어 보자.

"어떤 새로운 이야기를 알고 있는 것이 자본을 소유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낫다는 건 말할 여지도 없다. 뻬쩨르부르그 사람은 서둘러서 자신이 알고 있는 희귀한 소식을 얘기하려 할 때면, 입을 열기도 전에 정신적으로 달콤한 열정 같은 그 무엇을 느끼게 된다. 그의 목소리는 약해지면서 만족감에 떨린다. 그의 심장은 마치 장밋빛 버터 속에서 헤엄치는 듯하다. 평소 지병조차 말끔히 치유되거나 혹은 이 순간만큼은 자기의 적들에게조차 관대해진다. 그는 아주 온순해지고 위대해진다. 어째서 이와 같은 현상이 일어나는 것일까? 그런 장엄한 순간 뻬쩨르부르그 사람은 모든 장점과 소중함을 인식하고, 스스로에게 공평성을 부여하기 때문이다."

연신 하품을 하며 지루해하는 사람들이 가득한 뻬쩨르부르그를 떠올려 본다. 그 지루한 일상에 구원의 손길은 아무래도 돈이 아닌 이야기여야 할 것 같은 강한 생각이 드는데, 도스토옙스키는 바로 이런 점에서 이야기꾼을 자처하고 시대적 사명을 띠고 글을 쓰지 않았을까 싶은 생각도 하게 된다. 조금은 과장된 듯하고 익살스럽기도 한 문장을 다음과 같다. 

"이미 알려진 바와 같이 뻬쩨르부르그에서 하품은 감기나 치질, 열병과 같은 병으로, 지금까지도 아무런 치료 방법, 예를 들어 뻬쩨르부르그의 그 어떤 유명한 치료 방법으로도 치유되지 않고 있다. 뻬쩨르부르그는 하품을 하면서 일어나고 하품을 하면서 일을 하고, 하품을 하면서 잠자리에 든다. 이 도시에서 가장 많이 하품을 하는 곳은 가면 무도회장과 오페라 극장이다."

등장인물의 캐릭터로, 사건 사고의 공간적 배경으로, 그리고 그들의 사상으로 간접적으로 표현된 뻬쩨르부르그의 인상이 조금씩 더 와닿는다.


6월 1일
우리나라에서 초여름에 해당되는 6월의 첫날은 뻬제르부르그에서도 여름으로 막 넘어가는 시기인 듯하다. 이 연대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모스크바와 비교하여 뻬쩨르부르그의 특징을 이야기한다. 그는 뻬쩨르부르그를 다소 어둡게 표현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역사적이고 사회전반적인 측면까지 고려하면서 러시아의 중심 도시라고 말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도스토옙스키가 뻬쩨르부르그를 사랑했음을 느낄 수 있었다. 

"모스크바는 과거의 역사적인 그 무엇이 있는 곳인 반면, 뻬쩨르부르그는 어디를 가도 현재의 이 순간, 그리고 현재의 이상이 보이고 들리고 느껴진다. 어떤 면에서 이곳에는 모든 것이 카오스인데, 모든 것이 뒤섞여 있는지도 모른다. 많은 것이 캐리커쳐의 소재가 될 수 있다. 하지만 모든 것이 삶이요, 움직임이다. 뻬쩨르부르그는 러시아의 머리요, 심장이다."

"도시의 미래는 아직도 이데아 속에 있다. 이데아란 뾰뜨르 1세의 것으로써 국민 모두가 그의 정책의 힘과 진가를 확인했다. 공업, 무역, 과학, 문학, 교육, 사회, 체제 정비 등 모든 부문에서 뻬쩨르부르그는 아주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태생부터가 서구 유럽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기 때문인지 도스토옙스키는 러시아인의 민족성까지도 변질되지 않았나 고찰했던 것 같다. 그는 러시아인으로서의 자부심이 상당했던 것 같다. 그가 슬라브주의자라는 사실을 여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민족성이란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듯 유럽의 영향으로 쉽게 소멸되는 것이 아니다. 자신들이 살아가는 현재를 긍정적으로 사랑하는 민족이야말로 온전하고 건강한 민족이며, 바로 그런 민족이야말로 현재를 진실로 올바르게 이해할 수 있다고 우리는 생각한다. 그런 민족이야말로 삶을 지속시킬 수 있으며, 생명력과 원칙 또한 그들과 영원히 함께할 것이다."


6월 15일
"날씨는 덥고 도시는 텅 비어 있다. 모든 사람들은 자신들의 별장에서 감흥에 젖어 자연을 만끽하고 있다."라고 쓴 걸 보면 6월 중순 뻬쩨르부르그는 본격적인 여름이 시작된 듯하다. 이 연대기에서 도스토옙스키는 독일인과 러시아인을 비교한다. 독일인은 꼼꼼히 분석적으로 일을 처리하는 사람들인 반면, 러시아인은 순진 무구하고 때론 너무나 우스꽝스러운 형식도 흔쾌히 수용할 수 있는 성격의 사람들이라고 말이다. 그러면서 러시아인을 비난하는 듯한 뉘앙스로 글을 써나가는데, 러시안인 중 애정을 가지고 자기 일을 할 수 있는 여건이 되는 사람이 극소수일 거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많은 사람들이 결국 자신의 일을 발견하지 못하게 된다고 한다. 그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쓴다. 

