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4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 소설
한강 지음, 최진혁 사진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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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절대로 더럽혀질 수 없는


한강 저, '흰'을 읽고


‘흰’이란 소설은 하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 같지만 다분히 독립적으로 보이는 많은 짧은 글들의 모음이다.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는 에세이 같은 느낌을 준다. 중간중간에 사진도 여러 장 끼어 있어 마치 시집 같은 느낌도 있다. 그래서 그런지 읽고 나면 이미지가 남는다. 짧은 텍스트를 읽었는데 남는 건 그림이다. 이 작품은 한강 작가 특유의 문체가 묻어나는 텍스트로 그린 그림집인 셈이다. 


한강 작가의 여느 작품처럼 이 작품 역시 서사가 아닌 묘사 위주로 되어 있다. 그렇기 때문에 이 책을 읽는 데엔 여백을 음미할 필요가 있다. 실제로 텍스트 대비 물리적 여백이 많기도 하다. 나는 그것을 그만큼 천천히 읽으라는 뜻으로 받아들였고 그렇게 읽었다.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서도 작품은 모호하기만 했다. 공중에 붕 뜬 느낌을 어떻게든 처리하고 싶었다.


마침 한강 작가가 이 책을 쓰고 나서 남긴 인터뷰 기사를 찾아 읽을 수 있었다. 존재하지만 안개 같아 손에 잡히지 않던 것이 물방울이 되어 피부로 느껴진 순간이랄까. 그제야 선명해졌다. 소설 속에 나타난 이미지들의 윤곽이 의미를 가지고 실체를 드러냈다. 그것은 그녀의 전작 '소년이 온다'가 남긴 흔적인 것 같았다.


'소년이 온다'는 지금까지 읽은 소설 중 내게는 가장 무거운 작품이었다. 한국 역사의 커다란 비극이라고 할 수 있는 1980년 5월 18일 광주 (광주민주화운동)를 그 어느 논픽션보다도 선명하고 사실적으로 전달해 주었기 때문이다. 역사에 큰 관심이 없던 나는 그 책을 읽고 조금이나마 역사에 관심을 가질 수 있었다. 거짓 역사와 참 역사를 분별하는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진지하게 생각해 보게 되었다. 역사 선생님이 하지 못했던 일을 소설 한 편이 해낸 것이다. 이는 왜 그녀가 박근혜 정부에서 블랙리스트로 올랐는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하다.


인터뷰에서 알게 된 사실 몇 가지를 소개한다.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기 때문이다. 책에서는 지명을 직접 거론하지 않지만 언급되는 ‘어느 도시’는 한강 작가가 실제 4개월 정도 머문 폴란드 바르샤바다. 2014년 8월부터 12월까지였으니 ‘소년이 온다’를 탈고한 직후다. 한강 작가 역시 이 부분을 언급한다. ‘소년이 온다’를 쓸 때 가까이 와 있다고 느꼈던 혼에 대한 생각을 계속하고 있었고, 흰 것에 대해 쓰고 싶다는 생각을 늘 하던 차에 바르샤바에 머물게 되는 기회가 찾아왔노라고. 전쟁에 의해 거의 완전히 파괴되었던 도시가 복원된 모습을 보면서, 그 도시를 닮은 사람을 상상하게 됐고 그런 이미지가 확장되어서 책을 쓰게 되었노라고. 

 

그녀가 말하는 ‘흰 것’은 결코 더럽혀지지 않고 절대 더럽혀질 수 없는 그 무엇이다. 희다는 표현도 여러 색 중 하나를 묘사하는 것을 넘어선다 (물론 어떤 면에서 흰색은 색이라고 할 수 없지만). 인터뷰 글을 가만히 읽어보면 그녀는 ‘소년이 온다’ 이전에도 흰 것에 대한 애착이 있었던 것 같다. 단지 ‘소년이 온다’가 담고 있는 참혹하고 어두운 기운이 흰 것에 대한 갈망을 더 짙게 만들었을 뿐. 그러고 보면 ‘소년이 온다’ 차기작으로 ‘흰’이 쓰인 건 당연한 수순이었던 셈이다. 어두울수록 조막만 한 빛도 밝은 법이니까.


책의 서두에서 그녀는 흰 것의 목록을 나열한다. 거기엔 생명의 시작도 끝도 모두 담겨 있는 것으로 보인다. 강보와 배내옷부터 시작해서 백발과 수의로 끝나기 때문이다. 마치 삶과 죽음이 모두 흰 것 안에 들어 있기라도 한 것 같다. 작품 속에서 그녀가 직접 거론하는 죽음은 그녀가 태어나기 전에 같은 엄마의 자궁 속에 먼저 있다가 세상의 빛을 잠시 보고 숨을 거둔 언니의 죽음이다. 언니가 죽지 않았다면 그녀는 태어날 기회를 갖지 못했을 거라고 말한다. 나에겐 마치 그녀의 삶이 죽은 언니에게 빚지기라도 한 것처럼 읽혔다. 작품 속에서 그녀의 언니는 언니가 되기도, 아기가 되기도, 또 그녀가 되기도 한다. 어떤 모습으로도 자꾸만 살아나고 또 죽고 또 살아나고 죽는 존재인 듯했다. 그리고 언니는 그녀가 바르샤바를 보며 떠올린 사람이었다. 파괴되었으나 복원된 한 사람. 책을 읽으면서도 왜 그녀는 보지도 못했고 함께 하지도 못했던 언니의 존재를 이렇게나 의식하는 걸까,라는 질문이 내 안에선 끊이지 않았다. 혹시 그녀의 언니는 실재했던 한 사람의 의미를 넘어 파괴된 모든 넋을 상징하는 건 아니었을까. '소년이 온다'에서 학살당한 그 수많은 영혼들처럼 말이다. 그렇다면 그녀가 바르샤바에서 본 것은 그 혼들이 복원되는 모습일지도 모르겠다. 그것이 흰 것의 궁극적인 이미지였던 건지도 모를 일이다. 삶과 죽음뿐 아니라 부활의 의미까지 흰 것은 담고 있는 것은 아니었을까.