"그렇게 되면 활동을 갈망하고, 실천적인 삶을 갈망하고, 현실을 갈망하는, 그러나 약하고 여성스럽고 부드러운 그런 성격에서는 우리가 공상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움트게 되고, 이런 사람은 결국 사람이 아닌 뭔가 중성적이고 이상한 주체, 즉 '몽상가'가 되어 버린다. 그런데, 여러분은 몽상가가 뭔지 아는가? 그것은 뻬쩨르부르그의 악몽이요, 구체화된 죄악으로서, 모든 끔찍한 비극과 모든 참사, 대단원, 그리고 발단과 결말을 가진 말 없고 비밀스러우며, 음산하고, 야만적인 비극인데, 이것은 절대로 농담이 아니다. 당신은 이따금 초점을 잃은 눈빛에 창백하고 피로가 누적된 표정의 주의가 산만한 사람, 항상 마치 무언가 끔찍하게 고통스럽고 뭔가 머리가 깨질 것 같은 일에 빠져 있으며, 이따금은 고통 속에 찌든 데다가 마치 힘든 노동으로 피로에 지쳐 있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아무 일도 하지 않는 그런 사람을 만나게 되는데, 바로 이런 사람이 몽상가의 겉모습이다."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에서 관념적인 인물들이 자주 등장한다는 건 그의 작품 두세 편만 읽어도 단번에 알 수 있는 사실이다. 끝도 없는 생각의 실타래를 통해 자기만의 세상에 갇히게 되는 인물들의 다른 이름은 몽상가일 것이다. 도스토옙스키는 이 연대기에서 몽상가들의 출현 배경 역시 뻬쩨르부르그가 낳은 산물이라고 해석하는 듯하다.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는 이런 도발적인, 그러나 아니라고는 결코 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진다. 

"우리 모두가 정도의 차이는 있을 망정 몽상가는 아닐까?"

도스토옙스키에 따르면 뻬쩨르부르그에서 태양은 아주 드물게 찾아오는 손님이라고 한다. 그곳에서 사람들은 건강을 쉽게 잃게 되고, 병약하고 불가사의하게 침울한 상태가 된다고 한다. 누구라도 그곳에 거주하게 되면 뻬쩨르부르그의 강력한 힘에 순응하여 몽상가가 되는 걸까? 뻬쩨르부르그라는 공간적이고 물리적인 특징이 도스토옙스키가 창조해 낸 많은 인물들의 캐릭터에게 숨을 불어넣은 게 아닌가 싶다. 다시 한번 나는 도스토옙스키가 살았던 당시의 뻬쩨르부르그를 보고 느끼고 싶다는 갈망을 느낀다. 그의 모든 작품을 다 읽는다 하더라도 결코 채워지지 않을 2% 일 것이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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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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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르만 헤세 저, ‘로스할데’를 다시 읽고

7년 전 ‘로스할데’를 처음 읽었을 때 나는 주인공인 화가 요한 페라구트를 머리로는 이해했지만 가슴으로는 공감할 수 없었다. 특히 가족을 버리고 일을 선택한 그의 결단을 도무지 지지할 수 없었다.

다시 이 작품을 읽고 나니 7년 전 나의 관점이 다소 가벼웠을 뿐 아니라 다소 치우쳤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문제를 가족과 일로 나누는 이분법적인 사고에 갇힌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요한 페라구트의 문제는 결코 간단하지 않았다. 표면적으로는 그가 가족 대신 일을 선택한 것처럼 보이지만, 맥락을 진중하게 고려했을 때 그는 어쩌면 둘 중 하나를 선택한 게 아니라, 유일하게 남은 단 하나의 길을 걸을 용기를 마침내 낸 것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 두 관점의 차이를 이해하기 위해 반드시 짚고 넘어가야 할 질문이 있다. ‘요한 페라구트에게 과연 가족을 선택할 기회가 여전히 남아 있었던가?‘ 요컨대 초독 땐 여전히 선택권이 남아 있었다고 생각했으나 재독 땐 이미 손을 떠났다고 보았던 것이다. 과연 그런가?

초독 때의 관점은 그 당시 여전히 빠져 있던 나의 개인적인 상황의 연장선에서 나온 해석이었던 것 같다. 당시 아들은 초등학교 3학년, 그러니까 9살 아이였고, 엄마 없이 아빠인 나와 3년을 살아낸 후 다시 가족이 함께 살기 시작한 지 1년 정도 되었을 무렵이었다. 성공이라는 구름을 잡기 위해 가족을 데리고 미국으로 건너갔던 나의 욕망은 이미 꺾인 상태였고, 그와 함께 나의 성공지향적인 가치관도 무너졌던 때였다. 반대급부로 나는 일과 성공이 아닌 일상과 가족의 소중함을 뒤늦게 깨닫게 되었고 그것들을 우선순위에 두고 생을 걸고 지키겠노라고 다짐하던 차였다. 그랬던 내 눈에 자신의 일을 위해 가족과의 이별을 선포하는 요한 페라구트의 결연함이 좋아 보였을 리가 없었다. 내겐 그가 자기만을 생각하고 일을 위해 가족을 희생시키는 성공지향적인, 절대 닮고 싶지 않은 사람으로 보였던 것이다. 

어떤 하나의 견고한 세상에 살다가 그 세상이 가진 한계를 깨닫는 동시에 다른 세상이 추구하는 이상을 쫓아 탈출한 자는 보통 용수철의 반동적인 힘에 의해 자신이 거했고 자신을 구성했던 모든 것을 필요 이상의 증오 어린 시선으로 바라보고 거부하는 과정을 한동안 거치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나도 모르게 내가 속했던 세상의 반대쪽으로 지나칠 정도로 치우쳤던 게 아닌가 싶다. 이것이 재독 후 요한 페라구트에 대한 나의 관점이 달라진 근본적인 이유일 것이다. 

먼저 요한 페라구트와 그의 아내 사이에 난 갈등의 깊은 골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넌 것과 같은 상태인 것 같다는 게 내 지론이다. 그가 좀 더 자상하려고 노력하거나 아내와 함께 하는 시간을 늘린다고 해서 해결되는 수준의 문제가 아닌 듯했다. 작품 속에서도 이 부부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는데 나는 바로 여기에 답이 있다고 보았다. 요한이 그 어떤 행동을 하더라도 아내에겐 그 행동이 가진 의미가 왜곡되어 전달될 것 같았다. 요컨대 요한만이 아니라 그의 아내 아델레도 문제의 원인으로 작용했던 것이다. 별 특별한 사건 사고 없이 오해와 또 다른 오해가 쌓이고 쌓이다 보면 그것이 하나의 관점이 되어 상대방을 원래 알던 그 사람으로 볼 수 있는 기회가 영원히 사라지게 된다. 요한과 아델레는 바로 이 길 위에, 아니 더 이상 합칠 수 없을 만큼 갈라진 두 길 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였다. 두 사람에게 남은 건 이별, 즉 이혼 밖에 없었던 것 같다. 이것은 초독 땐 보이지 않았지만 재독하고 나서야 보였던 부분이다. 

그렇다면 왜 둘은 진작 이혼을 하지 않았던가. 왜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는 선택을 하지 않고 이름만 부부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던가. 이 질문 역시 오래된 부부 관계에서 종종 볼 수 있듯이 명확한 답을 가지지 않는다. 서로에게 적당한 존중을 유지하면서도 서로를 무시하는, 모순된 삶에 그들은 수년간 이미 친숙해 보였다. 그것이 물 흐르듯 당연하게 느껴질 정도로 말이다. 다만, 요한의 오랜 친구 오토의 방문으로 인해 그 잘못 끼워 맞춘 옷이 실체를 드러냈던 것이다. 이 작품에서 오토의 방문이 가진 중요한 의미가 되겠다. 말하자면 객관성의 재발견, 혹은 비뚤어진 상태를 비뚤어진 상태로 인정하고 그로부터 벗어나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발화점이 되었던 것이다.

제1의 인생이 실패했다더라도 제2의 인생은 새롭게 시작할 수 있다. 거머리처럼 붙어있던 미련과 자책 (아들 피에르는 가장 큰 상징이리라)으로부터 해방받아 용기를 내어 새 삶을 시작하기로 결단한 요한 페라구트를 내가 이젠 응원하게 된 이유다. 작품 속에서 가장 객관적이고 냉철한 제삼자로 등장하는 요한의 오랜 친구 오토 역시 요한에게 다시 부부 사이를 예전처럼 돌이켜보라고 권유하지 않았다는 점도 나는 의미심장한 부분이라 생각한다. 요한에겐 이미 더 이상 합칠 수 없는 아내와의 관계 속에서 마치 아무 일 없는 듯 연극하는 삶, 그 늪과 같은 삶에서 빠져나올 때였던 것이다. 

가끔 우리에겐 오토의 방문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나도 모르게 뒤틀린 영점을 가지고 그것이 정상인 것처럼 합리화한 채 기울어진 삶을 살아가고 있진 않은지 점검해 봐야겠다. 요한에게 오토라는 친구가 있다는 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다. 

* 헤세 다시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1898
2.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1912
3.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1924

* 헤세 처음 읽기
1. 수레바퀴 밑에: https://rtmodel.tistory.com/449
2. 싯다르타: https://rtmodel.tistory.com/453
3. 게르트루트: https://rtmodel.tistory.com/463
4. 페터 카멘친트: https://rtmodel.tistory.com/468
5. 황야의 늑대: https://rtmodel.tistory.com/488
6. 크눌프: https://rtmodel.tistory.com/499
7. 로스할데: https://rtmodel.tistory.com/5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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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 요양객: https://rtmodel.tistory.com/826
12. 헤르만 헤세, 음악 위에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430
13. 헤세로 가는 길 (by 정여울): https://rtmodel.tistory.com/1552

#현대문학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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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배명자 옮김 / 다산초당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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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테판 츠바이크의 마지막 수업

슈테판 츠바이크 저,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를 읽고

슈테판 츠바이크의 작품을 아직 절반도 읽지 못했지만 한 권만 읽고도 나는 그가 예사롭지 못한 필력가라는 사실을 단번에 알았다. 그의 전작을 기어이 읽어낼 계획이지만 최근에 그의 미공개 에세이집이 출간되었다고 해서 구매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이 책은 나치의 박해를 피해 미국과 브라질로 건너간 이후, 그가 자살로 생을 마감하기 전 2년 동안 남긴 기록을 담고 있다. 그래서일까? 짧지만 묵직한 기분이었다. 

완독을 하고 두 가지를 느꼈다. 하나는 역시 비범한 필력가라는 확인, 다른 하나는 책장에 꽂힌 그의 작품을 서둘러 읽어보고 싶은 욕구였다. 원주로 오가는 짧은 여정에서 남긴 감상을 옮긴다.

1. 걱정 없이 사는 기술
지극히 평범하나 누구보다도 비범한 인물, 안톤에 대한 이야기다. 안톤은 직업도 없고 아무런 고정 수입이 없었으며 집도 없었다. 그는 자는 곳이 매일 달랐고, 그날그날 먹고사는 사람이었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매일 거리를 산책하며 세심한 눈으로 주위를 관찰한 뒤 필요한 곳에 선뜻, 당당하게 도움의 손길을 내미는 것이다. 사람들은 그가 보수를 요구해서가 아니라 진정 그 사람을 돕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알았기에 언제나 그의 도움을 감사히 받았고 그가 원하는 최소한의 사례를 했다. 그는 아무것도 가지지 못했지만 모든 것을 가진 것 같은, 일종의 초월적인 인물이었던 것이다. 화자는 안톤 같은 사람만 있으면 법도 필요 없을 거라고 말하며 이 특별한 존재에 대한 회상을 마무리한다. 

2. 필요한 건 오직 용기뿐!
화자의 고등학생 시절의 회상기인 이 글에서는 메테르니히라는 인물로 인해 깨달았던 시기적절한 용기의 중요성을 언급한다. 그는 금수저였으나 고상하고 사려 깊고 친절하여 모든 이들이 그를 좋아했다. 어느 날 그의 아버지가 사기죄로 체포되어 전국적으로 메테르니히를 포함한 가족의 신상공개가 되었다. 언론에 대서특필될 정도로 거대한 금융 사기였던 것이다. 몇 주간 보이지 않던 메테르니히가 학교로 돌아온 날 화자를 비롯한 친구들은 그에게 어떤 말을 해야 할지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주저했다. 메테르니히는 스스로를 고립시켰고 친구들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다음 날 메테르니히는 학교를 그만두었다. 화자는 자신을 포함한 친구들의 용기 없음을 반성하고 후회한다. 함부로 말했다간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수도 있었지만, 메테르니히를 도울 유일한 기회를 놓쳐버린 이유를 화자는 용기가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판단했던 것이다. 내 생각은 조금 다르지만 말이다.