사실 이 작품을 '소년이 온다'를 읽기 전에 먼저 한 번 읽은 적이 있다. 아마 6년 전이었던 것 같다. 그땐 이해하지 못했던 것들이 이번엔 많이 이해가 되었다. '소년이 온다'를 읽은 후이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나에게도 파괴와 복원, 죽음과 삶이라는 단어들에 대한, 그리고 결코 더럽혀지지 않는 그 무엇, 흰 것에 대한 어떤 갈망 같은 것이 그동안 생겼기 때문이지 않을까 한다. 인간의 추악한 본성을 그동안 더 많이 보았고 체험했기 때문일까 (하기야 그동안 도스토옙스키 작품들을 많이 읽었으니). 물론 흰 것이 빛을 낸다면 그 빛의 세기는 한강 작가의 그것보다 더 세진 않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흰'은 '채식주의자'와 '소년이 온다'에서 느꼈던 폭력성이 희미한 잔재로만 남아 있는 것 같아 읽기가 수월한 편이었다. 그러나 그 희미한 잔재마저도 이 작품을 이해하는 데 있어선 중요한 도구가 되는 것 같다. 그러므로 아직 이 작품을 읽기 전이라면 적어도 '소년이 온다'는 먼저 읽고 시도해 보길 추천한다.


* 한강 읽기

1. 채식주의자: https://rtmodel.tistory.com/362

2. 소년이 온다: https://rtmodel.tistory.com/791

3. 작별하지 않는다: https://rtmodel.tistory.com/1360

4. 희랍어 시간: https://rtmodel.tistory.com/1409

5. 흰: https://rtmodel.tistory.com/1886


#문학동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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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령 - 상 열린책들 세계문학 57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박혜경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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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한계


표도르 미하일로비치 도스토예프스키 저, ‘악령‘를 다시 읽고


5년 만에 다시 '악령'을 읽으며 나는 이번에도 이 작품을 관통하는 렌즈로써 제사로 쓰인 누가복음 8장 32-36절을 의지하게 된다. 한 사람 안에 들어가 있던 악령들이 예수의 허락으로 인해 돼지 속으로 옮겨갔고, 그 돼지떼는 비탈을 내리 달려 모두 호수에 빠져 죽은 일화가 소개된 성경본문이다. 


초독 때 나는 이 본문에서 악령들이 처음 거하던 한 사람을 스쩨빤 뜨로피모비치 베르호벤스키로, 돼지떼를 스쩨빤의 아들 표뜨르 스쩨빠노비치 베르호벤스끼를 필두로 한 5인조로 보았다. 뚜르게네프의 소설 ‘아버지와 아들’의 핵심 구도를 따라 아버지 세대로부터 아들 세대로, 마치 악령이 한 사람으로부터 돼지떼로 옮겨가듯, 사상과 이념이 전달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이 작품의 또 다른 축인 스따브로긴을 악령의 영향력을 강조하고자 설정된 인물로 보았다. 제사에 비춰볼 때 스따브로긴은 악령이 깃든 한 사람도 아니고, 악령이 옮겨간 돼지떼에 속하지도 않는 독립된 존재이지만, 두 존재 모두와 연결되고 그들보다 압도적으로 우위를 점하고 있는 듯한 초월적인 인물로서 마치 악령이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존재인 듯한 뉘앙스를 풍긴다. 재독을 하고 나서도 초독 때와 그리 다르지 않은 반응이지만 이 글에서는 그때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 세 명의 인물 위주로 나눠 볼까 한다. 


1. 스따브로긴

먼저 '악령'이 '백치' 다음에 쓰였다는 점이 눈에 밟혔다. '백치'의 미쉬낀 공작은 도스토옙스키가 그리스도를 형상화한 인물이다. 신이 사람의 몸을 입고 나타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신'은 선과 악의 이분법에서 선에 해당되는 영적 존재다. 이번에 '악령'을 재독 하면서 미쉬낀 공작의 대척점에 위치한 인물이 바로 스따브로긴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강하게 들었다. 악마가 인간의 몸을 입고 나타난 경우랄까? 도스토옙스키가 실제로 그랬을 거라는 정보는 없지만 (적어도 나는 가지고 있지 않다), 그가 스따브로긴을 묘사한 부분을 살펴보면 충분히 일리가 있다는 생각이다. 


스따브로긴은 5인조의 우두머리 격인 표뜨르가 유일하게 인정하고 무릎을 꿇는 우월한 이미지의 소유자로서 사상과 이념은 물론이며 자신을 낳은 어머니인 바르바라를 포함한 주위 모든 사람들에게 압도적인 영향력 (제다이 식 표현으로는 다크 포스라고 할까?)을 끼친다. 영적이고 정신적인 면만이 아니다. 그는 신체적으로도 알파 메일 (Alpha male)처럼 덩치도 클 뿐 아니라 완력도 보통 남자들보다 세다. 게다가 외모도 수려하여 군중 속에 있으면 결코 묻힐 인물로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여러 여자들과 관계를 갖는 걸로 나오는데, 단 한 경우도 그가 따라다닌 적이 없었다. 마치 그는 모든 여자들에게도 압도적인 매력을 발산하여 원하기만 하면 관계를 가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스따브로긴은 금수저이기도 하다. 평생 아무것도 안 해도 충분히 먹고살 돈이 어머니인 바르바라로부터 공급된다. 이런 여러 가지 특징들은 그를 결코 평범하게 볼 수 없게 만드는데, 내 눈엔 도스토옙스키가 스따브로긴에게 남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매력과 지도자로서 가질 수 있는 최고의 힘을 모두 몰아준 것처럼 보였다. 물론 여기까지만 보면 인간계에서 가장 강한 인물 정도로 여겨질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작품의 부록이자 마지막 장인 '찌혼의 암자에서'에서 찌혼 신부와 대화하는 장면을 살펴보면, 스따브로긴은 밤마다 일종의 환각 증상을 겪는다고 고백하는데, 가끔씩 자기 옆에서 조소를 보내는 이성적인 사악한 존재를 보고 느끼고 있으며, 그것들은 여러 가지 얼굴과 여러 가지 인격을 띠고 있지만 결국 같은 것으로 그를 언제나 화나게 만든다고 말한다. 그는 실제로 악령 같은 어떤 형상을 보고 있는 것이었다. 나는 이 부분에서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에 등장하는 둘째 아들 이반 카라마조프를 떠올릴 수밖에 없었다. 그 역시 무신론을 설파하고 모든 것이 가능하다는 신념에 사로잡혀 스메르쟈꼬프에게 살인을 종용한 혐의를 띠고 마지막에 가서 악령에 사로잡히기 때문이다. 스따브로긴이 인간의 몸 안에 갇힌 악마가 아니라면, 적어도 주위 그 누구보다도 그 악령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는 인물이라고 볼 수 있겠다.