3. 나에게 돈이란
전후 오스트리아에서 있었던,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니 미쳤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로 엄청났던 인플레이션으로 돈의 가치가 땅바닥에 떨어졌던 때를 상기하는 글이다. 화자는 놀라움과 함께 두 가지를 깨닫는다. 하나는 돈의 가치가 사라져도 삶을 지탱하려는 힘은 유지되었다는 점, 다른 하나는 떨어진 돈 (물질)의 가치 덕분에 반대급부로 비물질적인 가치들의 소중함을 알게 되었다는 점이다. 화자의 마지막 문장은 이 글을 압축한다. “우리의 진정한 안전은 가진 재산에 있지 않고, 우리가 누구고 어떤 사람이 되느냐에 달렸다.”

4. 센강의 낚시꾼
프랑스혁명 시기, 루이 16세가 단두대에 처형되는 순간, 그곳에서 그리 멀지 않은 센강에서는 낚시꾼들이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은 듯 유유히 찌만 노려보고 있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며 느낀 놀라움을 토로하며 화자는 그것으로 인해 얻은 인식의 변화를 이야기한다. 센강의 낚시꾼들은 사회에 무관심하거나 공감하지 못하거나 사익만을 추구하는 사람이 아니라, 삶은 지속되어야만 한다는 자연주의적인 가치에 따라 살던 사람들이었다고 말이다. 화자는 자신의 시대에도 마찬가지임을 밝힌다. 너무나도 많은 사건 사고들이 터지는 시대에 개별적인 인간은 그 모든 일에 공감할 수도 개입할 수도 없다. 인간의 한계를 벗어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자연이 일부 파괴되더라도 일상생활을 유지하는 것, 자연의 연속성에 화자는 큰 의미를 둔다. 센강의 낚시꾼들은 세상 돌아가는 일에 무관심했던 게 아니라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명령에 순종하는 자들이었던 것이다.

5. 영원한 교훈
‘생각하는 남자’ 조각상으로 유명한 로댕과의 짧은 만남으로부터 화자가 얻은 영원한 교훈 두 가지를 소개하는 글이다. 첫 번째 교훈은 위대한 사람은 거의 항상 매우 친절하다는 것, 그리고 과하게 나서지 않는 사람에게 본능적으로 관대하다는 것. 두 번째 교훈은 세상의 모든 예술과 성과의 궁극적 비밀은 바로 집중이라는 것. 로댕을 찾아갔던 날, 로댕은 화자에게 작업실을 소개해주다가 화자가 옆에 있는 줄도 모르고 한 시간 반 동안 작업에 집중하는 모습을 의도치 않게 보여주었는데, 화자는 바로 그 시간 동안 책으로도 수업으로도 배울 수 없는 귀중한 교훈을 배울 수 있었다고 고백한다. 

6.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를 위한 추도사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라는 작가의 죽음을 추도하는 글이지만 나는 츠바이크가 자신을 위한 추도사를 미리 쓴 게 아닌가 싶었다. 그가 기리는 알폰소 에르난데스 카타와 그의 작품이 남긴 의의가 츠바이크 자신과 자신의 작품이 가진 의의라고 읽어도 충분히 이해할 만했기 때문이다. 츠바이크 역시 조국을 국경 너머 널리 알리고, 자신의 세계문학과 조국을 연결하여 그 위상을 높인 사람으로서 조국에 봉사한 사람이었다.

7. 거대한 침묵
화자는 나치에 의해 저질러진 육체적 폭력을 넘어선, 스스로 가장 잔인한 영혼 훼손이라 정의하는, 침묵의 고문을 이 글에서 고발한다. 한 사람 (히틀러이리라)을 제외한 모두의 입을 틀어막은 일이 유럽 한복판에서 벌어졌다. 책이 불태워졌고, 학자들은 연구실에서 쫓겨났으며, 성직자들은 설교단에서, 배우들은 무대에서 쫓겨났다. 언론이 통제되었고, 창작으로 문화를 풍요롭게 했던 사람들은 야생동물처럼 사냥당했다. 모두 나치의 소행이었다. 츠바이크의 이 글을 읽으며 지금 한국에서 벌어지고 있는 일들도 나치 시대와 그리 다르지 않음을 보고 섬뜩한 기분을 느낀다. 특히 한 세기가 지났음에도 힘을 가진 한 인간이 나머지 힘없는 인간들에게 폭력을 사용하고 입을 틀어막는 행위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여 반복되고 있다는 사실이 슬프고도 두려운 일로 다가왔다. 

8. 이 어두운 시절에
유럽 작가들이 모인 자리에서 했던 츠바이크의 연설문인 것 같은 글이다. 먼저 그는 나치의 국가 독일인으로서 독일어는 쓰는 작가들이 괴롭고도 비극적인 우선권을 갖고 있다고 말한다. 작가는 조국을 떠날 수 있어도, 창작하고 생각하는 데 사용하는 언어와는 갈라설 수 없다고 말하며 자신이 사용하는 독일어야말로 세계를 파괴하고 인간 존엄을 시궁창에 던져버리는 범죄적 망상에 맞서 싸우는 데 쓸 수 있는 유일한 무기라고 말한다. 가장 어두운 시기를 맞이하여 인간이 존엄이 땅에 떨어졌지만,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인간의 영혼에 자유가 필수임을 명확히 인식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가장 어두울 때 빛의 소중함을 실질적으로 깨닫게 되었다는 말이다. 이는 이 책의 제목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결연히 외친다. 망명한 자유국가에서 자유를 누리고 있는 독일어를 사용하는 작가들에게 가장 시급하고 주요한 의무는 도덕의 힘과 무적의 정신을 흔들림 없이 믿게 하는 것이라고 말이다. 츠바이크는 독일어 작가로서 공적인 책임감과 사명을 그 누구보다도 절실히 느꼈던 게 틀림없다.  