뿐만이 아니다. 스따브로긴은 '찌혼의 암자에서'에 나오는 격문 같은 글 (일종의 고백록)을 기록하면서 여러 번 강조하는 부분이 있는데, 그것은 그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점이다. 그는 선한 행위에서도 만족을 느끼고, 악한 행동에서도 만족을 느낀다. 또한 지극히 수치스럽고 극도로 굴욕적이며 비열하고 무엇보다 우스꽝스러운 상황에서 그는 극단적인 분노와 더불어 믿기 어려울 정도의 쾌감을 느끼는데, 범죄의 순간에도, 목숨에 위험을 느끼는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가 강조했던 자기가 자신의 주인이라는 말의 의미는 그가 저지른 모든 행위는 어떤 감정에 정복당해 수동적으로 실행한 게 아니라 완벽하게 의식이 있는 상태에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 그는 단 한 번도 자기 자신에게 져 본 적이 없는 인물로 자신을 여기고 있었다. 이 무시무시한 논리는 그가 자신의 범죄를 고백하는 부분에서 혹시라도 받을 수 있는 선처 (범행동기를 어떤 특별한 환경이나 병에서 찾게 되면 형량이 감해지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를 미리 차단해 버리는 효과까지 낸다. 


흥미로운 점은 찌혼 신부가 스따브로긴의 글을 읽고 나서 그의 이면에 감춰진 의도를 알아채는 부분이다. 그는 스따브로긴이 자신의 죄를 인정하는 것은 부끄러워하지 않으면서 참회는 부끄러워한다는 점을 짚어낸다. 그리고 스따브로긴이 자신의 심리에 도취되어 있다는 점도, 스스로 죄인이라고 하면서도 여전히 오만함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는 점도 정확히 짚어낸다. 스따브로긴이 자신의 범죄행위를 솔직하게 고백하며 자기희생을 했지만, 그러면서까지 그는 자신의 그 염원에 짓눌려 여전히 회개하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을 꿰뚫어 본 것이었다. 게다가 찌혼은 그런 모습의 스따브로긴이 여전히 악령에게 조종을 당하고 있음을, 악령에게 굴복당한 노예라는 사실을 정확히 알려주기도 하고, 그가 곧 스스로 목숨을 끊게 되리라는 것을 예견하는 듯한 말까지 하게 되는데, 나는 이 부분에서 스따브로긴도 한낱 인간일 뿐이구나, 그렇게나 완벽한 조건을 두루 갖춘 존재였건만 결국 그도 악령에게 잡힌 자였구나,라는 사실을 목도할 수 있었다. 그리고 나는 이 사실이 스따브로긴의 자살로 그 실체를 드러내게 되었다고 보았다. 악령은 가장 악령 같았던 인물조차 말끔히 제거해 버린 것이었다. 악령의 궁극적 승리로 볼 수도 있겠다. 


2. 샤또프

이 작품에서 가장 불쌍하고 비극적인 인물로 나는 샤또프를 꼽는다. 단지 그가 표뜨르를 비롯한 5인조에게 살해당했기 때문도, 3년 만에 돌아온 아내가 스따브로긴의 아이를 출산했지만 그 새 생명을 경이롭게, 자신의 아들로 여기며 새로운 삶을 출발하려던 바로 그날 비극적 죽음을 맞이했기 때문도 아니다. 그는 끼릴로프와 함께 스따브로긴으로부터 사상과 이념을 전수받은 '순수한 영혼'이었는데, 그 사상과 이념의 노예가 되어 마치 악령에 잡힌 듯 나머지 삶을 모조리 어둠 속에서 살아가고 있었기 때문이다. 


나는 샤또프로부터 도스토옙스키의 자전적인 모습도 볼 수 있었다. 알다시피 도스토옙스키는 시베리아 유형 가기 전에는 공상적 사회주의 서클에 가입할 정도로 나름 진보적인 지식인에 속했다. 그러나 사형을 면하고 시베리아 유형 중 그는 신약성경을 반복해서 읽으며 기독교의 영향 아래 슬라브주의자로, 즉 보수적인 입장으로 전향하게 되었다. 샤또프 역시 스따브로긴 및 표뜨르와 함께 하다가 그들의 사상과 이념으로부터 탈퇴한 인물로 그려진다. 도스토옙스키의 전처를 비슷하게 밟은 것으로 해석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도스토옙스키는 샤또프를 죽이기로 했을까? 왜 자신의 모습이 투영된 그를 희생양으로 삼게 놔두었을까? 혹시 도스토옙스키 자신은 그리스도를 믿는 자였지만 샤또프는 끝까지 무신론을 고수했기 때문은 아닐까? 샤또프 역시 전향을 했지만 그 전향이 인생의 답이 아니라는 것을, 그리스도를 통하지 않은 길은 결코 답이 될 수 없다는 점을 상징적으로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니었을까? 


3. 끼릴로프

결국 자살로 생을 마감하며 신이 되고자 했던, 그러나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이해하기 가장 어려운 인물 중 하나였던 끼릴로프가 '악령'을 다시 읽으며 측은하게 여겨졌다. 그가 아이와 함께 공 가지고 노는 장면, 공으로 운동을 하며 건강을 챙기는 장면, 돌아온 아내 때문에 마실 것과 먹을 것이 필요해서 자기를 찾아온 샤또프에게 모든 것을 다 흔쾌히 내어주는 장면, 그리고 샤또프에게 건네는 따스한 말에서 나는 이상하리만큼 끼릴로프의 죽음이 안타까웠다. 그가 신봉하는 인신 사상은 도저히 내 머리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 사상만 아니라면 끼릴로프가 참 괜찮은 인격의 소유자가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까지 하게 되었다. 이 작품에 등장한 인물 중 가장 너그럽고 지혜 있는 듯한 사람으로 보이기까지 했다. 


도스토옙스키는 왜 끼릴로프에게 이런 인격을 심어 놓았을까? 자살로 생을 마감할 것을 온 천하에 알린 사람에게 왜 이런 인격을 허락했던 걸까? 아무리 인격적으로 훌륭한 사람이라도 특정 사상과 이념에 잡히게 되면 엉뚱한 짓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 싶었던 건 아닐까? 인간이 신이 되고자 하는 인신 사상은 신이 인간이 된 신인 사상과 정반대 되는 개념이다. 그가 '악령' 이전에 '백치'를 썼다는 점에 비춰 보아도 인신 사상은 조롱받아 마땅한 사상이었을 것이다. 끼릴로프가 자살로 이룬 건 신이 아니라 피와 뇌수가 난자한 비참한 인간의 사체일 뿐이었다는 점은 이를 극명하게 대조하는 것으로 보인다. 인간은 그 어떤 이유로도 신이 될 수 없는 것이다. 


이렇게 세 명의 인물을 조금 자세하게 들여다보며 재독 감상문을 마치려 한다. 세 명의 공통점은 모두가 인간의 한계를 절묘하게 드러내고 있다는 것이다. 모든 것에서 우월해 보이는 스따브로긴도, 사상과 이념의 전향을 스스로 이뤄낸 샤또프도, 누구보다 훌륭한 인격을 가진 것으로 보이는 끼릴로프도 결국 악령 같은 그 무엇에 사로잡혀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힌 채 죽음을 맞이했다. 그들에게 구원은 존재하지 않았고 끝까지 무신론 및 허무주의를 신봉했다. 그들에게도 라스꼴리니꼬프의 소냐와 같은 구원의 한 줄기 빛이 임했다면 어땠을까, 하고 생각해 본다. 그들에게도 도스토옙스키가 그랬던 것처럼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는 사람으로 거듭나는 기회가 주어졌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도 든다. 그리고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리스도를 믿고 따르지 않으면 인간은 악령 같은 사상이나 이념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는 존재론적 한계를 지니고 있다는 메시지로도 이 작품을 해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다.


다른 인물들에 대해서도 할 말이 많지만, 지면이 모자란 관계로 독서모임에서 풍성하게 나누는 것으로 대체하려 한다. 함께 읽고 나눈 것을 정리해서 남기도록 하겠다. 요즘 같은 시대에 이런 문학 작품으로 깊은 나눔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유독 소중하게 느껴진다. 


* 도스토옙스키 다시 읽기

1.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690

2.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696

3.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39

4.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744

5.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761

6.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776

7.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1807

8.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819

9.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1849

10.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1882


* 도스토옙스키 처음 읽기

1. 죄와 벌: https://rtmodel.tistory.com/811

2. 백치: https://rtmodel.tistory.com/815

3. 악령: https://rtmodel.tistory.com/879

4. 미성년: https://rtmodel.tistory.com/928

5. 카라마조프 가의 형제들: https://rtmodel.tistory.com/1068

6. 죽음의 집의 기록: https://rtmodel.tistory.com/1087

7. 가난한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153

8. 분신: https://rtmodel.tistory.com/1159

9. 지하로부터의 수기: https://rtmodel.tistory.com/1171

10. 노름꾼: https://rtmodel.tistory.com/1174

11. 도스토옙스키 (by 에두아르트 투르나이젠): https://rtmodel.tistory.com/1077

12. 도스토예프스키, 돈을 위해 펜을 들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177

13.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by 이병훈): https://rtmodel.tistory.com/1194

14. 매핑 도스토옙스키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58

15. 도스토옙스키의 명장면 200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362

16.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by 도제희): https://rtmodel.tistory.com/1388

17.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396

18. 상처받은 사람들: https://rtmodel.tistory.com/1429

19. 악몽 같은 이야기: https://rtmodel.tistory.com/1435

20. 악어: https://rtmodel.tistory.com/1436

21. 인간 만세!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488

22. 도스토옙스키를 쓰다 (by 슈테판 츠바이크): https://rtmodel.tistory.com/1625

23. 도스토옙스키가 사랑한 그림들 (by 조주관): https://rtmodel.tistory.com/1644

24. 백야: https://rtmodel.tistory.com/1659

25. 뽈준꼬프: https://rtmodel.tistory.com/1702

26. 정직한 도둑: https://rtmodel.tistory.com/1703

27. 크리스마스 트리와 결혼식: https://rtmodel.tistory.com/1704

28. 꼬마 영웅: https://rtmodel.tistory.com/1706

29. 약한 마음: https://rtmodel.tistory.com/1707

30. 남의 아내와 침대 밑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711

31. 농부 마레이: https://rtmodel.tistory.com/1717

32. 보보끄: https://rtmodel.tistory.com/1719

33. 백 살의 노파: https://rtmodel.tistory.com/1721

34. 우스운 사람의 꿈: https://rtmodel.tistory.com/1722

35. 온순한 여자: https://rtmodel.tistory.com/1723

36. 예수의 크리스마스 트리에 초대된 아이: https://rtmodel.tistory.com/1724

37. 영원한 남편: https://rtmodel.tistory.com/1823

38. 아홉 통의 편지로 된 소설: https://rtmodel.tistory.com/1825

39. 쁘로하르친 씨: https://rtmodel.tistory.com/1827

40. 도스토옙스키의 철도, 칼, 그림 (by 석영중): https://rtmodel.tistory.com/1867


#열린책들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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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 예배의 순간
정혜덕.하늘샘 지음 / 비아토르 / 2024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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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덕, 하늘샘 저, '하루, 예배의 순간'을 읽고