9. 하르트로트와 히틀러
빈센테 블라스코 이바녜스라는 작가가 쓴 ‘묵시록의 네 기사’라는 책을 우연히 다시 접한 뒤 작중 인물인 독일 역사학 교수 율리우스 폰 하르트로트에 대한 이야기를 담은 글이다. 그는 독일인의 정치적 열망을 히틀러에 앞서 먼저 선포한 작자였다. 25년 전에 읽었을 땐 그가 반미치광이 캐리터로 여겨졌으나, 2차 세계대전을 겪은 뒤에는 그가 그 어떤 인물보다 현실적인 캐릭터로 보였다고 한다. 하르트로트의 터무니없는 아이디어들이 히틀러를 통해 7,000만 독일인의 공식 신념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의 우생학적인 독일인 우월주의는 히틀러에 와서 꽃을 피웠던 것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히틀러의 광기는 하르트로트라는 배경을 가지고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츠바이크의 놀라움은 상상할 수 없었던 것 같다. 

이상 아홉 편의 짧은 에세이를 읽고 나는 생각에 잠긴다. 작가의 사명에 대한 숭고하고도 결연한 의지에 적잖은 감동을 느낀다. 시대를 대변하는 목소리, 그것이 갖는 고유한 의미에 대해 숙고하지 않을 수 없다. 츠바이크가 타국으로 망명을 간 이후 자살로 생을 끝내기까지 얼마나 깊은 고뇌에 휩싸였을지 짐작이 되어 가슴이 아려오기도 했다. 

* 슈테판 츠바이크 읽기
1. 감정의 혼란: https://rtmodel.tistory.com/1608 
2. 환상의 밤: https://rtmodel.tistory.com/1615 
3.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https://rtmodel.tistory.com/1625 
4. 과거로의 여행: https://rtmodel.tistory.com/1652
5. 체스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797
6. 어두울 때에야 보이는 것들이 있습니다: https://rtmodel.tistory.com/1923

#다산북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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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성년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108
도스또예프스끼 지음, 이상룡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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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다른 이름, 미성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미성년‘을 다시 읽고

나에게도 ‘이념‘이 있었다. 그 이념은 하나의 진리처럼 나에게 빛을 비춰주었고, 비밀스러운 힘을 공급해 주었으며, 그것으로 인해 나는 은밀한 자신감도 얻을 수 있었다. 그 이념이 향하는 목적만 달성하면 세상 따윈 다 감당해 낼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아무것도 두렵지 않고 무엇이든 다 해낼 수 있을 것 같았다. 나는 나름대로의 왕이었다. 

문제는 그 왕좌가 좁디좁은 '나'라는 우물 안에 갇혀 있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내가 세상을 바라보는 렌즈도 바로 그 우물 안에서 제작되었다는 사실이었다. 이념은 나의 빈약한 내면을 풍선처럼 부풀려주었고, 그래서 바닥에 붙어 있으나 마치 구름 위를 걷는 듯한 기분을 느끼게 해 주었을 뿐만 아니라 (aka 허영 혹은 허세), 나의 세계관과 가치관마저도 형성시켜 주었다. 그러나 그 렌즈는 유효기간이 있었고, 우물 밖을 볼 땐 왜곡될 수밖에 없는, 그래서 우물 밖 관점에서 바라볼 땐 망상이 될 수밖에 없는, 명백한 한계를 가지고 있었다. 나에겐 두 가지 선택권이 있었다. 하나는 그 렌즈를 계속해서 사용하며 왕 노릇하기 위해 '나'라는 우물을 고수하는 것, 다른 하나는 그 렌즈를 벗어던져 버리고 용기를 내어 우물 밖으로 탈출하는 것이었다. 

우물 안이 모든 세상인 줄 아는 정신적 유년 시절에는 그리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 아니, 발생했다 하더라도 인지하지 못했거나 큰 영향을 끼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고인 물은 썩는 법. 내가 애써 지키려 했던 우물은 언젠가부터 냄새가 나기 시작했다. 나는 우물 밖 세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차차 알게 되었고, 인간인지라 저 너머의 세상, 즉 우물 밖 세상이 궁금했기 때문에 내가 들고 있는 유일한 렌즈를 들고 우물 밖을 바라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우물 안에서 제작된 세계관과 가치관으로 우물 밖 세상을 판단하고 해석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어느 정도는 괜찮았다. 그 정도 수준의 합리화는 나를 지키는 하나의 방법이라 믿었고, 나는 절대 무너질 수 없는 존재라고 믿었다. 그러나 시간이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우물 밖 사람들을 더 많이 만날수록 그 렌즈의 왜곡은 점점 더 심해져야만 했고, 급기야 나를 제외한 모든 것을 판단하고 정죄하는 태도를 취하려는 자아가 형성되고야 말았는데, 그것은 곧 우물 안에서처럼 우물 밖 세상에서도 나는 왕 자리를 꿰찰 수 있다고 믿었던 거나 다름없었다. 나는 언제나 옳아야 했고, 내가 생각하고 판단하고 믿는 것은 진리여야 했으며, 나와 다른 시선을 가진 모든 사람은 나를 해하려 하거나 제거하려 하는 적으로까지 간주하게 되었던 것이다. 병이었다. 그것도 심각한 병이었다. 결국 나의 존립 자체가 흔들리기 시작했고, 나중엔 붕괴될 수밖에 없었다. 나는 죽음으로 내몰렸고, 기나긴 세월을 거쳐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던 '나'라는 우물은 그렇게 말라갔다.