소소한 일상 가운데 깃든 하나님의 임재를 보고 느끼게 해 주신 고마운 두 분께,


위도 37.4의 대한민국 서울과 위도 42.9에 위치한 미국 미시간 주의 그랜드 래피즈 사이의 거리를 살펴보니 약 만 킬로미터 (육천오백 마일) 남짓 되는 것 같더군요. 비행기로 18시간을 날아가야 하는 거리입니다. 직항은 존재하지도 않네요. 참 먼 거리입니다. 하지만 저의 첫 미국이 미시간 주와 남쪽으로 접하고 있는 오하이오 주 클리블랜드여서 그런지 그 거리가 낯설지만은 않아요. 생각지도 못했는데 11년 미국 거주 경험이 이 책에 대한 공감과 이해의 폭을 넓혀주는 것 같습니다. 한국과 미국을 모두 경험한 저에게는 편지에서 배경으로 깔려있는 혜덕 작가님의 한국과 늘샘의 미국이 친숙하게 다가왔답니다. 그래서인지 저는 두 분이 주고받은 편지에서 거리감도 거의 느끼지 못했어요. 덕분에 서로 다른 문화와 생활환경에 제한되지 않고 모든 편지의 주제였던 '예배와 일상' 혹은 '일상 속에 깃든 예배'에 좀 더 집중해서 읽어 내려갈 수 있었던 것 같아요. 또한 장로교에서 신앙생활을 시작했고, 미국에서 사제로부터 견진성사까지 받은 성공회 교인인 적도 있었기에 두 분의 신앙 배경도 전혀 낯설지가 않았답니다. 


이제 책을 다 읽고 책상 앞에 앉아 있습니다. 두 분이 만 3년간 주고받으신 편지를 공식적으로 훔쳐본 저 나름대로의 책임을 다하기 위해서랄까요. 아니면,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늘샘이 감사하게도 이 책이 출간되자마자 저에게 한 부를 보내주셔서 그 은혜에 보답하기 위해서랄까요. 그것도 아니면 이 책이 제게 남긴 잔잔한 흔적이 저를 이 자리로 불렀기 때문일까요. 몇 자라도 남기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혀 저는 이렇게 늦은 밤 스탠드 불빛에 의지하여 노트북 화면 위 깜빡거리는 커서를 노려보고 있답니다. 


두 분의 편지를 읽으며 모처럼 제 마음이 말랑말랑 해지는 기분을 느꼈어요. 제 마음이 그만큼 평소에 무뎌지고 딱딱해져 있었기 때문일 거예요. 좀 더 부드러운 남자가 되어야 하는데, 두 분 때문에 뜻밖의 반성도 하게 되었네요. 저는 이 책을 퇴근하고 집에 와서 아들에게 저녁을 챙겨주고 난 뒤 실내자전거를 타면서 읽었답니다. 딱 열흘이 걸렸네요. 한 번 탈 때 30분가량 소요되는 걸 감안하면 300분, 그러니까 5시간 정도 걸려 앵앵콜의 마지막 페이지를 덮었습니다. 200 페이지 밖에 안 되고, 물리적으로도 손에 잡기 딱 좋은 판형이라 텍스트 수는 분명 부담스럽지 않을 정도였을 텐데, 평소에 책을 조금 빠르게 읽는 편인 제가 왜 이렇게 많은 시간이 걸렸나 생각해 보았어요. 쉬운 소설이었다면 아마 3시간 채 걸리지 않았을 거예요. 제가 딱히 집중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거든요. 오히려 다른 책보다 더 집중해서 읽느라 하루 목표인 10킬로미터를 달성했는지 모를 때도 있었답니다. 아마 저도 모르게 두 분의 편지를 눈으로만 읽었던 게 아니라 제 일상에서도 예배의 순간이 언제인지 여러 번 진중하게 물으며 마음으로 읽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덕분에 지난 열흘 동안 저의 자전거 타기는 저만의 예배가 되었답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예배를 경험해 버린 셈이랄까요?


일상에 깃든 예배의 순간은 어쩌면 우리가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 삶에 침투하여 그리스도인인 우리를 사로잡는 게 아닌가 싶어요. 우리는 그저 상투적인 행위를 했을 뿐인데도 마음과 생각의 주파수가 하나님의 그것과 맞춰지는 순간 우린 예배자가 되어버리는 게 아닐까 하고도 생각했어요. 예배하기 위해 옷단장, 몸단장, 마음단장을 하는, 다시 말해 우리에게 익숙한 공예배가 아니라 일상의 예배, 삶의 예배는 우리가 의식하지 못할 때가 많을 뿐 이런 식으로 순식간에 이뤄지지 않나 하는 생각도 해보게 되었답니다. 


책을 읽으며 반성도 많이 했어요. 앞서 말한 것처럼 하나님의 말씀이 들어가기 힘들 정도로 견고해진 저의 마음을 느꼈거든요. 어느덧 감사가 사라져 가고 분주한 마음이 가득한 저의 일상에 더 많은 예배의 순간이 깃들길 바라게 됩니다. 나아가 하나님의 임재를 더 많이 의식적으로 알아채고 다시 얻은 이 두 번째 인생을 세상 속의 그리스도인으로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길 원합니다. 


지금은 한국 시간으로 밤 11시가 막 넘었습니다. 혜덕 작가님은 주무실 시간이네요. 미시간 시간으로는 이제 아침 9시가 지났습니다. 늘샘은 분주한 아침을 지나 일과를 시작하셨겠어요. 저도 이제 잠을 청하려 합니다. 저는 단 한 번뿐인 편지를 이렇게 쓰지만, 참 감사하다는 말씀을 꼭 드리고 싶어요. 아마 저뿐만이 아닐 거예요. 이 책을 읽는 모든 독자들이 각자의 일상에 깃든 예배의 순간을 알아차리고, 더 나아가 그 순간들을 감사함으로 즐기고, 또 그 순간들을 지속적으로 확보하는 기쁨까지 누릴 수 있길 바라봅니다. 그럼 저는 이만 물러갈게요.


대전에서 영웅 드림


#비아토르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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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시끄러운 고독
보후밀 흐라발 지음, 이창실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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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혀져가는 것들, 그리고 고독

보후밀 흐라발 저, ‘너무 시끄러운 고독’을 읽고.

‘시끄러운 고독’. 사실, 제목부터 내 눈길을 사로잡았던 책이다. 중고서점에 들를 때마다 꼭 한 번씩은 마주쳤던 책. 그러나 나는 이상하리만큼 한 번도 그 책에 손을 대지 않았다. 지금 돌이켜보면, 조금은 의아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그 책을 볼 때마다 내 머리를 스친 생각은 ‘아마도 이 책 또한 과대포장된 제목의 책’일 것이라는, 별 근거 없는 나의 상처 입은 신념이었던 것 같다. 제목에 이끌려 책을 펼쳐보다가 적잖은 실망을 했던 적이 어디 한 두번이던가. 이 책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게다가 저자 이름도 생소하고 해서, 난 그냥 제목만을 읽고 표지만을 구경하는 것으로 만족했던 것이다.

최근, 평소에 내가 참 좋아하는 필체로 글을 쓰시는 지인이 이 책에 대한 감상문을 쓴 것을 보았다. 익숙한 제목과 익숙한 표지, 그러나 낯선 내용. 순간, 내가 중고서점에서 그 책을 볼 때마다 했던 생각이 철저히 틀렸다는 걸 깨달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주말에 나는 한치의 망설임도 없이 중고서점에 들려 그 책을 구입했다. 다행히 그 책은 비슷한 자리에 꽂혀 있었다. 마치 계속해서 내 손길을 기다렸던 것처럼.

이 책은 장편소설로 분류되지만, 상당히 짧은 분량의 작품이다. 그다지 큰 집중을 하지 않아도, 두 어시간에 다 읽을 수 있다. 그러나 이 책이 던지는 메시지는 결코 가볍지 않다. 이 책의 제목이 가지는 의미는 결코 과대포장된 것이 아니었다.

주인공 한타는 삼십 오년째 폐지를 압축하는 일을 하고 있다. 습하고 퀴퀴하며 어두운 지하실에 위치한 그의 작업장에는 압축기 한 대와 수많은 종이 (책)와 쥐들이 산다. 저만치 위에서는 언제나 화가 난 듯한 소장의 불평과 잔소리가 큰소리로 들려온다. 늘 구부리고 일을 하느라 허리가 구부러지고, 가족도 친구도 없이, 마치 시끄러운 세상과는 단절된 듯 고독 속에서 외로이 살아가는 한타.

이야기만이 아닌 글에서 시적 이미지를 떠올려보길 좋아하는 나는 잠시 책을 덮고 상상력을 동원하여 한타와 그의 작업장을 머리 속에 그려봤다. 꽤 흉측하고 기괴한 그림이 그려졌다. 내 그림 속에서 한타는 마치 꼽추와 흡사했다. 저자가 묘사한 것처럼 잘 씻지도 않는 그의 몸에선 곰팡이 냄새와 쥐 냄새가 나고, 그래서 그런지 그의 몰골은 더욱 말이 아니었다. 그가 즐겨 마시던 맥주를 파는 곳에서 계산할 때 옷 속에서 쥐가 뛰쳐나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는 에피소드까지 읽으니 더욱 내 그림 속의 한타는 처참하고 처절한 인간의 대표가 되어버린 듯했다. 잊혀진 듯한 인물, 그리고 시끄러운 고독 속에서 잊혀져가고 있는 인물.

그러나 한타의 일상은 압축기가 내는 괴물 같은 소리나 쥐들이 은밀하게 내는 조그만 소리, 혹은 소장의 고함 소리만으로 이루어진 시끄러운 세상만이 아니었다. 또한 그는 그저 열악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묵묵히 폐지를 압축하는 성실한 사람만도 아니었다. 그는 폐지가 되기 직전의 수많은 책에서 추출한 어마어마한 양의 문자를 통해 지식과 지혜를 마치 폐지를 압축하듯 고독하게 머리와 몸에 압축하여 흡수하는 이 세상에서 유일한 사람이었다.

시대가 원하지 않거나 남아돌거나 잘못 만들어진 책들을 파기하는 작업의 맨 마지막 단계를 책임지고 있었기에, 그가 섭렵하는 지식의 출처도 모두 시대가 어쨌거나 파기하길 원하는 책들이었을 것이다. 그래서였을까. 그가 좋아한 건 고전적인 책들이었고 , 또 그래서 그랬는지, 그는 새로운 시대의 변화에 뒤쳐질 수밖에 없었던 것 같다. 시대가 원하는 책들은 그의 냄새 나는 지하실 작업장으로 떨어지지 않았을 테니.

시대가 변함에 따라 고성능의 압축기가 개발되었다. 한타에게는 위기가 찾아온 것이었다. 그에게 있어 폐지를 압축한다는 것은 한 사람의 인생이 모두 압축되어 들어가야만 하는 것이었고, 그는 그 가운데 나름대로의 자존감을 찾기도 했었다. 그러나 새로운 기계는 그가 하루 종일 처리해야 했던 양의 책들을 단 몇 시간만에 해치웠고, 그가 휴가까지 반납하고 몇 푼 안되는 수당을 받으면서 일을 해야만 마칠 수 있었던 일은 멋드러진 유니폼을 입은 젊은 사람들이 희희낙낙거리면서 일을 마치고 어디 놀러갈까 이번 휴가에는 어디 갈까를 지껄이면서 진행할 수 있을 만큼 간단한 일로 변해버렸다.

한타는 말문이 막혔다. 더욱 시끄러워진 기계와 전문성이나 경험 없이도 충분히 자신이 했던 양보다 더 많은 양의 일을 단시간에 처리하는 젊은이들의 시끄러운 지껄임 가운데 한타는 더욱 고독했다. 그는 늙었고, 그가 은퇴 후 사려고 마음 먹었던 그 압축기 또한 이젠 시대에 걸맞지 않은 저사양의 그것이 되어버렸다.

그곳에 한타가 설 자리는 더 이상 없었다. 습하고 퀴퀴하고 어두운 지하 작업장과 그 안을 언제나 가득 채우고 있던, 그가 사랑해 마지않았던 책들, 그리고 그와 동반자였던 쥐들이 있는 그 작은 세상이 그에겐 그나마 위로요 안식처였는데, 이젠 그마저도 사라져 버릴 운명에 처한 것이었다.