놀라운 일은 그다음부터였다. 우물은 파괴되었지만, 그래서 어쩔 수 없이 우물을 버리고 나올 수밖에 없었지만, 나는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었다. 게다가 죽어야만 했던 자아는 진작에 죽어야 했다는 사실을 뒤늦게 고백하게 되었다. 내가 고수하던 우물은 알과 같았다. 내가 살려고 발버둥 치던 모든 행동들은 앞으로 성장하지 않겠다는 철부지 어린아이의 몸부림 (aka 땡깡)에 불과했다. 나를 이끌고 나에게 하나의 진리로 자리 잡았던 이념이란 것은 궁극적으로 나의 성장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이었던 것이다! 

인생은 우물 탈출기와 같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아가, 하나의 우물을 탈출하여 다다른 곳은 우물 밖이 아니라 또 다른 우물 안이라는 사실도 나중엔 알게 되었다. 삶은 양파 껍질처럼 다중의 우물로 이루어져 있음도 알게 되었다. 안타까운 인간의 한계는 가장 바깥의 양파 껍질에 닿기 전에 죽는다는 점, 그리고 그 껍질에 언제쯤 닿을 수 있을지조차 계산하지 못한다는 점에 있다는 사실도 뒤늦게 알게 되었다. 알고 보니 모든 인간은 누구나 깊이와 너비가 다를 뿐 우물 안에 있는 것이었다. 

건강한 사람은 끊임없이 우물을 탈출하는 과정의 연속선 상에 있는 사람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어떤 우물이든지 정착하는 순간 성장은 멈춘다. 성장이 멈춘 인간은 정도가 다를 뿐 모두 미성년인 것이다. 이런 이유로 인간의 또 다른 이름은 '미성년'이라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이것이 바로 내가 도스토옙스키의 5대 장편 중 네 번째 작품 '미성년'을 재독 후 내린 하나의 중요한 결론 중 하나가 되겠다. 

이 작품을 읽고 나는 성장과 성숙이란 무엇인가?라는 질문 앞에 섰다. 나를 돌아봤다. 과연 나는 성장하고 성숙하는 과정 중에 있는지, 아니면 몇 번째인지는 모르지만 어떤 우물 안에 멈춰 거기서 뿌리내리려고 애쓰고 있진 않은지 궁금해졌다. 아마도 이 작품을 읽은 독자들은 '미성년'이라는 제목의 의미를 물으며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 싶다. 나는 그리 어렵지 않게 답을 낼 수 있었다. 

그것은 나에게는 두 가지 자아가 있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하나는 여전히 어떤 이념에 사로잡혀 그것을 숭상하며 그곳이 우물인 줄도 모르고 왕 노릇하기 위해 정착하려 애쓰면서 현실이라는 핑계로 물질적이고 욕망에 이끌리는 삶을 추구하는 자아였다. 다른 하나는 안정적인 정착이 가져다주는 정체감에서 신물을 느끼고는 불안을 감수하고서라도 또 다른 이념을 쫓아 성장과 성숙을 도모하는 자아였다. 하나인 줄 알았던 나의 내면은 이렇게 적어도 두 개의 자아로 분열되어 있었던 것이다. 두 자아를 모두 나라고 인정하고 받아들이기까지 얼마나 많은 시간이 걸렸는지 모른다. 이제는 이 분열이 내겐 세계관과 가치관을 형성하는 렌즈의 출발점이 되었다,라고 나는 생각한다. 나는 하나가 아니었다. 둘 이상의 자아가 서로 다투기도 하고 융합하기도 하면서 한 몸 안에서 합일을 이루는 존재자가 바로 나였던 것이다. 

이 작품 속 이야기를 이끄는 중추는 '이념'에 있다. 일인칭 주인공 시점으로 쓰인 수기 형태의 작품 속 주인공 아르까지 돌고루끼는 제목이 가리키는 '미성년'의 대표적인 인물로 그려진다. 그는 19세의 나이로 법적으로는 갓 성인이 된 청년이다. 성년이 되었으나 여전히 미성년에 머문 인물이 바로 아르까지 돌고루끼인 것이다. 그의 나이를 19세로 설정한 이유에서 나는 도스토옙스키의 합리성과 현실성을 찾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이로 봐도 '미성년'이라는 타이틀이 충분히 이해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이 작품의 제목 '미성년'이 단지 아르까지를 지칭한다고 생각하진 않는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로 등장하는 베르실로프, 여자 베르실로프라고 할 수 있고 모든 남자들이 반하게 되는 까쩨리나, 아르까지의 친동생 리자, 리자를 임신시키고 또 다른 여자에게 청혼을 하는 세료자 공작, 어떤 독특한 이념에 사로잡혀 자살로 생을 마감하는 끄라프뜨, 까제리나의 아버지이자 돈의 원천으로 상징되는 소꼴스끼 노공작, 아르까지가 주머니에 바느질로 꿰매어 보관하고 있던 중요한 편지를 결국 훔쳐가 아르까지의 뒤통수를 때리게 되며 과거 아르까지를 폭행하기도 했던 학폭 가해자 람베르뜨, 그의 프랑스 연인으로 다소 코믹하게 나오는 알폰신느, 베르실로프의 허망한 사랑의 실천이 가져온 커다란 상처와 오해로 인해 자살을 선택한 올랴, 그녀의 어머니이자 이름이 작품 중간에 바뀌어 혼동을 조장했던 다리아 오니시모브나, 그리고 아르까지의 법적인 부모인 마까르와 소피아까지 모두 정도만 다를 뿐 미성년이라고 보아도 무방하다는 생각이다. 말하자면 모든 인간을 미성년으로 볼 수 있다는, 위에서 한번 언급했던 나의 주장을 반복하는 해석인 것인데, 모두 어딘가 분열되어 있고 어리숙하며 성숙하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며, 나아가 모두가 저마다의 이념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이다. 나는 작품 제목 '미성년'의 다른 이름을 그래서 '인간'이라고 읽는다.