세상은 더욱 시끄러워졌고, 한타는 한층 더 고독에 잠겼다. 그리고 그는 마지막으로 작업장을 찾는다. 늘 하던 압축하는 일을 하기 위해서다. 그러나 이번에 그가 압축기에 넣은 것은 폐지가 아니었다. 자기자신의 몸이었다. 그렇게 그는 죽음이라는 영원한 고독 속으로 생을 마감한다.

다소 끔찍한 책의 마지막 설정이 던져주는 메시지는 강한 울림이 있었다. 나는 그의 고독에 가슴이 미어졌고, 이해가 충분히 되면서도 안타까웠다. 그리고 왠지 모를 동질감까지 느껴졌다. 내 안에도 한타의 모습이 있는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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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본행 야간열차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전은경 옮김 / 비채 / 2022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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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명적인 일탈: 지금 나는 어디에

파스칼 메르시어 저,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읽고.

필연은 없다고, 모든 게 우연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언젠간 운명 같은 만남을 갖기 마련이다. 지난주 목요일,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이 책은 그렇게 운명처럼 내게 다가왔다. 오프라인 서점에서만 만끽할 수 있는 스릴 넘치는 현장감은 사전에 아무런 계획 없이 손에 붙잡히는 대로 책을 고르고 훑어보다가 마음에 꽂히는 문장이나 작가의 문체 등에 이끌려 즉흥적으로 구매할 때 최고조에 달한다. 이름도 들어보지 못했던 작가, 평소에 즐겨 읽지 않는 현대문학. 이 두 가지 핸디캡에도 불구하고 이 책은 지난 일주일 남짓 나와 매일 동행하며 나를 매혹시켰다. 나는 이 책이 내 손에 들어온 사건을 우연을 가장한 필연이라 믿기로 한다. 책을 다 읽고도 여전히 책을 도로 책장에 꽂아놓지 못하고 있는 나를 발견한다. 여전히 무언가를 알고 싶은 것처럼, 이제 막 다시 읽기 시작할 것처럼 망설이는 모습이다. 나는 이 책을 손에서 놓기가 못내 아쉽다. 책 표지 그림을 가만히 쳐다본다. 내가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는 착각에 빠진다. 인생이라는 기찻길의 한 정류장에 우두커니 서 있는 것만 같다. 어딘가로 떠나려는 것인지, 어딘가로부터 도착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나는 그저 떠나가는지 다가오는지 모를 기차를 바라보며 서 있다.

한 번도 가 보지 못한 리스본. 이 책을 읽고 이곳에 대한 이상한 동경이 생겨 버렸다. 세계지도를 꺼내 리스본의 위치를 찾아본다. 대륙의 끝, 이베리아 반도, 스페인의 서쪽, 포르투갈의 수도. 리스본은 해안에 위치해 있다. 내가 지금 이 글을 쓰고 있는 캘리포니아는 서쪽으로 태평양을 끼고 있지만, 리스본은 서쪽으로 대서양을 끼고 있다. 언젠가 보스턴에서 바라봤던 동쪽 대서양의 이국적인 모습이 떠오른다. 그 반대편에서 바라보는 대서양은 어떤 느낌일까. 한국에서 바라본 태평양과 캘리포니아에서 바라보는 태평양의 차이만큼일까. 땅끝의 나라 포르투갈 리스본에서, 아프리카 대륙으로부터 불어오는 사막의 바람을 맞으며 바라보는 대서양은 과연 어떤 느낌일까. 문득 나도 떠나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스위스 베른에서 포르투갈 리스본, 편도 1,250마일을 가려면 비행기나 기차를 타야 한다. 작품 속 주인공 그레고리우스는 5주 간의 포르투갈 여행의 시작과 끝을 기차로 장식했다. 의미심장한 일탈의 시작과 끝이 되어 주었던, 그리고 이 책의 제목이 된 리스본행 야간열차. 그의 인생에서 가장 깊고 가장 빛나는 순간으로 안내한 마법의 기차. 나는 나도 모르는 사이에 장거리 기차 여행의 낭만을 떠올려본다. 즉흥적인 이끌림에 몸을 맡긴 채 홀로 말이 전혀 통하지 않는 낯선 곳으로 떠나는 기분은 어떤 것일까 하고 상상해본다. 그 외국어들은 과연 노랫소리로 들릴까.

비 내리던 어느 날, 수십 년 간 일상의 한 부분이 되어버릴 정도로 익숙했던 키르헨펠트 다리에서 그레고리우스는 낯선 한 여자를 운명처럼 만난다. 그는 고전문헌학 교수다. 여느 때처럼 수업을 하기 위해 학교로 향하는 중이었다. 그녀가 다리 중간에서 난간 위로 팔을 뻗치며 미끄러지던 순간 그레고리우스는 그녀가 뛰어내릴 거라는 본능적인 생각을 했다. 놀란 심정으로 그는 들고 있던 우산을 순간적으로 내던졌고 덕분에 가방이 바닥에 떨어졌다. 책은 이미 빗물에 젖어가고 있었다. 그녀가 다가왔다. 주머니에서 사인펜을 꺼내어 그레고리우스 이마에 숫자를 몇 개 적었다. 전화번호를 잊어버리지 않아야 하는데 마침 종이가 없기 때문이랬다.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와 함께 걸어서 그가 강의하는 교실까지 들어와 잠시 앉아 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홀로 조용히 빠져나가 떠나 버렸다. 그레고리우스는 강의실에 들어가기 전 그녀에게 모국어가 무엇인지 물었었다. “포르투게스.” 그녀의 답변이었다. 그레고리우스에게는 지상에서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는 멜로디였다. 하루 종일이라도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마에 전화번호를 남기고 홀연히 떠나버린 그녀는 그레고리우스의 인생에 깊은 창을 찔러 넣은 셈이었다. 아니, 그녀가 아니라 포르투갈어의 그 묘하고도 신비한 노랫소리 같은 발음이 그의 인생에 새로운 길을 낸 것이었다. 수업을 마치지도 않고 그는 책과 가방을 그대로 교탁 위에 두고 유유히 학교를 빠져나왔다. 이전에는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용기가 생겼다. 그레고리우스는  57년 간 안정적이었던 학자로서의 삶을 이제야 완전히 장악하고 있다는, 불안과 해방감이 묘하게 섞인 기분을 느꼈다. 모든 게 새롭게 보이기 시작했다. 자신의 인생도, 자신이 몸담고 있는 이 세상도 모두 새로운 모습을 띠기 시작했다. 