넓은 의미에서 모든 등장인물에게 해당되겠지만, 아르까지 돌고루끼에게는 이념이 있었다. 그 이념이 그에겐 힘의 근원 같은 것이었다. 그의 이념은 우습게도 로스차일드와 같은 인물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그가 진정 원하는 것은 단순히 부자나 저명인사가 되는 것이 아니라 굳은 의지와 억센 인내심으로 얻을 수 있는 '혼자만의 고독한 상태'였다 (나는 여기서 도스토옙스키의 조롱 섞인 뉘앙스를 읽는다). 단지 돈과 명예를 쟁취하는 데에 머무르지 않고 돈과 명예를 쟁취한 이후에 누릴 수 있는 자유, 즉 더 이상 돈과 명예에 압도되지도 속박되지도 않는 상태였다. 말하자면, 강한 자가 아닌 강한 자의 여유를 원했던 것이다. 이는 강한 자보다 우위를 점하는 상태에 속하게 되는 심리를 조장하기 때문에 아르까지는 지상 최고의 우월감을 느낄 수 있는 이념의 사람이 될 수 있었다. 그러나 그의 이념의 문제는 망상에 가까울 정도로 허망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 이유는 그 이념이 지향하는 상태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먼저 가장 강한 자가 되어야만 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래서인지 그는 이 부분에서 돈을 지목한다. 돈이야말로 보잘것없는 인물까지도 최고의 지위로 이끌어 주는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이 그의 이념의 주요한 내용이며, 그것을 쟁취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이념에 힘이 실린다고 스스로 고백한다. 그러나 그에겐 돈이 없었다. 그러므로 큰돈을 거머쥐기 위해 그는 굳은 의지와 억센 인내심으로 말초적인 욕망을 이겨내는 자기 극복을 실천도 해보지만 결국 도박 같은 한탕주의에 빠지는 모순적인 모습도 보여준다. 그의 이념이 만들어낸 이상은 그가 처한 현실과의 간극이 너무나도 컸으며, 그 결과로 그는 이념과 현실이라는 양극으로 분열된 채 이중적인 삶을 살아가고 있었다. 이런 면에서 '미성년'의 의미는 모든 인간으로 확장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기는 것이다.

그의 생물학적 아버지인 베르실로프는 아르까지의 가까운 미래의 인물로 설정된 게 아닌가 싶었다. 베르실로프는 누가 봐도 성년임이 분명했지만, 그의 삶은 극명하게 분열되어 있어 누가 봐도 모순과 분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단적인 예로, 베르실로프의 이념을 추구하는 자아는 자신을 러시아를 가장 사랑하는 귀족으로 여기면서 전 인류를 사랑하고 그 사랑을 베풀기 위해 어설픈 용기를 내어 영혼 없는 실천을 일삼기도 하는데, 그 실천이 낳은 열매는 한결같이 불행을 가져다주었다 (베르실로프의 이념적 자아의 단일 모델의 최종 형태가 마까르로 설정된 것이리라). 대표적인 열매는 아르까지의 어머니인 소피아와 자살로 생을 마감한 올랴, 그리고 역시 자살로 생을 마감한 까쩨리나의 의붓녀 리지아로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베르실로프는 소피아, 올랴, 리지아에 대한 마음이 완전히 가식 혹은 거짓이었을까? 아닐 것이다. 그 순간만큼은 진심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반쪽 짜리 자아의 진심이었기 때문에 베르실로프의 전인적인 진심이라 할 수 없다. 나는 이 부분에서 도스토옙스키는 '사랑'이라는 개념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는 게 아닌가 싶다. 사랑은 이념에 따른 것도, 현실에 따른 것도 아닌, 두 가지가 모두 하나가 된 전인적인 마음과 행동이라고 말이다. 전 인류를 향한 공상적인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한 사람을 향한 사랑이야 말로 진정한 사랑인 것이다. 자신의 공간과 시간을 내어줌이 없다면, 즉 자신의 희생이 동반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라 할 수 없을 것이다. 

베르실로프의 또 다른 자아, 즉 현실과 욕망을 따르는 자아 역시 파괴를 가져왔다. 그가 마음을 품었던 까쩨리나에게 베르실로프의 현실 자아는 유부남이면서도 청혼을 하는 엽기적인 행동을 선보였는데, 이 사실이 어쩌면 이 작품 속 모든 이야기의 근간에 깔린 불협화음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또한 그는 마까르가 죽으면서 선물한 성상을 두 조각으로 부서뜨리며 또다시 소피아를 떠나 방랑을 일삼으리라고 선포하기도 하는데, 주위 사람으로서는 기겁할 만한 충분한 이유가 되어 주었다. 

베르실로프의 이념 자아와 현실 자아의 분열은 단적으로 각각 소피아와 까쩨리나를 통해 발현되었다고 해석할 수도 있을 것이다. 소피아와 까쩨리나를 오가는 베르실로프의 마음은 그의 분열된 자아를 그대로 드러내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아르까지는 베르실로프의 이념적인 자아를 숭배할 정도로 감동했고 사랑했다. 이런 면에서 아르까지는 베르실로프의 이념적인 자아가 낳은 이념적인 아들로 해석할 수도 있겠다. 

그러므로 아르까지만이 아니라 그의 아버지 베르실로프 역시 정신적인 면에서 볼 때 미성년이었다는 나의 주장은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고 할 수 있다. 뿐만이 아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다른 등장인물들도 저마다의 이유도 저마다의 이념에 사로잡혀 성숙하지 못하고 치우친 생각과 판단에 의거하여 엉뚱한 일을 저지르기도 한다. 모두 미성년의 의미를 충족시키는 행위로 볼 수 있을 것이다. 다시 한번 이 작품의 제목 '미성년'의 다른 이름은 '인간'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이 글을 쓰는 나도, 이 글을 읽는 당신도, 우리 모두는 신체적인 나이와 상관없이 미성년을 내면에 간직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성년은 무엇일까? 어떤 하나의 이념에 사로잡히지 않고 끊임없이 낯설고 새로운 물줄기의 유입을 수용하며 한 우물에 머물지 않고 계속해서 우물을 탈출하며 깊고 풍성한 삶을 도모하는 도상에 있지 않을까? 그 도상에 있는 모든 사람을 성년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이념은 성장으로도 정체로도 이끌 수 있는 힘을 지닌다. 정체되면 미성년에 머물고, 성장의 길 위에 있기만 하면 성년을 지향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년은 완성형이 아닌 진행형이다. 우리 안의 미성년을 인지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성년의 길 위에 서는 나와 모든 사람이 되면 좋겠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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뻬쩨르부르그 연대기 외 열린책들 세계문학 12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항재 옮김 / 열린책들 / 201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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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념과 몽상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여주인‘을 읽고


금세 바닥날까 두려워 아껴왔던 도스토옙스키 작품 하나를 조심스레 까먹었다. 좋아하는 작가의 작품을 다 읽는다는 건 멋진 일이다. 그러나 이제 내겐 슬픈 일이기도 하다. 몇 페이지 되지 않는 단편까지 포함하여 열린책들에서 번역된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개수는, 내가 파악하기로는, 모두 서른다섯인데, 이번에 읽은 ‘여주인’을 빼면 이제 네 작품 밖에 남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문호의 작품을 읽어나가는 성취감이 남모를 아쉬움으로 변한 지도 벌써 오래되었다. ‘도스토옙스키와 저녁식사를‘ 독서모임과 함께 내가 선별한 총 열다섯 편의 대표작을 재독하고 있는 것도 어쩌면 곧 맞닥뜨릴 상실로 인한 슬픔, 즉 읽지 않은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사라질 시기를 늦추고 싶었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여주인‘은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단편 중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작품 중 하나다. 우리가 잘 아는 그의 첫 작품 ‘가난한 사람들‘, 그에 이은 ’분신’ 이후에 급하게 쓰였던 소설 중 하나다. ‘가난한 사람들‘로 높이 올라갔던 그의 명예가 ’분신‘으로 본의 아니게 실추된 이후 도스토옙스키 내면에서 일었을 심적 동요가 느껴지는 작품이었다고 하면 과장일까. 도스토옙스키의 천재적이고 집요한 인간 본성에 대한 탐구가 텍스트의 옷을 입고 잘 드러나 있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성급함이 느껴졌다. 그 성급함은 이야기 전개의 미완결성과 미숙함으로 표현되어 있었다. 


장편이 아닌 단편만의 특징이 잘 살아 있다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도스토옙스키의 다른 작품들을 거의 모두 섭렵한 내 눈에는 무언가 아쉬운 점이 많았다. 물론 등장인물의 인생 전체를 단편에 모두 녹여낼 수는 없는 노릇이겠지만, 개연성이랄까 핍진성이랄까 하는 부분에서 선뜻 이해하거나 공감하기 어려운 부분이 많았다. 특히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남성의 정체가 모호했는데, 마치 관념과 몽상 속에서 평생을 살아온 사람 아닌 사람 같았다. 물론 ‘지하로부터의 수기‘에서 이보다 더 강한 캐릭터가 등장했었지만 적어도 모호하진 않았다. ’백야’에서도 비슷한 인물이 등장했으나 나름대로 낭만을 느낄 수 있었고, 주인공과 대비되는, 여자가 기다렸던 남자가 작품 끝에 등장하는 바람에 주인공의 개성이 도드라졌었다. 그러나 이 작품 속 주인공은 이도 저도 아닌 인물이었다. 맥락 없이 무대 위에 잠시 등장한 배우 같은 느낌이었다. 


뿐만 아니다. 그가 첫눈에 사랑에 빠진 ‘여주인’인 여성 역시, 비록 저자가 그녀의 과거사를 소개하고는 있지만, 유로지비를 연상케 하는 순진함과 광적으로 느껴지기도 하는 격정적인 감정으로 채색되어 있어 내겐 낯설게만 느껴졌다. 또한 갑작스러운 친구의 등장도, 그 친구의 역할도 전체 서사와 무슨 연관을 가지는지 알 수 없었다. 등장인물이 손가락으로 셀 수 있을 만큼 소수만 나오는 작품인데도 서사가 엉성하게 보였다. 가독성도 좋지 않았다. 나 같은 도스토옙스키 전작 읽기에 도전하는 소수의 찐 독자만이 자발적으로 읽어낼 수 있는 작품이 아닌가 한다.  


모호하고 관념적인 이 작품의 결말을 처리하는 부분도 도스토옙스키다운 면이 잘 보이지 않았다. 마치 현대문학의 단편을 보는 듯한 인상을 줄 정도였다. 이야기가 더 진행되어야 할 것 같은데 뜬금없이 끝나버리는 찝찝함이 작품을 다 읽고 하룻밤이 지났는데도 내게 아직 남아 있다. 다만 주인공 남자의 꿈꾸는 듯한 관념적인 표현들이 하나의 어떤 독특한, 신비감까지 느껴지는, 아우라를 형성해서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나에게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관념과 몽상, 이 두 단어는 '분신'의 골랴드낀을 창조한 도스토옙스키의 초기 작품들에서 절대 빼놓을 수 없는 키워드가 아닌가 한다.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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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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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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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

41. 여주인: https://rtmodel.tistory.com/1917

42. 아저씨의 꿈:

43.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44. 뻬쩨르부르그 연대기: 

45. 자유 (by 석영중):

46. 도스토옙스키 깊이 읽기 (by 석영중):

47. 도스토옙스키와 함께한 나날들 (by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48. 도스토옙스키와 톨스토이 (by 윤새라):

49. 도스토옙스키의 세계관 (by 니콜라스 A. 베르댜예프): 

50. 죽음의 집에서 보다 (by 석영중, 손재은, 이선영, 김하은):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11. 미성년:

12.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13.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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