몇 년 만에 찾은 에스파냐 책방에서 그레고리우스는 운명의 책을 만난다. 포르투갈어로 쓰인 책이었다. 제목은 ‘언어의 연금술사’. 마침 책방 주인은 포르투갈어를 할 줄 알았다. 주인이 그를 위해 몇 문장을 읽어주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순간 온몸이 마비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 글이 오직 자신만을 위해, 모든 것이 달라진 그날 오전을 위해 쓰였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확신에 차서 책을 구입한 뒤 집으로 돌아왔다. 책의 안 표지에 나온 저자의 사진을 보며, 이 포르투갈 사람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싶었고 움직이는 모습도 직접 보고 싶었다. 포르투갈에 꼭 가야 할 것 같은 운명을 느꼈다. 책방에 가서 포르투갈 어학 교재를 사고 공부를 했다. 책 일부분을 번역하기 시작했다. 그의 마음은 빠르게 진동했다. 교장 선생에게 사정을 설명하는 메일을 써서 우체통에 넣었다. 현금을 찾고 리스본행 야간열차에 몸을 실었다. 모든 게 자연스러웠고 모든 게 운명에 이끌리는 것 같았다. 일탈의 시작이었다.

이후의 이야기는 그레고리우스가 운명처럼 갖게 된 책의 저자 아마데우의 일생을 톺아보며 그 흔적을 좇는 여정이다. 아마데우는 이미 뇌출혈로 죽은 지 오래였다. 그러나 아마데우의 글은 그레고리우스가 가진 책 이외에도 이곳저곳에 많이 산재해있었다. 그러므로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일생을 좇는 여정은 그의 글을 좇는 여정이라 할 수 있고, 그 여정 가운데 등장하는 사람들을 직접 만나고, 등장하는 장소를 직접 찾아가 보며 텍스트 이면에 있는 콘텍스트까지 읽어나가면서 글을 깊고 풍성하게 이해해나가는 여정이라 할 수 있다. 아마데우의 가족과 친구, 연인 등의, 이제는 모두 죽었거나 노인이 되어버린 사람들을 차례대로 만나가면서 그레고리우스는 자신을 포르투갈이라는 낯선 땅으로 이끌었던 그 운명 같은 만남의 주인공 아마데우의 삶을 추적해 나간다.

아마데우는 언어의 연금술사였다. 아니, 언어 그 자체였다고 표현해도 좋을 만큼 글쓰기로 자신의 사상과 감정, 속마음 등을 모두 털어놓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어릴 적부터 탁월한 지력을 가졌던 아마데우도 어쩔 수 없이 시대의 한계에 속한 유한한 인간이었다. 문학자가 아닌 아버지의 뜻에 맞추기 위해 의사가 된 아마데우는 어느 날 독재 정부의 하수인 격인 멩지스를 죽을 고비에서 살려준다. 독재에 대항하는 포르투갈 국민으로서가 아닌, 히포크라테스 선서를 했던 한 의사로서의 숭고한 선택이었다. 그러나 그 선택은 아마데우의 인생을 크게 한 번 뒤트는 사건으로 자리매김한다. 사람들의 비난 어린 시선을 한 몸에 받게 되었기 때문이다. 멩지스로 인해 고통받는 포르투갈 국민들의 설움과 고통을 외면하고, 오히려 독재 정권을 옹호한 배신자로 낙인찍히게 되었기 때문이다. 그 이후 아마데우는 속죄라도 하듯 독재 정부에 저항하는 운동에 발을 담그게 되고, 인생의 커다란 전환기를 맞이한다. 그러면서 만나게 되는 여러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또 예상치 못했던 사건들이 발생하며 아마데우의 삶은 점점 그를 내면으로 침잠케 만든다. 그리고 그러한 침잠이 그의 글로 번역되어 나오게 된 것이었다. 아무나 쓸 수 없는 글, 아마데우가 아니면 도저히 쓸 수 없는 글을 그는 그의 뜻밖의 인생의 심연에서 퍼올리게 된 것이었다. 결국 그는 의사가 아닌 문학가의 삶을 뜻하지 않게 살아낸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왜 아마데우라는 사람에게 그토록 집착하게 되었을까? 이방인에 불과한 아마데우라는 한 사람의 과거 흔적을 샅샅이 좇으며 그레고리우스는 과연 무엇을 얻었을까? 단순한 운명의 이끌림으로만 설명이 가능하지는 않을 것 같다. 바람처럼 왔다 가는 전율의 순간은 지속력이 강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그를 그런 자리로 내몰았을까? 모든 시간과 모든 돈과 모든 건강을 다 소진하면서까지 낯선 이의 삶의 흔적을 좇을 필요가 있었을까? 그레고리우스와 아마데우의 공통점이 언어와 글쓰기에 기반한다는 점이 실마리가 될 수는 있을진 몰라도 여전히 풀리지 않는 무언가가 남는다. 그레고리우스가 아마데우의 흔적을 좇아가는 과정에 일개 과학자에 불과한 나조차도 몰입하게 되었기 때문에 그 의문은 더욱 진하게 남는다. 그저 보편적인 인간의 심리와 운명을 목격하고 그것에 저항하거나 순응하는 여정에서 나의 공감을 샀나 보다, 하며 나는 석연치 않은 결론을 내릴 뿐이다. 어쩌면 그것을 알기 위해 나는 여전히 이 책을 책장에 꽂아 놓지 못한 채 이렇게 답례라고 하듯 글을 쓰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여전히 나는 기차역에 서 있는 것 같다. 답을 모른 채로 덩그러니 그렇게.

#들녘
#김영웅의책과일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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